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달과 그림자
“이거 너무 대놓고 꼬시는 거 아닌가.”
김신은 거실 밖으로 크게 나 있는 발코니 창을 열어보고는 우진에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진은 소파에 누워 천장을 보다가,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 방향으로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김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벗은 상박이 햇빛에 매끄럽게 빛났다. 노을이 길게 지는 방향으로 서 있어 김신의 표정이 자세히 보이질 않았다. 우진은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김신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목을 길게 뻗었다.
“이렇게 큰 발코니에, 고급스러운 실내풀이 있을 줄 몰랐네요.”
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벗어놓은 스웨터를 들어 올리는 김신의 손목을 잡아챘다. ‘설마, 또 하자고요?’하고 웃는 김신의 뺨에 잠시 손을 가져다 댔다가 우진은 숨을 몰아쉬었다.
“힘이 안 들어가.”
“칭찬이죠?”
“아직도 수영, 전혀 못 해?”
우진은 아주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이 리조트에 들린 적이 있었다. 일본풍으로 제법 고급스럽게 지어진 리조트는 바닷가를 근처에 두고 있었지만 습하지 않게 관리한 덕에 십여 년 전과 거의 비슷한 외관을 하고 있었다. 긴 산책로와 숲길, 바닷가가 잘 어우러진 리조트의 가장 위층 숙소는 방마다 제법 큰 실내풀을 갖추고 있었다. 아주 큰 수영장은 아니었지만 제법 깊은 덕에 물을 받으려면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모르겠어요.”
“….”
“밤에는 들어가볼까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는 김신에게 우진이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나 스웨터를 건네주었다. 그제야 그가 돌아보고는 눈을 마주쳤다. 이해할 수 없는 상처들이 순간적으로 얼굴 표면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마도 평생 알아들을 수 없는 감정일 것이라고 우진은 어림짐작했다. 그의 가슴 아래 길게 뻗어 있는 상처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아주 매끄러운 피부였다. 상처가 난 부분만 조금 붉고 흰 색채를 갖고 있었는데 손으로 만지면, 피부결이 손을 따라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김신이 간지럽다는 듯 눈을 접어 웃었다. 우진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수영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어?”
아주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만 몇 번씩을 되내었던 질문을 입 밖으로 끄집어냈을 때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아, 우진은 좀 더 일찍 물어볼걸 하고 후회했다. 매우 긴 시간 동안 이 질문은 우진을 괴롭혔었다. 김신은 스웨터를 입고는 우진의 옆에 와 털썩 앉았다. 노을이 길게 져서 발코니에는 오렌지빛 하늘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른한 얼굴의 김신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고는 창밖을 오래 바라봤다.
“사실, 잘 기억이 안나요.”
“….”
“당시에는 엄청 억울했겠죠. 왜 난 사고를 당했을까.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괴로웠던 거 같기도 한데.”
“….”
“그런데 참 우습게도, 가끔 끔찍한 느낌이 들었다는 기억만 나요.”
고개를 뒤로 젖히며 김신은 미소 지었다. 평온한 얼굴이 거짓 없이 빛났다. 우진이 손을 들어 올리자, 김신이 천천히 우진의 어깨에 기댔다.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큰 사람이 자신에게 온전히 기대어 체온을 나누는 건 묘한 기분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뿌듯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또 다르게 그를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우진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의지하듯 몸을 좀 더 기대오자 이제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조금 무겁고, 따듯한 경험이었다. 김신이 우진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흐흥, 하고 웃었다.
“위로하는 건가.”
“아니야.”
“그럼요?”
“…사랑하는 거.”
머뭇거리듯 우진이 답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이 사람을 힘껏 사랑하는 일이었다. 김신은 말없이 오랫동안 우진의 어깨에 자신을 기대고 있었다. 품속을 더 파고들기에, 더 세게 껴안았더니, 김신이 몸을 묻고는 숨을 고르게 쉬었다.
“뭔가, 엄청나게 슬프고.”
“….”
“행복한 느낌이 들어요.”
그걸 듣고 있는 우진도 행복과 슬픔이 전염되어 노을처럼 천천히 무너지는 기분에 눈을 감았다. 아주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차곡차곡 햇볕처럼 쌓였다. 그건, 행복과 슬픔, 처음 맞이하는 사랑의 기억으로 범벅된 감각이었다.
