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 주임과 최 대리-23화 (23/60)

23화. 시선의 의미

- 오늘 저녁은 힘들 것 같아요.

김신은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가는 와중에 우진이 보내놓은 채팅창을 껐다 켰다 하고 있는 중이었다.

점심은 팀 회식이라 우진과 같이 먹지 못했다. 결국 우진이 혼자 점심을 먹었단 사실을 슬기를 통해 들었고, 그래서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려던 참이었다.

김신은 뭘 하지 않더라도 우진과 함께 있는 시간들이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연애를 하면서 한 번도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던 터라, 자신감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즈음에 우진에게 메시지가 왔고, 한편으로 안심이 되면서도 불안했다. 저녁시간을 같이 보내자고 한 적은 없었는데,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게 귀여웠다. 다만, 뭐 때문에 그러는지만 좀 알려주면 좋겠는데.

‘일일이 물어보는 거, 싫어하려나.’

이전까지의 연애에서 김신은 상대에게 맞추기보다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유지하는 편에 가까웠다. 그래서 연애보다는 파트너 개념이 맞았고, 몸이 맞으면 마음은 안 맞아도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만났던 여자들은 많았지만 한 번도 헤어졌다고 해서 서글프거나 하진 않았다. 처음부터 그다지 관계 유지에 미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없으면 허전했으나 아쉽진 않았다.

‘모르겠다.’

그러나 우진은 달랐다. 김신이 아쉬운 편이란 생각을, 늘 하게 됐다. 우진이 매시간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고 같은 층에 근무하고 있단 사실이 가끔 고맙기까지 했다.

자보고 나니, 더 욕심이 생겼다. 눈을 떴을 때 김신은 얌전히 숨 쉬고 있는 우진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봤다. 블라인드 때문에 어두웠지만 어디쯤이 눈인지, 입술인지 다 알듯했다.

상처가 많은 몸이었지만, 기꺼이 김신에게 보여주고 솔직하게 눈을 맞추는 데다 무려 대범하기 까지 했다.

‘사춘기도 아니고.’

오늘도 집에 어떻게 데려갈까만 고민하는 중이었단 사실을 들켰던 거 같아 김신은 붉어진 턱을 살짝 손으로 가렸다. 그 순간 메시지 창에 새로운 알람이 떴다.

- 김신, 오늘 퇴근 후에 뭐함?

시우였다. 김신은 바로 확인하고선 답을 보냈다.

- 일정 없는데?

- 나 너네 회사 근처에 미팅 하러 잠시 나왔어. 저녁 사줘.

- 맡겨놨냐?

- 회사 로비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다. 6시 30분까지 나와.

김신은 웃으며 메시지 창을 닫았다. 그러고 나서 차근하게 고개를 들었는데, 어느새 우진이 홍보실 문가에 서 있었다. 가방을 얌전히 들고 있는 걸 보니 퇴근하려는 모양이었다.

“아, 우진 대리님.”

“메시지 읽었어요?”

김신이 일어나 문 앞으로 다가가자 우진이 나지막히 물었다.

“네.”

“저 먼저 퇴근해요.”

그 말이 좀 아쉬워 김신은 우진을 따라 사무실을 나왔다. 짙은 그레이의 패딩 점퍼를 입은 우진은 아직 대학생 같아서 김신은 자기도 모르게 후드를 붙잡았다.

아직 시우가 오려면 20여 분이 남은 상태였다. 우진이 고개를 갸웃하길래 “엘리베이터 앞까지 데려다줄게요.” 했다. 정각에 퇴근하는 사람이 드문 편이라 아직 사무실 밖 복도는 조용했다.

“너무 급하게 가는 거 아니예요?”

김신이 고개를 숙이고는 우진의 셔츠 깃을 펴주는 척하며 속삭이자 우진이 미간을 조금 모로 세웠다.

“어, 설마 속상한 얼굴인가.”

“네.”

세상에, 설마 아쉬워서 얼굴을 보러 온 건가 했는데, 진짜인 것 같았다. 패딩 코트에 푸욱 파묻힌 그 얼굴이 귀여워서 김신은 한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면 연락해요.”

“네.”

“들어가기 전에 전화하고.”

“네.”

“밥 맛있게 많이 먹어요.”

살이 좀, 찌면 좋겠거든, 이라고 말하면서 김신은 우진의 어깨와 허리를 슬쩍 쓰다듬었다.

뭐랄까, 보고 있는데도 아쉬워서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팅,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가요, 하고 쳐다보는데 우진이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문이 닫힐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가 홍보실로 들어오는데, 심장 근처가 꽈악, 죄였다. 뭔가 아릿아릿하면서도 손끝까지 피가 돌았다가 다시 심장 안으로 끓어 넘치는 듯했다.

