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 주임과 최 대리-8화 (8/60)

8화. 트리거

“이거 봐, 슬기 주임, 지금 제정신이야?”

홍보팀 팀장 윤수진은 깐깐하고 일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사업팀에서부터 정책실까지 전 부서를 커버해야 하는 홍보팀은 그만큼 업무가 복잡하고 양도 상대적으로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진은 팀장으로서 적합한 업무를 분장하고 일처리를 말끔히 하는 걸로 유명했다.

무리한 야근은 절대 없다는 그녀의 원칙에 따라 홍보팀은 웬만한 일이 아니면 업무시간을 연장하지 않았다.

“내가 수정 자료 취합 때 빠트리지 말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어?”“죄송합니다.”

“슬기 주임 내년에 승진 심사 있지 않아? 되도록 이런 실수는 없어야 하는 거 아니야?”

김신은 팀장에게 혼나고 있는 슬기를 슬쩍 쳐다보다 망설이며 재킷을 들고 일어섰다.

오늘 오후에 광화문에서 주임급 대상으로 관련 산업 세미나가 있었다. 출장 기안은 어제 올려놨는데, 아무래도 팀장에게 보고를 한 후에 나가는 게 맞을 것 같아 망설이고 있자니 수진이 시선은 슬기에게로 둔 채 김신에게 입을 열었다.

“김신 주임은 나가 봐요. 오후 교육 아니야?”

“슬기 주임님도 교육 대상이라.”

“알고 있어요. 좀 있다 보낼 테니 먼저 출발하세요.”

수진은 웬만하면 화를 내지 않는 타입이라 김신은 조용히 목례를 하고 가방을 챙겨 나왔다. 복도 앞에는 연우가 먼저 나와 김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신 오빠랑 같이 가려고 기다렸지.”

연우는 애교스럽게 웃으며 김신의 옆에 섰다.

오늘 교육은 정책실에서 주관하는 분기별 세미나 중에 하나로, 교육 시간 이수에 꼭 필요한 것이라 주임급들은 모두 참석해야 했다.

정책실은 전원 참석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돌아보니 우진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세미나 준비로 먼저 자리를 뜬 모양이었다.

“슬기 주임님 혼난 거야?”

“그런가 봐.”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면서 연우가 묻자 김신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뭐 때문에 혼났대?”

“자료 한두 개 빠뜨렸나 보지.”

“슬기 주임님도 실수할 때가 있나 봐.”

“같이 일해?”

“응. 강지훈 대리님 담당이잖아요. 일할 때 보니까, 엄청 깐깐하던데. 성격이 딱 우진 대리님이랑 맞을 상이야.”

김신은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저번에는 자료 빠트렸다고 나한테 얼마나 면박을 주던지. 차갑고 깐깐하고 인간미 없어.”

“….”

“우리 실장님이 맨날 우진 대리님 인간미 없다고 그러잖아요.”

연우에게 꽤나 미운털이 박힌 모양이었다. 김신이 지켜본 김슬기 주임은 묵묵하게 일만 하는 유형이라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긴 했다.

주관도 뚜렷하고, 업무 관련 사항을 일일이 따지고 드는 편이라 상사들이 싫어했다. 다행히 수진은 그런 슬기를 높게 샀고, 업무 관련 기대감도 높은 편이었다.

“일 잘하는 게 흠 잡힐 일인가.”

“물론 슬기 주임님 일 잘하시죠. 근데 사회성 없기는 우진 대리님 못지않은 거 같아요.”

거기서 왜 최우진이 나오지.

김신은 묘하게 거슬리는 것 같아, 연우가 하는 말들에 도통 집중하지 못한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오늘 세미나 주제는 광고 산업 규모가 어떤 요소에 의해 산출되는지 알아보고, 통계 및 요소 분석을 통해 각 사업팀별로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입니다.”

정책실에서 준비한 세미나는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아 의외였다.

김신은 보고서를 펴고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는 지훈을 올려다보았다. 지훈이 설명을 시작하자마자 주위가 제법 조용해졌다.

강지훈은 발표에 재능이 있었다. 목소리가 낮고 울림이 좋은 것도 한몫 하는 듯 했지만 무엇보다 프레젠테이션 구성 능력이 훌륭했다.

“프레젠테이션 엄청 깔끔하다.”

“그러게. 알아보기도 쉽고. 발표하기도 편하고.”

“저거 최우진 대리님이 만드신 거예요.”

어제 그래서 우진 대리님 야근했을걸, 하고 말하는 연우를 김신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쩐지 기분이 또 나빠졌는데,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조금 답답했다.

