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와 청사가 예그리나를 찾아 하계로 내려간 지 어언 이렛날. 예그리나를 찾긴 했는지, 소식 한 통 보내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함흥차사가 되었다.
조아반은 매일 아침 예그리나와 고도, 청사가 떨어진 숲속 폭포를 찾아갔었다. 그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기별이라도 있을지를 기다렸건만. 닷새가 지나갈 때까지 깜깜무소식이자 괘씸함에 더 이상 찾으러 나오지도 않았다.
그 연약하고 어린 첫째 손주에게 별고가 있으면 어찌할지. 하계를 뒤집어야 하나, 조용히 상을 치러야 하나, 온갖 잡생각으로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흐트러진 심신의 안정을 찾고자 조아반은 하루 종일 바둑판 앞에 앉아 있었다. 바둑돌을 보며 삿된 마음을 정리해 보지만, 쉽진 않았다.
멍한 눈으로 바둑돌을 만지작거렸다. 잘그락 잘그락 소리가 울려도 손을 멈추지 못했다. 도통 집중할 수가 없던 것이다. 짧게 한숨을 내쉰 조아반은 휘젓던 흑돌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정수리 위로만 쏟아지던 햇볕이 조아반의 반듯한 이마와 콧잔등에도 맺혔다. 문을 위로 올려 처마 밑에 걸어 놓았기에 대청에 반사된 햇살이 푸른 눈동자를 말간 계곡처럼 보이게도 했다. 조아반이 입을 열었다.
“나슬이냐.”
소리 없이 들어오던 청년이 그 말에 멈칫했다. 그를 따르는 식솔들마저 문밖에 세워두어서 기척을 느끼지 못해야 함이 정상이건만. 역시 선대 천룡 중 상제가 가장 아끼던 소경이자, 은퇴한 후에도 대국 상대로 매일 천궁에 불러들이는 조아반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 문안드립니다, 조아반 가주.”
소경의 자리를 청사가 인계하여 일하는 동안, 집안의 실질적인 어르신이 된 조아반이었다. 그는 깍듯한 예의를 차려서 인사하는 ‘나슬’에게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청년이라고 하기엔 아직 덜 자란 소년미가 물씬 풍겼지만, 천계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머리카락과 눈 색상 때문에 그를 덜 자란 아이보다는 하나의 완성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나슬은 금발의 소유자였다. 햇볕을 녹여 한 올 한 올 실처럼 풀어 만든 것처럼 어깨 밑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은 출렁이는 금빛의 물살과도 같았다. 두 눈 역시 태양을 머금은 금색으로 빛이 났는데 햇살이 쫓아다니며 그의 눈 속을 파고드는 것 같은 인상이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좋은 편이었다.
고도와 청사의 아이였고, 둘 중 청사를 많이 닮은 편이다. 예그리나가 고도를 닮아 순한 눈망울에 귀엽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라면 나슬은 젊은 청사를 닮아 호기롭고 패기가 넘치고 제 외모를 믿어 여식들을 섣부르게 건드리고 다니는 방탕한 면마저 있었다. 고도라는 반려를 맞이하면서 청사가 의젓함을 갖추고 상제 옆을 보좌할 수 있게 되었지만, 나슬이 그 정도로 자라려면 앞으로 몇백 년은 족히 더 필요할 듯싶었다.
워낙 태양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라는 존재이니 저 기개가 꺾일까 싶기도 하다. 조아반의 둘째 아들이 은하수에 몸을 묻은 것처럼, 나슬이 태양길을 따라 몸을 묻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그 운명이 조아반의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젊음의 객기가 한 꺼풀 벗겨지면 보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그래, 여긴 어인 일이느냐.”
나슬은 마른침을 삼키더니 정중하게 입을 뗐다.
“소경 한무와 지상차사 고도께서 돌아오지 않아서 말씀 좀 여쭙고자 왔습니다.”
“네 아비들에 대해 물을 게 무엇이 있다고.”
“하계 시간으로 며칠이 지난 듯한데 언제 오려는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조아반은 의외의 상황에 눈만 깜빡였다.
