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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주임과 최 대리-20화 (20/60)

20화. 낮을 보내는 방법

강남역에는 늘 그랬듯 사람이 많았다.

우진은 손목시계의 오래된 가죽끈을 습관처럼 몇 번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들어 빌딩 틈새로 조각난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빌딩 꼭대기들 사이로 하늘은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정도의 물빛을 띠고 있었다.

11월의 초입인데도 불구하고 밤에는 기온이 겨울만큼이나 떨어져 얇은 옷을 여러 개 겹쳐 입어야 했다. 우진은 손을 들어 손목을 감싼 다음, 핸드폰을 확인했다. 손이 차가웠다.

“날씨가 좋은 건가?”

주말에 집에만 있는 우진에게 외출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대부분 늦게까지 잠을 몰아 자고, 책을 읽거나 집에 있는 DVD를 봤다. 우진은 반복적인 일들을 선호했다. 사실 선호라는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잘 불안했다.

순간 근저에서 끼쳐든 훈기와 함께 우진의 옆으로 길게 그림자가 졌다.

“…좋은 거죠.”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김신은 짙은 진셔츠에 검은색의 스웨터를 심플하게 레이어드해서 입고 있었다. 날씨가 추울 거라고 예상했는지 짙은 카멜색 울코트를 겉에 입었는데 정장과는 다른 느낌이라 우진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김신은 확실히 주목을 받기 쉬운 타입의 남자였다. 화려하게 생긴 것도 그랬지만, 다른 사람보다 한 뼘은 커서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이 돌아보곤 했다.

우진은 김신의 팽팽하게 당겨진 다크블루 셔츠를 살펴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뭔가, 좀 불편한 감각이 들었다. 이상했다. 이전까지 추웠던 체온 위로 열기가 촘촘히 손바닥에 박혔다.

“오래 기다렸어요?”

“방금….”

올려다보느라 미간을 찌푸리자, 김신이 조금 어색하게 웃고선 그런 우진의 이마에 손을 올려 엄지손가락으로 눈썹 뼈를 쓸었다.

김신은 스킨십에 유연한 면이 있었다. 향을 맡거나, 쓰다듬거나,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게 손을 들어 귓바퀴를 만지곤 했다.

어릴 때부터 스킨십에 익숙지 않은 우진이라 남들과 닿는 게 극도로 불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김신의 체온만은 나쁘지 않았다.

나른하게 눈을 감자, 김신이 손을 내리고는 우진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 부근의 혈관이 팔딱거렸다. 김신이 그런 우진을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영화 시간 얼마 남았죠?”

“30분쯤?”

“커피 사서 들어갈까요?”

김신은 어제 점심을 먹고 난 뒤 우진에게 주말에 시간이 나느냐 묻고선, 영화를 보자고 말했다.

‘주말에 데이트해요.’

간결하게 말하는 김신의 목소리에 떨림이 전혀 없어서, 우진은 앞에 놓아두었던 물 컵을 자신의 앞으로 당겨 물을 마셨다. 이상하게 목이 탔다.

‘사귀잖아. 우리.’

그 말에 결국 사래가 들렸는데, 그걸 보고 있던 김신이 장난스럽게 웃고선 손을 들어 물방울이 맺힌 턱을 찬찬히 닦아주었다.

김신은 사람을 만나는 데 있어 조심스러운 면이 분명히 있었다. 우진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편이라 누군가를 관찰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친절한 걸까, 라는 생각이 무심결에 들어서 떨쳐버리려고 노력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걸음이 느려진 우진의 앞에 김신이 돌아보며 손을 휘휘 저었다.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는 눈에 장난기가 다분했다.

“무슨 생각해요?”

“아….”

“나랑 있는데 다른 생각하는 거 아니죠?”

그럴 리가. 우진이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젓자 김신은 조심스럽게 손끝을 당겨 자신의 옆에 붙게 했다. 나란히 영화관 옆에 있던 카페에 들어가면서 김신은 무심하게 한마디 했다.

“그냥 집에서 볼 걸 그랬나.”

“….”

“사람들 볼까 봐 손을 못 대겠어.”

정말,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했다. 우진의 목덜미가 핑크빛으로 붉어졌는데도, 김신은 무심히 우진을 내려다보고는 손가락으로 우진의 셔츠 깃을 살짝 펴 주었다.

