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 주임과 최 대리-15화 (15/60)

15화. 자료 보관실

김신은 슬기와 함께 오늘 미팅과 관련된 문서들을 프린트하고 있는 중이었다.

홍보업체 미팅은 까다롭기가 그지없었다. 기획자들은 말이 많았고, 프레젠테이션은 형편없었다.

수진 팀장은 이마를 한손으로 짚더니 손짓으로 조용히 슬기와 김신에게 제안요청서를 준비해오라고 일렀다. 아무래도 오늘 퇴근은 늦어질 듯 했다.

복사기 앞에 허리를 짚고 서 있는 김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슬기가 문득 입을 열었다.

“우진 대리님이랑 싸웠어요?”

“…네?”

김신은 이 질문을 회사사람들로부터 듣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젠 놀랍지도 않을 정도였다.

사내는 신기한 공간이었다. 서로에게 무관심한 듯 보이지만, 끊임없이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갑작스럽게 환멸감이 느껴져서 숨을 몰아쉬니, 슬기가 그런 김신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화장을 거의 안한 얼굴이 나이에 비해 깨끗한 느낌을 줬다.

“키카 커서 늘 목이 아프네요. 쳐다볼 때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쓸데없이 크다는 이야기였어요.”

슬기는 드물게 김신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는 편에 속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김신은 무리에서 꽤나 사랑을 받아온 전적이 있었다. 그건 사람을 다루는 스킬과 함께 호감을 사는 외모 때문이라는 걸 김신 자신도 잘 알았다.

그러나 슬기는 좀 달랐다. 김신은 우진과의 점심 식사 이후 슬기로부터 ‘불호’의 감정을 여실히 느끼고 있는 터였다.

이 사람이 느슨하고 따뜻하게 쳐다보는 대상이라고는 최우진 말곤 없었다. 적당한 거리감과 냉철한 비판, 그게 이 사람의 장점이자 단점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지랖 넓으시네요.”

“팩트를 말한 건데, 오지랖이라니요.”

“최우진 대리님과 싸운 적 없단 뜻입니다.”

최소한 둘은 사람들 앞에선 사이좋게 지낸 적도 없었다. 겉으로 드러나기에 두어 번 식사를 같이 한 사이일 뿐인데도 회사 사람들은 부쩍 김신과 최우진의 관계를 궁금해했다.

슬기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복사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프린트를 착착, 하고 두 번 정리하고는 스테이플러를 눌렀다. 김신은 그런 슬기를 쳐다보다가 자신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헤집었다. 이마에서 약간 열이 돋는 것 같았다.

“우진 대리님이 누구한테 곁 내주는 거 첨 봐서요.”

“….”

“좋은 의미예요.”

“강지훈 대리님도 있으시잖아요.”

지훈이 우진을 향해 웃는 것을 보고 있으면 김신은 뱃속 어딘가가 배배 꼬이는 기분이었다. 지훈은 얼굴이 멀끔하고 패션 감각도 좋아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김신은 무엇보다 지훈이 우진에게만 극진하게 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 점심도 그랬다. 우진이 자신을 보고 당황하던 그날 밤 이후, 김신은 몇 번이고 우진에게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지만 거절당한 참이었다.

연우 말로는 업무 때문에 스트레스가 제법 많다고 했다. 그러다 우연히 동기들과 지나치던 회사 근처 죽집에서 우진을 봤다. 강지훈은 우진을 향해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한 열기에 휩싸인 건, 아무래도 질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질투라니.’

어린아이도 아닌데, 자꾸 조급했다.

“남자들도 서로에게 소유욕 같은 거 있나 봐요?”

“….”

“강지훈 대리 이야기가 거기서 왜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그렇게 특별할 것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무심코 뱉은 말에 김신은 심장 아래가 서늘했다. 자신의 말에 되려 자신이 상처 입은 얼굴을 한 김신을 보고 슬기가 제안요청서를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강지훈 대리님은 짝사랑에 가깝죠.”“….”

사람들은 가끔, 용어의 쓰임에 대해 깊게 생각지도 않으면서 핵심을 짚어내는 경향이 있었다.

김신은 자기도 모르게 눈썹을 모로 세웠다. 이마뼈가 투욱, 하고 튀어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사회생활에서 감정이 얼굴 밖으로 드러나는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결국 일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몇 번이고 주의를 들었었다. 홍보실은 더욱 그랬다.

“입사했을 때부터 그랬다던데. 우진 대리님 신기하게 눈에 잘 안 띄잖아요.”“…그래요?”

‘누가 봐도 눈에 띄는 타입 아닌가.’

김신의 눈에 우진은 주의를 확 끄는 느낌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 강렬한 시선 때문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김신은 그가 지나다닐 때마다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동그마한 뒤통수나 가늘지만 약하지 않은 우진의 어깨선은 점점 김신의 취향이 되었다. 처음부터 취향이었을 수도 있지만.