예그리나는 용성보단 인간성을 더 갖춘 개체라서 저를 낳아 길러준 두 아비에게 각별한 애정을 지닌 편이다. 하나, 나슬은 인간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용 그 자체였다. 그는 한무를 상위 용으로 생각하여 대하기 어려워했고, 고도는 자신을 돌보는 존재로서 예를 갖출 뿐이었다. 예그리나와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던 이가 별안간 두 아비를 찾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예그리나를 찾으면 올라오겠지. 나도 정확한 일수는 가늠할 수 없단다.”
부디 예그리나를 무사히 찾아 올라오면 좋으련만.
근심을 애써 숨긴 조아반의 대답을 듣고 나슬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습니까. 말씀 감사합니다.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조아반은 눈치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살아온 경험에 반추하여 어린 용의 생각을 파악했다.
“혹시 한무와 고도가 아니라 예그리나 쪽이 궁금해서 그러느냐?”
물러나려던 나슬이 멈칫한다. 토양이 좋은 용인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 땅에서 자라날 새싹이 꽃이 될지 나무가 될지 아직 알지 못하는 한참 어린 용을 조아반이 꿰뚫어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자란 형이라고 미워할 땐 언제고, 막상 하계로 떨어졌다 하니 걱정은 되나 보구나.”
침착하고 차분하던 나슬이 그 말에 다급히 반응했다.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가솔들이 말해주지 않는다고 어찌 내가 모를쏘냐. 네가 예그리나를 툭툭 건들면서 괴롭히던 걸 알고 있다.”
“그, 그것이 아니오라.”
“현인하지 못한다고 형을 모자란 것 취급하더니, 왜, 아예 하계에 떨어져서 산짐승 밥이라도 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으냐?”
조아반의 거침없는 힐난에 나슬은 입을 다물었다. 변명을 주절주절 늘어놓지 않는 성격인 것은 그나마 조아반의 마음에 들은 터였다. 놓았던 흑돌을 바둑판 위에 ‘딱’ 소리를 내어 내려놓으니 그제야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이 벌어진다.
“맨몸으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것이 불안해서 그랬습니다. 형을 무시한 게 아니라, 걱정이 되어서 그랬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나어린 짓으로 심통을 부린 것 같았나 봅니다.”
용은 감정 표현이 어색할 수밖에 없지.
조아반 자신도 여태 감정이란 것을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살다보니 눈치가 생기고 사회성이 길러져서 남들에게 해도 되는 말, 해선 안 되는 말을 구분할 수 있게 된 것뿐이다. 그래도 제 형이 싫어서 밀어낸 것이 아니란 것만큼은 안심했다. 우애가 좋은 걸 바라지는 않아도,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 불화가 생기진 않겠구나 싶었다.
“용마다 성격이나 재능은 다른 법이다. 예그리나는 성장이 더디지만, 제 아비 고도를 닮아서 그런지 이해력이 좋고, 호기심이 많아 학습이 빠르지. 머리 하나는 비상해서 무언가 하나를 알려주면 실수가 사라지고, 좋은 점을 응용해서 더 나은 결과물을 보여준다. 그러니 네가 형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지 않으면 좋겠구나. 벌써부터 형을 판단하고 네 기준대로 대해야 쓰겠느냐.”
나무라는 조아반에게 나슬이 고개를 숙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한무보단 좀 의젓하긴 한 것 같다. 저 나이 때의 한무였다면 “노망난 노친네 같으니라고. 못 잡아먹어 안달이지. 잔소리로 귀에 딱지가 앉겠어.”하고 깝죽거렸을 텐데. 바둑돌들을 손가락 사이로 굴려 차르륵, 소리를 낼 때 바깥에서 부산한 소리가 들렸다. 웅성거리는 소란 사이로 식솔들이 저희끼리 하는 얘기가 들려왔다.
“소경과 차사께서 돌아오셨대!”
“아기씨도 함께 오셨다더라!”
고도, 청사, 예그리나가 왔다고?
조아반과 나슬이 동시에 뛰쳐나갔다. 활짝 열린 대문 안으로 청사와 고도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안심한 조아반이 외쳤다.
“예그리나는 무사하느…….”
조아반은 입을 벌린 채 자리에 멈추어 섰다. 해괴하기 짝이 없는 청사와 고도를 보고 눈가가 일그러졌다. 나슬 역시 제 아비들의 모습에 웃지도 못한다. 굳어 있는 조아반과 나슬을 고도가 먼저 발견했다.
“아, 춘부장, 나슬아.”
