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 주임과 최 대리-28화 (28/60)

28화. 비밀과 연애의 작동방식

“거기서 넘어지면 어쩌자는 거야. 다리에 힘은 있는 거야?”

“닥쳐. 네 방으로 가, 좀.”

이준은 2인 3각 릴레이 도중 넘어지는 바람에 멍이 든 무릎을 문지르며 지훈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이준을 바라보고 있던 우진은 숙소당 배정된 맥주와 먹을거리를 받아온 김신의 손에서 짐을 받아들었다. 굳이 내어주지 않으려는 걸 손목을 잡아 낚아챘더니 김신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민재는 벌써 거실 테이블에 음식을 잔뜩 깔아놓는 중이었다.

“야, 최우진, 강대리가 나 보고 가래.”

“….”

“나 그쪽 숙소에 아는 사람 없어. 여기서 놀고 싶단 말이야.”

“원래 아무하고도 안 친하잖아.

”중간에서 지훈이 말을 가로채며 이준이 귀찮다는 듯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강지훈은 의외로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드러나지 않는 편이었는데, 유독 이준에게는 예외였다.

여우같은 자식, 이라고 몇 번이나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걸 우진은 집안 모임 때마다 들었다.

“그런데 세 분이서 원래 아는 사이신가 봐요.”

“….”

“직급도 다르고, 같은 본부도 아니신데. 사내에서 말 놓기 쉽지 않잖아요?”

“그건 그렇지.”

강지훈은 그렇게 말하며 입꼬리 한쪽을 올렸다. 비아냥대는 얼굴이었는데 우진은 그 표정이 굉장히 오랜만이라 생각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지훈은 한동안 저런 얼굴로 사람을 대한 적 없었던 걸로 기억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차갑고 낯선 얼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금방 가라앉았다.

“집안끼리 아는 사이예요. 민재 주임.”

그 순간 이준은 눈을 깜빡거리며 민재를 쳐다보고선 말을 이었다.

배이준은 가끔, 사람을 전투적으로 홀리기 위한 무기들을 가지고 있는 듯해 보였는데, 그중 하나가 얼굴이었다.

저건 잘보이고 싶을 때 이준이 자주 하는 행동 중에 하나였다. 지훈에게로 갔던 시선이 금방 이준에게로 옮겨졌다.

“네?”

“동네 친구라는 뜻이죠.”

“아.”

“누가 친구야?”

지훈은 그렇게 말하며 김신의 손에서 맥주 캔을 뺏어 들고는 민재를 도와 음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지훈과 이준의 발이 뒤엉켜 결국은 넘어지는 바람에 도저히 회생 불가했던 1조는 2인 3각 대회에서 꼴찌를 했고, 김신은 그 틈을 타 속도를 높여 1등을 한 참이었다.

김신은 즐거워 보였지만, 어쩐 일인지 이겨놓고도 연우는 풀 죽은 얼굴이었다. 한참을 투닥거리고 있는 지훈과 이준을 보고 있던 우진은 상으로 타온 과일 바구니를 들고 부엌 쪽으로 걸어가는 김신을 뒤따랐다.

김신이 과일 바구니를 뜯으며 우진에게 손짓해 결국 둘은 나란히 싱크대 옆에 섰다. 김신의 숨소리가 나직하게 옆에서 울렸다. 또 이상하게, 마음이 울렁거린다.

“연우 주임도 부르지.”

“….”

우진이 그렇게 말하며 김신의 어깨에 머리를 콩, 하고 부딪히자 김신이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몸을 움직이는 김신을 보고 싶다는 일념하에 내려갔던 체육관에는 큰 키를 구기고선 연우와 자신의 발목을 서로 묶고 있는 김신이 있었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김신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목 위에까지 지퍼를 올린 김신이 천천히 굽혔던 허리를 들어 올리자 스탠드 석 앞에 앉아 있던 여사원들이 소리를 꺅꺅 질러댔다.

‘어마어마하죠?’

‘…네?’

어느새 옆에 앉아 있는 민재가 물을 마시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전에 경기에 참가했던 모양이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했다.

‘인사팀의 계략이라니까요. 여직원들이 사내체육대회 참가 안 한다니까 김신으로 홍보한 게 틀림없어요.’

‘…하하,’

‘어, 웃으실 줄도 아시네요?’

‘아….’

민재는 얼굴이 제법 포동포동한 타입의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김신과 자주 어울리는 모양이었다.

가끔 김신과 함께 있으면 민재에게서 문자 메시지나 전화가 자주 왔다. 대부분 술자리에 나오라는 이야기였던 거 같은데 김신은 귀찮은 표정을 자주했다. 그게 나름 귀여워 우진은 또 입꼬리가 올라섰다.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데.’

‘….’

‘김신 여친 있는 거.’