우진은 기본적으로 어두운 타입의 수트를 자주 입었다. 기성복 같지 않게 그 마른 몸에 수트가 딱 맞는 느낌이 들었다. 가봉한 느낌이 물씬 나는 수트들은 우진의 몸의 선을 여실히 드러냈다.

팬츠의 끝단은 복숭아뼈 바로 위에서 끊어졌다. 걸을 때마다 잘 다려진 바짓단이 섬세하게 주름졌다.

“강지훈 대리님은 정반대고. 그런 둘이니 늘 주목을 받았던 모양인데….”

“….”

“강 대리님이 꾸준히 최 대리님 챙겼던 모양이에요. 정책실로 넘어올 때도 일부러 옮겼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 정도면 집착이네요.”

슬기가 김신의 말에 풋, 하고 웃었다.

“일주일 뒤에 국외 출장 건 하나 있는 거 알죠?”

“네.”“그거 팀장님한테 말해서 김신 주임이 좀 다녀와요.”

“…네?”

그 출장은 정책실 쪽과 협조문이 걸려 있는 건이었다. 김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슬기가 무심하게 돌아서며 홍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그쪽 미팅에 여자들이 잔뜩 나올 거 같아서.”

“그게 무슨 상관 입니까.”

“대행사 관리 잘 해줘요. 계약도 많이 따오고.”

김신 주임님, 일 잘하고 와요. 하고 돌아서며 웃는 슬기의 얼굴 어딘가가 좀 씁쓸했다. 김신은 의아해하며 정책실 근처를 돌아다봤다.

텅 비어 있는 자리. 어떻게 다시 다가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김신은 서류를 한 번 더 챙겨들었다.

***

“비행기 티켓 예약했어?”

“아직.”“출장신청서 협조 다시 걸어야 될 거 같아. 홍보팀이랑.”

강지훈은 그렇게 말하며 파티션 뒤로 의자를 밀며 우진을 바라보았다.

“슬기 주임 못 간다더라.”

“….”

“김신이 간대.”

우진은 심의 문서를 뒤지다 멈칫했다.

“슬기 주임은 사업설명회 건이 잡혔다나 봐.”

“….”

“김신 주임 첫 출장이니 네가 알아서 잘 챙겨줘.”

우진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서 사무 책상에 얌전히 올려다 놨다.

안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후우, 하고 숨을 몰아쉬자 지훈이 타이핑을 치던 손을 멈췄다.

“가기 싫어? 워크샵 교육 갈래? 내가 출장 갈까?”

“아니.”

“대답 칼 같네.”

지훈은 그렇게 말하며 슬몃 웃었다. 우진은 의자 뒤로 고개를 젖혔다.

저혈압이라 가끔 혈액순환이 되지 않으면 두통이 심하게 찾아와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으려는데, 타각, 하고 구둣발 소리가 들리더니 깊은 우드향이 풍겼다. 어디서 맡아본 향기였다.

“우진 대리님.”

낮은 목소리. 우진이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목울대였다.

말할 때마다 굵은 선으로 움직이던, 김신의 아담스 애플. 우디한 느낌의 향수는 김신의 목덜미에서 나던 것이었다. 우진은 눕다시피 앉아 있던 의자에서 상체를 느긋이 일으켰다.

“네.”

“출장 건으로 보고서를 찾으려고 하는데, 어딨는지 모르겠네요. 기안문을 찾아보니 2014년에 우진 대리님이 담당하셨던 걸로 되어 있어서요.”

짙은 네이비 와이셔츠는 화려한 김신의 얼굴에 잘 어울렸다. 김신은 늘 클래식한 정장을 챙겨 입었는데 얼굴과는 상반되는 느낌이라 유독 보기 좋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와이셔츠에서 나무 냄새가 짙게 배어 나왔다. 김신이 몸을 숙여 우진의 뒤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2014년 정책본부 문서번호 935번입니다.”

“….”

숨소리가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이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으면 산소가 부족해지는 느낌이었다. 등 뒤로 뻗어 온 김신의 가슴에서, 조금씩 열기가 흘렀다. 두텁고 무거운 공기층이었다.

“아, 여기 있네요. 2014년 결산 전망 보고서….”

덮었던 몸을 일으켜 뒤에서 스마트폰으로 메모하고 있는 김신을 올려다보던 우진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2014년 자료는 2층 자료실에 있습니다.”

“전자문서로는 안 남아 있나요?”

“매출은 기밀자료라 인쇄해서 보관해요. 전자문서는 보안이 걸려 있어 검색이 안 될 겁니다.”

“아, 그럼 제가 찾겠습니다.”

“찾아 드릴게요.”

우진이 일어서자 김신이 조금 놀란 표정을 했다. 몇 번의 점심을 거절하면서, 어떤 마음이었는지 이 화려하고 잘난 남자는 절대 알지 못할 것이라고 우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김신의 등을 보며 복도를 걷자, 몇몇의 사원들이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습한 마음이 들었다. 축축하고 기분 나쁜 성정. 사람과 가까워지는 것을 무서워하면서, 이들의 시선을 빼앗는 이 남자에 대한 무한한 소유욕이 우진은 두려웠다.

