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기간한정 연애
“김 주임, 출장 다녀왔는데 뭐 없어요?”
“출장 후 과도한 선물 요구는 내부 고발감입니다.”
팀룸 근처를 지나가던 강지훈이 농담 삼아 건넨 말에 사무실에 앉아 기안문을 작성하던 김신이 모니터에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김신은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커서, 앉아 있어도 파티션 위로 얼굴이 드러났다. 와이셔츠 대신에 얇은 네이비 색의 양모 터틀넥을 수트 재킷 안에 받쳐 입은 얼굴은 화사해 보였다.
골격이 화려한 데 비해 상대적으로 입는 옷은 심플한 게 그의 스타일이었다.
무표정하게 김신의 얼굴을 관찰하던 강지훈이 입술 한쪽을 끌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뭐야. 기분 나쁘게 잘생겼어.”
“…칭찬이시죠?”
그, 말투도 기분 나쁘거든, 하고 말하고선 금방 정책실로 돌아가 버리는 강지훈의 뒷모습을 황당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김신은 출장결과 보고서를 다시 작성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결의서 작성 양이 적었는데, 아무래도 미팅 위주의 국외출장이다 보니 카드 사용이 항공권이나 숙박료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인 듯했다.
사업 진행비도 원인 행위를 잡아놓고는 거의 사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정말 독하게 출장 다니는 스타일이네.”
영수증을 챙기며 결의서를 치고 있는 와중에 채팅창에 알람이 떴다. 김신은 스캔 파일을 정리하다 채팅창을 눌러 메시지를 확인했다. 최우진이었다.
- 점심 같이 먹을까요?
“….”
‘먼저, 밥 먹자고 말할 줄도 아네.’
김신은 자신도 모르게 입 꼬리가 조금 올라가는 것 같아,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지웠다.
채팅창을 한참 바라보다, 김신은 출장을 다녀온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음을 체감했다.
출장종료 후 하루도 쉬지 못하고 출근이었다. 독일보다는 확실히 한국이 따듯했지만 금방이라도 겨울이 올 것 같은 흐린 날씨가 지속됐다.
내일은 주말이었다. 창 밖에는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져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한 달만 만나자.’
밟으면 바스락거릴 정도로 메마른 사람이 습윤한 눈동자로 그렇게 속삭였다.
혹시 알아듣지 못했을까 봐, 어깨를 붙잡은 우진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김신은 금방 눈치챘다. 달큰한 숨소리와는 달리 가슴에 파묻힌 우진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그래요.’
김신은 숨결같이 대답했다. 망설임이 없었던 건, 본능 탓이었다.
이번의 제안을 거절하면 다음이 없을 것 같았다. 최우진은 점점 더 멀어지기만 했지 가까워지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한 달이건, 일주일이건 그 만남의 의미가 김신 자신이 생각하는 ‘관계’가 맞다면, 알 수 없이 꼬여버린 이 물음에 대해 답을 찾아야만했다.
‘그럼.’
김신은 다시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우진의 턱을 오른손으로 들어올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파랗게 빛이 나는 듯한 우진의 얼굴을 드러냈다. 속눈썹이 길어서 음영이 길게 졌다.
하관이 짧아 상대적으로 어려보이는 얼굴. 어디서 분명 스친 적이 있다 하더라도, 절대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을 것 같은 불투명함.
많은 것들이 혼재되어 쏟아진 그 표정을 김신은 뚜렷하게 쳐다보았다.
‘뭐부터 시작할까요?’
김신은 그렇게 말하며 우진의 손목을 들어 올려 입 맞췄다. 놀란 듯 눈을 키우는 그 얼굴을 보면서 김신은 손을 더 잡아당겨 손목시계의 안쪽 혈관을 따라 깊게 키스했다.
‘당신은 내가 궁금해야 해.’
김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배 안에서 불꽃이 튀고, 혈관들이 팽창되는 느낌이 들었다.
‘으…읏.’
힘을 주어 손목을 빼려는 우진을 당겨 김신은 좀 더 손끝으로 혀를 가져가 핥았다.
우진은 당황해하면서 몸을 돌리려 했다. 김신은 손을 들어 어깨를 당겨 안아 우진이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없게 자신의 품 안에 가두고는 입술을 떼어냈다.
‘나랑 섹스할 수 있어요?’
‘….’
‘못 하겠어?’
손목시계 안에 감춰진 상처가 무엇인지,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든 질문들이 그날 밤 김신의 몸 안으로 쏟아진 느낌이었다.