민재가 장난스런 얼굴로 혼잣말처럼 입을 여는 순간 우진은 심장 한가운데가 뜨끔했다. 결국 아무 대답도 못하고 민재에게서 시선을 돌려 출발선에 서 있는 직원들을 쳐다보았다.

연우와 서로 발목을 묶어주며 이것저것 말을 건네던 김신이 스탠드석으로 시선을 둔 건, 정말 우연이었다. 그 순간, 우진은 김신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김신은 뭔가 당황해하면서도 반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일할 때와는 달리 부스스하게 내려온 앞머리 덕분인지 몰라도 한참 어려보이는 듯했다.

땅을 딛고 서 있는 발아래에서부터 솟아나는 색채들이 있었다. 김신의 시선에 우진의 심장이 알록달록하게 변했다.

이런 마음이 보일 것만 같아 애꿎은 민재에게 말을 걸었다.

“진심이에요?”

김신이 웃으며 팔꿈치로 우진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진심인데?”

“아닌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씻고 있던 포도알 하나를 따서 김신은 우진의 입에 넣어주었다.

“저기 아, 해봐요.”

그렇게 말하는 김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이상해, 라고 말하고 돌아서는데 뒤에 이준이 멍하니 서 있었다.

“너네들 지금 뭐한 거?”

“포도 씻는 중.”

우진은 자신에게 당황하면 더 침착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걸 요즘 새삼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남이 주는 거 입에도 안 대던 게.”

“손이 없으니까.”

“넌 손이 하나냐?”

“아 맞다, 강 대리.”

우진이 지훈을 부르자 민재와 함께 거실에서 치킨박스를 열고 있던 지훈이 부엌 쪽을 쳐다봤다.

“왜, 우진아.”

“아까 배이준 주임이 너한테 뭐 물어볼 거 있다던데.”

“…뭐?”

“요즘 따라 운동하, 읍!”

“아, 맞다 우진아, 내가 너한테 할 이야기가 있는데 말이지.”

자신의 몸에 손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우진이 갑자기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선 입을 틀어막는 이준의 손바닥을 쳐내자, 이준의 잔뜩 당황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준의 목 부근이 울긋불긋해져 있었다.

“하던 말이나 마저 해. 운동이 뭐가 어쨌다고?”

“아무것도 아니야!”

강지훈이 일어서서 부엌으로 걸어오자 손사래 치는 꼴이 더욱 수상했다.

우진은 어깨를 약간 으쓱하고는 무심하게 소파로 가 지훈의 옆에 앉았다. 뒤따라온 김신이 과일을 놓고선 우진의 맞은편에 앉은 민재의 옆으로 가 앉았다. 김신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이준과 지훈을 쳐다보고 있었다.

“김신한테 감사하다고 말해야 하나.”

어느새 사과 하나를 깨물고 있는 이준이 소파에 풀썩 앉으며 입을 열었다.

“넌 정말 뻔뻔하다. 이걸 네가 먹어도 된다고 생각해?”

지훈이 어이없다는 듯이 맥주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이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치면 너도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냐? 김신이 2인 3각 마지막 주자 1등해서 받은 건데.”

“네가 중간에 허리만 안 잡았어도 안 넘어졌어.”

“어이가 없네. 허리 안 잡고 어딜 잡아 그럼? 그리고 내가 너 허리 부근 약한 걸 어떻게 알아! 미친. 아무 데나 더듬어도 꼼짝 안 할 거같이 생긴 놈이.”

“내가 어떻게 생겼다고?”

그 둘을 쳐다보던 우진은 탁자 위의 맥주를 하나 땄다. 캔을 따는 것만으로도 금방 취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주 어릴 땐, 저렇게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숨 막히는 공기 속에서 서로 식사를 하거나, 공부를 하고, 부모님들의 손에 이끌려 한마디도 나누지 못하고 집으로 가는 일이 많았다.

특히나 강지훈은 더욱 그랬다. 의젓해 보이는 얼굴을 하면서도 유독 우진에게 잔인하게 굴었다. 지금의 얼굴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이준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사람 좋게 웃고 있는 지훈을 보며 우진은 입술을 조금 씹었다.

“출장 가서 내가 뭔갈 좀 사오긴 했는데.”

지훈의 얼굴을 밀어내며 이준이 소파 아래에 있던 면세점 쇼핑백 하나를 꺼내들었다.

“…뭐?”

“뻔한 거 아냐? 술이지.”

“우와, 이준 주임님 최고!”

민재가 옆에서 이준을 보며 박수를 쳤다. 이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면세점 쇼핑백 안에 들어있던 백주 한 병을 꺼내들었다.

“마오타이?”

“치킨이랑 먹어요, 그러기엔 안주가 좀 아쉽긴 하다만.”

