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 주임과 최 대리-9화 (9/60)

9화. 시간외 근무조회

“야, 지연우 당장 불러와!”

출근을 하자마자 들어선 정책실은 엉망이었다. 현수가 던져놓은 문서가 사방으로 바닥에 깔려 있었다.

일찍 출근한 인턴사원 하나가 떨어져 있는 기안문들을 줍느라 바빴다. 우진은 말없이 양복 상의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고서는 자신의 맞은편에 놓여 있는 네임태그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아직 지연우는 출근 전인 것 같았다. 연우는 늘 9시 정각에 사무실로 올라왔다. 누가 봐도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지연우 주임, 아직 출근 전이야?”

“그런 것 같습니다.”

파들파들 떨며 대답하는 인턴 사원은 대학을 갓 졸업한 여자였는데, 현수를 무척이나 어려워하고 무서워했다.

우진은 한숨을 몰아쉬며 노트북을 켰다. 회사 그룹웨어로 접속해 메일을 확인하려는데 인턴 사원이 다가와 떨리는 목소리로 우진에게 물었다.

“연우 주임님 핸드폰으로 전화 드려야 할까요?”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우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자신의 밑에 떨어져 있는 문서 몇 개를 주워 인턴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하고 파리한 얼굴로 말하는 인턴을 쳐다보고 있다가 우진은 탕비실로 걸음을 옮겼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아, 아무래도 커피 한잔을 마셔야 할 듯했다.

“강지훈 아직도 출근 전이야? 이 새끼는 상사보다 늦게 출근하고 지랄이야!”

“연우 주임님 5분 내로 오신다고 합니다.”

인턴이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우가 헐레벌떡 사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는 연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현수는 웬만하면 아침에 팀원들을 찾는 일이 없었다. 늦은 밤까지 술자리가 잦아 구내식당에서 아침을 먹거나 트레이닝 센터에서 운동을 하곤 했다. 뭔가 일이 크게 터진 것 같았다.

“신입 주제에, 정각에 맞춰서 출근해?”

“….”

“야, 너 근처에 있다가 지금 올라온 거 아니야? 아주 정신이 나갔구나?”

“죄송합니다.”

“어제 보도자료 관련해서 검수했어, 안 했어?”

“네?”

“귀먹었냐? 어제 김슬기한테 보낸 보도자료, 검수했냐고!”

정책실은 회사가 발표하는 보고서나 발간물, 세미나 등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특히 기자들에게 나가는 보도자료는 담당 사원 데이터가 잘못 표기되는 경우가 잦아 적어도 열 번, 많게는 스무 번 가까이 검수를 하고 사수에게 확인받은 뒤 홍보팀으로 전달되었다.

“강 대리님이 그대로 나가도 된다고 하셔서….”“강 대리? 뭐 강지훈?”

씨발, 이라고 외치는 현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사무실을 울렸다. 다른 팀의 사원들이 정책실을 한 번씩 돌아보고 갔다. 벌써부터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우진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자리에 앉았지만 업무에 집중하기엔 이미 글렀다. 지훈은 대체적으로 출근 시간에 느슨한 편이었다. 한 시간을 훌쩍 넘기고 사무실로 들어오면서 외부 미팅 건으로 외근 기안을 올리기도 했다. 때문에 감사실이나 인사실에 불려가 근무태만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는데도, 고쳐지지 않았다.

습관이거나, 회사에 마음이 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 그 미친 새끼가 후배를 이 따위로 가르쳤구나. 너 뭐 잘못했는지 알긴 해?”

“….”

“매출액 단위가 잘못 나갔어. 이 새끼야. 시말서 써야 한다고!”

“….”

“너 기자들한테 일일이 전화 돌려서 사과하고 기사 수정해 달라고 할 수 있어? 어?”

“죄… 죄송합니다.”

현수는 들고 있던 보도자료를 연우의 얼굴에다 던졌다. 연우가 글썽이기 시작하자 현수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래서 여자들이란, 이라고 중얼거린 현수는 자리에 앉아 있는 인턴을 불러 세웠다.

