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계약연애 만료
새벽 네 시였다. 우진이 지훈에게 연락처를 알려주긴 했지만 이 시간대에 서로 통화를 할 만큼 친해졌는지 몰랐다. 잘못 걸었던 것 같아 돌아서려는데, 끈질기게 진동이 울렸다. 목 뒤로 소름이 돋아 무시하고 김신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때였다. 차가운 손 하나가 우진의 손목을 잡았다. 돌아보자 시우가 눈을 뜨고 우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가운데, 하얀 얼굴 하나가 천천히 일그러지고 있었다. 보랏빛의 색채가 점점 어두워졌다.
“대신 받아줘요.”
“….”
“한 번만 받아줘요.”
시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우진은 시우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묘했고, 이 상황에서 지훈의 전화를 자신이 받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지만 매몰차게 돌아설 수가 없었다. 결국 떨어져 있는 핸드폰을 들어 올려,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귀를 가져다 대자,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정시우
틀림없는 강지훈의 목소리였다.
-오늘 오라고 했잖아. 두 번이나 나를 물 먹일 셈이야?
“….”
강압적이고 싸늘한 말투였다. 이런 얼굴의 지훈을, 우진은 아주 조금 잊고 있었다.
-네가 먼저 꼬셔놓고 어딜 토껴. 개새끼.
“….”
-엎어두고 박을 테니까….
상스러운 목소리에 우진이 미간을 찌푸리자 시우가 손을 들어 전화를 꺼버렸다. 네 개의 눈동자가 서로 마주쳤다. 시우가 고마워요, 라고 낮게 중얼거렸다. 크게 한숨을 몰아쉬는 그를 보며, 우진이 입을 열었다.
“…사귀어요, 강지훈과?”
“아뇨.”
“그럼, 왜 지훈이랑….”
“섹스할까 했는데, 무서워서 도망쳤거든요.”
“….”
“그런데 되게 끔찍하게 집착하네요. 일주일 내내.”
시우가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걸 왜 나에게 말하죠?”
“왤까요.”
“….”
“강지훈 잘 알아요?”
시우는 자신과 지훈이 친척이라는 사실을 모를 터였다. 김신은 시우에게 자신과는 달리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지냈다. 그걸 알았을 때 피어오르던 묘한 승리감에 우진은 가끔 괴로움을 느꼈다. 집착의 감각이 생기는 건 우진에게 두려운 일이었다. 언젠가는 자신이 김신을 나락으로 이끄는 것은 아닐까, 혹시나 걱정하는 그 병이 자신을 조금씩 좀먹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김신을 망가트리게 되면.
“우진 씨.”
“아, 죄송해요.”
멍하니 김신을 생각하다, 시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우진이 시선을 돌렸다. 새벽빛에 시우의 얼굴이 새파랗게 빛났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김신은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떠올랐던 상념들을 지워버리고 우진은 다시 시우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회사 동기예요.”
“그렇군요.”
“신이에게 사귀던 사람이 있다고 들었어요.”
김신이 말하기로 시우는 셰프와 사귀고 있다고 했다. 헤어진 것 같다는 뉘앙스를 풍기긴 했는데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어서 지훈에게 시우의 전화번호를 넘기고는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그저 예전에 지훈을 만난 기억이 있다고만 들어서, 그러려니 했었다. 그러나 시우의 표정이 이상하게 구겨졌다. 그것이 울기 직전의 얼굴이라는 걸, 우진은 금방 알아차렸다.
“헤어졌어요.”
“….”
“거짓말을 했거든요.”
“….”
“거짓말이라기보다, 묻는 말에 답을 안 해준 것이지만.”
순간, 우진의 심장 한구석이 저려 미간을 찌푸렸다. 시우는 아직 술에 덜 깬 얼굴이었다. 힘없이 늘어진 고개가 천장을 향했다가,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목선이 길었다. 핏줄이 도드라져, 예민하면서도 동시에 나약한 초식동물의 것 같았다.
“복수를 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답을 안 해줬으니 다른 상대에게 묻고 싶었던 건지.”
“….”
“난 왜 강지훈을 만났을까요.”
“….”
“후회해요.”
“그럼 이제 안 만나면 되잖아요.”
