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곁의 의미
김신은 본가에서 느지막이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저녁을 먹고 나니 우진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 집으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돌아가서 우진을 기다리는 편이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가족이라는 단위가 생겨나는 것은 감각에 종속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김신은 어렴풋이 했다. 가겠다고 일어서자, 민지가 가장 먼저 섭섭한 얼굴을 했다.
“누나도 얼른 다른 가족을 찾아.”
“넌 찾았다 이거냐.”
그 말에 김신이 움찔하자, 민지가 웃었다. 환한 웃음이었다. 민지는 웃으면 눈꼬리가 아래로 처지면서 아이 같아졌는데, 그 환한 웃음이 김신은 좋았다. 가끔 김신에게 힐난을 퍼부을 땐 악마 같기도 했지만.
“우진 씨한테 안부 전해주고.”
“알았어.”
어머니에게도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 와중에, 김신은 우진의 문자를 받았다. 다행히 약속이 끝난 모양이었다. 바로 전화를 걸자 신호음이 얼마 되지 않아 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어디예요?”
아주 단정하고 느긋한 목소리. 우진은 모든 것이 느렸다. 그러나 그 가운데 세밀함이 있어서 그걸 알게 되는 순간 사랑스러운 느낌이 발끝부터 차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서 김신은 잠깐 골목을 걸어 나오며 발걸음을 멈췄다.
-너네 집 근처야.
“네?”
-본가 주소 알려줬었잖아. 난 너 보이는데.
김신이 놀라 핸드폰을 내리고 두리번거리자, 골목 근처에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우진이 천천히 시야에 들어왔다. 후드가 달린 코트를 입고, 아침에 매어준 목도리를 얌전히 하고 있는 연인. 김신과 눈이 마주치자 핸드폰을 끄고는 손을 흔들었다. 저런 반응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처음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정말 사람 같았다.
“인형인 줄 알았는데.”
김신이 발걸음을 멈춘 채 혼잣말을 했다. 사람이 숨을 쉬면 약간이라도 표정이 흐트러질 만한데, 우진은 그렇지도 않았다. 요즘 김신은 자다가 일어나 가끔 옆을 쳐다봤다. 손가락을 코끝에 대어보고, 그제야 편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김신은 우진이 부쩍 표정이 많아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연인은 이제 미간을 찌푸릴 줄도 알고, 숨을 크게 내쉴 줄도 알고 가끔 귀엽게 입술을 내밀 줄도 알았다. 큰 변화였다.
“언제부터 기다렸어요.”
숨을 내쉬니 하얗게 입김이 서렸다. 그걸 보고 있던 우진이 나긋하게 웃으며 김신을 올려다봤다.
“그냥 지나가던 차였어. 기다릴 생각은 없었는데.”
“정말요?”
“응. 안 기다렸어. 진짜. 지나가는 순간 네가 나온 거야.”
첫 변화는 자신이 가슴에 담아둔 말을 곧잘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카운슬링의 효과일 것 같다는 생각을 이전부터 하고 있었는데, 우진이 먼저 누님이 유능한 의사인 것 같다고 말하곤 웃어주었다. 김신은 그게 고마워 손을 들어 차가워진 우진의 뺨을 감쌌다.
“누나가 보고 싶어했어요.”
“월요일에 또 만날 건데.”
“부럽다.”
“우린 맨날 같이 있잖아.”
그렇게 말하며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는 우진의 표정이 생소해 김신은 어깨를 끌어다 안았다.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며 김신은 그의 얼굴이 조금은 피로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이야기 나눴는지 물어봐도 돼요?”
“응.”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어 김신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확실히 피곤한 모양이었다.
“밥은 먹었어요?”
“아니.”
“집에 가서 맛있는 거 해줄게요.”
그렇게 말하자 우진이 볼우물이 파이도록 웃는다. 근래에 자주 미소를 보여주는 덕분에 김신은 마음이 남아나질 않았다. 때마침 눈이 조금씩 내렸다. 가로등에 비친 눈발이 별빛 같았다. 사랑은 어떻게 오고,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녹이는 걸까. 김신은 손바닥을 뒤집어 보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념을 뚫고, 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지만 명확한 울림이었다.
“생각보다 아주 오래되었나 봐.”