“너 강지훈한테 연락해서 당장 사무실로 들어오라고 해. 그 새끼 오늘 내가 아주 조져놓을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최우진!”

“….”

“이제부터 지연우 네가 맡는다.”“….”

“사수 네가 맡으라고, 알아들었냐?”

“네.”

연우는 그 말에 더욱 당황한 눈빛이 되었다. PM을 맡고 있는 사수는 직속 후배에게 부차적인 업무를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강지훈의 업무가 대체적으로 외근이 많고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라면, 최우진의 업무는 통계를 돌리거나 데이터를 수집해야 해 야근이 잦고 까다롭다는 사실이었다. 울먹이던 연우가 아예 눈물을 주르륵 흘리기 시작했다.

“보도자료 마무리는 최 대리가 해. 강지훈 그 새끼 못 믿어.”

“….”

“최우진, 대답 안 해?”

우진은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실장이 소리를 지르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최우진 한 명이었다. 우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 올려야 하는 실적 보고서, 내일까지로 미뤄주시면 하겠습니다.”

“…대신 마무리 대강대강 하면 너도 강지훈 꼴 날 줄 알아!”

화난 얼굴로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현수의 뒷모습을 보던 연우가 결국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

정책실 근처를 지나가던 사원들이 그제야 연우에게 다가와 괜찮으냐고 물었다. 다들 웅성거리는 와중에 우진은 천천히 일어서 연우의 앞에 섰다.

옆에 있던 사원들이 비켜나자, 우진이 입을 열었다.

“지연우 주임님.”

“…네.”

“강 대리가 검수했던 보도자료 및 데이터, 보고서 전부 저한테 메일로 넘겨주세요. 홍보팀 김슬기 주임에게 연락해서 보도자료 나갔던 미디어 리스트 및 담당자 연락처 달라고 하시고요.”

“….”

“일하세요.”

울음을 멈추고 우진을 빤히 쳐다보던 연우가 당황한 얼굴로 알겠습니다, 하고 눈물을 닦은 뒤 자리에 앉았다. 우진은 자리로 돌아가 문서함을 열어보기 시작했다. 일이 두 배로 많아질 예정이었다. 입사 후 바쁘지 않은 적이 별로 없었던 우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는 파일들을 하나하나 오늘 날짜가 기입된 새로운 업무 폴더에 저장했다.

***

김신은 모니터의 채팅창을 켰다가 끄는 걸 반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점심은 어떡할 거냐고 묻는 민재의 메시지는 무시한 지 오래였다.

- 우진 대리님, 점심 같이 먹을까요?

며칠 사이 우진과 김신은 점심을 매번 같이 먹었다. 사무실에서도 같은 팀이 아니면 마주칠 일이 적었기 때문에 점심시간이 아니면 짬을 내어 우진의 얼굴 보기가 힘든 탓이었다.

강지훈이 몇 번인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우진과 함께 있는 김신을 쳐다봤지만 우진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왜 답이 없지.’

늘 바로바로 답이 오던 우진이었는데 오늘따라 메시지 확인을 전혀 하지 않았다. 벌써 점심시간이 코앞이라 김신은 한숨을 쉬며 민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층에서 보자는 민재의 답이 바로 날아왔다. 옷걸이에 걸어둔 재킷을 걷어들고 홍보실을 나서는데, 우진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또 외근인가.’

이것저것 생각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사원증을 목에 건 민재가 보였다. 민재는 인사팀이라 6층에서 근무했다. 그러고 보니 옆에 연우도 서 있기에 손을 들어 인사했다. 함께 하는 점심 식사는 오랜만이었다.

“어제 잘 들어갔어?”

“너 어제 회식 왜 안 왔냐?”

민재가 그렇게 물으며 김신의 어깨를 툭하고 쳤다.

“뭐 피곤하기도 하고.”

