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36)

덜커덩.

페트병에 갇힌 예그리나는 어두운 곳에서 몸이 흔들렸다. 천계에서 선녀들이 마차를 타고 만주사화 꽃밭을 돌아다닐 때 잠깐 얻어 타면 돌부리에 걸려 들썩이던 것과 비슷했다. 작은 손으로 꽉 닫힌 페트병 뚜껑은 두드려 봐도 열리지 않았고, 마차가 달릴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감에 겁을 먹었다. 마음만 먹으면 날카로운 앞발의 발톱으로 페트병을 찢어 놓고 탈출할 수 있지만, 무작정 도망쳤다가 제게 호의를 보이는 어린 아이보다 더 무시무시한 하계 인간들을 만나면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용기를 낼 수 없었다.

하계 마차가 어딘가에 도착하고 나서야 인간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아들! 트렁크에서 도롱뇽 꺼내줘!”

캄캄했던 어둠이 조금씩 걷어진다. 꽉 닫혀 있던 문이 위로 올라가면서 어린아이가 페트병을 품 안에 가득 끌어안았다.

“엄마! 엄마 이거!”

아이가 쪼르르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는 트렁크에 가득 담아온 캠핑용품과 지역 특산물을 챙기느라 페트병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엄마가 이거 정리하느라 바쁘거든? 아들이 거실에 있는 어항에다가 풀어놔줘.”

“물고기 집에?”

“맞아. 엄마가 이거 정리하고 도롱뇽 밥 챙겨줄게.”

“응!”

짧은 다리로 힘차게 거실을 가로지른 아이가 커다란 어항 앞에 멈췄다. 거실 선반장 위엔 민물 잉어가 담긴 어항이 놓여 있었다. 아이는 의자를 끌고 와 어항 앞에 섰다. 먹이를 주는 뚜껑을 열자 잉어들이 수면으로 몰려들었다. 아이가 신나서 종알거렸다.

“잉어 친구, 잉어 친구.”

검고 긴 예그리나가 페트병에서 미끄러지듯이 떨어진다.

풍덩!

수면 위에서 입을 뻐끔거리던 고기들이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려 줄행랑을 쳤다.

예그리나는 뽀르르, 물방울을 터뜨리며 인조 모래까지 가라앉았다. 아이는 어항에 두 손을 붙인 채 한참이나 예그리나를 바라봤다. 등에서 푸드득거리는 날개를 도롱뇽이 가진 아가미쯤으로 생각했는지 신기해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용용이, 용용이.”

그렇게 신나 있을 때, 문밖에서 아이 엄마가 외쳤다.

“아들! 잠깐 이리 와 봐!”

아이는 의자를 기어서 내려왔다. 그러곤 집에 들어올 때처럼 호다닥, 현관문을 빠져나갔다.

예그리나는 제 머리 위를 노니는 잉어들을 불안하게 바라보다가 자그마하게 목소리를 냈다.

“삐이, 삐……?”

어항 속 터줏대감이자 잉어들 중에서 수염이 가장 긴 붉은 잉어가 다가왔다. 잉어는 입을 뻐끔거렸다. 그때마다 예그리나는 화들짝 놀라 새된 소리로 울었다.

“삐, 삐?”

다른 잉어들이 다가와 말을 걸 때는 거의 기절할 것처럼 얼굴이 창백해지기까지 했다.

“삐삐, 삐이이이, 삐, 삐이……?”

어항에서 가장 나이 든 잉어가 마지막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예그리나는 울먹거리는 눈을 작은 손으로 닦아내며 외쳤다.

“삐이, 삐, 삐!”

잉어들과 예그리나의 대화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이곳은 오염된 하계라 고귀한 천룡의 자제가 오래 머물 곳은 못 되니, 산속이나 숲속에 몸을 피하고, 해가 저물면 도깨비나 귀신에게 물어서 ‘만물상’을 찾아가라는 뜻이었다. 그 ‘만물상’이라면 예그리나가 천계로 돌아갈 수 있는 물건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고.

그 조언을 가슴 깊이 새긴 예그리나는 인공 모래를 박차고 수면 위로 올라왔다. 잉어밥을 주던 뚜껑을 양손으로 힘차게 밀어 올렸다. 덜그덕거리던 플라스틱 뚜껑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텅텅 소릴 내어 굴러갔다.

예그리나는 어항 위로 올라가서 주변을 살폈다. 생소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는 하계 집안 풍경에 정신이 팔려 있으려니 잉어들이 수염을 휘날리며 수면 밖으로 입을 내밀었다. 뻐끔거리는 입이 된통 혼을 냈는지, 예그리나는 허겁지겁 젖은 날개를 펼치고 파닥거려 보았다.

“삐이이.”

잔소리쟁이 잉어들을 피해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뒷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소나무를 발견했다. 일단 높은 꼭대기에 올라가 볼 생각으로 전속력을 다해 날았건만.

‘쾅!’

투명한 유리 창문에 있는 힘껏 머리를 박았다. 바닥으로 꼴깍 떨어진 예그리나를 보고 어항 속에서 잉어들이 뱅글뱅글 돌며 난리가 났다. 예그리나는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충격에 조막만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부풀어 오르는 혹을 문지르며 눈물을 찔끔 삼켰다. 그러나 다시 커다란 거실 창을 아득하니 바라보고는 잠금쇠로 날아올랐다.

“삐이.”

있는 힘껏 잠금쇠를 돌렸다. 알에서 껍질을 깨고 나올 때만큼 힘을 쥐어짰다.

“삐이이!”

‘달칵.’

걸쇠가 풀린다. 예그리나는 기진맥진한 몸으로 간신히 창문을 뛰어넘었다. 때마침 현관 밖에서 떠들썩하던 인간들이 짐을 한아름 안고 들어왔다.

“어머!”

여자는 어항 주변에 떨어진 물자국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아들! 엄마가 어지르면 치우라고 했지!”

예그리나는 허겁지겁 창밖으로 날아올랐다. 인간들 시야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나 안 어질렀어!”

“여기 물이 다 쏟아졌잖아.”

“내가 안 했단 말이야! 어? 도롱뇽 어디 갔어?”

“도롱뇽? 어항에 안 집어넣었니?”

“넣었는데! 내 도롱뇽 어디 갔어! 도롱뇽!”

“엄마가 찾아볼 테니…….”

“으앙! 용용이 데려와, 용용이!”

자지러지듯이 터진 울음이 창밖까지 빼액, 솟구쳤다. 예그리나는 그 목소리를 뒤로한 채 힘차게 날갯짓했다. 이대로 하늘 위로 날아가 천계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허억, 헉, 삐, 헉, 삐이.”

날개가 이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천계에서는 선녀옷을 걸친 듯 가볍기만 했던 날개가 하계에선 거추장스럽다 못해 온몸을 내리누를 만큼 무거웠다. 결국 구름에도 닿아 보지 못하고 비행 방향을 바꿨다. 지쳐서 가느다란 새소리처럼 숨을 몰아쉬던 예그리나는 푸르른 녹음이 보이는 숲에 내려앉았다. 그늘 밑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피해 나무가 우거진 곳에서 숨을 골랐다.

난생 처음 보는 것투성이였던지라 한동안 몸을 숨긴 채 주변을 살폈는데, 그 호기심은 금방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몇 번 더 날개를 펄럭이며 비상해도, 구름에 닿기도 전에 지쳐서 숲에 돌아오기 일쑤였다. 어느새 서쪽으로 저물어가는 조그마한 태양을 보다가 눈물이 핑 돌았다. 이대로 닭똥 같은 눈물을 후두둑 쏟으며 목 놓아 울고 싶었지만, 잉어들의 조언을 되새기며 마음을 다잡았다.

‘해가 저물면 나와 도깨비나 귀신에게 물어서 [만물상]을 찾아가라.’ 

작은 주먹을 불끈 쥐는 예그리나는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등산객 차림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던 한 남자가 멈추어 서서 예그리나를 올려다보는 것을.

“아니, 이게 웬 귀하디귀한 영물일까.”

남자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잇새로 혀를 날름거렸다. 혀끝이 뱀의 그것처럼 가운데가 갈라져 있었다. 새빨간 뱀의 혀를 흔드는 그는 예그리나를 보며 히죽 웃었다. 그의 두 눈 주변에는 굶주린 요력이 그득 묻어나 피부가 검게 변해 있었다.

*

버스가 달리는 내내 그 안은 난장판이었다.

“이거 봐, 내가 얼마 전에 김서방네 고물상에서 구한 오래된 절구통이야.”

“여보게, 내가 김서방에게 받은 도자기 잔을 봐줘.”

“내 김서방 물건도!”