가끔 김신의 손가락이 목덜미에 닿아 간지러웠다. 입술을 깨물자, 김신이 묘하게 웃었다.

“카푸치노 두 잔 나왔습니다.”

김신은 방금 나온 따듯한 카푸치노를 우진의 손에 쥐여주었다.

예매했던 영화는 매년 시리즈로 나오는 첩보 영화 중 하나였다. 굳이 전편을 보지 않아도 재미있을 거라며 웃었던 김신과는 다르게 우진은 영화에 하나도 집중하지 못했다.

우선 다른 영화관들과 좀 구조가 달랐다. 영화관이 제법 컸는데 딱 40석이었다. 거기다 좌석이 전부 큼직큼직하게 떨어져 있었다.

“좌석이….”

“아, 프리미엄 관으로 예매했어요. 웬만한 영화관은 저한테 좀 불편해서.”

우진은 그제야 김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몸집이 제법 크다는 걸 다시 한번 인식했다.

“저 일반석 가서 앉으면 좀 구겨져야 해요.”

“풋.”

우진이 웃자, 김신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하지만 그건 우진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으로 얼굴 근육을 사용한 사람처럼, 금방 웃음의 잔향이 사라졌다.

그러나 김신은 한참 우진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웃는 거 처음 봐요.”

김신이 말을 마치자마자 극장이 암전됐다. 광고 없이 시작한다는 안내 문구에 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좌석에 깊이 몸을 묻었다.

김신은 손으로 턱을 가리고 있었다.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김신의 얼굴이 우진의 얼굴로 떨어져 내려서 그가 단순히 당황한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우진은 귓가로 떨어지는 소음들과 숨소리만 기억했다. 뜨거운 숨이 귓불을 물었을 때, 심장이 저리도록 뛰었다.

“…이제 사람들이 우릴 못 봐요.”

김신이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말하는 바람에 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으응, 하고 김신의 목을 당겨 안았다.

다행히 옆 좌석은 텅 비어 있었다. 김신은 좌석의 바를 위로 올려 우진의 허리를 당겨 자기 쪽으로 넘어오게 만들었다.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쓸고 뺨을 당겨 숨을 막았다. 우진이 호흡을 힘들어 하자 김신이 입술을 천천히 떼며 긴장한 얼굴을 했다. 심장에서 아드레날린이 빠르게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아쉬운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 김신이 우진의 뺨을 몇 번 손으로 쓸고는 다시 정면을 쳐다봤다. 파랗고 하얀 빛들이 스크린에서 쏟아져 나왔다.

…영화는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

“뭐 먹고 싶어요?”

풋콩을 따서 젓가락으로 얌전히 앞 접시에 놔주는 김신을 보고 있다가, 우진은 메뉴에 시선을 돌렸다.

김신의 뺨이 약간 상기되어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게 자신 때문인지 방 안의 훈기 때문인지 헷갈렸다.

일식집 마당에는 작은 주차장이 있었는데, 김신이 주차를 하다가 마주친 우진에게 살짝 입 맞췄기 때문이었다.

가벼운 입맞춤 뒤에 김신은 아무렇지 않은 듯 우진의 안전벨트를 끌러주었다. 그러나 턱 아래가 금방 붉어졌다.

“무슨 음식 좋아해요?”

“….”

“매번 물어봐도 말 안 하더라.”

김신은 그렇게 말하며 우진의 앞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우진은 이런 갑작스런 스킨십이 나쁘지 않았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자, 김신이 웃으며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을 아래로 내려 뺨을 만졌다.

“이런 거 보면 강아지 같은데….”

“….”

“ 사람 손은 저만 탑시다.”

김신은 의미를 모를 말을 내뱉고선 메뉴를 살짝 옆으로 치웠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자 김신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이고, 뜨겁고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제가 좋아하는 거 알려줄게요.”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신이 간지럽게 웃었다.

“전 해산물은 가리는 거 없어요. 육고기도 좋아하고.”

“….”

“과일은 좋아하는데, 야채는 가리는 게 좀 있어요. 어릴 때 물리도록 먹어서. 뭐 고기도 물리게 먹긴 했는데, 질리진 않았어.”

운동 할 때 많이 먹는 것들이 있어요, 라고 말을 잇는 김신을 바라보다 우진은 사실 자신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이 잘 가는 음식이 있는 반면, 잘 가지 않는 것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걸 모르고 먹었다. 맛 같은 걸 느낀 적이 별로 없어서 배가 고픈 것도 모르는 때가 훨씬 많았다.

