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 주임과 최 대리-5화 (5/60)

5화. 도발의 원칙

피곤한가.

모니터 스크린이 흐릿하게 보였다가 다시 선명해지길 반복했다.

가을이 다가오는 시기는 늘 우진에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로감을 안겼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추워지는 날씨를 견디는 게 어렵기도 했고, 이 시기에 유난히 잠 못 이루는 탓도 있었다.

늦어지는 퇴근 시간에 엑셀 숫자가 두세 개 겹쳐 보이기 시작하자 두통이 이는 듯했다. 그때 책상 앞 네임 태그를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톡톡, 하고 두드렸다. 고개를 드니 익숙한 얼굴이 모니터 불빛에 비쳤다.

“안 가냐, 집에?”

강지훈이었다.

“너 운전도 안 하잖아. 차 끊기면 어쩌려고.”

지훈의 말에 우진은 그제야 컴퓨터 작업 표시줄에 나와 있는 시간을 체크했다. 밤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지훈을 올려다보니,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던 앞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와이셔츠의 소매가 엉망으로 구겨져 있는 걸 보니, 아마 야근 중이었던 모양이다.

지훈이 사무실에 있는지도 몰랐던 우진은 팔을 들어 올려 길게 스트레칭하며 일어섰다. 끼고 있던 안경을 벗고 눈 아래를 문지르자, 지훈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너 지난달보다 더 마른 것 같다.”

“신경 꺼.”

“그 대답도 여러 번 들었던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우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지훈의 손길을 피하려는데, 뒤에서 딸깍, 하고 스위치 누르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홍보팀 사무실의 불이 꺼졌다. 오픈되어 있는 정책실과는 달리, 비서실 옆에 따로 팀룸을 두고 있는 홍보팀은 규모가 작은 탓에 늘 일이 많았다. 지훈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기도 야근이었나 보네.”

“….”

“슬기 주임이 너 기다린 거 아냐?”

“나 먼저 간다.”

농담이야, 임마, 하고 웃고 있는 지훈을 뒤로 하고 우진은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뒤에서 지훈이 급하게 재킷을 챙기며 소리를 질렀다.

“야, 같이 가!”

우진은 사무실을 빠져나와 말없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빨간색으로 떨어지는 숫자를 보며 우진은 머릿속으로 하루를 정리했다.

배가 고픈가. 점심은 혼자 편의점에서 샌드위치 같은 걸 먹었던 걸로 기억했다. 저녁을 분명 안 먹었던 거 같은데. 우진은 식욕이 없는 데다, 늘 배고픈 걸 자각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팅,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걸 보며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가쁜 숨소리 같은 게 들렸다. 어차피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갈 거면서 굳이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려는 지훈이 유난스러워 우진이 한숨을 쉬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설 때였다.

후욱, 하고 끼치는 체향이 우진의 어깨를 감싸 안는 순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갑자기 닫히며 전광판의 숫자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후우, 안녕하세요?, 최우진 대리님.”

감싸 안은 어깨에서 손을 내려놓고 허리에 손을 짚으며 숨을 몰아쉬는 사람은 지훈이 아닌, 김신이었다.

“오늘 얼굴 처음 보는 것 같네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강지훈의 목소리가 들린 듯도 했는데.

김신의 긴 손가락은 열림 버튼이 아닌 닫힘 버튼을 누르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뜻밖의 등장에 놀란 우진이 김신의 뒤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분명 뒤에 강지훈이….

“아, 뒤에 강 대리님 계셨어요?”

빠르게 떨어지는 빨간색 숫자를 보며 김신은 화사하게 웃었다.

그 미소는 지훈이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어오고 있는 걸 목도한 자의 것이 분명했다. 우진이 숨을 몰아쉬는 김신의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자, 김신은 아무렇지 않은 듯 두 번째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마를 긁적거렸다.

“이제 집에 가시나 봐요?”

“….”

우진이 대답을 하지 않자, 김신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어차피 답을 원하는 얼굴은 아니었던 거 같아 우진은 옆에 서 있는 김신의 얼굴을 그냥 빤히 보았다. 시선을 느끼는 듯한 얼굴이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짙은 얼굴선이 두드러져 긴장감이 들었다. 한참을 쳐다보고 있자, 김신이 갑자기 한쪽 손으로 자신의 턱 아래를 가렸다. 팅, 하고 금방 떨어진 1층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최우진 대리님”

“…네?”

엘리베이터 밖으로 빠져나온 그림자마저도 화사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였다. 뒤에서 걸음을 옮기던 김신이 우진을 불렀다. 타각, 하고 구두굽 소리가 어두운 복도를 울렸다.

우진이 시선을 돌려 김신을 바라보자, 그가 좀 어색한 얼굴로 가만히 우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뺨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하던 그가, 끝내 입을 열었다.

“뭐 많이 늦긴 했지만….”

“….”

“저 배고프거든요.”

어딘가가 붉어진 얼굴이 망설임을 말하고 있었다.

김신은 우진과 시선을 맞추어왔다.

우진이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어딘가 긴장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밥 먹읍시다. 저랑.”

늘, 배가 고픈지, 목이 마른지 잘 몰랐다. 아마 알았더라도 말하지 못했던 날들이 모여 우진을 이렇게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무언가를 요구하고, 혹은 욕구하는 것 따위 아주 오래전 잊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걸, 우진은 이제야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맞닿은 시선이 뜨끈했다.

꿈에서는 여러 번 자신과 마주했던 그 시선을 뿌리치는 대신 우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고팠다. 많이 고파서 우진은 고개를 여러 번 끄덕여야만 했다.

