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하반기 전사경영전략 워크숍
- 점심 식사는 도시락으로 대체합니다. 오후 3시부터 실내 체육관에서 사내 체육대회를 실시할 예정이오니, 오후 2시 30분까지 조별로 로비에 대기해주세요.
사당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전북 무주로, 리조트에 있는 호텔을 통째로 빌려 워크숍이 진행될 모양이었다.
인사팀은 벌써부터 바쁘게 움직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셔틀버스는 총 4대가 움직였는데, 워크숍에서 같이 움직일 새롭게 짜인 조들로 좌석이 배정되어 있다고 했다.
각 조는 직급별, 팀별로 골고루 배정이 되었지만 숙소는 달랐다. 처음 참석해본 워크숍이 만만치 않을 거 같아 한숨을 몰아쉬자, 옆에 있던 지훈이 그런 우진을 쳐다봤다.
“괜히 간다고 그랬다 싶지?”
“….”
“출장이라도 잡아둘걸 그랬지?”
“그만해라.”
며칠 전의 저녁식사 이후 묘하게 어색해진 감이 있다고 생각했던 지훈이 웬일인지 먼저 우진에게 말을 걸었다.
웃는 얼굴이 예전처럼 밝아 보이는 듯해서 우진은 조금 안심했다.
오전 인사팀이 보내준 액셀 파일에는 지훈과 우진은 같은 숙소로 배정되어 있었다. 팀원들끼리 조는 달랐지만 팀별로 동일한 직급들을 하나의 숙소로 묶은 듯 했다. 아무래도 그 편이 숙소에서 쉬기 편할 것이라는 인사팀의 배려였다.
“도시락 들어줄까?”
“됐어.”
무심하게 답하고 복도를 걸어가 코너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려는데, 뒤에서 우진의 어깨를 잡아채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진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밝게 웃는 얼굴의 김신이었다. 지훈이 미간을 찌푸리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김신은 휴,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로 성큼 들어섰다.
뒤에는 동기인 민재가 뻘쭘하게 도시락을 들고 걸어들어 오고 있었다. 가볍게 목례하던 그가 우진과 지훈을 번갈아보며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5층?”
김신이 우진에게 그렇게 물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김신은 웃으며 5층을 누르고, 우진이 들고 있던 가방을 손에서 넘겨들었다. 지훈의 표정이 아낌없이 구겨졌다.
“저도 5층인데, 우연이네요.”
그렇게 말하며 김신은 입꼬리를 올려 환하게 웃었다. 민재는 그런 김신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찼다.
“우연은 무슨 우연이야. 우진 대리님, 우리 같은 방이에요. 이 자식이 우진 대리님 뒷모습 보자마자 저한테 도시락 맡기고선 뛰어왔다니까요.”
민재는 그렇게 말하며 도시락 두 개를 들어서 우진과 지훈의 앞에 보여주었다. 김신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우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마에 앞머리가 약간 헝클어져 있어서, 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얼굴에 손을 뻗어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순간, 지훈의 표정이 거기서 더 엉망으로 망가졌다. 다행히 민재는 들고 온 도시락을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게 같은 방이네요.”
먼저 숙소를 확인했던 건, 사실 김신이 아니라 우진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워크숍 참석 의지가 전혀 없었던 우진이 여기까지 오게 된 건 8할이 김신 때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1박 2일 동안 못 보는 게 아쉽다는 한마디에 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워크숍 참석 여부 메일에 동의하고선 회신해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같은 팀의 지연우 주임이 몇 번이고 되묻기도 했다. ‘진짜 참석하세요?’ 그렇게 연우의 얼굴이 당황스러워 우진은 얼버무리느라 혼이 났다.
“식사 같이해도 되겠네.”
혼잣말처럼 말하며 김신은 우진의 시선과 마주했다. 보기에도 아까운 사람이라 우진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아마 귀 끝이 조금 빨개진 듯 했다. 겨울엔 아무리 운동을 해도 열이 오르지 않아 걱정이었는데, 이젠 그런 생각조차 할 여유가 없었다.
“내리시죠.”
침묵을 깨며 지훈이 무거운 목소리로 우진의 손목을 끌었다. 지훈은 요즘 따라 차가운 얼굴을 자주했다.
근무 시간 같은 건 전혀 생각지 않고 출근하던 사람이 사무실을 떠나는 일도, 업무를 게을리 하는 법도 없었다. 제법 잦았던 지방 출장이나 외근도 최근 전혀 없어 팀장이 의아해할 정도였다. 대신 술을 자주 마시는 듯했다.
“어이쿠, 이게 누구야?”
