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 주임과 최 대리-24화 (24/60)

24화. 벗겨진 마음, 빗겨간 기억

“맛있냐?”

“어.”

앞에 놓인 술병을 가리키며 윙크를 하는 시우를 한참 보고 있던 김신이 웃으며 작은 잔에 술을 따라주자, 그가 캬아, 하고 귀여운 척을 하며 술잔을 꺾었다.

김신이 결국 손을 들어 강아지처럼 곱실거리는 시우의 머리칼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시우는 곧장 그 손을 맞잡고는 흔들흔들했다. 스킨십을 좋아하는 편인 그는 그중에서도 김신의 커다랗고 뜨거운 손을 가장 좋아했다.

“주완이는 다 좋은데, 늘 손이 추워.”

“어쩔 수 없잖아. 요리산데.”

“그래도 아쉽다.”

“그거 하나 아쉬운 거 가지고 나라 잃은 표정이냐.”

김신이 그렇게 말하며 시우의 앞 접시에 유린기 한쪽을 올려주었다. 시우는 먹는 것에 비해 살이 붙지 않는 타입이라 학창시절 스트레스를 제법 받았다.

입맛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는데, 사람들에게 까탈스럽게 구는 면이 있어 아마도 정신적인 에너지 소모가 많을 것이라 김신은 어림짐작했다.

운동을 하는 것도 싫어하는 데다, 일상적으로 게으른 면이 있어서 혼자 있으면 끼니 같은 걸 챙겨먹지 못했다. 그런 시우의 연인이 돌고 돌아 결국은 셰프인 걸 보면 인연은 인연이란 생각이 들어 김신은 왠지 웃음이 났다.

“겨울엔 김신 만나고 싶다.”

“농담은 그만해라.”

“진심인데.”그렇게 말하며 애살스럽게 웃는 시우가 밉지는 않았다. 시우는 사랑받기 쉬운 타입의 사람이었다. 예쁨 받고 자라온 사람의 그늘 없는 시선을 시우는 잘 보여주곤 했다.

그런 시우를 보고 있자니 김신의 마음 한구석에 최우진이 떠올랐다.

강지훈과 최우진. 김신은 굳이 추운 날 그렇게까지 우진을 밖에 세워둔 강지훈을 떠올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사무실을 나간 지가 언제인데 그때까지 차에 안 태웠던 거지 싶어, 김신은 밥을 먹다 말고 젓가락을 바닥에 내려놨다. 양배추 피클을 젓가락으로 집어 올리던 시우가 그런 김신을 쳐다봤다.

“너 요즘 소식하니? 왜 밥을 도통 안 먹어?”

“그냥, 이상하게 속상하네.”

“술 마시게?”

“차 안 갖고 왔잖아.”

“흐아, 신난다.”

기분 좋게 눈꼬리를 접어서 웃는 시우의 뺨을 두드리던 김신이 갑자기 떠오른 듯 시우를 불렀다.

“그런데, 말이다. 정시우.”

“응?”

입안에 잔뜩 음식을 넣고 열심히 씹고 있던 시우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볼이 빵빵한 게 시우는 살이 쪄도 제법 귀엽겠다 싶었다.

“너 그 사람 어디서 봤어?”

“누구?”

“아까 주차장에서 마주친 사람.”

“아, 약간 몸 좋고 되게 섹시하게 생긴 그 사람?”

“…재수 없게 생기지 않았어?”

“네가 더 잘생겼어. 걱정 마.”

시우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앞에 놓여 있던 연태고량을 반잔 정도 마신 그가 입술을 꾸욱 다물고는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눈동자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너 회사 사람이야? 그 사람?”

“그렇지.”

“나 좀 고민된다. 사실 걸어오면서 누군지 기억났거든.”

“…왜?”

“뭐 여러 가지가 있지.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경우에 오는 다양한 문제.”

“….”

“너도 좀 고민해야 할 텐데. 이제.”

그렇게 말하며 김신을 보는 시우의 얼굴이 조금 심각했다. 시우는 눈썹이 가늘고 길었는데, 그래서 여려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김신은 앞접시에 놓아두었던 유린기의 파채를 조금씩 뒤적거렸다.

“네가 사귀는 사람 말이야. 그 사람이 너랑 사귀는 걸 누가 봤어. 그래서 그 누군가가 너는 게이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다닌다면 어떻겠어?”

“아웃팅?”

“이미 말해버린 셈이네.”

시우는 그렇게 말하며 반쯤 남겨둔 술을 한 번에 비워버렸다. 두 손가락으로 집은 잔이 약간 떨렸다.