클리닉에서 윤일이 무감하게 뱉었던 질문이 생각났다.

‘요즘에도 전혀 욕구가 없어요?’

그 질문은 어딘가 잘못되어 있었다.

“우선 보안실에 연락해서 자료실 창고 카드키를 받아와야 해요.”

“제가 받아올게요. 2층에 계세요.”

김신이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팅, 하는 소리와 함께 9층으로 올라온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면서 김신은 우진의 앞에 비껴서 5층과 2층을 연달아 눌렀다. 손가락 끝이 단정했다. 그와 반대로 김신의 얼굴은 매번 조금씩 난잡함과 혼란의 색을 띠고 있었다. 마음을 빼앗기긴 충분했다.

“….”

우진에게 욕구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반응하는 대상이 한정적이었을 뿐이다.

우진은 앞에 서 있는 김신의 등을 바라보았다. 툭 튀어나온 날개뼈가 수트 위로 두드러졌다.

심장이 쿵하고 아래로 떨어지는 엘리베이터와 함께 진동했다. 충동적으로 두드러진 날개뼈를 만질 뻔했던 우진은, 5층에 멈춰선 엘리베이터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김신이 문 밖으로 몸을 빼면서 돌아다봤다.

“카드키 가지고 내려갈게요.”

“네.”

버튼을 누르고 한동안 엘리베이터 안에 붙어 있는 거울을 들여다봤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상기 된 뺨. 약간 휜 듯한 눈썹. 손을 가져가 얼굴에 대었더니 축축한 열기가 느껴졌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금방 다시 열리는 바람에 우진은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2층의 두터운 유리문 앞에서 사원증을 가져다대자, 둔탁한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이중 보안 시스템 때문이었다. 복도를 돌아나가자 커다란 창고가 나타났다.

“….”

우진은 말없이 로퍼 뒤축을 툭, 하고 쳐올렸다. 2층은 전체가 자료실이라 사람들이 내려올 일이 드물어 고요하기만 했다.

“수영장 같네.”

고등학생 시절 다니던 학교에는 체육관에 실내 수영장이 있었다. 체육 시간에 가끔, 반 전체가 단체로 수영을 하기도 했다. 이상하리만큼 수영장은 늘 바닥이 새파랬다.

우진의 고등학교는 수영부로 유명한 곳이었다. 특기생으로 입학한 그들은 오후가 되면 실내 수영장 라인 밖으로 서서 한동안 몸을 풀곤 했다. 한 번은 우진이 수영 수업을 마치고 체육관을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마지막 수업이라 제법 서두르긴 했는데, 노을이 길게 지던 때라 약간 쌀쌀함을 느끼며 수건으로 머리를 덮고 있었다. 누가 옆에서 우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떨어트리셨는데요.’

그 순간 바닥에서 학생증을 주운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검다 못해, 짙은 푸른색의 느낌이 드는 눈동자였다.

긴 손가락으로 우진의 어깨를 두드리고, 조금 있다간 손목을 잡아챘다.

한 번도 가족이 아닌 사람이 자신과 스치리라 상상하지 않았던 우진은 그때, 자신도 모르게 그 손목을 차갑게 털어 냈다.

“우진 대리님.”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더니 김신이 뒤에서 카드키를 들고 서 있었다. 아노락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던 소년과, 현재의 김신이 오버랩되는 듯했다.

클리닉을 다녀오면 늘 그랬다. 며칠간은 머리가 멍한 것 같아 우진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김신이 앞으로 다가와 손바닥으로 우진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김신이 다른 손으로 카드키를 들어 창고 문을 열었다. 육중한 문이 덜컹, 하고 열렸다.

“여러 번 불렀는데, 대답이 없으셔서 걱정됐습니다.”

“….”

“멍한 얼굴로 서 있지 마요.”

그렇게 말하는 김신의 입 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그가 먼저 철문을 열어 자료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우진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자료실 안에선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덜컥, 하고 쇠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2014a….”

우진은 자료실에 빽빽하게 들어찬 쇠로 만든 책문 앞에 붙여진 연도를 확인하며 복도를 죽 걸었다. 책문들은 두껍고 무거운 데다, 레인으로 연결되어 있어 앞에 달린 손잡이를 돌려서 밀어가며 문서를 뒤져야 했다.

김신은 우진의 뒤를 느긋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여기네요.”

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책문에 달려있던 손잡이를 꺼내 휠을 돌렸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터라, 휠이 뻑뻑해서 잘 돌아가지 않자 김신이 우진의 뒤에서 손을 뻗었다.

“제가 하죠.”

허리를 숙인 그가 휠을 돌리자, 책문이 천천히 앞으로 벌어졌다. 김신의 넓은 등으로 날개뼈가 솟아났다가 가라앉는 걸 우진은 가만히 보고 있었다.

“수영은 이제 완전히 그만두셨나요?”

김신이 그 순간, 휠을 잡은 손을 툭, 하고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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