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 주임과 최 대리-55화 (55/60)

55화. 형제와 남매

-윤박이 진짜 걱정해. 어머님도 어제 전화하셨어. 우진아, 병원 좀 가.

우진은 본부장회의 시간에 핸드폰 모니터에 떠오른 이준의 메시지를 나른하게 내려다봤다. 본부장회의에 이준은 참석이 불가했다. 팀장이나 실장이 참석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오늘 정책실의 실장은 안타깝게도 지방 출장이라 자리가 비어 있었다. 지훈은 외근인데다 부차장급은 아침부터 간부급 회의에 호출된 상태였다. 대리 출석이라 회의자료만 준비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본부장이 우진에게 눈인사를 했다. 초기 입사 때부터 그런 인사는 대외적으로는 없던 터라 우진은 조금 당황했는데, 아마도 윤일의 할아버지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리라 짐작은 가능했다.

‘얼마만큼, 어디까지 움직일 예정일까.’

할아버지는 우진에게는 꽤나 거리감이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집안의 가장 어르신이었지만 처음부터 그는 혈연인 우진에게 관심이 있기보단, 후계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 방점이 찍혀 있었던 사람이었다.

성 같은 집처럼 할아버지의 주위에도 사람들이 겹겹이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둘러싼 다수의 사람이 우진을 싫어했다. 그건 친척들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터일까.’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이준의 메시지를 보며 떠올린 생각은 하나였다. 대체 배이준은 언제부터 자신을 속여온 걸까. 배명훈은 확실히 차근차근 우진과 지훈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에 이준이 필요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했기에 우진은 할아버지에게 연락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배명훈 변호사의 시선을 피해 할아버지에게 접근하는 일은 절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윤일, 배명훈, 배이준의 라인을 정리하고 나면 남는 사람이 몇 없었다. 그중 하나가 우진이 속해 있는 정책본부의 본부장이었다. 아무런 라인이 없고, 할아버지의 신임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온 평사원.

-만나죠.

이준의 메시지 위로, 낯선 번호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메시지를 펼치자 단편적인 문자 아래에 김주완 드림, 이라고 적혀 있었다. 우진은 손을 들어 눈썹뼈 주변을 쓸었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은 늦게 들어갈 것 같다고 김신에게 문자를 남겨야 할 것 같았다.

***

“본가에는 웬일이야.”

저녁을 먹으러 본가에 들린 김신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다 민지의 목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민지는 퇴근하는 길이었던 모양이다.

“김민지. 너 옷이 그게 뭐냐.”

“누나 이름 막 부르는 거 아니다.”

캐주얼하게 입는 건 좋은데, 아래위로 같은 색의 후드와 조거 팬츠라니 충격적인 코디였다.

“병원에서 뭐라고 안 해?”

“가운 입고 있잖아. 셔츠 위에.”

“세탁은 하지? 누나?”

“엄마, 어딨어? 김신이 나 자꾸 놀려!”

철이 덜 드는 게 평생의 목표인 누나였다. 김신은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누나로 정해진 민지가 신기했다. 민지의 엄청난 애정과 비판은 어렸을 때부터 김신에게 막무가내로 쏟아지던 것 중 하나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엽고 잘생긴 내 동생이니 비난과 힐난도 자신이 한다는 게 그녀의 모토였다. 김신의 어머니가 금방 주방에서 나와 그들을 쳐다보며 웃었다.

“무슨 일이야?”

“누나 옷 너무 이상하게 입고 다녀요. 엄마.”

“편한 게 최고지.”

김신의 어머니는 자유방임주의자였다. 외곬수의 성격을 가지고 태어나 사회에서 적응하기 힘든 민지를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성장시킨 건 다름 아닌 어머니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 고백을 먼저 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의 누나 민지였다. 어른이 되고 같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민지는 김신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래서 김신도 민지에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남매라는 것, 누나라는 존재가 그 당시 사고에서 허우적거리던 김신의 곁을 많이 채워준 것은 사실이었다. 고마운 사람이었다. 특히, 우진에 있어서는 더더욱. 가족은 힘들 때 늘 울타리가 되어주는 장소였다. 민지가 금방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며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신이 룸메이트 생겼어 엄마.”

“알아. 이미 이야기했어. 오피스텔 정리했다며.”

“아주 정리한 건 아니에요.”