“너도 이제 고려해야 할 문제야.”

“주완이는 어때?”

“주완이는 유치원 때부터 자기가 그렇다고 생각했대. 그리고 상대에게 피해가 가지 않으려면 최대한 사적인 공간에서 단 둘이 만나야겠다고 생각하는 타입이라.”

“너랑 다르게?”

“꼭, 그렇게 아픈 델 찔러야겠니? 어릴 때 치기 어렸던 거 생각하면 나야말로 할 말은 아니다 싶다.”

그렇게 말하던 시우가 자조적으로 웃고는 옆에 두었던 찻잔에 재스민 차를 잔뜩 따랐다.

“걸러서 들어.”

“….”

“본명은 몰라. 이태원 P 클럽에 가면 그 남자 모르는 이쪽 애들 거의 없을 거야. 뭐 클럽에 있는 애들은 R이라고 불렀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고. 거의 6년 전쯤은 매일매일 왔던 걸로 기억해. 금요일 날마다 룸을 빌려서 엄청 크게 놀았는데, 한번 놀 때마다 쓴 돈이 어마어마해서 다들 좋아했지. 비싸고 좋은 양주 공짜로 마실 수 있었으니까. 거기다 어찌나 쇼맨십이 뛰어난지 룸에 들어가면 온갖 걸 다 구경할 수 있었지.”

“….”

“게이라고. 아까 그 남자. 그것도 매일 파트너가 바뀌던 엄청난 게이.”

김신은 아무 말 없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고 술잔을 집어 들었다. 심장 한가운데에서 타닥타닥하고 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근데 묘하게 R이 데리고 나가는 남자들은 거의 다 닮았어.”

“취향이 확고하다?”

“그렇지. 아무나 데리고 나가는 건 아니고, 식이 확실한 편이라서. 그것도 이쪽 취향에서는 드물게 가늘고 하얗고….”

“….”

“여우같이 생긴 남자.”

시우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가만히 깜빡였다.

***

“입맛 없어?”“….”

“최 대리….”

“….”

“우진아?”

“먹고 있어.”

우진은 앞에 놓인 달걀찜을 숟가락으로 떠올리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날씨가 제법 추워 룸에 열선을 넣은 모양이었다. 우진은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 자신의 앉은 자리 옆에 얌전하게 놓았다.

치익, 하고 고급스런 돌판에 구워진 삼겹살이 먹기 좋게 잘라졌다. 지훈은 다 익은 것들을 확인하고는 우진의 접시에 몇 점 올려주었다. 정갈한 느낌이었다.

“고기도 먹어.”

“….”

“어머님은 건강하시니?”

“….”

우진은 그렇게 묻는 지훈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입에 고기 한 점을 집어넣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 들어왔을 때, 집안 어른들은 식사하는 척 하라고 말했다. 오래 천천히 씹으면서 그 질문을 벗어나라는 것이다. 우진은 아주 어릴 적 배웠던 에티켓들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독일은 좋았고?”

“….”

“3년 만에 저녁 같이 먹는 거 같다.”

“회사에서 친한 척 하지 말라고 했던 건 너야.”

“삐졌어? 그래서?”

오늘따라 이상하게 구는 지훈이 새삼스러워 우진은 밥알을 삼키지 않고 입안에서 도록도록 굴렸다. 강지훈만 아니었어도 우진은 김신과 저녁을 먹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 예쁜 사람과 마주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왠지 어디 한군데가 체한 것 같아 우진은 손바닥으로 오른쪽 가슴을 문질렀다. 우진이 다른 손으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인터폰을 들어 올리자, 지훈이 밥을 먹다 말고 우진을 쳐다봤다.

“뭐 더 먹고 싶은 거 있어?”

“솔송주 가져다주세요.”

“술 마시려고?”

“….”

얼마 지나지 않아 흰색 백자에 담긴 술병 하나가 나무 구슬로 만들어진 발 아래로 들어왔다. 마를 꿀에 재운 것은 익숙한 듯 우진의 앞에 놓였다. 얇은 편자처럼 투명하게 놓여 있는 마 조각을 보며 우진은 조금 입꼬리를 올렸다.

다음 번에 김신에게, 자신은 생마와 꿀을 좋아한다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너 웃냐?”

“….”

“별일이네. 요즘.”

우진은 대꾸하지 않고 마를 하나 집어 앞접시에 놓았다. 투명하고 끈적거렸다. 달고, 약간은 무미인 듯, 식감이 좋은 것들을 우진은 좋아했다.

그걸 지금에서야 인식했다. 뭘 좋아해요, 하고 달큰하게 묻던 김신이 생각났다.

