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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주임과 최 대리-32화 (32/60)

32화. My Remedy

“…유전병이지. 쉽게 말해서.”

“정신질환 말이죠?”이준은 담배 끝을 씹으며 무심하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윤일이 그런 이준을 보고 있다가 다시 침대 위의 우진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준의 곡선이 유려한 눈썹이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다, 마침내 하얀 침대에 누워 있는 파리한 얼굴의 우진을 쳐다봤다.

천장을 오래 바라보고 있었는데, 초점이 흐린 것 같아 이준은 천천히 일어나 우진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우진이 이준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더니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치워.”

“성격하곤. 너 내가 안 발견했음 죽었어.”

“….”“굶어죽는 게 말이 되냐.”

“….”

“도망간 곳이 어이없게도 할아버지 별장이라니. 너도 참.”

“도망간 거 아냐.”

“너 병 없어. 아무리 말해도 이해를 못 하냐. 넌 유전이 안 됐다니까.”

“강지훈은?”

“말 안 했어.”

“김신은?”

“…했을 거 같냐?”

“응.”

“와, 윤 박사님 최우진 장난 없죠? 어떻게 알았지?”

“…들켰어?”

“아니, 안 들켰어.”

우진이 후, 하고 한숨을 쉬며 손목을 들었다. 얇은 손목에 비친 파란 핏줄이 투둑 뛰고 있었다.

“참고로 죽고 싶단 생각은 안 했어.”

“알아.”

“귀찮아서 안 먹었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알아.”

“그러다가….”

“발작 일어난 것도 알아. 혼자 있을 때 좀 주위에 한 명이라도 알리고 다녀라.”

“김신이 알았어.”

“뭘.”

“내가 유진인 거.”

유난히 이준은 우진이 말이 많아졌음을 느꼈다. 약기운이 도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포도당 수치가 올라가기도 했고.

이준은 숨을 크게 몰아쉬는 우진의 이마에 달라붙은 색소가 옅은 머리칼을 넘겨주려다, 몸에 손대는 걸 싫어한단 사실을 기억하고서 금방 손을 거둬냈다.

“자각 좀 하고 살아. 죽다 살아난 경험이 있다는 걸.”

“그래서 죽음이랑 늘 가까운 걸까.”

“윤 박사님, 얘 헛소리 너무 많이 하는데?”

“눈뜨면 신이가 있었으면 좋겠어.”

이준은 눈을 감았다 뜨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것도 집착이지 않을까.”

“집착인 상태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어떻게 떨어져 있었냐.”

“꿈인 줄 알았지.”

내 인생에 유일하게 찾아온, 아주 오래되고 빛바랜 꿈.

“우진아.”

“응, 이준아.”

“약 먹어서 너무 다정 다감한 거 적응 안 되지만.”

“죽어.”

“아, 진짜 매력 넘치는 새끼.”

“….”

“김신은 너 때문에 다친 거 아냐.”

“….”

“그러니까 좀 쉬자.”

이준은 망설이던 손을 가져와 우진의 눈동자를 덮었다. 우진은 그 손을 뿌리치지 않고 다시 자신의 손으로 덮어 손가락 사이사이에 체온을 밀어 넣었다.

“신아.”

“….”

“어디 가지 마.”

“…그래.”

쉿, 하고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댄 채, 아주 오랫동안 우진을 바라보고 있던 김신이 그 순간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준의 시선과 마주치자, 김신이 입술을 물었다. 잘생긴 이마에 핏줄이 섰다.

“나가서 이야기하죠.”

“그래.”

잠이 든 우진을 한참 바라보던 김신이 고개를 돌려 윤일과 이준에게 가볍게 목례하며 입을 열었다. 이준은 순순히 김신을 따라나섰다.

닫히는 문 사이로, 커튼이 펄럭거렸다. 10년 전 김신의 병실에서 마주쳤던 우진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금방 하얀 커튼 사이로 사라졌다.

***

“잘 찾아왔네. 그것도 빨리.”

“반차를 냈어요.”

