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거짓말과 속아주는 자
“정시우라고 합니다.”
“최우진입니다.”
김신은 색소가 옅은 우진의 뒷머리를 만지고 싶은 충동에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마주 보고 앉아 있던 시우가 무릎을 툭, 하고 쳐올렸다. 고개를 들자 ‘팔불출’이라고 말하는 입모양이 보였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신이한테.”
“…네.”
시우는 찬찬히 우진을 쳐다보고는 말끔하게 웃었다. 우진은 여전히 표정이 없었는데, 식사가 나오자 김신의 앞에 앞접시를 제일 먼저 놓아주었다.
“침 나오겠다.”
“배고파서 그래.”
시우가 기어코 핀잔을 주자 김신은 시선을 우진에게 고정한 채 웃으며 대꾸했다. 오늘의 저녁식사 자리는 우진이 먼저 마련했다.
우진이 회사에 복귀한 지 만 3일째였는데 그 누구도 우진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 없었다.
김신은 신기했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는데 상대적으로 누군가에겐 시간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반대로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건 그 부재의 의미까지 알아야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상실의 무게를 기억한다는 것은 제법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다.
“여긴 룸이 많군요.”
“미팅 전용 식당이라 그런 것 같아요.”
시우가 묻자, 우진이 얌전하게 대답했다. 상견례 느낌이네, 라고 시우가 조용히 웃었다. 우진은 그런 시우를 빤히 쳐다보더니 결명자차를 한 모금 마셨다. 눈이 접힌 걸 봐서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한식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신이에게.”
“뭐 다 좋아하는데, 집밥 먹어본 지 오래되어서요.
”주완이와 함께 나오라는 이야기에 시우가 거절한 사실을 알고 있는 김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주완은 가정식을 자주해 시우를 먹이곤 했다.
그러고 보니 살이 제법 내린 것 같아 미간을 찌푸리자, 시우가 김신을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김신, 안 그렇게 생겨서 예민한 편이죠?”
“….”
“대답이 없으신데?”
“…예민한 게 아니라 예리한 것 같은데.”
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앞에 놓여 있던 갈빗살을 젓가락으로 잘게 뜯어 김신의 앞접시에 놓았다. 의외의 모습에 당황한 김신이 눈을 깜빡이자 우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의 앞에 놓인 갈비를 얇게 저며 내어 자신의 입에 넣었다.
우진은 늘 천천히 음식을 먹는 타입이었는데,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입을 다물고선 조심스레 밥을 먹는 모습은 볼 때마다 신기했다. 한참을 쳐다보고 있자, 피식 웃는 소리가 났다.
“…초대받은 자의 소외감이 느껴지는 거 같지 않아?”
“드릴까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시우는 손사래를 쳤다. 늘, 애교가 많아 보이긴 하지만 연인들에게 유독 건조한 시우는 이런 상황을 못 견뎌 했다.
그건 김신도 우진을 만나기 이전까지는 마찬가지였다. 우진은 말없이 앞에 놓인 음식을 비우고 있었다. 며칠 유동식만 먹다가 처음으로 식사다운 식사를 하는 것이라 김신은 긴장감이 들었다. 그다지 불편해 보이지는 않는 듯해, 전복죽을 좀 더 시켜 앞에 놓아주자 또 숟가락을 들었다. 음식이 마음에 맞는지 우진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정말 안 그렇게 생겨서 잘 웃으시네요.”
“…야.”
김신이 결국 필터 없이 내뱉는 시우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우진이 고개를 들어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런 이야기 자주 듣는데, 실제로도 웃음이 별로 없어요.”
“….”
“신이 옆이니까 그런가 봐요.”
김신은 다시 고개를 숙여 열심히 음식을 먹는 그를 바라보다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죄송한데,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우진이 의자를 밀자, 김신이 자리를 잠시 비켜주었다. 조용히 미닫이문을 열고 나가는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김신의 뺨을 시우가 꽈악, 하고 집었을 때에야 정신이 돌아왔다. 혼이 나가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너 진짜 정신없다.”
“…그래 보이냐?”
“그래 보이는 정도가 아니야.”
“예쁘지?”
“얼씨구?”
“요즘 좀 못 먹어서 말랐어.”
“헐.”
“너 반하거나 그런 거 아니지?”
“내 취향은 아냐.”
“왜?”
“…뭐?”
“누가 봐도 이뻐하는 게 정상 아냐?”
“정신 차려, 김신.”
