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기억의 파편
감정의 자각이 무서운 것이라는 걸 김신이 처음 깨달은 건 고등학교 때였다.
어릴 적부터 수영은 일상이었고, 그건 공기같이 당연한 것이라 자신과 늘 붙어 다닐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거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트레이닝 과정이 괴롭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만 일정량의 운동을 하고,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를 목도하는 건 엄청난 희열이었다. 심장까지 휘몰아치는 순간적인 감각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연히 사고를 당했고, 사고 이후 폐활량이 반으로 줄었다.
지옥 같은 시간들이었다. 물이 싫었고, 심지어 끔찍했다.
수영부가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지하에서부터 기어 나오는 수영장의 물 냄새, 그 지독한 소독제 냄새를 맡는 건 고통이었다.
가끔 악몽 때문에 숨을 못 쉬어 바닥에 쓰러졌다. 다시는 무엇인가가 자신에게 스며들게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절대, 무언가에 감정을 쏟거나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분명 여러 가지가 가벼워진 면이 있었다.
김신에게는 인간관계가 그랬다.
사고 이후 타인을 극단적으로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
가벼움은 사람들과의 경계를 만들 수 있는 좋은 속임수였다. 가볍게 다가서면, 끝까지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되었다. 육체적 관계도, 친구들과의 사이도 그랬다.
사람들은 김신과 있는 걸 즐거워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진지한 얼굴로 다가올 때면 김신은 도망갔다. 끔찍했다. 무서웠다.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는 것만큼 남의 상처를 보는 것은 싫었다.
주고받는 관계가 명확해야 했다. 그래야, 누군가가 자신에게 더 이상의 깊이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후우….”
스마트폰을 몇 번 만지작거리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직장 동료이자 상사인 우진에게 점심 한번 같이 먹자고 하는 게 어려울 건 없다. 그러나 김신은 이상하게 망설이는 자신을 발견했다.
우진이 거절할 걸 걱정하는 마음은 아니었다.
분명, 자신이 걱정되는 거였다.
밥을 먹자고 하면, 회사 이외의 시간을 갖고 싶어질 것 같았다. 회사 이외의 시간을 갖자고 하면 분명, 만지고 싶어질 것이다. 또, 만지면 섹스하고 싶어질 게 뻔했다.
최우진을 보고 있자면 헤테로라고 하기엔 어색한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김슬기 주임과 데이트를 하지 않는 것도, 회사 주변에 친한 사람을 두지 않는 것도, 모두 대학에서 만난 김신의 게이 친구들과 비슷한 패턴이었다.
그런 애들이 꼭, 밤 생활은 천진난만했다. 아, 물론 여기서의 천진난만은 절대 좋은 뜻이 아니지만.
“쉽게 생각하자.”
밥 한번 먹자고 하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들게 만드는 최우진의 존재 자체가 꺼림칙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김신은 애써 외면했다.
식사를 같이하고 싶은데 이유가 있을 리는 만무였고, 무엇보다 묻고 싶은 것도 있었다.
물론 죽은 잘 먹었는지 따위의 일상적인 거였는데, 그게 왜 궁금해지는지 자기도 모를 일이었다.
- 최우진 대리님
채팅창에 메시지를 띄워놓고 나서 김신은 이것저것 업무를 처리했다. 그래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우진이 메시지를 확인하는 데 얼마정도의 시간이 걸릴 테니까.
우선 김신은 주간업무보고와 같은 자잘한 엑셀 파일 작업을 해놓고, 보도자료 같은 것들을 정리해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안했다. 자기도 모르게 모니터의 채팅창을 다시 열어보니 아직도 숫자 1이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뭐야, 왜 확인 안 해.’
- 우진 대리님?
미친.
다시 메시지를 입력하고 엔터를 누르면서 김신은 깨달았다. 뭐가 이리 조급하지.
분명 1분도 안 지났는데. 자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순간, 채팅창에서 1이 지워졌다. 수십 초가 흐른 것 같았는데, 데스크의 올려둔 전자시계의 숫자는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
- 네. 김신 주임님.
- 점심 약속 있으세요?
또, 또 바로 확인하자마자 메시지를 보내고 말았다. 김신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 없습니다.
- 같이 식사하실래요?
우진은 확인하면 바로바로 메시지를 보내는 타입인 듯했다. 갑자기 심장이 울렁거렸다. 1초, 2초, 분명 읽었는데 우진은 답이 없었다.
갑자기 텀이 길어지자 정작 당황한 건 김신이었다. 메시지를 읽지 않은 것도 아니고, 숫자 1은 분명 지워졌는데, 답이 없었다.
1분이 지나고, 어느 순간 10분, 15분, 30분이 지나자 김신은 채팅창을 꺼버렸다.
‘설마, 씹힌 건가.’