김신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어머니를 도와 저녁을 차리기 시작했다. 민지는 금방 주방으로 건너와 손을 씻었다. 어릴 땐 넷이서 늘 끼니를 챙기곤 했다. 생각해보니 아버지도 주방일은 기꺼이 하시는 타입이었던 거 같아 김신은 새삼스러워졌다. 민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추쌈을 씻어내며 말을 이었다.

“회사 선배래. 엄마. 엄청 아름답게 생겼어.”

“그래? 아름답다니 수식어가 굉장한데?”

김신의 어머니가 화사하게 웃으며 불고기를 가득 그릇에 담아내었다. 김신이 뒤에서 그런 어머니를 껴안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데려와도 돼?”

김신이 그렇게 묻자 어머니와 민지가 동시에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지.”

“밥 해줄 거야?”

“밥 먹고 싶을 때 언제든지 같이 와.”

큰 키를 구기며 김신이 웃었다. 그러자 민지가 김신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예 오늘 같이 오지 그랬어?”

“저녁 약속 있어.”

“아아, 그래서 밥 얻어먹으러 온 거군.”

얄미워 보여 눈을 흘겼더니 민지가 푸하하 웃었다. 어머니가 잠시 요리를 마무리하기 위해 자리를 뜬 동안 민지가 김신을 쳐다봤다. 김신이 머뭇거리는 민지를 쳐다보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쳐다봐.”

“잘생겨서.”

“거짓말 말고.”

“….”

“그럼 내가 먼저 물어볼게.”

“뭔데?”

“우진 씨, 상담하면서 힘들어하진 않아?”

“좋아하는 거 같던데.”

김신이 그렇게 대답하는 민지를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진심이야. 무엇보다 내가 우진 씨랑 이야기하는 게 재밌어.”

“그래?”

“아주 신기하게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내가 말하는 거에 반대할 때 한쪽으로 올라가는 눈썹뼈라던가?”

“동의할 땐 입꼬리에 약간의 주름이 지기도 하고.”

“와, 맞아.”

“정말, 누가 핏줄 아니랄까 봐.”

그렇게 말하며 민지가 김신을 쳐다보며 웃었다.

“누나.”

“응.”

“기억을 하는 게 과연 좋은 걸까. 그 사람에게.”

김신이 그렇게 말하며 어두운 표정을 했다. 속눈썹이 길어 아래와 위에 음영이 지는 얼굴이었다. 눈썹뼈 위로 부서지는 빛 그림자를 보고 있던 민지가, 숨을 크게 몰아쉬고는 시무룩해진 김신의 머리칼을 쓸었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거야 그 사람 마음이지.”

“….”

“그 사람의 의지야. 지켜봐주면 돼. 힘들면 곁에 있어주고.”

“그러네.”

김신은 그렇게 말하며 누나를 내려다보았다. 어느 순간 자신보다 작아져 있던 사람. 어머니보다 더한 잔소리꾼에, 늘 감정선은 왔다갔다 자기 마음대로였지만 김신은 민지가 자랑스러웠다. 민지가 의대에 다니면서 정신의학과를 지망하게 된 것은 김신의 탓도 있었다. 그만큼, 자신도 모르게 꾸준히 마음을 써오는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우진 씨 약은 끊었지?”

“원래부터 그쪽 의사가 처방해줘도 잘 안 먹었던 모양이야.”

“다른 약은 더 위험한 거였는데.”

“아-”

아마도 강지훈의 약을 말하는 것 같았다. 우진은 지훈으로부터 약을 받아 민지에게 의뢰를 맡긴 상태였다. 성분이 거의 강한 마약에 가까운 약. 심지어 뇌에 무리가 갈 수도 있다고 했다.

“강한 중독성이 있는 거야. 일주일에 두 번씩은 꼭 먹었다는데, 끊으려면 엄청나게 노력해야 할 거야.”

“…그래?”

“우진 씨는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라 다행이야. 그래서 지금까지 다치지 않고 잘 견뎌왔던 거 같고.”

“그렇지도 않아.”

“그래도 마음이, 아직 맑아.”

그렇게 말하며 민지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한참 김신을 쳐다보다 민지는 그의 뺨 주변을 손바닥으로 톡, 하고 두드렸다. 어렸을 때부터 버릇 같은 것이었다. 귀여워하는 얼굴. 눈주름이 지면, 미소가 금방 떠올랐다. 어딘가 자신과 닮은 부분이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얼굴이었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렇겠지.”

