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 주임과 최 대리-43화 (43/60)

43화. 살아 있는 날들과 기억의 사고

“좋은 아침.”

지훈이 우진을 스쳐 지나가며 손을 들어 인사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목소리가 밝아 보여, 우진은 게시판을 확인하다 말고 시선을 마주치며 가볍게 묵례했다. 그러자 지훈이 말끔하게 웃었다. 누가 봐도 반할 만한 미소였다. 눈이 오려는지 잔뜩 흐린 하늘과는 상반되는 표정이었다.

“너 휴가 쓰고 뭐 했냐?”

자리에 앉자마자 우진을 보며 지훈이 책상을 정리하더니 무심코 물었다. 우진은 그 말엔 대답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에, 앞에 놓은 자료를 다시 확인하고, 재무팀에 제출할 영수증을 챙기기 시작했다. 지훈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우진의 옆태를 힐끗 쳐다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기분은 좋아 보이네.”

“….”

“맞선 상대들은 영 기분이 나쁜 모양이던데.”

선 자리를 주선하기 시작한 건 할아버지였다. 고모는 지훈에게 결혼을 종용하면서도, 할아버지가 우진부터 결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바로 꼬리를 내렸다고 들었다. 만만치 않게 고모로부터 잔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 뻔한 지훈인데, 강 건너 불구경하듯 자신을 보고 있는 지훈이 얄미워서 우진은 콧잔등에 미끄러지듯 안착한 안경을 다시 고쳐 쓰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맞선 네가 봐. 나 대신에.”

“직계가 먼저 가는 게 맞지. 난 외가 쪽이잖아.”

“무슨 상관이야.”

결혼을 먼저 하면 재산 상속에서 유리해질 것이라는 상상은 누가 했는지 모르겠지만, 집안 어른들은 지훈과 우진의 사회적 재생산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죽고 난 뒤 하나 남은 딸도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상상으로 불면증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런 할아버지의 건강상 이유를 필두로 지훈은 끊임없이 우진을 설득했었다.

“고모님 이혼하셨잖아.”

“…그래서?”

“난 관심 없으니까 너나 해.”

“나도 관심 없어.”

“고모님은 관심이 있으신 걸로 아는데.”

우진은 자신의 고모이자 지훈의 어머니인 ‘그 여자’의 이야기를 꺼내는 걸 극도로 회피하곤 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훈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는 걸 보고 있다가, 우진은 말없이 의자를 돌려 모니터로 시선을 향했다.

어쩐지, 주말 새벽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난 우진이 발코니로 발걸음을 옮긴 건, 그저 바다를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진은 새파란 타일이 깊게 깔려진 실내 수영장을 보자마자 물을 받아보고 싶었다. 뜨거운 물을 마음껏 틀었더니 금방 발코니가 수증기로 가득 찼다. 수증기가 얼굴에 달라붙는 느낌이 나쁘지 않아 발에 닿을 때까지 앉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뜨끈한 기운이 종아리까지 차올랐을 때 발코니의 커다란 창이 스르르 열렸다. 바깥공기를 따라 물안개가 구름처럼 천천히 이동했다. 그사이에, 놀랍고 걱정스러운 눈빛의 김신이 나타났다. 아마도, 그날의 기억이 재생되는 모양이었다. 눈동자를 마주치고, 웃어주었을 때 김신은 금방 우진에게로 걸어와 어깨를 껴안았다. ‘어디 가버린 줄 알았어요’ 손을 들어 뒤통수를 감싸 안았더니, 어깨에 얼굴을 깊게 묻고는 말을 이었다. ‘멀리 가지 마요.’

“….”

기다린다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걸 실제로 견딜 수 있는 상대방이 과연 있을까, 라고 우진은 무심결에 생각했다. ‘널 기다릴 수 있을 만큼, 나는 너를 좋아해’ 라는 의미의 수사일 뿐, 기다리는 건 고통이고 지루하기까지 했으며, 혼자일 때보다 몇 곱절이나 외로운 것임을 우진은 알고 있었다.

“무슨 생각하냐?”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데,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가둬놓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의미 없는 타이핑을 다시 시작했다. 힐끗 바라 본 지훈은 마치 조각처럼 숨만 쉬고 있었다. 아마 지훈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선택지는 우리가 더 많이 만들 수 있었는 데도, 주어진 것밖에 없다고 그저 뒷걸음질 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

“점심은?”