허들이 상당히 높은 스타일이긴 했지만, 우진은 김신에게만큼은 어느 정도 벽을 낮추어왔다. 그건 확실했다.
곁에서 본 우진은 타인과 섞이는 걸 극도로 피하는 편이었다.
눈을 마주치거나 내민 손길에 움츠러드는 걸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사무실에서 자리를 뜨는 일도 드물었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도 꺼리는 듯했다.
그러나 분명 그날 밤 김신과 부딪힌 열기는 최우진의 것이었다.
심지어 취했다곤 했지만 자신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가댔다. 코끝에 닿은 머리카락에서 민트향이 났다. 목에 솟은 혈관이 팔딱거리며 뛰었다. 너무 세게 울려서 관자놀이가 아플 정도였다.
칭얼거리는 게 딱 김신 타입이었다.
매끄럽게 안기는 몸이나, 가는 선 같은 게. 여자 같지는 않았는데, 차갑게 생긴 것과 달리 손에 감기는 게 너무….
‘여우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목덜미를 쓰다듬자, 가볍게 떠는 것도 좋았고 침대에 눕힐 때 목을 감고 안 놔주려는 것도 취향이었다.
눕힐 때 코끝에 닿은 귓불에서는 베이비 로션 향이 났다. 침대에 눕히고 돌아서려는데 우진이 김신의 목을 너무 감고 있어 서로의 코끝이 닿을 뻔했다.
그때 김신은 자기도 모르게 우진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좀 더 힘주어 당겨 안았다면 키스했을 것이다.
분명, 위험한 패턴이었다. 입을 맞추었으면 입술을 열어 혀를 감았을 것이다. 다리가 엉켰다. 허벅지는 가늘었다. 뼈가 마주한 것뿐이었는데, 몸이 달아올랐다.
‘미치겠네.’
우진의 손이 닿으면, 어딘가가 부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사춘기도 아니고 발정기가 있는 짐승도 아니었는데, 쉽게 가라앉지 않을 흥분이라 서둘러 그 집을 나왔다. 술 취한 사람을 상대로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무엇보다, 제정신에 섹스하고 싶었다.
최우진이랑…?
내가 지금 그런데 자꾸 무슨 생각을?
“돌아버리겠다.”
대낮부터 얼굴이 시뻘게진 것 같아 김신은 마른세수를 했다.
벌써 11시 40분을 향해 가고 있었다. 10분 뒤면 점심시간 시작이었다. 혼자 점심을 먹는 건 질색이라 동기 채팅방을 열어 점심은 어떻게 할 거냐고 메시지를 보내버렸다.
민재가 회사 근처의 라면집을 추천했다. 당연히 연우도 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갈까, 말까. 김신은 답지 않게 고민 중이었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사실 우진을 강당에서 처음 봤을 땐, 그저 기묘하게 기분 나쁜 상대라고만 생각했다.
집요한 눈빛을 본 순간 감당이 되질 않았다.
이렇게 긴장감이 들기 시작했던 건, 분명 그 술자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야근을 했으면 집에 가서 잠이나 잘 것이지 나는 또 왜 술 먹자고 말을 꺼내서….
결국 거리감 조절에 실패한 김신은 열기가 오른 이마에 손을 가져다댔다. 위험했다.
‘빌어먹을 망상 따위 하는 게 아니었어.’
그렇지만 후회해도 소용은 없었다.
사실 입사 이래로는 섹스할 상대를 찾는 것도 귀찮은 노릇이었다. 혹시 누구 다른 사람이라도 찾아서 진탕 섹스를 하고나면 괜찮아질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한 찰나였다.
“김신 주임님.”
미친. 이제는 환청까지….
“주임님?”
“….”
설마, 하고 의자를 돌렸을 때 우진이 거기 서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전혀 못했기 때문에, 대답을 하는 대신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우진이 입술을 약간 물었다가 떼었다.
정말, 최우진이었다. 김신이 벌떡 일어섰다.
“아, 우진 대리님.”
“메시지 보내기가 곤란해서.”“아, 네.”
“10분 뒤에 마무리되는데, 기다려주시겠어요?”
김신이 고개를 끄덕이자 우진이 고마워요, 하고 나지막히 말하고는 급하게 홍보팀을 나섰다.
“지금, 설마 최우진 대리였어?”
홍보팀의 과장 하나가 벙찐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김신에게 다가왔다.
“네?”“세상에, 최우진 대리가 홍보팀 찾아온 거 처음 봐. 자기 업무 보도자료 내보낼 때도 매번 내선번호로 전화만 하잖아. 낯가림 완전 심해서.”
“….”
“김신 주임, 최우진 대리랑 친한 사이야?”
고개를 저을 수도, 끄덕일 수도 없는 상황에 김신은 왠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아 턱 아래를 손바닥으로 가려버렸다.
***
“상반기 워크샵 일정 나온 거 봤어?”
