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시소 타기
김신은 체크무늬의 라벤더 셔츠 위로 검은색 니트를 입고 있던 중이었다. 검은색 슬랙스와 맞춰 입으면서 코트를 고르는 와중에, 텍스트 메시지가 도착해 침대 위에 던져두었던 스마트폰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메시지는 주말에 데이트를 잡아놓은 우진으로부터였다.
-도착했어.
화를 잘 안 내는 타입이라 풀리는 데까지 꽤 오래 걸릴 줄 알았던 우진은, 선물을 받고는 한동안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싶어 허리를 숙여 눈을 맞췄더니 자신의 가방에 선물박스를 고대로 집어넣고는 김신의 손을 찾아 쥐었다.
‘난 매일 선물받는 기분인데.’
그렇게 말하는 우진의 목소리가 제법 떨려서, 김신은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사람이 변해가는 걸 지켜보는 건 묘한 감정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감동받는 사람이 있다는 걸 경험하지 못했던 김신은, 찌르르하게 울리는 그 표정이 주는 여운이 제법 오래갔다. 한참을 메시지를 보던 김신이 급하게 코트를 챙기고선 스튜디오를 나섰다. 오늘도 날이 추워, 아무래도 기다리고 있을 우진을 생각하면 조급해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리자마자 우산을 폈다.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금방 왔네.”
눈이 내리는 순간 돌아서는 창백한 얼굴을, 김신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순간했다. 버건디의 울코트, 코끝까지 올린 블랙의 니트 목폴라, 옅은 갈색의 머리칼과 자신을 보며 휘는 눈꼬리가, 순간의 기억을 촘촘하게 쌓아 내렸다.
“안 추워요?”
“별로.”
손을 붙잡아 바로 주차장으로 데려갔다. 손가락을 벌려 손깍지를 꼈는데, 손이 얼음장 같아서 김신은 속상했다. 연인에게 이런 감정이 든 경험이 무후한 터라, 머리를 쓰다듬고 팔을 만지는데, 우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요?”
“…너 너무 더듬어.”
“싫어요?”
우진은 답 없이 주차장으로 걸어가 김신의 차에 먼저 타버렸다. 화가 풀린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의 반응이라 김신이 차에 타는 우진을 따라 운전석에 앉았다. 초조해지는 순간에도 옆얼굴을 관찰하는 동안 표정이 풀어졌다. 신기하게도 이 사람의 내면에 있는 감각들을 알아챌 수 있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아마도 김신이 최우진이라는 인간에 대해 깊게 고민하는 편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지금은 화가 났다기보다, 좀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팔찌 했어요?”
“….”
“계속 만져서 화난 건 아니죠?”
“아니야.”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우진이 김신의 손가락들을 잡더니 가만히 있었다.
“왜요?”
미소를 머금고 묻자, 우진이 조금 몸을 기울여 김신의 뺨에 살짝 입술을 가져다 댔다.
“기분이 이상해서 그래.”
“뭐 어떻게 이상하다는….”
그러고 보니 뺨이 좀 상기된 듯도 했다. 설마, 싶어 쳐다보니 우진이 약간 흐릿한 표정으로 김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열이 뻗쳤다. 코끝에 입술을 가져다 대자, 살짝 피하는 척하다가 금방 가슴팍으로 안겨 들었다.
“왜 피해요.”
“외출, 하지 말자고 할 것 같아. 더 하면.”
머뭇거리며 말하는 모양새가 기묘했다. 쌕쌕 숨을 쉬기에 떨리는 손으로 가느다란 머리칼을 몇 번 움켜쥐었다. 가끔, 이 사람은 반항 같은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라서 난폭하게 굴고 싶어질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그랬다. 어차피 이른 아침이라 주차장에 사람도 없었다.
“야한 생각 하지 마.”
“어떻게 알았죠?”
머리칼을 좀 더 세게 움켜쥐자, 우진이 아, 하고 약한 신음 소리를 냈다. 그걸 놓치지 않고 입술을 가져다 댔더니, 질척하게 붙어온다. 이런 식이지. 야한 최우진.
“…으… 응.”
목을 울리길래, 얽었던 혀를 떼어내고 목울대를 핥았더니 간지러운 듯 몸을 간헐적으로 떨었다. 귓바퀴를 물었더니 김신의 뺨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는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오늘은 여기까지였다. 더 이상 끌면, 분명 오늘 가려던 장소는 영영 못 가게 될지도 몰랐다. 입술을 떼어내고 우진의 얼굴을 만지자 그제야 눈을 뜨고는 열기가 도는 눈동자로 김신을 오래 바라봤다. 덕분에 정말 데이트고 뭐고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지만.
