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18세의 최우진
“언제, 제가 수영했다고 말한 적 있나요?”
숨을 몰아쉬면, 차갑게 내려앉은 꿈들이 우진의 머릿속을 유영하곤 했다.
그때마다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의 소년이 하나 있었다. 무거운 톤의 목소리는 수면 아래로 침잠하고 있던 우진의 심장을 세차게 두드렸다.
자신의 손목을 쥐고 있는 그 손의 악력이 너무나도 세서, 마치 소리를 내며 숨을 몰아쉬어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다.
장난스러운 얼굴, 또래보다 큰 키, 깔끔한 화이트 컨버스화, 딱 떨어지던 교복바지의 선, 명찰과 엠블럼의 단정함과는 달리 어딘가 화려하면서도 난잡한 느낌이 드는 소년 하나가 시간을 유영하듯 수면 위에서 뱅글뱅글 우진의 얼굴 위를 맴돌았다.
김신.
우진이 김신을 처음 본 건, 18세와 19세의 경계에서였다.
우진에게 그전까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삶이란 벽돌처럼 단단했다.
어쩌면 자신에게 스무 살은 영원히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때이기도 했다. 무감하다고 느꼈지만 불행하진 않았고, 인생은 단조롭기만 했다. 행복이란 단어를 씹으면, 왠지 쓴물이 나올 것 같았다.
***
‘안녕하세요!’
교문을 지나치면서 남자 여럿이 학생주임 선생님과 선도부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진의 고등학교는 서울에서도 유명한 사립 고교로, 수도권에 얼마 남지 않은 남자 고등학교 중 하나였다.
성적 상위 20%와 체육 특기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했고, 나머지 학생들은 등하교를 하는 형태의 특수 고등학교였다.
‘수영부는 아침 연습 들어가고, 나머지는 자율학습 준비해.’
기숙사는 상위 성적권의 아이들만 모여 있었기에 제법 조용했다. 가끔 체육 특기생들과 마주칠 일이 있었지만, 확실히 그들과 뒤섞이지는 않는 느낌이었다.
우진은 입학 때부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꾸준히 기숙사 생활을 종용받아온 터라 늘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해야 했다.
주말에 본가에 들리는 걸 반기지 않는 부모님 때문에 우진은 기숙사에 혼자 남아 있을 경우가 많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 또한 그게 편했다. 부모와 자식은 닮는 법이었다.
2년 내내 우진은 주말마다 체육관에서 수영을 하는 수영부 아이들과 마주쳤다. 수영부는 특히 사계절 내내 전국체전을 준비했기 때문에 우진과 마주칠 기회들이 많았다.
물론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긴 했지만 특기생들이 특별히 성적 상위권의 학생들과 어울릴 기회 같은 건 없었다.
시간은 제법 빨랐다. 우진에게도 고등학교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3월이 왔다. 개학 첫 주에는 입학식 겸 전체 조례가 있었다. 우진은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인 데다 저혈압이라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결국 찌푸린 얼굴로 침대 밖으로 나와 목도리를 여러 겹 두르고 코트도 목 끝까지 채워 입었다.
기숙사를 나서자 같은 반 학우들이 입김처럼 사그라져 우진을 스쳐 지나갔다. 진폭이 없는 날들이었다.
‘입학생 대표, 김신 앞으로.’
입학생 대표를 체육 특기생이 한 건 처음이라는 이야기를 담임이 옆 반 담임에게 속삭이듯 했다. 마침 앞단에 서 있던 우진이 우연히 그 얘기를 듣고선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목도리로 입 부근을 막아 자신의 호흡이 코끝과 뺨에 닿아 습했다. 뿌옇게 흐려진 안경 너머로, 큰 키의 소년 하나가 휘적휘적 걸어 단상으로 올라서는 게 보였다. 금방 맞춘 교복의 바짓단과 재킷 선들이 약간 짧아 보일 정도로 키가 컸다. 신발에서부터 긴 다리를 지나, 등까지 시선이 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얼굴과 마주했다.
‘와….’