“뭐가요.”
“내가 경험한 시간 같은 것.”
“….”
“분노, 같은 게 없어졌어.”
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귀 뒤로 머리칼을 넘겼다. 손이 섬세했다. 마디가 길고, 곧은 뼈들이 마치 움직일 때마다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너무 오래되어서, 남의 이야기를 듣는 거 같았어.”
“…우진 씨.”
“우리 아버지와 지훈의 어머니는, 아프지 않았대. 신아.”
말간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그 순간 김신은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아 가만히 아래로 떨어진 손을 꾸욱 잡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주, 멀쩡했대.”
“….”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아마도, 우진은 김신이 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김신이 상상했던 것 보다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렸던 것인지도 몰랐다. 우진의 떨리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자신의 체온을 밀어 넣으며 김신은 생각했다. 이 서투른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걸, 이제는 함께하고 싶었다.
“슬프면 슬프다고 말하면 되고.”
“…응.”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면 되죠.”
“….”
“옆에 있을게요.”
우진은 걸음을 멈추고 김신을 올려다봤다.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참 아름답게 빛나는 얼굴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게 뭘까, 생각하게 만드는 날들이 펼쳐졌다.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이 찬란하게 빛나고, 가끔은 이 행복감이라는 것이 팡, 하고 터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날들. 쓸쓸하게 빛나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자 눈을 감았다.
“곁에 있어줘서-”
“….”
“날 바라봐줘서 고마워. 신아.”
결국 김신은 양팔을 벌려 우진을 크게 안았다. 더 이상 춥지 않은 시간이 심장 속으로 차분히 쌓였다.
***
지훈은 협탁 위에 놔둔 핸드폰이 꾸준하게 진동을 울려 결국 미간을 찌푸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새벽 여섯 시였다. 오랜만에 집에서 자는 잠이었다. 어제는 시우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잠들었는데, 왠지 우울하게 들리는 목소리 때문에 통화를 끊고도 늦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약을 먹으려다가 우진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도청은 늘 걱정하고 있는 일 중에 하나였지만
-응.
-약도 위험해. 강지훈.
-….
지훈은 전화를 끊고 바로 본가로 연락했다. 어머니는 요즘 병원에 다니고 있었다. 약을 먹지 않으면 곧잘 불안해했다. 다행히 지훈은 가끔 목이 타는 느낌만 받았다. 더 오래 먹으면, 기억이 잘 나지 않고 기억에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고 들었다. 몇 달 전에 있었던 일들이 생각났다. 술을 먹고, 약을 먹으면 자기도 모르게 아무에게나 전화를 걸었다. 그것들이 어떠한 연유에서 생겼던 것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발신자를 내려다보니 우진이었다. 지훈은 상체를 일일으키곤 금방 전화를 받았다.
“어, 최우진. 웬일이야.”
-지금 어디니?
“집인데. 이제 출근-”
-시우 씨가 다쳤어.
순간 핸드폰이 미끄러질 것 같아, 지훈은 손마디에 힘을 주어 그 작은 기계를 움켜쥐었다.
-여보세요?
“어… 듣고 있어. 더 말해. 얼른.”
-다리가 부러졌는데, 지금 수술실 들어가서 전화하는 거야.
“….”
-놀랐냐.
“…많이 다친 건 아니란 거지?”
-다행히도.
턱 막혔던 숨이 그제야 쉬어졌다. 지훈은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쳤다. 지독한 인간들이었다. 둘로도 모자라서 셋을 죽이고, 넷을 꾸미고, 다섯을 힘들게 했다.
“어떻게 알았어. 이 새벽에.”
-김주완 씨가 연락했어.
“그 새끼-”
-안 알려줬으면 큰일 났을지도 몰라.
“…넌 그러고도 그 자식이 용서가 돼?”
-시우 씨가 너한테 연락하라고 했어. 자기랑 연락 안 되면 분명 불안해할 거라고.
“….”
-시우 씨가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다. 그게 우선이었다. 잊고 있었던 것. 이제 막, 마음을 열기 시작한 정시우가 자신의 곁에 있었다. 그걸 미리 겪은 최우진은 강지훈보다 한 움큼은 커 있었다.
“지금 출발할게.”
-알았어.
