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낮과 밤의 기억
눈을 뜨면 기억과 꿈, 현실들이 겹칠 때가 있다.
우진은 한동안 멍한 얼굴로 침실의 찬장을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검은색의 파이프들을 연결해 만든 독특한 전등이 눈에 들어왔다.
낯설면서도 기묘한 감각이라, 우진은 손을 들어 눈 주위를 문질렀다. 몇 번 숨을 몰아쉬고,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일으켰다.
너무 놀라 침대 헤드 쪽으로 도망가다, 엎드려 누워 있던 김신에게 손목이 잡혔다. 상체를 벗은 등의 근육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미간을 찡그리며 김신이 우진의 손목을 당기자 자신도 모르게 몸이 딸려 들어갔다.
“기억 안 난다는 말 같은 거 하면 안 됩니다.”
“….”
“나 생각보다, 상처 많이 받거든.”
그렇게 말하며 김신은 턱으로 우진의 머리를 당겨 자신의 품 안으로 안았다.
“좀 더 자요. 일요일이니까.”
“내가 왜….”
“왜 여기 있느냐고 묻지 마요. 그냥 여기 있는 거니까.”
기억이 천천히, 스며들듯 온몸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아, 하고 신음을 울리자 김신이 으응, 하고 웃었다. 그 바람에 등에 닿았던 그의 벗은 가슴에서 진동이 울렸다.
“소리가 야한데요.”
“….”
“아무것도 안 입고 있는 거 같던데.”
김신이 고개를 들어 우진의 목선을 따라 키스하며 웅얼거렸다. 우진이 허겁지겁 이불을 말아 올리자 김신이 팔에 힘을 주고 더욱 당겨 안았다.
목울대가 울렁거리도록 웃는 김신을 보고서, 우진은 그제야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음을 알았다. 자신에게 약간 큰 듯한 맨투맨과 편한 바지는, 어젯밤 김신이 내어준 것이었다. 그리고 기억의 틈새가 조금씩 벌어졌다.
‘벗어봐요.’
어제의 김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렸다. 목덜미에 닿았던 뜨거운 입김이 귓가 근처로 스쳤다. 마치, 그렇게 저변의 바닥으로 같이 가라앉기라도 할 심산인 듯했다. 발버둥 칠 때마다 김신은 웃으면서 우진의 손목을 아래로 꾸욱 눌렀다.
‘못 벗겠어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동시에, 차가운 느낌도 함께 들어서 우진은 긴장감을 느껴야 했다.
당황스러울 만큼 능숙하고, 자연스러웠다.
김신의 몸이 너무 뜨거워서 우진은 손이 데일 것 만 같았다. 그가 자연스럽게 우진의 손목을 잡고선 후우,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서 그만할까.’
동의하기에는 너무 목이 말랐다. 우진이 고개를 천천히 젓고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셔츠 소매 버튼을 끌렀다. 누군가에게 벗은 몸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병원을 제외하고 우진은 한 번도 자신의 나신을 공개한적 없었다. 셔츠를 전부 벗기 전에 손목시계를 풀자, 자연스럽게 김신의 시선이 손목을 향했다.
두둘두둘한 표면의 상처. 여러 번 기우고 또다시 얽어매야 했던 삶의 흔적이 드러났다. 그 때 김신이 손목을 잡아 다시 자신의 품으로 당겨 안았다.
‘안 벗어도 되니까. 그만해요.’
그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 느낌이 왠지 이전까지의 경계와는 조금 달라서 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김신의 눈동자가 조금 젖어 있는 듯 했다. 뭔가 슬픈 듯한 숨소리였다. 여전히 깊은 목소리였지만, 축축하게 젖어 있는 느낌이라 금방 귓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싫으면, 싫다고 할 줄도 알아야 해. 그거 알아요?”
“….”
“왜 상처가 났는지, 나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
“왜 한 달 만인지.”
“….”
“당신은 누구인지.”
“….”
“말 안 해도 돼요.”
상관없어, 라고 자신의 입술을 짓씹는 김신을 우진은 빤히 바라보았다. 당황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가, 다시 고개를 내려 우진을 바라보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냥, 뭐랄까…."