도깨비들은 오래된 물건을 좋아하는 종족답게 새로 구한 물건을 늘어놓으며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김서방이란, 인간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붙이기 귀찮아서 김아무개라 부르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구미호들도 알고 있었다.

“청이 기억나? 걔 연예인 됐더라.”

“걔도? 연예계에 웬만큼 미색 소문난 애들은 다 우리 종족인 거 인간들은 알려나.”

“난 그렇게 관심 받는 거 싫던데. 나이 먹어도 방부제 외모니 뭐니 알려지는 거 부담스럽잖아. 그러다 헌터들한테 구미호인 거 들키면 사냥당할 텐데.”

“오히려 연예인이라서 안전하지. 위험한 일 겪어도 사생 팬이나 미친 사람에게 피해봤다고 퉁 치면 되는 거라.”

생간을 먹어야 영생할 수 있는 구미호는 미모를 무기 삼아 인간들 사이에 섞어들었다. 처음엔 인간 간을 노렸지만, 유명세를 얻게 되어 행동에 제약이 생기는 바람에 도축된 동물 간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만큼 과감하게 신분을 속이고 사는 건 성격에 맞지 않는 이들은 족장인 ‘가연’을 따라서 인간 세상에서 몰래 요괴들이 살 수 있는 생활 방식을 구축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가연을 따라온 남성 구미호 하나가 버스 의자 등받이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의 요사스러운 눈웃음이 고도를 향했다.

“그보다 환영도사 진짜 오랜만이네. 우리랑 사이 안 좋았던 거 기억나?”

선이 얇은 얼굴이라 낮은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잠깐 헷갈릴 정도의 미색이었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채 씨익 웃는 구미호를 향해 고도가 눈알만 도록도록 굴려 대답했다.

“내가 하계에 있던 때를 말하는 건가? 그땐 요괴, 귀신, 도깨비 할 것 없이 다 사이가 안 좋았지.”

“넌 특히 요괴는 보이는 족족 잡아다 죽통에 가둬서 악명 높았어.”

“암, 그땐 내가 퍽 유능했지.”

“지금은 그 실력이 녹슬었나 보다? 그러니 우리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겠지?”

속을 살살 긁어놓는 구미호에게 와글와글 떠들던 도깨비와 나머지 구미호들의 시선이 쏠렸다. 패기 넘치는 어린 구미호의 도발을 흥미진진하게 관람하는 시선이었다. 고도는 주눅 들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래, 너희 도움이 필요하지.”

“이런, 어쩌면 좋으냐. 그 유명한 환영도사가 뒷방 늙은이가 됐어?”

“내가 뒤에 있지 않고 앞에 나섰다간 이 하계가 풍비박산 난다는구나.”

그 말 한마디에 구미호가 멈칫했다. 고도는 까만 눈을 빤히 뜨고 구미호를 바라봤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검은 눈동자는 고도의 능력과도 같았다. 끝을 알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계룡산을 뒤집어 탈탈 털어버리면 그만이지 않겠더냐. 그 간단한 일을 칠성신까지 한사코 말리니, 어떡하겠느냐. 연약해진 하계 사정을 참작하여 내 능력을 잠시 묻어둘 수밖에.”

도시에 얼마 남지 않은 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구미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거짓말로 점철된 허세가 아니었다. 눈치 빠른 여우가 그 정도도 모를 쏘냐.

그는 힐끔, 족장인 가연을 바라봤다. 하필 건드릴 인간이 없어서 고도를 건드리냐며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는 족장의 살벌함에 금세 꼬리를 말았다. 기죽은 구미호를 향해 고도가 친절하게 말해줬다.

“이왕 이렇게 모인 거, 너희들이 한 시진이라도 빨리 예그리나를 찾는 게 좋을 게다. 내가 늙어서 인내심이 많이 줄어서 말이다. 정 못 기다리겠다 싶으면 산을 동강내 버릴 테니, 그 전에 일을 마무리하자. 어떻겠느냐?”

진심이었다. 청사가 나서서 천룡의 힘을 끌어다 쓸 바에야 도력으로 산을 반 토막 내는 게 하계의 안녕을 위하는 일임에는 사실 아닌가. 그러나 속사정을 모르는 구미호는 하계의 산봉우리 하나 날아간들 뭐가 문제겠느냐는 태평한 발언에 꼬리를 말고 슬그머니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야기를 듣던 족장 가연, 아니 고도에게는 여전히 ‘지진아 미호’라고 불리는 이가 웃음으로 무마했다.

“고도, 봐줘라. 네가 산을 망가트리면 우리 행적이 헌터들에게 속속들이 알려진다.”

“헌터는 무엇이냐.”

“현대에 적응한 도사 무리다. 네 때엔 도력으로 요괼 잡아들였다면, 헌터들은 특별한 물건들을 이용해서 우리 목에 현상금을 걸어놓고 경쟁하듯이 잡아간단다.”

“잡아가선 어쩌는데?”

“우리 신체를 필요로 하는 부자 인간들에게 경매로 부치지. 우리의 예쁜 눈, 날카로운 이빨, 꼬리, 이 모든 게 아주 값비싸게 거래되거든.”

“……흐음.”

“헌터 개개인의 솜씨는 고도 너보다 턱없이 약해서 내가 상대할 수 있긴 하다만, 떼거지로 몰려와 수작을 부리면 아차 하는 사이에 당할 수가 있어서 말이야. 그러니 헌터들 관심을 살 만큼 일을 크게 키우진 말자. 알았지?”

고도는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연은 분위기를 녹아내리게 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고맙다, 고도야.”

그녀가 그렇게 분위기를 무마하지 않았더라면, 계룡산에 도착하기 전까지 숨 막히는 냉랭한 기류에 갇혔을 것이다. 고도가 편하게 의자에 몸을 묻는 모습을 본 후에야 도깨비와 구미호 사이에서 멈추었던 수다가 와글와글 이어졌다. 이 모습을 쭉 지켜봤던 청사가 고도의 통통한 볼살을 집게손가락으로 잡아 당겼다.

“고도, 너 방금 전에 되게 우리 아버지 같았어.”

말랑말랑한 찹쌀떡처럼 볼살이 늘어난 채로 고도가 대꾸했다.

“춘부장 같았다니. 무슨 말이더냐.”

“웃으며 촌철살인했잖아. 나 없는 사이에 그런 걸 배운 거야?”

청사 말에 곰곰 고민하던 고도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그래 보였나? 이상하군.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닌데.”

“하하, 되게 용 같았어.”

“칭찬인지, 욕인지.”

“당연히 칭찬이지!”

“인간미 없다는 소리 아니냐. 인간에게 인간미가 없으면 어찌할꼬.”

“또 궤변 늘어놓기야?”

“용을 반려로 둔 인간이 인간미가 없어지고 용미가 있게 되었다니, 이것은 칭찬인가 욕인가.”

청사는 더 이상 궤변이 늘어지지 않도록 고도의 양쪽 볼을 잡아당겼다.

“고도.”

청사는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진짜로 위급한 상황이 되면 계룡산을 동강낼 것이냐. 하계와 척을 지겠느냐 묻는 게다.”

고도는 시답잖은 이야기에 피식 웃었다.

“나는 천계에 속해 있으니 천계의 입장에 설 수 밖에 없는 인간이 되었지 않느냐.”

“땅의 대리자잖아.”

“하계와의 균형을 맞추고자 땅의 주인이 나를 대리자 삼았지만, 글쎄다. 그의 부름을 받지 못한 지 300년이 넘었다. 어쩌면 나는 이만 대리자 자격을 포기하고 하계를 완전히 떠나 천계에만 정착하는 게 답일지도 모른다.”

청사는 근심 가득한 눈으로 고도를 바라봤다. 천하의 고도를 이렇게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부서질까 전전긍긍하며 바라봐주는 이는 온 우주를 통틀어 청사밖에 없을 것이다. 무엇이든지 혼자서 척척 해결해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감에 의심이 없는 고도지만, 이럴 때면 책임감과 여러 생각들을 내려놓고 청사에게 마냥 기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하계는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아도, 자신들의 방식으로 잘 꾸려가고 있지 않느냐. 신을 믿지 않게 되면서 스스로를 믿고 발전하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화를 내겠느냐.”

가만히 지켜보던 청사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곁에서는 더 이상 ‘잃는 것’에 익숙해지지 못하게 하려 했는데, 하아.”

“쓸데없는 생각을 했구나. 무릇 삶이란 잃으면 얻는 게 있고, 얻는 게 있으면 잃기도 하는 법이라.”