“오늘은 예약해둔 곳이 있어서 여기까지예요.”
“….”
“아쉬워요?”
“응.”
“미치겠네.”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하다 김신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솔직하고, 깨끗하고, 동시에 어딘지 모르게 야한 구석이 있는.
“데이트 끝나고 해요.”
김신이 그렇게 속삭이자, 우진이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싫다는 말을 안 하는 게 좋아서 뺨에 몇 번 짧은 입맞춤을 했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린다.
“그럼, 가볼까요.”
***
우진은 주말마다 김신과 만나는 장소가 거의 식당, 영화관, 아니면 집이라는 패턴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새해가 금방 지나버린 건, 김신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있던 몇 주간이 훌쩍 흘러버렸기 때문이었지만, 왜 갑자기 데이트 장소를 비밀로 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여기는 대학병원이었다.
“왔냐.”
“…어.”
여자, 김신.
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김신이 입술을 늘어뜨리며 웃었다. 키가 김신만큼이나 컸는데, 호리호리한 체격에 왼쪽 눈 아래 눈물점을 제외하곤 정말 흡사한 얼굴이었다. 웃으니 눈꼬리가 물결치는 것도 닮아서, 우진이 넋을 놓자 그녀가 우진을 보며 앉으라고 재촉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김민지예요.”
“….”
“그렇게 넋을 빼고 봐도 김신 누나 맞습니다.”
김신이 우진을 툭 치기 전까지, 한참을 바라보던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가워요. 우진 씨.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
“얼굴이 신이랑 좀 닮아서 상담하기는 편하실 수도 있겠네요.”
얼마까지 이야기한 걸까, 갑자기 의문이 들어 김신을 쳐다보자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우진의 코트에 붙은 먼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눈치라 우진이 미간을 찌푸리자, 민지가 웃으며 우진의 시선을 당겼다. 편한 움직이었다. 남매는 남매인지 스킨십을 무리 없이 하는데, 아마도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부담스럽지 않고, 건조하지도 않은, 아주 조용한 움직임.
“김신은 트라우마성 발달장애가 좀 있어서 아직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죠.”
“누나!”
그제야, 우진은 웃음이 좀 났다. 자기도 모르게 김신의 가족에겐 죄의식 같은 것들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언젠간 한번은 김신이 자신의 누나를 언급한 적 있었다. 너무나도 자신을 괴롭혀대서, 어쩔 수 없이 집에서 독립했었다는. 지금 보니 그건 애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우진은 마음이 조금 들떴다.
“김신 성격상 여기 데리고 오면서 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거 같기도 하네요.”
“…왜죠?”
“상대방이 불편해서 도망갈까 봐 전전긍긍할 것 같은 타입이거든요. 물론 확신하는 건 아닙니다. 67퍼센트 정도?”
말투가 귀여워서 웃었더니 김신이 놀란 얼굴로 우진을 바라봤다. 김신 이외의 사람에게 소리 내어 웃은 건 처음이라 그런 모양으로, 가볍게 집착하고 진득한 애정을 바라는 섬세한 면이 우진에게 김신이 가장 사랑스러운 순간이었다. 우진은 기꺼이 그 집착에 짓눌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김신이 친구 중에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는 걸 무척이나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애정 어린 말투로 말하더라고요? 원래 요청 같은 걸 잘 못하는 타입이니 매우 가까운 사이일 거라 예상했습니다.”
“네.”
“고등학교 선후배시라고요.”
“네.”
“그럼 김신의 트라우마도 잘 아시겠네요?”
김신이 눈썹을 휘며 민지를 바라보자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팔짱을 꼈다. 어투는 묘하게 다정하고, 문장은 기이하게도 직선적이었다. 그 어울림과 눈빛이, 분위기가 마음에 있는 말을 꺼내고 싶게 만들었다. 심지어, 그 얼굴과 눈빛이 너무 익숙해서, 그녀의 말대로 말하기는 편한 상대일 것 같기도 했다.
“잘은 모르지만, 수영과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이를 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할 정도면, 진짜 친하신가 봐요. 김신은 아직 자라지 않은 문제점이 있는 아이인데-”
“누나 제발, 그만.”