세상에, 이게, 연애인가 싶었다.

***

“아! 추워, 멍청아!”

로비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리고 있던 시우가 김신을 보고 웃으며 소리쳤다. 원래부터 웃으면서 험악한 소리를 제법 잘하는 시우는, 그 바람에 로비에 서 있던 퇴근 무리의 시선을 한꺼번에 받고 있었다.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만나 같이 퇴근하던 연우가 김신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물었다.

“신 오빠, 누구예요?”

“왜?”

“엄청 잘생겼어. 아이돌 아녜요?”

학창 시절 시우는 몇 번이고 기획사의 콜을 받은 걸로 알려진 학교 내 유명인사이기도 했다. 그만큼 눈에 띄는 외모였다. 키도 큰 데다 호리호리하고, 곱게 생겼지만 정작 당사자인 시우는 딱히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꾸미는 것도 좋아하고 시선도 즐기면서, 정작 심드렁한 이유가 뭐냐는 김신의 질문에 답은 딱 하나였다. “나, 남자 사귀잖아. 자유연애하고 싶거든.”이라고 말하던 시우의 얼굴이 생각나 김신은 씁쓸하게 웃었다.

“아이돌 하기엔 좀 많이 늙었지.”

“친구?”

“응. 나랑 동갑.”

“세상에, 완전 동안인데요?”

“지금 나 디스한 거지?”

김신은 그렇게 말하며 웃고는 연우에게 먼저, 갈게 하고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조심성 없는 시우가 손짓하는 게 빨라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더 있다간 회사 내 이목을 제법 끌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소개시켜 달라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김신은 뛰어가 시우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면 일이 복잡해진다.

뒤에서, 우와,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귀찮아질 것 같아 말없이 시우의 손목을 잡아끌자, 시우는 환하게 웃으며 김신의 팔짱을 꼈다.

“어머어머, 김신 정장 입은 거 봐. 지금 너 재킷 안에 흰 셔츠 입고 넥타이 맨 거야?”

“야, 빨리 나가자.”

“팔에 걸친 코트도 입어봐. 어깨 너무 넓어서 나 코피날 거 같아.”

시우가 금방 김신의 팔에서 검은색 코트를 건네어 받고선 로비 앞에서 손을 벌렸다.

“뭐야, 너?”

“입혀줄게, 뒤로 돌아 봐.”

“아놔.”

시우는 생각보다 고집이 센 타입이었다. 김신은 그저 툭 내뱉고선 바로 뒤를 돌았다. 뒤에서 차근히 소매를 끼워주길래 입고 돌아섰더니, 시우가 뿌듯한 얼굴로 어깨 부근의 주름을 손바닥으로 두드려 탁탁 하고 털어주었다. 애인 행세가 따로 없었다.

“너 이러고 있으면 나 오해받아.”

“오해 아닌데.”

“너 진짜 미친놈이야.”

“그 매력에 우리 김솊이 홀딱 빠졌잖아.”

능청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자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져 김신이 풋, 하고 웃었다. 뺨을 늘였더니 으악, 하고 웃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뭐 먹고 싶냐?”

“김솊 요리 질렸어. 너무 건강하기만 해.”

“그래서?”

“몸에 나쁜 요리랑 술. 나 중국 음식 먹고 싶어.”

욕구에 솔직하기도 하지. 김신은 그렇게 생각하며 우진을 생각했다. 병이었다. 시우와 우진은 닮은 데가 전혀 없었는데, 그가 겹쳐 보인 건 의외였다.

“너 다른 사람 생각하지?”

“여우같은 놈.”

“그 사람 생각하냐?”

“그래.”

“아, 김신 너무 솔직해.”

김신과 시우는 닮은 점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솔직함이었고, 그 때문에 서로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무심코 김신은 생각했다.

김신은 멍하니 웃고 있는 시우를 데리고 얼른 로비 문을 빠져나갔다. 로비 문을 열고 회사 밖으로 나오려는데,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시선 둘과 마주쳤다.

“어.”

“오호?”

강지훈이었다. 옆에는 아까 배웅했던 최우진이 같이 서 있었다.

“퇴근하나 봐요?”

강지훈이 김신을 힐끗 보며 물었다.

‘설마했는데 저녁 약속이 강지훈이었나.’

지훈은 지하 주차장이 아닌 회사 빌딩 앞 주차장에 차를 대어둔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우진의 뺨이 빨갰다. 대체 사람을 밖에다 얼마나 세워둔 건지, 김신은 좀 짜증이 났다.

“뭐야, 뭐야, 회사 사람?”