“근데 왜 발표는 강 대리님이?”

“원래 강 대리님 업무예요. PPT 잘 못 만드신대서 실장님이 우진 대리님 보고하라 그랬어요.”

민재가 의아해하자 연우가 대답했다.

“최 대리님은 그냥 하겠다고 했고?”

“별말 안 하셨어요.”

뭐야? 김신은 연우의 대답에 미간을 찌푸렸다. 정책실은 원래 이렇게 업무 분장이 엉망인가,

처음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 발표 때도 정책실 프레젠테이션은 최우진이 아니라 강지훈으로 공지되어있었다. 갑작스런 출장으로 인해 우진이 대신 참석했다고 했을 땐,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몇 주간 업무를 하다 보니 강지훈의 업무 대부분은 최우진이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책실 업무는 최우진 대리님이 다 하는 것 같네.”

신입 동기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하자 연우가 흠,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에요. 지훈 대리님도 꽤 많이 하시는데.”

“무슨 업무?”

김신이 물어보자 연우가 입을 열었다.

“뭐 대내 협력이랑 대외 협력, 자문회의 같은 것들….”

“그거 그냥 사람 만나는 거 아냐?”

김신이 그렇게 말하자 연우는 더욱 표정을 찡그렸다.

“지훈 대리님 일 많이 하세요.”“그렇게 말을 하고 다니는 거겠지.”

“강 대리님 그만 까. 사람 좋고 사교적이시던데 뭘.”

민재가 김신에게 면박을 줬다.

대체 사람 좋다는 게 뭐지?

김신은 한마디 하려다 목소리가 다른 사원들이 돌아보기 시작해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괜스레 지훈의 목소리가 거슬렸다. 프레젠테이션이 딱 봐도 품이 많이 들어간 것 같아 짜증이 절로 솟았다.

“후우….”

김신에게는 이런 감각들이 처음이라 적응이 안 됐다. 육체적으로 가까워지고 싶은 만큼, 저 사람 주변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

욕망이라고 하기에는 미묘한 감각들이 동반됐다. 김신은 앞단에 서 있는 우진의 나른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알 수 없는 갈증 같은 것들을 느꼈다.

***

“오늘 교육 끝나고 회식이래.”“뭔 놈의 회식을 이렇게 자주하는 거야. 돈이 남아도나 봐.”

김신은 동기들의 푸념을 들으면서 가방에 교육 자료들을 모아 담았다. 아무렇지 않게 상의를 걸쳐 입으며 나가려는데 연우가 자연스럽게 김신에게로 다가왔다.

“갈 거예요, 회식?”

오늘은 일찍 퇴근하고 운동이라도 할까, 생각하던 찰나였다.

김신은 자신도 모르게 정책실 사람들을 돌아봤다. 지훈과 우진이 함께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보였다. 지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우진의 옆에서 웃고 있었다. 우진은 지훈의 이야기를 들으며 피곤한 얼굴로 뒷정리 중이었다.

안 그래도 마른 몸이었는데, 요 며칠 새 더 마른 것 같아서 김신은 절로 이마가 찌푸려졌다.

너무 가깝고 너무 들러붙어.

“거슬리네….”

“응?”

“아, 아냐. 정책실도 전부 가려나, 회식?”

“강 대리님은 가신다고 했고, 우진 대리님은 아마 야근?”

김신은 강지훈이 우진의 셔츠 깃을 정리하고 있는 걸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우진은 몸이 마른 편이었지만 수트는 딱 맞게 입는 편이었는데, 타이를 잘 메지 않거나 풀고 다녀 지훈이 가끔 정리해주곤 하는 걸 본 적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게 유난히 거슬렸다.

“안 가려고? 민재 오빠도 간다던데?”

“음.”“약속 있어?”

김신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작고 귀여운 느낌의 연우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연우는 자신의 취향이었다.

연우는 적절히 영리하고, 그걸 직접적으로 내보이지 않아 적을 만들지 않으면서 경계는 뚜렷한 인간이었다.

지금도 자신에게 팔짱을 스스럼없이 끼면서 눈웃음을 치는 건, 아마 다른 동기들이나 사원들에게 경계를 두려고 그러는 듯했다.

나쁘진 않았다. 문제는 계속 뇌 한구석이 송곳으로 찌른 듯 최우진이 떠오르는 게 문제였다. 이건 몸의 열기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기분이 여러모로 좋질 않았다.

“연우 주임, 여기 와서 치우는 것 좀 도와줘요.”