“그러게요. 그러고 싶은데….”
“….”
“궁금해요. 나보다 더 중요한 침묵이 뭔지.”
우진은 직감으로, 시우의 연인이 지훈과 연관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우진이 손을 들어 시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시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욕심이란 대단하죠.”
“….”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것으로도 행복했던 때가 있었는데.”
그 말은 우진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시우는 우진의 손등을 한참 바라보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열이 나는 모양이었다. 울 것 같은 얼굴이 까만색의 밤에 이지러져 슬픈 빛을 띠었다. 우진은 가만히 그의 곁에 서 있어주었다. 그러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지훈과 단순한 회사 동료 사이가 아니죠?”
“…네?”
시우가 그렇게 물으며 우진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덮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우진이 손을 아래로 당기자, 그가 다시 손목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시선이 두려움과 유사한 감각들로 인해 떨리고 있었다.
“그가 당신의 사진을 갖고 있었어요.”
“….”
“아주 어릴 적의 사진.”
“…아 그건.”
우진이 설명하려 하자, 시우가 손을 들어 우진의 말을 막았다. 그가 천천히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마도, 우진 씨가 중학생일 때의 사진.”
“….”
“외국에서 찍은 사진 같은 것들도 있었어요.”
“….”
“그리고 아주 최근의 사진까지.”
“…뭐라고요?”
“김신도 함께였어요.”
김신도, 함께였어요.
우진은 머릿속이 휑하니 비어버려 까맣게 암전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새벽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지켜야 할 것과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들이 하나가 되어 머릿속을 맴돌았다. 침실로 시선을 돌리기 전에,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었다. 돌아본 새벽의 끝은 절벽이었다.
“오늘은 왜 어제와 같은 옷이지?”
출근하면서 코트를 걸던 지훈이 우진을 내려다보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우진은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지훈을 올려다보자, 그가 눈썹을 휘며 웃었다. 아마도, 유일하게 핏줄임을 증명하는 것 중 하나가 서로의 눈동자일 것이다. 둘은 짙은 검은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세탁하는 걸 잊었어.”
“코트도 똑같은데.”
“….”
“심지어 넥타이 문양까지 동일하네. 같은 걸 여러 개 사는 스타일은 아닐 텐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지훈이 우진의 셔츠 깃을 꽈악 쥐었다. 거칠고 굵은 손가락. 지훈의 겉모습은 자신의 아버지를 닮은 탓에 말하지 않으면 우진과 사촌이란 사실을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선이 굵고, 거칠고, 남자다운 얼굴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화려하지 않아도, 단정하고 심플했고, 남자다웠다.
“신경 꺼.”
“신경 쓸 일이 하나 남았지.”
지훈은 그렇게 말하며 우진의 옆인 자신의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침에 업로드된 그룹웨어 게시판을 한참 들여다보던 지훈이 연우의 업무보고를 받고는 다시 우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점심은 나랑 먹지?”
“….”
“할 이야기가 있어.”
“난 없는데.”
“네가 한 달여 전에 말한 딜에 관한 이야기야.”
우진이 모니터를 보던 시선을 돌려, 얇은 테의 안경을 벗어내고선 지훈을 돌아봤다. 새까만 눈동자가 서로 얽혔다.
“난 한 달 정도를 참았어.”
“…그래서?”
“이제 끝낼 시기가 다가온 것 같은데?”
점심은 김신과 함께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침에 함께 김신의 집에서 나오면서 김신은 오늘이 주말이면 좋겠다고, 한숨을 쉬듯 우진에게 속삭였다. 시우가 새벽녘에 집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아침에는 서로에게 온전하게 집중할 수 있었다. 샤워를 함께하고,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면서 김신은 우진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넓은 어깨, 단정한 쇄골, 그 아래로 내려오는 두터운 상박이나 좁아지는 허리선, 튀어나온 골반뼈가 허리에 부딪히던 감각이 기억났다.
“한 달 만나고 헤어진다고 하지 않았나?”
“….”
“그때 했던 딜이 이거였지. 한 달 만나게 해주면….”
“그만해.”
