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벗겨지는 가면
꿈을 어느 순간부터 자주 꾸지 않게 되었다. 그건 아마도 우진이 김신에게 자신의 마음을 넘겨주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던 듯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나던 불면의 밤이 스쳐 지나갔다. 우진은 오늘이 수요일임을 기억해냈다. 청주는 서울에서 가까운 지역이었다. 지척에 앞두고 보고프다는 마음이 드는 건, 사랑이 피어오르는 정점의 기간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언젠간 서로가 지칠 수도 있었다.
“저녁은 먹었어요?”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오는 길에 기분이 이상해 오피스텔 계단을 숨차게 뛰어올라갔던 우진이었다. 쉽게 흥분하거나 열이 오르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문을 열었을 때, 훅 하고 끼치던 온기가 너무 낯설어서 눈꼬리가 시큰했다. 김신은 쨍한 블루의 맨투맨 티를 입고 있었다. 우진의 집에 가장 먼저 가져다 두었던 그 옷은 가끔 김신의 체향이 나서 우진이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던 그것이었다. 넥타이를 흘근거리게 풀어내면서 구두를 벗는데, 전혀 실감이 안 나서 한참 허리를 숙인 채 있었다. 그러나 김신이 거실에서 급히 걸어 나오며 우진의 앞에 섰다.
“어디 아파요?”
“아니.”
고개를 들었더니 김신이 있었다. 그 순간 평생의 외로움이 달려들어 마음에 쌓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전까지 몰랐던 외로움, 슬픔 같은 것들. 그것에 얼마나 오랫동안 절어 있었는지 그 따스한 시선을 받는 순간 우진은 깨달았다. 몸을 일으키며 가방을 바닥에 놓았다. 우진은 김신의 드러난 손목을 찾아 쥐었다.
“안 반가워 보이는데?”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늘여 웃는 그 모습을 한참 보고 있던 우진은 그의 눈가에 있는 조그만 상처를 손을 들어 쓸었다.
“만져지네.”
“….”
그리고 손을 들어 올려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우진은 김신에게 안겼다. 김신은 좀 당황한 듯했지만 금방 손을 들어 우진의 등을 감쌌다. 한 번도 이렇게 크게 안아본 적이 없었던 거 같아, 우진은 닿지 못하는 가슴 안의 심장이 쿵쾅이며 뛰는 걸 느끼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건 신기하네. 우진은 자신의 숨이 다시 돌아와 닿는 뺨의 뜨거움을 느끼며 생각했다.
“따듯한 냄새가 났어.”
“어디서부터요?”
“역에서 내렸을 때부터.”
“거짓말.”
“진짜야.”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비비자 김신이 우진의 목덜미에 감겨 있는 뒷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얼굴 좀 들어봐요. 안 본 지 너무 오래돼서 보고 싶으니까.”
“싫어.”
“싫다구요?”
“응.”
그렇게 말하며 우진은 웃었다. 요즘 제법 웃음이 많아진 거 같다는 말을 민지로부터 들었는데, 그걸 말하면서도 민지는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다.
-뭐 굳이 웃지 않아도 되긴 하는데
-네?
-터져 나오는 웃음이 이쁘긴 하네요. 곱게 생겼어요. 우진 씨.
김신의 누나는 확실히, 김신과 핏줄이었다. 어딘가 닮은 부분이 많은 것 같아 김신을 올려다보다가 입술이 내려 앉길래 시선을 피했다.
“왜?”
“배고파.”
“그러니까 키스해줘요.”
“너도, 너희 누나도 바람둥이지?”
“…김민지… 진짜.”
활짝 웃자, 김신이 우진의 얼굴을 내려다보고는 눈이 부신 얼굴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건, 찬란한 감각이었다. 마치 빛이 부서져 자신에게로 온연히 쏟아지는 듯한 순간이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안 본 사이에 엄청 아름다워졌네요.”
“그런 말을 잘하니까 문제인 거야.”
“설마 우리 누나도 그래요?”
“응.”
“설마 반했어요?”
“아니.”
행복했다. 우진은 자신의 손을 찾아 깍지를 끼는 김신의 체온을 마음껏 즐겼다. 그래도 된다고, 시간들은 말해주었다.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평생 이렇게 있을 수 있어서 좋을 것만 같은 생각을 들게 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어서 행복했다. 아마도, 그것이 현실이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거,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그것이, 사랑이었다.
***
“커피 마실래?”
