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 주임과 최 대리-45화 (45/60)

45화. 진실의 암막

“뭐야… 너.”

시우는 눈앞에 서 있는 지훈의 손을 자신도 모르게 뿌리쳤다. 예상과는 너무 다른 인물의 등장이라 맥이 풀리기도 했고, 자신만큼이나 강지훈의 얼굴이 엉망이라 그 순간 또 다시 얽혀 들게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예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얽히지 않았어야 하는 인물들이었다. 뭐가 이렇게 복잡하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지훈의 손이 시우의 뺨을 덮었다.

“너 울어?”

끔찍할 정도로 뜨거운 손이라 뿌리칠 생각을 못 했다. 마음으로는 주완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진득하게 감아오는 손이 감겨들어 시우는 순간 말을 잃었다.

“내가 아픈데, 왜 네가 울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아픈 사람을 위로해주기는커녕 자신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인데도 시우는 그 말에 시선을 얽었다. 추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결국 눈물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왜 우냐고-”

“강지훈. 나 이제 어떡하지.”

동공이 제멋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새벽이 넘어가는 시간인데 지훈은 코트 안에 정장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술을 먹은 것도 아니고, 그저 피곤한 얼굴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쌓인 피로감이 지훈의 온몸에 내려앉아 시우는 도저히 그 자리에서 그를 뿌리치고 돌아설 자신이 없었다.

시우가 한숨을 쉬었다. 지훈의 시선이 서서히 자신의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저 지치고 우울하며 어쩌면 슬프면서도 진득한, 눈빛. 그건, 아마도 주완이 자신에게 준 상처만큼이나 저 사람이 받은 상처가 커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질긴 인연이었다. 인연이 아니면,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 순간 시우는 했다.

결국 숨을 몰아쉬고 서서히 시우가 입을 열었다. 까만 눈동자가 시우의 얼굴을 태우듯 노려봤다.

“강지훈, 한 번만 들어.”

“….”

“난 널 이기적이고 미친놈이라고 생각하지만,”

“….”

“그래서 지금도 너 이러고 있는 거 뿌리치고 돌아서야 한다는 건 아는데.”

“….”

“이상하게 그게 안 돼. 나쁜 놈아.”

으앙, 하고 눈물이 먼저 터졌다. 시우는 결국 멍하니 서 있는 지훈의 어깨를 끌어당겨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떨리는 지훈의 손이 시우의 몸에 닿는 게 느껴졌다. 이젠, 정말 끝이었다. 어쩔 줄 모르는 지훈의 체온에 위안을 받으며, 시우는 어쩌면 이기적인 것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김신 주임님, 벌써 출근했어요?”

아침 일찍 출근하는 김신이 정책실 코너를 돌자마자 연우가 다가와 어깨를 톡, 하고 두드렸다. 연말도 지나갔고, 이제 완연한 새해였다. 눈이 포근하게 내린 출근길은 교통이 엉망이었다. 낭만이라고는 없는 회사생활이었지만 자신을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긴 했다. 물론, 나지막이 자신의 병실에서 책을 읽어주는 우진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지만. 김신은 돈만 있다면 일을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었다.

“일주일 쉬었으면 많이 쉬었지.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기절했다면서요.”

“어떻게 알았냐?”

“오빠 덩치만 컸지, 진짜. 우리 정말 큰일 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회사에는 병가를 내면서 가벼운 접촉사고 정도로 보고한 걸로 알고 있었다. 우진은 좀 더 쉬어야 한다고 우겼지만, 김신은 운동선수 출신이었다. 하루 종일 병실에 갇혀 있는 건 아무래도 할 짓이 못 됐다. 몸 마디마디가 욱신거려서 우진이 자리를 비운 낮이면 매일같이 산책로를 걸었다. 날이 추웠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의 상쾌함이 있었다.

“뺑소니였다면서요?”

“…응.”

“범인은 잡았어요?”

“아직.”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이 정도라 다행이에요.”

“그러게.”

가속으로 우회전하는 차에 크게 치였다. 운전자도 횡단보도 앞에서는 늘 주의를 기울이기 마련인데, 처음부터 이상했다. 분명 후진을 하려는 낌새가 있어 김신은 넘어진 상태에서 몇 번을 본능적으로 굴렀다. 우진은 손목이 조금 꺾여, 멍이 든 부분을 보고 한숨을 푹푹 쉬기만 했다. 표정이 다양해진 건 좋았지만, 그걸 보는 상대방의 마음도 마냥 편치만은 않아 김신은 한숨을 쉴 때마다 우진의 이마에 입술을 꾹꾹 눌러댔다. 그러니 어느 순간부터 슬픈 표정을 하지 않게 됐다.

