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블라인드
우진과의 첫 데이트 장소가 집이 될 줄 몰랐던 김신은 메시지를 받고 몇 분 동안은 멍한 채로 있었다.
그는 평범하게 영화를 보거나 밥을 먹고, 집에 데려다주거나 혹은 커피를 마시는 일 따위를 상상했다. 시우도 데이트에서 별로 많은 걸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 그냥 평범하게 밥 먹고 놀아. 요즘은 남자들끼리도 잘 놀잖아. 카페 가 봐, 온통 게이 천국이야.
시우는 그렇게 말하며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김신은 토요일 오전부터 볼 만한 영화가 뭐가 있나 살펴보고, 지난번 전복죽을 포장했던 일식집 예약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두었다.
청담에 있는 일식집은 테이블 수가 적어 반드시 예약을 해두어야만 했다. 특히 간이 센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우진이 좋아할 것 같았다. 점심을 몇 번 같이 먹다 보니 김신은 절로 우진이 선호하는 음식의 종류를 알게 됐다.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데도, 맵거나 짠 음식에는 손을 잘 대지 않았다.
- 다음번에 주완이 레스토랑에 같이 놀러와.
- 김솊 나 싫어하잖아.
- 세트로 오면 엄청 좋아할걸? 걔가 너 보자마자 위험하다고 하더니 진짜 그 멍충이 말이 맞을 줄이야.
시우는 그렇게 말하며 주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김신 게이 됐대, 라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김주완에게 전화가 왔다. 설마 너한테 고백했느냐는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릴 정도라, 시우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김신은 그가 1년 넘게 한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는 게 신기했다.
커플이 늘 주목받는 한국에서의 연애는 주변 때문에 쉽게 끊어지고는 했다. 특히나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시우는 그 강도가 더욱 심했다. 다들 언제 여자 친구를 소개시켜줄 거냐고 묻기 바빴다.
시우는 그걸 못 견뎌 하면서, 많은 남자들과 짧게 연애했다. 아버지에게 들킨 직후에는 저러다 죽는 건 아닌가 할 정도로 아무 남자와 만나고 다녔다.
“오래 만난다?”
“주완이 좋은 애야. 섹스도 엄청 잘하고.”
“투 머치 인포메이션인 것 같다.”
지속적인 관계란 무엇일까, 김신은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가벼운 만남의 가장 좋은 점은 한 사람의 모든 면을 다 알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알고 싶지 않은 부분은 넘어가면 됐다.
그러나, 김신은 우진이 궁금했다. 모든 면을 전부 다 알고 싶었고,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으면서 오직 자신에게만 내어주는 체온 같은 것들이 좋았다.
“처음엔 그렇지. 다들.”
“뭐가?”
“초반에는 뭐든지 그래. 공부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시작하면 너무너무 재밌지. 알아가는 것, 배워가는 것, 전부. 사실은 잘 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다들 시작한 거거든.”
시우는 그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말이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제 알만큼 안 것 같다 싶다? 그런데 처음처럼 흥미도 안 생기고, 빨리 늘지도 않아. 그러다 보면 더 이상 발전이 없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감각이 생겨. 계속 노력하는데, 안 되겠다 싶은 거지.”
“….”
“그래서 포기해. 공부도, 일도, 사람도. 그런데 신기한 건, 그게 공부고, 일이고 연애야. 내가 노력한 만큼, 좋아한 만큼 결과가 안 나올 수도 있고, 처음처럼 노력해도 발전이 없을 수도 있어. 자연스럽게 생각하면 되는 걸, 화를 내고 포기하고 그만둬버리지. 그냥, 흘러가듯이 내버려두면 되는데.
“모두 다 아는 건 불가능해. 그건 욕심이야.”
김신은 그 말을 이해한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장을 보는 동안 그를 생각하고, 집에 찾아가 무방비하게 서 있는 우진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을 잊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몸 어딘가가 무너지는 감각이 있었다. 그건 욕정이랑은 다른 감정이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김신은 냉장고 문을 열고선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는 우진을 보며 물었다. 우진은 고민하는 것 같더니 질문으로 답했다.
“아침, 먹었어요?”
“네. 9시쯤?”“그럼 신이 씨 먹고 싶은 걸로.”