나의 김신.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울렸다.

“한잔 따라줄까?”

“됐어.”

우진은 지훈의 손에서 술병을 뺏어들고는 하얀 잔에 얌전하게 따랐다. 술을 마실 때는 소리를 내지 않고, 꺾어 들지 않았다.

술은 어머니가 아닌 강지훈에게 배웠다. 지훈은 두주불사(斗酒不辭)라는 한자성어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술에서 소나무 향기가 났다. 나무 향이 좋았다. 김신의 목덜미나 손가락 마디, 가슴팍에선 나무냄새가 났다. 굳고, 바르고 단단한 향기.

“주말에 뭐했어?”

“….”

“영화 봤어?”

“우리 집 왔다 간 거 알아.”

“….”

강지훈. 그와 같이 회사에 들어오게 된 건 우연은 아니었다.

“너도 마셔.”

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잔 하나를 지훈의 앞에다 놓아주었다.

“집엔 어떻게 가고.”

“난 내가 알아서 가고. 넌 네가 알아서 가고.”

“….”

“나 어린애 아니야.”

우진이 어렸을 때 강지훈도 어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훈은 평생을 우진에게 형처럼 굴었다. 끼니는 챙겨 먹는지, 옷은 따뜻하게 입는지, 계절은 잘 헤아리는지.

살아 있는지.

“와, 최우진 많이 변했다.”

“안 변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한 달을 만나자고 했을 때 분명 김신이 그 제안을 거절할 거라고 우진은 단정했다.

자기 욕심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욕심을 부려보자고 생각했다. 그것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최소한 입 밖으로 자신의 마음의 말을 꺼내놓을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우진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주 오랫동안 차곡차곡 발아래 쌓여온 감정을 그날 밤 처음으로 꺼내보았다. 그리고 더 많은 걸 말해주고 싶었다.

네가 처음으로 날 똑바로 본 것이 언제인 줄 아는지, 널 만나러 가고 싶었던 날들이 차곡차곡 심장 바닥에 쌓여 있었다고.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어느 순간 풀썩, 바닥에 쌓여 있던 마음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몰래 만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주 몰래. 아무도 몰래. 그냥 너와 나만 알 수 있게.

사실은 오래전부터, 그 마음을 꺼내 네 앞에 널어놓고 싶었어.

“강지훈.”

“응?”

“모르는 척해줘.”

“뭐?”

“한 달이야.”

“….”

“한 달만 눈감고 기다려.”

“….”

“귀도 막으면 좋아.”

“우진아.”

“딜 하는 거야.”

“….”

“너희 엄마와 우리 할아버지가 잘하는 거.”

“….”

“나와 우리가족들은 못 하는 거.”

우진은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김신의 앞에서 웃었던 것처럼 웃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상대방은 모를 것이다. 처음으로 보여주는 표정이었으니까.

“한 달이야. 지훈아. 그럼 다시는 보고 싶다고 말 안 할게.”

***

“으 추워.”

시우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 근처 지하철역에서 내려 계단을 뛰어 올라오며 혼자 중얼거리자 생각보다 소리가 컸는지 지나가던 여자 둘이 그 목소리에 킥킥거리며 돌아보고 웃었다. 코트를 좀 더 여미며 출구를 나오자 바람이 더욱 거세어졌다. 진짜, 금방 겨울이 오려는 모양이었다.

“….”

최우진이 또 생각나는 바람에 김신은 이제 자신이 중증의 병이 걸린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진은 추위를 많이 타는 타입인 듯했는데, 자고 있을 때도 추운지 계속해서 김신의 품에 파고들어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게 싫거나 귀찮지 않다는 게 너무 신기했고, 은근히 최우진이 애교가 있는 타입이란 생각이 들어 사랑스러웠다.

큰 품으로 당겨 안자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편안한 얼굴을 했다. 입꼬리가 약간 올라가 있었는데, 그게 또 귀여워 손가락으로 실컷 만졌다. 안 예쁜 곳이 없었다.

“….”

시우랑 밥만 먹고 헤어졌는데도 벌써 9시였다. 빨리 집에 가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우진에게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신이 오피스텔 정문으로 주차장으로 들어서던 찰나였다.

“….”

자신의 오피스텔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천천히 패딩의 후드를 벗으며 고개를 들었다. 설마 자신을 기다렸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김신은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자 놀란 얼굴을 했다.

“어…?”

붉어진 뺨과, 자신을 보자 스스럼없이 풀어지는 눈, 그리고 하얀 얼굴.

“문자, 하는 걸 깜빡했어.”

그리고 안겨오는 체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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