소설리스트

김 주임과 최 대리-58화 (58/60)

58화. 까만 낮과 푸른 밤

오랜만에 꾸는 꿈이었다. 꿈에서 김신은 아직 앳된 얼굴이 남아 있는 고등학생이었다. 그 당시 김신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볼 때 짓는 표정 같은 것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에 눈동자들이 입는 색깔이 느껴졌다. 자신을 향한 동경과 기대가 빛나는 시선들. 그 색이 좋기도 했지만 동시에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무뎌졌다.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결국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김신은 그래서 사람들이 쳐다보는 가운데에도 시선을 무시할 수 있게 되었다.

“뭐 하러 가냐?”

꿈이 현실 같았다. 자신을 스쳐 지나가던 동기 하나가 김신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연습, 이라고 말하고 돌아서며 김신은 트레이닝복 지퍼를 턱까지 올렸다. 저녁때가 다가와서 꽤나 쌀쌀한 날씨였다. 마치 영화처럼, 꿈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은 그 기억에서 마치 삼자가 되었던 것 같다. 김신의 시선이 어린 자신의 그림자를 좇았다.

“….”

키는 멀끔하게 컸지만, 어딘가 앳돼 보이는 김신이 바닥에 무언가를 밟았다. 허리를 굽히고 오래 바라보는데, 입꼬리가 올라갔다. 학생증이었다. 앞뒤로 돌려보고 한참을 사진을 쳐다보던 김신이 엄지손가락으로 사진을 문질렀다.

“유진.”

이름을 부르는 앳된 목소리를 김신은 꿈결처럼 들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마치 그 사람을 안다는 듯이, 천천히 사진을 들여다보고는 김신은 체육복 윗주머니에 그 학생증을 넣었다. 그리고 돌아서서는 기숙사 쪽 건물을 바라보았다. 얼굴 위로 노을이 쏟아져 핏빛으로 빛났다. 어린 얼굴에 비친 다양한 색깔이 김신의 감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건, 분명 기대감이었다.

-난 당신을 몰랐는데.

얼굴도 잊었던 사람이었다. 잊고 있던 기억의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가 다시 깊은 심해로 사라졌다. 그리고 김신은 잠에서 깼다. 모든 기억이 사라질 것 같아 머리를 털며 침대 옆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하아….”

어둠을 더듬어 핸드폰을 확인했다. 저녁 여덟 시. 퇴근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어지러워 머리를 털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밖이 캄캄했다. 해는 지지 않는다. 지구가 움직이는 바람에 어두워지는 것뿐이다. 입술을 깨물며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드르륵, 하고 침대 옆에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놀란 얼굴로 김신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왜 이래.

“…아… 시우야.”

-밥은 먹었어?

“…아니….”

-너 그러다 죽어.

최우진이 사라진 지 3일째. 점심을 이준과 먹으러 나간 이후에 사무실로 복귀했다고 들었다. 분명 퇴근길에 보자는 우진의 메시지도 받았다. 그러나 퇴근시간이 다 되어도 우진은 김신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주차장에서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회의가 생겼나 해서 김신은 회사로 다시 올라갔지만, 사무실은 텅 비었고, 우진은 여전히 연락이 닿질 않았다. 설마, 하는 무서운 생각이 머릿속을 휩쓸었다. 꼬박 하룻밤을 샜다. 집으로 돌아올 거라는 믿음으로 기다리고 전화도 계속했지만 우진에겐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심지어 한 시간 간격으로 보낸 메시지의 숫자 1은 지워질 생각을 안 했다. 지옥이었다. 그리고 우진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의 집에도, 회사에도,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너는 어때?”

-….

“강지훈 연락 왔어?”

지훈은 그날따라 점심 이후 외근 일정이었다. 김신이 시우에게 전화를 받은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강지훈이 안 와. 전화도 안 받아’ 떨리는 시우의 목소리에 김신이 숨을 몰아쉬었다. 둘 모두, 갑자기 사라졌다. 분명 모든 것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

“밥은.”

-안 먹었어.

“갈게. 기다려.”