“오늘 연우 속상하대서, 점심 같이 먹자고 한 거야.”“무슨 일 있었어?”

“너 같은 층인데 몰랐냐?”

그러고 보니 연우의 눈가가 약간 붉으스름 한 것도 같았다. 김신이 쳐다보자 연우가 입 꼬리를 내리며, 으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출근했을 때는 아무 일 없었던 거 같은데. 김신이 슬쩍 눈썹을 올리자 연우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고개를 숙였다.

“실수했어요.”“무슨 실수?”

“김슬기 주임님한테 보도자료 잘못 넘겨서 실장한테 완전 깨졌어요.”

이현수 실장은 타 팀에도 성격이 개 같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김신이 미간을 찌푸리자 연우가 울먹울먹했다.

“사수도 바뀌고….”

“누구로?”

김신이 묻자 연우가 흐잉, 하고 더욱 입 꼬리를 내렸다.

“최우진 대리님으로….”

“뭐야, 그 대리 완전 얼음장이라며?”

민재가 쏘아붙이듯 우진에 대해 평가하는 걸 김신은 빤히 쳐다보았다.

어쩐지 오전부터 슬기 주임은 전화 업무로 정신없어 보였다. 단순히 어제 업무 처리의 연장인 줄 알았더니 연우 때문인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최우진이 업무를 더 맡게 된 상황이 김신을 심난하게 만들었다.

무심코 김신이 우진의 걱정에 미간을 찌푸리자, 연우는 자기 때문인 줄 알았는지 마음 놓고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우진 대리님이 오늘 아침에도 저 울고 있는데, 위로는커녕 지금 당장 실수한 자료 취합해서 달라고….”

“최우진이 왜?”

“우진 대리님이 일 마무리하기로 하셨거든요.”“아니 그 실수를 최우진이 한 것도 아닌데 왜 그 사람이 마무리해?”

버럭, 김신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치는 바람에 연우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신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결국 업무를 더 맡은 건 최우진이었지, 지연우나 강지훈은 아니었다. 그렇게 일이 쌓여 우진은 매번 야근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 사람이 자기 몫만 챙기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다들 최우진에 대해서 차갑다고 말하는 건지 김신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업무 원래 담당 누구야?”

“저랑, 강지훈 대리님이긴 한데….”“그럼 최우진 대리가 대신 맡아서 하는 거에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냐?”

“…왜 애한테 화를 내고 그래?”

민재의 말에 천천히 연우를 내려다봤다. 한때 귀엽다고 생각했던 연우의 얼굴이 구겨져 있었다.

“화낸 건 미안한데,”

“….”“최우진 대리한테 너무 심하다 싶어서 그래. 업무는 정작 그 사람이 다하는 것 같은데 뒤로는 그 사람 성격 가지고 뭐라고 하는 거 듣는 거 불편하고.”

후우, 하고 김신이 한숨을 쉬며 자신의 앞머리를 엉망으로 흐트러뜨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사람들은 우진을 늘 차갑다고 평가했다. 피곤하고, 무감한 얼굴 아래 최우진이 어떤 사람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건 김신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실은 그 무감한 얼굴이 아프다거나 힘들다고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김신은 자꾸,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었다.

지금까지 왜 거리감 유지 운운 하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너, 너무 감정이입한 거 아니야? 누구한테 업무 떠넘겨 받은 적 있냐?”

“그러게 말이다.”

민재의 물음에 김신이 어설프게 웃으며 대답했다.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 때문인가 봐, 라고 덧붙이며 김신은 울상인 연우의 어깨를 툭하고 쳤다.

미안, 하고 입모양으로 말하자 어색하게 웃는 연우의 얼굴이 보였다. 평소라면 뭐라고 위안의 말을 더 했을 만도 한데, 김신은 더 이상 말을 잇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뒤섞인 감정이 후두둑,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

불 꺼진 사무실의 스위치를 더듬거리며 찾던 우진은 결국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 15분을 지나고 있었다.