그 질문들은 어쩌면 김신이 우진에게 갖고 있는 성적 욕망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파들거리는 우진의 목을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대자 혈관이 파닥거리는 소리를 냈다.
‘너는?’
우진이 물었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목덜미에 묻었던 입술에서부터 음폭이 느껴졌다. 김신은 천천히 목줄기를 따라, 깊게 키스했다. 혀로 음미하는 그의 피부는 부드러웠고, 간지럽고, 동시에 파괴적인 느낌을 선사했다.
‘김신, 너는 나랑 섹스할 수 있….’
김신은 우진이 뱉어내는 숨이 색을 가지고 있다면 붉은 색이 아닐까 생각했다. 노을처럼 붉고 뜨거운 색을 김신은 천천히 입술로 음미했다. 숨을 탐하고, 입술을 물었다가 떼어냈다.
‘하아.’
두 번째 키스였다. 확실히 입맞춤이라는 사실이 각인되는 느낌의 키스. 이번에 김신은 충동적이라기보다 계획적으로 우진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는 순간, 저릿한 감각이 온몸을 달렸다. 붉은 숨을 토해내는 걸 여러 번, 자신의 색과 섞었다. 혀가 엉키고, 천천히 치아를 훑자 옅은 알코올과 농익은 포도향이 입술을 스쳤다.
우진이 눈을 감는 걸 보고 있다가 김신이 침대 쪽으로 몰자, 그가 비척거리며 몸을 기대었다. 더웠다. 혈관이 팽창하고, 심장이 푸른빛을 내며 솟았다. 입술을 뗐을 땐, 둘 모두 서로에게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서로 닿으며 마찰을 일으켰다. 뼈가 부딪혀 바스락거리는 옷가지들을 벗겨내고 싶어 안달이었다.
‘답이 됐어요?’
하고 싶었다. 아마, 심장을 꺼내도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어느 일정부분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김신은 숨을 몰아쉬며 우진의 귓가에 이마를 갖다 대며 속삭였다. 후욱, 하고 끼쳐든 더운 숨에 우진이 몸을 떨었다. 모든 것이, 그렇게 쏟아진 밤이었다.
***
“최 대리님, 어쩐 일이세요?”
우진이 홍보팀 사무실 문 앞에 서 있는 걸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사원증을 손에 쥐고 사무실 밖으로 걸어 나가던 김슬기 주임이었다. 상의를 팔 한쪽에 걸고 단정하게 서 있던 우진이 가볍게 목례했다.
옅은색 앞머리가 파스스, 하고 이마 위로 떨어졌다.
“아, 저….”“김신 주임 불러 드려요?”
“….”
분홍 크림이 퍼지듯, 와이셔츠 밖으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목덜미 부근을 가렸다.
그러자 슬기가 조그맣게 웃고는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김신 주임님, 손님 오셨어요.”
손님이라니, 우진은 더 붉어지려는 얼굴을 결국 손으로 가렸다. 슬기가 그런 우진을 한참 보고 있더니 금방 목례를 하고 자리를 떴다. 열린 문틈 사이로, 금방 김신이 나타났다.
“우진 대리님?”
“….”
“슬기 주임님이, 손님이라고….”
당황한 얼굴을 한 김신의 얼굴을 보자 우진은 이제 아예 전신이 붉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복도에서 머뭇거리고 있자, 김신이 홍보팀 사무실의 문을 조용히 닫으며 우진의 손목을 잠시 잡아 자신의 쪽으로 끌었다.
탕비실로 향하던 그가 손으로 턱 아래를 가리고 문을 열었다. 커피 냄새가 후욱하고 끼쳤는데 텅 비어 있다는 걸 확인한 김신이 문을 천천히 닫고선 문 위로 기대어 섰다.
손목이 잡힌 채라 우진이 당황하고 있는데, 김신이 우진을 자신의 앞으로 마주 당겨서는 내려다봤다.
약간의 경계가 느껴지는 얼굴. 턱 아래가 조금 붉어서 손가락을 들어 만지려 하자 김신이 다른 손으로 그 손을 잡아 내렸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라, 우진이 시선을 피하자 손목을 더 힘을 줘 잡아당겼다.
김신은 예전부터 느꼈지만 늘, 복종하고 싶어지는 권위적인 얼굴을 갖고 있었다. 다리를 약간 벌리고 서 있는 김신의 품으로 당겨진 우진이 당황해하자, 김신이 손을 들어 우진의 얼굴을 꾹 눌러 자신의 가슴에 안았다. 심장이 두근, 하고 울렸다.
