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미디어와 매개
-열이 오를 만큼이란 게 무슨 뜻이에요?
김신은 자주 자신이 알고 있는 것도 되묻거나, 우진의 앞에서 못 알아듣는 척을 했다. 우진은 김신과 사귀는 몇 달 동안, 그가 자신이 구체화하지 않는 이상 답을 잘 주지 않는 연인이라는 걸 알게 됐다. 누군가는 그런 관계가 싫을 수도 있었지만, 우진은 그런 이상하고 기묘하게 뒤틀린 귀여움이 좋았다. 김신의 숨소리가, 귓가에 조금씩 흘러들어왔다. 끈적하고, 깊은 숨소리였다.
“영상통화할까.”
얼굴이 보고 싶었다. 사실, 김신은 색채가 화려한 만큼이나 표정이 풍부한 타입이었는데 가끔 흥분하거나 열이 오르면 극도로 냉랭한 얼굴을 했다. 그런데 그 얼굴이 우진에게는 열감을 던졌다. 차가운 얼굴이 던지는 열감은 어딘가 비뚤어진 면이 있었는데, 어긋나는 그 순간에는 어깨가 후들거릴 정도로 떨리거나 좋았다. 지금도 크게 뛰는 왼쪽 심장의 근육이 느껴져서, 우진은 숨소리를 조금 약하게 냈다. 자신이 흥분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진 않았다.
-좋아.
김신은 긴장하면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썼다. 우진은 페이스 타임을 눌러놓고 김신이 받길 조용히 기다렸다. 금방, 작은 휴대폰 모니터에 김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조금 창백한 얼굴이었다.
“방이 추워?”
-왜요?
“얼굴이 파래.”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내려간 건지, 두터운 네이비의 후드티셔츠를 입고 있던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거 알아요? 지금 표정이 되게 서운한 얼굴이야’ 그렇게 말하는 김신의 얼굴이 조금 시차를 가진 채 움직이는 걸 우진은 골똘히 쳐다봤다. 화면으로 보는 그가 묘해서 손가락을 가져다 댔더니 김신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해요.
“만지면 만져질 거 같아서.”
그러자 김신이 또 냉랭한 얼굴을 했다. 왜 참지, 늘 우진은 생각했다. 김신은 가끔 우진이 깨어질 것 같은 사람인 것처럼 대하곤 했는데 그게 우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부서지지도 않고, 깨어지지도 않는다. 어쩌면 냉한 기운 안에 가장 단단한 내면을 키워온 것도 있었다.
“너도 나 만지고 싶어?”
그렇게 묻자, 김신은 입을 다물었다. 왜 가만히 있을까, 우진은 김신이 좋아지는 지점들을 생각했다. 섹스할 때 눈을 감고 목을 젖히는 순간이 있었다. 크게 울리는 목울대를 사랑했다. 만지면 진동하고 있을 것 같은 눈꺼풀. 눈이 둥글고 선했지만, 치켜뜨면 꼭 사나운 동물 같았다. 하얀 피부와 속 쌍꺼풀. 입술은 적당하게 도톰했다. 입술을 마주하면, 촉촉하게 달라붙었다. 입술을 쓸면, 턱으로 우진의 머리통을 꾸욱 누르곤 했다. 그러고 웃으면, 맞닿은 등과 가슴이 울렸다. 맨 가슴을 손으로 만지면, 우진의 허리를 잡았다. 골반을 쓸고 더듬고, 허리를 쓸어 올리는 손은 가장 남자다운 구간이었다. 손바닥이 크고, 손가락이 길었다. 그 손이 얼굴을 덮으면, 순간적으로 숨이 안 쉬어졌다. 마치 아픈 사람처럼 앓았다.
-끊고 싶어.
“왜?”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갈라졌다. 탁한 음성에 김신이 고개를 들더니, 우진을 한참 쳐다봤다. 모든 것이 까맣게 암전되는 그 순간에, 우진은 목이 뜨겁게 마름을 느꼈다. 아마도, 욕망한다는 것의 최전선을 현재 지금의 자신은 오롯이 느끼고 있는 듯했다.
“내가 잘못된 걸까.”
-왜요.
“그냥 너만 보고 있어도 좋을 거 같아.”
그 말의 파장은 컸다. 사실 만지고 싶기도, 닿고 싶기도 한 마음의 이면에는 오로지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받는 상담은 고백 같았다. 담당의는 물 흐르듯 우진의 말을 경청했다. 거기에 대한 평가나 약물 치료는 없었다. 이야기를 듣고, 가끔 자신의 이야기도 했다. 건조하지 않은 일이었다. 심지어 상담을 하는 와중에 민지는 좀 더 강하게 말해도 된다는 말을 했다.
