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탐닉의 해부
“입사했더니 회사에 이상형이 있었고, 알고 보니 남자였다? 전형적이네.”
“이상형도 아니고, 그냥 딱 봐도 남자야.”
시우는 벌써 세 잔째 진 토닉을 들이키는 중이었다. 그냥 남자인데, 라고 덧붙이는 김신의 얼굴이 떨어졌다가 다시 시우의 손에 의해 들어 올려졌다.
김신은 그런 시우의 손을 피하고선 턱 아래를 가렸다. 부끄러울 때마다 나오는 김신의 버릇이었다. 김신은 당황할 때마다 턱 끝이 약간 떨리곤 했다.
“그럼 이 얼굴은 뭔데?”
“….”
“내가 잘나가는 애들을 얼마나 많이 소개시켜줬는데, 이 새끼가 그때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더니”
시우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는 모양이었다. 머리카락을 연신 뒤로 넘기던 시우가 김신의 멍한 눈동자를 보고 생각보다 일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은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너 연애, 뭐 이런 걸로 고민 상담한 거 이번이 처음인 건 아냐?”
“응.”
“…후.”
시우는 가슴이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새끼가 제일 위험해, 하고 말하던 그가 히든에게 담배 있냐고 물었다.
히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담뱃갑을 살짝 시우에게 밀어주었다. 시우는 눈웃음을 치며 담배와 함께 모르는 척 테이블 위에 얹힌 히든의 손가락을 만졌다. 그걸 보고 있던 김신이 시우의 손등을 때리며 입을 열었다.
“너 그러다가 성추행으로 잡혀가.”
“무슨 소리야? 좋아서 그러는 건데.”
“히든은 좋겠냐?”
“아, 내 맘이야!”
고집쟁이에 늘 제멋대로였지만 시우는 진지한 구석이 있었다. 졸업 후 바로 광고 회사에 취직한 시우는 조만간 콘텐츠 제작사로 직장을 옮길 거라고 했다.
음식 관련 광고를 만들다가 여러 셰프들과 친해졌고, 그러다 보니 요리 콘텐츠 제작을 하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1년 정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연인이 셰프이기 때문에 더 그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
“너 담배 끊지 않았냐?”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서 그래.”“히든 손가락이 만지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닥치고, 어떤 남자야?”
그 물음에 김신은 입을 다물고 시우를 한동안 쳐다봤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우는 어딜 보나 남자였고, 유난히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것 같으면서도 험한 말은 김신보다 훨씬 잘했다.
그러나 가끔 말간 눈동자가 음울해 보일 때가 있었다. 김신에게는 위험하지 않은 부분이었으나, 시우를 좋아하는 남자들은 그 음울하면서도 밝은 모습에 넋이 나가곤 했다.
여자들은 시우를 좋아하면서도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법이 없었다. 김신의 파트너들은 시우를 좋아하면서도 싫어했는데, 다들 왠지 모르게 ‘경쟁심’이 느껴진다고 했다. 김신은 그게 늘 신기했다.
“말랐어.”
“아, 난 통통한 애가 좋은데.”
“네 취향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뭐래, 질투하냐?”
어. 라고 대답하는 김신을 빤히 쳐다보던 시우가 스티어로 녹지 않은 아이스 큐브를 달캉달캉 저었다. 김신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넌 아무래도 남자들한테 인기가 많으니까. 난 게이도 아니었고.”
“그럼 지금은 게이?”
“굳이 성향에 대해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만”
좋아하는 사람이 남자니까 게이인 건가, 하고 김신은 되물었다. 시우는 풋, 하고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이없어. 오늘 시우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말을 열세 번쯤은 들은 듯했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니 입으로 말하는 거 처음 듣는 거 같아.”“그래, 다 처음이네.”
“10년은 놀려 먹을 수 있겠다.”
“놀려도 되니까, 하나만 물어보자.”
김신은 그렇게 말하며 시우의 머리카락을 쓱, 하고 쓰다듬었다.
“이거 연애감정이냐?”
“아직도 자각이 안 되니? 연애라며 네 입으로.”
“키스만 했어. 아직.”
“….”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
나도, 그 사람도.
김신은 그렇게 덧붙이며 우진을 떠올렸다. 무심코 키스를 해버리긴 했는데, 입술을 떼는 순간 미움받을까 봐 걱정했다.
