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공적관계와 사적감정
우진은 김신의 얼굴이 천천히 자신에게로 다가왔을 때, 잠시 숨을 멈춰야 했다. 마주한 입술에선 온기가 끼쳤다.
그건, 우진이 꾸는 꿈과 비슷하면서도 한편으로 달랐다. 찰나로 닿았던 입술이 금방 떨어져 나가고, 손바닥으로 우진의 얼굴을 감싼 김신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너무 간지럽고, 또 부끄럽기도 해서 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김신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그러자 김신이 손가락으로 우진의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진한 사향 냄새 비슷한 것이 났다. 언젠가 밤에, 김신의 목덜미에서 나던 그 향기였다.
“괜찮아요?”
“….”
뭐가 괜찮은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우진은 대신, 어깨에 묻은 얼굴을 끄덕거리기만 했다. 피곤한 데다 숨이 조금 찼다.
그냥 입술을 마주한 것뿐이었는데 처음으로 느껴본 감각들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 것 같았다. 당장은 조금 더 이대로 마주하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뭔가 부족하고 목이 말랐다. 고개를 들었더니 김신이 약간 사나운 얼굴로 우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배꼽 근처가 간지러웠다.
“지하에 차 있어요.”
그러고 보니 김신은 정장 차림이 아니었다. 하얀색 반팔 피켓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캐주얼한 모습이었다. 이런 차림으로는 처음 보는 것 같아 빤히 쳐다보자, 김신이 지하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우진의 뺨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고개 돌려요, 라고 하기에 돌렸더니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났다.
차를 타자 벨트를 단정하게 메어주었다. 어디로 가는지 몰라서 한참 쳐다봤더니 김신은 말없이 핸들을 돌리지 않는 손으로 우진의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그 손이 조금 떨리고 있어서, 김신의 행동이 자신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나온 것임을 짐작하게 했다. 김신은 육감적인 데가 있었다. 인지하고 행동하기보다, 즉흥적이고 감각적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뿌리치고 싶은 생각이나 거부감 같은 것들이 전혀 들지 않았다. 더 만져 달라고 어필하고 싶어서 머리를 좀 더 숙였더니 김신은 또 조금 묘한, 곤란한 듯한 얼굴을 했다.
싫은가.
“계속 그러면 저 운전 못 해요.”
“….”
“아니, 싫다는 건 아니고요.”
사실은 좋아서 그런 거기도 하고….
“곤란해요. 저.”
그렇게 말하며 김신은 우진의 눈을 마주치곤 머쓱하게 웃었다.
차를 몰고 도착한 곳은 회사 근처의 깨끗해 보이는 일식집이었다. 김신은 우진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곤, 금방 식당에 들어갔다가 종이백 하나를 들고 나왔다.
“전복죽이에요. 해산물 알레르기 없죠?”
“…네.”
“먹고 가면 좋긴 한데, 피곤해보이니까.”
“….”
“다음번에 와서 초밥 먹어요. 여기 특초밥 세트 맛있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며 김신은 우진을 한참 바라봤다. 우진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으아,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던 그가 마른세수를 하고 차를 다시 몰았다. 내비게이션에 능숙하게 우진의 주소를 입력하는 걸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김신이 쑥스러운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날 택시 탈 때, 알려줘서 기억했어요.”
“아.”
차를 몰아 우진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 11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차에서 내려야하는데, 우진은 왠지 망설여졌다. 그건 김신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도착했네요, 라는 말을 하고선 가만히 앉아 있던 그가 뒷좌석에 둔 종이백을 건네주려고 우진의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스친 머리카락에서 푸릇한 향기가 났다.
“따뜻할 때 먹어요.”
“네.”
“음, 그러니까….”
김신은 종이백을 우진의 무릎에 올려놓고는 뭔가 할 말이 있는지 망설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우진은 그런 김신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손가락으로 종이백 입구를 살짝 열었다. 따뜻하고 고소한 죽 냄새가 났다. 우진은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먼저….
“김신 주임님.”
“아, 네….”
우진은 김신을 부르며 뺨에 손을 가져가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김신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그러니까 아까, 이 입술에서 체온이 느껴졌다. 키스라는 자각보다 그 온기가 더욱 설레게 했다.
우진은 왜 목이 마른지, 왜 부족한 건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는 김신, 네가….
“…눈 감아요.”
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손바닥으로 김신의 눈을 가리고 입술을 가져가댔다.
꾸욱, 하고 눌린 입술에 김신이 놀란 듯 뒤로 잠깐 물러섰는데, 우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을 맞댔다.
