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 주임과 최 대리-18화 (18/60)

18화. 리미트 라인

“놀란 거 같더라.”

우진이 벌떡 일어났다. 또 숨이 막히는 것 같아 가슴을 움켜쥐자, 이준이 앞에 있던 커피 잔을 우진의 앞으로 밀며 나른하게 웃었다.

“난 아직 누구 편도 아니야. 고모님도 입국은 힘드시고.”

“하아… 하아….”“거기다, 어렸을 때부터 너랑 같이 자란 인연도 있지.”

“….”

“그러고 보니 김신, 너랑 같은 고등학교….”

쨍그랑, 이준이 앉아 있던 소파의 벽 뒤로 던져진 머그잔이 산산히 부서졌다.

하얀색 벽지에 갈색 커피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심장이 찢어질 듯 뛰기 시작했다.

손이 덜덜 떨려 우진은 심장부근으로 오른손을 옮겨다 놓았다. 온기가 필요했다. 진동이 빠르게 손바닥 안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아직은 살아 있다는 걸 느껴야 했다.

“와, 최우진 이때까지 성격 죽이고 산다고 고생 많았네?”

“….”

“난 먼저 내려간다. 정리하고 내려와.”

우진은 이준이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부들부들 떨며 서 있었다.

이준의 로퍼 소리가 복도를 저벅저벅 울리는 동안 우진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감싼 채 몸을 둥글게 말았다.

자신이 회장의 직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사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중 하나가 전년도에 입사한 배이준으로, 이준은 영국에서 일하다 갑자기 입국한 케이스였다.

보나마나 회장의 지시였을 것이다. 영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도, 몇 번이고 우진에게 연락을 했던 이준을 우진은 기억하고 있었다.

“우진 대리님?”

몇 분이 지났을까. 낮은 목소리가 들려 우진은 고개를 들었다. 김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왜 이래요? 방은 왜 또… 배이준 주임님은 어디 가셨어요?”

“….”

“혹시 아파요? ”

온기가 필요했다. 우진은 급하게 그 손을 당겨 자신의 입을 막았다.

숨을 몰아쉬자, 김신이 허리를 숙여 우진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나 더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아, 우진은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더 당겨 안으려 하자 김신이 조금 거리를 두며 우진에게 입을 열었다.

“우진 대리님.”

“….”

“내가 수영선수였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

“그리고, 어디가 아픈 거예요?”

마지막으로 묻는 목소리가 낮았지만 분명하게 떨렸다.

우진은 김신의 눈빛이, 직선적이어서 좋았다. 소년의 김신과 성인의 김신은 똑같이 직선적이고 솔직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자신과는 다른, 맑고 깨끗하며 동시에 본능적인 그 얼굴을 우진은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다. 눈물이 후두둑, 김신의 손 아래로 떨어졌다.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우진은 김신을 오랫동안 좋아했다.

***

미팅은 순조로왔다. 우진과 이준은 죽이 잘 맞는 페어였다.

침착한 데다 눈치가 빠른 우진은 업체가 원하는 자료를 바로바로 넘겼고, 이준은 위트가 넘치는 프레젠테이션을 구사할 줄 알았다.

특히 이준은 첫 인상만큼이나 사회성이 좋았는데, 그래서 우진과는 극과 극이었다.

세 번의 릴레이 미팅이 점심식사를 스킵하고 쭉 이어졌다. 사업 소개 및 콘텐츠 관련 데이터가 끊임없이 오갔고, 제법 영어를 한다고 생각했던 김신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의 이야기와 농담들이 테이블 위로 펼쳐졌다.

마지막 미팅이 끝났을 때는 이미 저녁시간을 한참 넘긴 후였다.

“배 안고픕니까? 다들?”이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는 우진과 김신에게 물었다. 다들 셔츠는 구겨진 상태고 재킷은 테이블 앞 의자에 여러 벌 겹쳐 널려 있었다.

미팅 장소에서 바로 빠져나와 호텔로 향하는 우진을 보고 김신과 이준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우진을 도와 자료를 정리하는 김신의 노트북 앞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이준은 목소리를 키웠다.

“독일 왔는데, 맥주 한잔도 못 했다는 게 말이 되요?”

“….”

“소세지 한 조각 못 먹었다는 게 말이 되냐구우!”

그렇게 말하는 이준을 앞에 두고, 우진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자료를 집어 들었다.

여왕님, 너무 하시네, 하고 말을 잇는 이준을 보며 김신은 우진을 힐끗 쳐다봤다. 3일째 같이 지내다 보니 우진과 이준은 서로 대화를 잘 안 할 뿐이지 묘하게 가까운 느낌이 난다는 걸 김신은 알 수 있었다.

강지훈과는 또 다른 관계성이었다. 특히나 우진은 이준이 말할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거나 짜증 나는 얼굴을 했다. 김신은 처음 보는 표정들이었다.

“야, 최우진!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냐?”

결정적으로 이준은 어느 순간부터 미팅 이외의 시간에는 우진에게 반말을 했다.

