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 주임과 최 대리-13화 (13/60)

13화. 국내출장 결과보고

“집에 안 가냐?”

지훈은 12시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는 우진의 뒤에서 재킷을 챙겨 입으며 말을 걸었다.

지난주까지 무더웠던 날씨는 가을이 오려는지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졌다.

우진은 둥근 느낌의 은테 안경을 벗고 피곤한 얼굴로 지훈을 돌아봤다. 어쩐지 눈이 조금 커져 있었다. 그 정도로 요즘 우진의 얼굴이 바싹 말라가는 중이었다.

“나중에.”

“그나저나 너 요즘 점심 약속 없어? 매번 나가지 않았냐?”

“….”

“야근 좀 그만해. 얼굴 못 봐주겠다.”

지훈은 그렇게 말하며 홍보팀 사무실을 돌아다봤다.

“그러고 보니 김신이 요즘 안보이네. 점심때마다 귀신같이 나타나더니.”

“….”

“알고 보니까 김신, 인기 엄청 많더라. 어제 인사총무팀이랑 회식했는데, 여사원들이 다들 걔 이야기만 하더라고. 예전에 운동 선수였다며? 무슨 운동했다더라?”

“수영.”

“아, 수영… 그래?”

지훈이 우진의 파티션에 기대선 채 능글맞게 웃었다. 우진은 그런 지훈의 시선을 무시한 채, 손가락으로 눈 아래를 문질렀다.

“잘 좀 챙겨 먹어. 점점 마르는 거 보기 안 좋아.”

지훈은 여전히 피곤해 보이는 우진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는 금방 몸을 돌려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이 소등됐다. 깜깜한 가운데 컴퓨터의 모니터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알록달록한 스크린 화면이 우진의 하얀 얼굴을 어지럽혔다.

“….”

우진은 이마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홍보팀 사무실의 불은 꺼진 지 오래였다.

먼저 말을 걸 타이밍 같은 걸 재고 있기엔 우진은 아직 관계라는 것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다.

벌써 일주일째였다. 김신은 이제 더 이상 먼저 문자하거나, 식사하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신기했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무심결에 가까워졌다가 무심코 멀어진다는 사실이.

우진은 자신이 이전까지 아무와도 관계를 만들지 않았던 건, 이런 감정들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속이 이상하게 죄어오는 느낌이라 우진은 며칠째 식사를 못 했다. 살이 내렸고, 잠은 오지 않았다.

가까스로 잠이 들면, 꿈은 다시 자신을 찾아왔다. 꿈속에서 김신은 아직 어린 얼굴이었다. 우진은 몸 아래에서 뜨거운 물 같은 것들이 찰랑거리는 것 같아 눈을 꾹 감았다. 꿈에서의 김신은 우진에게 더 심한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

김신을 보지 못한 일주일 간, 우진은 하루에도 몇 번씩 멍해지곤 했다.

그건 이중적인 감각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이대로 지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만은 명확했다. 김신을 만나 많은 것들이 변했다는 사실이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게 부자연스러웠다.

늘 그렇듯 손에 쥐면 쏟아지는 것들이 시간이었는데, 김신을 알아가고 부딪히면서 시간들이 한없이 늘어났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곤 했다.

널 보지 않는 시간들,

너와 마주치지 않는 시간들.

그 부자연스러움이 우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다른 의미의 열기가 마음에서 치솟았다가, 끝도 없이 추락하는 일들이 반복됐다. 목이 말랐다. 그의 입술에서 나던 향기 같은 것들이 귓가를 스치고 숨을 통해 불어왔다. 이대로, 오늘도 흘러가는 모양이었다.

***

“후….”

김신은 회사 주차장에 차를 대어놓고선 이미 느슨하게 내려온 넥타이를 완전히 풀며 숨을 몰아쉬었다.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김신은 숨을 몰아쉬며 벨트를 풀고 의자를 뒤로 젖혔다. 갈비뼈 부근이 뻐근했다. 몰아치는 피곤함에 잠이 쏟아지는 것 같아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여섯 시간인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차를 가져가겠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무리였지만, 5일간 출장 지역에서 단거리 이동이 많아 어쩔 수가 없었다.