코트를 벗어내는 김신의 몸에서 바람 냄새가 났다. 이준은 숨을 몰아쉬며 머리에 손가락을 짚는 김신의 유려한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김신은 어딘지 모르게 짐승 같은 구석이 있었다. 크게 숨을 몰아쉴 때 뿜어내는 열기라던가, 자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큰 몸으로 다정하게 감싸는 꼴이 그랬다.

“용케, 사람을 잘 믿는다.”

“느낌이란 게 있으니까.”

이준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강지훈은 절대 김신을 이길 수가 없다. 모든 점이 그랬다. 한 번의 상처를 입었지만 숨기려고 하기보단 드러내는 솔직함, 발아래부터 끓어오르는 열기나, 웃음, 눈물, 분노 같은 것들이 그랬다.

우진과 김신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은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내면은 닮아 있었다.

“유진 선배가 맞는 거죠?”

“기억하고 있었네.”

“기억 못 했어요.”

“….”

“그때 너무 많이 다쳐서, 얼굴이 다 부어 있었고.”

“….”

“죽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때엔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여겼다.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손목에서 빠져나온 혈액이 수영장을 물들일 정도였으니, 과다출혈에다 심정지도 왔었다.

이준은 미국에 있다가 급히 귀국했고, 그 순간의 난장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손목이 전부 그어져 있던 우진은 눈을 뜨자마자 온몸을 긁었다. 트라우마였다.

“자살을 시도한 거, 아니죠?”

“눈치 한번 빠르네.”

“죽으려는 사람 같지 않았어.”

“뭐, 잘 알겠지만 삶에 욕심도 없지만 죽음에 가깝지도 않은 타입이지. 최우진은.”

이준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 놓여 있는 카모마일 차는 윤일이 가져다준 것이었다.

“여긴 어딘가요?”

“윤 박사네 집.”

“…윤 박사는 누구죠?”

“최우진 주치의이자, 우진 어머니의 절친이시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뭔지 알 거 같은데.”

“그런데 그건 배이준 주임님한테 물을 게 아니라, 최우진 씨에게 물어야 하죠.”

“….”

“기다리는 게 힘이 드네요.”

절대, 이길 수 없다는 느낌이 주는 절망감은 어떤 걸까.

이준은 지훈을 떠올리며 입술을 물었다.

“최우진은 어릴 때부터 혼자 뭐든지 잘했어.”

“….”

“조용하고 조심스런 타입인데, 표정이 참 없어서 놀리기 쉬운 대상이었지.”

“….”

“난 어렸을 때부터 최우진이 좋았거든. 얌전하고 조용하고 할 말은 하는데, 사람들과 어느 정도 늘 거리를 둬서. 불편하지 않았어.”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저의가 뭔가요.”

“최우진은 좀 아파.”

“…유전병 말인가요?”

“아니 그건 아닌데. 그게 걱정이 돼서 만든 병이지.”

“….”

“그리고 어렸을 때 다친 곳 때문에 몸이 안 좋기도 하고.”

“누가 그랬나요?”

“우진이 고모님.”

김신이 눈을 키웠다.

“고모님이요?”

“회장님의 하나뿐인 따님이자, 우진이 아버지의 여동생.”

“…뭐라고요?”

“우진이 고모님이 우진이를 싫어했어.”

“….”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

눈을 뜨자, 밤이 드리워 코끝까지 내려앉아 있었다. 우진은 아직 약 기운이 돌고 있는 멍한 머리를 짚으며,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새벽의 어느 시간쯤인 듯했다. 겨울이 문득 깊어져 아직은 새까맣기만 했다.

손을 더듬어 이불을 당겨오려는 순간, 자신의 옆에 누군가가 누워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정말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감싸 안은 커다란 등이 너무 크고 안온해서.

우진은 이렇게 온몸에 닿고도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김신.

유려한 눈썹에 손을 대려다, 천천히 김신 쪽을 향해 모로 누운 우진은 천천히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굵은 선으로 그려놓고 따뜻한 온기로 채워 넣은 얼굴을 한 김신은, 아름다웠다.