다행히 괜찮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최우진은 그때 분명 어딘가 욕정적인 얼굴을 했다. 더 당겨 안아 달라는 얼굴이었다.
그 하얀 얼굴에 열꽃이 잔뜩 피어 있었다. 그걸 보고도 열이 오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확실히 색기가 있었다. 팔딱팔딱 뛰는 핏줄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다시 먼저 키스했지.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을 때는 심장이 너무 아프게 뛰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대로 섹스하고 싶었다. 동시에 아직은 섹스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너 야한 생각하는 거 같아서 토 나와.”
“…흠.”
“히든아, 여기 물 좀 가져와라. 변태가 한 마리 있는 거 같아.”
시우가 남은 얼음을 아삭아삭 씹으며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김신은 그런 시우를 보고 한참을 웃다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날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한데.”
“왜 이렇게 자신이 없냐.”
“먹고 버릴까 봐.”
“널 한입에 먹고 버릴 수 있을 만큼 니 덩치가 작진 않은데 말이지.”
“무서워서 그래.”
“뭐가.”“내가.”
거리감이 없어지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고. 더 알고 싶고. 그런데, 그게 내 맘대로 조절할 수가 없어. 무서워.
“그게 연애야.”“….”“사람 만나는 게 남자 여자 다른 줄 아냐. 밥 먹고, 같이 시간 보내고. 같이 이야기하고 그러다 보면.”
“…그러다 보면?”
“그렇게 늘 같이 있는 거지.”열기가 언젠가 가라앉더라도, 숨 쉬듯이 함께 있는 거지 뭐.
“도망가면 어때? 질척거리면서 붙잡으면 돼.”“….”
“그게 무서워서 놓치면, 넌 영원히 연애 같은 거 못 할 거야.”섹스나 어떻게 할지 공부해.
그렇게 말하는 시우의 얼굴을 김신은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우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디서 본 느낌의, 늘 피곤한 얼굴에 하얗고 파랗고 빨간 최우진.
“그럼, 남자끼리 섹스는 어떻게 하는 거냐?”
김신의 말에 먹고 있던 치즈를 뱉어버린 시우가 빨개진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는 걸, 김신은 웃으면서 쳐다보았다.
***
우진은 토요일 11시가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
주말에도 우진은 아침 일찍 기상하는 편이었는데 평소보다 늦잠을 잔 모양이었다. 이번 주는 일이 너무 많아 야근도 잦았고, 쉴 수 있는 시간이 도통 없었다. 한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돌아보니 암막 커튼 사이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있다가 이불을 걷어내자, 찬바람이 불었다. 이제 곧 9월이었다.
“추워.”
요즘 따라 혼잣말이 많아졌다. 그건 하나의 변화이기도 했다. 이전까진 혼자 살면서 스스로 말을 하는 일이 없었다.
어떤 주말엔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아서 목이 쉬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엔 말을 한다.
배가 고파, 아파, 피곤해. 그런 말들을 할 수 있게 될 줄은 우진 자신도 몰랐다.
말을 하는 순간 자신을 잘 알게 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뭘 느끼고 있는지, 뭘 원하는지 따위의 간단한 것들이었는데 우진에게는 새로웠다.
우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걸어 나갔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종이백 하나가 덩그러니 들어 있었다.
‘먹고 자요.’
그렇게 말하던 김신의 얼굴이 기억나, 우진은 한참을 냉장고 문을 열어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날 집에 들어와 우진은 태어나 처음으로 샤워를 하면서 자위했다. 우진은 몽정도 없었던 사춘기를 보냈다. 아무 생각 없이 AV를 우연히 보게 되었을 때도 그저 영화 내용이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한 번은 대학 동기가 우진에게 에이섹슈얼이냐고 물었는데, 우진은 그게 답일 것이라 어렴풋이 생각했다. 아마도, 자신은 누구에게도 욕정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귓가에 번지던 김신의 숨소리가 기억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몸이 더웠다.
“…휴우.”
결국 그날 밤 죽은 먹지 못했다. 샤워를 끝내자마자 잠이 들었고, 일어나자마자 회사에 나가야 했다. 그날은 다행히 외근을 하지 않아도 됐다. 지연우가 직접 기자 리스트를 뽑아 나머지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렸기 때문이었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서 의아했지만 우진은 그날도 여전히 바빠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머지 자료들과 수치들을 수정하고 나니 벌써 퇴근 시간이 넘어 있었다. 결국 그날도 10시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김신에게 몇 통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 출근 잘했어요?