***

김신은 자신의 앞에 얌전히 앉아 있는 우진이 국밥을 먹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몇 주간 점심을 먹는 걸 스치듯 제법 봤지만, 우진은 우울한 고양이처럼 먹을 것을 앞에 두고 가만히 있기만 했었다. 그런 우진이 말없이 숟가락을 놀려 국밥을 야무지게 떠먹고 있었다.

그게 신기했다. 밥을 먹으니 흰 얼굴에 제법 홍조가 도는 것도 같았다. 그게 또 뭐라고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진짜 신기한 사람이었다.

“안 드시고 뭐하세요?”

“아.”

김신은 숟가락을 들어 올리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그릇을 자신의 앞으로 당겼다.

사실 김신은 6시 이후에 음식을 잘 먹지 않는 편이었다. 운동을 오래했기 때문에 갑자기 중단했을 때 체중이 느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수영 이외의 운동은 신물이 났다. 거기다 요즘엔 좋아하던 섹스도 안 한지 오래되어서… 아, 섹스.

“더우세요?”

“네?”

“얼굴이 빨개졌는데.”

미친.

“아 좀 덥네요.”

김신은 자신이 왜 우진을 앞에 두고 섹스 생각을 했고, 섹스 생각을 하면서 얼굴을 붉힌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시선을 돌렸다.

최우진을 섹스 상대자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연스럽게 이 사람에 대해 생각하면 기묘한 기분이 되는 건 확실히 성적 긴장감 탓이었다. 그게 이상했다.

“아직 여름이 안 지나갔나 봐요.”

아무렇지 않은 듯 조근조근 말하는 최우진은 확실히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색소가 옅은 편이었다. 저 하얗게 겉도는 얼굴을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관찰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진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김신을 쳐다보긴 했다. 그게 뭐라고 기분이 묘하고, 평소보다 들뜨게 되는 면이 있었다.

강지훈이 뛰어오는 걸 알고서 엘리베이터 문을 닫은 건 전부 그것 때문이었다.

야근을 하고 나오면서 우진의 뒤통수를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우진은 늘, 사람들을 귀찮아했다.

김신만 제외하고.

그게 사람을 들뜨게 했다.

…더 바라게 했다.

“어차피 지하철은 끊긴 거 같은데.”

“….”

“집은 어디시죠?”

“신도림요.”

알아서 뭐하게, 라는 눈빛을 보낼 줄 알았더니, 우진은 김신을 보면서 순순히 대답했다. 이상하게 목이 타는 것 같아 김신이 물 컵을 앞으로 당겼더니 우진이 가만히 손을 뻗어 물병에 있는 물을 따라주었다.

손가락이 희고 길었다. 의식을 하다 보니, 이상하게 몸 언저리가 근질거릴 정도로 심장이 쿵쿵하고 뛰었다.

분명 김신은 잠자리나 상대에 있어서 담백한 타입이었다. 연애도 충분히 했고, 이전까지 분명 절반 정도는 이성애자라는 생각이 있었다.

근데 이상하게, 욕정 비슷한 것이 들었다. 이 사람 앞에서는.

“그럼, 최우진 대리님.”

“…네?”

이것도 충동이라면 충동이었다. 술을 잘 하지만 숙취가 심한 편이라 김신은 반드시 마셔야 할 자리가 아니면 피하는 편이었다.

출근한 지 한 달이 갓 넘었는데, 회식도 아닌 자리에서 회사 사람과 술 마시는 건 에너지 낭비다.

내일도 분명 9시에 출근을 해야 하고, 오전에는 팀 회의도 있었다.

분명 이건 김신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또,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냥 밥만 먹고 헤어지자고 하는 게 싫었다.

말갛게 쳐다보는 우진의 눈을 쳐다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말이 먼저 나와버린 건 정말로 충동이었다.

“저랑 술 한잔 하실래요?”

너무 뻔한 패턴이라 김신은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했다. 벌써 자정이 다 되어가는 데다, 우진은 요즘 따라 유난히 피곤한 기색이었다.

거절당할 요청은 하지 않는다는 게 김신의 신조였는데. 거기다 지난 번 회식 때에 우진은 술을 받고선 마시지 않았다.

“….”

그때였다. 우진이 앞에 놓인 물 컵을 손가락으로 한 번 문지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죠.”

메뉴판을 다시 들춰보는 우진의 얼굴을 보고 있자 이상하게 열이 올라 김신은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까, 최우진이 지금, 나랑 술을 마시겠다고 한 건가.

“진짜 마실 겁니까?”

“마시자고 하셨잖아요.”

“….”

“1시에는 일어나죠.”

김신은 자신이 우진에게 얼마나 더 기대할 수 있을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분명, 김신은 우진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얼마만큼의 선을 넘을지 몰라 두려워진 김신은 입을 열었다.

“최우진 대리님.”

“왜요?”흰 얼굴. 긴 목덜미. 어딘가 울긋불긋한 입술.

언제인가 마주친 적 있었던 건 아닐까, 고민하게 만드는 뚜렷한 시선.

그와 마주하면 배경이 탁해지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건 아마도 자신이 이 사람과 선명하게 부딪혔기 때문일 거라고 김신은 생각했다.

모든 것이 옅은 사람에게서 가장 강렬한 감정의 색을 발견한 건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제가 하자고 하는 것들, 거절할 생각은 있으신 거예요?”

“….”

그렇게 물으면서 김신은 확신했다.

최우진도 자신에게 분명 가장 강렬한 감정의 색을 발견했을 것이다.

선명하게 부딪힌 감정의 선들이 만들어낸 공기의 파장에서, 김신은 조그맣게 웃었다. 붉어진 저 목덜미를 언젠간, 손끝으로 더듬어보게 될 것 같은 예감이 강렬하게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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