우진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는 배이준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왜?’ 하고 묻는 그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던 우진은 후우, 하고 한숨을 몰아쉬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커튼을 쳤다.

독일의 밤은 쌀쌀했다. 창가에 습기가 조금씩 달라붙어 있었다. 김신은 잠자코 그런 우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7시, 로비에서 봅시다.”이준이 앗싸, 하고 노트북을 탁 하고 덮었다.

‘그럼, 조금 있다 만나요’, 하고 나가버린 이준을 뒤로, 김신은 이마에 손을 짚고 서 있는 우진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유독 김신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우진의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다가서려는 순간 밀어내는 우진과 마주했고, 아직 하지 못하거나 만들어지지 않은 감정들이 둘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떻게 조합을 해야 할지,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할지 김신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만으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김신은 하고 있었다.

“나가 보세요.”

“아, 네.”

나중에, 뵙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김신은 자신도 모르게 우진의 손목 아래에 시선이 갔다. 문을 닫고 나오자 길게 뻗은 호텔의 복도와 특유의 카펫 먼지 냄새가 풍겼다. 후우, 길게 한숨이 먼지와 함께 내려앉았다. 모든 일들이 순간에 일어나 머릿속으로 뒤섞였다.

***

“후, 이제 살 거 같네. 식비를 독일 출장 3일째에 처음 쓰다니. 너무한 거 같지 않아요?”

“….”

“내가 이래서 최우진 대리랑 출장 오는 거 싫어한다니까.”

얌전히 프렌치프라이를 마요네즈에 찍어먹고 있는 우진을 보고 이준이 웃으며 이야기했다.

김신은 앞에 놓여 있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펍을 둘러봤다. 함부르크 숙소 근처에 있는 식당 겸 펍은 제법 한산한 데다 어두웠다.

독일은 10시만 되어도 가게들이 전부 문을 닫아 걱정이었는데 카운터에 물어보니 입술에 피어스를 한 금발 여성이 11시까지 오픈한다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맨날 식빵에, 식은 커피에. 지겹다 지겨워.”

“식사나 하시죠.”

우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바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감하게 시선을 던졌다.

샤워를 하고 나온 모양인지 옅은 갈색의 머리칼이 보송보송했다. 바닐라 색의 스웨터를 입은 우진은 아직 대학생 같은 얼굴이었다. 오전까지 부어 있던 눈이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그거 알아요? 최우진 독일에서 대학 나온 거.”

“….”

한창 바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있던 이준이 김신에게 말했다. 우진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앞에 놓여 있는 와인을 마셨다. 이미 식사가 나오기 전에 우진은 와인 한 잔을 깨끗하게 비운 상태였다. 김신은 조금 신경 쓰였지만 애써 무시했다.

“아, 그래요?”

“몰랐구나. 우리 둘이 어릴 때 친구였거든요.”

“….”

“친구 아니야.”

끼익, 하고 사기 접시에 나이프가 엇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우진은 스테이크에 칼집을 넣다 말고 이준의 말을 정정했다.

“뭐야, 그럼 형제냐?”“동네 아는 사람.”

취했나, 김신은 약간 몽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우진을 보며 생각했다. 분명 무표정했지만 약간은 긴장감이 풀린 느낌이었다.

“들었어요? 동네 아는 사람이래. 하하하하.”

“….”

뭐가 웃기지, 하고 혼잣말을 하는 우진은 확실히 조금 취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3일 만에 우진은 금방 쪘던 살이 다시 내릴 정도로 식사량이 줄었다.

거기다 와인을 주문할 때, 이준이 금방 취할 텐데, 라고 혀를 끌끌 차던 것도 김신은 똑똑하게 들었다. 이준은 앞에 두었던 양배추 샐러드를 포크로 집으며 중얼거렸다.

“우진이 독주에 강하고, 과실주에 약한 타입이에요. 옛날부터 그랬어.”

“다 안다는 듯이 말하지 마.”

“고집 피우는 거 봐라.”

우진이 이준을 샐쭉하게 바라봤다. 김신은 그런 우진의 표정이 새삼 신기해서, 한참 들여다봤다.

옅은 느낌의 눈썹이 움직이고 가느다란 입술이 호선을 그었다. 와인을 가져가는 손가락이 가늘고 곧았다. 확실히 본능적으로 끌리는 무언가가 있는 사람이었다.

“잠시, 실례할게요.”우진은 앞에 있던 냅킨으로 입술을 닦고는 약간 비척이며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김신의 시선이 주욱 따라가자, 포크 스테이크를 자르고 있던 이준이 약간 미묘하게 웃었다.

“취했네. 안 취했다고 고집 피우기는.”

“친하신가 봐요.”

“난 친하다고 생각하고, 우진은 아니고.”

“….”“회사에서 아는 척도 안 하잖아요. 우리 둘은.”

이준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게 묘하게 서글픈 느낌이라 김신이 쳐다보자 이준은 말없이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사실 좀 골려주고 싶었는데.”

