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 주임과 최 대리-27화 (27/60)

27화. 사내체육대회

“아, 와 있었어요?”

카드키로 문을 열고 502호로 들어서자, 거실 소파에 기대 있던 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김신은 빠른 걸음걸이로 다가와 그의 앞에 허리를 숙였다.

“숨이 가쁜데.”

“누구 때문인데.”

김신은 그렇게 말하며 손으로 우진의 파리한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몸이 차가워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감싸 안자 아무렇지 않게 우진은 금방 기대왔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죠.”

“화났어?”

“괜찮아요, 지금 아프다고 하니까.”

어디 봐요, 하고 말하며 김신은 우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눈을 감으려길래 손으로 뺨을 감싸자 우진이 응, 하고 목울대에서 올라오는 소리를 냈다.

이러는 걸 보면 고양이과가 틀림없긴 한데, 자주 골골거리며 앓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금방 피로함을 느끼는 데도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혹사하는 타입이었다.

결국 우진이 먼저 후, 하고 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체했어.”

“도시락 많이 먹지도 않았잖아.”

“….”

“불편했어요?”

등을 쓸어주는 동안 우진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혼자 갔어요? 약국에?”

“응.”“왜?”

“시간 뺏을까 봐.”

김신은 우진의 등을 쓸다 말고 뒤로 물러나 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입술이 조금 마른 것 같았다. 물을 갖다주는 대신 입을 살짝 맞췄다.

눈이 조금 커진 우진을 보고 있다가 입술을 떼고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한텐 체육대회가 내 시간을 뺏는 느낌인데요.”

호선을 그리는 입술. 그때 우진이 입을 열었다.

“표정이 이상한데.”

“내가요?”

“응.”

“야한 생각 했거든요.”

뻔뻔하긴, 하고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우진의 목덜미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크림에 분홍색을 섞은 듯한 색. 처음 봤을 때도 저 흰 피부에 크림처럼 퍼지는 분홍빛이 눈에 밟혔다. 자신도 모르게 목에 입술을 묻고 크게 숨을 쉬었다. 우진의 향이 났다. 새벽빛 같고, 어스름한데 포근하고 달콤하고, 어딘가 슬픈.

“…간지러워.”

그렇게 말하는 뺨을 붙잡고 김신은 키스했다.

분명 예전엔 예고 없는 키스에 버둥거리기 바빴던 거 같은데 뒤로 넘어가려는 자그마한 뒤통수를 붙잡자 우진이 스스럼없이 팔을 들어 올려 김신의 목을 감았다.

그 바람에 김신은 자기도 모르게 깊게 키스하며 우진을 소파 위로 눕혔다. 결국 위에 올라탄 형세가 되어버린 김신이 우진이 힘들어할까 봐 팔을 짚고 상체를 들어 올리자, 우진이 그 팔을 잡고선 아래로 내려 체중을 싣게 했다. 그 무게에 우진이 가쁜 신음소리를 흘렸다. 그게 또 미칠 듯이 야해서 김신은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물었다.

“읏….”

“아파요?”

자기도 모르게 심취했던 모양이다. 목 안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우진이 고개를 젓고는 풋 하고 웃었다.

“누가 들어오면 어쩌려고.”

“그러게.”

머리를 넘겨주며 김신도 웃었다. 숨이 찬 듯해서 소파에서 내려오려는데 우진이 목을 다시 둘러 감아 자신을 보게 했다.

“아프니까 어리광이 늘었네요.”

“응.”

“이게 더 좋은데?”

그 순간 삐리릭,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 김신이 자기도 모르게 소파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 김신 여기 있었네?”

다행히도 커튼이 쳐 있는 거실이 조금 어두웠던 탓에 김신은 천천히 일어나 들어오는 민재의 얼굴을 쳐다봤다.

“최 대리님도 여기 있는 거야?”

“….”

“설마, 자는 거?”

갑자기 톤이 낮아진 목소리로 사근대는 민재를 멍하니 쳐다보다 재빨리 소파를 내려다보니 우진이 눈을 감고선 모로 누워 있었다. 설마 자는 척하는 건가, 싶었는데 정말인 듯했다. 김신이 그런 우진을 쳐다보다 재빨리 민재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런가 봐.”

“오오, 빨리 나가야겠다.”

