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커뮤니케이션 도구
“이 손 놓으시죠.”
주완이 사나운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시우는 오랫동안 주완을 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저런 얼굴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 심지어 주완의 얼굴은 마치 다른 사람의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지훈은 손을 들어 시우의 손목을 놓고선 허리를 당겨 자신의 옆에 서게 했다. 숨을 몰아쉬자, 조금씩 차가운 공기가 뇌를 태웠다.
“왜 나한테 명령이지?”
“….”
“무슨 근거로?”
지훈의 말에 주완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주완의 이마에 핏줄이 서는 걸 시우는 묘한 기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주완이 이렇게까지 폭발적으로 화를 낼 것이라 생각을 못 했기에 반대급부로 시우의 분노가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마치, 연기를 하는 세 사람을 보는 또 다른 시선이 된 것만 같았다. 순간 주완이 지훈의 가슴을 밀치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충분한 근거와 이유가 있으니, 관계없는 사람은 빠져줬으면 해.”
“내가 왜 관계가 없지?”
“….”
“안 그래, 정시우?”
“…시우야.”
주완이 시우를 애처롭게 쳐다보며 이름을 불렀다. 시우는 말없이 지훈을 쳐다봤다. 강지훈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시우는 현실에 다시 못 박힌 기분이었다. 그랬지, 김주완은 강지훈과 매달 만나고 있었다. 예약자 리스트를 발견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강지훈은 김주완을 몰랐다. 적어도 최우진이 레스토랑에 데려가기 직전까지. 주완은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눈 아래가 검붉었다. 참으로 오래 사귀었는데, 정작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헤어지고 나서 알게 되는 아이러니란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시우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강지훈.”
“….”
“이건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지훈의 표정이 극렬히 무너지고 있다는 걸, 시우는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지훈은 자존심이 센 사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자존감은 낮아서 늘 불안해하는 걸 정시우가 모르지 않았다. 그런 부분은 자신과 닮아 있어서 더욱 피했던 부분 중에 하나였다. 주완이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시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 순간 익숙해진 그 눈빛에 시우는 약간의 두렴을 느꼈다. 아마 자기가 모르는 시간 동안 김주완은 다양한 얼굴을 했을 것이다. 그걸 지금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시우는 천천히 입을 뗐다.
“집에 가 있어. 강지훈.”
“정시우.”
“끝나고 갈게. 너한테.”
그 순간 주완의 손이 시우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지훈이 잡았던 때와는 달리, 시우는 그 손을 뿌리치고는 지훈의 손을 마주 잡았다. 지훈의 찌푸려졌던 미간이 서서히 풀리는 걸 보고 있자 속절없이 웃음이 날 거 같아 시우는 좀 멍해졌다. 정말, 심하게 빠진 모양이었다.
“빨리 갈게.”
그렇게 말하자 두 명의 얼굴이 상반되게 달라졌다. 시우는 지훈의 등을 살짝 밀면서 날개뼈 주위를 만졌다. 어젯밤에 움켜쥐었던 데가 선명했다. 지훈의 목덜미가 약간 붉어졌는데, 그게 또 귀엽기도 해서 시우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섰다. 그걸 몰라볼 리가 없는 주완이었다.
“둘이 사귀어?”
“응.”
지훈이 돌아서다가 흠칫 멈췄다. 아마 뒤돌아선 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좀 더 기다렸다가 대답할 예정이었는데, 김주완 때문에 모든 것이 틀어졌다. 그래도 시우는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뭐라고?”
“이거야 말로 너랑은 관계없는 일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건, 네가 더 이상 나와는 사적으로 볼 일이 없다는 걸 이야기해주고 싶어서고.”
“…정시우.”
“이름 그만 부르고 대답해. 언제부터 거짓말을 했어?”
“….”
“언제부터야?”
“….”
“대답할 생각 없으면, 알았어.”
지척에 손을 뻗으면 강지훈이 있었다. 시우는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반복해서 주완에게 진실을 말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런 기회를 주완 스스로 걷어찼다. 이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아주 작은 진실 정도는 보여줄 수 있었다고 기대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알았다니?”
