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 주임과 최 대리-41화 (41/60)

41화. 겨울 휴가

우진은 자신의 집 앞에 조용히 주차돼 있는 블랙의 세단을 창밖 너머로 지켜보고는 블라인드를 다시 내렸다. 앞머리가 물고기처럼 둥글고 매끄러운 자동차는 어릴 적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과 비슷하게 생긴 것도 같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6시였다. 우진은 거실에 놓아둔 캐리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선 냉장고로 걸어가 생수병을 꺼냈다. 냉장고 안은 예전과는 달리 알록달록한 색으로 가득했는데, 그건 오롯이 김신 덕분이었다. 무심코 우진은 아래 칸을 내려다보다가 사과를 하나 꺼냈다. 세척이 되어 있는 사과를 한입 바로 베어 물자 시큼함과 동시에 턱 아래가 아릴 정도로 단맛이 강하게 났다.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네.”

김신은 일곱 시에 우진을 데리러 집으로 오겠다고 했다. 예약해둔 리조트는 11시부터 체크인이 가능했다. 국외로 가볼까도 생각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여권은 강지훈이 가지고 있었다. 어제 점심은 김신과 함께 먹질 못했다. 점심시간마다 우진은 호텔 커피숍에 가서 앉아 있어야했다.

“안 가나.”

블라인드 사이를 손가락으로 약간 벌려보고는, 우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예정일까. 새벽에 잠깐 일어났을 때가 두 시였으니, 그때부터 계속 집 앞에 서 있는 상태였다. 우진은 입을 삐죽이고는 블라인드 체인을 몇 번 잡아당겼다. 김신이 오기 전까지 저 차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주일 내내 우진은 점심과 저녁 모두 김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기 때문에, 얼른 만나고 싶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언제 오냐고 물어볼까.’

우진은 요즘 자주 자신이 먼저 메시지를 보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김신이 귀찮아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시 침실로 들어가 누워 눈을 감았다. 월차도 먼저 내자고 졸랐고, 리조트도 자신이 먼저 예약해버려서 김신의 취향이나 의중은 물어볼 새도 없었다. 일주일 내내 김신과 보내지 못한 덕분에 욕구불만에 시달릴 줄은 몰랐던 터라 우진은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금방 갈색으로 변하는 사과의 속살을 보고 있다가 손목을 이마에 올렸다.

‘…보고 싶다.’

요즘 들어 우진은 김신을 더 자주 보고 싶었다. 만지고 싶은 마음은 더 컸다.

어렸을 때 사진을 보여 달라고 했더니 여행가는 날 들고 온다고 약속했다. 우진은 김신에게 부탁해 그걸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무언가를 갖고 싶다거나, 그걸 요구해보는 일이 처음이라 기분이 들떴다. 처음이 어려웠을 뿐, 한 번 시작하니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상대방은 그 요구를 들어주면서 받는 자신보다 더 기쁜 얼굴을 했다. 알고 보니, 그 얼굴을 보고 싶어서 이러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우진은 뺨을 조금 붉혔다.

‘이렇게 까지 좋아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집착이라는 것과 애착은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고 배웠다. 그 감각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우진으로서는 이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잠을 조금 설쳤는데, 머리가 맑았다. 눈을 감자, 머릿속에서 테이블 위에 있던 여자들의 사진이 펼쳐졌다. 10명이었는데, 벌써 다섯 명을 만났다. 다섯 명을 더 만나면 끝난다. 10명 모두에게 거절할 생각이었고, 다섯 명 중에 두 명은 우진에게 먼저 거절 의사를 밝혔다. 우진은 심지어 상대방의 이름도 외우지 못했고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면서 김신과 메시지를 나눴다. 예의가 없다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간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선택적 청각반응이랬나.’

윤일은 그게 심각한 사람이 있긴 하지만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했다. 갑자기 소음이 많이 쏟아지더라도,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들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특별한 음성에만 반응할 수 있고 심지어 단독으로 마주한 사람에게 집중하더라도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우진은 머리를 왼쪽으로 누이고는 김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김신의 목소리는 낮았다. 웃으면 목울대가 아래위로 울렁거렸는데, 그때마다 자신의 어딘가도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혈관에서 피가 도는 게 하나하나 느껴질 정도였다.

‘올려다보면 어떤 표정이더라.’