신통방통하게 모든 걸 꿰뚫어보던 고도의 이런 모습은 청사에게도 처음이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상황이니 그렇겠지. 지금까지 거들떠보지도 않던 물건에 의지해서 예그리나를 찾아보는 처지가 낯설기도 할 테고. 단순히 건물이나 복식, 서역인들이 뒤섞여 지내는 인간들의 생활뿐만 아니라, ‘환영도사’라는 근사한 칭호를 가진 고도가 이제는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도 없는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고 반응해야 할지 고민이 많은 듯했다. 빤히 바라보던 청사가 손끝으로 고도의 코끝을 살짝 들췄다.

“대롱아, 내 얼굴 그렇게 주물럭거리면 못생겨진다.”

그 시시껄렁한 소리에도 청사는 찌푸린 미간을 펴지 못했다.

선이 곧게 뻗은 코를 손으로 들추며 고도를 꼼꼼히 살폈다.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얼굴이다. 고도와 달리 청사는 세월이 흐를수록 나이가 들어갔다. 고도가 ‘소녀 같다’며 어린 여자아이처럼 취급할 때보다 머리가 굵어졌고, 맡은 일도 의젓하게 처리하면서, 인간의 기준으로는 나이도 한두 살 더 먹은 얼굴이 되었다. 고도만이 그대로였다. 언젠간 영원히 아름다울 자신의 반려를 곁에 두고 나이를 먹어 죽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그러한 생각들마저 어렸었나보다.

“예그리나는 괜찮겠지?”

주물럭거리던 고도의 얼굴에서 손을 뗀다. 고도는 손자국이 발갛게 올라온 볼을 움직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다른 용도 아니고 우리 용인데.”

“워낙 약한 개체인지라 무슨 변고가 있지 않을는지, 걱정이 되긴 한다.”

“그 애는 성장이 느릴 뿐, 기본 바탕은 너만큼 뛰어난 자질을 가졌다. 이왕 이곳에서 시련을 이겨내서 한 계단 더 올라서면 더할 나위가 없겠구나.”

“예그리나에겐 혹독한 아비구나.”

“그래야 예그리나가 네 일을 물려받아 일찍 은퇴하지.”

은퇴, 라는 말에 청사는 멈칫했다. 눈을 여러 차례 깜빡였다. 고도의 말에서 문맥을 읽어내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내가 은퇴하길 바라느냐?”

고도는 조금 전 청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볼을 만지작거렸다. 꼬집고 잡아당기기에도 너무 귀한 얼굴이라는 듯이 손끝과 손등으로 살짝 쓸어내리는 것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어서 빨리 해야 할 일을 마치거라. 네가 의무를 다 하고 내 곁으로 돌아오는 날부터 네 시간은 내가 전부 갖겠다. 그러니 지금의 방만한 자유를 즐기는 게 어떠한지. 소경 이후의 여생은 내 것이라 내 허락 없인 어디도 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청사는 놀라서 눈만 크게 떴다.

고도가 그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도는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청사를 사랑하고, 그가 하는 소경의 일을 지지하며, 소가주가 비어 있는 천룡 가문을 안팎으로 대신 살핌은 물론, 예그리나와 나슬에게 조아반과 더불어 천룡으로써의 자질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만사를 능수능란하게 돌보던 고도가 서운함이나 불만족을 흘러가는 농담으로도 드러낸 적은 없었다. 그러한 고도의 입에서 진득한 소유욕과 함께 내뱉은 농밀한 고백이라니.

청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요동치는 목울대를 숨기지 못한 채 고도를 가만히 바라봤다. 고도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표정에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투명하고 선해 보이던 까만 눈에 청사가 보지 못했던 끈적거리는 감정이 담겨 있기만 했다.

헤어져 있어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고도도 청사 못지않게 둘이서 함께 지내고 싶었던 게다.

“하하.”

청사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데도 웃음이 먼저 새나왔다.

“하하, 하…….”

고도는 모를 것이다. 청사가 지금까지 봐왔던 인간들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다. 사랑은 오래가지 않았고, 정으로 연인을 붙들었다. 그 정마저 퇴색되면 이별을 고하고 떠나면서, 또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으며 살아갔다. 아무리 일평생을 서로 아끼며 사랑하자고 맹세해도 그 맹세가 지켜지는 이들은 소수였다. 설레던 입맞춤과 손끝만 닿아도 화들짝 놀라던 쑥스러움은 함께 하는 세월이 길어질수록 변모했다.

그들은 손을 잡는 것도 귀찮아했다. 합구는 웬 말이오, 한 이불을 덮는 것도 이상하다며 내외하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청사는 고도와 만나지 못하는 시간마다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그 외로움에 대한 고통과 설레는 사랑에 대한 갈망이 무서웠다. 청사가 고도에게 그만한 만족을 안겨주지 못하는 상황이니, 고도가 외롭다거나 사랑이 식었다며 이별을 고하고 하계로 내려가면 어떻게 붙잡을지, 어떻게 마음을 돌릴지 갈피를 잡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고민이 나약한 헛발질이지 않은가.

역시 고도는 한수 앞을 내다보는 특별한 인간임이 틀림없었다. 불안해하는 관계에 대해 단단한 말뚝을 박아주는 그에게 어찌 고마움과 애정이 샘솟지 않을 수 있을까.

“예그리나 찾으면 하계에서 더 놀다 갈까?”

청사가 고도의 허리를 슬그머니 끌어안았다. 눈치 빠른 구미호의 시선이 청사를 향했지만, 천방지축 도깨비가 방해하느라 제대로 구경할 수는 없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틈타 청사는 고도의 두루마기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허벅지 안쪽을 향하는 손길에 고도가 움찔, 허리를 세우면서 어깨를 밀어냈다.

“이 세상이 싫어서 얼른 떠나고 싶다 할 땐 언제고.”

청사는 밀어낸 거리를 다시 바싹 좁혔다.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던 조심스러운 손길이 대범해졌다.

“고도야, 내가 변덕이 심한 건 알고 있지 않았느냐.”

허벅지 안쪽 살을 콱, 움켜쥐는 바람에 태평하던 고도의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나온다.

“아.”

고도 본인이 더 놀라서 한 손으로 입을 막는다. 소리에 밝은 구미호들이 귀를 더 쫑긋 세웠다.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있지만, 고도와 청사를 향한 귀 끝이 계속 쫑긋거렸다.

“참으로 음흉한 손길이구나.”

“살이 좀 올랐나? 말랑말랑 도톰한 것이 좋긴 한데.”

“대롱아, 그러다 손이 더 들어오겠다만.”

“어디 보자, 허리는 여전히 한줌이구나. 살을 더 찌워야겠어.”

“그만 만지는 게, 으음.”

또다시 이상한 소리가 나올까 봐 입을 아예 다물어버린다. 고도답지 않은 여유 없는 반응이다. 청사는 마른침만 꿀떡 삼켰다.

고도도 많이 쌓인 듯했다. 이러다가 거친 숨소리까지 토하면서 먼저 옷고름을 풀지 않을까,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본분도 잊은 채 고도를 확 덮치려 할 때였다.

‘끼익!’

버스가 멈춘다.

“다 왔습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구미호가 신이 나서 외쳤다. 도깨비들이 덩달아 어깨춤을 췄다.

“도착이다, 도착!”

구미호들은 아쉬워했다.

“저 눈치 없는 놈. 이 근처 한 바퀴만 더 돌지.”

손톱까지 질끈, 깨물며 아쉬워하는 시선 끝엔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고도와 그런 고도를 보며 뜨거운 숨만 삼키는 청사가 있었다.

“후아, 김서방이 없는 동네야! 이 얼마만의 깨끗한 기운이냐!”

도깨비들이 신날만했다. 마천루가 하늘을 가린 도시와 달리, 푸르른 녹음으로 물든 산봉우리가 높게 솟아 있었다. 등산로 주변에는 서양식으로 꾸며 놓은 카페라든지, 원기 보양을 위한 음식점들이 보였다. 도깨비와 구미호들이 간만에 쬐는 정기에 찌뿌드드한 몸을 펴고 있는 사이, 청사와 고도는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예그리나 기척이 느껴져.”

“요괴들의 악의와 죽은 자들의 숨결도 느껴지는구나.”

고도는 챙겨두었던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도깨비 눈이라고 불리는 선글라스를 끼자마자 어둑한 세상에 파랗고 붉은 불빛들이 산등성이마다 가득 피어올랐다. 고도가 도술을 전개하여 산 전체를 뒤덮으면 요괴와 귀신들의 관심을 끌 수 있겠지만, 산신이 노할 수도 있는 일이다. 조용히 일을 처리하기로 약속한 만큼 능력 자랑은 삼가기로 했다.

“대롱아, 나침반 꺼내 보자.”

고도의 청을 받은 청사가 소매 안에서 나무 함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나침반 자침이 흔들렸다. 도시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집 모양을 가리켰던 바늘 끝이 새로운 문양을 가리켰다.