“이러시면 안 돼요.”
자신의 머리 위로 턱을 내려놓은 김신이 한숨을 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왜요?”
“몰라서 물어요?”
그렇게 말하며 김신은 우진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그전까진 몰랐는데, 김신은 사람의 체취를 맡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뺨, 목, 손, 모든 곳에 코를 묻고 숨을 몰아쉬었는데, 그때마다 우진은 소름이 돋아 몸을 떨었다. 김신은 깊고 뜨겁게 숨을 쉬었다.
“맨날 좋은 향이 나.”
“….”
너도, 라고 말하고 싶은 걸 우진은 참았다.
“왜 왔어요? 최우진 씨.”“…읏.”
고개를 옆으로 꺾어 목을 깨무는 바람에 우진이 신음을 흘리자 김신이 조용히 웃었다.
“밥 먹자고 했는데 답이 없어서….”
팔에 얌전히 걸려 있는 재킷을 내려다 본 김신이 몸을 조금 떼어내 우진과 눈을 마주쳤다. 볼이 붉어졌을 것 같았다.
우진은 김신에게서 느껴지는 열기 때문에 탕비실 안이 몇 도는 높아진 기분이었다.
“11시 50분에 지하에서 봐요.”
“….”
“대답해요.”
“네.”
5분 남았네, 라고 말하던 김신이 웃으며 우진을 더 깊게 끌어안았다. 빠져나가려고 비비적거리자 김신이 우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눈동자 네 개가 동시에 마주쳤다. 느긋하면서도 진득한 시선을 떼어내기가 힘들어 우진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결국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뺨에 갖다 대자, 체온이 서로 마주쳤다. 커다란 손. 김신은 우진보다 늘 한 움큼씩 컸다.
“뭐 먹고 싶어요?”
뭘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우진은 조금 했다. 동시에 뭔가가 부족한 느낌도 들었다. 무엇이 부족한지 알 수 없을 만큼 심장이 뛰고 호흡이 가팠다.
“안아 달라는 얼굴 같아.”
세게 끌어안는 김신의 어깨에 우진은 얼굴을 묻으면서, 생각했다. 고교 시절,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우진은 김신의 어깨를 손을 따라 그려보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꿈처럼 금방 사라질 것 같았다. 우진은 눈을 감으며 김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깊은 나무 냄새가 났다.
그 깊은 나무향은 아주 오래 동안 각인되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전에도 그랬고, 아마도, 오랫동안 그럴 것이다. 우진은 슬펐다. 심장에서 어느새 자라난 나무가 짙게 울었다.
***
김신은 주말 아침에 눈이 빨리 떠진 건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어, 일어나자마자 헬스장에 들렸다.
한 시간가량 운동을 하고 돌아와 샤워를 하면서도 시계를 자주 봤다.
코끝이 조금 찡했는데 부쩍 건조해진 가을 날씨 때문인 듯했다. 샤워부스에서 나와 셔츠를 고르고, 옷장에 걸려 있던 블랙의 슬랙스를 입으면서 거울을 쳐다봤다.
전신거울이 김신에게는 짧은 편이라 좀 더 뒤로 섰다. 청남방의 어깨 부분이 타이트했다. 김신은 팔을 몇 번 돌리다가 늑골 부근에 손을 가져다 댔다. 통증은 없었지만, 매번 그 곳을 만질 때마다 김신은 어딘가 크게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왜 꿈을 꿨지?”
김신은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이었다. 꿈을 꿔도 잊어버리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일어났을 때 코끝에 남아 있는 피 냄새가 이상하게 지워지질 않았다.
“….”
꿈속에 온 몸이 피투성이었던 사람이 있었다.
수영장 아래로 가라앉고 있던 그 사람의 몸은 한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다.
물에서 끌어내 밖으로 나왔을 땐 전신이 창백했고, 너무 많은 피를 흘려 수영장이 분홍빛을 띨 정도였다.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김신은 가지고 있던 핸드폰으로 119를 불렀다.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그 사람의 얼굴은 사실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심하게 폭행당한 듯 얼굴이 부었던 터라, 눈조차 뜰 수 없는 상태였다. 거기다 두 손목 모두, 엉망으로 그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꿈에서 엉망으로 그어진 손목 아래에, 약하게 뛰던 맥박을 김신은 봤다.
너무 얇은 손목이라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의 희미한 움직임이었다. 그 순간 살아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고, 김신은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꿈에서 깼다.
그 얇은 손목이, 오랫동안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