고도는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밀어 올렸다. 떠날 때의 검은 두루마기 차림은 어디 갔는지 열대야자 이파리가 그려진 반팔 셔츠에 하얀 반바지를 입어 팔과 다리를 모두 드러냈다. 맨발은 열 발가락이 다 드러나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는데 어깨에는 홍학으로 추정되는 튜브가, 반대편 어깨에는 마당에 꽂아 둘 파라솔을 짊어 매고 있었다. 그 특이한 차림새에 눈이 현혹되어 고도의 결정적인 변화마저 한 번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도의 눈은 금색이었다. 그의 몸에서 옅게 맡아지던 인간의 냄새도 더 이상 나지 않았다. 그는 천룡의 기운이 풍겼다. 인간의 태생으로 천룡의 힘이라니. 그 힘의 근원이 옆에 있는 한무라는 걸 쉽게 유추할 수 있었으나, 역시나 거기까지 생각이 뻗어나갈 새도 없었다.
“뭘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들어가시죠, 햇살도 따가운데.”
너스레를 떠는 한무도 괴이한 차림새는 마찬가지였다. 분홍색 꽃무늬 셔츠에 쪽빛으로 물든 반바지와 슬리퍼를 신고 손에는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그 컵 안에서 풍기는 달콤한 커피 향기와 양손 가득 챙겨온 볶은 커피 콩에서 풍기는 향기가 같았다.
“……둘 다 그 꼴이 무엇이냐?”
일에 찌들어서 눈 밑이 거뭇했던 청사가 맑고 환해진 얼굴로 행복하게 대답했다.
“하계 관광하고 왔습니다.”
“그게 요즘 하계에서 입는 복식이란 말이냐?”
“아버지랑 나슬 옷도 사왔으니 나중에 한번 입어보시죠. 편하더라고요. 그리고 이건 커피. 이거 물 내려 마시면 진짜 향이 좋습니다. 정신도 맑아지는 성분이 있다던데. 그게 뭐랬더라, 고도야?”
“카페인.”
“맞다. 카페인이 들어 있어서 마시고 나니 하루 종일 기분 좋고 힘이 나더군요. 일 년치를 한꺼번에 사오긴 했습니다만, 또 떨어지면 하계에서 구해오면 됩니다.”
“미호가 한 포대 사둔다 하니 언제든 내려가면 되지 않겠느냐.”
“그렇지. 아, 그라인더는 잘 챙겼어?”
“그럼, 커피 여과지까지 모두 챙겼노라.”
청사는 커피 포대를 조아반 품에 안겨주었다. 조아반은 구수하게 볶은 콩 냄새가 나는 포대를 엉겁결에 안은 채 청사를 바라봤다. 청사는 바지 주머니에서 네모나고 반짝이는 금속체도 보여주었다.
“핸드폰이라고 합니다. 하늘에 위성을 띄워 놓고 통신망을 구축했더라고요. 그걸 기반으로 놀라운 인프라를 형성했던데, 입이 쩍 벌어지는 모습들을 모두 동영상으로 찍어왔습니다. 이걸 상제께도 보여드리고 천계도 변화를 모색해봐야겠습니다. 저승은 이미 하계 사정에 발맞춰서 변화를 했더라고요.”
황망한 얼굴을 한 조아반이 얼른 대화 궤도를 바꿨다.
“예그리나는 어디 있느냐?”
그 말에 고도와 청사가 서로를 바라본다. 짓궂은 장난을 준비하는 아이들처럼 두 눈이 초롱초롱했다.
“여기 있지요.”
고도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파라솔을 팡, 소리 나게 폈다. 까만 용이 파라솔 천막 안쪽, 나무살을 칭칭 감고 있었다.
“아가!”
조아반이 양팔을 활짝 벌리며 끌어안으려 하니, 그 주책에 기겁한 예그리나가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고도 뒤로 도망친 예그리나는 하계로 떨어질 때와 다를 바 없이 소심하고 겁이 많은 아기 용이었다. 조아반 뒤쪽에 서 있던 나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를 고도만이 눈치챘다. 나슬이 표현력이 서툴러서 그렇지, 알게 모르게 제 형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를 고도도 잘 알고 있는 바였다. 하여, 기쁘고도 즐거운 일을 위해 나슬을 가까이 불렀다.
“나슬, 이리와 보지 않겠느냐.”
