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모먼트
살면서 우진은 규칙이라는 것에 대해 일정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가벼운 운동을 했다. 전날 다려둔 와이셔츠를 입고 과일을 챙겨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탄 뒤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꼭 이어폰을 끼고 매일같이 비슷한 음률의 음악을 들었다.
누군가는 강박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을 것이다.
6시에 알람을 맞춰놓으면 5시부터 10분 단위로 잠에서 깨는 것 같은 경험들은 늘 일상이었다. 그러니 우진에게는 규칙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을 강박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이유도 없었다.
“하아….”
문제는 어젯밤 이후, 삶이 같은 시간에 동일한 움직임을 반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데 있었다.
“대리님, 이제 출근하세요?”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연우가 우진을 보고 꾸벅 인사했다. “점심은 드셨어요?” 하고 묻기에 우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오후 근무가 시작되기 전이라 아직 사무실은 소등 상태였다.
후우, 하고 숨을 몰아쉰 우진이 컴퓨터를 켰다.
“머리 아파.”
혼잣말을 하고선 지레 놀란 우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든지 속으로 꾹꾹 담아두는 스타일이라 자신도 모르게 나온 목소리에 당황했던 탓이다.
결국, 집게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모니터를 보는데 마침, 따랑따랑 하고 메시지 알림음이 들렸다. 가방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꺼내들었더니, 체크할 메시지가 10통 가까이 와있었다. 대부분 지훈이었다.
- 야 너 출근 안 해?
- 어디 아파?
- 반차 냈어? 천하의 최우진이?
- 언제 오냐?
- 점심 먹고 와?
- 뭐 좀 사다줄까?
답이 없으면 문자를 안 할 만도 한데 지훈은 이상한 곳에서 끈질긴 면이 있었다.
강지훈은 우진의 얼마 없는 지인 중에 가장 오지랖이 넓었다. 그 부분이 우진은 늘 불편했다.
이 정도 상대하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지, 싶은 부분에도 지훈은 예상을 매번 비켜가곤 했다. 입사했을 때부터 지훈은 유난히 우진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동갑에 동성이라 그런 듯했다.
지훈은 알아채기 힘든 것들을 눈치채고 먼저 챙겨주는 편이었다. 문제는 우진이 그런 면들을 거북해한다는 점이었다.
거절도 여러 번 했지만 바뀌지는 않았다. 다행이라면 지훈은 퇴근 시간 이후에는 일절 연락하지 않는다는 점 정도였다.
따랑.
가방에서 사온 생수를 꺼내며 뚜껑을 따다가 메시지 알림음을 들었다. 아직 점심시간이 끝나려면 15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사실 밥을 안 먹은 터라 편의점에서 사온 샌드위치를 꺼내려는데, 알림음이 다시 울렸다.
지훈이겠지, 하는 생각에 우진은 샌드위치 포장을 풀면서 문서함과 메일함을 먼저 열었다.
“최우진 대리님”
나지막이 들리는 목소리에 돌아보려는데, 먼저 휘익, 돌아가는 의자가 있었다. 의자가 뱅그르르 돌아가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 어지러워하자, 쿡,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반차는 제가 내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의자를 두 손으로 돌려놓고선 허리를 굽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은 가장 궁금하면서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김신이었다.
“잘 잤어요?”
순간 화악 하고 붉어지는 얼굴 때문에 우진은 손으로 자신의 턱 아래를 가렸다.
그러자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있던 김신이 웃으며 굽혔던 허리를 천천히 폈다.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자, 김신은 들고 있던 종이백을 우진의 책상에 털썩 올려놓았다.
“메시지 확인하세요. 좋은 하루 보내시고요.”
혹시라도 화가 난 건가 싶어 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뒤 캐비닛에 기대어 웃고 있는 김신이 보였다.
“갔을까 봐 놀라긴.”
우진은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먹으면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는 반면, 목덜미 아래로는 불긋해져서 심장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메시지 확인 안 해요?”
눈썹을 휘며 웃는 김신을 보고 우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와이셔츠도 깨끗했고, 소매를 단정하게 접어올린 옷매무새도 평소와 같았다. 갑자기 부끄러워진 우진은 시선을 내리고선 메시지 창을 열었다. 두 개의 메시지는 전부 김신에게서 온 것이었다.
- 최 대리님, 오고 계시죠?
- 죽 샀어요. 커피도 같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알람은 10분 단위로 끊어져 울리고 있었다.