그렇게 말하는 민재가 사뿐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있던 김신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연기까지 하네, 싶어 내려다보자 우진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문을 열고 다시 나오는 민재를 따라나섰다. 카드키를 들고 문을 닫고서 복도로 나오자 민재가 후우, 하고 숨을 뱉었다.

“난 저 사람, 왜 이렇게 유리 같냐.”

“뭐?”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지금 얼빠진 얼굴일 거 같아 표정관리를 하려는데 민재는 아랑곳없이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게 좀 그래. 툭 치면 깨질 거 같아.”

“헛소리.”

“그나저나 전화 받으러 들어갔을 텐데 자고 있어서 안 놀랐냐?”

“어?”

“여친 전화 받으러 간 거 아니었어?”

“어어….”

“부장님이 찾겠다, 얼른 내려가자.”

얼른 말꼬리를 돌리며 김신은 민재의 어깨를 붙잡아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다. 심장이 크게 뛰는 거 같아 숨기기 어려웠다.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드르륵, 하고 메시지 알림창이 떴다.

-얼굴 보니 한결 나은 것 같아. 고마워.

어쩌지.

김신은 왠지 온 몸에서 핏줄이 달음질쳐 심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너 내가 한 얘기 들었냐?”

“응?”

“미친. 야 빨리 내려. 멍청한 얼굴 그만하고.”

뒤통수를 때리려는 민재의 손을 피하며 김신은 웃었다. 누가 입꼬리를 좀 내려줬으면 좋겠다 싶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

우진이 눈을 떴을 때, 몇 시인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거실이 어두워져 있었다. 자는 척을 하려다 진짜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더듬어 옆을 짚어보았는데 아무도 없어 서늘한 느낌을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새로울 것 없는 일상이었다.

놀라울 정도였다. 마치 마른 스펀지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애정을 한꺼번에 흡입해서 뚱뚱해진 스펀지. 우진은 멍하니 앉아 있다 목이 깔깔해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소파 앞 협탁에는 생수 몇 병이 놓여 있어 하나를 따서 마셨다. 배도 조금 고픈 것 같았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메시지 세 개가 와 있었다.

- 자요?

- 체했어도 배고플 텐데. 나 조금 있으면 경기 시작해요. 마치면 바로 갈게요.

- 최우진, 너 전화 왜 안 받냐?

앞에 두 개는 김신, 나머지 하나는 강지훈의 것이었다. 우진은 홈버튼을 눌러 잠금화면으로 핸드폰을 돌려놓고는 자신의 짐이 놓여 있는 방으로 걸어가 카디건을 챙겨 나왔다.

몸을 움직이는 김신을 보는 건 오랜만이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김신의 문자는 5분 정도 전에 와 있는 것이었다.

지금 내려가면 김신이 어떤 경기를 하던 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생수통을 손에 쥐고 카드키를 챙겼다. 나가기 전에 거울을 보니 머리가 조금 헝클어져 있어서 손으로 슥슥 다듬었다. 문을 열고 복도를 걸어가려는데 몸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별일이네.’

한번 아프면 오래도록 아팠고, 만성적으로 피로감을 자주 느끼는 탓에 몸이 늘 무거운 편이었다. 약국에서 체한 것 같다는 이야기에 소화제를 샀다. 물론 약에도 내성이 생겨 그걸 먹어도 별 효과를 느끼지 못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음에도 항상 그랬듯, 약사가 시키는 대로 먹었다.

분명 머리가 아프거나 잠이 안 오거나 할 줄 알았는데 한 시간이나 낮잠을 잔 모양이었다. 거기다 일어나보니 체기가 좀 가라앉아 있었다. 배도 고팠고. 무엇보다 단것이 먹고 싶었다.

‘김신이 단걸 좋아하지.’

김신이 덩치가 큰 강아지 같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좀 의외였다. 뭐든 가리지 않고 다 잘 먹는 편이었는데 의외로 김신은 단걸 특히 좋아했다.

밥을 먹고 초콜릿 바를 두어 개 고르더니 포장을 벗겨 입에 물려주길래, 쳐다봤더니만 빙그레 웃었다.

- 저 단거 좋아해요.

- ….

- 안 그렇게 생겼단 이야길 듣긴 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쑥스러운 듯 수줍게 웃으며 초콜릿 바를 한입 무는데, 그게 꽤 귀여워 보였다.

확실히 김신에게는 대형견 같은 느낌이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꼬리를 흔들 것 같은 이미지. 우진은 편의점에 들려 초콜릿이나 좀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라져가는 시간에 특별한 색을 입혀주는 사람.

