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 주임과 최 대리-37화 (37/60)

37화. 이별의 이해

- 보고 싶어.

김신에게 연애는 인생에서 부차적인 문제였다. 김신은 연인들의 진심을 궁금해한 적이 별로 없었다.

늘 만족하는 얼굴을 하는 상대방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자신이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두고 시작하고 싶을 때 시작했다. 자존심 같은 건 생각도 안 해봤다.

그러다 최우진을 만났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을 하지 않고, 표정도 없고, 상대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는 최우진은 김신 인생 최대의 난제였다.

“어, 그러니까….”

- ….

“지금 보고 싶다고 한 거예요? 나를?”

문제는 그 진심을 자신이 알고 싶은가였다. 표정이 없지만 슬프고, 삶의 무게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우진의 얼굴에서 김신은 신기하게도 시간과 감정의 간극을 읽을 수 있었다.

그건 자신도 모르게 알아지는 것들이었다. 무표정함에 담겨 있는 어마어마한 감정의 소용돌이라니. 보면 볼수록 어딘가를 파고드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늘,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심장이 아프게 뛰는 것도 그랬다.

누군가에게 먼저 손 내미는 게 서툴러서 몇 번이고 생각하는 우진을 김신은 잘 알고 있었다.

단순한 감정의 나열. 그것이 마음을 휘젓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대답해봐요.”

- 응.

낮게 울리는 목소리. 첫인상으로는 참 공허해 보이는 사람이네, 싶었는데 그건 다 마음이 너무 넓게 퍼져 있는 사람이어서였던 것 같다.

이런 진심을 누구보다도 바라고 기다렸기 때문에, 김신은 자기도 모르게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기차 타요.”

- ….

“저녁에 봐요.”

조심해서 와, 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가 심장 바로 아래까지 울렸다.

우진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우진은 자신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르는 채로 그 자리, 그 시간에 우물처럼 고여 있는 사람이었다.

김신은 그 사람이 손을 뻗어 감정의 휘발을 이야기해준 그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입술을 깨물며, 김신은 우진을 생각했다.

“미쳐….”

어떤 연애는 뜨겁게 몰아치다 금방 식기도 했고, 서서히 자신에게 다가와 흔적도 없이 흡수되기도 했다. 우진은 달랐다.

상대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서 있었고, 혼자 서 있으면서도 김신에게 손을 뻗었다. 마치, 고독을 서서히 나누는 법을 알아가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 깊은 고독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서로는 알았지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건 믿음이었다.

***

- 오늘, 집으로 와

시우는 퇴근길에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다가 받은 문자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만난지 일주일, 만나자마자 호텔로 직행한 뒤 시우가 알게 된 건 강지훈이 생각보다 강압적이라는 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젠틀했던 인상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기대를 가졌던 모양이었다. 물론 인성에 대한 건 예외였지만.

“지랄하고 나자빠졌네.”

시우는 카톡창을 닫아버리고는 자신의 차 근처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 순간 큰 손이 시우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시우야.”

저 목소리가 참으로 좋았던 때가 있었다. 첫사랑이었던 김신을 잊을 수 있을 만큼 온건했고, 따뜻했다. 시우가 입술을 물고 고개를 들었을 때, 눈이 아래로 쳐져서 사랑스러웠던 자신의 연인이었던 남자가 서 있었다.

“….”대답을 않고 문을 더 열려고 힘을 주자, 주완이 시우의 손목을 아프게 낚아챘다. 와중에 혹시나 아플까 봐 손에 힘을 빼려는 주완 때문에 시우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았다.

“어쩌자고.”

“넌 어쩌자고 이래.”

보통의 퇴근 시간대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지하주차장에 차가 몇 대 없었는데, 얼마만큼 기다렸는지 가늠이 안 되었다. 걱정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아직까지 미련이 남아 있다는 것 같아 시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손목을 꺾어서 빼냈다. 주완이 잡았던 손목뼈가 끝까지 시려왔다.

“우리 헤어진 거야.”

“난 동의한 적 없어.”

“나도 네가 나한테 이렇게까지 일관적으로 입 다물고 있을 거라고 한 번도 생각 못 했거든.”