김신은 눈을 뜨곤 몸을 비틀어 뒷좌석을 더듬었다. 지금 보니 옷과 문서들로 엉망이었다.

“피곤하다.”

중간에 잠시 쉴걸 그랬나, 싶었다. 그러나 급작스럽게 잡힌 출장이니만큼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던 터라, 김신은 빨리 서울로 돌아오고 싶었다.

팀장은 신입인 김신에게 사수 하나 없이 출장을 보내는 걸 안쓰러워했지만 업무보고는 반드시 정해진 시간에 올리도록 했다.

김신은 5일 내내 새로운 고객을 만나고, 홍보자료를 돌리고 보도 자료를 작성했다. 다행히 사업부서에서 한 명이 따라붙어 손을 덜 수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5일이었다.

밤에는 회식 자리까지 있었다. 업무를 끝내고 나오면서 둘러본 호텔은 엉망이었다. 뭔가 하나 떨어트리고 온 것 같은 찜찜한 기분마저 들었다.

‘보고 싶다.’

김신은 무심결에 우진을 떠올렸다. 몰아치는 업무 사이사이에 우진의 얼굴이 생각나곤 했다.

감정적으로 누군가가 스며드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에 김신에게는 처음 겪는 생소한 감각이었다. 우진에게 문자를 보내려고 해도 매번 업무가 새벽 2시쯤에 끝났다.

아침에는 업무보고로 바빴고, 점심은 업체들과 함께 먹느라 개인 시간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우진의 얼굴이 차가웠던 게 기억나, 김신은 왼쪽 심장 부근을 더듬거려 손으로 덮었다. 웅, 하고 심장이 우는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 길이였나.”

김신은 두 번째 손가락 마디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상처가 제법 길고 붉었다.

당황해서 돌아가라고 말하는 그 차가운 말투나 표정보다, 김신은 그 상처에 박힌 시간들이 좀 가슴 아팠다.

그러니까 길게 죽 찢어진 것 같은 느낌의 상처는, 회복하는 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아프다는 말 같은 걸 할 줄 모르는 느낌의 사람이라 김신은 그 상처를 매번 곱씹었다.

사실, 상처는 하나가 아니었다.

“…흠.”

쇄골을 지나, 가슴에 이르기까지 그어진 상처들은 김신이 알 수 없는 시간들을 품고 있었다. 매번 메시지 창을 열어보고 닫았던 건 여러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봤을 때 우진은 지나치게 덤덤하고 지나치게 무던했다. 무엇보다 꼭 상처받지 않은 사람 같은 면이 있었다.

김신은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고선 가방을 챙겨 들었다.

사무실에 서류를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 얼른 쉬고 싶었다. 아무리 자신의 체력이 좋다지만 주말 출근은 무리였다.

김신이 상의를 벗어두고 차에서 내릴 때였다. 뒤에서 타닥, 하고 발걸음이 멈춰서는 소리가 났다.

“…김신?”

한 손에 가방을 들고, 다른 손으로 차키를 쥐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강지훈이었다. 늦게까지 야근을 한 모양이었다. 늘 단정하던 지훈의 와이셔츠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

김신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금방 똑바로 서서 인사했다.

“웬일이세요? 늦게까지 업무 보실 일은 없으실 텐데.”

“일 없다고 은근히 디스하는 거

같은데요?”

“….”

“와, 거짓말은 못 하는구나.”

그렇게 말하며 지훈은 환하게 웃었다. 확실히 사람 좋다는 게 뭔지 여실히 보여주는 미소였다. 지훈은 금방 무표정한 김신에게서 웃음을 거두고선 말을 이었다.

“근데 김 주임,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출장이었어요. 월요일부터.”

“아, 어쩐지. 점심때마다 안 보이더라고.”

유독 지훈은 타인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더 이상 늦게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김신이 무표정하게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지훈이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돌아보니, 아까보다 능글맞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뭡니까?”