-욕 같은 걸 해도 되는데.
-네?
-난 가끔 쌍욕을 하거든요. 기분이 나쁘면.
-….
-왜 그런 거 있잖아. 여러 가지 갖은 새들을 찾게 되는.
-뭐라고요?
그게 이상하게도 너무 웃겨서 우진은 한동안 허리를 못 펼 정도로 웃었다. 민지는 김신과 닮은 구석이 많은 데다 심지어 모든 것에 회의적이었다.
-실수는 모든 사람이 해요.
-….
-아주 치명적인 실수라고 해도. 사과하면 돼.
-….
-용서를 못 하겠으면 안 하면 되고.
안 그래요? 하고 진지하게 말을 건네는 의사에게 우진은 위안을 받았다. 그건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보편적이고, 어디선가 읽었을 만한 그 말에 마음이 관통당한 건, 그 사람의 태도 때문이었다. 아주 진지하면서도 어딘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미소. 그도 그런 적이 있었을 거 같은 느낌의 눈꼬리. 그런 입술의 호선 같은 것들과 분위기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무언가를 내려놓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게 신기했다. 그 변화의 처음이 자신의 마음에 담아둔 이야기들을 꺼내놓는 것이었다. 우진이 숨을 몰아쉬자, 김신이 반응했다.
-끊고 싶은 건.
“응.”
-지금 당장 안고 싶어서야.
그 말에 어딘가 튀어 오르듯 심장이 뛰었다. 김신의 거친 손이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핥아낼 때의 시선이 기억났다.
“잠이 안 올 거 같은데.”
그 말이 시그널이었다.
***
“먼저 보자고 하는 건 처음인데?”
시우는 주중에 저녁 약속을 거의 잡지 않는 편이었다. 자신은 굉장히 사교적이면서도 인간에게 스트레스를 받는 범주의 사람인 걸 잘 알았기에, 회사에서 마주치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도를 씻어내기 위한 하나의 방안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은 좀 예외였다. 뭐랄까, 술을 마시고 싶긴 한데, 혼자는 싫고 누군가가 옆에 있어줬으면 하는 마음. 내일은 특히 오후 미팅이었다. 자유 출근이 가능한 유연근무제를 십분 활용하고 있었던 시우는, 자주 가지만 지인들은 없는 종로의 한 펍에 강지훈을 불렀다. 문자를 보내면서도 제발 거절하라는 마음이 컸다. 그러나 지훈은 흔쾌히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했다.
“너네 회사랑 멀잖아. 꾸역꾸역 나올 필요 없대도.”
“너 원래 먼저 보자고 안 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마주치는 지훈의 동공이 까맸다. 그 사람의 눈동자를 오래 쳐다본다는 건 이미 그 사람에게 절반은 넘어갔다는 뜻이었다. 망했다, 라는 생각이 들어 시우는 한숨부터 나왔다.
“사람 불러놓고 한숨 쉰다.”
“취미야.”
“그런 사람이 취향인 내가 문제인가.”
그렇게 말하며 손등을 덮는 뜨거운 손이, 숨이 막혀 시우는 시선을 돌렸다. 바텐더가 오더를 받으러 앞까지 걸어왔다가 다시 돌아갔다.
“치워. 손.”
지훈은 그렇게 말하는 시우의 콧잔등을 두 번째 손가락으로 쓸고는 기묘하게 웃었다. 저건 분명 놀리는 시선이었다. 얼굴 어딘가가 붉어진 느낌이라 손등으로 뺨을 쓸고 바텐더를 부르자, 그제야 다가온 바텐더가 글라스를 닦으며 시우에게 물었다.
“핸드릭스 진 토닉 드시겠어요?”
“어, 기억하고 있었네.”
그렇게 말하고 시우가 웃자, 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시우는 무신경하게 변하는 지훈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얼른 주문하라고 팔을 툭툭 쳐올렸다. 그러자 지훈이 입고 있던 블랙의 니트를 길게 늘이며 고개를 저었다.
“술은 안 마실래.”
“뭐야, 여기 술집이야.”
“여기 치즈랑 크래커, 올리브만 갖다 주세요. 레모네이드랑.”
시우는 가만히 앉아 담뱃갑을 쓸고 있는 지훈의 프로필을 감상했다. 실제로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기억에 남지 않을 얼굴로 어딘가 고고해 보이면서도 굉장히 서글한,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김신이 화려하지만 둥근 느낌이라면, 이 사람은 서글하면서도 예민하게 생겼다. 짙은 눈썹이나 까만 동공, 웃으면 이상하게 우울해 보이는 눈꼬리까지. 벗겨본 적은 없지만 피지컬은 확실히 제 취향이라고 느끼는 중이었다. 시우는 그가 딱 달라붙는 검은색의 하프 목폴라를 입는 걸 선호했는데, 어깨와 두터워 보일 때마다 흥분됐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강지훈은 정시우에게 오래전부터 취향이었을 것이다. 대학교 때 그를 클럽에서 마주칠 때마다 시선이 온전하게 뺏겼던 것도 그러한 연유였다.