“예전에 네가 나한테 말한 적 있지?”
“….”
“헤어지는 순간 내가 널, 다시는 안 볼 것 같아 늘 조심스럽다고.”
“….”
“맞아. 이제 더 이상 볼 일 없을 거야.”
“시우야, 나는-”
뒤도 안 돌아 볼 것처럼 돌아섰다. 주완은 다정했지만, 시우는 그 다정함이 다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았다. 돌아서자마자 손목이 잡혔고, 세게 뿌리쳤다. 이젠 아프다는 감정도 느껴지질 않아서 신기했다. 아마 차 안에서 지훈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네 말이 맞아. 처음엔, 목적이 있어서 접근했어.”
“….”
주완의 말에 시우의 걸음이 멈췄다.
“그런데 나중은 아니었어. 진짜야. 그 예약리스트 명단도, 그냥 난 네가 볼 줄 몰랐었-”
“상관없어.”
“…시우야!”
시우는 곧장 돌아섰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휘청거렸는데, 차 안에 있을 줄 알았던 지훈이 횡단보도 건너편에 서 있었다. 마치 클로즈업이 되듯이 지훈의 얼굴이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 파란불이 깜빡이고 있었다. 지훈은, 여유롭지만 조금은 불안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봤다. 얼른 와. 아주 조그마한 속삭임이었는데 시우는 빠르게 숫자가 내려가는 신호등을 체크도 하지 않은 채 뛰었다. 숨이 금방 찼다. 그게 지훈 때문이었는지, 빨라진 자신의 발걸음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라고 했잖아.”
“진짜 갔을 줄 알았어?”
“…강지훈.”
손을 뻗으니 금방 어깨를 안아 자신 앞으로 당겼다. 숨소리가 귓가에 몇 번이고 울렸는데, 자신보다 훨씬 가쁜 숨소리였다. 걱정한 걸까. 다정하진 않지만, 미친 듯이 세심한 인간. 그게 집착의 형태로 나타날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울렸다.
“정시우. 넌 사람 보는 눈이 없어.”
“그래서 널 선택했나 보지.”
쿡, 하고 웃는 목소리가 머리 위에 울렸다.
“얼른 집에 가자.”
그 목소리가, 위안이 될 줄은 몰랐다고 시우는 순간 생각했다.
***
-통화 괜찮아?
-집으로 와.
우진은 소파에 앉아 한 시간 전에 걸려온 지훈의 전화를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지훈은 우진의 집에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다. 그게 어떤 이유였는지,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행의 흔적들을 마치 이 집에 옮겨놓을까 봐, 어느 정도 노력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진은 앞에 놓여 있는 물컵의 둥근 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자신의 옆에서 책을 읽고 있는 김신의 맨발에 시선을 두었다. 손을 뻗어 발목 주변을 만졌더니, 금방 놀란 얼굴을 하고 들고 있던 책을 책상 위에 내려다 놨다.
“긴장돼요?”
“아니.”
“안아줄까요?”
“응.”
김신의 손은 컸다. 등을 당기고 자신의 품으로 당겨 안는 그 순간이 좋아서 우진은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을 몰아쉬었다. 뜨거운 입김이 어깨 부근의 뼈에 닿았다가 다시 자신의 얼굴로 몰려들었다.
“난 나쁜 사람일까?”
“…왜 그런 생각을 해요.”
김신은 손으로 우진의 뒤통수를 더 세게 당겨 안으며 깊게 울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약간 고개를 들자, 길게 드러난 목덜미로 김신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방관했으니까.”
“….”
“불행한 인생으로 남을 거라고 생각했어.”
따뜻한 손이 셔츠를 헤치고 등의 날개뼈를 쓰다듬었다. 섬세한 손가락이 피부의 결을 쓸고 척추를 타고 건반을 두드리듯 뼈를 훑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양. 김신의 소유욕도 우진의 것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요즘 몸을 맞출 때마다 느끼는 바였다. 묘하게 바라보는 시선에서부터, 손목에 집착하거나 발목을 들어 느긋하게 바라보는 것도 그랬다. 특히 주말에는 거의 몰아치듯 섹스를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김신은 우진이 눈을 못 감게 했다. 사람이란, 이상한 부분에서 파괴적인 집착을 갖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비정상인 것이 아니라, 아주 끈적하고 짙은 색을 띠고 있을 뿐이었다.