이렇게나 자신의 식사를 걱정하는 사람이 갑자기 많아질 줄은 몰라서, 우진은 어느새 정책실 사무실 앞에 비스듬히 서서 사원증을 흔들고 있는 이준을 보고는 시계를 들여다봤다. 예전 같으면 샌드위치나 우유를 사서 자리로 돌아와 연구보고서나 읽고 있을 시간이었다.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들에 먼지가 제법 쌓여 우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책등을 훑었다.

“밥 먹으러 갈 건데 손을 버리고 그러냐.”

“간다고 안 했어.”

“가자. 죽 사줄게.”

“죽 안 먹어.”

오늘 김신은 오전부터 외근이었다. 사무실에 들려 아침 인사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돼서, 우진은 조금 속상했다. 연인과 너무 오래 붙어 있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인간의 적응감이란 생각보다 사악해서, 조금이라도 온기를 빼앗기게 되면 몇 배나 더한 외로움이나 집착을 갖게 만들었다. 이준이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우진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김신 외근이라며?”

“또 부탁받았니?”

“그건 아닌데, 밥 먹자 나랑. 식사 거르면 몸 상해.”

하루에 한 끼 정도는 걸러도 될 만한데, 우진의 주변 사람들은 그걸 못 견뎌했다. 이제 셔츠의 목 부분 버튼이 잘 잠기지도 않았다. 워낙 마른 체형이라 맞춤 드레스 셔츠를 주문하곤 했었는데, 어제는 숍에서 다시 몸 치수를 재야 할지도 모른다는 통보를 받았다. 자신은 잘 느껴지지 않는 변화 중에 하나였다. 잘 먹고, 잠을 잘 잤다. 주변에선 얼굴이 좋아졌다고 했다. 숍 디자이너가 다행이란 이야기도 했다. 평소에 끼니를 걱정할 만큼 말랐었나 싶어 우진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배가 고팠다.

“그럼 밥 먹으러 가. 죽은 싫어.”

“오, 웬일이래.”

이준이 웃으며 일어서는 우진의 코트를 어깨에 걸쳐주었다. 이준은 생각보다 남을 케어링하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우진은 늘, 자신의 속을 보여주지 않는 지훈보다 솔직한 이준에게 좀 더 거리감을 느꼈다. 우진은 순간 그건 아마도 자신과 핏줄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인 건가, 라는 아주 보수적인 생각을 했다. 코트를 걸치고 핸드폰을 찾으려는데, 갑자기 드르륵, 하고 진동이 시끄럽게 울렸다.

“전화 오는 것 같은데?”

이준이 파티션에 팔을 올려놓은 체 고개를 갸웃, 하고는 우진을 향해 물었다. 그 순간 우진은 어딘지 모르게 싸해지는 기분이 들어 잠시 바닥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들어 핸드폰을 찾았다. 진동소리는 요란한데 찾는 물건이 눈에 보이질 않아 두리번거리자, 데스크톱 아래에 불빛이 번쩍이는 스마트폰을 이준이 천천히 가리켰다.

<김신>

“아주 대단한 분이셔. 점심시간 맞춰 전화를-”

우진은 매우 좋지 않은 감각이 들어 급하게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엄지손가락에 달라붙은 모니터의 표면이 빨간색으로 빛났다.

“여보세요.”

-혹시, 최우진 씨 되십니까?

맞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김신의 것이 아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귀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여기 강남 S병원 응급실인데요. 교통사고로 실려 온 환자가 의식을 잃어서….

후두둑, 손에서 떨어진 핸드폰이 사무실 바닥에 널브러졌다.

“최우진?”

이준이 발끝부터 얼굴까지 하얗게 질려가고 있는 우진의 어깨를 잡아채기도 전에 그는 미친 듯이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

김신은 오늘이 며칠인지 기억이 잘 나질 않아 처음 눈을 뜨고 나서는 한참을 머릿속을 정리해야 만했다. 주말이었나, 옆을 만져보니 소독약 냄새가 나는 딱딱한 침대매트만이 느껴져서 김신은 몸을 일으켰다. 순간 하얀 천장이 비잉, 하고 돌아서 몸이 다시 절로 침대 쪽으로 기울어졌다. 손이 당기는 느낌이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투명한 끈 같은 것들이 달려 있었다. 주사 줄이었다. 놀란 눈으로 미간을 찌푸리자, 커튼이 걷히더니 간호사가 나타났다.

