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커튼을 열자, 봄이 걸어 들어왔다
겨울이 조금씩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햇살이 따듯했기 때문이었다. 시우는 퇴근 시간에 맞춰 업무를 정리하다가 자신이 퇴근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해졌다. 이런 감각은 느지막이 오거나 아예 오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인데, 아마도 저녁에 있을 데이트 때문이라는 생각에 목 아래에서부터 열기가 번져나갔다.
“피디님, 요즘 즐거우신가 봐요?”
“…뭐?”
팀원 중 디자이너 한 명이 시우에게 농담 삼아 던진 이야기부터가 시작이었다.
“애인이 엄청 잘해주나 봐.”
“나 연애하는 거 같아?”
“있으시댔잖아요. 오래전부터.”
근데 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란 말에 시우는 느낌이 묘해졌다. 불같은 연애는 이십 대 초반에 모두 끝났다. 뭔가 활활 타오르고 나면 재밖엔 남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설렘을 기대하기보다는 안정감을 원했다. 그 오랜 연애의 끝이, 불신과 이어지는 그 상황에서 불신의 상대와 다시 연애를 시작하다니.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손으로 이마를 짚으려다가, 어젯밤에 손가락 사이사이에 키스 아닌 키스를 퍼붓던 강지훈이 생각나 또 얼굴에 열이 났다. 이건 뭐, 애도 아니고. 배 아래가 빠르게 끓어올라 시우는 얼른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어, 피디님 얼굴이 빨개요. 감기 걸린 거 아니에요?”
“퇴근 시간 됐으면 퇴근이나 해.”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고 난리시람.”
그렇게 말하는 디자이너의 얼굴을 한참 보고 있다가, 시우는 책상에 놔둔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다시 확인했다. 분명, 눈언저리 밑이 붉어져 있었다. 광대 아래가 둥글어서 동안이란 이야기를 자주 듣곤 했지만, 어딘가 맹한 얼굴이란 생각이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머리를 다시 매만지는데, 메시지 창이 울렸다.
-내려와.
심장이 빠르게 왼쪽 가슴의 표면을 두드렸다. 이건 확실히 안 좋은 신호였다. 이렇게 쉽게 사랑에 빠지는 타입이라 늘 신경을 써온 것이었는데 모든 것이 한 큐에 무너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시우는 입이 썼다. 그러는 와중에도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얌전하게 매는 자신이 어이가 없어 웃고 있는데, 디자이너가 옆에서 가방을 들어 올리며 시우에게 말을 건넸다.
“칼퇴?”
“퇴근이지. 정시에 퇴근하는 걸 칼퇴라고 부를 건 뭐야.”
“오늘 진짜 까칠하시네. 가실 거면 같이 내려가요.”
디자이너가 몸을 붙여오기에, 시우는 늘 그러하듯 무해한 여성의 스킨십을 아무 의미 없이 받아들이고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단층 건물이라 계단을 이용할 만도 한데, 워낙에 체력이 좋지 않은데다 비효율적인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엘리베이터를 타곤 금방 내렸다. 옆에서 디자이너가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다가 시우를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참 분홍색 같은 거 어울리기 힘든데, 피디님은 이상한 게 잘 어울려요.”
“이상한 건 또 뭐야. 젠더 감수성 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줘요. 박 디자이너님.”
“그나저나 저 로비에서 피디님 뚫어지게 쳐다보시는 남성분은 굉장히 훈남이시네요.”
정말 가끔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멀티플레이 능력에 감탄하곤 하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심했다. 자신의 목도리를 만지다가도 뒤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건 놀라운 재능이었다. 시우가 쯧, 하고 혀를 차고는 뒤를 돌았는데, 강지훈이었다.
“훈남은 무슨.”
“눈이 여전히 높으시네요. 피디님.”
“어디가 잘생겼다는 건데?”
“잘생겼다곤 안 했어요. 훈남이랬지.”
“뭐?”
“피디님이 잘생겼다고 생각하나 보네.”