고도의 부름에 나슬이 긴 다리로 성큼, 다가왔다. 고도의 몸에서 풍기는 청사의 기운에 멈칫하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나슬, 아버님의 명을 받잡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허어, 뭘 시키려고 부른 게 아니니 일어나 보아라.”
고도는 무인 같은 자세로 일어나는 나슬을 두 손으로 잡아당겼다.
“네가 그렇게 구박하던 형의 현인을 가까이서 보라 부른 것이니라.”
총기 가득한 나슬도 그 순간엔 고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언제나 굳게 다물어져 있던 입술이 바보처럼 벌어졌다.
“……예?”
“예그리나, 한번 자신 있게 보여주려무나.”
고도 뒤에서 쭈뼛거리던 예그리나가 그 커다란 눈망울로 나슬을 바라봤다. 청사를 닮은 외모이나, 분위기는 제 아비보다 훨씬 차갑고 묵직해서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동생이었다. 모자란 형 때문에 알게 모르게 한숨도 푹 내쉬던 모습도 보이지 않았나. 서러운 지난날이 떠오른 예그리나는 조막만 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삐이!”
허공에서 한 바퀴를 빙글 돌자 새하얀 빛이 예그리나를 감쌌다. 빛은 점차 커지더니 땅 아래 가라앉았다. 부푼 빛 속에서 사람 손이 나온다. 가까이 서 있던 나슬이 놀라서 금색 눈을 커다랗게 뜰 만큼 예그리나의 현인화 모습은 생각도 못한 장면이었다.
부푼 빛 무리가 펑, 터진다. 그 안에서 한 청년이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인간들 나이로 갓 스물이 되었을 법한 외모였다. 키는 다 자란 듯하지만 골격도 다부지지 않고, 이목구비 선도 얇았다. 안 그래도 분위기가 여리고 조심스러워서 외모보다 풍기는 분위기가 더 어려 보이기도 했다. 큰 눈을 깜빡이면서 조심스럽게 나슬을 올려다보는 두 눈은 놀랍게도 양쪽 색이 달랐다. 한쪽은 익히 알던 까만색이지만, 다른 한쪽은 새벽하늘이 번져가는 보랏빛이었다. 신비롭고도 몽환적인 그 눈동자는 우주 만물의 이치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세상의 진리가 저 두 눈이 아니면 어디에 숨을 수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나슬이 예그리나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손길에 깜짝 놀란 예그리나가 황급히 고도 뒤로 숨었다. 하와이안 셔츠 옷자락을 꼭 쥔 예그리나는 자신에게 몰린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했다. 얼굴이 빨갛게 익어서는 고개를 푹 숙인다. 긴 머리가 치렁치렁하니 얼굴을 반 이상 가렸는데, 그 모습이 볼품없어 보인 청사는 “쯧”하고 혀를 찼고, 고도는 “하하”하고 웃어 넘겼다. 조아반은 감격했으며 나슬의 표정은 오묘했다. 그토록 고대해온 예그리나의 현인화에 반응은 가지각색인 것이다.
고도는 그런 청년의 등을 떠밀었다.
“예그리나. 할아버지와 동생에게 인사해야지.”
소매 밑으로 살짝 보이는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면서 망설이다가 고도에게 배운 듯이 고개를 숙이고 정중하게 인사를 해 보였다.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앞으로 이런 소란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맑은 목소리였다. 새소리로 삐이, 삐, 울어댈 때와 똑 닮은 음색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선녀들이 꺼내어 연주하는 악기보다도 고운 목소리는 그의 미색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듯했다.
조아반은 허리를 숙여 예그리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성장이 더딘 개체답게 아직 가늘고 여리기만 한 예그리나를 귀한 보물 보듯 했다.
“예그리나.”
조아반의 관심에 목덜미까지 새빨개진 예그리나가 어렵사리 대답한다.
“예, 예, 가주님.”
“현인을 보여주는 기쁜 자리거늘, 무엇이 이리 부끄러우냐.”
“그, 그것이…… 가솔들까지 족히 백에 달하는 시선을 받고 있는지라…….”
“이런 관심은 즐겨야지. 네 동생은 으스대며 턱 끝을 까딱였단다.”
나슬은 움찔했다. 워낙 어린 나이에 현인해서 그땐 멋모르고 그랬던 것을. 항변하려다 “쯧”하고 혀만 찼다. 오늘은 자신이 아닌 예그리나가 주목받는 날이었으니 한차례 양보한 셈이다.