시우는 그렇게 말하며 앞에 놓인 갈비를 입에 넣었다. 계속 젓가락이 간다 했더니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우진과 시우는 서로 다른 지점에서 묘하게 마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김신은 그걸 발견할 때마다 신기했다. 시우가 한참 음식을 먹다 말고 시선을 다른 곳에 두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꺼냈다.
“어렸을 때랑 거의 똑같다. 달라진 데가 없어.”
“….”
“정말 어디로 사라져도 모를 것 같은 얼굴.”
시우는 그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픈 사람은 힘들어.”
“….”
“듣고 있어?”
“응.”
“너도 아팠던 적이 있으니 알 거 아냐.”
“알아.”
“자신 있냐?”
“아니.”
김신은 그렇게 말하며 쥐고 있던 젓가락을 앞접시에 위에 살짝 놓았다.
관계에서 주어지는 이상한 예감 같은 것들이 있었다.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는 이 사람의 진심. 음성은 없지만 공기 중에 의미만 남은 말들의 여운.
우진이 돌아온 후 김신은 한 번도 그를 제대로 안지 못했다. 섹스를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그로 인한 만족감보다 그가 옆에 있다는 정서적 만족감이 더 커서 곁에서 놓고 있질 못할 정도였다.
“지금은 그냥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란 생각을 해.”
“….”
“기다리면 되겠지.”
새벽에 깨어 김신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는 우진의 시선을 안다.
가끔 벗은 가슴 아래, 자신의 상처를 만져보고 한숨을 쉬면서 다시 김신의 품에 파고들어 한참을 생각하는 작은 머리통이 있다.
그러다 자신의 손목을 몇 번이고 바라보고는, 이번에는 입술을 꾹 깨물고 김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 것이었다.
김신은 자는 척을 하면서도 그 순간에 치밀어 올라오는 슬픔을 느꼈다. 감정이 선이라면, 그 선들이 죽 이어져 자신에게로 넘어오는 순간이 있었다. 김신은 그 순간을 기대하면서도 고통스러워했다.
“사랑하는 게 뭘까, 싶어.”
“….”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어. 보자마자 반했던 것 같긴 한데. 이렇게 깊게 파고들지 몰랐어. 예감을 했었다면.”
“그랬다면.”
“아마 더 빨리 만나자고 말했을 거야.”
김신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좀 더 먼저 알아볼걸. 손목에 얼기설기 묶인 그 선들을 좀 더 빨리 잡아당겨 자신의 심장 아래로 넣어둘걸.
눈 아래가 시큰해져 김신은 고개를 숙였다.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 않았으니 끝은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불완전하다. 그 불완전함을 알고 있는 한, 이대로 끝일 수는 없었다.
***
“무슨 생각해요.”
사실 매번 섹스가 끝나면 쓰러지듯 잠이 드는 자신 때문에 우진은 김신과 관계 도중이나 끝난 이후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없었다.
오늘은 좀 이상한 날이었다. 김신의 친한 친구와 저녁식사를 했고, 마지막엔 칵테일을 한잔 마셨다. 그러고 나서 요즘 늘 그렇듯 김신의 집에 들렀고, 아주 오랜만에 섹스를 했다.
늘 김신과의 섹스는 영혼이 날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무서울 만큼 좋았다.
눈을 뜬 채 숨을 고르고 있는 와중에 김신이 우진의 팔목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우진이 바로 누워 있다 고개를 돌리자, 김신이 뺨에 누르듯 입을 맞춰주었다.
“좋다는 생각.”
“밝히는데요.”
“몰랐어?”
“밝히는 거 좋아해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김신의 얼굴이 장난꾸러기처럼 구겨졌다.
벗은 어깨선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리자, 우진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상체를 세워 엎드린 김신이 간지럽다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움츠렸다.
“잠이 안 와”
“체력이 좋아졌나 보죠.”
“그런가.”
나른한 얼굴로 자신의 팔에 얼굴을 묻은 채 우진을 바라보는 김신은 내려온 앞머리 때문에 더욱 어려 보였다.
“고등학생 같아.”
“억울해요.”
“왜?”
“난 그때의 우진 씨를 잘 기억 못 하니까.”
“내가 기억하니까 상관없어.”
눈꺼풀에 입술이 내려앉았다. 김신은 감동을 받거나 당황하면, 윙크하듯 오른쪽 눈이 먼저 감기곤 했는데, 능숙하게 다시 치켜 올리는 그 눈이 맹수 같았다.
