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 주임과 최 대리-40화 (40/60)

40화. 휴/공가 신청서

김신이 잠에서 깬 건, 한밤중이었다. 자신의 집은 침대에서 내려다보면 한눈에 모든 것이 들어오는 공간이었다. 큰 창이 하나 있고, 블라인드를 내리면 사방이 암흑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단체생활을 했던 터라 김신은 혼란스러운 걸 극도로 싫어했다. 독립하게 되면 집은 필요한 것들로만 채울 생각이었다. 스튜디오 타입의 오피스텔을 고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새벽에 잠이 깬 건 오랜만이라, 몸을 뒤척이며 일어나려는데 자신의 트레이닝복을 붙잡고 있는 희미한 색의 손가락을 보았다.

“….”

설마, 하고 눈을 몇 번 깜빡이다 다시 떴다. 요즘엔 꿈을 꾸지 않고 한번 잠이 들면 아침까지 깨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내려다본 침대 위에는 분명 우진이 몸을 둥글게 말고 누워 있었다. 김신이 언젠가 사다놓은 파자마 세트를 입은 채로. 우진은 강박적인 부분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항상 집에 돌아가 잠을 자려고 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 최우진이, 지금 퇴근을 하고 자신의 옆에 잠들어 있었다. 김신이 손가락 끝을 살짝 쓰다듬자, 우진이 으응, 하고 얕은 잠투정을 했다.

“쉬….”

자기도 모르게 아기들에게 하듯 우진의 등허리를 쓰다듬자 그가 눈을 천천히 떴다. 재우려고 했던 거였는데, 오히려 잠을 깨려고 눈을 재차 뜨는 우진을 김신은 가만히 내려다봤다. 신기한 사람이었다. 모든 인연이 돌아돌아, 자신에게 다시 다가왔을 때,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큰일 날 뻔했다고 김신은 진심으로 생각하는 중이었다. 우진이 손을 뻗어 김신의 손목을 붙잡았다. 지금 보니 늘 차고 있던 시계도 풀어놓은 상태였다. 상처가 선명하게 눈에 박혀, 김신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우진의 이마에 입술을 문질렀다.

“…놀랐어?”

“그러게요. 온다는 말 없었잖아.”

“…얼굴 보고 싶어서.”

두 손을 김신에게 뻗길래 고개를 숙이자 목을 감았다. 잠에서 방금 깬 사람의 짙은 체향이 코끝에서 오래 머물렀다. 좋은 향기였다. 이 온기가 좋아서 김신은 또 목덜미에 콧등을 대고 문질렀다. 숨을 크게 몰아쉬자 우진이 잔뜩 몸을 웅크렸다. 아마도 간지러워서 그러는 듯 했다. 귀여워서 입술을 당겨 웃었더니, 우진이 멀리 고개를 떨어트리고는 한동안 바라봤다.

“잘생겼어.”

“…네?”

“너 말이야.”

“잠꼬대하는 거예요?”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진은 황당해하는 김신의 콧등을 손가락으로 그리듯이 미끄러트리고는 웃었다. 그 모습이 먹으로 그린듯이 아름다워, 김신은 순간 넋을 놓았다.

“잠옷 내 마음대로 꺼내 입었는데.”

“우진 씨 꺼라 괜찮아요.”

“그럴 것 같았어.”

“사두길 잘했네요.”

“나, 갈아입을 옷도 가져왔어.”

소파 위에 놓여 있는 쇼핑백을 가리키며 우진이 말했다. 칭찬해달라는 눈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김신은 눈을 접으며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가늘고 옅은 머리칼이 손가락에 가닥가닥 달라붙었다. 그러자 천천히 눈을 감고 우진이 김신의 손아래에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

사랑스럽다, 는 생각을 했다. 극적으로 만나 서로의 아픈 곳을 우연히 목도하지 않았더라도, 이 사람이 자기가 다니는 회사의 그렇고 그런 아드님이 아니더라도, 아니, 실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김신은 그 희고 창백한 목덜미를 손으로 만져보고 싶었었다. 김신은 그 순간 마음이 몽글거렸다.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별로 없던 터라, 김신은 심장 아래 근육이 죄인다는 기분이 먼저 들었다. 어릴 때 처음으로 아프다는 핑계로 조퇴를 하고선 한적한 골목길을 혼자 몰래 걸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사람은 없고, 바람은 사근하고, 햇살은 따스했다. 온전히 그 공간에 자신만 남은 기분이었다. 그게 외롭거나 아프지 않고, 그저 평온하기만 해서 순간적으로 영혼이 붕 떠오르는 것 같은.