“네 눈은 아주 깊고 영험하구나. 상제가 좋아할 눈이야. 진리를 꿰뚫어보고, 만물의 이치에 통달하는 눈이거든.”
이렇게 칭찬이 쏟아진 적이 있던가. 언제나 한 수 모자란 취급을 받았거늘. 특히나 동생이 태어난 후로는 허구한 날 능력을 비교당해 우울감에 눈물을 짓지도 않았던가.
예그리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간지러운 기분에 손끝만 계속 만지작거렸다. 솔직하게 기뻐하지도 못하고 퍽 불안해했다. 고운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은 것을 어색해했다. 그 모습조차 조아반에겐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용 중에 이토록 부드럽고 위태로워 보이는 이가 있었던가. 다들 무식하게 자기 잘난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나 하지. 땅의 기운을 받아 태어난 덕분에 겸손함까지 갖춘 용이라니. 참으로 기이한 조화로다.
“대견하구나. 언제 이렇게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냐.”
손가락을 꿈지럭거리지만, 대답은 우물쭈물하는 기색 없이 또렷했다.
“하계에 떨어지고 이틀이 지난 후에 가능했습니다.”
“갑자기?”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던 예그리나가 슬쩍, 나슬을 돌아봤다. 나슬은 눈이 마주치고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예그리나는 그간 집안에서 잘난 동생과 몇 번 비교를 당했던 일이 떠올라서 풀이 죽고 말았다.
동생의 천성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예그리나를 괴롭힌 적도 없었다. 다만, 현인도 못하는 형을 짐짝 취급하면서 일부러 떼어놓고 밖으로 나가기는 했었다. 형제가 같이 해야 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예그리나와 함께 하기 싫어 일부러 일을 분담해 가져가서는 저 혼자 끝내놓고 칭찬을 독식하기도 했다. 자신을 기피하던 동생을 어찌 모를쏘냐.
잘난 동생 앞에서 인간의 모습을 보인 것을 뿌듯하게 말할 의욕이 생기지 않아 입을 다물고는 고도를 돌아봤다. 구원을 바라는 그 시선에 고도가 이제는 인정(人情) 사정 보지 않고 용의 방식대로 예그리나를 꾸짖었다.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어디 가 천룡의 자손이라 말하겠느냐. 생각을 말로 꺼내는 것을 연습하거라. 내 도움을 바라지 말고.”
예그리나는 더 이상 갓 태어난 사슴처럼 떨지 않았다. 주변 눈치를 살피는 대신 숨을 골랐다. 굽은 어깨를 당당하게 폈다. 아무리 연약해 보여도 용으로서의 기개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저는 땅의 기운을 많이 받은 용입니다. 그래서 천계에만 있는 동안엔 탈피를 하지 못했습니다. 하계에 내려가고 나서야 자극을 받아서 탈피가 가능해졌고 이렇게 현인 상태로도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그리나는 뒤돌았다. 고도와 청사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지금까지 제 할 일에 소홀하여 도움의 손길을 당연하게 바랐던 점을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앞으로 두 분을 따라 어엿한 한 마리의 용으로서 제 몫을 다하겠나이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고도와 고개를 주억거리는 청사였다.
“이래서 자식 농사를 짓는 거로구먼.”
청사의 뿌듯함에 고도가 웬일로 딴지를 걸지 않는다.
“잘 키운 용 한 마리 세상이 부럽지 않네.”
“하하, 누구 피를 이어받아 그렇겠어.”
“내 피.”
“고도야, 알을 품고 부화시킨 건 내 능력이다만.”
“그 알을 최초에 단전에서 만들어낸 건 내 능력이야. 특히 예그리나는 날 닮아 땅과 하늘의 지성을 한 몸에 품었는데, 누구 덕분이겠어.”
서로 잘났다고 티격태격하는 고도와 청사를 보며 예그리나 혼자만 말갛게 웃었다.
“하하, 두 분은 하계 다녀오고 나서 더 친해지신 것 같습니다.”