시우는 지훈에 대해 아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최우진과 사촌지간이라는 것, 어머니가 오래 아팠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 때문에 지훈이 사라졌을 때 정신적으로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고 정신없이 소리치는 시우를 보고 김신은 깨달았다.

-너 설마, 강지훈이랑 사귀냐?

답이 오래도록 없기에 김신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지금은 우진과 지훈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그 이후에 묻지 않아도 시우는 답을 해줄 것이다. 김신은 우선, 자신이 알고 있는 걸 시우에게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우진의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일, 그것이 지훈의 어머니 사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던, 또 다른 세력. 그리고 그 세력과 관련 있었던 김주완. 시우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강지훈이 정말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어?

-말 안 했어.

-….

-그 멍청이가, 김주완 이야기는 입 밖에도 안 꺼냈다고.

심지어 시우는 주완이 하나제약의 후계자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걸 알아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거라는 시우의 목소리가 떨렸던 건, 우진의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는 것, 그리고 지훈과 우진이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난 뒤부터였다.

-납치, 당한 거라면.

-…시우야.

-그런 거면 어떡하지, 신아.

김신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현재는 우진이 어딨는지 알아야만 했다. 김신은 급하게 침대 옆에 벗어둔 코트를 들어 올리며 집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연인만 빼고는,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모든 사물의 색이 어두워졌다.

“어디 있어요. 우진 씨.”

꿈이 답을 해주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최우진이 김신을 그려왔던 것처럼, 자신도 우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사랑은 늘, 우연을 가장해 나타났다. 알고 보면 운명이었는데도.

***

우진은 머리가 깨어질 것 같아 손을 들어 올리려다가, 무심코 아주 오래전 잊고 있었던 상처를 발견했다. 얼기설기 벌어졌던 피부를 잘 봉합해두었지만, 생각보다 상처는 깊었고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신기한 건, 예전만큼 그 상처가 보기 싫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팔찌를 어디다 풀어두었지 싶어 몸을 일으키던 우진이 생소한 향기에 방을 둘러보았다. 짙은 라벤더 향기였다.

“하아….”

적어도 우진이 알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어디로 데려온 걸까. 아직 몸 주변으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데다 발을 움직여 보니 아프기까지 했다. 뇌와 신체가 괴리된 느낌. 이 느낌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수영장에서, 발견된 그날. 영상이 뒤로 감기듯, 우진의 머릿속으로 색이 바랜 기억의 이미지가 박혔다. 본가로 돌아가던 날이었다. 지훈이 키우던 하얀 강아지. 고모. 그리고, 뒤에서 누군가가 우진의 목을 감았다. 서늘하게 보이던 칼. 그 손은, 좀 더 두껍고 컸다. 이건 처음 보는 기억이었다. 상념을 깨고, 짙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일어났어?”

배이준이었다. 이준의 평소 취향과는 달리 검은색 진에 같은 색의 풀오버를 입고 있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낯설어 우진은 무릎을 끌어 올려 안았다. 어디서 찬바람이 부는지 몸에 소름이 돋았다. 문을 반쯤 열고 들어오는 그의 손에는 작은 물병만 들려 있었다.

“며칠 지났어?”

“이틀 정도. 약 조절을 잘못했어. 못 깨어나면 시체 치울 뻔했대.”

“어차피 치울 생각이었잖아.”

“빙고.”

이준은 다가와 물병을 우진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타는 듯한 목마름이 순간에 느껴져 우진은 나오지 않는 침을 억지로 삼켰다. 목구멍이 달라붙어 지익, 하고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피맛이 났다.

“K회사 후계자 C군. 평소 처방받던 약, 과다복용으로 사망.”

“…언제쯤 나갈 기사인데?”

“이틀 뒤?”

이준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물병의 뚜껑을 땄다. 그의 손에 두드러진 혈관이 미약하게 뛰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긴장한 걸까, 라고 남의 일처럼 우진은 생각했다. 그래야 조금은 덜 두려울 거 같아서였다. 두 번째라 해도, 이 감각은 여전히 소름 돋았다. 두… 번째. 우진은 그 순간 관자놀이에 박히는 기억의 울림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 순간 이준이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우리 셋 모여서 교육받았잖아.”