침대에 누워 있으니 김신이 자신의 집에서 처음으로 자고 갔던 날이 떠올랐다. 김신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로 우진의 침대에서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떠서 일어나 보니, 엎드린 채로 우진을 보고 있었다. 우진은 몇 번 눈을 깜빡이자, 김신이 큰 손을 들어 우진의 눈을 가렸다. 부끄러워요, 라고 말하는 김신의 손이, 닿았던 살갗이 너무 뜨거워서 우진은 숨이 잘 안 쉬어졌다. 넓은 어깨가 매끄러워서 자신도 모르게 손을 거둬내고 품에 파고들자, 뜨겁게 몰아치는 상대방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때 고개를 들어 김신의 얼굴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입술을 깨물고 있던 김신이 시선을 마주했다. 까만 눈동자가 푸르렀다.

“….”

더 생각하다간 도저히 안 될 거 같아 우진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늘 성적으로 담백하다고 생각하던 타입이었는데 요즘은 열이 잦은 주기로 올랐다. 그 순간 진동음이 들려, 우진은 협탁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을 가져와 메시지 창을 열었다.

-언제 준비 끝나요?

이게 한순간의 감정인지, 영원히 지속될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정도로, 순간의 감정이 찰랑찰랑 차올랐다. 우진은 눈가를 문지르고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미 끝났는데

-뭐야, 깨어 있었어요?

-응

-뭐 하고 있어요?

-기다리고 있어

-누구?

확인받고 싶어 하는 김신이 집요해 보여 우진은 웃음부터 났다.

-누굴까

그렇게 보내자 한동안 답이 없었다. 아직 도착하려면 30분이나 남아서, 우진은 또 마음이 휑해졌다.

-문 열어줘요.

메시지가 도착한 순간 우진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직 일곱 시가 되려면 멀었는데, 심장이 쿵쾅쿵쾅해서 발이 서로 엇갈렸다. 넘어지지 않으려 천천히 거실을 가로질렀다. 우진은 현관 앞에 서서 몇 번 숨을 몰아쉬었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잠금장치를 열고 문을 열자, 아이보리 목폴라를 끌어 올려 입을 가리고 하얗게 웃는 김신이 보였다. 그가 가만히 서 있는 우진을 향해 먼저 물었다.

“많이 기다렸어요?”

손을 뻗기 전에 숨을 몰아쉬고 그를 감상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김신이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웃으니 눈이 접히면서 소년처럼 변했다. 그가 우진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잠이 안 오더라고. 처음 여행 가는 것도 아닌데.”

“….”

“얼른 챙겨서 나와요.”

김신이 큰 손을 뻗어 머리를 헝클이고는 말갛게 웃었다. 색채가 바닥으로 쏟아져 모든 사물이 환하게 빛났다.

“이쁘네. 오늘도.”

그렇게 말하며 목덜미에 코를 묻는, 그에게서 겨울 냄새와 따듯한 체향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우진은 좀 더 닿고 싶어 까치발을 하고 귓가에 묻은 입술을 가까스로 열어 말을 이었다.

“얌전히 기다렸어.”

“…알아요.”

우진이 아주 오랫동안 기다린 걸, 김신이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두 분이신가요?”

프론트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캐리어를 올려놓은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신은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우진을 쳐다봤지만 그는 아무런 표정 없이 카드키를 받아 들고 있었다. 깨끗한 유니폼을 단정하게 입은 여자직원이 김신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다른 투숙객 리스트를 살펴보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의심을 산 모양인데, 정작 우진은 아무렇지 않게 정면을 보고 서 있었다.

“혹시 다른 투숙객은 없으세요?”

“없습니다.”

“더 오실 분이 있으시다든가.”

“없습니다.”

자신의 연인인, 최우진은 자신의 바운더리에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에 대한 반응이 철저하게 달랐다. 김신은 프론트 옆에 약간 비스듬하게 서 있다가 우진이 딱딱한 표정으로 직원을 쳐다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는 걸 보며 조그맣게 웃었다. 우진은 철저한 개인주의자이자, 합리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옆에서 지켜본 우진은 적어도, 차고 넘치는 걸 싫어했다. 딱 적당히 조금 모자란 듯하게 살아갔다. 애정을 주는 것도 그랬었다.

“객실은 제가 열어드리겠-”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우진은 캐리어를 다시 끌고는 돌아섰다. 김신이 옆에 서 있다가 굽혔던 허리를 펴며 따라오자, 우진은 말없이 김신의 팔 끝을 잡았다.

“멋있는데요?”

“어디가?”

“‘필요 없습니다’ 라니. 새삼 반하겠어.”