그 말대로였다. 청사와 고도는 누구의 방해도 없이 하계 문물을 실컷 누리며 애정을 더 키워왔다. 떨어져 있으면 그립고, 말하지 않으면 오해가 생기던 시절도 지났다. 이젠 그리워할 일을 애초에 만들지 않았고, 눈빛과 표정만 봐도 서로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둘의 평온한 사랑에 익숙해진 예그리나는 웃을 수 있었고, 용이라는 개체가 이런 식으로 사랑을 나누는 건 처음 보는 조아반과 나슬 그리고 식솔들만이 멀뚱멀뚱 바라보았지만 말이다.
“하계에서 생각해낸 꿍꿍이를 한번 이행해볼까?”
고도의 말에 청사가 남은 커피를 다 마시며 자신 있게 말한다.
“상제랑 한판 뜨러 가자, 내가 이길 거다!”
이게 무슨 기겁할 만한 소리인가. 조아반이 평소의 침착함을 잃은 얼굴로 다급히 물었다.
“천궁엘 그 꼴로 간단 말이냐?”
“안 될 건 없지요. 하계에서 보고 들은 신문물을 상제께 선물하려는 건데.”
“안 된다! 옷은 제대로 갖춰 입고 가!”
“커피 한 모금 드시면 반하실 겁니다. 일도 많으신데 피로도 덜어주는 하계의 명약이거든요. 그리고.”
말을 잠시 멈춘 청사가 옆에 선 고도를 바라봤다. 금색 눈으로 빛나고 있는 고도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느껴졌다. 서로 신호를 주고받은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고도의 생각과 의지를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주군이자 반려인 한무의 뜻대로 하소서.’
뭐, 용의 생명력까지 깎으면서 반려자를 곁에 두겠다는데 상제가 거품 물고 쓰러지지 않으면 다행이다만.
청사가 씨익 웃었다.
“이젠 내 절반의 목숨이 된 고도의 입궁 절차도 갖추고, 예그리나가 내 옆에서 일을 돕게 교육을 시켜야 하거든요. 나슬, 너도 하늘길을 지키는 무인들의 방식을 배워야겠으니 준비하거라.”
그 말에 조아반이 뒤늦게 눈치챘다.
“설마, 지금 고도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청사는 경악한 조아반을 내버려둔 채 예그리나와 나슬에게 손짓했다.
“천궁으로 간다.”
몸을 일으킨 예그리나의 등에서 커다란 날개가 펼쳐졌다. 옷을 찢고 펼쳐진 기다란 검은 피막은 천룡 가문의 부지를 모두 뒤덮을 정도로 크고 웅장했다. 모자란 형으로 여겼던 나슬의 두 눈에 경외심과 당혹스러움이 동시에 번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현인 상태에서 용의 성체로 돌아온 예그리나는 그 몸길이만 십 척이 넘었다.
검은 그림자처럼 기다란 몸으로 나슬을 내려다본다. 나슬 역시 본래 용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예그리나와 거의 동일한 덩치의 황금색 용은 날개 없이 하늘을 떠오를 수 있었다. 매끈한 예그리나의 표피와 달리, 나슬의 표피에는 견갑에 가까운 금색 비늘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햇살을 함뿍 머금은 비늘은 나슬이 긴 몸을 또아리 틀 때마다 사방으로 빛을 산란시킬 정도였다.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청사가 마지막으로 용의 본모습으로 화했다. 검은 예그리나와 금빛 나슬보다 열 배는 더 큰 용신이었다. 지켜보던 가솔들이 모두 자리에 엎드려 절하는 동안에 조아반은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을 가만히 지켜봤다.
은하수에 몸을 뉘어 하늘을 떠받치는 둘째 아들. 그리고 그 아들 밑에서 하늘 일을 돌보는 막내아들. 그 막내아들이 낳은 자식들은 지성과 인품을 지닌 이와 태양의 기개를 지닌 이였다. 이들이 하늘을 지키는 이상 상제의 태평성대는 지속될 것이다.
한 가지 변수가 있다면 하계의 변화겠거니. 청사가 선보인 하계 문물은 신기하고 이상하다 못해 삿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청사는 그 문물을 배척하긴커녕, 천계에서도 응용해서 써먹자고 할 만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절차와 예의를 중시하는 용족에게는 보기 드문 개방성과 포용의 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긍정적인 성향을 이끌어낸 이는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었다. 청사가 양 앞발로 소중히 감싸드는 고도가 바로 이 용들의 중심이지 않은가.