검게 칠해진 손 모양이다. 예그리나가 근처에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침이 한 바퀴 돌았다. 이번에 가리킨 방향은 달. 시간이 촉박하다.

“오늘 저녁 안에 찾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소린데.”

“그렇다면 빨리 움직여야지. 지진아, 저 방향에서 예그리나의 기척이 느껴진다. 어서 날아가 데려오너라.”

가슴을 쭉 편 채 숨을 들이켜던 미호가 입술을 삐쭉였다.

“언제까지 날 그렇게 부를 거야, 진짜.”

“넌 언제 봐도 어린애 같아서 어쩔 수 없다.”

“무슨 늙은이 같은 소릴 하니.”

“이 늙은이 위해서 젊은 것들이 빠릿하게 움직여주는 게 어떨까 싶은데.”

나 참, 노인네 같은 소리가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 세상에 또 있을까. 얼굴에 솜털도 보송보송한 외모로 신선같이 굴어서야.

미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젠 천계의 귀한 존재가 되신 분의 명을 어찌 모른척할 수 있을쏘냐.

“몽당아! 움직이자!”

미호의 외침에 산을 보며 가슴을 크게 부풀리던 몽당이가 도깨비 방망이를 꺼냈다.

“몽당!”

우렁찬 기합과 함께 커다란 손아귀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던 방망이가 바닥을 후려쳤다.

쿠구구구.

지진이라도 인 것처럼 바닥이 위태롭게 들썩였다. 저물어가는 해를 등지고 하산하던 등산객들이 난데없는 지진에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우악!”

머리를 감싸고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소란이 떠들썩하게 번져 나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도깨비들은 몽당의 신호를 받더니 땅바닥에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우!”

“우우!”

“우우우!”

도깨비들은 거대한 황소처럼 소리를 내뱉었다. 몽당은 그때마다 방망이로 바닥을 내리쳤고, 땅을 울리며 번져나간 기운을 도깨비들이 꿀떡꿀떡 삼켰다.

“우우우우!”

기운을 먹은 도깨비들의 몸집이 부풀어 오른다. 팔척장신들의 몸이 십일척, 십이척까지 거대해지더니 순식간에 집채만 해졌다. 함께 외치는 소리도 산골짜기 메아리처럼 깊어졌다.

“우우우우!”

거대한 몸이 푸른 도깨비불로 뒤덮였다. 상투 머리와 삼베 옷, 두 눈에까지 파란 불이 활활 타올랐다. 불덩이로 변한 도깨비들이 산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으랏차!”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엎드린 사람들 위를 거대한 발이 지나간다.

‘쿵!’

성큼, 뛰어넘은 도깨비는 감투를 쓰고 모습을 감췄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큰 발자국만 찍혔다.

‘쿵쿵!’

산 정상까지 뛰어오르는 소리만이 여진처럼 우르르 울려 퍼졌다.

몽당은 산으로 흩어져 수색하는 도깨비들 뒤를 따르려다 멈췄다. 대신 고도에게 다가왔다. 십삼척 장신으로 자라난 파란 도깨비 몽당이 제 손바닥만 한 검을 건넸다.

서전검. 인간 왕이 하사하여 지금은 도깨비 왕의 상징물이 된 오래된 보검. 정성껏 잘 관리해 온 검날이 반짝반짝 빛났다.

“몽당!”

몽당은 빛나는 검을 고도 손에 쥐여 주었다. 고도에게 검을 돌려주고는 감투를 뒤집어쓰고 도깨비들 뒤를 따라갔다. 도깨비들이 모두 사라진 후에야 미호가 외쳤다.

“구미호들, 전원 준비!”

도란도란 모여 있던 구미호들이 신발을 벗었다. 주차된 버스 안에 대충 던져 놓은 구미호들이 손과 발을 흔들어 털면서 개운하게 말했다.

“혈액팩 먹는 것도 맛없었는데 간만에 산짐승 사냥도 해야겠네.”

“여기 고라니 천국이라며. 하나 잡아서 내장 파티 할까?”

“먹고 남은 피 뿌려서 여기 사는 요괴 잡아다 족치면 단서 모으겠지.”

괴팍한 계획을 세우는 구미호들을 일일이 통제하기란 불가능한지라, 미호도 반쯤 포기하고 외쳤다.

“출발!”

구미호들의 손과 발이 커지더니, 손톱발톱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매끄럽고 곱상한 얼굴에도 털이 난다. 동그랗던 동공은 세로로 길쭉해지고 송곳니도 길어졌다. 꼬리를 드러낸 구미호들이 네발로 땅을 디뎠다. 껑충 뛰어오른 구미호들이 순식간에 수풀로 사라진다. 아홉 개의 꼬리를 밖으로 꺼낸 미호가 출발 전 고도에게 뭔가를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물건을 고도가 받아든다. 그것은 인간들이 저마다 손에 쥐고 다니던 휴대전화였다.

“내 여분 핸드폰이야.”

“이걸 왜 주느냐.”

“예그리나 흔적을 찾는 대로 연락할게. 전화 오면 받아.”

말을 마친 미호도 산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고도는 한 손에 몽당이가 준 서전검을, 다른 한 손에는 미호가 준 휴대전화만 꼭 쥔 채 고개를 갸웃했다.

“전화가 뭐지?”

옆에서 청사도 심각한 표정이었다.

“쓰는 법도 안 알려주고 가다니.”

비밀번호를 풀어둔 휴대전화 화면을 터치할 때마다 어플이 눌려서 뭔가가 떴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신기하다는 듯이 그 자그마한 화면을 살폈지만, 여유를 부릴 때는 아니었다. 해가 저문 반대편 하늘에서 달이 휘영청 떠오르고 있었다.

오늘 밤은 만월인지라, 음의 정기를 받아먹는 귀신과 요괴들이 한 달 중 가장 힘을 얻는 때다. 예그리나가 그 요괴들 중 유독 악독한 것에게 잘못 걸리면 몸성히 빠져나오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

“도깨비와 구미호가 애써주는데 우리도 우리의 방법으로 추적에 나서볼까?”

“이번엔 내 힘을 써보자.”

“어허, 천계의 힘을 끌어다 쓰면 산신도 놀라 몸을 움트고 만다. 조용히 처리하기로 나와 약조하지 않았느냐.”

“으으, 그럼 난 마냥 쫓아다니란 말이더냐?”

“있어 봐라. 내 오랜만에 도력을 좀 써봐야겠다. 아주 조금만 꺼내 쓰면 산신도 노하지 않을 터.”

고도가 나침반을 꺼냈다. 흔들리는 자침은 여전히 달을 가리키고 있었다.

“진(陳)을 펴서 수목의 기운을 먼저 보호하마.”

말을 끝내기 무섭게 고도의 두 눈이 금색으로 노랗게 차올랐다.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두 손을 바닥에 댔다.

“구궁팔문 괘.”

손바닥 밑으로 기다란 황금빛이 쏘아나간다. 바닥을 가로지른 빛이 하늘로 튀어 오르더니 순식간에 그물망처럼 얼기설기 얽혔다. 거대한 금빛 투망이 산을 감쌌다. 투망이 덮은 바닥마다 팔각문양이 나타난다. 문양은 여덟 개의 글자인 팔문을 만들어냈다.

휴(休)·사(死)·상(傷)·두(杜)·개(開)·경(驚)·생(生)·경(景)

떠오른 팔문 위로 팔괘가 덮어씌우듯이 적힌다.

건(乾)·감(坎)·간(艮)·진(震)·손(巽)·이(離)·곤(坤)·태(兌)

팔문팔괘로 얽힌 주술은 금빛 투망을 더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산의 기운이 그 도술 안에 묶여버렸다. 그러자 산 안쪽에서 바람이 휘몰아쳤다. 고도가 산 하나에 통째로 진을 그려버리자 그 안에 갇힌 귀신과 요괴들이 날뛰느라 불어닥친 바람이었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짜인 진에 걸리면 고도가 풀어주지 않는 이상 빠져나올 재간이 없다. 그러니 저 안에서 도망칠 곳은 오로지 진의 힘이 비어 있는 중궁(中宮)뿐이다. 귀신과 요괴들이 중궁으로 도망치면 한꺼번에 쓸어 담아 예그리나의 행방을 물으면 될 일이었다. 글자들이 하늘로 떠올라 터지자 번쩍번쩍 빛나던 진의 형태도 모습을 감췄다. 겉으론 확인할 수 없지만, 이미 계룡산은 고도의 손아귀에 묶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러니까 산신이 널 안 좋아하지.”

뒷짐 지고 구경하던 청사의 한마디에 고도는 여전히 신비로운 금색으로 빛나는 눈을 들었다.