다음 순간, 곧장 김신이 허겁지겁 우진의 입술로 달려들었다. 우진이 허리를 뒤로 밀자, 김신이 팔로 바짝 당겨 안았다. 아랫입술을 계속 깨물길래 입을 벌렸더니 뜨거운 혀가 엉켜들었다.
“흣….”
제대로 한 키스는 너무 뜨거웠다. 제대로 숨을 못 쉴 정도였다.
김신이 큰 덩치로 우진을 밀어붙이는 바람에 우진은 물러설 곳 없이 쿵, 하고 차문에 몸을 부딪혔다. 그러자 김신이 놀란 듯 큰 손바닥으로 우진의 머리카락을 감싸 쥐었다. 다정하고 뜨거워서, 우진은 절로 눈이 감겼다.
뒤로 떠밀린 우진은 숨을 몰아쉬면서 김신의 몸을 지탱했다. 조수석으로 거의 넘어온 김신이 우진의 몸 전체를 덮었는데, 그 무게감이 마음에 들어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타액이 넘어왔다. 김신은 우진의 입술을 이로 길게 물었다가 놨다. 정신없이 키스하면서 김신이 한 손으로 조수석 바를 당기는 바람에 우진의 입에서 으응, 하고 앓는 소리가 났다.
자기도 모르게 온몸이 꼬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김신이 우진의 몸에서 비켜섰다.
“하아… 하아….”
어지러운 듯, 머리를 털던 김신이 우진의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귓불을 핥았다. 촉, 하고 소리가 났는데, 우진이 김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깊게 쉬자 그가 약간 몸을 떨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그렇게 말하며 김신은 흥분한 얼굴로 웃었다. 우진은 김신이 엄청나게 뜨겁고, 크고, 동시에 다정하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깨닫는 중이었다. 그는 정신없어 하는 와중에도 우진의 목덜미며, 뺨, 콧대에 계속해서 입을 맞췄다. 정말로 닿고 싶어서 그랬다는 듯이. 우진은 그 숨결에 맞춰 숨을 몰아쉬었다.
“우…리, 주말에 만날까요?”
뺨에 입을 맞추며 김신이 묻기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감겨서 눈꺼풀이 떨리자, 김신은 거기다 입을 맞추며 다시 물었다.
“밥 먹을까?”
“…으응.”
열기가 가라앉질 않았다. 마음 같아서 그냥 계속 있고 싶은 마음에 큰 손바닥을 가져다 얼굴을 묻었더니, 김신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 다음 우진을 떼어내고, 손바닥을 가져가 입술을 묻었다.
“…오늘은 푹 쉬어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김신이 아쉬운 얼굴을 했다. 순간 우진이 이상한 마음이 들어서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더니, 김신이 우진을 당겨 안았다. 온몸이 심장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쿵쿵, 하고 온몸의 혈관이 뛰어다녔다.
“아쉽다.”
눈을 마주치며 말하기에 우진이 김신의 손을 가져와 입을 맞췄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데, 김신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한참을 차 안에 앉아 있던 김신은 가방을 챙겨 우진의 현관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아무 생각 없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더니, 김신이 손을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밥 먹어요, 하길래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자해요. 하기에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김신은 손바닥으로 턱을 가렸다. 후우, 하고 한숨을 몰아쉰 그가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크고 넓은 등이 보였다.
먹으로 사람을 그려놓으면, 저렇게 짙고 아름다운 선이 나올까, 우진은 그렇게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김신.”
“….”
“고마워.”
마주한 눈이,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아까의 체온을 떠올리게 해서 우진은 여전히 눈가가 떨렸다.
***
금요일 저녁, 홍대 주변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졸업 이후 홍대는 오랜만인 거 같아, 김신은 왠지 긴장감이 들었다. 지금 보니 홍대 거리의 사람들은 저보다 훨씬 어리고 풋풋한 것 같았다.
퇴근 직후 정장 차림인 자신을 한번 내려다본 김신은 왠지 홍대가 더 이상은 자신과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서 오세요.”
상수역 근처의 작은 바 RS는 김신이 학부 시절 자주 가던 곳이었다. 오래된 나무로 만든 테이블이 길게 놓여 있는 RS는 한쪽 벽면 전체가 술로 가득 차 있었다. 단골들만 찾는 곳이라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래서 고즈넉한 맛이 있어서 김신은 이곳을 좋아했다.
“어, 신이 형.”
“잘 있었어?”