“춘부장, 저는 금관소경보좌와 함께 천궁에 입궐을 요청하려 합니다. 제 반려의 옆을 지키며, 상제를 모시려는 것이죠. 하계는 급변했고, 그 급변함에 저승은 맞추어 변화했습니다. 천계가 전통을 지키기엔 세상의 너무 많은 것들이 달라지고 있으니, 그 변화를 끊임없이 보고하는 역할로 지상차사인 제가 적격이지 않겠습니까. 하여, 이러한 준비와 소란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부디 너른 마음으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하와이안 셔츠에 반바지 차림새. 게다가 나슬의 비늘빛이 눈부셔서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는 고도가 파라솔을 일산(日傘) 삼아 절을 해봤자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천방지축 환영도사 고도는 천계에서도 그 본성을 잃지 않았다. 그에겐 근엄한 천룡 가문의 생활보다는 반려용과 자식 용들과 우당탕 얽혀서 살아가는 게 더 행복할 것이다. 이미 표정부터 달라지지 않았는가.
“그래.”
조아반은 좀처럼 다른 이들에겐 보여주지 않는 미소로 고도의 노력에 화답했다.
“보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거라. 네 선택과 결정이 틀렸던 적은 없으니.”
고도는 처음부터 자신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준 조아반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절을 올렸다. 짧은 인사를 마치자 청사가 하늘을 울리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한다.
<가 볼까?>
고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도를 태운 청사가 날갯짓하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뜨거웠던 하계의 열기와는 다른 온화하고 시원한 바람에 고도가 가슴이 부풀 정도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미련은 하계에 묻어 두었다. 땅의 주인이 제 몸에 심어준 ‘진명의 보주’ 역시 계룡산 깊은 곳, 요괴나 삿된 존재가 접근도 하지 못하도록 봉인해 두었다. 훗날 하계를 지킬 재목(材木)이 태어난다면 그가 ‘진명의 보주’를 손에 넣어 땅의 주인의 부름에 답하도록 말이다. 그러니 하계와 인연을 맺었던 고도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그의 이야기는 천궁에서 새롭게 이어질 것이다.
“돌아왔구나. 내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곳은 땅이 아닌 하늘. 아주 오래전 가족이라 불렸던 여인과 딸아이를 가슴에 묻어두고도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던 것처럼 고향의 흙내음 역시 잊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상실감은 들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을 절반 내어준 평생의 반려인 금관소경대좌, 아니 한무, 그것도 아닌 청사, 그도 아닌 대롱이. 그 대롱이와 함께 할 이야기가 남아 있으니 말이다.
“예그리나! 날갯짓을 똑바로 하라니까!”
“허억, 헉, 하지만 너무 높아서 떨어질 것 같은데요, 아버지!”
“쯧, 나슬, 도와줘라.”
“…….”
청사의 명을 받든 나슬이 예그리나의 배 밑으로 날아가 등으로 예그리나를 받쳐주었다. 예그리나의 까만 가슴팍이 따끈따끈 익어갔다.
“고, 고맙다.”
“…….”
더없이 심란한 눈빛으로 힐끔, 예그리나를 올려다본 나슬이 한숨만 푹 내쉬었다. 복작거리는 용들을 보면서 고도는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청사의 발톱 사이에 파라솔을 끼우고, 그의 손아귀 안에서 느긋하게 드러누웠다. 그리고 높은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천궁을 바라보며 꼰 다리를 까딱거렸다.
“저 낡은 건물부터 허물고 최첨단 빌딩으로 새로 세우자 해야겠어.”
고도가 천계에 있는 한, 단 하루도 잠자코 넘어가는 일 없이 떠들썩한 소란이 벌어지리라. 순수한 천계인들이라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기상천외한 변화를 요구하면서, 하계와 저승 못지않은 방향으로 천계 역시 성장할 일만 남았다. 저승을 밀어내고 하계에서 유명세를 떨쳤던 고도에게 천계는 새로운 놀이터나 다름없었으니.
“같이 상제에게 청해줄 거지?”
그 놀이터를 함께 뛰어놀아 줄 푸른 눈의 주인이 미소를 머금고 화답했다.
<우리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파업이다.>
“아하하하.”
그 후로 천궁에는 ‘천궁에서 일하는 자들을 위한 노동법’이 새로 생겼다고 한다.
<곡두기행 : 환세기담>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