“설마하니 내가 반의 반도 실력발휘를 하지 않았는데 이걸로 노할까.”

“허참, 얄미워서 더 격노하겠는걸.”

“산신이 노하면 네가 잘 달래주려무나.”

“언제는 나보고 개입하지 말라더니.”

자신의 말을 번복한 고도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고도는 이 정도 능력이야 별거 아니란 식으로 말하지만, 청사는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는 입장이었다. 구궁팔문진을 전개하는 동안에 고도가 다른 도력을 중복해서 쓰면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지 않나. 청사가 적당히 고도를 뒷받침 해주기로 했다.

“안내해라. 내가 널 모시고 움직이마.”

청사가 고도의 허리를 한 팔로 안는다. 고도는 버스에서의 야릇한 손길이 떠올라서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청사는 긴장한 고도를 눈치채고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 시선을 억지로 모른 척하는 고도였다.

“그러니까, 흠흠.”

고도는 선글라스를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면서 산속을 살폈다. 그러다 계곡 사이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을 빤히 바라봤다. 귀문이 열린 고도 눈에 일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들어왔다.

“북동으로 이십 리에 귀신들이 집합했다. 그리로 가보자.”

여전히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있던 청사가 씩 웃었다.

“언제까지 버틸지 궁금한데.”

“대롱이, 쓸데없는 소리 말고.”

“네 인내심은 나도 궁금하구나.”

청사는 일부러 고도의 옆구리를 손으로 쓸어 만졌다. 흠칫, 하며 허리를 숙이는 고도를 작정하고 괴롭히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가보자, 네가 말하는 곳으로.”

고도가 밀어낼 새도 없이 청사는 발을 내딛었다. 땅이 아닌 허공을 밟는 순간 둘은 산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졌다. 여진과 거센 바람에 떨던 등산객들이 잠잠해진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방금 지진 맞지?”

“하이고, 무서워라.”

“빨리 내려가자. 날 어두워져서 더 무서워졌어.”

등산객들이 허둥지둥 빠져나간 등산로 입구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곳엔 고도가 바닥을 내려친 두 개의 손바닥 자국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

계룡산 골짜기 사이, 작은 마을. 여고생 둘이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여기 폐교 됐는데도 건물 부지 그대로인 이유 알아?”

가로등도 띄엄띄엄 놓인 길에 추리닝을 입은 두 학생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평소라면 학원 차를 타고 집 근처에서 내렸겠지만, 오늘은 학원 근처 피시방에서 게임을 한다고 차를 놓친 탓에 20분 거리를 걸어갔다. 그러다 차를 타고 등원할 땐 쌩하니 지나쳐버리던 어둑한 폐교 옆을 지나가게 되었고, 단발머리 학생이 음산한 목소리로 얽힌 사연을 풀어줬다.

“교육부에서 내놓은 땅을 어디 공장이 5년 전에 입찰했대. 근데 그 계약한 공장주가 저기 학교 거목에 목을 매달고 죽었다는 거야.”

겁이 많은 긴 머리 학생은 “윽” 소리를 냈다.

“왜 목 매달았대?”

“나도 몰라. 그러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 더 계약했는데, 그 사람들도 학교에서 시체로 발견됐대.”

“진짜? 몇 명이나?”

“총 세 명 죽었대. 한 명은 학교 화장실 안에서, 다른 한 명은 학교 뒤뜰에서 발견됐다던데. 우리 외할머니가 굿당 다니시잖아. 거기 무당한테 은근슬쩍 물어봤었나 봐. 사람들 왜 죽어 나가냐고. 그 이유가 뭔지 알아?”

겁에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긴 머리 학생이 중얼거렸다.

“왜 죽었대?”

“땅이 기운이 흉흉하대. 전쟁 났을 때 피란민들 죽으면 저기 운동장 파다가 묻었다더라.”

“요즘에도 그런 소문이 있다니 신기하네.”

“응?”

“나 때는 빨갱이들 다 잡아다 죽인 곳이라고 했는데.”

긴 머리 학생의 대답이 이상했는지 단발머리가 멈추어 섰다. 그리고 느릿하게 먼저 걸어가는 긴 머리 학생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단발머리는 억지웃음을 지었지만, 입 꼬리가 떨렸다.

“어우, 야, 무섭게 왜 그래.”

“진짜야, 여기 지역 농민이라고 말해도 빨갱이 새끼라고 전부 총으로 쏴죽였거든.”

단발머리는 떨리는 눈을 천천히 바닥으로 내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 길어진 자신의 그림자와 달리, 친구의 발밑은 밝기만 했다.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진 단발머리에게 먼저 걷던 긴 머리가 돌아본다.

등판까지 목이 반 바퀴 다 돌았다. 고개를 꺾은 이마에 총알 구멍이 나 있다. 파란 핏줄은 창백한 피부 바깥으로 드러났는데, 그 모습이 비쩍 마른 논두렁처럼 징그러웠다.

“오늘 저기서 친구들 모이는 날이야. 같이 갈래?”

손을 내미는 긴 머리를 피해 단발머리가 뒷걸음질 했다. 그녀는 왔던 길을 달렸다.

“꺄아아악!”

기다란 비명 소리가 밭두렁에 울린다. 긴 머리는 저만치 도망가는 학생 뒤를 보며 까르륵 웃기만 했다. 하지만 웃음도 얼마 가지 못했다.

‘퍽!’

날아온 검이 그대로 긴 머리의 머리통에 꽂혔다. 뒤통수를 파고들어 이마까지 검이 꽂힌 채 여자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검은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한밤중에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는 도사 하나가 허공답보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마에 칼이 꽂힌 귀신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감히 인간 주제에 정월의 귀신을 공격해?!”

긴 머리가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의지를 가진 생명체처럼 움직이던 머리카락이 도사의 옷깃을 붙잡았다. 귀신에게 붙잡히고도 도사는 태연했다.

“한 많은 악귀 주제에 날 건들다니 배짱도 좋구나.”

“네놈 정체가 뭐냐!”

“고도.”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 있는 이름에 귀신이 주춤한다. 귀신은 설마하니 물었다.

“……환영도사 고도? 인간이 그자를 사칭해서 날 공격해?”

“오호라, 한낱 잡귀가 날 알다니. 이 몸이 그새 전설이 되었구먼.”

고도는 귀신의 머리통을 뚫어버린 검자루를 손에 쥐었다. 서전검이 고도의 손 안에서 환하게 빛났다.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귀신이 아차하고 말했다.

“사칭이 아니라니. 그럴 리가 없는데, 환영도사는 이미 옛적에 천계로 이적했다는데…….”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검의 밝은 빛에 부풀던 귀신의 몸이 그대로 터져버렸다.

‘펑!’

갈기갈기 찢겨진 혼령이 허공으로 뿌려졌다. 저승에 가서 죗값도 물지 못하고 구천에서 그대로 소멸해버린 귀신에게 딱함이 들지도 않는 고도였다.

“흐음.”

고도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렸다. 밤중에도 인간 외의 것을 밝혀주는 도깨비 안경이라더니, 고도가 공들여 다른 존재의 기척을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눈에 그 흉포한 꼴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지금도 인간의 눈으로는 사람 하나 없는 야심한 밤의 적막한 폐교였지만 머리 위로 밀어 올린 선글라스를 다시 쓰면 버려진 땅에 온갖 기운들이 바글바글, 붉은 불꽃처럼 일렁였다.

“이거 우리끼리 전부 상대하다간 시간 꽤나 걸리겠는걸.”

질 가능성은 없다. 단지, 바글바글한 혼령들이 사방으로 튀어나가면 오히려 곳곳에서 사건사고가 발생해서 고도의 뒤치다꺼리가 늘어날 뿐이다.

“무시할까?”

고도는 그리 물으며 제 곁으로 사뿐히 내려앉은 청사를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도 청사의 파란 눈은 맑게 빛나고 있었다. 천룡의 힘을 아주 미약하게 개방하고 용안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고도의 말처럼 귀신들 숫자가 상당했다. 조용히 처리하지는 못할 숫자다.

“무시하는 게 맞겠지. 한데.”

어쩌랴. 지금은 예그리나의 흔적을 물을 수 있는 존재라면 찾아가 말을 걸어야 하고, 여기 떼로 몰려 있다면 소란이 일더라도 아는 체를 해야 하지 않겠나.

“귀신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으니 물어보기 편할 수도 있지 않을까.”

청사의 제안에 고도는 마른 턱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우리에게 협조적일지는 장담할 수 없다.”

“고도야, 감히 내 앞에서 설마 귀신들이 천방지축으로 날뛰겠니. 그러다 영영 구천에서 소멸되어 저승도 못 가게 될 것이다.”

