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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주임과 최 대리-48화 (48/60)

48화. 업무양식 변경 보고

-오늘 윤 박사님 예약 건너뛰었다면서?

이준의 문자를 받은 우진이 무심하게 손가락으로 자신의 미간을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했다. 입에 물고 있던 빨대를 한번 꾸욱 씹은 우진이, 앞에 놓여 있는 달걀 프라이를 포크로 헤저으며 밥을 먹고 있는 김신의 얼굴을 쳐다봤다.

“왜요?”

“우리 같이 사는 거 같은 느낌이라.”

“맞는데.”

“그럼 짐을 좀 더 가져와.”

그렇게 말하자 김신이 입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여유롭게 웃었다. 김신은 유난히 새카만 머리칼을 갖고 있었는데, 샤워를 하거나 머리를 감으면 금방 머리가 붕, 하고 떠올랐다. 햇빛이 비친 검은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서 있어서 손가락으로 정리해줬더니 우유를 마시다가 눈으로 웃었다.

“왜 웃어?”

“같이 사는 거 같은 느낌이라서요.”

“좋아?”

“정말 짐 더 가져올까요? 이참에 차도?”

“내일 경비실에 네 차 번호 등록할게.”

김신은 좀 멍한 얼굴이었다. 사실 우진은 좀 더 일찍 김신에게 같이 살아보지 않겠냐고 물어볼 생각이 있었는데, 김신이 순간 우진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에는 김신이 준 가죽 팔찌가 매어져 있었다.

“…진심이에요?”

“지금은 절반만 옮겨도 돼. 나중에 좀 더 큰 집으로 이사 가면-”

“정말 진심으로 나랑 살 생각이냐구요?”

우진은 눈을 크게 뜨는 김신의 얼굴을 보고는 조금 고민했다.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 드는 감정들의 변화는 너무 순식간이고 가지각색이라, 딱 하나의 색으로 단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늘 존재했다. 늘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을 정확히 읽을 수 없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우진이 눈썹을 조금 휘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각, 한 번도 안 해봤어?”

마음의 상처는 가까워진 상대에게서 더 많이 받는 법이었다. 좋아하면 같이 살고 싶어지는 건지, 김신 전까지 우진은 사실 잘 알지 못했다. 혼자가 편했다. 혼자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가끔 끼니를 잊는다는 사실이 제일 힘들긴 했지만, 그것도 자신보다는 주위 사람들이 힘겨워하는 일 중에 하나였다. 김신은 예외였다. 인생에서 김신 단 한 사람만 예외인 것은, 우진에게는 큰 행복이었지만 동시에 불행이기도 했다. 긴장감에 주먹을 쥐었더니, 김신이 묘하게 웃었다.

“나 때문에 불안해하는 걸로 놀리고 싶지 않은데.”

“….”

“요즘 자주 표정이 알아보기 쉬워서 이상하게 삐뚤어진 욕망이 생기려고 해요.”

“…무슨 뜻이야?”

입술이 조금 떨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자 김신이 조금 딱딱해진 얼굴로 우진의 뺨을 감싸고, 테이블 너머로 허리를 굽혀 우진에게 깊게 키스했다. 혀를 물려고 해서 입술을 맞추며 도망쳤더니, 몸을 좀 더 기울여 우진에게로 넘어오는 바람에 포크가 떨어졌다. 입술에서 오렌지와 키위, 포도가 섞인 과일 맛이 났다. 답을 듣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듣고 싶지 않아져서, 우진은눈을 감았다.

“…감동받았다는 이야기예요.”

츠읏, 하고 입술을 떼내자마자 김신이 웃으며 말했다. 무던하게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 같으면서도 김신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세심하게 살필 줄 알았다. 그게 좋아서 우진은 심장이 또 두근거렸다.

“당장 옮길 생각인데, 정말 안 피곤하겠어요?”

“왜?”

“혼자 오래 산 사람은 같이 사는 게 조금 덜 익숙할 수도 있는데.”

하긴 누구와 살아본 적이 거의 없는 우진이었다. 그래도 마냥 좋기만 해서 입술 끝을 올렸더니, 김신이 파랗게 웃어서 우진은 계속 진동이 울리는 스마트 폰에서 시선을 떼어낼 수 있었다.

***

“뭐 동거?”

“쉿, 조용하게 좀 말할 수 없냐?”