김신이 처음 보는 표정으로 절박하게 민지의 입을 막아냈다. 그 와중에 그녀가 너무 무표정해서 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확실히 편하게 하는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김신은 빼고 상담 진행하죠. 상담이라기보다는 잡담에 가깝지만.”
“….”
“사실 이건 치료는 아니고-”
“….”
“그냥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다 기억이 나면 좋은 거고, 안 나면 저랑 즐겁게 이야기하는 걸로 해요. 김신 어릴 때 이야기라던가. 고등학교 때 얼마나 양아치였다던가-”
김신은 이제 포기한 얼굴로 코트를 다시 집어 들고 있었다. 김신은 상담실을 나가기 전에 잠시 우진을 불렀다. ‘화난 거 아니죠?’ 라고 묻는 그 얼굴에 우진은 손을 뻗어 콧잔등을 쓸었다.
“고마워.”
“…이런 대답일 줄 몰랐는데.”
“…진심이야.”
“누나한테 반하는 건 아니겠죠?”
“그럴지도.”
김신에 비해 자신이 숨긴 것들이 더 많았었다. 미간을 찌푸리는 걸 손가락으로 몇 번 펴주었더니 자긴 카페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게 얼마나 힘들고 고된 일인지 우진은 잘 알았기에 민지가 뒤돌아서 있는 동안 발꿈치를 조금 들어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편하게 눈을 감는다. 아름답고, 찬란했다.
“잘 하고 와요.”
아마도, 많은 것이 더 변화할 것이라고, 우진은 막연하게 기대했다.
***
시우는 또 자신의 집 앞에 무작정 찾아온 지훈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내심 주말에 강지훈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섭섭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덜컥, 겁이 났다. 주완을 만나기 직전에도 이랬다.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다시 시작하게 되면 상처부터 다시 덧날까 전전긍긍하던 날들. 이미 마음이 조금 넘어간 상태에서 시작되는 병이었다. 끊어내야 하지 않을까를 고민하고 있는데 딥한 그레이의 니트를 받쳐 입은 지훈이 시우를 보자마자 묘하게 얼굴을 구겨 웃었다.
“아우 진짜 얼굴만 내 스타일이 아니었어도.”
“뭐라고?”
고개를 젓자 지훈이 눈썹 한쪽을 휘며 웃는다. 김신과 다르게 정돈된 잘생김이 묻어나는 미소였다. 김신이 어마하게 화려한 얼굴로 사람의 이목을 끄는 타입이라면, 지훈은 항상 웃는 얼굴이라 흔하게 느껴질 만한 타입인데 가끔 가만히 있으면 조각상 같았다. 아주 바르게 자랐을 것 같은데 기묘하게 그 안에 변태성이 있었다. 그게 취향이라 시우는 손가락으로 자기 눈썹을 문질렀다.
“너 제발 연락 좀 하고 찾아와라.”
“너라니. 형이라고 해.”
“미쳤냐. 나 외동이야.”
“밥 먹으러 가자.”
“너 친구 없지?”
“응.”
“…아니, 사람 좋게 생겨가지고 왜? 회사에서도 사회성 좋기로 소문났다면서?”
“사회성은 연기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렇게 말하며 웃는 얼굴이 쓸쓸해 보여 시우는 또 한숨이 나왔다. 잘못 걸렸다. 처음 볼 땐 취향이 아닐 것이라고 백 프로 확신했는데 알면 알수록 어딘가가 일그러져 어둠이 있고, 우울한 사람이었다. 그 우울을 숨기려고 가면을 쓰고 있는데, 벗겨질 때마다 도망가려는 그 소매 끝이 보이면 붙잡을 수밖에 없는 타입의 연애를 해온 시우였다.
주완은 예외였다. 그래서 오래 마음을 붙일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심장이 심하게 뛰거나, 괴롭거나 하지 않아서, 아주 오랫동안 은은하게.
“너 무슨 생각해?”
“무슨 상관이람.”
“그래도 옷은 제대로 챙겨 입었네. 맛있는 거 사줄게.”
“꼬시지 마.”
“꼬시면 넘어올 생각은 있고?”
어느 순간부터 험한 말을 하지 않게 된 강지훈. 강하게 보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모양으로, 시우는 편하게 머리를 내린 지훈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싶어져서 자신도 모르게 손이 저릿했다.
“아아, 인생 꼬이는 소리가 들린다.”
“뭐래.”
시우는 결국, 아니라고 말하며 따라나설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겨울이 금방 깊어졌다가 사라질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