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말끝을 흐렸는데, 신이 씨, 라는 말이 좀 어색한 기색이었다. 하긴 회사 밖에서까지 주임님이라고 하면 이상하기도 할 것이다. 김신은 그제야 허리를 펴고 우진의 옆자리로 와 앉았다. 소파가 김신의 무게로 출렁, 했다.
“왜 문자 안 했어요?”
“….”
“바쁜 건 아는데, 조금 걱정했어요.”
“…익숙하지 않아서.”
김신은 답을 바라고 전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한 것은 아니었는데, 기다리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진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요즘 본 바에 따르면 그는 사회성이 부족했고, 누군가와 함께하는 걸 어색해했다. 결국 김신은 우진의 머리카락을 쓸며, 다음번엔 목소리라도 들려줘요, 라고 말했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아슬아슬했다. 눈이 마주치면 또 키스하게 될 것 같은데, 그러면 좀 위험할 것 같았다.
“근데 왜 블라인드랑 커튼을 다 내려놓은 거예요? 너무 어둡지 않아요?”
“아….”
우진의 집은 복층이었는데, 1층에는 방 하나와 거실이 있고 거실에는 큰 텔레비전과 벽장이 있었다. 벽장에는 보기에도 엄청난 양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4단으로 되어 있는 벽장 대부분이 책이었고, 나머지 가장 아랫단에 DVD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김신이 일어서자 우진이 팔목을 잡으며 따라 일어섰다.
자신의 손목을 꽉 쥔 우진이 귀여워 쓰다듬었는데 그가 약간 당황한 얼굴을 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김신은 단순히 부끄러워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엄청나네요. 전엔 밤이라 몰랐는데.”
“그냥, 수집하는 거 좋아해서.”
“우진 씨도 좋아하는 게 있어요?”
우진 씨, 라고 하자 최우진의 얼굴이 금방 빨개졌다.
“왜요, 먼저 신이 씨라고 하지 않았어요?”
“…아, 그건.”
“근데 대리님 몇 살인지 물어봐도 되요?”
“….”
“얼굴이 엄청 어려 보여서.”
나보다 어릴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김신은 그렇게 말하며 우진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실은 회사 그룹웨어에 우진의 생년월일이 나와 있어서 알고 있었다. 우진은 김신보다 두 살이 많았다. 그렇지만 우진이 직접 말하는 걸 듣고 싶어서 눈을 마주치자, 그가 입을 천천히 열었다.
“서른.”
“전 스물여덟이예요. 알고 있었어요?”
“….”
“어, 알았나 보다. 그렇죠?”
김신이 손바닥으로 뺨을 뭉개며 묻자 우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심각해진 얼굴이 제법 귀여웠다. 한참을 쳐다보자 우진이 금방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최우진 씨.”
그렇게 불렀더니 눈을 크게 뜨고 김신을 쳐다봤다. 요즘 신기하게 우진의 새로운 표정을 자주 보는 것 같았다.
회사 사람들이 늘 마네킹 같다고 하는 걸 아는 걸까. 이렇게 다채로운 표정이 있는 사람에게 마네킹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책장 구경해도 돼요? 밥 먹고 영화 봐요.”
“응.”
김신이 우진을 내려다보며 웃자,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덜미가 불긋해져 있기에 김신은 바로 시선을 책장으로 돌렸다.
사람이 짐승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막힌 공간에, 커튼 때문에 어두웠고 침실은 지척이었다. 예상을 아예 못 한 건 아니었지만 너무 빠른 것도 싫었다.
이상하게, 김신은 우진과는 천천히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시우는 꼰대라며 비웃었지만 마음이 그랬다. 시간을 손으로 잡아서 주욱, 늘이고 싶은 기분이었다.
“영화 뭐 볼까요? 밥 먹기 전에 정할까요?”
“….”
“좋아하는 거 뭐예요?”
그러고 보니 책장 가득 DVD나 책은 잔뜩 꽂혀 있는데, 앨범은 하나도 없었다. 그 흔한 액자도 없는 집.
우진이 DVD 리스트를 살펴보고 있는 동안 김신은 거실을 둘러보았다. 소파 겸 베드로 쓰일 수 있는 캔버스 체어가 하나, 협탁. 텔레비전. 책장이 전부였다. 그전에 데려다준 침실에는 침대 하나와 거울, 옷장이 있을 뿐이었다. 본가에 모든 걸 놔둔 건가.
“앨범 같은 건, 본가에 있어요?”
“…본가?”