“우와씨, 나도 못 해봤는데 지금 김신이 먼저 한다는 거야? 어이가 없네.”

“나이가 몇인데 동거도 안 해봤니?”

그렇게 말하며 웃던 김신은 지난주와 달리 제법 밝아진 시우의 얼굴을 보고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주완과 만나기 직전까지 근 1년 가까이 이별로 인한 큰 여운에 시달렸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심지어 주완과 만나면서도 시우는 이별이 무작정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상대에게 거리감을 두고 지내는 편이었다. 독립해 살면서 절대 연인과 동거하지 않는 시우의 연애는 안정적이면서도 늘 애처로웠다. 외로움을 덮어낼 애정이 떠나갈 것이 두려워, 외로움을 선택하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너 요즘 연애하냐?”

“커플이 돌아가면서 똑같은 질문을 하는 건 뭐냐?”

김신은 그렇게 대답하며 묘하게 미간을 찌푸리는 시우를 들여다봤다. 시우는 불호보다 호가 강한 타입의 사람이었다. 강하고 화려한 외모와는 달리 속살은 여리고 따듯했다. 그 여림과 따스함을 온전히 다 받을 수 있는 존재인 연인은 이상하게도 그 고마움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전까지 외롭고 나쁜 연인을 사귀어왔다가 주완을 만난다고 했을 때, 김신은 큰 이별이 시우의 취향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이번 이별이 더욱 불안했었다.

“주완이랑 다시 만나?”

“김주완 이야기는 그만하자.”

그렇게 말하는 시우의 입꼬리가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어서, 김신은 더욱 의아해졌다.

“너 헤어지고 나서 금방 연애 시작하는 타입 아니잖아.”

“연애 아니라고 니 연인에게 이미 고해했어.”

“근데 너, 연애 시작하기 전 같은 얼굴 따위를 하고 있는데-”

김신은 그렇게 말하며 약간 눈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부끄러워할 줄 알았더니 시우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정말 연애가 아닌 것 치고는, 굉장히 안정된 시선이었다.

“월요일 저녁부터 속 시끄러운 소리 하지 말아 줄래?”

“뭐야, 그 반응은.”

“저녁이나 먹고 얼른 들어가. 동거 첫날부터 너무 늦으면 혼날 텐데.”

“오늘 우진 대리님, 집안 모임 있어.”

“아 맞다. 그렇댔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순간 입을 합, 하고 다무는 시우를 김신이 가느다란 눈초리로 쳐다보자, 시우는 금방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김신, 그냥 밥이나 먹자.”

“너 내가 캐묻는 거 질색하지?”

“알면서 왜 그러냐.”

“그래. 알았다. 그러나저러나 신기하네 우리 둘 다 시간이 비어서, 저.녁.시.간을 함께하게 되고 말이야.”

김신은 그렇게 말하며 시우의 안색을 살폈다. 어디 하나 발개진 곳 없이 묵묵하게 앞에 놓인 고기를 먹고 있는 시우를 보자,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싶어 더 이상의 질문은 안 하려는데, 시우가 젓가락을 식탁 위로 놓으며 김신을 쳐다봤다.

“김신.”

“응.”

“너 교통사고 이대로 덮을 예정은 아니지?”

“절대 아니지.”

“너 강지훈이라고 생각하지, 범인?”

“…뭐?”

어느 정도 알거라고 생각했지만, 여기까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김신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강지훈이랑 만나. 나.”

“…뭐라고?”

“연애하는 건 아냐.”

“그럼 뭐 친구냐?”

“뭐 그런 거지.”

김신은 피가 싸악 식는 느낌이 들었다.

“강지훈이 어떤 앤 줄 알아?”

“너보다는 잘 알 거 같다.”

“…그 사람 어머니가.”

“최우진 씨 싫어하지.”

“…강지훈이 말해줬어?”

“응.”

아주 평온한 얼굴. 김신은 그런 얼굴의 시우가 너무 오랜만이라 반대로 자신의 정신이 없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너 지금 제정신이냐?”

“강지훈이 말해줬다니까.”

“그 새끼가 어떤 새끼인 줄 알고.”

“넌 어떤 사람인 줄 알어?”

“…뭐?”

“우진 씨 말고 네가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긴 해?”

“…지금 뭐라는 거야 너.”