10시 반. 평소보다 네 시간 가까이 늦게 일어난 건 처음이었다. 눈을 깜박이고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덮어보았다.
꿈이 아니었다. 자신의 집, 자신의 침대. 이불을 얌전히 덮고 잠들었지만, 수트는 그대로 입은 채였다.
재킷은 현관 앞에 구겨져 떨어져 있었다. 손목이 무겁다 했더니 시계도 그대로 찬 상태였다. 반쯤 일어나 앉으니 천장이 비잉 하고 돌았다.
목이 말라서 물을 찾았는데, 생수병 하나가 침대 옆 협탁에 말끔하게 놓여 있었다. 아래에는 물이 번진 듯한 메모가 하나 남아 있었다.
- 기안문은 제가 올려놓을게요. 잘 자요.
글씨도, 사람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화려하고, 거침이 없었다.
“집에 들어가시면서, 내일 아무래도 반차는 내야할 것 같다, 라고 하시더라고요.”
“….”
“죽은 냄새가 거의 안 나는 잣죽으로 부탁했어요. 견과류 알레르기 없으시죠? 어제 아몬드도 잘 드셨으니까.”
사무실에서 드셔도 될 거예요. 라고 말하며 김신은 접었던 몸을 천천히 폈다. 돌아서는 어깨가 넓었는데, 우진은 그 순간 그의 목덜미에서 나는 체향 같은 걸 느꼈다.
기억이었다.
온몸을 휘감는 듯한 체향. 사무실이 북적거리기 시작했지만 우진은 그의 등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단편적으로 뇌리에 꽂혀드는 기억들의 파편이 우진의 발끝에서부터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저 목덜미에….
그러니까, 내가, 김신의 목덜미….
“꿈을 꿔.”
“…네?”
“너, 내 꿈에 나와.”
끊어지는 호흡 같은 것들이 있었다. 기억들은 순간적으로 흐려졌다가 분명해지길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흔들리는 택시 안에서 창문에 비친 김신의 얼굴 같은 것들이었다. 색색으로 빛나는 도로의 불빛이 선처럼 연결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은 김신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목덜미에서 향기가 났다. 풀 냄새, 아니 물 냄새 같기도 해서 코를 더 파묻자, 목에 선 핏줄이 투둑투둑하고 뛰었다.
“간지러워.”
그렇게 말하며 김신은 우진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숨을 몰아쉬자, 달콤한 과일 냄새 같은 것들이 났다. 술에 취해 눈이 감겨 있는 우진을 내려다보는 김신의 시선이 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기억이 또 끊겼다.
“최우진.”
“….”
“우진 대리님.”
“….”
“비밀번호 말해줘요.”
그리고 끝이었다.
***
김신은 우진의 입속으로 넘어가는 술들이 신기했다. 주량이 어떻게 되냐고 물었을 때, 우진은 잘 모른다고 답했었다.
술잔을 두 손가락으로 감아 마시는데 그걸 보고 있자니 배 속이 간지러웠다. 술이 넘어갈 때마다 옅은 색의 머리카락이 감긴 하얀 목덜미가 보였다. 입술이 위로 동그랗게 당겨졌다. 갈색 눈동자가 두세 번 닫혔다. 속눈썹이 길어 음영이 졌다.
…야하게 생겼네.
순간적으로 위험한 기분이 되었다.
“잘 드시는 것 같은데요.”
“그런가.”
말을 할 때 툭툭, 끊어지는 느낌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우진에게만큼은 잘 어울렸다.
우진은 술을 마시고 김신의 눈을 바로 쳐다보곤 했다. 표정이 참 없는 사람인데, 김신에게는 그 시선 하나하나가 얼굴 표정 같아서 다채로웠고, 동시에 아슬아슬했다.
“술 많이 마셔본 적 없어.”“아, 네.”
다섯 잔 정도 마셨나. 세 잔부터 말이 좀 짧아졌다.
그게 생각보다 귀여워 김신은 우진이 시선을 내릴 때 몇 번정도 헛기침을 하는 척 하며 웃었다. 밝은 톤의 그레이 수트는 마른 몸에도 피트될 만큼 선이 가늘었는데, 첫 잔을 마셨을 때는 재킷 버튼을 한손으로 탁, 하고 풀었다.
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아니었던 것 같았으나 워낙 손가락부터 허리, 다리 선까지 가는 편이라 이상하게 눈이 가게 만들었다.
