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 주임과 최 대리-36화 (36/60)

36화. 연애의 흔적

아침 일찍 출근한 우진은 언제나 그랬듯 정책실로 가장 먼저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네임태그를 확인하고, 모니터를 켜려는 순간 조금 어지러운 것 같아 자리에 앉아 사원증을 걸어놓고 숨을 몰아쉬었다.

윤일의 병원에서 보낸 주말이 순식간에 흘러지나갔다. 세 시간의 긴 상담을 마치고 나오는 동안 처음으로 수면제를 처방받지 않았다.

김신은 긴 시간을 대기하면서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는데, 결국 우진이 먼저 이준에게 조금 짜증을 냈다.

‘왜 데려오자고 해서.’

‘네 치료에 도움이 많이 될 거야.’

‘그런 거 필요 없어.’

아픈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김신의 차를 타고 집에 오면서 우진은 그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자 김신이 지친 표정을 했다. 치료를 받고 나오면 가끔 시간들이 중첩되어 현재가 과거인지 과거가 현재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눈을 마주치면 언제든 과거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아 숨을 몰아쉬자 김신은 말없이 우진을 집에 데려다주고는 금방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지친 얼굴이었어.’

질릴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자신은 아픈 사람이니까 늘 자신만을 바라보게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일거란 생각을 처음부터 했고, 그래서 딱 한 달만 만나보자는 결심을 했다. 한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그러나 그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김신은 우진의 몸에 자신의 몸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건,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이젠 혼자 잠이 오지 않았다. 몸에 닿았던 뜨거운 기억들은 날이 갈수록 더욱 흔적이 깊어졌다. 일요일에 몇 번 전화벨이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어머니가 독일에서 한 전화도 건너뛰었다. 블라인드를 내리고 2층으로 올라가 사진들을 쳐다봤다.

한 장 한 장, 윤일이 가르쳐줬듯이 처음부터 찬찬히 사진을 보며 기억해보라는 말을 되새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숨만 가파져 사진을 던지고선 다시 일층으로 내려와 눈을 감았다.

그렇게 주말이 갔다. 그러고 보니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침에 간신히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가득 들어 있던 과일이나 샐러드를 보고는 또 한숨을 몰아쉬었다. 김신의 흔적이었다. 끝이 물러져가는 딸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시큼했다.

‘보고 싶다.’

주말 동안 김신은 연락이 없었다. 밥은 먹었는지, 잠에서 깼는지 등의 간단한 문자가 몇 통 와 있었는데, 전화가 오지는 않았다.

핸드폰을 매번 확인하는 성격이 아니었던 우진은 이상하게 일요일 내내 전화를 기다렸다. 만나지 않는 날에는 김신이 전화를 주었고, 우진의 끼니를 걱정했고, 낮아진 음성으로 보고 싶다는 말을 속삭여줬다.

당연히 그런 수순일 거라 생각했던 우진은 겁이 덜컥 나기 시작했다. 멍하니 사무실 밖을 쳐다보고 있던 우진이 입술을 물었다.

‘질린 걸까.’

화가 난 건 아니었는데.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들킨 게 싫었을 뿐이다. 그가 자신을 밀어내게 될까 봐 이준이 원망스러웠고, 그 순간 모든 것들이 짜증스러웠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안달 내는 것 같잖아.’

좋아해 달라고, 안달이 난 것처럼. 우진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어딘가 열이 뻗쳐 견딜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이런 감정들이 몰아쳐, 몰래 도망간 적도 있었는데, 그렇게 도망가서 며칠간 김신의 전화도 받지 않았었다. 그때 김신의 심정이 어땠는지를 우진은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혹시나 자신을 기억했을 때, 끔찍함이 남았다면 다시는 김신의 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진은 한 번도 김신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내비친 적이 없었다. 연애는 많은 것들이 얽혀 있는 관계였다.

나, 상대방, 그리고 우리.

우진에게 자신을 생각하면서 상대방을 읽어내기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였다.

“무슨 생각 하냐?”

강지훈이었다. 미간이 주름을 가득 단 채 올려다보자 우진이 올려다보자 지훈은 빙그레 웃었다.

“짜증 내는 얼굴도 귀엽네.”

“….”

“월례 브리핑 준비는 했고?”

“아….”

“설마 안 했냐?”

“자료 취합만 한 것 같은데.”

“웬일이래. 최우진이.”