“근데 그건 당연한 거야. 너는 우진 씨만 챙기면 돼. 그리고 강지훈은-”

뭔가 순식간에 골똘하게 생각하는 얼굴이 되어버린 시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지훈은 최우진과 오해를 풀어야겠지.”

“오해가 아니라면.”

“아닐 수도 있겠지만-”

“….”

“너도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 뺑소니의 주역은 강지훈이 아니라는 거.”

김신이 드디어 집중한 얼굴로 시우를 마주했다.

“넌 왜 여기에 얽혀 든 거야?”

“내가 묻는 말에 답해봐. 너도 알고 있지?”

“그냥 추측이야. 경찰에서도 이렇다 저렇다 답을 내놓지 않고 있는 게 아주 수상한데.”

“수상한데?”

“아주 법을 잘 아는 사람이, 어디선가 실타래를 꼬아버리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 같긴 해.”

“동물적인 새끼.”

“본능 말고는 남은 게 별로 없지.”

“자랑이냐.”

“응.”

김신은 좀, 의뭉스러웠던 표정을 지우고 시우를 바라봤다.

“그래도 강지훈은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

“부정하다가 넘어가는 순간을 잘 기억해놔. 머리 쥐어뜯지 말고.”

변화가, 시작될 거 같았다. 김신은 순간, 같이 살게 된 자신의 연인을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무도 없는 날들이 좋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크게 뛰었다. 자신도 모르게 왼쪽 가슴을 문지르며 웃었다. 모든 것이 좋아질 거라고, 김신은 막연하게 생각했다.

***

“데려다줄게. 내 차 타고 가자.”

이준이 저녁 식사를 마친 이후, 길게 뻗어 있는 정원을 걸어가며 우진에게 말을 걸었다. 지훈은 조금 앞서 걷고 있다가 그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뒤를 돌았다. 가족 모임에 이준이 참석한 건 오랜만이었다. 늘 식사 이후 지훈이 우진을 데려다주는 게 의례적인 일이라 우진은 순간 지훈의 시선을 마주했다. 지훈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타고 가. 이준이랑 방향도 같을 텐데.”

“그쪽 허락이 필요한 건 아니고.”

이준이 그렇게 말하며 지훈에게 묘하게 기 싸움을 시도했지만 정작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진은 그런 둘에게서 시선을 떼고, 한참을 걷던 싸늘한 정원의 돌담 위에 잠시 멈춰졌다. 돌아본 정원 중앙에 자리한 집이 어마어마하게 커 보였다. 어렸을 땐 그 집이 마치 지옥 같았다. 첫 가족모임이 끝난 날 우진은 먹었던 저녁을 전부 게워냈다. 어머니는 그런 우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아버지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돌아가신 이후 생각해봤지만, 아버지는 그 상황이 미안했던 거 같다. 잠이 든 우진의 머리맡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다 방으로 돌아가신 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을지도 모른다고, 우진은 순간 생각했다.

“지훈이도 피곤할 테니까 이준이 차 타고 갈게. 같은 방향이기도 하고.”

“…그래.”

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약간 미간이 좁아진 지훈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서로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한편이 무작정 무엇이든 맞추려고 했던 관계였다. 그것이 타래가 얼마나 꼬여 들었을지 몰랐으나 지금은 어느 정도 그 윤곽이 드러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준이 지훈이 앞서 걸어가자마자 우진에게 말을 걸었다.

“밥 먹을 때도 유난이더라. 강지훈.”

“….”

“김신은 좀 어때? 몸은 나아졌어?”

“그냥 그래.”

“교통사고가 늘 그렇지.”

그렇게 말하며 입을 뾰로통하게 내미는 이준을 보고 있던 우진이, 천천히 이준의 손목을 잡았다. 힘겹게 한 마디를 떼어내기만 하면, 아마 이 일은 좀 더 쉬워질 거라고 우진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말이지. 이준아.”

“응.”

“네가 좀 알아봐주면 좋겠는데.”

“뭘?”

“…김신 교통사고.”

이준의 눈동자가 커졌다.

“뭘-”

“알잖아. 사고 아니라는 거.”

“….”

“분명, 강지훈, 아니면,”

“아니면?”

“그 여자겠지.”

부들거림이 조금 있었으나 금방 가라앉았다. 우진은 이준의 손목을 잡고 천천히 말했다 .

“믿을 사람이 너뿐이라, 부탁한다.”

“걱정 마.”

이준의 시선을 한참 마주하던 우진이, 다시 정원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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