우진은 지훈의 앞에 손을 들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지훈이 한쪽 입술만 끌어 올려 웃고는 금방 파티션에서 고개를 내려 자신의 업무에 몰두했다. 타이밍 좋게도 그때 김신이 홍보팀에서 나와 정책실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 짙은 그레이의 목폴라는 아침에 우진이 골라준 것이었다. 옷장 앞에 서서 우진은, 한동안 김신이 옷을 갈아입는 걸 바라보았다. 그가 돌아보며 우진의 셔츠 깃을 단정하게 바로잡아주었다. 목덜미에 콧잔등을 대고, 한동안 숨을 몰아쉬는 게 간지러워 웃었던 기억이 났다. 눈이 마주쳤다.
‘조금 있다 봐요.’
볼 우물이 파이는, 눈꼬리가 접히는 김신을 가만히 쳐다보던 우진은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점심, 같이해. 나도 할 말 있으니까.”
우진은 김신에게서 고개를 돌려 지훈에게 낮게 읊조렸다. ‘그래’라고 말하는 그의 차가운 얼굴을 쳐다보다 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감정이 쏟아져 심장 아래 조각조각 부서졌다. 그것은 절망이라는 이름의 감각이었다.
-점심 같이 못 할 거 같아.
김신은 점심시간 20분 전에 도착한 우진의 메시지를 오래 들여다보고는 핸드폰의 홈 버튼을 눌렀다. 안 그래도 10분 전에 연우가 동기 모임을 제안한 터라 천천히 사무실 복도를 돌아나가는 중이었다. 우진의 메시지에서 석연찮은 느낌이 들어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려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배이준이었다.
“점심?”
“네.”
“누구랑?”
“…동기들이랑요.”
“나랑 먹는 건 어때?”
그렇게 말하며 생글거리고 웃는 이준의 얼굴이 조금 익숙해져서, 김신은 말없이 동기들에게 점심 같이 못 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김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층수에 도달한 엘리베이터에 매끄럽게 걸어가 탑승했다. 그는 팔걸이에 두 손을 얹고는 김신의 옆모습을 편하게 지켜봤다. 시선이 부담스러워 김신이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자 이준이 풋, 하고 웃었다.
“왜요?”
“표정이 안 좋아서.”
“어제 술 먹어서 그래요.”
“해장국 사줄게.”
“왜 팀 분들이랑 안 드시고….”
“너랑 같이 먹으라고 최우진이 부탁했거든.”
“진심이에요?”
“그럴 리가.”
‘우진은 누구와는 달리 세심하지 않아서’라고 말을 잇는 이준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참 다른 세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하기엔 서로의 환경만 비슷했지 목소리도, 생김새도, 사회성도 전부 다 달랐다. 지훈은 전형적으로 사회성이 좋은 회사원 스타일이었는데,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인상으로 편안한 느낌을 줬다. 반면 이준은 다분히 가볍고 스타일리쉬한 느낌이 강했다. 옅은 갈색의 머리칼도 그랬고, 옷도 다른 사람에 비해 파격적인 컬러를 자주 고르는 편이었다. 오늘도 그는 라벤더 색의 가디건을 입고 있었다. 하얀 피부에 잘 어울리는데다, 어딘가 모르게 날카로운 그의 인상을 유하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 저한테 반말을 하시네요.”
“지금 알아차리다니, 너도 참.”
그렇게 말한 이준이 쿡쿡 거리며 웃었다.
“답답한 사람이랑 연애하다가 자기도 답답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좀 깨달아야 할 텐데.”
“최 대리님 그렇게 안 답답해요.”
“뭐?”
“그냥 말을 아끼는 편이지.”
“정신 좀 차려.”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한 터라 동성연애에 대해 거리낌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시우와는 달리 이준은 이 관계에 대해 명확한 선을 긋는 편이었다. ‘점심, 뭐 먹을래?’라고 물어보는 이준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다 김신은 손을 들어 자신의 눈썹 뼈를 문질렀다.
“나한테 할 말 있죠?”
“눈치 빠르네.”
“뭐예요?”
“우진이 선볼 거야.”
김신은 그 말에 이준을 다시 쳐다보았다.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금방 도착했다. 띵, 하는 소리가 길게 울렸다.
“내가 처음부터 경고했잖아.”
“….”
“우진이 회장님 직계야. 설마 남자 애인을 그대로 내버려두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