눈을 떴을 때 지훈은 오늘이 주말인가를 고민했다. 머리가 좀 띵하긴 했지만 예전처럼 기억이 날아가거나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느끼고는 안심했다. 자동적으로 약을 들이키진 않은 모양이었다. 자신의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서 금방 침대 헤드에서 몸을 일으켜야 했지만, 블랙의 커튼 아래 그레이의 베개가 떨어져 있는 침실은 꽉 들어차게도 더블베드였고 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파자마를 입은 채였다.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는데, 파자마가 종아리 선에서 끊어지는 조거팬츠여서 발목과 복숭아뼈가 드러나 있었다. 시선이 온통 빼앗기자 시우가 금방 얼굴이 붉어졌다.
“그만 봐.”
“신기하게 종아리 뒤에 마크가 있네.”
“너 목소리 다 나갔어.”
“왜 그런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
드디어, 손에 들어왔다. 시우는 금방 솟아오른 밝은 갈색의 머리를 헤집으며 지훈의 옆에 털썩 앉았다. 처음이었다. 마음에 들어온 사람을 안아본 건. 느낌이 이상해서 고개를 돌리자 시우가 금방 손을 들어 지훈의 얼굴을 밀어냈다.
“아주 너 미쳤더라.”
“뭐가.”
“…그냥 넌 미쳤어.”
“…좀 빨리 알아줬음 더 좋았을 텐데.”
그렇게 말하며 갈비뼈를 쓸자 시우가 엉덩이를 슬쩍 밀고는 옆으로 피했다. 고양이 같은 구석이 있었다. 한번 안으면 몸을 기대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디펜스가 길고, 높기까지 했다. 지훈이 미간을 찌푸리자 언제 알아봤는지 자신이 마시던 커피 잔을 앞에다 갖다 댔다.
“마실 거야 말 거야?”
“나 커피 안 마셔.”
“뭐?”
“너랑 있을 때 한 번도 마신 적 없는 거 같은데.”
예민하게 생겨서 둔감한 남자. 아주 디테일이 세밀하고 아름다운 사람인데,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행동의 반경은 거칠고 둔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어릴 때 봤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집착하며 무너뜨렸을 만한 무서운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시우가 커피를 홀짝거리며 눈동자를 멍하니 먼 곳에 두었다. 아마도 미안하기 때문인 듯했다.
“오늘 출근 몇 시야?”
“열 시.”
“유연근무제라니 대단하네.”
“능력이 좋아서야.”
그렇게 말하며 시우가 눈썹을 찌푸리면, 지훈은 마음이 이상하게 떨렸다. 쥐고 있던 차가운 생수통을 지훈의 근처에 던져두는 걸 보면 아주 둔감한 건 아닌 거 같고, 키스를 하면 목을 움츠리면서도 몸은 좀 더 붙여오기도 했다. 이중적이고 모순적이었다. 그것이 취향이란 게 문제였긴 했다.
“데려다줄게.”
“너 회사 안 가냐?”
“반차 쓰지 뭐.”
“너네 회사 그러고도 잘 굴러가는 게-”
그 순간 몸을 기울여 입술을 물었다. 지훈은 일부러 거리감을 조금 두고 눈동자로 시선을 마주하며 치아로 잘근잘근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몸을 기울였다. 하체를 은근히 붙이자, 흥분해 있었던 탓인지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파자마가 헐렁해서 금방 손을 가져다 댔더니 파닥거린다. 진득하게 달라붙는 액체가 있어서, 지훈은 입술을 떼어내고 웃었다.
“설마 속옷 안 입었냐.”
“…아 시발.”
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다. 가늘고 곧은 손가락. 관절이 굽어질 때마다 지훈은 숨이 찼다. 언제 빠져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탐닉하게 되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나 마음이 춤추듯 튀어 올랐다. 이전까지 차갑고 예민한 사람이 취향인 줄 알았는데 시우는 적당히 차갑고 동시에 뜨거웠으며 예민하면서도 둔감했다. 시간이 흘러 알고 보니 이것저것 섞어놓은 사람이 이상형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입체감이 느껴지는 눈썹 뼈를 쓸며 지훈이 느긋하게 말했다.
“또 하고 싶은데 난.”
“…미쳤어.”
“회사 좀 더 늦게 가면 안 되냐.”
지훈은 그렇게 말하며 한쪽 눈썹을 휘었다. 지훈은 자신이 마음먹은 순간에 상대방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잘 알았다. 그게 초반에 정시우에게 먹히지 않아 애를 먹었던 걸 생각하면, 기가 막혔다.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쓸고 손톱으로 복숭아뼈를 긁었더니 몸을 뒤로 젖혔다. 키는 큰데, 선이 고왔다. 몸을 타고 오르려 하자, 흥분감에 얼굴이 붉어졌다. 예뻐서 그대로 옷을 벗기려는데, 시우가 손으로 지훈의 얼굴을 막았다.