“대리님을요?”“아니. 그쪽이요.”

이준은 그렇게 말하며 김신을 향해 웃었다.

“안 놀라더라고요. 최우진이 회장 직계라는 말에.”

“…놀랐는데요.”

“그럼 표정이 얼굴에 안 드러나는 스타일인가요?”

“엄청 드러나는 스타일입니다.”

김신은 그렇게 말하며 앞에 놓여 있는 골든 에일을 한 번에 마셨다. 기포가 바글거리며 심장 안을 맴도는 기분이었다.

“그럼 놀랐는데, 우진이 걱정할까 봐 모른 척하는 거?”

“….”

“최우진 신기해.”

“뭐가 신기해요?”

“이상하게 눈길이 가죠. 걱정되고. 묘하게 어딘가 시선을 끄는 타입이에요.”

“….”

“그래서 좀, 불행해 보여.”

“그건, 아마….”김신은 기포가 남아 있는 빈 맥주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배이준 주임님이 최우진 대리님을 좋아해서겠죠.”

“그런가.”

“우진 대리님 그렇게 눈에 띄는 타입은 아니에요.”

“….”

“문제는, ‘제’ 눈에 띈다는 거죠.”

이준의 눈이 조금 커졌다. 타이밍 좋게도 우진이 테이블 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

“아우, 무거워 뒈지겠네. 최우진 대리님! 정신 좀 차려보세요. 네?”

“…Scheisse.(병신.)”

‘입은 험해 가지고 진짜!’

이준은 자신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우진의 얼굴을 밀어내며 소리쳤다.

우진은 결국 와인 한 병을 모두 비웠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테이블로 돌아온 우진에게 와인을 권한 건 이준이었다. 뭔가 심통이 난 얼굴로 몇 잔을 연거푸 권한다 했는데, 결국 얌전히 마시던 우진이 클로즈 시간에 맞춰서 고꾸라졌다.

도저히 잠에서 깨지 않을 거 같아, 둘이 함께 부축해서 호텔로 돌아온 건 몇 분 전이었다.

엘리베이터까지는 어찌어찌 데리고 들어왔는데, 문 앞에서 우진이 몇 번 미끄러졌다. 김신이 옆에서 우진의 어깨를 안아 고정시키자, 이준이 금방 우진의 코트 안을 뒤적거려 카드키로 보이는 카드를 꺼내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법카잖아. 얘 카드키를 어디 둔거야?”

“아마 로비에 둔 거 같은데요.”

“들어올 때 이미 확인했지. 아우 진짜, 내가 사달을 냈네. 내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영어로 빠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이준이 다시 한번 우진의 코트를 뒤졌지만 나오는 게 없었다.

“어쩌죠? 내 방에서 재워야 하나. 난 싱글 룸인데.”

“다시 로비에 내려가 보죠.”

“없다니까. 얘 분명 어디에다 숨겨놨을 텐데. 하여간 여우같은 자식.”

그렇게 말한 이준이 다시 우진의 몸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김신이 흘러내리는 우진을 고쳐 안는데, 우진이 잠결에 손을 올려 우진의 목을 감았다. 달큰한 와인향이 목덜미에 닿았다. 김신은 갑작스런 긴장감에 등근육이 딱딱하게 굳는 걸 느꼈다.

“없어, 없어. 아주 단단히 숨겨놨구만.”

“….”“참, 김신 주임 방에 보조침대 넣어두지 않았어? 우리 어제 미팅 준비하다가.”

“아, 네.”“어쩔 수 없네. 데려가서 좀 재워요. 아우 씨. 진짜 가볍게 생긴 녀석이 그래도 남자라고 무거워…. 으악.”

관절에서 두둑, 소리가 난다며 이준은 굽혔던 허리를 어렵사리 폈다.

“잘 부탁해요. 내일 몇 시 체크아웃이죠?”

“11시입니다.”

“그때까지 뭐 어떻게든 되겠지. 짐 맡기는 기분이네요.”

“아닙니다.”

“푹 쉬어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이준을 보고 있다가, 김신은 다시 주르륵 미끄러지는 우진을 고쳐 안았다.

우진은 가볍지 않았다. 그건 그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김신은 쏟아지는 앞머리를 한손으로 넘기고는, 재킷 안에 넣어두었던 자신의 카드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 전자음이 들리자마자 김신은 한손으로 문을 밀며 들어섰다. 어두운 방 안에서 훅, 하고 훈기가 끼쳐들었다.

“후우.”

숨을 몰아쉬며 문을 닫고 카드키를 꽂으려 할 때였다.

“김신.”

어둠 속에서 숨결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김신.”

아마, 한 번 더 부르지 않았다면 김신은 그 목소리가 꿈결 같다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어둠에 익숙해지려는 시선으로,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는 우진을 내려다보았다. 김신의 어깨에 파묻힌 얼굴이 보이지 않아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었다.

“…신아.”

뜨거운 숨이 어깨에 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우리 한 달만 만나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