“구천에 한이 남아 머무는 악귀들이 그런 앞날을 걱정이나 하겠느냐만은, 으음.”

귀신들만큼 소문에 밝은 것들도 없다. 촉박하게 움직여야 할 때에 이것저것 재고 따질 겨를은 없었다.

“좋다, 가보자.”

폐교로 향했다. 학교 정문을 들어설 때부터 기운이 달라졌다. 밀도 높게 쌓인 음산한 기운에 고도가 금빛 눈을 반짝이며 도술을 전개한다.

“기문둔갑(奇門遁甲) 아형(亞形) 은형술(隱形術).”

도술이 고도와 청사를 휘감는다. 어둠과 달빛에 숨어드는 술수였다. 구궁팔문진과 기문둔갑까지 동시에 신경 써야 한다. 보통의 평범한 도사는 땀을 뻘뻘 흘릴 만큼 피로도와 중압감에 억눌릴 테지만, 고도는 어깨가 약간 뻐근한 정도였다. 이 정도 몸 상태라면 동시에 여덟 가지 능력을 써도 무리가 없다고 진단 내렸다.

조금 더 과감하게 능력을 운용해야겠다며 마음먹을 때였다.

“고도, 저기.”

은형 상태의 청사가 학교 건물을 가리켰다. 단층짜리 건물 안에 어른거리는 기운들이 바글바글했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대신 슬쩍 옆으로 빠져서 건물 뒤쪽 공터까지 확인해봤다. 주민들이 몰래 갔다 버린 쓰레기 더미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악귀들은 쓰레기 더미 위로도 빼곡하게 서 있었다.

“와, 이런 건 처음 보네.”

순수하게 놀란 청사와 달리, 고도는 심란해졌다. 와글와글 모여 있는 귀신들의 외형이 제각각이었다. 군복을 입고 있는 젊은 남자 귀신은 머리에 총알 구멍이 나서는 어디 쏴죽일 인간이 없나 두리번거렸다. 교복 입은 여학생은 목을 매달아 자살했는지, 목이 비틀려서 눈과 혀가 길게 내려와 있었다. 머리를 풀어헤친 중년 여성은 물에 빠져 죽었는지, 퉁퉁 불어터진 아기를 강보에 감싸서 업고 다녔다. 중년 남성은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듯, 타이어 자국이 난 배 안쪽에서 터진 장기가 발등까지 쏟아져 흘러 덜렁거렸다. 리어카를 끌고 가는 노인과 그 리어카에 앉아서 썩은 빵을 먹는 아이까지. 전국 팔도의 귀신들이 다 모인 건 아닐까 싶다.

“보름달이 뜰 때마다 계룡산에 모이진 않을 것 같구나.”

“왜 그렇게 생각해?”

“그랬다면 저승차사들이 일감이 몰렸다고 단체로 여길 쳐들어오지 않았을까.”

고도의 말에 파란 눈을 굴리던 청사가 대꾸했다.

“허면 매번 모이는 장소가 바뀌는 게 아닐는지.”

“매번 바꿔서 모인단 말이지.”

“정기를 받을 수 있는 곳을 찾긴 해야겠고, 혼자 돌아다니다가 저승차사에게 잡히면 낭패지 않겠느냐. 이렇게 몰려 있으면 저승차사들도 선뜻 덤벼들지 못할 게다.”

맞는 소리다. 이 많은 숫자의 악귀들을 상대하려면 삼인일조로 움직이는 저승차사 열 조 이상이 한꺼번에 덮쳐야 한다. 예그리나가 하필 이 지역으로 떨어진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오늘 이 땅 위에 가장 기운이 강한 곳이 계룡산 터다. 귀신들도 모여드는 판국에 예그리나도 빨려든 것이 분명했다.

“저치들에게 다가가서 ‘새끼 용 보았는가.’라고 물어보면 말이 통할까?”

청사가 조심스럽게 상황을 둘러보는 것과 달리, 고도는 성큼성큼 발을 떼며 대꾸했다.

“말이 안 통하면 묶어놓고 저승차사들을 불러오면 된다.”

화끈한 방법에 청사가 피식 웃었다.

“하여튼 안 그런 거 같으면서도 자기 새끼 미아 됐다고 급해 하기는.”

느긋하게 뒤따라오는 청사를 내버려둔 채 고도는 은형술을 풀었다.

“여봐라, 내 누굴 좀 찾고 있어서 말이지.”

어디선가 갑자기 등장한 고도에게 수백 명의 귀신들이 고개를 돌렸다. 버려진 교실 안쪽에서 깔깔거리며 놀고 있던 귀신들도 우르르 창가로 다가오는 바람에 유리창마다 푸른 얼굴이 두둥실 떠다녔다. 밤바람에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간이야?”

“인간인가 봐.”

“인간치고는 기운이 이상해.”

“헌터 아닐까. 귀신 잡아다 저승차사들이랑 거래하는 애들이 있다던데.”

“그게 뭐야?”

“옛날 말로 도사.”

“도사야?”

“도사 같아.”

긴 그림자처럼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며 다가오는 고도는 두 눈만 금색으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손에는 수많은 요괴들의 피가 스며들어 날카로운 짐승 이빨처럼 느껴지는 서전검이 으르렁거렸다.

겁 많은 어린 귀신들은 공처럼 튀어 올라 계룡산 밖으로 멀리 도망가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라, 이상해! 갇혔어!”

“산이 미로가 됐어! 아무리 달려도 여기로 다시 되돌아와!”

“저 도사 짓이야!”

“도사가 우릴 상대로 뭔 짓을 했어!”

겁 많은 귀신 몇이 팔문팔괘를 피해 억지로 진을 벗어나려 했다.

“아악!”

보이지 않는 금줄에 묶였다.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퍼덕이다가 산산조각 나서 소멸되기도 했다.

귀신들은 눈앞에서 죽어나간 귀신들을 보고 자리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 고도를 바라봤다. 원한으로 가득 찬 음울한 시선을 한 몸으로 받아내고도 고도는 태연했다. 그는 쓰레기더미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는 귀신에게 다가갔다.

검은색 우비를 입고 있는 남자다. 손에는 낫과 칼이 들려 있었다. 머리에 푹 뒤집어쓴 모자 밑으로 흰자위가 보이지 않는, 검은 먹물 같은 눈이 보였고, 눈자위 주변으로 음습한 기운이 정맥처럼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인간이었을 땐 최소 열 명 이상의 사람을 죽인 살인귀다. 죽어서도 저승차사와 대립하다가 몸을 숨겨 악귀가 되었고, 재미 삼아 인간들을 홀려 수십 명은 사고사로 죽였을 존재. 폐교에 모인 귀신들 중 가장 악랄한 놈이었다.

“여기 우두머리가 네놈이냐.”

고도는 그런 살인귀 앞에 멈추어 섰다. 고도의 서전검을 보고 슬금슬금 도망가는 다른 귀신들과 달리 살인귀와 살인귀 주변을 맴도는 악귀들은 꿈쩍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새카만 이를 드러내면서까지 히죽 웃을 뿐이었다.

“네놈이 이 산에 진을 쳤느냐? 감히 우릴 묶어둘 생각을 하다니, 제명에 죽기 싫어 발악을 하는구나.”

세월이 너무 오래 지나서 고도를 환영도사라고 단번에 알아보는 귀신이 없는 것은 심히 애통할 일이었다. 고도는 전언(傳言)으로 청사만이 들을 수 있는 자신의 생각을 보냈다.

‘대화할 준비가 안 된 놈들이구나. 다 죽이고 다른 말 통하는 귀신을 붙잡을까?’

청사는 다급히 두 팔을 교차했다. 온몸으로 표현하는 가위 표시에 고도는 입매를 찡그리다가 선량하게 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뭐를 좀 찾고 있다.”

“뭐를 찾기에 귀신들까지 묶으셨을까.”

“아주 먼 곳에서 온 생명체다.”

“외국에서 온 인간이냐. 우리가 잡아먹었나 확인하려고?”

“아니, 인간은 아니고.”

“그럼 요괴?”

“요괴도 아니고.”

“짜증나게 하네. 빨리 말하고 진 풀고 꺼져라. 이럴 시간도 아깝다.”

‘용’이라고 말하면 다들 신나서 보물찾기하듯 흩어지겠지. 이 많은 악귀들에게 예그리나가 쫓기는 것만큼 불쌍한 일도 없다. 뭐라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에 남자가 으르렁거렸다.

“계속 우리를 방해하면 너부터 죽이는 수가 있다, 도사 놈아.”

성급한 살인귀의 협박에 다른 악귀들이 동조한다.

“잡아먹자.”

“만월의 정기까지 받는 밤. 도사를 못 잡을 것도 없지.”

“먹고 우리 힘을 더 키우자.”