RS의 바텐더는 실질적인 사장 로빈과 어리지만 실력이 좋은 히든, 둘이었다. 오랜만에 찾은 김신의 얼굴을 보고 히든이 반갑게 인사했다. “형, 잘 지냈어요?” 하고 묻는 히든에게 김신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어깨를 두드렸다.
“로빈 형은 오프지?”
“네.”
“시우는 아직 도착 안 했어?”
“화장실 갔어요. 저기 나오네요.”
김신이 고개를 돌리자 한눈에도 화려한 남자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김신을 발견하고선, 금방 웃는 얼굴이 된 남자는 김신만큼이나 키가 컸지만 마른 편이었다.
어딘가 묘하게 이쁘장한 느낌이 강했는데, 컬이 잔뜩 들어간 머리카락은 사랑스러운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김신, 오랜만이다.”
“뭐야, 정시우. 하나도 안 변했네.”
정시우는 김신의 유일한 고등학교 친구이자, 대학 동기였다.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나 3년 동안 같은 반이었고, 우연히 희망하던 대학이 같아 같은 곳에 입학했다. 진학한 학과가 달라 캠퍼스에서 마주할 일은 더 이상 없을 줄 알았는데, 교양 과목이나 채플이 늘 발목을 잡아 징하게 8학기를 함께 했다. 군입대와 제대 시기도 겹쳐 붙어 다니는 시간이 예상외로 길었다.
“히든 얘 봐라. 엄청 멋있지? 내가 김신 수트 입은 거 보려고 졸업식 간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같은 해에 졸업한 주제에.”
“우리 아버지가 나 졸업하는 거 보기 싫다 그래서 어차피 안 가려고 했다, 뭐.”
그렇게 말하며 입을 삐죽이는 시우는 남자다우면서도 애교스러운 면이 있었다. 속눈썹이 제법 길어 눈 아래에 음영이 짙게 졌다. 둘은 한참 마주보고 웃다가 테이블로 옮겨 자리에 앉았다.
“웬일이야. 김신이 얼굴 보자는 말을 다 하고.”
“졸업 이후에 서로 안 본 지 오래되기도 했고.”
둘은 가볍다는 공통점이 있어 쉽게 친해졌다. 둘 다 워낙 크고 화려해 캠퍼스에서 단연 돋보였는데, 이상하게 한쪽은 무지하게 여자가 꼬이는 반면, 다른 한쪽은 아무도 꼬이는 법이 없었다.
그 이유를 김신은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나 게이야, 라고 덤덤하게 말하던 시우의 고백에 김신은 알아, 라고 대답했다.
언제부터 알았는지 묻기에 체육복 갈아입으려고 화장실에 기어들어가던 날부터, 라고 대답했더니 시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알아차렸으면 좋았을걸.”
김신은 그때도,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으려고 먼저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시우는 그런 김신의 성격을 잘 알았고, 그 성격을 싫어하면서도 좋아했다. 지긋지긋한 인연이었지만 같이 있으면 즐거웠다.
“고민상담 좀 하려고.”
“천하의 김신도 고민이 있냐? 뭐, 벌써부터 회사가 너무 지겨워졌어?”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뭐야, 사내 연애라도 하냐?”
그렇게 물으며 히든에게 핸드릭스 진을 더블로 넣은 진토닉 하나를 주문한 시우가 갑자기 조용해진 김신을 멍하니 쳐다봤다.
“뭐? 진짜야? 한 달에 서른 번 다른 여자랑 자는 새끼가?”
“한 달에 서른 번이라니… 오버하네.”
“나 지금 존나 긴장되니까 조금 기다려봐. 술부터 마시고 들을래.”
시우는 히든이 금방 만들어온 진토닉을 받아들었다. 투명한 진토닉 안에 얇게 깎인 오이와 장미가 들어있어 상큼한 향이 났다.
시우는 스티어로 오이를 글라스에 마구잡이로 구겨 넣고는 진토닉을 단번에 마셔버렸다. 후우, 하고 숨을 몰아쉰 시우가 김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너 이 새끼 눈빛 봐라. 이거 완전 진짜네.”
“….”
“어떤 여자야?”
“여자 아닌데?”
시우가 손에 쥔 잔이 미끄러지는 걸, 김신은 여유롭게 다시 받아들었다.
“어이, 위험하잖아.”
“지금 너 내 앞에서 장난 치냐?”
김신은 시우가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을 향해 말하는 걸 찬찬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사내연애 맞아서 맞는다고 한 건데. 사내끼리 하는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