지금도 두 번째 손가락으로 눈 아래를 문지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우진의 눈 아래가 붉어졌다.
하얗고, 빨갛고, 눈을 못 떼겠다.
“아몬드 드실래요?”
“…응.”
손을 뻗어 아몬드 그릇을 자신의 앞으로 당기는 모습이 영락없는 고양이 같았다. 지난번 식당에서도 그랬지. 식당에서도 음식을 받아놓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김신은 손가락으로 멀리 있는 아몬드 그릇에 손을 뻗어, 한두 개를 집었다.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으로 우진의 손에 넘겨주려는데 우진이 앞으로 몸을 숙여 쥐고 있던 김신의 손가락 끝에 입을 가져가댔다.
“….”
오드득, 하고 아몬드 씹히는 소리가 났다.
“허….”
분명, 이빨이 손톱에 닿았다. 빠져나갈 때 느껴졌던 매끈한 입술의 단면이 약간 젖어 있었다. 김신은 어이가 없었다.
그사이 우진은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이제는 자작까지. 김신이 술병을 빼앗아 들자, 또 가만히 있었다.
“마셔도 돼?”
눈을 비스듬히 아래로 하고 시선을 맞추며 우진이 묻는데, 이상하게 아랫배가 꿀렁, 했다.
우진은 술을 마시면 목소리가 약간 쉬는 편이었다.
갑자기 김신은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내가 이 사람을 꼬시려 했던가, 아니면 최우진이 나를 꼬시려는 건가.
복잡한 마음에 술을 털어 넣었는데, 그걸 가만히 보고 있던 우진이 손을 뻗어 김신의 눈썹 뼈를 만졌다.
“이번엔 또 뭡니까?”
놀란 김신이 뒤로 물러나자, 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최우진은 김신을 꼬시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확실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럴 리가 없었다.
와중에 얼굴은 순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기 상처, 없었는데.”
뭐라는 거야?
“그리고, 이 뺨에 있는 상처도.”
…뭐냐. 최우진.
“무슨 말이에요?”
물론 눈썹에 있는 상처는 군대에 갔을 때 생긴 거였고, 뺨에 있는 건 대학 때 난장으로 놀다 술병에 그였을 뿐이지만, 김신은 기분이 이상했다. 설마 나를 아는 건가.
“저 회사에서 처음 본 거 아니었어요?”
“아니야.”
처음으로 똑 부러지는 대답을 했다. 최우진이.
“꿈을 꿔.”“…네?”
“너, 내 꿈에 나와.”
뭐? 꿈?
“궁금해해잖아. 어디서 본 적 있는 얼굴 아니냐고.”
“….”
“꿈에서 봤어.”
나른한 얼굴, 갈색 눈동자.
김신은 우진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걸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긴장감이 도는 얼굴이었다. 아니, 우진을 바라보는 김신이 긴장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몰랐다.
우진은 손끝으로 김신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너, 내 꿈에서 나온 맞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확실히 취한 듯했다.
그때 더워, 라고 말하던 최우진이 넥타이를 흔들어 풀었다. 지금 보니 목덜미 아래가 울긋불긋했다. 얼굴은 아직 하얘서 몰랐는데, 목 아래로는 전부 분홍빛이었다.
‘취했네. 만취.’
김신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주정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생각보다 위험한 인간이었다.
김신은 그제야 숨을 내쉬며 우진을 쳐다보았다. 긴장이 탁 풀렸다.
“대리님, 집에 갈까요?”
“…응.”
꿈이라니, 그것도 황당한데 가만히 앉아 응, 이라는 대답은 얌전해서, 김신은 또 피식 웃었다.
“택시 부를게요. 데려다 드리죠.”
“응.”
최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일어났다. 휘청거리는 것 같아 김신이 다가가자, 아무렇지 않게 우진은 김신의 손목을 잡았다.
‘술 먹으면 변하는 타입이구나. 그렇게 날을 세우더니.’
우진은 아무렇지 않게 김신의 얼굴을 보고 손목을 붙들었다. 김신이 모르는 척 허리를 감아 안았더니, 몸을 더 기대어왔다.
몸이 닿자, 김신은 더 확실하게 알게 된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붉어진 우진의 목덜미를 쓸자, 으응, 하고 간지러워했다.
이건 욕정이 맞다.
그렇게 생각하자 김신의 몸 전체가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