평생에 감탄사 같은 걸 내뱉을 경우가 없었던 우진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을 때, 우연히 그 소년이 단상 아래로 시선을 두었다. 뿌옇게 흐려지는 안경을 닦으려고 손을 들었는데,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엄청난 흡입력을 가진 시선이었다.
‘….’
부옇게 흐려지는 시선 사이로, 그가 웃었다.
아마도 입김이 서린 안경과 아무렇게나 두른 목도리나, 멍하니 입을 벌린 자신이 조금 우스꽝스러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시선은 찰나였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입학선언문을 읽고 조용히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심장이 한 번, 두 번 크게 아래로 진동하는 거 같아서 우진은 교복재킷 안의 왼쪽 심장 부근을 만졌다. 숨이 조금 차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쳤을 때 심장이 시선 아래로 묶이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와 눈을 마주친 일이 열아홉 우진의 기억에는 별로 없었다.
자신이 유난히 고개를 숙이고 다니기 때문이기도 했고, 억지로 말을 붙이려 다가오는 친구들도 없었다. 선생도 그저 최우진의 이름만을 어렴풋하게 기억할 뿐이었다. 출석부에서 이름이 지워진다 한들, 그들의 기억에 남을 정도는 아니었다.
‘진, 안 들어가냐?’
담임의 목소리가 근저에서 울려 우진은 멍하니 서 있던 몸을 돌렸다.
천천히 한 발짝을 내딛다가 결국 우진은 교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너무 뛰어 숨이 모자랐다. 갑자기 힘을 준 발목 아래가 전기가 들어온 듯 아팠다.
‘….’
마치, 말을 거는 듯한 시선이었다.
선명한 얼굴. 쏟아지는 강렬한 색채. 폭죽이 터지듯 심장 안에서 여러 번의 충동이 일었다.
이후로도 몇 번 단상에 올라가는 김신을 봤다. 볼 때마다 키가 크는 것 같았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긴 다리로 뛰듯이 걸어서 계단을 오르고, 메달을 걸어주면 고개를 숙이면서 환하게 웃었다. 웃을 때마다 이마와 눈썹 산이 아치형을 그렸는데, 놀라울 정도로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소년과 성인의 중간, 딱 그 시절의 얼굴이었다.
우진은 그를 볼 때 마다 묘하게 피어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복도를 걷다가도 뒤통수만 봐도 알아볼 지경이었다. 가끔 창밖을 내려다보면 트레이닝을 받는 체육부 애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때에도 그 소년은 우진의 시선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김신이라는 색깔.
김신은, 우진에게 마치 선명한 색채 같았다.
꿈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우진은 김신을 늘 환상으로 치부했다.
기억이 제법 바래서, 어쩌면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독일로 부랴부랴 어머니와 함께 비행기를 탔을 때도 우진은 김신을 잊어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함께 떠오르는 기억들이 우진을 그날 그 밤 속의 수영장 아래로 끊임없이 침잠시키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회사에서 처음 마주친 순간. 더 낮아진 음성과 완연히 성인이 된 눈동자가 우진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10년 전 딱 한 번 그의 손가락이 우진의 손목을 스쳤던 적이 있었다.
건네어주던 학생증을 받아 기숙사 방으로 들어왔을 때, 우진은 그 학생증을 책 위에다 올려놓고는 한참을 쳐다보았다.
학생증에 묻은 그의 색채가, 울렁거렸다. 노을이 졌다. 그날은 우진이 노을이 보랏빛과 오렌지, 네이비와 쨍한 두랄루민의 빛 덩어리로 레이어되듯 물든다는 걸, 처음 알았던 날이었다.
우진에게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스무 살이 성큼 다가왔다.
***
시간이 스며들 듯, 그때의 소년과 김신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우진 대리님.”
“….”
“대리님, 괜찮아요?”
김신이 우진의 손목을 잡았다.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한 우진이 시선을 위로 옮기자 김신이 걱정스런 얼굴로 우진의 손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죽줄이 제법 헤져서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해주는 시계가 감긴 얇은 손목이 김신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우진이 손을 돌려 빼려 하자 김신이 힘을 주어 가슴 쪽으로 당겼다.