***
시우는 퇴근하다 말고, 회사 앞에 정차된 차 안에서 기겁할 만한 인물을 발견했다. 날씨가 추워져 길목 곳곳에는 얼음이 끼어 있었는 데다, 휘잉, 하고 바람 우는 소리가 제법 거센 금요일 밤이었다. 까만색 세단의 운전석 창문이 찬찬히 내려오더니, 시우의 놀란 눈과 시선을 마주한 지훈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예의 바르지만 어딘가 삐뚤어진 얼굴을 한 지훈에게 시우는 당장 가운데 손가락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가 푸하하, 하고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뭐야. 귀엽게.”
“…너 그런 캐릭터 아니었던 거 같은데.”
“어쭈. 어디서 반말이야.”
“무슨 상관이람. 피차 반말하는 주제에.”
시우는 그렇게 말하며 지훈에게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차가 천천히 시우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오늘 시우는 이태원이나 상수 근처의 바에서 느긋하게 술을 마실 예정이었다. 내일부터 주말 시작이라, 오늘따라 유난히 한적한 도로변을 따라 누가 봐도 수상하게 따라 붙는 차를 시우는 걷다 말고 뒤돌아 째려보았다. 이윽고 시우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지만 지훈은 끈질긴 편이었다. 한숨을 쉬며 길 한복판에 멈춰 서자, 지훈의 차가 시우의 옆으로 천천히 정차했다. 똑똑, 하고 창문을 두드리니 그가 창을 내렸다.
“너 지금 웃냐?”
지훈의 입꼬리가 올라간 걸 보자 시우는 배알이 꼴려 견딜 수 없었다. 예의 바른 얼굴 어딘가 또라이 기질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시우는 한숨을 쉬고 목에 하고 있던 목도리를 타이트하게 당기고선 입을 열었다.
“너 시간 많냐.”
“아니.”
“너 이러다가 경찰한테 잡혀가.”
“신고 안 하면 되잖아.”
“…신고할 건데.”
“안 할 거 알아.”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처음이라 어이가 없기도 했고, 처음 자신이 먼저 다가간 탓도 있는 터라 시우는 팔짱을 끼고는 발로 멈춰 선 바퀴를 몇 번 찼다. 그러자 지훈이 문을 열고는 차에서 내렸다. 시우가 자신도 모르게 방어적인 자세로 뒷걸음질 치자 지훈이 웃었다.
“너 설마 내가 무서워?”
“하루에 전화 20통씩 하는 사람이 그럼 안 무섭니?”
“네가 먼저 꼬셨잖아.”
“간만 봤다. 새끼야.”
“간은 왜 봤어?”
그렇게 말하며 손목을 붙잡는 지훈이 훅, 하고 시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코끝에서 짙은 샤워코롱의 향이 풍겼다. 풀을 짓이긴 향이었다. 낯설고 거친 향기 때문에 긴장한 몸이 뻣뻣해지자, 지훈이 잡았던 손목을 살짝 풀었다.
“잡아먹는 거 아니다.”
“그럼 왜 그렇게 집착해?”
집착이라는 단어는 자신도 모르게 나온 것이었다. 지난번 우진에게 전화를 떠넘겼을 때도, 끈질기게 집착하는 타입이라고 무심결에 생각했었다. 강지훈은 묘하게 사람을 끄는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디 한 군데가 고장 난 사람 같았다. 시우는 대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훈을 쳐다보다 결국,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그 순간이었다. 지훈이 우진의 손목을 잡아챘다.
“…이상하게 내가 눈독 들인 건 무섭게 도망을 가버려서.”
비집고 나온 진심은, 그만큼의 무게를 갖고 있었다. 무시하고 돌아서려던 시우가 그 말에 다시 지훈을 돌아보자, 그가 묘하게 시선을 피했다. 아마도 자기도 모르게 말이 나온 모양이었다. 당황한 탓에 지훈이 잡고 있던 시우의 손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시우는 지훈이 쥐었던 그 모양대로, 발간 자국이 난 자신의 손목을 보고 있다가 입술을 물었다. 바닥에 쌓인 눈 그림자가 파랗게 빛났다.
“너 나 좋아하니?”