“….”

“납치를 당했을 때, 가장 유의해야 하는 일은?”

“…범인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우진은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둔 물병을 더듬어 손에 쥐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 걸 보니 포도당 주사도 놓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독한 인간들이었다.

“배고프지?”

“아니.”

“…거짓말.”

“난 배가 잘 안 고파.”

“뭐?”

“한 번 잡혀가서 일주일 정도 갇혀 있었던 거 같은데.”

“….”

“그때 일주일을 굶어야 했거든.”

기억이 서서히 스며 들어오고 있었다. 이준의 눈동자가 커졌다.

“…뭐야.”

“꼬박 물만 먹고 견뎠지.”

아버지는 납치되려는 우진을 막으려다가 괴한의 칼에 맞았다. 지금 돌이켜보니 지훈과 고모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아버지는 피를 흘렸고, 울부짖는 우진을 데려간 건 그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손목에 주완이 하고 있던 타투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기억이, 돌아왔다.

“그때 꼭 하루에 세 번 물을 마시게 했는데.”

“….”

“그걸 마시면 이상하게 기억이 지워졌어.”

“….”

“나중에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몰랐어.”

단 하나 기억이 나는 건 나는 건 손목을 그인 채로, 학교를 향해 달리고 있던 자신이었다. 손목을 들어 올렸을 때 너무 아파서, 우진은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목이 말랐다. 숨도 찼다. 그리고 물 안으로 들어갔을 때, 매번 푸르게 다가오던 사람을 기억했다. 그 하나의 기억이 오래도록 우진의 의식을 붙잡고 있었다. 이준이 입술 한쪽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그때 죽었으면 완벽했는데.”

“….”

“심지어 그때 먹었던 약의 양을 생각하면, 네 뇌는 좀 심하게 망가졌었어야 해.”

“….”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가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김신도 네가 그랬어?”

우진이 물병을 입으로 가져가며 무심하게 물었다. 자신은 분명, 이 물을 마시게 될 것이 분명했다. 기억이 또 지워지더라도 이제는 뇌가 망가지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게 분명했다. 그러면 김신에게 돌아갈 수 없었다. 영원히. 한 모금의 물이 식도를 타고 흘렀다.

“아니.”

“그럼?”

“우리 할아버지.”

“왜?”

“강지훈과 네가, 점점 더 사이가 벌어져서 더 이상은 서로를 만나지 않아야 했거든.”

“…그래서 네가 얻는 거 뭐지?”

“회사?”

우진은 이준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얼굴이 매끈했다. 도자기처럼 빚은 얼굴이라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얼굴에서 허물이 벗겨져 어두운 비늘이 드러난 기분이었다. 눈이 점점 감겼지만, 우진은 물병을 협탁 위에 놓고는 이준을 쳐다보려 애썼다. 천천히 입을 열었는데, 마른 입술이 찢어져 피맛이 났다.

“널 미워하지는 않아.”

“어째서지?”

“너도 이용당했으니까.”

“….”

“너도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을 텐데.”

“….”

“사랑받지 못해서, 안됐어.”

이준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낮인지 밤인지 알기 힘든 시간이 머리 위를 지나쳐갔다. 우진은 눈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불쌍해라.”

착, 하는 소리와 함께 우진의 뺨이 돌아간 건 그 말을 내뱉은 직후였다. 약 기운 때문에 아프지도 않았다. 입술 꼬리를 올리자 이준의 눈이 커졌다.

“웃냐?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모르는데?”

“덕분에-”

“뭐?”

“기억이 났거든. 아버지가 날 구하려다 돌아가셨다는 걸.”

아버지는, 우진을 사랑했다. 파편처럼 날아와 박히는 기억속의 아버지는 우진을 놓지 않으려는 얼굴이었다. 슬프면서도, 찬란한 느낌의 시선. 평생 기억해내지 못했다면 너무나도 아팠을 것 같은 오해.

“난, 사랑받고 있었나봐. 배이준.”

“….”

“너와는 달리.”

탕, 하고 총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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