“움직이지 마세요.”

“지금 무슨-”

“환자분 얼른 누우세요. 막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월요일부터 외근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김신이 주위를 둘러봤다. 천천히 청각이 돌아오고 기억들이 찾아들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파란불을 보고 건너려던 참이었다. 검은색 세단이 돌진하는 순간, 숨을 몰아쉬었던 것 같기도 했는데. 끊어지듯 침잠하는 기억의 파편이 꽂히는 와중에, 의사가 들어와 김신의 차트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김신이 끊어지는 목소리로 의사게에게 물었다.

“지금 몇 시죠?”

그가 김신을 내려다보고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신 씨, 맞으신가요?”

“…몇 시죠?”

의사가 김신의 재차 반복되는 질문에 옆의 간호사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김신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어깨를 짚으며 물었다.

“김신 씨?”

“네.”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월요일이요.”

“여기는 어딘가요?”

“병원이잖습니까.”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세요?”

“네.”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했다. 주차장이 미팅이 있었던 장소와 멀어서 조금 걸어야만 했다. 김신은 스마트 폰을 확인하다가 신호등의 신호가 바뀐 것을 확인하고, 10초 정도 기다렸다가 건넜다. 그건 오래된 습관이었다. 좌우를 살피고,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 늘 신중하고 조심을 기했다. 그건 본능적인 것 중에 하나였다. 경험은 가끔은 예민하게 사람을 만들기도 했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 알림판이 되기도 했다. 앞에 서 있던 차 하나가 보조선을 넘어오는 순간 위험을 직감한 건, 그 경험 때문이었다.

“차번호를 기억합니다.”

“네?”

“교통사고였잖아요. 뺑소니.”

의사가 그제야 김신을 보고 한숨을 몰아쉬었다.

“정신을 잃었었어요. 다행히 찰과상 이외는 뇌출혈의 흔적은 없는 것 같고, 혈압이나 심박 모두 정상입니다. 그러나 예후가 중요하니 몇 가지 검사를 받으셔야 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오후 세 시쯤 됐습니다.”

의사가 그제야 김신에게 시간을 알려주었다. 열두 시가 조금 넘어 나왔으니 정신을 오래 잃었던 모양이었다. 바지를 뒤졌는데 핸드폰이 나오지 않았다. 두리번거리자 옆에 간호사가 소지품을 가져다주며 말을 이었다.

“보호자가 주변에 없어서 핸드폰으로 지인에게 연락했어요.”

“…네?”

김신이 간호사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누구에게….”

“아, 저기 돌아오시네요.”

순간 손목이 덜컥 잡혀, 돌아보니 창백한 얼굴의 우진이 있었다. 잡힌 손이 너무 차가워 김신이 눈을 크게 뜨자, 우진이 입술을 깨물고는 어깨에 부들거리는 손을 내려다 놨다. 길고 가는 손가락이 파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직장 동료시라면서요? 소지품은 이분에게 맡겼는데-”

“아… 네.”

간호사의 말보다 눈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먼저 들어와 김신은 입술을 물었다. 손을 잡지 못해서 당황하고 있는 와중에, 간호사가 나가고 응급실 커튼이 닫히자 우진이 먼저 무릎을 꺾었다. 그 와중에도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언제 왔어요?”

“….”

“회사는-”

순간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우진이 김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는데, 그때까지도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어서 김신은 손을 들어 어깨를 감쌌다.

“…대리님.”

“….”

어깨가 급하게 젖어 들었다. 우진이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우는 걸 보고 있자 김신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김신이 먼저 말을 건넸다.

“많이 안 다쳤대요. 찰과상만 있고, 차를 먼저 봤어요. 잘 피하기도 했고-”

“….”

“듣고 있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우진이 뜨겁게 몇 번 숨을 토했다.

“…어디 멀리 가지 마.”

“….”

“나도 안 갈게.”

숨을 불규칙적으로 쉬며, 우진이 힘겹게 진심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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