회사일로 복귀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그동안 몸이 안 좋아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한 번도 업무 일로 일정이 꼬인 적은 없었다.

주말 동안 근무라도 했었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타박을 주는 지훈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우진은 급하게 파일들을 열어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주말 동안 밥은 잘 챙겨 먹었고?”

“….”

“얼굴 보니 또 식사 거른 것 같은데.”

“내가 알아서 해.

실수가 없고 일처리가 빠르기로 소문난 우진이었지만 급한 마음에 자료를 작성하다 보니 보여야 할 자료의 목록들이 잘 찾아지질 않아 시간이 꽤 걸렸다. 일찍 출근하지 않았더라면 월례 브리핑이 늦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뒤이어 출근한 연우에게 몇 가지 부탁을 하고난 뒤에야 자료 취합이 모두 끝났다. 본부에 메일링을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지훈의 시선이 느껴져 우진이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지훈의 얼굴이 좀 야윈 듯도 했다. 눈 아래가 거뭇하게 잠을 못잔 얼굴이었다.

“왜 쳐다봐?”

“허둥지둥하는 최 대리는 오랜만이라.”

“…놀리냐?”

“뭐 그런 걸 수도 있고.”

그러면서 소리 내서 웃는 지훈은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요 몇 주간 본 적 없는 미소여서 우진은 안도했다. 지훈은 간만에 보기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준이 몇 번 충고했지만, 여전히 강지훈은 우진에게 몇 안 되는 가까운 사이기는 했다.

자료 취합이 끝나자마자 팀내 업무 보고 회의가 연달아 있을 것 같다는 연우의 공지가 메일로 왔다. 우진은 숨을 몰아쉬고는 업무 보고를 위한 자료를 작성해나가기 시작했다.

틈틈이 메시지 창을 열어보긴 했는데, 점심시간이 다가오도록 김신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그렇게 훌쩍 오전이 지났다.

“점심 식사 안 하세요?”

연우가 나가며 우진에게 말하기 전까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고 있던 우진은 흠칫 놀란 듯 뒤를 돌아봤다. 연우가 코트를 입으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아….”

“강 대리님은 약속 있다고 나가셨고, 실장님도 외근이시라, 저는 동기들이랑 밥 먹을까 하고요.”

“…동기들요?”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간 질문에 연우가 놀란 얼굴을 했다. 우진은 누구에게 되묻는 일이 거의 없는 상사였다. 놀란 기색을 금방 지운 연우는 곧 우진에게 시선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네. 오늘 동기 모임이 있어서.”

“아, 네.”

연우는 식사 맛있게 하세요, 라고 덧붙이고는 금방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홍보팀으로 옮겨갔다.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밥을 먹지 않으면 또 언제든지 쓰러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의자를 뒤로 끌며 천천히 일어섰다. 이미 홍보팀은 사무실 불이 꺼져 있는 상태였다. 사원증을 손에 쥐고 코트를 입는데, 뒤에서 익숙한 손길이 우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점심 약속 없어 보이는데, 저랑 식사 한 끼 같이 하시죠.”

급하게 돌아본 시선의 끝에는 환하게 웃는 배이준이 있었다. 우진이 한참 이준을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이자 이준이 피식하고 웃었다.

“뭐야. 이 눈에 보이는 실망은.”

“그런 적 없어.”

“밥이나 먹자. 네가 좋아하는 일식집 예약해놨지.”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는 이준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던 우진은 어딘가 마음이 따끔하게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핸드폰을 찾아 코트 가슴안쪽 주머니에 단단하게 넣고는 이준의 뒤를 따라 나갔다. 왠지 발걸음 걸음마다 진득하게 미련이 묻어나는 기분이었다.

***

“팍팍 좀 안 먹지?”

“강지훈으로 됐거든, 잔소리는.”

“진짜 지훈이가 식사 때마다 한소리 하는 거 이해할 거 같다.”

전복죽을 앞에 놓고 수저를 다시 내려놓는 우진에게 시원해 보이는 나박김치를 당겨주며 이준이 혀를 끌끌 찼다.

“너 이렇게 말라가지고 김신이 뭐라고 안 하냐?”

“….”“표정이 갑자기 바뀌는데?”

“아무 말 안 하는데 어쩌라고.”

“아량이 넓으신 애인이네.”

“…애인 아냐.”

“나한테까지 거짓말 할 필욘 없어.”