-띵동
초인종 소리가 들리기에 우진이 팔을 짚으며 일어섰다. 아마도 지훈일 것이라 예상했다. 천천히 걸어가 문을 여는 순간, 강지훈이 차가운 바람을 맞은 얼굴로 서 있었다. 몸에서 바람 냄새가 났다.
“안녕.”
입꼬리의 한쪽이 올라가는 미소는, 참 신기하게도 우진과 닮아 있었다. 혈연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웃음을 보면 우진은 미묘하게 어느 부분에서 지훈에게 감정이입이 되곤 했었다. 아주 외향적이지만 큰 벽이 있는 지훈과, 아주 내성적이지만 어느 순간 직선적으로 파고드는 우진은 서로 상극이었지만, 동시에 이해하게 되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했다. 근육과 미세한 신경들을 타고 흐르는 그 붉은 입자 중 한가운데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들어와.”
김신이 소파에서 일어나 느긋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지훈이 코트를 벗으며 웃었다. 여유로우면서도 조금은 긴장한 얼굴이었다. 지훈이 먼저 말을 건넸다.
“같이 산다는 이야기는 아주 잘 전해 들었어. 김 주임.”
“이때까지 오해해서 죄송했습니다. 강 대리님.”
“뭐, 오해 살 만했다고 보는데.”
“여전히 능글맞으시네.”
그렇게 말하며 김신은 웃었다. 김신이 일어나 우진에게, 저는 들어가 있을게요, 라고 말하는 걸 지훈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전처럼 화가 나거나 힘들어 보이지 않는 건, 대상이 바뀌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기감정의 이면을 직접 목도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는 그저, 외로움을 쉬이 누일 곳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이제 이야기해볼까.”
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커피를 미리 내려놓은 탓에 오피스텔에는 커피 냄새가 그득했다. 머그잔을 가져와 앞에다 두자, 지훈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난 커피 안 마셔.”
“…아 맞다.”
“시우랑 그런 점에서 닮았어. 너.”
우진이 지훈과 편하게 말을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실은 늘, 불편한 사이였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 벽을 허물려고 노력했던 건, 우진이 아니라 지훈이었다.
“시우에게 이야길, 아주 간단하게 들었어.”
“…시우 씨가 알게 된 건가.”
“그 레스토랑에 데려갔었거든. 저녁 먹으러.”
우진은 그 말에 심장 아래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연애를 하고 나서 변한 것 중 하나는 자신의 연인뿐만 아니라 관계를 맺고 있는 타인에 대한 감정선이 생각보다 너무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우진은 점점,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마음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시우가 받았을지도 모르는 상처를 생각하니 덜컥, 어딘가가 찌르듯 아팠다.
“시우 씨, 충격 많이 받았어?”
“난 네가 김신 말곤 누굴 걱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
“많이 변했다. 최우진.”
그렇게 말하며 지훈은 웃었다. 입술을 쓸며 소파에 기댄 그가, 조금 냉랭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아질 거야. 내가 옆에 있을 거니까.”
“….”
확실히 강지훈도 변했다고, 우진은 생각했다.
“난 김주완을 몰라.”
“그런 것 같더라.”
“왜 나에게 비밀로 하고 데려간 거야.”
“미안해서.”
진심이었다. 오해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여자가 널 미워했던 건 사실이잖아.”
“그래서 너도 네 어머니를 미워했잖아.”
“혈육을 죽였을지도 몰랐으니까.”
결국은 마주한 진실과 퍼즐이 하나하나 조각이 되어 떨어졌다.
“아직도 난 우리 어머니를 신뢰하진 않아.”
“왜.”
“아직 우리가 다 아는 게 아니잖아.”
그 조각을 맞추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우진은 소파 앞에 있던 협탁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이건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해.”
우진이 꺼낸 상자 안에는 작은 약들이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