사무실에 아무도 없을 만했다. 특히나 오늘은 일이 더욱 고됐다.

보도자료를 돌린 미디어국 중에서 우진이 직접 찾아가야 하는 곳이 몇 군데쯤 있었다. 일과 연관된 사람들과의 만남은 낯가림이 심한 우진에겐 배로 힘든 일이었다.

“휴우….”

자료를 놔두고 갈 것이 있어 들른 사무실은 텅 비어 휑했다. 모니터를 켜고 몇 가지 자료를 업데이트한 우진은 스케줄 표에 메모를 하고 금방 일어섰다. 순간 하늘이 비잉, 하고 도는 느낌이 들어 그만 비틀거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한 끼도 먹질 못했던 것 같다. 피곤했다.

“….”

또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야할 생각을 하니 우진은 아득한 느낌마저 들었다. 집을 회사 근처로 옮기고 싶은데, 강남은 늘 그랬듯 너무 복잡해 망설이는 중이었다.

그래도 집에서 쉬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빠르게 가방을 챙겨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우진은 벽에 붙어 있는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봤다.

사실, 자신의 얼굴을 잘 보지 않는 편이라 거울 속 자신이 조금 낯설었다. 거울은 양면으로 붙어 있어, 시선을 맞추자 자신의 형상이 끊임없이 이어져 보였다.

마르기만 한 얼굴, 창백한 피부, 핏줄이 도드라진 이마, 색이 옅은 눈동자.

눈이 하도 퀭해 보여서, 우진은 손을 들어 차라리 얼굴을 감쌌다. 어둠이 눈앞에 내려앉았다. 팅, 하고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닿았다. 문이 닫히기 전에 나가야 하는데, 몸이 잘 펴지지 않았다.

누가, 나 좀….

“우진 대리님.”

까마득히 어두운 로비에 울리는 목소리가 익숙해, 우진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부딪히는 시선.

“늦었네요.”

훅 하고 끼쳐온 체향이 있었다. 손목이 잡힌 우진이 빠져나온 엘리베이터의 문이 곧장 닫혔다. 불빛이 사라지자 빌딩의 로비에는 어둠만 남아 있었다.

“…김신?”

손목을 놓아주지 않은 채 김신은 우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둠이 조금 가라앉자, 시선이 너무 직접적으로 느껴져 우진은 고개를 돌려 피했다.

그러자 김신이 우진의 턱을 잡고 자신을 향하게 했다. 턱 끝에 스쳤던 체온이 뜨거웠다.

꿈인가.

우진은 처음 혹시 자신이 업무로 지쳐 잠이 든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걸 부정하듯, 김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 남이 시키면 말없이 다 하는 편이예요?”

“…네?”

“내 일이 아니다, 다른 일도 많다, 왜 안 합니까?”

“….”“자기 일 아니면 잘라내야죠. 신입인 저도 아는데, 왜 대리님이 그걸 몰라요?”

김신은 화가 난 듯 보였다. 사실 그가 화를 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우진은 마음 한 구석이 이상하게 뜨끈거렸다. 바닥에서부터, 자신도 알 수 없는 열기가 천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니면 알면서도 하는 겁니까?”

“….”

“그냥 강지훈이 좋아서 그 사람 일 대신 하는 거냐고요.”

“뭐?”

우진이 당황한 얼굴로 김신을 올려다봤다. 자기도 모르게 반말을 써버린 것 같았다.

지금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우진은 미간을 찡그렸다가, 입술을 물었다. 김신은 우진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멀쩡한 사람 들썩이게 해놓고, 알고 보니 마음에 둔 건 다른 사람이었어요?”

“네?”

김신이 다급하게 우진을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겼다. 우진의 몸이 휘청하고, 김신의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뜨거운 눈빛이 우진의 몸을 한번 크게 훑었다. 화사한 얼굴이, 우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저 좋아하시잖아요. 우진 대리님.”

김신의 팔이 우진의 허리를 감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 순간이었다.

입술이,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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