휘청, 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김신은 차가워진 얼굴로 우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는 거예요?”
“괜찮습니다.”
우진은 손목을 약하게 비틀어 김신의 손을 뿌리쳤다.
“보고서 빨리 찾죠.”
우진은 급하게 김신의 시선을 피했다. 기억을 파헤치면서까지 김신과 얽혔던 이유는 아주 오래전 마주쳤던 색채의 파편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려 했다.
우진은 더 이상 자신의 세계로 김신이 넘어오지 않길 바랐다. 그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들이었다.
‘너 때문에 죽은 거야.’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우진은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모든 것들은 갑자기 일어났다.
‘너도 죽어야 해!’
예고도 없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살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루하루가 그저 지나갈 뿐이었다. 그저 가끔 보이는 김신이라는 색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좋았다는 감정이 너무 새로웠기에, 우진은 그 당시 벌을 받은 건지도 몰랐다는 생각을 했다.
검은 밤이 다가왔다.
“윽….”
갑자기 심장이 턱, 막히더니 우진이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사라졌던 증상이 돌아오고 있었다. 숨이 더 이상 쉬어지지 않았다. 우진의 무릎이 갑자기 꺾이자, 김신이 놀란 얼굴로 우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대리님!”
과호흡이었다. 우진이 갑작스럽게 숨을 못 쉬고 얼굴이 창백해지자, 김신이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최우진!”
‘숨 쉬어요, 얼른!’
기억이, 사그라졌다.
김신,
사실 아주 오래전 아무도 몰래 숨결처럼 네 이름을 불러봤어.
김,
신.
***
“호흡도 정상이고, 맥박도 정상이에요.”
“…감사합니다.”
김신이 한숨을 몰아쉬며 강지훈을 돌아보았다. 지훈은 입술을 자근자근 씹고 있었다.
김신이 실신한 우진을 데리고 1층으로 뛰어 내려갔을 때, 급하게 따라 나온 건 지훈이었다.
지훈은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이동하는 중에도 우진의 입과 코를 손으로 꽈악 막았다. 김신이 응급차를 부르는 동안 로비는 그야말로 난리였다. 급하게 의사들이 응급처치를 하면서 다행히 우진의 호흡이 돌아왔다.
지훈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접수를 하고선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응급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김신은 몇 가지 진찰을 한 뒤 응급실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우진의 얼굴을 내려다보곤 한숨을 몰아쉬었다.
안색이 여전히 창백했다.
“불안 증세가 원래 있었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니었던….”
“7년 전쯤입니다. 그때도 전환 장애처럼 나타났어요.”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우진의 옆으로 지훈이 다가와 빠르게 대답했다. 김신이 그런 그를 내려다보고 시선을 맞추자 지훈이 당황한 듯 눈을 피했다.
“김신 주임님 잠깐 밖으로 나가 있으시죠.”“네?”
담당의사 앞으로 나서는 지훈을 보며 김신은 현기증을 느꼈다.
무의식중에 우진의 손을 찾아 잡으며 김신은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것투성이었다.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제가 왜….”
“선생님, 밖에서 저랑 잠시 이야기 나누시죠.”
결국 강지훈은 의사의 팔을 끌고는 복도로 나갔다.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우진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아 김신은 더 이상 지훈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똑, 똑 떨어지는 수액이 파랗게 돋아난 우진의 손목 핏줄 안으로 스며들었다.
두 번째였다. 자신의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지는 건.
“왜 이래요…. 나한테.”
혹시 몰라 코 아래에 귀를 가져다댔다. 아주 옅은 숨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와 습기. 마른 손목, 손목….
“….”
주삿바늘을 찔러 넣기 위해 끌렀던 손목시계를 김신이 움켜쥐며 우진을 내려다보았다.
…선명하게 그어진 손목 위의 두 줄
그건 분명, 날카로운 무엇인가로 여러 번 그은 듯한 상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