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 주임과 최 대리-49화 (49/60)

49화. 시간 여행

“어, 김신 주임님 퇴근 안 하셨어요?”

연우가 야근을 하느라 늦어진 우진과 함께 복도를 걸어가다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친 김신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오늘 업무는 아침부터 사정이 없었다. 인사 조직이 새로 개편된 이후에 만들어진 TF팀 업무는 현재 하고 있는 업무와는 상관없이 이중으로 주어지는 편이었다. 순식간에 신입에서 연차가 쌓인 김신과 연우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둘 다 팀을 옮기지 않아 다행이긴 했지만 외주와 관련된 사안뿐만 아니라 올해 사업계획서와 관련된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고역이었다. 연우는 분명 저녁을 먹으러 간다고 일찍 퇴근하는 모습의 김신과 복도에서 마주한 기억이 있었다.

“아, 저녁만 먹고 들어왔어.”

“홍보팀 내일부터 교육 아니에요?”

“어, 맞는데.”

김신은 엘리베이터에 함께 오르는 우진을 힐끗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2박 3일 동안 교육이라니. 어디 간다 그랬죠?”

“청주.”

“서울에서 별로 안 머네.”

“그렇지.”

우진은 쓰고 있던 안경을 가방에 있던 케이스에 넣고는 얌전히 정면을 보는 중이었다. 오늘 아침에는 처음으로 함께 출근했는데 우진이 회사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내려달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늦어질 뻔했다.

‘아니, 왜 그래야 하는 거예요. 그냥 주변에서 만났다고 하면,’

‘너랑 나랑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니까.’

‘뭔 소리야. 이준 주임님도 알고 강지훈도 아는데.’

‘조금이라도 흠 잡히는 거 싫어, 난.’

‘네?’

우진은 조금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핏기가 없어 김신이 손을 들어 몇 번을 문지르자, 그제야 우진이 시선을 마주해 김신을 본다.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는, 당황한 얼굴을 만지작거리자, 우진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싫어.’

‘….’

‘이상한 상상을 하는 것도 싫으니까.’

‘….’

‘난 네가 늘, 빛났으면 좋겠는데.’

그런 말을 하는 우진의 입꼬리가 서서히 잦아들어서, 김신은 조금 우울했다. 엘리베이터 사이드에 붙어 있는 거울을 확인해보니, 우진의 얼굴이 조금 어두웠다. 우진이 먼저 집에 가라고 한 이야기를 무시한 건 김신이었다. 내일부터 당장 교육기간이었고, 또 2박 3일 내내 못 보는 게 확실하니 오늘은 집에 함께 가고픈 마음이 컸다. 처음이었는데, 함께 돌아가는 건.

“오, 잘됐다. 오빠 나랑 같은 방향이죠? 저 좀 데려다줘요.”

“뭐?”

김신이 당황한 얼굴로 연우를 쳐다보는 순간, 1층 로비에 도착했다. 김신은 지하 1층 주차장에 주차를 해두었는데, 우진이 1층을 눌러놓았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진은 차가 없었다. 우진의 입꼬리가 약간 경련하고 있었는데, 이유를 알지 못해 김신은 엄청나게 불안해졌다.

“아, 아니, 그러니까,”

“전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

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순식간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연우는 우진의 뒷모습을 한참 보다 열림 버튼을 누른 채로 김신에게 낮게 물었다.

“뭐예요? 혹시 데이트 있어요?”

“…어….”

“아 웃겨. 그럼 다른 데 들렸다 간다고 하면 되지, 우진 대리님 눈치는 왜 본담.”

“사적인 이야기 하는 거 별로라서.”

“하긴 최우진 대리님 그런 이야기 꺼리시는 거 같죠?”

“미안, 연우야.”

“뭐가 미안해요. 난 오빠 집에 바로 가는 줄 알았어. 여튼 알았어요. 좋은 저녁 되어요.”

연우는 금방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처음 느꼈던 호감은 아마도 저런 마음 씀씀이에서 비롯된 모양이었다. 김신은 지하 1층에 도착하자마자 핸드폰을 열어 메시지를 보냈다. 전화를 하는 게 맞는데, 아무래도 연우랑 속도가 비슷해 주위에서 들을까 걱정이되기도 해서, 김신은 금방 우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에요?

-회사 앞 사거리.

우진에게서 바로 답이 왔다. 아마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던 모양으로, 평소와는 다른 속도에 김신은 웃음부터 비죽이 스며 나왔다.