“뭐야. 그 멘트는.”

“감동받았냐.”

“조금.”

“오래 사이좋게 지내.”

“그럴게.”

어디까지 관계를 예상하고 있는 건지는 몰랐으나, 민지는 김신을 신뢰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집에 오면 그래서 편안해졌다. 이 편안함과 따스함, 무한한 신뢰 같은 것들을, 우진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아마도, 이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김신은 편하게 웃었다.

***

“처음 뵙겠습니다. 최우진입니다.”

“김주완입니다.”

의외의 장소였다. 김주완이 선택한 곳은 교외의 한적한 카페였는데, 카페 안에는 바리스타 한 명만이 대기하고 있어 우진은 들어오는 입구에서부터 당황했다. 작은 정원이 딸린 공간이라 매우 넓었으나 사람이 텅텅 빌 정도의 외진 곳은 아니었고, 심지어 주변에 꽤나 유명한 레스토랑과 호텔이 있었다. 다시 말해, 이 카페를 통째로 빌린 것 같았다.

“전 플랫화이트를 마실 생각인데, 뭐 드시겠어요?”

“홍차 부탁드릴게요.”

바에 있던 바리스타가 주문을 받자 소매를 걷고 돌아섰는데, 손목에는 묘한 무늬의 타투가 있었다. 그건 주완도 마찬가지였다. 홍차 우리는 향기를 맡고 있던 우진이 그 타투를 유심히 쳐다보자 주완은 아무렇지 않게 소매를 걷어 손목을 꺼내놨다. 아주 익숙한 그림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로고죠?”

“…하나제약?”

“알아보시네요.”

우진의 회사가 투자하고 있는 제약회사였다. 특히 유전질환에 대한 연구를 주로 하는 제약회사로, 아마도 집안 유전에 대해 이것저것 의뢰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가방에 늘 들어 있던 알약 병의 위에 그려져 있던 로고. 그걸 잊어버릴 리가 없었다.

“배명훈 변호사도 투자하고 계신다는 사실 알았나요?”

“…몰랐습니다.”

“배이준과는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였어요. 전 집안의 막내라서 후계모임과는 좀 멀었거든요.”

하나제약에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우진도 두 명의 형제는 이미 본 적이 있고, 막내는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자랐다는 이야기만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막내분?”

“맞아요. 형들과는 안면이 있으실 수도.”

“일 년에 한 번 정도 봤지만 기억에 안 남네요.”

“전해드리죠.”

그렇게 말하는 주완의 표정은 하나같이 무(無)에 가까웠다. 관심이 없으나, 기계적으로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보자고 하셨나요?”

“왜일까요.”

주완은 그렇게 말하며, 바리스타에게 손짓을 했다. 그가 다가와 서류봉투를 넘겨주었는데, 그 위에도 손목 위의 타투와 동일한 문양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주완은 봉투를 뜯어 안에서 사진은 여러 장 펼쳐주었다. 어린 최우진과, 나이 든 최우진. 우진은 아무렇지 않게 그 사진을 마치 타인의 것인 양 바라보았다.

“우진 씨는 저를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지만.”

“….”

“전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봐왔죠.”

“….”

“물론 제 의지는 아니었습니다.”

“의지가 중요한가요.”

“그러게요. 핏줄이라 그런가. 저도 아주 뻔뻔한 사람이더라구요.”

하나제약은 정보를 사고파는 데도 능하다는 이야기를, 최근에서야 들은 바가 있는 우진이었다. 우진은 사진을 하나하나 넘기다 약간 바랜 빛의 사진 한 장을 테이블 위로 꺼내 들었다. 고등학교 기숙사 앞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어린 얼굴. 그리고 그 뒤로 돌아 나가는, 김신.

“이건 제가 갖죠.”

우진이 손을 뻗어 사진을 집어 올렸다. 그러자 주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명훈 변호사님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일에 개입되어왔습니다.”

“….”

“당신과 강지훈, 씨의 일.”

강지훈이라고 내뱉는 주완의 미간이 갑작스럽게 찌푸려진 걸 우진은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 최우택과 강지훈의 어머니 최다영. 그 둘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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