사랑은 둘 모두의 동의로 시작되지만, 이별은 둘 중 하나의 결정으로 끝이 난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눈꼬리가 젖어들 것 같아 시우는 금방 고개를 돌려 차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주완이 뒤따라 타려는 걸 손으로 막았다. 차가운 손이 시우의 뺨을 짚었다.

주완은 말이 없는 축에 속했다. 모든 걸 말하지도 않았지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었다. 침묵으로 일관했던 사람을 몰아붙인 건 자신이었을지도 몰랐지만, 어떤 침묵은 거짓보다 컸다.

“내가 거짓말한 건 아니잖아.”

“그럼 왜 말 안 해주는데?”

“시우야.”

“넌 날 기만했어. 말해줄 생각도 안 했고.”

“…정시우.

”낮게 떨어지는 목소리는 밤 같았다. 밤처럼 시우의 몸을 감싸, 아팠던 모든 연애를 이불처럼 포근하게 덮어주곤 했다. 잠이 들 때에도 입을 맞출 때에도, 서로의 호흡이 엉켜 마음의 울림을 줄 때에도 주완은 시우에게 충분히 다정하고 이상적인 연인이었다.

“마음이 떠난 것도 아니잖아.”

“…주완아.”

“응.”

“난 네가 좋았어. 정말로.”

시우는 그렇게 말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운전석에 몸을 묻자, 문을 당겨 온 시우가 허리를 굽혀 시우의 눈동자를 오래 쳐다봤다.

검고, 깊은 눈이었다. 빛깔을 모두 흡수해서, 자신에게 안정감을 주었던 그 눈은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

“왜 말 안 해주는 거야?”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

“주기적으로 그 사람 만나면서, 내 생각 안 했어?”

“시우야. 난 그 사람이랑 아무 사이가 아니야. 사업적인….”

“그게 무슨 사업이야.”

“….”

“사업이면 나한테 말 못 할 이유가 없었겠지.”

시우는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물었다. 이제는 미련을 전부 버려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허리를 굽혀 시우를 쳐다보고 있던 주완이 입술 새로 쇳소리를 내뱉었다.

“강지훈은 왜 만났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순간적으로, 문을 닫으려던 시우가 고개를 들어 주완의 시선을 맞추어왔다. 팔 아래로 소름이 돋았다. 순식간에 검은 눈이 잠식할 듯 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젠 뒤를 밟아?”

“….”

“너 진짜….”

“그 사람 위험한 사람이야.”

주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걱정하는 눈, 그 눈을 아주 오랫동안 서로 바라볼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날들이 있었다. 시우는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몇 년 전 주완을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해냈다.

자신의 어깨를 돌려세우던, 아주 매끈한 팔과 시린 손. 그 손 가운데 있던 작은 별 문양의 타투. 동질성을 느끼는 듯한 눈빛과 시선. 착한, 아니 착한 줄로만 알았던 아름다운 연인.

“솔직히, 걱정 안 해줘도 되잖아.”

“….”

“우리 이제 끝났으니까.”

그 감정들을 끊어내는 순간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시우는 눈을 질끈 감고, 손에 힘을 주어 문을 닫았다. 핸들에 얼굴을 올려놓고, 문을 잠그지도 않았는데 열려고 애를 쓰지도 않는 주완의 그림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서로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주완이 떠난 걸 확인한 시우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오늘은 당장, 누군가가 필요했다.

***

서울역은 오랜만이었다. 우진은 기차를 타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다. 독일에서는 운전을 해야만 했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는 더 이상 출퇴근을 차로 하지 않게 되었다.

대중교통이 잘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우진은 차를 타는 게 이상하게 꺼림칙했다. 서울은 차가 너무도 많았다.

“…7시 30분.”

도착시간 15분 전이었다. 한국 기차는 늦는 일이 별로 없었다. 독일에서는 기차가 연착되는 일이 잦거나 출구 번호가 매번 바뀌어 스크린을 확인하는 횟수가 많았다.

습관처럼 모니터를 보던 우진은 숨을 몰아쉬며 부쩍 추워진 날씨에 드러난 목을 코트 안으로 숨겼다.