정차해둔 차의 비상등이 깜빡깜빡했다. 그때마다 주변이 밝아졌다 흐려졌다를 반복했다. 감정들도 그랬다. 명확했다가, 모르겠다가, 또 알 것 같기도 한 것이 사람을 향한 마음이었다. 미움이었는지, 혹은 사랑이었는지. 어쩌면 집착이었는지도 몰랐다.
“뭐?”
“아니면 무슨 확신으로 이렇게 따라다니는 건데?”
“….”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날 귀찮게 해?”
“너, 나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었어?”
너무 의외의 답이라, 시우는 말문이 막혔다. 화가 난 듯하면서도 어딘가 풀이 죽어 있는 목소리라 시우는 갑자기 맥이 탁 하고 풀렸다. 자신만만한 또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아서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외면하는 지훈의 턱을 손으로 잡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놀란 듯 뒷걸음질 쳤다. 애정을 달라고 갈구하는 눈빛과는 달리 실제로 만지면 도망가는 타입인 모양이라, 왠지 모르게 주완이가 키우던 고양이 달이 생각났다. 달은 은빛으로 된 샴 고양이었다. 달은, 파양당했다가 다시 입양된 기억으로 처음에는 무척이나 사납게 굴어 주완의 손에 빨간 생채기를 내곤 했다.
“관심이야 있었다가도 사라지는 거잖아. 확신은 아주 오랫동안 지켜봐야 하는 거고.”
“그럼 사라졌어?”
“너 지금 되게 애기 같아.”
시우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 주변에서 되게 평판 안 좋은 거 알아?”
“….”
“차 문이나 열어봐. 나, 가고 싶은 데 있어.”
“…뭐?”
지훈이 코트 깃을 여미는 시우를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시우는 말없이 손을 들어 지훈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문 열어, 어서’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쳐다본 지훈의 얼굴이 말도 못 할 정도로 굳어 있어 시우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러자 지훈이 입을 열었다.
“마음이 바뀌었어?”
“묻지 마 그런 거.”
열린 문 사이로 들어선 시우가 조수석에 몸을 묻으며 답했다.
“그런 거 물을 시간에, 어디 가고 싶냐고 물어야 하는 거야. 이 바보야.”
시우는 그렇게 말하는 자신을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지훈의 이마에 몇 가닥 내려온 머리칼을 한참 바라보았다. 상처가 많은 주완의 고양이 생각이 부쩍 나서, 손가락으로 이마를 쓸어주자 지훈이 당황한 눈빛을 했다. 확실히 개 과는 아니고, 고양이 과였다. 살짝 갸름해지는 눈매가 딱 그랬다.
“설레지?”
“…미쳤어?”
“설레나 보네. 술이나 마시러 가자. 처음엔 친구로 시작해보자고.”
시우는 환하게 웃으며 지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꼭 자신의 눈에 띄는 건 운명인가 보다라고, 차의 시동을 켜는 지훈을 보며 시우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
김신은 잠을 자다 말고, 옆을 더듬어보고선 천천히 눈을 떴다. 꽤나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우진과 함께 가장 쉽다는 봉골레를 만들고, 샐러드를 나눠 먹은 후 영화를 한 편 봤다. 거실에는 70인치의 벽걸이 텔레비전이 걸려 있었는데, 우진은 커피를 내리고는 김신과 함께 소파에서 IP TV 채널을 돌리다가 마음에 드는 영화를 결제했다. 그리고 어렴풋이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일어나 보니 옆에서 잠들었던 우진이 사라져, 김신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주변에 체온이 없으면, 추위를 금방 느꼈다. 무섭도록 빠른 적응력이었다. 외로움은 늘, 친밀감과는 달리 빠르게 흡수되고 강하게 자신의 감각을 눌러왔다. 아마도, 우진은 더할 것이라고 김신은 무심코 생각했다.
“….”
거실 밖으로 나오자 후끈한 바닥이 발 표면에 달라붙었다. ‘감기에 한번 걸리면 되게 오래가더라고요’라고 말한 김신의 말을 오래 기억하고 있는 우진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발코니 창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눈이 부셔 미간을 찌푸리다가, 다가가 문을 열었더니 뜨거운 수증기가 후욱 하고 김신의 얼굴에 끼쳐 들었다. 갑자기 두려운 감각이 들어 급하게 문을 열자, 발코니가 안개로 가득했다. 순간 김신은 기시감이 들어 눈을 비볐다. 심장박동수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새벽, 수영장, 그리고,
“일어났어?”
우진,
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