눈치가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시우가 뒤따라오다 김신의 허리를 붙잡고 등 뒤로 고개를 내밀었다. 키가 큰 편이라 김신과 거의 비등비등한 체격인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시우는 가늘고 귀여운 면이 있었다.

김신의 어깨 위로 고개를 내려다놓고선 김신과 지훈, 우진을 번갈아보던 시우가 갸웃, 하고 고개를 움직였다.

“저녁 약속 있으신 모양이네. 김 주임.”

“아 네. 두 분도 저녁 식사 맛있게 하세요.”

김신은 억지웃음을 웃으면서 뒤에 서 있던 시우를 끌어당겨 옆으로 세웠다. 안녕히 가세요, 하고 철없이 인사하던 시우가 금방 김신의 옆으로 다가와 팔짱을 꼈다.

“중국 음식 사줄 거지?”

“사줄게.”“오예, 나 그럼 오늘 고량주도 먹어야지.”

김신은 어색한 둘의 시선이 따라오는 게 싫어 걸음을 빨리했다.

“너 저 사람들이랑 안 친해?”

“뭐, 회사 사람이니까.”

“근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는데….”

제법 거리가 멀어졌을 때 시우가 우진의 팔짱을 놓고선 고개를 다시 갸웃거리며 말했다. 김신이 걷다 말고 멈춰서 시우를 쳐다봤다.

“누구? 어느 쪽?”

혹시라도 우진을 아는 건가, 싶어 김신이 시우에게 답을 재촉했다. 시우는 뒤를 돌아 한참을 쳐다보더니 손가락으로 한 사람을 가리켰다.

“저 사람.”

시우가 가리킨 쪽에는 다름 아닌… 강지훈이 서 있었다.

***

“뭐해. 얼른 타. 날씨 춥다.”

지훈이 기꺼이 차 문을 열어줬는데도 불구하고 우진은 멍하니 앞을 보고 서 있었다. 우진은 기분이 좀 많이 상한 상태였다. 뭔지 모르겠지만 밥도 먹고 싶지 않았고, 머리도 아팠다. 무엇보다 김신과 함께 있던 사람이 누군지, 너무 궁금했다.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던 모양이었다. 강지훈이 결국 우진의 뺨을 한손으로 잡고 자기 쪽을 향하게 했다.

“신경 쓰여?”

“응.”

“대답 봐라.”

지훈이 혀를 끌끌 차며 차에 타는 우진을 확인하고는 자기도 운전석에 올랐다.

“뭐 먹고 싶어?”

“….”

“최우진.”

“아무거나.”

“그럼 고기 먹는다.”

아까 그 사람은 중국 음식 사 달라고 했던 거 같은데. 우진은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손목에 두른 시계를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눈을 뜨고선 핸드폰을 찾았다. 문자가 올까 해서였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할 수가 있을까 싶었다. 갖지 못해도 만족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너무 오랫동안 좋아해서, 그냥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날들이 있었는데.

“출장은 어땠어? 김신은 딱 잘라서 기념품 같은 거 안 사왔다고 하던데.”

“….”

“대답 좀 해주라. 최 대리님.”

“괜찮게 생겼더라.”

“뭐?”

“옆에 있던 사람.”

사실은 예쁘다고 할 정도였다.

미에 대한 기준도, 선호도 없는 우진의 눈에도 그 사람은 반짝거릴 정도로 어여쁜 면이 있었다. 제법 덩치가 있는 편이었는데, 선이 가늘었다.

사실 우진은 로비에서부터 밖으로 걸어 나오는 김신을 우연히 발견했다. 차분하게 걸어오는 모습이 좋아서, 한참을 보고 있었는데 결국 사달이 났다.

그러니까 김신이 등을 돌려 그 사람이 들고 있던 코트를 기꺼이 입었을 때부터, 우진은 그 자리에서 바로 로비로 뛰어가지 않은 건 전부 강지훈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친밀해 보이고, 친절한, 그리고 능숙한 김신.

“너 지금 미간이 엄청나게 찌푸려졌어.”

“알아.”

“네가 더 괜찮으니까 걱정 마.”

우진이 무표정하게 지훈을 쳐다봤다. 지훈은 핸들에 손을 얹은 채였다.

“왜 쳐다봐?”

“왜 그런 말을 하지?”

“너 이쁜 거 하루 이틀이냐.”

시동이 걸리자 금방 자동차에 훈기가 찼다.

강지훈은 늘 좋은 차를 몰았다.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사람.

그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늘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건 마치 강박 같았다.

“안전벨트 매.”

“….”

“내가 매줘?”

우진은 금방 손을 뻗어 안전벨트를 맸다. 마음이 미묘하게 울렁거려 고개를 돌렸는데, 사이드 미러에 강지훈이 비쳤다.

“….”

강지훈이 최우진, 자신을 묘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