“추워.”

우진은 요즘 마음을 몸 밖으로 뱉어내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건조하고 메마른 자신의 마음을 좀 더 크게 진동시키는 단 한 사람으로 인해서.

손끝이 닿으면 감정들이 큰 폭으로 휘어 마음 밖으로 뛰쳐나가곤 했다. 그렇게 달려 나가는 마음들을 붙잡을 도리가 없었다.

하아, 하고 숨을 몰아쉬니 하얀 입김이 후두득 떨어졌다. 이상하게 입꼬리가 올라가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멀리 플랫폼에서 기차가 큰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게 보였다.

레일을 끌어내는 소리가 길게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차가 천천히 멈추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

몇 호차에 탑승했는지 몰라서, 우진은 결국 고개를 들고 바깥으로 걸어 나오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쳐다봤다. 한동안 까치발을 들고 이리저리 둘러봤는데, 아무래도 김신처럼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분명, 7시 반 도착이라는 문자를 받았었는데.

아무래도 전화를 해야겠다 생각하고 핸드폰을 꺼낼 때였다. 우진의 손목을 뜨끈하게 잡아끄는 사람이 있었다.

“…여기 왜 있어요?”

어, 하는 순간 자신의 시선 안으로 떨어지는 김신이 있었다. 코트 깃을 위로 올리고, 포근한 그레이 울목도리를 한 김신.

밤인데도 불구하고 김신에게서는 햇살의 내음이 났다. 우진이 핸드폰을 다시 코트로 밀어넣자 김신이 얼른 에스컬레이터 뒤 기둥으로 우진을 잡아끌었다. 많은 인파가 퇴근 시간에 맞춰 우르르 뒤에서 몰려들었다.

“아니, 추운데 집에 가 있지, 왜.”

“….”

우진은 말없이 기둥 뒤에서 김신을 올려다보았다. 손목을 잡아챈 손이 금방 기차 안에서 내린 탓인지 뜨끈뜨끈했다.

손을 들어 김신의 눈 위로 솟아난 눈썹뼈를 만졌다. 차가울까 금방 손가락을 내렸더니 김신이 입술을 깨물고는 얼른 그 손을 거두어 자신의 코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왼쪽 가슴 부근의 심장 끝이었다. 크고, 빠르고 건강한 느낌의 심장에서 움켜쥘 만큼의 열기와 진동이 느껴져 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이 바짝 말랐다.

“지나가면서 설마, 했어요.”

“다행이다.”

“손이 얼음장 같네. 얼마나 기다린 거예요.”

김신은 말없이 손목을 당겨 우진을 좀 더 기둥 깊은 곳으로 밀어 넣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얼른 사람들이 다 지나가고 플랫폼이 텅 비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신의 얼굴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자, 김신 뒤를 몇 번 돌아보더니 커다란 손을 들어 우진의 뺨을 감쌌다.

“왜 이래요. 정말.”

“….”

“미치겠네….”

우진은 입을 맞추고 싶어서 그 손을 감싸고는 손등에 입술을 조금 가져갔다.

김신이 사나운 얼굴을 했다. 손을 들자, 김신이 눈을 감았다. 결국, 입술을 약하게 스치듯 닿았다.

그 순간 너무 뜨거워서 우진은 입을 맞추면서도 크게 흥분했다. 목 아래로 앓는 소리를 내자, 김신이 입술 아래를 지긋하게 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혀를 꺼내 이를 훑었더니, 김신이 끙, 하고 눈을 감았다. 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지금 당장 하고 싶은데….”

김신이 귓가에 대고 낮게 웅얼거렸다. 하고 싶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데다 우진 또한 당장 김신과 섹스하고 싶었기 때문에 머리끝까지 긴장감이 달렸다.

떨리는 손으로 김신의 목을 끌어안자, 김신이 우진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는 이를 세웠다. 물어오는 강도가 강했다. 아팠는데 그만큼 흥분해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디로든 가.”

“….”

“아무데나.”

우진이 입을 열었을 때 김신이 웃었던 것도 같았다. 뜨겁게 얽히는 손가락이, 우진의 가슴과 허리, 그리고 목덜미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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