“사랑해요.”

그 말을 뱉어냈을 때, 눈을 감았던 우진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김신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침묵하고 있는 그 눈을 바라보며, 아마 이 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김신은 직감했다. 많은 시간이 흐르더라도 이 감각이나 감정, 심장의 두근거림이나 열기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자주 느끼는 것 중 하나였다. 흘러간 그 순간의 감정은, 찰나의 색이었다. 그 색은 두 번 다시 똑같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감정의 색을, 김신은 우진과 함께 섞어내었다. 같은 감정의 빛깔이 우진에게는 쏟아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김신은 후회하지 않았다.

“….”

우진은 대답 대신, 새벽빛처럼 웃었다. 김신이 손을 뻗어 가슴에 우진을 안았다. 손이 얽히고, 따듯한 체온이 서로를 마주했다. 조용히 잠이 들 때까지, 서로의 숨소리를 확인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이날 월차를 내려고.

김신은 오전부터 내년에 있을 조직개편 회의로 인해 업무에 시달렸다. 머릿속은 전날보다 좀 더 복잡했는데, 그건 아마도 이준과의 점심 식사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이준은 점심 식사 동안 철저하게 회사 이야기만 했다. 김신도 더 이상 우진의 상황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날 돌아와서 혼자 잠이 들었을 때, 눈을 뜨고 난 뒤 우진이 옆에 있다는 사실로 만족했다.

그리고, 고백했다.

‘한 달.’

한 달은 훌쩍 넘겼다. 한 달만 만나자고 했던 말이 무색하게 시간은 빨리 흘렀다. 아직 데이트도 몇 번 해보지 못했고, 서로에 대해 알아볼 시간도 없었다. 고등학교 때 자신을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어디가 어떻게 좋았는지 물어보지 못했고, 서로 만나지 못한 시간 동안 독일에서 뭘 하고 지냈는지도 궁금했다. 심지어, 회사에서 자신을 처음 봤을 때 어땠냐고도 물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병실에 찾아온 사람이 우진, 당신이 맞았냐고 물어야만 했다. 그때, 왜 울고 있었는지, 아니, 이제는 아무 상관없이 그냥 우진이 좋으니 계속 만나자고,

아마도 이 마음이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으니 오래 만나자고 말해야만 했다.

‘메시지가 왔었지.’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김신은 지끈거리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짚으며 드디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다른 팀의 회의실을 전전하며 미친 듯이 메일을 확인하고 인사 TF 업무를 정리하다가, 메시지 창을 열었다. 우진은 오늘 점심 약속이 있다고 했었다. 혹시나 취소되어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몰라 급하게 홍보팀 밖 정책실 자리를 둘러보니 이미 소등된 뒤였다. 후, 하고 숨을 뱉어내며 김신은 그제야 우진으로부터 도착한 메시지를 읽었다.

“월차?”

휴가를 내겠다는 이야기였다. 당장 이번 주 금요일이었다. 김신이 ‘왜요?’라고 메시지를 보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휴가, 너도 내면 안 될까.

김신은 갑자기 헛웃음이 났다. 설마, 지금 같이 여행이라도….

-여행 가고 싶은데.

이런 연애의 정석을 봤나. 오전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두통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 들어 김신은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 몸을 눕히고 한참 천장을 보며 웃었다. 느슨하게 넥타이를 풀어내며 김신은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보냈다.

-팀장님한테 물어봐야 하는데.

일부러 튕겼더니 우진은 한참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김신은 팀장에게 이번 주 금요일 월차를 쓸 수 있는지 문의하는 메일을 보내고선 천천히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점심은 먹어야 할 거 같아 메뉴를 생각하고 있는데 재킷 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이미 예약했는데.

뭘 예약했는지, 목적어가 없는 그 메시지에 김신은 웃음부터 났다. 왠지 웃음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아 손을 올려 입을 가렸는데, 반대편 복도에서 걸어오던 연우가 김신을 알아보고는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혼자 뭐 해요.”

“아.”

연우는 한참 김신을 보고 있다가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아무래도 미심쩍다는 연우의 표정에 김신은 얼른 재킷 안에 핸드폰을 밀어 넣었다.

“점심 먹었어?”

“아뇨. 이제 나가려고요.”

“같이 먹을 사람은 있고?”