그렇게 말하며, 디자이너는 웃었다. 기분이 확 상해서 미간을 찌푸리자, 로비의 문 앞에서 벽에 기대어 서 있던, 검은색의 롱코트를 입은 지훈이 시우를 쳐다봤다. 눈빛이 얼른 자기에게로 걸어오지 않고 뭐 하냐는 느낌이었다. 시우는 디자이너에게 인사하고는 발걸음을 재촉해 지훈에게로 뛰듯이 걸었다. 그러자 지훈이 몸을 세우고는 시우의 어깨를 감았다.
“시시덕거리니까 좋냐.”
“야, 좀 저리 가. 사람들 봐.”
허리를 감는 손을 자기도 모르게 치자, 지훈은 아무렇지 않은 듯 귀를 잡아당겼다.
“야!”
“저 여자 좀 보라고 그랬다, 왜.”
“나 아직 사귀겠다고 말 안 했어.”
그렇게 말하자 지훈이 감았던 손을 금방 떼어냈다. 시우는 그 손이 떨어져 나가는 게 조금 아쉬운 마음이 저도 모르게 들어버려, 심장 부근에 손을 대었다. 심장이 또 두근두근한다.
“저 여자랑 같이 일해?”
“성별로 사람 지칭하지 말아줄래.”
“까다롭긴.”
“차는?”
“가져왔지. 회사 앞에 주차장이 비었더라고.”
“어디 가는지 안 알려줘?”
“아 맞다. 사직동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인데, 주반이라고 들어봤냐?”
시우의 뛰던 심장이 싸하게 멈췄다. 순간 시우는, 심장이 멈추면 죽는 게 아닌가, 라는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강지훈이 뭘 말하고 있는 거지.
“지난주에 처음 가봤는데, 최우진이-”
“잠, 시만.”
“…왜?”
“지난주에 처음 가봤다고?”
시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강지훈은 주반에 처음 가봤다고 말하고 있었다. 모든 신뢰가 무너졌던, 그 사람의 식당에.
김주완과 강지훈.
***
“배이준 주임님 퇴근하셨나요?”
김신은 4층 사업팀에서 이준의 자리를 쳐다보며, 옆 사원에게 물었다. 얼굴만 스치듯 지나가면서 본 듯한 남자 사원이 김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외근하시고 바로 퇴근하실 예정이셨던 거 같아요. 메모 전해드릴까요?”
“아니에요.”
김신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자신의 모니터로 고개를 움직이는 사원의 등을 바라보다 이준의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없는 책상에 딱 하나, 액자가 있었다. 그 가운데에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어린아이. 그리고 그 어린아이의 옆에, 백발의 노인이 서 있었다. 가끔, 회장의 비서실을 스쳐 지나가거나 홍보실 대응자료에서 보았던 사진의 사람. 배이준의 할아버지이자 자신의 다니는 회사의 전임 변호사, 배명훈. 지금 보니 이준과 닮은 구석이라곤 없어 보였는데, 의외로 눈빛 같은 부분이 유사해 김신은 한참을 쳐다보다 자리를 떴다. 어젯밤의 기억이, 조금씩 뇌리에서 흘러나왔다.
어젯밤 우진은 천장을 바라보며 김신의 손을 찾아 쥐고는 웅얼거렸다.
-신아.
-응?
-강지훈은 김주완을 몰라.
-…네?
놀란 얼굴을 하자, 우진이 눈을 감으며 나지막이 웅얼거렸다.
-김주완이 만난 건 강지훈이 아닌데, 강지훈이어야만 했던 거 같아.
-….
-난 가끔, 윤박이 준 약을 먹으면.
-….
-다음 날 생각이 잘 안 났었어.
-…우진 씨.
-김 선생님이, 그 약을 가져와 달라고 했는데.
-….
-아직 용기가 안 나.
입술을 너무 세게 물어서, 우진이 자신의 목을 감고 안아 내리지 않았다면 아마 벌떡 일어나 옷을 찾아 입고는 그 의사 선생의 집에 찾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윤일을 처음 봤을 때 건조했던 눈빛이 생각났다. 김신은 입술을 물고 한동안 액자 안의 배이준을 쳐다봤다.
‘왜, 최우진이 아니라 나지?’