김신은 그렇게 말하며 우진의 콧등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간지러운 듯 고개를 외로 꼬는 걸 보자 심장이 욱씬했다. 목덜미가 또 붉어져 있기에, 김신은 손을 모아 입에 가져다 대고는 혼자 웃었다. 엘리베이터는 로비를 돌아 나가자마자 있었다. 리조트는 제법 크고 화려했다. 회원제로 이루어지는 곳이라 와볼 생각을 못 했었는데,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다섯 대나 설치되어 있었다.

“동마다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네요.”

“나도 잘 몰라.”

그렇게 말은 했지만, 익숙한 듯 엘리베이터를 타는 우진을 보자 김신은 그제야 이 사람이 자신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왔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우진은 오늘 라벤더 색의 옅은 니트를 입고 있었다. 그레이의 패딩은 후드 부분만 푸른색의 털이 풍성하게 달려 있었는데, 앞머리를 내리고 있어서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얼굴이었다. 정말, 나이를 잘 안 먹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변할까 궁금해지는 얼굴이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에 도달할 때까지 빤히 쳐다봤더니 우진이 손을 들어 김신의 뺨을 밀었다.

“왜요?”

“….”

우진이 묻는 말에 답을 안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휑하니 내리기에 김신이 쫓아갔지만, 그가 방 앞에 서서 카드키를 대고는 문을 열고 혼자 들어가자마자 다시 닫으려고 했다.

“뭐예요, 안 들여보내 줄 거예요?”

“…응.”

“왜요?”

“…좀 이따 들어와.”

“뭐예요. 문 열어요.”

김신이 문 사이로 캐리어를 들이밀자, 우진이 한숨을 쉬며 문을 반쯤 열었다. 김신이 놀란 얼굴로 우진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런 장난은 누구한테 배웠습니까?”

“장난 아닙니다. 김신 주임님.”

“왜 그렇게 불러요?”

“거리 두는 겁니다.”

“왜요?”

“몰라요.”

농담을 하는 건가 싶어, 한참을 바라보자 우진이 또 캐리어를 들고는 객실 안으로 빠르게 걸어 들어갔다. 자신을 피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김신이 허, 하고 한숨을 몰아쉬자, 우진이 돌아보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거리는 왜 둬요?”

따라가서 어깨를 붙잡았더니 우진이 김신의 팔을 털어냈다. 감정의 변화가 자주 있는 타입이 아니라서 허리를 굽혀 우진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가 얕게 떨었다. 어디 아픈가, 싶어 손을 들어 뺨을 감싸 안았더니 우진이 손을 들어 김신의 목을 짚었다.

“왜 그래요? 내가 뭐 잘못했어요?”

“아니.”

“그럼 왜 나랑 떨어지려고 해요.”

“…나 좀 이상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김신은 길고 연약한 우진의 목덜미가 붉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숨을 몰아쉬다가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우진의 손가락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아, 그제야 눈을 마주하자 눈꺼풀 아래가 약간 붉었다.

“설마….”

“….”

“흥분했어요?”

미쳐, 김신은 입술을 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오래 안 보기도 했-”

발정 난 것처럼 굴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이 합리적이고 냉철한 개인주의자는 모를 것이다.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마주했더니 손에 쥐고 있던 캐리어의 손잡이가 툭, 하고 떨어졌다. 혀를 섞어내며 숨을 몰아쉬자 뒷걸음질 쳤다. 우진의 허리를 붙잡자 김신의 품에 절로 안겨들었다. 건조하고 메마른 김신의 손에 우진은 축축하게 달라붙었다. 떼어내기 싫어 거실 안으로 몰아가며 쇼파로 밀어내자, 천천히 무릎을 꺾어냈다. 귓가를 핥고 목에 잘게 입맞춤하며 니트 안으로 손을 밀어 넣자 차가운 듯 몸을 떨었다. 그래도 몸을 더 붙이며 허리를 움직이길래 귀여워서 웃었더니 우진이 입술을 떼어내고 몽롱한 얼굴로 물었다.

“나 귀찮지 않아?”

“또 이상한 소리를 하네.”

“….”

“이 정도가 귀찮으면 어쩌자는 거야.”

그러고 보니 객실이 끝도 없이 넓었다. 입술을 치아로 몇 번 깨물자 흥분한 듯 몸을 뒤틀길래,

몸을 좀 떨어트리고는 우진을 감상했다. 먹으로 그리면 이런 느낌인가. 옅은 선이 다시 굵어지는 곳이 있었는데, 눈이 그랬고, 입술이 그랬다.

“자주 이랬으면 좋겠어.”

“….”

“전 우진 씨가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변태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웃었더니 우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좋다는 뜻이라는 걸, 김신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만 같았다. 꿈처럼, 젖어 드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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