- 일 많죠?
- 점심 맛있게 먹어요.
- 저 퇴근해요.
확인을 했을 때는 이미 퇴근 후라, 우진은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었다. 전복죽을 사기그릇에 담아 전자레인지에 넣으면서 우진은 김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오늘 볼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김신에게 메시지가 왔다.
- 좋습니다.
우진은 막상 메시지를 받고 보니 김신과 함께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누군가와 뭘 같이 해본 적이 있어야 알 텐데, 늘 혼자인 삶을 살아온 탓에 순간적으로 당혹감이 들었다.
만나서 뭐하지, 란 생각이 들어 숟가락을 입에 물고 있다가 탱, 하는 전자렌지 소리에 우진은 죽 그릇부터 천천히 꺼냈다.
그날만큼은 아니었지만 고소한 쌀 냄새가 났다. 김신이 앞에 있지도 않았는데, 배가 조금 고팠다.
- 영화 볼래요? 아님 저녁 먹으러 갈래요?
죽을 먹으며 확인한 김신의 메시지에 우진은 조금 고민했다. 영화관에 가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두운 곳에 오래 앉아 있는 걸 불편해하는 탓이었다. 저녁도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 보고 싶은데.”
…어제 하루, 못 봤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 집에 올래요?
우진은 아무 생각 없이 메시지를 보냈는데, 한동안 김신에게서 답이 없었다.
바쁜가, 하는 생각에 우진은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얌전히 앉아 김신이 사준 죽을 말끔하게 다 먹고 설거지를 했다. 배가 어느 정도 불러, 숨을 몰아쉬던 우진이 샤워해야겠단 생각에 화장실로 들어가는데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우진은 바로 확인했다.
- 언제요?
‘두 시간 뒤쯤?’ 하고 메시지를 보내자 김신이 ‘알겠어요.’라고 답을 했다. 왼쪽 갈비뼈 아래가 조금 아픈 듯했다. 아무래도 심장 박동이 빨라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 빨리 두 시간이 지나갔으면, 했다.
***
우진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다가 벨이 울리는 소리에 일어섰다. 누군가가 우진의 집에 방문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우진은 김신일 거라고 생각했다.
오피스텔 현관 앞에 얌전히 서 있는 김신은 키가 워낙 커서 목울대밖에 보이지 않았다. 문을 열어주자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탁탁 하고 들렸다. 5층짜리 저층 오피스텔이라 엘리베이터가 없는 탓에 김신은 한참이 지나서야 집 현관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우진 대리님, 잘 지냈어요?”
“어….”
커다란 몸을 구기며 들어온 김신의 몸에는 바람 냄새가 묻어 있었다. 거기다 두 손 가득 종이봉투가 들려 있어 우진은 당황한 얼굴을 했다. 봉투를 현관에 내려놓고 김신은 얌전하게 신발을 벗었다. 그러고는 우진을 보고 웃었다.
앞머리가 이마를 덮고 있어, 평소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우진은 왠지 온몸이 간지러워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들어가도 돼요?”
“…네.”
우진이 비켜서자 그제야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온 김신은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우진이 따라오자 김신이 웃는 얼굴을 했다. 진짜 잘 웃는 사람이었다.
“그때 데려다 드리면서 물 마시려고 냉장고 열었잖아요. 기억나요?”
“….”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장봐왔어요.”
김신이 갖고 들어온 종이봉투에는 우유와 주스, 달걀, 샐러드, 쇠고기 같은 식료품이 가득 들어 있었다. 과일도 종류별로 있었다. 대부분 먹기 쉬운 크기로 자른 것들이었다. 무릎을 꿇고 앉은 김신이 냉장고 문을 열고선 칸칸이 음식들을 넣기 시작하는 걸 우진은 멍하니 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집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배가 고프면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샀다. 우유를 마시거나 잠을 잤다. 가끔 잠이 잘 오지 않을 때는 수면제를 먹기도 했다.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 집. 그 텅빈 집은 최우진이랑 닮아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어요. 제가 정리하고 갈게요.”
“….”
“뭐해요? 서 있으면 다리 아파요.”
우진은 거실로 돌아가는 대신 손을 올려 김신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그러자 김신이 우진을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우진은 허리를 굽혀 김신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보고 싶었어.”
입술을 떼며 우진은 그렇게 말했다.
처음으로, 배워가는 감정은 거침이 없고, 뚜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