“….”
“조금 화가 났어요. 한 달만 만나자는 그것도 그랬고.”
“….”
“당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
능숙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말을 할 때 김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어릴 때의 김신이 겹쳤다.
환하게 웃던, 후드티를 입고서 체육관을 뛰어가던 청량감 있는 소년.
락커룸 열쇠, 독특한 수영장 냄새, 그리고 자신의 손목을 붙들던 강인한 느낌의 손가락.
분절된 시간들이 축적되어, 핏물처럼 번졌다.
넌 날 기억할까.
우진은 갑자기 늑골 부근에 거세게 죄이는 느낌이 들어 숨을 몰아쉬었다.
“김신.”
우진은 나지막이 한숨처럼 그를 불렀다. 그가 고개를 들어 방황하던 시선을 우진에게 고정했다.
“난 많이 아파…. 아픈 사람이랑 만나는 거 안 좋다는 거 아는데.”
“….”
“그래도 포기가 안 돼.”
그게 최선이었다. 최선으로 나를 인정하고, 여기서 고백할 수 있는 것, 도저히 포기가 안 되는 것, 그게 최우진의 김신이었다.
그렇게 말하고 숨을 몰아쉰 순간 우진은 김신에게 뒷덜미가 잡혔다.
까만색 눈동자에서 열기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뒷덜미가 잡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운 입술이 마주쳤다.
이전까지와는 달랐다. 빠르고, 급하고, 숨이 찼다.
뒤로 툭, 하고 부딪힌 허리가 꺾일 정도였는데 김신은 상관없다는 듯이 우진의 골반 근처를 잡고 들어 올려 식탁위에 앉혔다.
우진이 내려다보고 키스하자, 김신은 천천히 눈을 뜨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셔츠를 붙잡아 내리는 손이 급했다. 우진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걸로 했다.
포기하지 않는 것을 넘어 욕심을 내고 싶었다. 지금보다 더 깊은 욕심이 있다면 그것마저 모조리 가져오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아름답고 화려한 남자를, 자신의 품에 거두고 싶어 우진은 다리를 올려 김신의 허리를 감았다.
숨을 몰아쉬면서 벗겨진 어깨 위로 김신의 입술이 낙인 찍듯 떨어져 내렸다. 아, 하고 신음을 울리며 김신의 얼굴을 안았다. 더, 더 다가와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신… 김신….”
자신도 모르게 불렀는데 김신이 묻었던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쳐왔다.
옷 속을 파고드는 김신의 손 가닥가닥이 너무 뜨거워 우진은 참기가 어려웠다. 모조리 벗었을 때, 우진은 자신의 상처보다 김신의 상처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에 있을 때, 김신의 사고 소식을 들었고 당연히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어머니가 먼저 말렸다.
‘돌아가면, 너 어떻게 될지도 몰라.’
우진은 죽고 싶었지만 동시에, 죽고 싶지 않기도 했다. 김신이 선사한 삶이었다.
“아직도 꿈에 내가 나와요?”
“응.”
우진은 가까스로 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 김신의 늑골 주위를 만졌다. 찢어진 상처에 얼기설기 붙어 있는 새살들이 사랑스러웠다.
“숨 쉬어 봐.”
우진이 자신도 숨이 차는 가운데 김신에게 요구했다. 김신이 키스를 하다 말고 숨을 몰아쉬자, 우진이 눈을 감았다. 살아 있었다. 꿈이 아니라, 정말, 현실에서.
첫 번째 관계는, 그야말로 온 몸이 찢겨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게 고통이든 쾌락이든 이 또한, 정말로 현실이었다.
***
“ 워크샵 일정 어떻게 됐대?”
강지훈이 출근하자마자 자리에 앉으며 지연우에게 물었다. 지연우는 앉자마자 조급히 물어오는 강지훈을 올려다보고는 조용히 목례하고 살갑게 웃었다. 그러자 강지훈도 살갑게 눈을 마주치며 대답을 재촉했다.
“출근하시자마자 대리님, 너무 급하시네요.”
“주말 내내 좀 기분이 안 좋았거든.”