흑백 밖에 없었던, 눈을 감은 채 더 이상 뜨지 않아도 좋을 만했던 자신의 시간에 색을 입혀주고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사람.

사실 단걸 안 먹어도, 입안이 달 정도였다.

“표정이 이상한데?”

“….”

뜻밖에 로비에서 마주친 인물은 배이준이었다.

“땡땡이치고 뭐하냐?”

“복귀중인데.”

“오 그럼 같이 가자.”

“싫은데.”

“같이 가. 너 방향치라 실내 체육관 어딘지도 모르면서.”

그 말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어 우진은 이준과 함께 나란히 걸었다.

“강지훈 너 찾느라 난리던데, 어디 갔냐?”

“숙소에 있었어.”

“하여간. 걘 늘 자기 발치에 널 두고 찾더라.”

뼈가 있는 말이었다.

“강지훈 요즘 운동하냐, 몸 왤케 좋아.”

“….”

“그 표정 뭐지? 왜?”

“그냥 이상해서.”

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멈춰선 이준을 쳐다봤다. 약간 쌀쌀한 느낌이 있어 카디건을 여미며 우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준은 깔끔하게 머리를 올린 상태였는데,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이마가 참 반듯하고 이뻤다. 어딘지 모르게 새초롬한 느낌이 있어서 이준은 포근한 색감의 옷이 잘 어울렸다. 콘트라스트가 강한 옷이 잘 어울리는 강지훈과는 또 다른 느낌의 미남이었다.

“뭐가?”

“넌 항상 나랑 있을 때 강지훈 이야기를 하더라.”

“….”

“막상 단둘이 만나지도 않으면서.”

“뭐래, 미쳤냐?”

갑자기 당황하는 이준을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던 우진이 미묘하게 고개를 틀었다.

배이준은 핏줄이라고 해야 하나, 집안의 성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슨 일이든 뻔뻔하게 처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잘못했을 때는 잘못했다고 말을 할 줄 아는 뻔뻔함, 그러나 여전히 그 잘못을 또다시 저지를 것을 예고하는 뻔뻔함, 아주 고급스런 허세를 부릴 줄 아는 처세술이 뛰어난 남자였다. 목부터 붉어지는 당황한 기색이 매우 신기했다.

“뭐, 뭐야?”

“넌 왜 나와 있었지?”

“…아, 그냥 좀 돌아다니느라.”

“강지훈 찾으러 다닌 건 아니고?”

이준의 까만색 눈동자가 커지는 걸 이번에는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아예 입까지 멍하니 벌리며 당황한 얼굴을 하는 이준을 보면서, 사람을 곯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우진은 생각했다.

***

“오빠, 왜 이렇게 긴장한 거야?”

“어?”

2인 3각 릴레이가 남녀 짝을 이뤄 하는 건 줄 알았다면 당장 안 한다고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김신은 펜스 밖 스탠드석에 무심하게 앉아 있는 우진을 쳐다봤다.

릴레이만 마치면 바로 숙소로 올라갈 예정이었다. 분명 잠이 들었을 거라 예상했던 인물이 스탠드석에 떡하니 앉아 있는 걸, 김신이 발견한 건 마침 서로 묶인 발목 때문에 연우와 웃으면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놀란 눈을 했더니 우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있는 민재와 대화를 나눈 거 같다.

“오빠, 어깨에 힘 좀 빼. 그러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아.”

심지어 상대는 강지훈과 배이준의 조합이었다. 어이없게도 여자 직원이 한 명 모자라서 남자 두 명을 붙인 모양으로, 강지훈이 발목을 묶고 있는 와중에 이준은 끊임없이 불평을 해대고 있었다. 출장 중에 만난 이준은 사근사근한 타입의 사람이었는데 유독 강지훈에게 뾰족하게 구는 데가 있었다.

“이길 수는 있을 거 같은데.”

“저쪽은 남자 둘인데?”

“분명 넘어질 거야.”“응?”

그래도 침이 바짝 말랐다. 자신도 모르게 스탠드 쪽으로 돌아간 시선에 우진의 눈동자가 얽혔다. 눈이 웃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자, 준비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인사팀 사원의 목소리에 김신이 시선을 돌리려하자 우진이 눈을 마주치며 조그맣게 입을 벌려 속삭였다.

잘, 하고 와.

탕, 하는 소리가 김신의 심장에서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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