-연우 안 데려다줘?

-사거리 앞에 카페 근처에 서 있어요. 금방 갈게요.

시동을 켜면서 문자를 보내자, 숫자 1이 금방 사라졌다. 사람이 정도껏 귀여워야지, 싶은 마음에 김신이 금방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가는데, 익숙한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짙은 네이비의 무스탕이 남자에게 잘 어울리지 않을 만도 한데, 카라 부분이 유난히 풍성한 느낌이라 얼굴 절반이 가려져 있지만 한 번에 알아봤다. 배이준이었다. 인사라도 하지 싶어, 클랙슨을 울리려다가 김신은 스쳐 지나가는 이준의 옆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러나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의 프로필을 목도했다.

“뭐… 야….”

김주완이었다.

***

“무슨 생각해?”

얼굴 표정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보는 건 애초에 포기했지만 그래도 오래 보고 집중하다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보일 때가 있긴 했다. 퀸 사이즈 베드를 들여놓아 다행이란 생각을 하면서, 파자마를 입고 있던 우진이 안경을 벗어 협탁에 놓으며 김신에게 물었다. 김신은 그레이 맨투맨의 목 부분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섬세한 손가락과, 둥근 손톱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유난히 손바닥이나 손길이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커서 한 번에 모든 것을 낚아챌 것 같은 기분을 안겨주는 손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거짓말.”

“이제 독심술도 하네.”

김신은 그렇게 말하며 상체를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댔다. 상박이 참 넓고 곧았다. 수영을 오래 해서 자세가 바르고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큰 키임에도 불구하고 직선적인 느낌이 있었다. 우진이 손가락을 잡아 하나하나 깍지를 끼자, 메마른 손이 잡혀왔다. 아주 아름다운 손마디이지만 뜨거운 체온 탓에 거칠고 두터운 손이었다.

“그냥, 좀 신기한 걸 봐서요.”

“그래?”

“…궁금해요?”

“조금.”

“졸라봐요.”

김신이 중지로 미간 사이를 문지르며 우진에게 말했다. 김신은 건조한 우진과는 달리 표정의 변화가 풍부한 사람이었다. 쏟아지는 색채를 보는 것 같은 얼굴 표정은 왼쪽 가슴이 바르르 떨리는 기분을 안겨다 줬다. 그러나 동시에 가끔 김신은 우진이 가진듯한 느낌의 메마르고 차가운 느낌의 표정을 하기도 했다. 지금이 그랬다. 마치 빠르게 스케치를 하고서 연필을 내려놔버린 것 같은 얼굴.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차가운 얼음을 씹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표정은, 다른 느낌의 긴장감을 안겼다. 어디선가부터, 진동하는 무거운 감정들과 마주한 듯했다. 그것이 아주 깊은 곳의 욕망을 끌어올리기도 한다는 걸, 김신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 거 잘 못해.”

“해봐요.”

김신의 말투는 강압적인 느낌을 주는 건 아니었는데, 순종하게 되는 면이 있었다. 함께하는 일들의 의사결정은 대부분 우진이 하는 편이었는데 아주 가끔, 열 번에 한 번, 김신은 묘한 고집을 부리곤 했다. 그걸 거부하고 싶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게 문제랄까. 우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음, 하고 입술을 물었다.

“…어떻게 하는지 몰라.”

그 말을 내뱉자마자 볼이 빨개졌다. 그러자 김신이 상체를 세우고는 옆으로 몸을 옮겨 우진의 귓불을 물었다.

“빨개졌어요. 여기.”

간지러워서 고개를 비틀자, 김신이 덥석 목덜미를 물었다. 아파서 소리를 질렀더니 그제야 웃었다.

“해봐요.”

“…정말 읏, 할 줄 모른다니까.”

김신은 진짜 아무렇지 않게 상체를 세워서 우진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번쩍 들어 자신의 배 위에 올려놓았다. 당황한 우진이 버둥거리자, 큭큭 거리고 웃었다.

“내가 자주 해주는 거 하면 돼요.”

“…내려놔.”

골반을 꽈악 쥐고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어 결국 두 손으로 김신의 목을 감자, 그가 물결치듯 웃으며 얼굴을 들이댔다.

“뽀뽀해봐요.”

“싫어.”

“싫다는 말 요즘 자주 한다~.”