“그만해.”
“싫은데?”
“너 진짜 느끼해.”
“형이라고 부르면 그만할게.”
“아 진짜.”
그렇게 말하는 입술이 도톰하고 붉어, 지훈은 키스하면서 몸을 떼어냈다. 실제로 한 번 더 하게 되면 오늘 연차를 내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심지어 배가 조금 고팠고,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깊이 수면에 빠져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확실히 다른 상대들과 다르다는 기분이 들어 지훈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 말야.”
그 순간 시우가 지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훈이 어젯밤 아무 생각 없이 건네받아 걸쳐 입었던 시우의 맨투맨이 조금 작다고 생각하며 어깨 부분을 만지고 있을 때였다. 왜? 하고 묻자 시우가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너, 네가 잘생기고 몸 좋다고 생각하지?”
“아니.”
“뭐가 아니야?”
“네가 그렇게 생각하나 보네.”
그렇게 말하며 웃자 또 눈썹을 일그러뜨린다. 저럴 때마다 어릴 때 얼굴이 궁금했다. 지금도 이상하게 개구쟁이 같으면서도 처연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지만, 좀 더 어렸을 때는 이미지가 좀 달랐을 거 같기도 했다.
“재수 없어.”
“참, 너 와인 좋아하냐?”
지훈은 그렇게 말하며 결국 몸을 일으켜 세웠다. 더 누워 있다간 오늘 하루가 그냥 날아갈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실은 인사 개편 때문에 회의, 출장과 외근, 미팅들이 오늘 줄줄이 연이어 있었기 때문에 여유를 부릴 시기는 아니었지만, 결국 시간은 만들면 생겨나는 것이긴 했다. 그 상대가 시우라는 게 신기했을 뿐이다.
“왜?”
“최우진이 레스토랑을 하나 소개해줬는데, 음식이 꽤 괜찮더라구.”
“….”
“오늘 저녁에 같이 가자.”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털었더니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려 보이는 건 아니었는데 가끔 아기 같은 면이 있어서 입꼬리를 올렸더니 몸을 일으키고선 손으로 지훈의 입술선을 따라 그렸다. 손가락이 닿으니 다시 키스하고 싶어져서 몸을 기울이자, 시우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선수 같은 느낌이 있단 말이야.”
“왜.”
“섹스하고 나서 밥 먹자는 이야기를 바로 하는 건, 반칙이야.”
“계산하는 거 싫어하는데, 난.”
“난 해야 돼. 안 하면 늘 뺏기기만 해서.”
확실히 디펜스가 높은 타입이지만,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따듯함이 지훈은 좋았다. 묘하게 어딘가 아픈 표정을 짓는 거 같아 지훈이 일부러 팔 부근을 잡아끌며 입을 열었다.
“사귀자.”
“…뭐?”
놀란 눈을 하는 시우를 보고 있던 지훈이 정말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샤워실로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시우의 집은 딱, 그 사람의 느낌이 났는데 누군가를 초대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거 같은 느낌의 단아한 오피스텔이지만 화려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고, 늘 비워둔 티가 났다. 아마도 그 누구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오래 사귄 연인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행동반경 내에서만 생활했을 거 같은 사람이었다. 엄청나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지훈에게는 어딘가 짠한 느낌이 들게 만드는 것도, 아마 그 이유 때문인 듯했다. 화려하지만 쓸쓸하고 어딘가 추운 기분이 드는 건 저 사람이 만들어내는 온기를 상대방에게 모두 주기 때문이겠지, 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너무 늦게 말했나?”
“….”
“지금 싫다고 이야기하면 나 조금 상처받을 거 같으니까, 시간을 두고 대답해.”
“…강지훈.”
“앓는 소리 내지 마. 나 너랑 놀고 싶은 마음 없어.”
목소리가 조금 떨렸을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나 이때까지 누군가한테 사귀자고 말한 적 없다.”
“그걸 어떻게 믿어.”
“최우진한테 물어보든가.”
“….”
“아니면 나랑 사귀어주라.”
눈이 부시게 쳐다보자, 고개를 돌려버리는 부끄러운 얼굴을 한 시우가, 강지훈은 좋았다. 아마도 봄이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아주 조금 지훈은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