“얼굴은 근데 더 좋아졌네?”

“그래?”

“애인이 엄청 챙겨줬죠?”

“당연하-”

그 순간 출근하던 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연우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기에 옆에서 따라 묵례를 했더니 우진이 새초롬하게 고개를 숙이곤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모니터를 켜고 자리에 앉는 우진을 보더니 연우가 손짓으로 탕비실을 가리켰다. 김신은 우진의 눈치를 보다가 연우를 따라나섰다. 오늘도 우진은 여전히 뽀얀 얼굴이었다. 우진은 투명할 정도로 맑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손자국이 곳곳마다 남아 쉽게 만지거나 쥐기가 힘들었다. 동시에 모순적으로 그 피부 곳곳에 이것저것의 자국을 남기고 싶어 안달 나게 만들기도 했다.

연갈색 머리가 봉긋하게 솟아 있는 걸 확인한 후 김신이 연우가 서 있던 에스프레소 기계 앞에 갔다. 그러자 연우가 목소리를 낮추고는 김신에게 속삭였다.

“우리 팀 분위기 요즘 최악이에요.”

“그래?”

김신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돌아보자, 연우가 탕비실 문을 닫더니 쉿, 하고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아니, 지난번에 최 대리님이랑 강 대리님 완전 크게 싸웠잖아요.”

“….”

“최 대리님이 강 대리님 때렸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뭐?”

그 순간 연우가 손바닥으로 김신의 입을 막았다. ‘조용히 해요’라고 말하는 연우의 눈빛이 진지해 김신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아니, 최우진이?”

“어머, 오빠도 최우진이라고 할 줄 아네. 이때까지 높임말 꼬박꼬박 쓰시더니.”

“아니, 무슨-”

“심지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알아요?”

연우가 심각한 얼굴로 커피를 내린 종이컵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설마, 하는 생각에 김신은 긴장으로 얼굴이 딱딱해졌다. 연우가 목소리를 더욱 낮추며 속삭였다.

“아니, 둘이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가 강지훈 때문에 최우진을 찼나 봐.”

“….”

“그래가지고 우진 대리님이 엄청 열받아서 친 거래요. 세상에 어떤 여우람.”

“….”

“아니, 내가 그랬잖아. 최 대리님 왠지 여친 생긴 거 같다고.”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은 김신은 표정 갈무리가 되질 않았다. 지금 연우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벙한 표정을 짓자 연우가 김신을 빤히 쳐다보고는 ‘오빠, 괜찮아요?’라고 물었다.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김신은 숨을 몰아쉬고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아, 아니 너무 황당해서”

“사내연애가 확실해.”

“뭐??”

그 순간, 문이 확 열리고 우진이 들어왔다. 연우가 놀라서 어, 하고 들고 있던 커피를 쏟을 뻔하자, 김신이 손목을 잡아챘다. 그 바람에 연우가 커피를 바닥에 쏟는 불상사는 없었다. 우진이 그 모습을 보고 시선을 옮겨, 연우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지 주임님, 전화 왔습니다. 메모 남겨놨으니 자리에서 확인하세요.”

“아, 네. 죄송합니다.”

“근태 신경 써 주시길 바랍니다.”

연우는 김신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는 금방 탕비실을 나갔다. 그 표정이 조금 억울해 보여 김신은 웃음이 났다. 우진이 에스프레소 머신의 버튼을 누르고는 김신을 올려다봤다.

“잘 잤어요?”

우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이 헤실 하게 풀어지는 건, 아마도 이 사람과의 관계가 안정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증거인 것 같아 뒤에서 커피를 내리는 걸 한참 보고 있는데, 우진이 돌아서면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좋은가.”

“당연히 좋죠. 최 대리님 아침부터 보는데.”

“아니, 지 주임님하고 말이죠.”

김신은 묘한 대답에 동공이 확장되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병실에서 시우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넌 너무 헤퍼.

설마, 하는 마음에 우진을 바라보자, 우진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밀랍으로 빚어놓은 듯한 피부였다. 저런 무감한 얼굴이 가끔은 붉어지기도 해서 사람 마음 심난하게 하는 데는 선수였다.

우진의 어깨를 잡으면서 김신이 뒷걸음으로 탕비실 문을 등으로 밀어 꾹 닫았다. 그러자 컵을 들고 있던 손이 파르르 떨린다.

“오늘 점심 누구랑 먹어요?”

“….”

“답 안 해줘요?”

이렇게 귀여우면 자주 놀리고 싶은데, 하는 마음부터 드니 큰일이었다.

“약속 있습니다.”