카드키로 숙소 문을 열며 들어가는데, 지척에서 누군가가 반갑게 인사했다. 아마 돌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목소리라 우진은 눈을 한번 감았다가 떴다.
“어, 배이준 주임님!”
같은 층에서 근무하는 민재가 큰 소리로 이준에게 인사했다. 이준은 하얀색 차이나 칼라 셔츠에 청바지를 심플하게 입고 있었는데, 캐주얼한 복장이 산뜻하게 잘 어울려 보기 좋은 얼굴이었다.
이준의 옆에는 같은 팀으로 보이는 여자 직원 몇 명이 몰려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적응하기 힘든 타입의 사회성이라고 우진은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지훈과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는데, 지훈은 겉으로는 따뜻하지만 어느 정도 벽이 있는 타입이라면, 이준은 차갑게 굴면서도 마음이 여려 오지랖이 넓은 느낌이었다.
우진이 말없이 고개를 돌리자 이준이 어허, 하고 헛기침을 하고선 복도를 천천히 걸어왔다.
“또 옆방에 배정해준 인사팀에게 고맙다고 연락이라도 해야 하나?”
“….”
“얼굴 좋아 보인다, 최우진.”
“그 말 독일에서도 여러 번 했잖아.”
우진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젓자 이준이 허리를 굽히며 웃었다. 이준은 어렸을 때부터 우진을 놀리는 걸 꽤나 즐겼다.
다만 우진이 반응해주는 일이 극히 드물었기에 더더욱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며 놀려댔다. 나중엔 집안 어른들이 그런 이준을 데려다 심하게 꾸짖을 정도였다.
다만 이준은 어른들 앞에서는 반성하는 척을 하고선 단둘이 있으면 또다시 우진을 놀리는 것에 열을 올렸다.
‘왜 표정이 없는 거냐, 가식이냐, 실제로 마음에 어둠이 있는 것은 아니냐, 좋아하는 애는 생겼냐.’ 등등 사적인 것과 인성적인 것들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말을 걸었던 이준을, 지금 와서야 혹시 자신과 친해지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우진은 요즘 들어 자주 자문하게 되었다.
“어, 강모 군도 여기 있었네?”
“….”
“우진이 옆에 붙어 있으니까 좋으신 모양입니다. 강 대리님.”
지훈의 얼굴 근육이 오늘따라 에너지 소모가 많을 예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훈은 말없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는데, 옆에 서 있던 민재가 말없이 김신의 소매를 당기는 걸 보니 꽤나 화가 난 얼굴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김신은 말없이 열린 방문 안으로 도시락을 든 채 걸어가는 민재의 뒤로 우진을 바라보았다. 함께 있어주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바라보는 시선 덕분에 제법 안심이 되어 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늘어트렸다.
결국 그런 우진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김신은 민재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지훈이 이준의 어깨를 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말조심 좀 하고 삽시다. 배이준 주임님.”
“말조심을 내가 왜 해? 내가 누구네 강아지도 아닌데.”
“….”
“너나 조심하고 다녀. 어디 클럽에서 거나하게 노셨다는 이야기 내 귀에 안 들리게 좀 해.”
“…뭐?”
“어떤 분이 아주 걱정이 많으시댄다. 어디서 누구랑 놀아나는 건지 관심 없으니까, 그냥 조심 좀 하세요. 강지훈 대리님. 우리 우진이 옮을까 봐 걱정되니까요.”
“…야!”
“한동안 안 그러시다가 요즘 부쩍 왜이러시나 몰라. 뭐 얼마나 진하게 놀든 나야 별 상관은 안 하는데 파리 꼬이는 건 딱 질색이라.”
그럼, 점심 식사 맛있게 하세요, 라고 끝맺던 이준이 돌아서며 우진을 향해 생긋 웃었다.
우진은 걸어가는 이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는 지훈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훈이 손을 들어 이마를 짚고 있었다.
이 표정은 우진이 태어나 지훈에게서 두 번째 보는 것이었다. 늘 여유롭고 적당한 온도와 거리감을 유지하며, 사회성이 좋은 강지훈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갑게 타오르는 분노를 빠르게 잠재우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어색한 느낌의 표정.
이제야 이전까지 몰랐던 감정의 뿌리들이 조금씩 흙더미를 밀어내며 솟아오르는 듯했다.
“배이준이 말하는 거 다 거짓말이야.”
“….”
“그러니까 최우진….”
“어, 저기, 아무런 상관없는데 난.”
표정의 변화없이 우진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
“나 먼저 들어간다.”