그렇게 말하며 뿌듯하게 웃는다. 김신은 우진이 감정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걸 좋아했다. 린넨으로 만든 파자마가 부드럽게 피부에 감겨들었다. 골반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열감이 퍼졌다. 신기하게, 모든 곳곳에 피어나는 열꽃들은 오로지 김신만을 위한 것이었다.

“…어디에다 해?”

망설이다 나온 그 말에, 김신이 표정이 조금 사납게 일그러졌다. 김신이 골반을 잡은 손을 돌려 허리를 안고 침대로 우진을 꾹 누른 채 올라탔을 때, 사실 우진은 김신에게 뭘 물어봤는지조차 잊고 있었다. 좀 더 내려와 자신에게 무게감을 싣게 만들고 싶어서 몸을 비틀자, 김신이 목을 핥고, 가슴팍을 손으로 헤쳤다. 더 아래로 내려오자, 이제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잊혔다. 우진이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자, 천장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어디에다 할 거예요?”

은근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흘렀다. 우진은 눈을 뜨고, 천천히 상체를 조금씩 일으켰다. 운동을 해야 할 이유를 잘 몰랐는데, 가끔 힘이 들어가지 않아 김신에게 닿지 못할 때면, 아무래도 어느 정도 운동을 해야겠단 생각이 들곤 했다.

“…맞춰봐.”

그 순간, 눈동자의 색이 약간 붉은색으로 변한 것도 같았다. 우진은 눈을 감으며 쏟아지는 김신이 무게를 느꼈다. 아무래도, 이 모든 것이 끝나면 김신에게 다시 물어볼 질문을 찾아야만 할 듯했다.

***

“좋은 아침입니다.”

우진은 오늘따라 출근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바람에 의아한 느낌이 있었는데, 연우가 반갑게 하는 인사를 듣자마자 그 이유를 바로 알아차렸다. 김신이 새벽에 나가는 바람에 까맣게 있고 있었다. 저혈압인 우진이 흐린 날씨에 일어나지 못하자, 두꺼운 패딩을 입은 그가 웃으며 이마 같은 데를 손으로 문질렀던 거 같기도 했다.

“교육-”

아직 함께 사는 게 익숙해진 건 아니었다. 이제 고작 이틀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김신의 빈자리가 썰렁했다. 회사로 출근하는 길이 멀게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익숙해지는 건 무섭구나.’

우진은 그렇게 곱씹으며 코트를 얌전하게 걸고는 자리에 앉았다. 아침부터 문서함이나 메일함이 가득 차 있는 건 일도 아니었다. 업무 관련 메일을 읽으며 우진은 어제 김신이 했던 이야기들을 곱씹었다. 나란히 누워 있는 사람의 숨소리는 밤을 걷어내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좀 이상해서 그랬어요.

-뭐가?

-어제 사거리 쪽 가다가 우연히 배이준 주임님 봤거든요.

-….

-의외의 사람이랑 같이 있어서.

의외의 사람은 누굴까, 우진은 생각했다.

-누구?

-시우 전 애인이요.

그렇게 말하는 김신의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무슨 생각하냐?”

강지훈이었다. 바람 냄새가 좀 나는 거 같아 우진은 지훈이 자주 쓰는 코롱 향기를 기억해냈다. 요즘 지훈은 자신에게 자주 말을 걸지도 웃어주지도 않았다. 고민이 많은 얼굴이었다.

“이것저것.”

“그래?”

“너 요즘도 약 먹니?”

지훈이 놀란 얼굴로 우진을 바라봤다. 사무실 책상에 털썩, 하고 가방이 놓였는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유려한 얼굴이긴 했다. 김신만큼 화려한 건 아니었지만, 반듯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구석이 있는 얼굴. 색소가 옅은 우진과 정반대이면서도, 가끔 여러 문양이 섞여 빛나는 갈색의 눈동자는 자신과 닮은 부분일지도 모른다는 기분을 던져줬다.

“안 먹어.”

“다행이네.”

지훈이 털썩, 의자에 앉으며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내 걱정해주는 거 처음인 거 같은데.”

“걱정해주는 거 아닌데.”

“무튼.”

지훈의 입꼬리가 약간 올라가 있었다. 우진은 아무렇지 않게 서랍에서 안경 케이스를 꺼내 안경을 착용하고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참, 강 대리.”

“응?”

“우리 오늘 저녁 같이 먹을까?”

“웬일이야.”

“장소는 메시지로 보내줄게.”

우진은 좀 더 명확한 것이 알고 싶었다.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며, 모니터에 비친 강지훈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