그 순간 멀리 서 있던 지훈이 연우를 불렀다. 우진도 그 바람에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모양이었다. 순간적으로 김신과 눈이 마주쳤는데 우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컴퓨터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여전히 무감하고 나른한 얼굴이었다. 전혀 특별할 것 없는 행동들이 김신의 뇌쪽 신경 줄 하나를 잡아당겼다. 짜증이 절로 솟았다.

…뭐야.

김신은 자기도 모르게 섭섭한 느낌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몇 번 점심을 같이 먹었고, 한번은 술도 마셨는데. 그러고 보니 우진이 김신에게 먼저 밥을 먹자거나, 연락하는 경우는 없던 것 같았다. 심지어 우진이 매번 야근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물론 그건 자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신경줄이 다닥다닥하고 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같이 가. 나도 도와줄게.”

“고마워.”

충동적으로 연우를 따라 걸으며 지훈에게로 다가갔다. 연우의 얼굴이 금방 화사하게 변했다. 알 수 없는 상황이 겹치는 것이 싫었던 김신은 빠르게 테이블과 자료집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뭐야, 김신이 연우 주임 도와주는 거야?”

지훈이 금방 김신에게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업무가 말만 잘하면 된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케이스의 사람이었다. 딱 봐도 한량인 데다, 웃는 모습이 호감형이었다.

이렇게 손을 놀리고 있는데도 주변에서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김신이 대꾸 없이 테이블과 다과들을 치우자, 지훈이 넉살 좋게 웃으며 김신에게 물었다.

“연우한테 잘보이고 싶은 건가?”

“그럴 수도 있죠.”

“오?”그때, 우진이 고개를 들어 김신을 쳐다봤다. 김신은 피하지 않고 그 시선을 마주했다. 우진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라도 있길 바랐는데 상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대신 연우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놀리지 마세요, 강 대리님.”“연우 주임 인기 많구나. 역시.”

지훈은 그렇게 말하며 우진에게로 다가갔다.

“봐봐. 너도 얼른 슬기 주임한테 밥 먹자고 그래. 시커먼 남자랑 먹지 말고.”

“….”

우진은 여전히 묵묵하게 뒷정리만 할 뿐이었다. 김신은 그런 우진이 답답했고, 동시에 모든 것에 짜증이 솟았다.

“슬기 주임이 너 회식 오나 안 오나 기다리고 있다니까.”“그만해.”

지훈이 장난스럽게 우진의 목 뒤를 감으며 말하자 그가 금방 귀찮다는 표정을 했다. 파쇄할 자료들을 정리하느라 허리를 숙이고 있던 우진의 뒤에서 장난을 치는 지훈을, 김신은 정리를 하다 말고 멈춰선 채로 쳐다보았다.

“회식 가자니까. 슬기 주임이랑 한잔하면서….”그 순간 김신의 책상 위에 모아두었던 자료집이 지훈의 앞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자칫하다간 우진이 다칠 뻔했는데, 다행히 곁에 있던 김신이 우진의 손목을 붙들어 옆으로 비켜서게 한 찰나였다. 지훈이 놀란 얼굴로 김신을 돌아봤다.

“아, 죄송해요. 모르고 건드렸나 보네요.”

“….”

“다시 정리해야 할 것 같은데. 이를 어쩌죠. 저 갑자기 팀장님이 호출하셔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김신이 화사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꺼내보였다.

“참 그리고, 우진 대리님은 이현수 실장님께서 전화 달라고 하셨는데, 제가 전달드린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얼른 전화해보세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라는 말을 끝으로 김신은 우진의 손목을 잡은 채 그대로 세미나실을 빠져나갔다. 연우와 지훈이 멍하게 김신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걸,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우진은 손목이 잡힌 채 김신을 향해 입을 열었다.

“김신 주임님, 실장님이 언제 전화 달라고 하셨죠?”

우진이 핸드폰을 꺼내들며 묻자, 김신은 그제야 손목을 놓아주고는 시선을 돌렸다. 둔한 건가. 이현수 실장은 오늘 외부 출장 건으로 회사에 없었다.

“전화 드려도 안 받으실걸요.”“…네?”

“여기서 쉬고 계시다가 마무리된 것 같으면 퇴근하세요.”

“….”

“그럼 전 진짜 퇴근합니다. 일 너무 많이 하시지 말고요.”

김신은 그렇게 말하며 웃어보였다. 우진이 당황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자, 김신이 아, 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강지훈 대리님이랑 너무 안 붙어 계셨으면 좋겠어요.”“….”

“저 이상하게 기분 나쁘더라고요.”

감정이란 말로 꺼내놓으면 그 부피와 질감이 현실화되는 걸, 김신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김신은 최우진을 욕심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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