전혀 뜬금없는 답이라 연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강지훈이 입술을 늘어뜨려 억지로 웃었다. 지훈은 자신이 출근했음에도 일말의 기척 없이 스크린의 메일을 들여다보고 있는 우진의 네임택을 몇 번 쳤다. 그러자 우진이 고개를 들어 지훈을 올려다봤다.
“나 왔는데 인사 안 하냐?”
“우리가 꼬박 인사 하던 사이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워크샵 일정 언제 나온대?”
“연우 주임이 알려주겠지.”
연우는 여상히 그 둘을 지켜보았다. 이상하게 강지훈은 오늘따라 심사가 굉장히 꼬여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연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지훈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연우를 바라봤다. 실제로 약간 수다스럽고 능청스러운 데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외모 하나는 준수했다.
고급스러우면서도 사교적이고, 동시에 완벽한 느낌이 아니라 다가가기에도 좋은, 그래서 인기가 많을 법한 얼굴. 연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지훈을 올려다봤다.
“말해주라. 연우 주임. 우진 대리는 알려줄 생각 없나 봐.”
“이번 주 목, 금이에요.”
“워크샵 준비는 누가 다했지?”
“사내 교육 일정 말씀이시죠?”
“응.”
“…강지훈 대리님이요.”
오늘따라 지훈은 유난스럽게 우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원래에도 지훈이 우진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시키거나 구애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누구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지훈의 목소리가 장난스러우면서도 소름 돋을 정도로 낮아서 결국 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경을 벗었다. 후, 하고 한숨을 쉬던 우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커피라도 사줘?”
“….”
“그걸로 안 되겠어?”
“응, 안 되겠는데.”
왜 안 그러던 심술을 피우는 거지, 라고 무심히 생각한 우진은 느지막이 데스크를 돌아 프린트기가 있는 자리로 걸었다. 지훈이 따라오며 어깨동무를 하자 우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이래.”
“점심 나랑 먹자.”
“출장 가라고 했던 사람은 너야.”
“그럼 저녁?”
주말이 끝나자마자 월요일이었고, 우진은 일요일 저녁에 김신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차분히 닿아오는 그 손길에 긴장하고 흥분했다. 짐이라도 챙겨 다시 김신의 차를 타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다분했지만, 김신은 그런 자신을 문 앞에서 금방 돌려보냈다.
‘푹 쉬어요.’
대신 김신은 그렇게 말하고는 목덜미를 붉혔다. 자기도 모르게 아쉬운 얼굴을 했던 걸까, 하고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리자 김신이 후우, 하고 한숨을 몰아쉬었다.
‘진짜 이상하네요.’
‘제가요?’
‘아니, 나.’
‘….’
‘가기가 싫네.’김신이 우진의 목덜미를 만지막거리며 말했다. 한 번만 더 안아보고, 라고 말한 김신이 우진을 당겨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우리 집 샤워코롱 향이네, 하고 장난스럽게 웃던 그가 금방 우진의 입술에 뽀뽀하고는 말했다.
‘아픈 건요?’
‘…별로.’
김신이 우진을 다시 당겨 안고는 웅얼거렸다.
착한 건 김신인데.
우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등을 쓸어주는 손길이 좋아서 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김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김신이 더 큰 한숨을 쉬며 우진에게 얼른 올라가라고 말했다. 김신은 우진이 올라가고도 오래도록 주차장에 차를 대어두고 있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자기 전엔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저녁 같이 먹자니까?”
“선약 있어.”
“누구랑?”
“왜 이래?”
“김신이랑?”
우진의 단정한 미간이 찌푸려졌다.
“너 지금 뭐하자는 거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그만해.”
지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우진은 잘 알았다. 강지훈은 능글능글하고 사교적이었지만 자세히 살피면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늘 웃고 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최우진, 잘 생각해.”
“….”
“아무리 나라도 두 번은 살리기 힘들어.”
“무슨 의미야?”
우진은 싸늘하게 피가 식은 얼굴로 강지훈을 쳐다봤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
“오늘 저녁 같이 먹자.”
쓸쓸한 손 하나가, 우진의 손목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