약하게 웃는 소리가 났다. 끊는다, 하고 말하지 우진이 응, 하고 약하게 대답했다. 얼른 샤워실로 들어가며 지훈은 정시우를 생각했다. 얼른 그 얼굴을 봐야 할 것만 같았다.
***
수술은 부분 마취라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시우는 간호사가 끄는 휠체어를 타고 병실로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자기가 왜 계단에서 내려오다 넘어졌는지도 모를 일이었고, 그 순간 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정신을 잃었던 것도 큰 실수였다. 정신을 잃고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는데,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옆에는 최우진이 있었다.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 수술실로 들어갔고, 의사는 뼈가 부러졌다고 했다. 금방 발견된 건 천운이라고 했는데, 시우는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 정말 최악. 진짜 운이 나빴-”
“정시우.”
시우는 사람이란 참 본능적인 동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강지훈을 보는 순간 느꼈다. 딥한 네이비 색의 목폴라를 입고, 보슬보슬하게 덜 말린 머리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찰나를 아마 만약 이 사람과 어떤 굽이치는 시간을 지나 헤어지게 되더라도 잊기는 힘들 것 같았다. 손을 뻗어 이마를 짚으며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보고 있으면 마치 최악의 운이 최고의 운으로 바뀔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정말 망했다.
“많이 아파?”
지훈은 병실에서 걸어오며 간호사에게로 걸어가 휠체어를 대신 잡았다. 그 바람에 훅, 하고 끼친 몸에서 물풀 냄새가 났다. 차가운 바람, 걱정스러운 목소리, 뒷덜미를 어루만지는 시선. 모든 것이 너무 급작스럽고 빵 터질 정도로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조금 쉬시고 진통제 드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옆에 서 있던 간호사가 지훈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자 지훈이 굽혔던 허리를 펴고 간호사에게로 돌아섰다.
“아, 감사합니다.”
“침대로 옮겨야 하는데-”
“제가 할게요. 보호자예요.”
보호자, 가 이렇게 쉽게 되는 건 아니었을 텐데, 그저 지나가는 말인데도 시우는 심장이 덜컹 했다. 간호사가 문을 닫고 나가자 지훈이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는 게 느껴졌다. 천천히 굴리기 전에 지훈이 허리를 굽히고 시우의 옆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뭐야. 놀랬잖아.”
“얼굴 좀 보자. 고개 좀 돌려봐.”
“됐어.”
“아파? 많이?”
“그런 거 아니야.”
지훈은 휠체어 잠금장치를 풀고 금방 병실 침대 쪽으로 끌었다. 자연스럽게 지훈이 휠체어를 돌려 자신의 쪽을 보게 하면서 무릎을 굽혀 손을 시우 쪽으로 내밀었다.
“어쩌라구.”
“안겨야지. 침대로 옮겨야 하니까.”
“내가 할 거야.”
“미쳤냐.”
왜 이렇게 고집이야, 라고 말하던 지훈이 허리를 감자마자 시우는 순간 어깨에 매달리고 싶은 강렬한 감정이 들었다. 결국 눈물이 맺힐 거 같아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와. 나 정말 너한테 반했나 보다.”
지훈이 놀란 듯 몸이 굳는 게 느껴져, 시우는 웃음이 났다. 사랑이라는 것들이 이것저것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감정이라면 그 감정을 느끼는 자신은 어쩌면 단순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고백은 처음인 거 같은데?”
쿡, 하고 웃자 지훈의 몸이 울렸다. 아, 이렇게 안은 채로 웃으면 몸이 울리는 구나. 시우는 새삼스러워 손을 뻗은 뒤 지훈의 목을 감았다. 지훈이 뒤통수를 찬찬히 쓰다듬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짜 좋아하는구나. 정시우가, 강지훈을.
“너도 애 같을 때가 있네.”
“24시간 애 같을 거야. 이제.”
“맞다. 너 이제 나랑 사귀지?”
“…강지훈 진짜.
아직 마취가 풀리지 않은 덕에 덜 아팠지만, 조금만 지나면 뼈가 저리도록 아플 것이다. 그래도 시우는 괜찮을 거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랑은 마취제 같은 부분이 분명 있었다. 이 사람이 달려온 그 시간이 소중하고 그리워서 시우는 새삼스럽게 열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