“뭐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잘 모르죠?”

우진은 그 질문에 김신을 빤히 쳐다보았다. 되묻는 듯한 그 얼굴을 바라보던 우진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하나는 아는 것 같은데.”

“어떤 거?”

우진은 김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김신이 궁금한 듯 눈썹을 휘자, 우진의 시선이 따라갔다. 흑묵으로 그린 듯한 눈썹이었다. 눈썹뼈가 두드러져 산언덕이 구불거리는 듯 했다.

표정이 많지만 조용하고, 선이 굵고 아름다웠다. 손을 들어서 눈썹을 만졌다. 김신이 놀란 얼굴을 했다.

“…너.”

가끔, 마음은 입을 열고 무심코 쏟아지는 법인가보다, 라고 우진은 조용히 생각했다. 김신의 얼굴이 목 아래부터 천천히 붉어졌다. “사람 마음 들었다 놨다 하는 건 대체 어디서 배웁니까.”

김신은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어둠이 없는 웃음이었다.

감정의 폭이 완연한 얼굴은 보고만 있어도 만족감을 줬다. 우진이 그가 옆으로 치워두었던 메뉴를 보고 몇 가지를 고르자, 김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을 했다.

김신이 차를 가져온 터라 맥주를 한 병 시켜, 둘이서 나눠 마셨다. 메인 요리로 시켰던 사시미와 초밥, 곁가지 찬들이 나와 김신이 따뜻한 우롱차를 한잔 따랐을 때였다.

흰색 앞치마를 허리에 두른 남자 하나가 김신의 테이블 앞으로 걸어왔다. 통통한 얼굴이었는데 살가운 느낌이 들어 우진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러고는 김신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맛있냐?”

“…어, 형.”

김신이 웃음을 거두고 그를 올려다보고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우진이 가만히 그런 둘을 쳐다보자 김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친한 형이에요. 여기 일식집 사장님이기도 하고. 여긴 우리 회사 대리님.”

“반갑습니다, 최우진입니다.”

대리님, 이라고 말하는 김신이 약간 긴장한 얼굴을 했다. 우진은 그런 김신에게서 시선을 떼고 먼저 인사를 나눴다. 약간, 얼굴이 딱딱해진 기분이 들었다.

“반가워요. 난 너 왔다길래 여자 친구랑 같이 온줄 알았더니, 회사분이었네. 입맛에 맞으세요?”

김신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우진이 그런 김신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안 먹어봤지만요.”

“드셔보세요. 입맛에 맞으실 겁니다.”

“빨리 주방으로 가. 오래 비우면 안 되잖아.”

김신이 중간에 끼어들어 말을 끊었다. 그러자 가만히 서 있던 셰프가 테이블에 허리를 숙이고선 김신에게 손사래를 쳤다. 얼굴에 장난기가 다분했다.

“뭘 당황하고 그래. 이놈이 분기별로 다른 여자들을 데려오길래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거든요.”

“…좀 나가.”

“같이 오신 회사분도 잘생기셨네요. 안 그래도 홀에 있는 서버가 신이랑 같이 온 분이 예쁘다고 해서 여자분인 줄 알고.”

“어딜 봐서?”

“미인이시네. 딱 봐도.”

고전적인 미가 있달까, 라고 말하며 핫핫, 웃던 셰프는 그 뒤로 살가운 몇 마디를 더 하고는 테이블을 떠났다.

우진은 갑자기 조용해진 김신의 앞으로 접시를 놓아주었다. 김신의 시선이 손끝을 따라다니는 게 눈치를 보는 듯 했다. 아니나 다를까 눈을 마주치자 김신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 진짜, 저 형이.”

“드세요.”

딸려 나온 고추냉이를 손에 쥐고 우진이 조그마한 그릇에 갈아, 김신의 앞에 놓아주자 김신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기분 안 나빠요?”

“왜요?”

“여자 많이 데려왔다잖아요.”

“남자 아니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우진은 한 번 더 입술 끝을 올렸다. 이게 웃는 법이라는 걸, 조금 알 것 같았다. 우진은 멍해진 얼굴의 김신에게 손을 뻗어서 머리를 흩트리며 말했다.

“남자 손은 저만 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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