코트 밖으로 꺼낸 핸드폰을 다시 확인해봐도 김신의 문자는 오지 않았다. 체하는 기분이라 우진이 따뜻한 녹차를 한 모금 마시자 이준이 우진의 얼굴을 얌전하게 살폈다.

“입이 삐죽 나왔는데?”

“물어볼 거 있어.”

나무숟가락으로 전복죽을 찬찬히 식히던 우진이 이준에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뭔데?”

“병원에서 김신에게 뭐라고 한 거야?”

“아무 말 안 했는데.”

“거짓말.”

“진짜야. 아무 말 안 했어.”

“연락이 없어. 이후로.”

이준이 숟가락을 앞 접시에 올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걱정되냐?”

“….”

“먼저 문자는 해봤고?”

“아니.”

“뭐?”

그러고 보니 자신이 먼저 문자를 하거나 전화를 해본 기억이 없다. 우진은 이상하게 구겨지는 이준의 얼굴을 바라보다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먼저 해본 적 없는데.”

“답장은 제대로 하고?”

“아니.”

“너 정신 나갔냐?”

“내가 뭐 잘못했나?”

우진은 연애하는 법을 모르는 것뿐이었다. 김신과 하는 일은 죄다 처음이라,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고 가끔 김신이 전화로 하는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김신이 다음부터는 목소리를 들려 달라고 몇 번이고 체크하곤 했다. 우진은 그런 일들이 전혀 귀찮지 않았다. 반대로 김신이 귀찮을까 봐 생각이 많아질 뿐이었다.

“잘못한 정도가 아니지, 너 답답한 스타일인건 알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야?”

“….”

“하긴 김신 심미안도 이상하긴 하다. 널 예쁘다는 둥 어쩌고 하는 거 자체가.”

“나 못생겼어?”

“아니 얼굴은 봐줄 만한데, 어딜 잡으면 툭 부러질 거 같잖아.”

“안 부러져.”

“거기다 문자도 안 해, 전화도 안 해. 어디 붙임성이라도 있나.”

“가끔 찾아가긴 해.”

“뭐? 예고도 안 하고 찾아간다고?”

그건 최악인데, 이준은 그렇게 말하며 혀를 끌끌 찼다. 우진은 가슴 한군데가 까맣게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평생, 마음에 담아두었던 사람은 김신 하나였다. 그러나 분명, 김신은 자신만을 담아두진 않았을 것이다. 섹스, 도 그렇고, 일상적으로 우진에게 하는 손짓이나 말투는 이미 연애에 있어 많은 경험들이 쌓여 있는 기분이 들게 했다. 갑자기 입이 썼다.

“너 표정이 너무 안 좋은데?”

“김신은 인기 많았겠지?”

“말해서 뭐해.”

“내가 질린 걸까.”

“그건 아닐걸?”

그렇게 말하며 이준이 쿡, 하고 웃었다.

“최우진 여전히 놀리는 맛이 있네.”

“….”

“김신이 나한테 자기 오늘 외근이라면서 너랑 밥 먹어 달라고 해서 여기 온 거야.”

“…뭐?”

이준은 그렇게 말하며 재밌다는 듯 입을 가리고 웃었다. 눈이 휘면서 소리 내며 웃는 얼굴은 너무 오랜만이라, 우진은 화내는 것도 잊은 채 숟가락을 놓고는 가만히 이준의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김신 아침부터 미팅 건 있어서 지방 갔어.”

“….”

“내가 너 치료받고 나면 이틀 정도는 힘들 거라고 했었는데, 걱정돼서 연락 안 했던 거 같고.”

“….”

“네가 먼저 해주길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얼른 해 봐. 밥은 먹고.”

이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진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을 손에 쥐고 일어섰다.

“뭐야 왜 일어나?”

“전화 좀, 하고 올게.”

이준의 넋 나간 표정을 뒤로 한 채 우진은 금방 식당을 빠져나와 한적한 골목으로 나왔다. 고립된 공간이 필요했고, 전화 내용도 생각해야 했고, 무엇보다.

“….”

신호음이 길지 않았다. 여보세요, 라고 김신의 낮은 특유의 음성이 귓가를 감쌌다. 순간 얼굴에 열이 올라 숨만 토해냈다.

- 우진 씨.

이름을 불리는 순간, 우진은 모든 게 다 괜찮을 거 같았다. 오랫동안 이 목소리를 듣고 싶어 했었다. 아주 오랫동안.

- 밥은 먹었어요? 어디 아픈 데는?

“보고 싶어. 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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