“더 키우자.”

고도를 향해 점차 거리를 좁히는 악귀들을 보고 청사 역시 은형술을 풀었다.

“내 자식을 찾고 있다.”

별안간 나타난 청사를 향해 모든 악귀들의 시선이 옮겨졌다. 고도에게는 눈을 부라리던 악귀들마저 청사를 볼 땐 비웃던 미소마저 완전히 지울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정장 차림에 긴 머리를 묶은 것이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형상이었으나, 그가 긴 다리로 느긋하게 다가올 때마다 어둠이 물러났다. 밤을 걷어낸 자리를 달빛으로 밝히며 다가오는 그에게 만물이 호응하고 있었다. 훈풍과 싱그러운 녹음과 들풀의 향기로 속눈썹 한 올, 손톱 끝마저 적시는 이는 하계의 생명이 아니었다.

신비롭고 고귀하여 정기가 가득한 산속 만물마저 굽어 살피는 존재. 귀신들이 보고 도망 다니던 저승의 존재도 아니니, 남은 답은 하나다.

“오호라, 선녀탕에 떨어진 새끼용 아비구나.”

청사의 파란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날 한 번에 눈치채다니. 네놈, 내 아이를 봤구나.”

“이게 웬 떡이냐, 부모자식 용이 한꺼번에 나타나다니!”

탐욕스러운 악귀가 뒤집어쓰고 있던 우비 모자를 젖혔다. 그가 잡아먹은 혼령들이 뒤통수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살인귀가 골목대장 노릇하며 저승차사들을 피해 힘을 키울 수 있던 것은 선량한 혼을 잡아먹은 덕택이었다. 그 탓에 살인귀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용고기 뜯어보는 건 처음인데 얼마나 맛있을지!”

청사를 어디 산속에 살던 평범한 뱀이 이무기로 자란 것쯤으로 여긴 것이다. 갑자기 달려드는 악귀들에 청사는 어리둥절했다.

뭐지, 죽으려고 달려드는 저 어리석은 것들은? 죽여줘도 되나?

고도는 저를 지나쳐 쌩, 날아가는 악귀들을 돌아봤다. 순식간에 악귀 열이 청사를 감쌌다.

죽여도 되나 보다.

간단하게 생각을 마친 청사가 팔을 들었다. 그보다 먼저 고도가 움직였지만 말이다.

“어허, 어르신 말하는데 먼저 자리를 뜨다니.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고도가 검을 들고 몸을 반 바퀴 빙글, 돌았다. 허공으로 부풀어 오른 옷자락이 땅에 가라앉기도 전에 서전검이 고도의 눈동자와 똑같은 색으로 빛났다. 마치 오랜 굶주림으로 광기에 절은 폭군 같은 모습이었다.

검은 몽당의 손에서 단 한 번도 요괴나 귀신을 잡아먹지 못했다. 피를 무서워하는 도깨비였던지라, 다른 생명을 해하거나 죽이는 일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서전검은 몽당에게도 ‘인간 왕의 검을 소유한 도깨비 왕’의 의미 이상이 되지 못했건만. 300년 만에 먹이가 눈앞에 있으니 서전검으로서도 간만의 포식을 기대할 만했다.

달빛을 머금은 검날이 그대로 악귀의 머리통을 반으로 갈라버린다. 입을 쩍 벌린 악귀는 기다란 비명을 지르며 검날로 빨려 들어갔다.

“?!”

근처에 있던 악귀가 고도의 움직임에 놀라서 돌아봤지만, 고도는 손안에서 덜그덕거리는 서전검만 달랬다.

“아가, 천천히 먹어야지. 그렇게 폭식하다가 배탈 나고 만다.”

오래된 물건에 신이함이 깃들면 그 자체가 화신이 되어 영체를 얻게 되고 마니. 왕가를 위해 만들어진 후 고도의 손에서 수백 년간 요괴들의 피를 머금었다. 그리고 다시 수백 년간 도깨비 왕의 기력을 받으며 보존되었다. 태생부터 특별한 서전검은 특별한 존재들의 손을 거치며 가장 별난 보검이 되어 있었다.

‘우우웅.’

공명하는 철의 노래에 귀신들이 움찔한다. 한쪽 발끝으로만 서 있는 고도는 그 몸놀림이 더 이상 하계의 것이 아니었다. 도력을 발산하여 귀신들을 도발하거나 제압할 필요도 없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는 한번 몸을 움직이면 허공에 긴 잔상만 남겼다. 힘에 굶주린 검을 쥔 고도를 피해 악귀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개중 퇴마를 업으로 삼는 인간과 몇 번 전투를 겪어봤던 악귀들은 순식간에 대처 방법을 강구했다.

“잔재주를 부리는 인간 놈에게 당할쏘냐!”

몇 악귀들이 폐교 건물로 숨어든 선량한 귀신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귀신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영혼이 뜯겨 나가는 귀신들 입에서 끔찍한 귀곡성이 울렸다. 달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던 원혼들이 풍선처럼 터지고 검게 물들었다. 죽은 이후에도 잔인하게 도륙당한 원혼들의 한이 우우우, 소리를 내며 산비탈까지 바람처럼 떠돌았다.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진한 원혼의 한기에도, 음기를 한꺼번에 삼킨 악귀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집을 부풀려 집채만 한 덩치로 바뀌었다.

“쿵!”

한발 내딛을 때마다 학교 뒤편 공터가 울린다. 형체 없는 귀신이 산신의 영역에서 물리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악귀에서 요괴로 변했다고 봐야 했다. 저승차사들이 보면 갱생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판단하여 당장 금줄로 속박해서 지옥에 집어 던지리라. 물론, 저만한 힘을 가진 악귀를 끌고 갈 만한 저승차사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다만.

고도가 서전검을 빙글, 돌려 잡았다.

“어디 보자, 그냥 휘두르면 산이 반 토막 날 텐데.”

힘 조절을 걱정했다. 천계 생활로 체질이 바뀐 자신의 힘을 사전에 가늠해 보지 못한 것이 문제다.

“아가, 분노를 잠재우거라.”

고도의 명에 허공에 공명음을 우우웅, 울리던 서전검이 잠잠해졌다. 고도는 사뿐히 딛고 있던 발을 뒤쪽으로 밀어냈다. 사선으로 비스듬히 섰다. 도력을 거의 지운 상태로 검기를 일으켰다. 고도의 도력을 받아먹은 서전검이 금빛으로 번쩍이는 순간이었다.

‘콰가가가가강!’

손목만 살짝 휘둘렀을 뿐인데 용오름처럼 솟아난 바람이 그대로 폐교 건물을 부서트렸다. 남향으로 늘어선 창문이 한꺼번에 터지며 유리 가루가 난사됐다. 벽돌이 부서지고 대들보가 우지끈, 반 토막이 나서 공터 뒤쪽까지 날아갔다. 해일에 휩쓸리듯 한꺼번에 날아간 건물 자재들이 산 밑동에 퍽퍽, 소릴 내며 박혔다. 흙먼지가 안개처럼 뿌옇게 떠오른 자리엔 뿌리째 뽑혀 엉망이 된 흙바닥만 남아 있었다. 건물은 지나가던 거인이 입 바람을 후, 불어버린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람으로 쓸어버린 자리엔 귀신들을 집어삼키느라 미처 피하지 못한 악귀가 산산조각 나서 연기처럼 피어올라 소멸되기도 했다.

“뭐, 뭐야, 일개 도사가 아니잖아!”

힘의 차이를 실감한 악귀들이 쏜살같이 도망간다. 고도가 다시 검을 휘두르려다 움칫했다.

“이거 원, 힘 조절이 안 되는데…….”

서전검이 다시 흥분하거나 고도가 힘 조절에 실패하면 산등성이가 날아가게 생겼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악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황금색 눈을 도르르, 굴리는 사이였다.

덩치 크고 식탐이 무식한 악귀들과 달리, 냉정한 살기만을 가득 담고 있는 무리의 우두머리, 살인귀가 청사를 덮쳤다.

“네놈 하나 잡아먹고 나도 이무기가 되어 보자!”

바지 주머니에 느긋하게 손을 꽂고 있던 청사가 살짝 턱을 들었다.

“고도가 오랜만에 몸을 푸니 장단을 맞춰주고 싶다만.”

바지에서 한쪽 손을 빼낸 청사가 뒤통수에서 울부짖는 원혼들을 삼킨 살인귀를 향해 엄지와 중지를 붙였다.

“주제 모르고 날뛰는 것들을 봐주기엔 내가 엄격한 규율과 통제하의 천궁 생활에 익숙해져서 말이다.”