백주를 유난히 좋아하는 이준이 종이컵에 백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중국술 특유의 향이 올라와 우진이 미간을 찌푸리자 자신을 바라보는 김신의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을 마주치며 약간 입꼬리를 올렸더니, 안심하는 얼굴을 했다. 김신은 생각보다 우진의 웃는 얼굴에 약한 모양이었다.

“난 그냥 맥주 마실게.”

“뭐야. 최우진 백주 좋아하잖아?

“나 약간 체한 거 같아서.”

“그럼 술 마실 생각 말고 과일이나 먹어. 저녁도 새모이만큼 먹어놓고서.”

우진의 옆에 앉아 있던 지훈이 그렇게 말하며 우진의 머리칼을 쓱 쓰다듬었다. 우진이 고개를 돌려 그 손길을 약간 피하자 이준과 김신이 동시에 풋, 웃었다. 그걸 보고 있던 민재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세 분이서 진짜 친하신 거 같아요.”

“그래 보여요?”

이준이 백주를 따르며 웃었다. 우리, 안 친한데, 라고 말하며 웃는 얼굴이 야살스러웠다.

“특히 지훈 대리님이 우진 대리님 엄청 챙기시네요.”

“저건 아낀다기보다는, 감시하는 거죠. 시찰견 같은 거.”

이준은 그렇게 말하며 강지훈을 돌아봤다.

“내가 틀렸나?”

지훈은 이준의 물음에 답 없이 앞에 놓인 백주를 스트레이트로 마셨다. 지훈은 도수가 센 술에 약한 편이라 우진은 무심결에 지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자신을 쳐다보는 지훈의 눈동자가 있었다. 김신과는 달리, 어딘가 갈색이 도는 여린 눈동자. 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2주 남았어.’

김신이 떠난 후 잠결에 뒤척이다 우진은 자신의 이마를 짚는 서늘한 손 하나를 발견했다. 강지훈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우진이 혼자 지내는 걸 극도로 보기 싫어하면서, 누군가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것 또한 싫어했다. 어딘가 그는 마음 한쪽이 망가져 있는 듯 했다.

‘아프지 마.’

그렇게 말하는 강지훈은, 늘 상처를 주는 사람의 편이었다. 그걸 최우진은 잊지 않았다.

***

- 오늘 점심 어때요?

김신은 우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놓고선 기지개를 쭈욱 폈다. 금요일까지는 워크숍으로 바빴고, 주말은 그 여파로 서로 데이트를 하질 못했다. 월요일 출근하자마자 정책실을 쳐다봤는데, 지훈과 우진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연우에게 묻자 외근이라는 말만 돌아왔다. 요즘 들어 지연우가 조금 쌀쌀맞아진 듯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사내체육대회 때 일 때문이리라 짐작만 했다. 릴레이가 끝난 직후 연우가 사귀는 사람이 있냐고 묻길래, 그렇다, 라고 대답했더니 제법 우울한 얼굴을 했다.

‘나한테 관심 있는 줄 알았는데.’

‘어….’

그건 사실이었기도 했다. 왠지 좀 쑥스러워 쳐다봤더니, 그럼 됐어요. 라고 말하는 연우의 쿨한 얼굴과 마주했다. 같은 층이라 자주 마주칠 테니 못 들은 척해 달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연우가 화사하게 웃었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아마 점심 전에 돌아올 거라는 연우의 말에 김신은 우진과 밖에서 점심을 함께 먹을 계획이었다.

‘찾아가서라도 볼걸 그랬나?’

주말 내내 일이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확실하게 말을 해주지 않아 김신은 애가 탔다. 주말에 유난히 메시지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젯밤 전화통화가 마지막이었다. 내일 봐요, 라는 말에 유난히 답이 없었다. 그날따라.

- 김신

메시지가 알람이 울려 채팅창을 켜자, 시우에게서 알람이 와 있었다.

- 어 왜.

- 전화통화 가능하냐?

급한 건인 것 같다는 예감이 김신의 몸을 관통했다. 빠르게 핸드폰을 들고 사무실을 빠져나와 복도에서 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지.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 어, 김신.

“무슨 일이야?”

- 나 갑자기 기억났는데 말이야.

“….”

- 그 왜 너네 회사 앞에서 만난 두 사람.

“….”

- 사실, 난 두 사람 모두 약간 안면이 있는 느낌이었단 말이야.

“뭐?”

- 어제 동아리 앨범 뒤지다가 생각났어.

“….”

- 그 사람, 너 기억나? 수영장에서 건졌던 선배 하나.

“….”

- 왜, 그 자살시도했던, 그 선배 있잖아. 이름이 뭐였더라, 너처럼 외자였….

“유진.”

침잠했던 혼돈의 수면 위로 기억이 튀어 올랐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