오랫동안의 물음이었다. 증오의 대상이 우진이라면, 자신을 괴롭히는 것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것도 이해가 되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화살이 자신이 아니라 그 사건을 향해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미워하게 만들기 위한, 김신을 이용하는 기제들이 곳곳에 있었다. 강지훈은 분명, 김신에게 몇 번이고 우진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사인을 보내기도 했었다. 모호하게 어긋나는 시간들이 천천히 태엽처럼 돌아가 틈새를 메우기 시작했다.
***
-레스토랑 앞이야. 나와.
처음이었다. 시우는 지훈이 돌아서던 마지막 표정이 언짢아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도저히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당장 알아야만 했다. 이제 돌이켜 생각해보니, 끝까지 강지훈에게는 주완과 무슨 사이냐고 묻지 못했었다. 멍청하게 주완에게만 끊임없이 되물었었다. 주완에게 보낸 메시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체크되었다. 나갈게, 라고 말하는 간결한 답장이 얼마나 그가 이 시간들을 기다려왔는지 알게 했다. 그는 아직도 정시우에게 미련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라 좋아했지만, 이건 신뢰의 문제였다.
“정시우.”
낮은 목소리가 울리자마자, 시우는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알게 됐다. 시간이 쌓이는 건 무서운 것이다. 입술을 두 번 깨물고, 강지훈을 생각했다. 아직 그를 신뢰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지훈은 자신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시우는 돌아서자마자, 손을 들어 착하고 아름다웠던 자신의 전 연인의 뺨을 내리쳤다. 길고 아름다웠던 주완의 목과, 하얀 뺨에 붉은 자국을 남겼다.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아팠지만, 그보다 마음이 차가워서 에여 들었다.
“나쁜 새끼.”
“….”
“너 나한테 왜 접근한 거야!”
“…시우야.”
악다구니가 절로 나왔다. 그래, 첫 만남이 어디였지. 그때도 김신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던 것이 이제야 기억났다. 그 당시에는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마치 상대에 대한 질투인 듯했고, 그래서 관심을 보였고, 손가락 사이에 밀어 넣던 체온이 따듯했고, 처음 만들어준 런치박스가, 시우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찼던, 그 하나하나가.
“김주완, 내가 오해했다고 말해.”
“….”
“너 나한테 접근한 거, 그거 김신과 전혀 관계없었던 일이라고 말해!”
“…시우야.”
“부르지 마! 내 이름 부르지도 마.”
주완이 손으로 어깨를 붙잡기에 시우는 소름이 돋아 털어냈다. 이전에는 이 손길에, 무너졌던 때도 있었다.
“오해야?”
“….”
“대답해. 강지훈과 꾸준히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이 거짓이었으면서 왜 강지훈과 만난다고 말했어?”
“….”
“언제부터야?”
“….”
“너 최우진 씨도 알지?”
그 순간 주완의 동공이 커졌다. 최우진은 김주완을 몰랐다. 그건 확실했다. 김신이 여러 번 연인을 언급했는데,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은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도 뭔가 연관되어 있다는 기색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주완은 달랐다. 아주 오래된 연인은, 안타깝게도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졸업사진도 보여달라고 했었잖아.”
“….”
“그런데도 나 아직까지 일말의 기대 같은 게 있어.”
“…시우야.”
저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음색을 좋아했다. 낮게 바닥을 끄는 목소리. 그러나 이제는 저 목소리에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는 시우였다.
“말해.”
“….”
“일부러 접근한 거 아니었고!”
“….”
“강지훈과 최우진 둘 다 아는 거 아니라고!”
“….”
“내가 멍청하게 오해해서-”
순간, 붕, 하고 손목이 잡혔다. 눈물이 흐르는지 몰랐는데, 잡힌 손목에 후두둑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고, 가슴 부근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기에 고개를 숙였더니 뜨거운 손이 금방 목을 낚아챘다. 무척이나 다급했지만, 거칠지 않은 손길이었다. 너무 익숙한 샤워코롱 향이 코를 찔렀다. 그건 아침에 자신도 똑같은 것을 뿌렸기 때문이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 정시우.”
돌아보는 주완의 얼굴이 극악으로 물들었다.
“어쩐지, 우진이랑 왔을 때, 나를 알아본 눈빛이었어. 셰프.”
“….”
“나는 그쪽을 처음 봤는데 말이야.”
강지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