“담배 안 피지 않아?”
“안 피지.”
“근데 왜 갖고 다녀.”
“네가 피잖아.”
아 진짜, 너무 짜증이 나서 시우는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왜? 하고 묻는 그 목소리가 낮고 진중하고 거기다 어느 정도는 가벼워서 시우는 정말 혼란스러워졌다.
“너 좀 그거 그만해.”
“뭐.”
“손으로 얼굴 가리는 거.”
“뭔 상관이람.”
지훈이 아무 말 없이 의자를 당겨 훅, 하고 시우의 옆으로 얼굴을 당겨 쳐다봤다. 속눈썹이 뺨에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간지러워 뒤로 도망가자, 지훈이 시우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진득하게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가락 끝으로 그 사이를 만지며 훑었다. 이상하고 기묘한 감각이었다. 가만히 멈춰 있자, 지훈이 웃었다.
“너 손가락이 너무 길어.”
“….”
“그래서 얼굴 손으로 가릴 때마다 꼴려.”
그렇게 말하며 금방 나온 글래스의 레모네이드를 자기 쪽으로 당기고선 지훈은 가까이 다가왔던 얼굴을 멀찌감치 떨어뜨렸다. 시우는 극도로 가볍고 나쁜 타입의 게이들이 싫었다. 자기가 잘난 걸 아는 남자. 심지어 옷도 잘 입고 돈도 많고, 경험도 많아서 스킨십도 잘하는 남자가 꼬이고, 시우에게 진득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거칠게 다가왔다가 여리도록 무너지는 내면을 보여주게 되면 자신은 덜덜 떨릴 정도로 상대방에게 집착하게 됐다. 그리고 이별하는 순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어느 한구석을 전부 넘겨줘 버리게 되어, 결국 남은 게 하나도 없음을. 그게 싫어서 주완과 사귀었고, 주완은 자신을 채워주는 최초의 연인이었다. 편안하고 안락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뭐야, 너 왜 다른 생각해.”
예민한 것도 지훈의 싫은 점 중에 하나였다. 민감하게 자신의 감각을 알아차리는 지훈을 보면 시우는 도저히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강지훈.”
“왜.”
“너도 좀 그러지 마.”
“뭘?”
“그렇게 다 안다는 듯이 말하지 말라고.”
어딘가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시우는 금방 바텐더가 꺼내 온 진 토닉을 얼음 채로 마셔버렸다. 아삭아삭 얼음을 씹고 있는데, 옆에서 레모네이드를 마시던 지훈의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유려하게 손을 뻗어 시우의 어깨를 감싸고는 잡아당겼다. 엇, 하는 순간 입술이 닿고, 거칠게 턱이 잡아당겨졌다. 입을 열자마자 뜨겁고 레몬 맛이 나는 혀가 시우의 입속을 크게 훑어냈다. 얼음 조각 하나가 지훈의 입속으로 들어간 건 순식간이었다.
“…레모네이드에 얼음이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지훈의 얼굴이 평온해서, 시우는 멍하니 손을 떨어트렸다.
“…안 때리냐?”
멍하니 있는 시우를 보고 지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망했다, 고 생각한 건 문자를 보내기 직전이었던 거 같기도 하다. 이별이 이렇게 쉽게 잊힐 리가 없는데, 아직도 김주완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 것도 사실이지만-
“넌, 아주 못됐고.”
“…뭐?”
“아주 능글맞고.”
“…정시우.”
“엄청나게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지만.”
“….”
“키스는 잘하는 거 같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부드럽게 휘는 입술을 보자 열감이 시우의 손바닥을 엉망으로 괴롭혔다. 만나는 거 아니라고 김신에게도, 심지어 최우진에게까지도 꿋꿋하게 변명을 해왔는데, 소용이 없어졌다. 옆에 앉아 있던 지훈이, 손을 움직여 시우의 팔뚝을 쓸었다. 다시 진득하게 다가오는 지훈의 얼굴을 밀어내지 않고 시우는 도리어 손을 뻗어 목을 감았다. 그러자 쏟아지는 지훈의 입술이 있었다. 혀가 치아를 부드럽게 훑고, 심지어 혓바닥을 살짝 치아로 긁었다. 허리가 튕겼는데, 정말 아무렇지 않게 지훈이 손으로 시우의 셔츠 안을 헤집고는 바스트 포인트를 긁었다.
아무래도, 집에 가긴 그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