“너 생각보다 예민한 타입인가 봐?”

“대리님, 저 진짜 피곤합니다.”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그냥 돌아서려고 하자, 강지훈이 웃으며 김신의 어깨를 잡았다. 지훈은 김신보다 키가 작았지만 덩치가 꽤나 있는 편이라 잡힌 어깨 부근이 뻐근했다.

“최우진이 그쪽 출장 간 거 몰랐죠?”

김신은 그 순간 몸 어디 한가운데가 뚝,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많이 생각하고, 기억하려 애썼지만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는 최우진, 이름 하나에도 이렇게 흠칫하며 몸을 떨게 될 줄은 김신은 몰랐다.

“점심때마다 기다리는 눈치더라고.”

“….”

“최 대리 누구랑 같이 밥 먹고 하는 성격 아닌 거, 알죠?”

“….”

“자기한테는 이상하게 관심을 보이더라, 최우진이.”

지훈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잡았던 손을 놓아주었다. 김신은 멍해진 얼굴로 지훈을 쳐다보았다.

“그런 표정 처음 보는 거 같네.”

“…몇 번 봤다고 다 아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아니, 너 같은 타입은 내가 잘 알지.”

“….”

“지금 기분 나쁜 얼굴이었어.”

“우진 대리님한테 관심 많으시네요.”

“그럼.”

지훈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쥐고 있던 자동차 키를 눌렀다. 삐빅, 하고 멀리서 차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네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많아.”

“….”

“그리고 네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지켜봤지.”

“….”

“소름 돋게도, 아마 최우진이 짐작하는 것보다 더, 오래일 수도 있어.”

지훈은 그렇게 말하며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 뒷모습이 낯설었다.

분명, 그동안 지켜본 지훈은 예민하거나 날카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화를 내거나 의견을 강하게 말한 적도 없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흔히 생각하는 회사에서 적당한 부류의 흔해빠진 인간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 지훈은 분명 자신에게 다른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아, 참.”

차 쪽으로 걸어가다 말고 지훈은 멍하니 서 있는 김신을 돌아봤다. 눈빛은 다시 사람 좋은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아직 최우진 야근 중이에요. 걔 밥도 못 먹었을걸.”

***

탱, 하고 어디서 엘리베이터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우진은 문서를 정리해 가방에 넣고 있던 참이었다. 남아 있던 지훈이 업무를 도와주긴 했지만, 연휴를 앞둔 터라 커버해야 할 자료들이 너무 많았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보고서들을 정리하고, 업체들과 일정 정리를 해야 했다.

주말에도 회사에 나와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던 우진은 결국 밤 10시가 넘어서야 데이터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휴우….”

작업하던 문서를 닫고, 컴퓨터와 모니터를 끄자 그제야 소음이 모두 멎었다.

우진은 집에 가는 중에 편의점에 들려 도시락이라도 챙겨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요 며칠 새 어지럼증이 더 잦아져 일어설 때마다 힘이 들었다.

아마 요즘 너무 적게 먹고 적게 잔 모양이었다. 우진은 이마를 짚었던 손을 떼고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였다.

“우진 대리님.”

순간 우진은 기시감 같은 것들이 느껴져,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뭡니까. 일 좀 작작 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아직 퇴근도 안 하고.”

그 화려한 얼굴을 보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은, 아무래도 최우진의 착각이었던 듯싶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순간적으로 열기가 심장을 감싸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지는 것 같아 우진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김신이 금방 우진의 앞으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앞에 있는 김신의 얼굴이 보고 싶어, 우진은 손이 떨렸다.

“괜찮아요?”

“….”

“대리님?

어디 안 좋아요?”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욕망을 잊고 산 시간들이 있었다.

사라진 표정들은, 시간 속으로 속절없이 흘러들어가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우진은 김신이 자신의 얼굴 위에 있는 손을 내려놓는 걸 가만히 두었다. 시선이 닿았다. 우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

“….”

“그때, 그냥 가라고 해서.”

“….”

“…미안해.”

물론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다시는 못 볼 것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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