한참을 바라보다 감고 있는 눈에서도 시선이 느껴져 다시 돌려 누우려는데, 김신의 큰 팔이 우진의 어깨를 감싸 다시 자신의 쪽으로 당겨 안았다.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늘 처음처럼 심장이 쿵쾅, 하고 울었다. 마치 여기에 아직 뛰고 있다는 듯이.

“…일어났어요?”

짙은 음성이었다. 눈을 채 뜨지도 못한 김신은 몇 번을 깜박이다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을 바라보던 김신이 손을 들어 우진의 얼굴을 몇 번 만졌다.

“하루에 두, 시간 정도 잤나?”

“….”

“안달 나게 만드는 데는 선수인가 봐.”

“아니야.”

“그럼?”

손으로 김신의 이마를 쓸었다. 맑은 이마, 라는 수사가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바르고 단정한 얼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같은 성정을 가두고 있는 듯한 이마였다. 우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

“답을 요구한 건 아니었다고, 그날 밤에 말했었잖아요.”

후회하는 눈빛이 보고 싶지 않아서 우진은 시선을 아래로 낮추었다. 그러자 따라오는 손길이 있어 안심했다. 왠지 아주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도 김신은 절대 자신의 손을 놓지 않을 것 같다는 믿음이 조금씩 생기고 있는 중이었다.

안 기다리는 척하면서, 오래 기다릴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답을 하고 싶어졌거든.”

“….”

“…그러고 싶었어.”

더 깊이 파고들어 심장을 마주했다. 따듯한 온기가 온몸 구석구석 마치 꽃잎이 봄에 사방에 날리듯 퍼져들었다. 잠이 왔다.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목덜미를 만졌다. 모든 것을 위로하고, 위안받게 만드는 진동이 있었다.

“유진이란 이름은 어머니의 성을 따른 거야.”

“….”

“아버지가 자신에게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했었던 거 같아.”

“….”

“아버진, 유전병을 앓고 있었거든. 유전되지 않았으면 했었어.”

“….”

“난 유전되지 않았다고 했어. 주변 사람들이.”

“….”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숨겼었던 것 같아.”

한숨을 쉬며 우진은 말을 이었다.

“아버진 가끔, 자신이 누군가에게 쫒기고 있다고 생각했어.”

“….”

“망상을 봤지.”

“망상?”

“응. 누군가 자신을 죽이러 온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수많은 이동과 여행이 그것을 알려주는 기제가 되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도 사랑했다.

술과 약으로 점철된 시기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너무나도 착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눈을 감았던 어머니.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 유전병은 가족력이 있어서 대를 거르고 나타났어. 할아버지는 괜찮았지만 아버지는 아팠고, 고모는….”

“고모는?”

“고모는….”

숨을 몇 번 몰아쉬었다.

“고모는 나를 싫어했는데. 그 이유를 잘 몰라.”

“….”

“아마 아버지가 싫어서 나를 싫어했다 정도야.”

“…고모님은 병이 없었어요?”

“몰라. 기억 안 나.”

그 여자는 기억이 잘 안 났다. 진짜였다.

“다친 건,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야.”

“….”

“사실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도망갔던 거 같아. 아버지가 쓰러지고, 나도 무서워서 도망갔는데. 난 그게 가끔 망상 같아서.”

“….”

“내가 죽으려고 했던 거 같아서. 가끔 무서웠어. 신아.”

그 끝에 너의 기억이 있었어. 나를 부르는 목소리, 물에서 끌어올리는 뜨거운 숨과 호흡.

“살려줘서 고마워.”

목을 감아 깊게 안았다. 안기고 싶어서 입술을 갖다 대었더니, 김신은 가만히 있다가 뜨겁게 입을 맞춰주었다.

입술을 가르고, 뜨거운 혀가 달콤하게 말을 걸었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지만 우진은 말하지 않았다.

아직 2주가 남아 있었으니까, 그 2주간은 떠나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물속으로 숨어들었을 때 찾아준 것도 김신이었다.

그러니, 또 찾을 수 있을 거야.

지금도 이렇게 옆에 있는 사람이 그리운 건, 모든 것이 끝이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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