“부모님 계신 곳이요. 사진이랑 앨범 같은 거 하나도 없길래. 저 어렸을 때 우진 대리님 보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며 웃자, 우진의 표정이 이상하게 구겨졌다. 두 번째였다. 확실히 이상한 느낌의 표정이었다. 김신이 고개를 갸웃하자, 우진이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DVD를 김신에게 넘겼다.
“이거 본 적 있어요?”
“….”
김신은 아무생각 없이 우진이 넘겨준 DVD를 받아들었다.
본가랑 사이가 안 좋나? 표정이 금방 무표정해졌지만, 우진의 얼굴에는 분명 그늘이 졌다. 그건 시우가 가진 어두운 면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저 이거 안 봤어요. 밥 먹으면서 이거 볼까요?”
“네.”
김신은 <살인의 낙인>이라는 영화를 골라 우진의 눈앞에 흔들었다. 우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김신은 DVD를 협탁 위에 내려놓으며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이전까지 김신은 우진이 너무 무표정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김신이 부엌으로 걸음을 옮기자 우진도 천천히 자신을 뒤따라 왔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은 서늘한 손이, 김신의 손가락 마디 사이로 체온을 밀어 넣었다. 지금은, 이 체온이 좋다고 김신은 무심코 생각했다.
***
“우진 대리님?”
“….”
진짜 잠들었나. 김신은 소파에 반쯤 누워 잠든 우진의 얼굴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긴장감 너무 없는 거 아냐?”
슬쩍 웃으며, 김신은 우진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한 번 자면 깊이 잠드는 모양이었다. 늘 피곤해보인 건 한동안 잠을 못자서 그런 모양이었다. 점심으로는 카레를 만들었는데, 우진은 식욕이 없는지 밥을 천천히 먹었다. 김신은 다음번엔 카레 대신 파스타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엄청 조용히 자네.”
김신은 영화가 지루하진 않았지만, 잠이든 김에 우진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었다. 텔레비전을 끄자, 거실은 정적이 맴돌았다. 괜스레 긴장감이 들었다. 손을 들어 반쯤 누운 우진의 이마를 쓸었다.
“…하얗다.”
빛을 안 본 사람처럼 우진의 피부는 유난히 흰색이었다.
이마에 파란 핏줄이 비쳐서 손가락으로 따라 그려봤다. 속눈썹이 길었는데, 그 아래에 옅은 갈색의 주근깨가 몇 개 있었다. 그게 귀여워서 김신이 손가락으로 쓸자, 우진이 으응, 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간지러운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캐주얼한 옷차림은 처음이었는데, 서른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차이나칼라의 편한 셔츠를 입은 우진은 대학생 같았다.
“…귀여워.”
어느 한군데 귀여울 구석이란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이상하게 보면 볼수록 김신의 눈에는 귀여웠다. 차갑고 무심해 보이는 표정 뒤에, 순한 면이 있었다. 그걸 자기밖에 모른다고 생각하니 순간적으로 열기가 솟았다.
손으로 이마를 쓸고 뺨을 감싸자, 우진이 뒤척거렸다. 기다랗고 하얀 목덜미가 김신의 눈에 들어왔다.
자신도 모르게 목줄기에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목 위까지 잠긴 셔츠가 불편해보이기도 해서, 김신은 우진의 단추 몇 개를 천천히 풀었다. 금방 쇄골이 드러났다.
“…어?”
드러난 쇄골 아래로, 길게 찢어진 상처가 하나 있었다. 적어도 수십 바늘은 족히 꿰맸을 것 같은 상처는 다른 피부에 비해, 붉은 색을 띄고 있었다. 어딜 크게 베인 듯한 상처였다.
아팠을 거 같아, 김신이 자기도 모르게 손을 가져다 댔는데 갑자기 협탁에 놓아둔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
눈을 뜬 우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김신을 보고 당황한 듯 두 손으로 크게 밀어냈다. 김신은 결국 소파 밑으로 떨어졌다. 우진이 자신의 셔츠를 내려다보고는 김신을 바라봤다. 표정이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아 그게….”
“….”
창백해진 김신을 보던 우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더니, 금방 소파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0049로 시작하는 전화번호였다. 우진은 숨을 몰아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집으로 돌아가요.”
“…우진 대리님?”
“미안한데, 아무래도 가셔야 될 거 같네요.”
순간적으로 체온이 빠져나가는 걸, 김신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우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게, 주말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