우진은 지훈의 어릴 적을 기억했다. 항상 좋은 옷에, 좋은 장난감에 고급스러운 책들을 가져와 우진의 앞에 펼쳐놓고 일부러 가지고 놀았다. 우진도 지훈이 그 따위 물건들에 관심이 있어서 그렇게 구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최우진.”
“….”
어깨를 잡아 이끄는 손은 가끔은 우악스러웠다. 평생, 친구로 지낼 수는 없을 것 같은 부류의 인간….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어?”
“….”
“내가 왜, 너를 한국으로 데려왔….”
“난 한국 싫어해.”
“….”
“물론 외국은 더 싫어하지.”
“….”
“사실 아예 좋아하는 게 없던 거 같기도 한데.”
“….”
“그러는 너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생각해본 적 없이 네 맘대로 행동했던 거 같긴 해. 강지훈.”
강지훈은 그런 부류의 인간과 닮아 있었다.
‘핏줄이니까.’
차갑게 식은 검은 머리의 여자가 우진을 향해 속삭이던 그때가 생각나 우진은 지훈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듯 방 안으로 들어섰다.
지금 당장, 온기가 필요했다. 큰 손과, 따뜻한 시선. 우진은 김신이 필요했다.
***
“핸드폰 손에 쥐고 뭐하냐?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민재가 조별로 앉아있던 체육관의 펜스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며 김신에게 말을 걸었다. 김신은 조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참가할 종목을 정한 뒤 금방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아, 뭐 확인할 거 있어서.”
“너 요즘 연애하지?”
“…티나냐?”
“와 씨, 한 번을 무르는 법이 없네. 직멘을 바로 쐈어.”
“무를 이유가 없잖아.”
“너 원래 이런 타입이냐? 연애하면?”
“뭐 그런 편인가보지.”
“뻔뻔하다.”
“감사.”
김신은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었다.
“무슨 종목 참가하냐?”
민재가 양 손에 들고 있던 캔 커피를 김신에게 던져주며 물었다.
“2인 3각 릴레이? 뭐 그런 거던데.”
“뭐야, 난 그런 거 안 시켜주던데. 이거 인사팀 사심 들어간 거 아냐? 난 씨름이야 젠장.”
“…오.”
김신이 얼굴이 망가진 채로 자신의 옆에 털썩 앉는 민재를 보며 혀를 찼다.
“힘 좋아 보였나 보지.”
“그거 성희롱이야.”
“미안하다. 느꼈구나.”
“정말, 김신 애인 있는 거 동네방네 알리고 다녀야해.”
민재는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푹 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김신에게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강지훈 대리랑 최우진, 배이준 좀 이상하지 않냐?”
“….”
“셋이 사이가 엄청나게 안 좋은가봐.”
“그래?”
“아, 같은 방 쓰기 껄끄러워 죽겠네. 아까 도시락 먹는데 진짜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내가 보기엔 입으로 잘 넘어가던데?”
“야!”
말은 아무렇지 않게 했지만 사실 지금 김신은 우진에게 전화를 하려던 참이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 잠시 나갔다 오겠다던 우진은 2시 30분이 되어도 로비에 나타날 생각을 안했다. 불안해진 김신이 참가해야 할 종목을 확인하고 있는 와중에도 다른 조들을 살펴봤지만 우진의 뒤통수는커녕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질 않았다.
민재가 커피를 따서 마시는 동안 김신은 조용히 채팅창을 열어 우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김신이 핸드폰의 홈버튼을 눌러 잠금 화면으로 돌리려는데 민재가 멀끄러미 그런 자신을 쳐다보며 혀를 찼다.
“왜?”
“너 여친한테 지금 문자했냐?”
“…아니.”
“표정 아주 가관이던데.”
“내가 뭐?”
“아놔, 이때까지 김신 카리스마 작렬하는 줄 알았던 여직원들한테 사진이라도 찍어서 보내야했던 건데!”
“애인한테 안 그런 네가 이상한 거야.”
드르륵, 손에 쥔 핸드폰의 진동이 울려 김신은 괘씸하단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는 민재의 말을 막으며 일어섰다.
“미안, 나 잠시 일어나봐야겠다.”
“와, 김신 진짜!”
“2인 3각? 그거 시작하면 나한테 문자 하나 쏴.”
“신입인데 이래도 되냐?”
“….”
그렇게 외치는 민재를 뒤로한 채 울리는 전화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심정으로 복도를 돌아 걸어 나가 전화를 받았다.
“어디예요?”
“약국.”
덜컥,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 김신이 미간을 찌푸렸다.
“약국은 왜?”
“체한 거 같아서 밖에 나왔는데, 안 내려가길래. 약 사러 나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