“뭐 혼자 먹는 게 한두 번인가.”

“그럼 나랑 먹자. 밥 사줄게.”

김신은 그렇게 말하며 연우의 옆에 서서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연우가 희미하게 웃더니 김신의 보폭을 맞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웬일이에요? 먼저 밥 먹자고 그러고.”

“그냥 기분 좋아서.”

“인사 TF 때문에 엄청 바쁘지 않아요?”

“뭐 바쁜 건, 바쁜 거고.”

김신은 감정에 솔직한 타입이었는데, 남들에게는 자신이 느끼는 것 보다 훨씬 더 드러나 보이는 모양이었다. 연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김신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오빠 연애하죠?”

“응?”

“맞네. 얼굴이 그런데?”

그렇게 말하며 연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김신이 다시 연우를 바라보고는 ‘그렇게 티 나?’하고 물었다.

“엄청 티 나요. 세상에. 오빠 의외네요.”

“어디가?”

“오빠 약간 바람둥이 같잖아요.”

“뭐?”

놀란 눈을 하자, 연우가 로비를 걸어나가며 눈을 키웠다.

“모르는 척하지 마요.”

“무슨.”

“오빠 엄청 능글맞잖아. 스킨십도 잘하고.”

“너 막말 잘한다?”

“거기다 잘 웃어주고.”

“사람이 좋다는 거야. 그건.”

“여지가 늘 있었던 거 같은데.”

아니라고는 말을 못 했다. 김신은 여자들이 좋아하는 행동을 잘하는 편이었다. 정말 털끝도 의도적이지 않았다고는 못 하는 행동들이 있긴 있었다. 그로인해 주목받는 걸 즐기고, 관계가 형성될 듯 말 듯 한 순간들을 김신은 좋아하는 편이었었다. 그러고는 금방 흥미를 잃었다.

“근데, 요즘은 그런 게 전혀 안 보여요.”

“…그래?”

“막, 나 지금 엄청 누군가에게 몰두하고 있어, 라는 오오라가 풍겨요.”

연우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모아 눈에 갖다 댔다. 그게 귀여워 고개를 젖히고 웃었더니 연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근데 요즘 우진 대리님도 좀 그래.”

“어?”

화들짝 놀라서 리액션이 제법 커진 모양이었다. 연우가 회사 근처의 카페로 자연스럽게 김신을 이끌다가 갑자기 데시벨이 높아진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놀라요?”

“아, 그게….”

“하긴 최우진 대리님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 같다고 내가 말하고 다닌 적도 있었네. 그죠?”

“…어….”

그때 화를 냈던 자신도 기억이 났다.

“근데 요즘 좀 유해졌달까. 빈틈이 있어 보인달까.”

“….”

“심지어 멍을 때려요. 최우진 대리님.”

“…그게 신기해?”

“오빠가 최우진 대리님을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그분 시간을 허투루 쓰시는 분 아니란 말예요.”

자연스럽게 카페에 이끌려 온 김신은 혹시나 올라간 입꼬리를 들킬까봐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어머, 진짠데.”

“그렇구나.”

“거기다 가끔 웃으시더라니까요. 신기해라.”

“….”

“웃으니까 얼굴이 좀 달라 보이더라.”

“어떻게?”

“이전까지 몰랐는데, 우진 대리님 보조개 있어요. 그거 알아요?”

보조개만 있는 게 아니다. 입술 끝에는, 작은 점도 있었다. 가끔 그 위에 입을 맞추면, 우진은 신기하다는 듯 김신을 올려다봤다. 혀로 핥으면, 간지러운 듯 목을 움츠렸다.

“거기다 눈이 엄청 새까매요.”

그것도 김신이 좋아하는 우진의 부분이었다.

“얼굴도 잡티 없이 하얗고.”

“누가 보면 너, 우진 대리님 좋아하는 줄 알겠다.”

“그건 아니에요.”

“왜?”

“저보다 더 말라서 제 스타일 아니에요.”

“…뭐?”

“심지어 나보다 좀 예뻐 보일 때가 있어서 좌절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입을 삐죽이는 연우를 보고 있던 김신이 카드를 꺼내며 크게 웃었다.

“뭐 먹고 싶냐?”

“다 사주시게요?”

“당연하지.”

김신은 그렇게 말하며, 메뉴판을 보고 있는 연우의 뒤에서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더 이상 튕기면 안 될 것 같았다.

-여행 가요.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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