사업팀과의 긴 컨퍼런스 콜을 마치고 들어온 우진이 의자에 기대어 널브러져 있자, 지훈이 우진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며 물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지훈은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지훈의 일과 중 하나는 비서팀과 인사팀에 들러 여사원들과 잡담을 나누는 것이었다. 스태프 부서와 친한 덕에 늘 소식이 빨랐다.
우진이 지훈의 손목을 거두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예고 없이 만지는 건 유쾌하지 않은 지훈의 습관이었다.
“넌 또 병가 낼 거냐?”
“…신경 꺼.”
똑같은 대답을 매번 듣는 사람치고 끈질긴 인간이다.
지훈이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의자를 당겨 우진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파티션이 좀 더 높았으면, 하고 혼자 생각하던 우진은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지훈의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요즘 들어 달라붙는 정도가 심해진 듯했다.
“왜?”
“너 오늘 점심 김신이랑 먹었다며?”
“….”
“홍보팀에서 난리가 났던데? 김슬기 주임은 매우 속이 상한 모양이더라고.”
“….”
“근데 웬일이야. 너 원래 회사에서 친구 안 사귀잖아?”
친구.
무심코 우진은 김신과 자신이 친구인가,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람들의 관계는 한 단어로 단정 짓기 어려운 상황이 많다. 그러나 사회는 늘, 하나의 단어로 사람과의 관계를 결정했다. 가족 혹은 친구. 동기. 회사 사람. 여자 친구, 남자 친구, 또는 연인.
“…친구 아니야.”
“그럼 뭐냐. 맨날 혼자 밥 먹고 혼자 돌아다니더니. 너 처음으로 회사에서 누구랑 밥 먹은 거 아니었어? 그것도 다른 팀 애랑.”
미심쩍게 바라보는 지훈의 얼굴을 쳐다보다 우진은 고개를 숙였다.
친구일까.
타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서른 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면서 겪어볼 일들 중에는 우진이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이 꽤나 많았다.
어머니의 손길, 아버지의 칭찬, 원만한 교우관계, 그리고 연인.
어릴 때 우진의 어머니는 어머니라는 위치를 어려워했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우진을 가만히 쳐다보며 훈계를 했다. 말수를 줄이라고 했다. 숨도 조용히 쉬라고 했다. 우진이 자신을 닮은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 하냐.”“…일이나 해.”
지훈은 표정의 변화를 일으킨 우진을 미묘하게 바라보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마치 마음을 읽어 내리는 듯한 표정이라 우진은 순간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마음이 불편했다. 모니터에 띄워진 액셀창은 몇 분째 그대로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친구라, 친구….
***
우진은 자주 이사를 다녔다. 집이 부유했음에도, 중학교 때까지 매번 지방이고 수도권이고 상관없이 돌아다니며 살았다.
아버지는 1년의 절반을 해외에 있었다. 특히 사진 찍는 걸 극도로 싫어하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건 우진에게도 금지된 것 중 하나였다.
덕분에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졸업식이나 입학식에 참석한 적 없었고, 졸업앨범에도 이름만 올라 있을 뿐이었다. 유령 같은 삶이었다.
“뭐 드시고 싶으세요?”
그렇게 묻는 김신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힘이 있어, 우진은 눈을 들어 김신을 올려다봤다.
한 번도 누군가가 우진에게 원하는 걸 물어봐준 적이 없었다. 그건 살면서 누군가와 무언가를 함께 해본 일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새삼, 저 얼굴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쁘다는 단어를 입에 올려본 적은 살면서 한 번도 없었으나 우진에게 김신은 그랬다.
표정이 다양하고, 색색이 빛났다. 만지고 싶은 얼굴이었다.
우진은 김신에게 한정식이 먹고 싶다고 했던 것 같다. 사실, 뭘 먹든 똑같은 맛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달랐다.
김신과 먹는 식사때는 늘 배가 고팠다. 김신은 생선가시를 발라서 우진의 앞에 놓아주거나 기름진 반찬을 우진의 앞에 당겨주었다.
그는 또 밥을 먹다 말고 자주 우진을 쳐다봤다. 잘 먹는지 안 먹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게 또 이상하게 열을 오르게 하는 것 같아 우진은 고개를 숙였다. 결국 우진은 그날 점심 밥그릇을 모두 깨끗하게 비웠다.
친구.
김신과 마주친 이후 우진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김신은 어른이었다. 우진을 잡아당겨 입을 벌려 숨을 밀어 넣었다. 좀 더 그 숨에 매달리고 싶어 우진은 김신의 목을 안았다.
‘우진아.’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적 없었던 꿈속의 김신이, 우진을 불렀을 때 우진은 꿈에서 깼다. 그리고, 깨달았다.
친구….
…는 될 수 없어.
그것은 우진이 태어나서 처음 마주한 강렬한 욕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