“누구랑요?”

약속 있다는 이야긴 못 들었는데, 싶어 김신이 금방 미간을 찌푸리자 우진이 말없이 그런 김신을 올려다보고는 탕비실 문고리를 잡았다.

“알 필요 없잖아요.”

“…앙탈이에요?”

문을 다시 닫으니 우진이 올려다보고는 입술을 물었다. 손가락으로 몇 번 아랫입술을 만졌더니 금방 피가 도는지 붉어졌다. 입꼬리를 당겨주자 우진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아니.”

“그럼?”

“화난 거예요. 이제 문 열어줘요. 김신 주임님.”

그렇게 말하더니 우진은 문을 잡아당겨 훽 하고 나가버렸다.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별다른 낌새를 보이지 않았던 터라 김신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자신도 탕비실을 빠져나왔다. 코너를 돌다 정책실을 힐끗 쳐다보니, 자켓 안에 넣어두었던 안경을 꺼내서 미간을 찌푸린 채 문서를 검토하고 있는 우진이 보였다. 혹시나 봐줄까 싶어 뚫어지게 쳐다봤지만 우진의 검은 눈동자는 김신 쪽을 향할 생각조차 안 했다. 설마-

“정말 화난 건가.”

아니겠지, 하면서도 김신은 어찌 불안한 마음이 엄습해오는 기분이었다.

***

“우진 대리님 어디 가셨어?”

“점심 식사하러 가시지 않았을까요?”

연우가 코트를 입으며 정책실 앞에 우뚝 서 있는 김신에게 답을 했다. 옆에 앉아 있던 지훈은 그런 김신을 보더니 고개를 돌리고는 무심히 코너를 돌아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이상하게 지훈은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아주 좋은 평판에, 아주 좋은 얼굴을 하고 있는 데도, 가까워질 수 없는 건 아마도 저 사람 또한 가벼움으로 점철된 관계 와중에 어두운 구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연우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김신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왜 이렇게 얼굴이 어두워요. 여친이랑 싸웠어요?”

“밥 사줄 테니까 상담 좀.”

“맨날 이런 식으로 이용만 하시는데, 저 소개팅 시켜주면 생각해볼게요.”

“콜.”

오늘 몇몇의 외근으로 동기모임이 무산돼서 결국 연우와 김신 둘만 점심 메이트가 없었다. 둘은 구내식당으로 걸어가면서 회사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보직자들 낌새가 영 안 좋죠?”

“너도 느꼈어?”

“뭐, 이사진들이 바뀔 거라는 이야기도 있고, 심지어 본부장급들은 물갈이 시작한다던데.”

“…회장님이 어디 아프신가?”

“뭐 그건 오래된 루머 아니었어요? 회장님 원래 지병 있으시다 정도.”

“회사만 안 망하면.”

“어머, 직장인 다됐네요. 김신 주임님.”

“연우 주임님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김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언제 연애하고 안 했냐?”

“그런 질문 투머치예요.”

“그럼, 남친이 좀 많이 친절하다, 이런 거 화가 날 요소인가?”

“사람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면 기분 나쁘죠.”

“….”

“내가 예전에 오빠한테 이야기 안 했나? 사회성이 별로 없고 바운더리가 좁은 사람일수록 지나치게 친절한 사람들을 이해를 잘 못해요.”

“…아.”

“오빠 좀 둔한 데가 있네.”

“뭐?”

“만약 오빠 여친이 사람들한테 다 친절하다고 생각해봐요.”

“내 애인은 안 그래.”

“그러니까 이해를 못 하지. 오빠 애인이, 다른 남자한테 막 엄청 다 친절한 거야. 이것저것 다 신경 써주고, 막 옷매무새도 챙겨주고-”

“뭐? 그건 좀-”

“오빠 자주 그러잖아. 막 여기 뭐가 묻었네 이러면서.”

연우가 귀 뒤로 머리를 넘기면서 말했다. 얼굴에 장난기가 있어 농담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김신은 자주 사람들과 몸을 부대끼곤 했다. 그건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해온 사람의 익숙한 스킨십이기도 했고, 그렇지만 여차저차 그러다 보니 파트너로 지내게 된 상대들도 여럿 있었다.

“오빠도 알 거야. 지금 엄청 찔리죠?”

“….”

“딱 보니 여친이 삐졌네. 그럴 줄 알았어.”

“많이 화났을까?”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긴장된 얼굴로 걸어 들어가는 중에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연우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비웃는 거야?”

“아뇨. 오빠 진짜 안절부절못하네.”

“…그런 것 같아.”

“좋네. 그럼 밥값을 좀 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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