눈썹 뼈를 만지자 졸린 눈을 했다.
“졸리면 자.”
“같이 샤워할까요?”
그렇게 묻는 김신의 얼굴에서 나른한 욕망이 느껴져 우진은 순간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김신이 손을 뻗어 우진의 어깨를 안았다. 방금 전에 있었던 정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몸이 식기도 전에, 뜨거운 손길이 우진의 곳곳을 만졌다. 열꽃이 피어나, 심장 아래로 모여들었다.
“샤워, 흣… 하자며.”
“이따 하면 되죠.”
끊임없이 안아도 모자란 욕망 같은 게, 분명 둘 사이에는 있었다.
육체가 닿아도 아주 오래되고 해묵은 감정은 닿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우진이 손을 뻗어 스스로 김신을 안고, 안길 때마다 그 감정이 점점 서로 만나 변화하는 것만 같았다.
섞이고, 뭉쳐지고, 그리고 타오르는 느낌이 있었다. 고개를 뒤로 꺾자, 김신이 깊게 키스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날 밤은 몸이 수십 개로 쪼개져, 어디론가 흘러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분명, 우진은 잠들기 직전에 자신의 몸을 닦는 김신의 얼굴을 눈동자에 담았었다. 그가 우진의 몸을 따듯한 물로 닦고, 곳곳에 입을 맞추자 상처가 사라졌다. 그건 꿈인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김신의 몸에 닿는 부위가 점차 사라지고, 결국 둘은 하나가 되는 꿈.
슬프도록 몸 곳곳에 저며 드는 꿈이었다.
***
- 회사 앞이야, 나와.
김신은 마침 오전에 외근 나갔던 곳이 시우네 회사 근처라 점심을 함께 하기로 한 터였다. 시간이 조금 남아 시우네 회사 빌딩 정문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겨울 햇살에 눈이 부셨다. 쨍, 하고 깨어질 거 같은 파란 하늘이었다.
날씨는 온몸이 시리도록 추웠다. 바람이 쌀쌀해 코트를 여미려는데, 점심시간이라 지나가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김신을 쳐다봤다. 왜지, 하고 뒤를 돌아보는데, 금방 익숙한 목소리가 근저에서 울렸다.
“야, 그만 쳐다봐.”
무리에서 툭 튀어나온 키 큰 인영 하나가 김신에게로 저벅저벅 다가오며 그 무리에 뒤섞여 있는 사람들에게 개구지게 웃었다.
“내 친구 넘보지 마. 임자 있으니까.”
“어머 친구분이셨어요? 대박.”
같은 팀인 모양이었다. 김신이 금방 꾸벅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려버리자, 시우가 깔깔거리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얘 생각보다 낯가림 있어.”
“아 뭐래.”
당황해하는 김신을 무시한 채, 시우는 팀원들에게 점심 식사 잘하라는 소리를 하고선 살갑게 김신의 옆에 서서 나란히 걸었다. 점심을 같이 먹는 건 오랜만이었다. 시우가 뜬금없이 김치찌개를 먹자고 했다.
“너 주완이가 밥 잘 안 챙겨주냐? 왜 이렇게 집밥을 찾아.”
“나 주완이랑 헤어졌어. 말 안 했나?”
툭, 하고 내뱉는 시우의 말에 김신이 우뚝 그 자리에 섰다.
“언제?”
“알아서 뭐하게.”
“최근일 거 아냐?”
“일주일 전후겠지. 기억 안나.”
“너 괜찮아?”
“안 괜찮을 리 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시우의 얼굴이 파리해서, 김신은 말없이 어깨를 끌어당겼다.
“우리 소문난다. 여기 회사 근처야.”
“왜 헤어졌어?”
“왜?”
“주완이, 쉽게 헤어질 상대 아니었잖아.”
“그러게. 왜 헤어졌지.”
곰곰이 생각하는 척하는 시우의 눈꼬리가 젖어 있었다. 김신이 한숨을 쉬자, 시우가 손등으로 눈동자를 꾸욱 눌렀다.
“나 힘들 때 너 찾는데, 넌 왜 안 그래?”
“미안.”
김신을 따라 한숨을 쉬던 시우가 앞장서서 걸으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주완이가 나한테 거짓말했어.”
“설마 바람 폈어?”
“아니.”
“그럼?”
“그것까진 말할 수 없을 거 같아.”
“왜?”
“김신.”
“응?”
“최우진 씨, 얼마만큼 좋아해?”
그렇게 묻는 시우는 김신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