손가락 두 개를 맞대어 ‘딱!’ 소리를 낸 순간, 쩌억 찢어진 입으로 청사를 집어삼키려던 악귀의 머리통이 터졌다.

‘펑!’

동시에 갇혀 있던 원혼들이 바람에 분 민들레 씨앗처럼 화악, 번져 나갔다. 바닥으로 쓰러진 머리 없는 살인귀는 그대로 검은 연기에 갇히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청사는 재처럼 날리는 살인귀 흔적을 발로 짓밟으며 느긋하게 고도에게 다가왔다.

“고도야, 천계의 힘은 아예 쓰지 않는 게 좋단다.”

악귀들은 이미 깊은 산속으로 흩어졌다. 팔문팔괘진을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니, 고도가 마음만 먹으면 그 악귀들을 괘로 붙잡아 소멸시킬 수는 있다. 하나, 조금 전에 서전검을 가볍게 흔든 것만으로도 건물 하나가 송두리째 날아가지 않던가. 힘을 쓰기 망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오랜만에 ‘곤란한 고도의 표정’을 본 청사가 씨익 웃었다.

“천계의 힘은 말이다, 하계의 존재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커서, 여러 번 연습해야만 겨우 조절할 수 있거든.”

간만의 포식을 기대했건만, 간에 기별도 하지 못한 서전검이 신경질적으로 울고 있으려니, 고도는 입맛을 다시며 청사를 돌아봤다.

“그러는 너는 어찌 그렇게 힘 조절을 잘 하느냐?”

“나야 뭐, 너 만나기 전까지 하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힘 조절을 익힌 것이고.”

“날 만나기 전이라.”

“날 죽통에 가뒀을 때 말이다. 우리의 첫 만남을 그새 까먹은 게냐?”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때까지만 해도 아예 천계의 힘을 쓰지도 않았다. 건방진 도사에게 붙잡히는 건 기분 나쁘지만, 죽통 안에 갇힌 수천 마리 요괴들을 보니 한낱 인간이 이리도 힘이 강하다는 것에 궁금증이 들어서 내 의지로 얌전히 있기도 했지.”

손가락 하나만 까딱여도 세상이 흔들리는데, 함부로 힘을 쓰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청사가 자신의 신분을 속이기 위해 죽통에 붙잡히는 것까지 감수했던 것을 고도는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칫 실수하면 하계 전체가 무너질 판이다. 하계의 균형을 맞춰야 하는 의무가 있는 천룡이 그렇게까지 직무 유기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으음, 너무 강해도 문제구나.”

“네가 하계에서 도사로 불릴 때완 비교할 수 없어질 만큼 강해지긴 했지.”

“어쩌면 좋으냐. 이렇게 넘치는 힘으론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것도 무서운데.”

고도는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나 강아지를 보듯 하계를 대했다. 그 태도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귀여웠던 나머지 청사가 푸흐흐, 하고 웃었다.

“하계에서 힘쓰는 건 내가 더 요령이 좋은 거 같구나. 어떠냐, 내가 좀 도와주련?”

고도는 시무룩해졌다. 다른 방법이 없는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청사는 그 모습이 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고도 손에서 칭얼거리고 있는 서전검을 받아 든 청사가 고도의 말랑말랑한 볼에 쪽, 뽀뽀를 해주었다.

“나중에 네 힘 실컷 쓸 수 있도록 해주마. 조금만 참아 보자.”

서전검은 청사의 손 안에서 갑자기 예의 바르고 조용한 검이 되었다. 고도는 제 손 안에선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던 검이 청사에겐 납작 엎드린 그 모습이 기가 막혀 “허” 한소리를 뱉었다.

“이런 얍삽한 놈을 보았나.”

고도의 욕에도 서전검은 이 세상 가장 순종적인 양이 된 것처럼 청사에게 제 모든 걸 맡겼다.

“네가 포악한 검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성향인 걸 검도 아는 거지.”

“그럼 너는 통제하는 성향이더냐.”

“물론이지. 하계의 모든 존재는 내 발밑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예외가 될 수는 없어.”

“오호라, 그럼 나도?”

“고도야, 너는 내 사람이다. 하계의 존재가 아니야.”

청사는 고도가 쓸데없는 생각을 더 하기 전에 서전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산신에게 양해를 구한다. 악귀들을 처리하는 데 약간의 소란을 감수해 달라.”

거꾸로 선 검자루를 손바닥으로 쿵, 내려치자, 금빛을 띠던 검이 이번엔 새파랗게 빛났다. 그 빛은 땅 밑으로 번져 한순간에 산 전체를 뒤흔들었다. 곳곳에서 연기처럼 파란 빛줄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청사의 기운이 관통하도록 산이 눈감아준 것이다.

“산신에게 묻는다. 내 아이가 있는 위치를 알려 달라.”

땅 위로 솟구치던 파란 빛의 기둥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만 남는다. 북쪽 골짜기 어드메였다.

“이런 방법이 있었으면 진작 할 것을!”

고도가 툴툴거리며 외치자 청사는 검을 뽑으며 대답했다.

“산신의 성격을 몰라서 바로 해볼 수 없는 방법이야. 갑자기 자기 몸에 검을 꽂고 천계의 힘을 내보내면, 포악한 성정을 가진 산신들은 노해서 우릴 가둬버릴지도 모르잖아.”

계룡산 산신이 온화해서 다행이라는 소리였다. 하긴 어떤 산신은 이무기의 모습으로 제 땅 밑에 숨어 잠들어 있기도 하다. 그 경우엔 갑자기 천계에서 내려온 존재가 단잠을 방해하는 셈이니 기분 좋게 응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계룡산 산신은 꽝철이처럼 화가 많은 이무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일이 잘 풀렸으므로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기로 했다.

“악귀들이 도착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가자.”

청사는 고도의 허리를 한 팔로 안았다. 축지를 쓰는 건 고도의 장기였지만, 아직 힘 조절 감을 잡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 청사가 실력을 발휘했다. 그 사이에 고도의 소매 안에 들어 있던 나침반의 자침이 움직였다.

달칵.

달 문양을 가리켰던 바늘 끝이 입을 가리킨다.

악귀들이 예그리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산 전체에 금색 도술로 만든 진이 그려지자 예그리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도의 기운이었다. 따뜻하고 다정한 그 기운에 나뭇가지 위에 몸을 숨기고 있던 예그리나는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삐이.”

낯선 곳에 혼자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나와 본 적이 없었다. 잉어들이 일러준 구미호는 어디 가서 찾아야하는지 막막했고, 아무리 높게 날아도 천계에 닿지 않아서 아득한 기분마저 들었다. 절망과 불안 속에서도 눈물을 꾹 참고 있던 예그리나는 고도의 기운을 감지하고 설움과 희망을 동시에 느꼈다. 작은 앞발로 눈물을 슥슥 닦아낸 예그리나는 나뭇잎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낮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던 등산로는 밤이 되자 부엉이만 간혹 울어대는 스산한 곳으로 바뀌었다. 다람쥐 한 마리가 나뭇가지 사이를 폴짝 뛰어다니다가 예그리나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예그리나는 생전 처음 보는 동물에 눈만 동그랗게 떴다. 서로를 순하고 동글동글한 눈으로 바라보던 때에 근처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울어댔다.

“끄아악!” 

사람 비명처럼 내지르는 소리에 다람쥐는 놀라서 후다다닥, 나무 위로 달아나버렸다. 예그리나는 근처에 수상쩍은 움직임이 없다는 걸 확신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나무 밑으로 내려왔다. 호기심 많은 다람쥐 하나가 뒷발로 딛고 서서 예그리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종일 공복 상태였던 예그리나의 시선이 그런 다람쥐에게 고정되었다. 간에 기별도 안 갈 조그마한 짐승이지만, 그래도 꼬르르륵, 천둥이 치는 뱃속을 잠깐 달랠 수는 있을 터. 침을 꼴깍 삼킨 예그리나가 조심스럽게 다가갈 때였다.

무언가가 예그리나의 날개를 잡아 올렸다. 놀란 다람쥐가 부리나케 나무를 타고 오르는 사이에 예그리나는 자기를 덥썩 잡아 올린 존재를 돌아봤다.

등산복을 입고 있는 인간이었다. 아니,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예그리나가 접해본 인간 중 이런 음산한 기운이 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남자의 눈 주변엔 검은 기운이 고여 논두렁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그 갈라진 틈으로 검은 기류가 스멀스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삐?”

두 눈을 깜빡이는 예그리나를 보며 등산복을 입은 악귀가 히죽 웃었다.

“잘 먹겠습니다!”

입을 벌린다. 쩌억, 벌어진 턱이 그대로 툭, 소릴 내며 빠지더니 덜렁거리는 아가리 속에서 두 개로 갈라진 뱀의 혀가 튀어 나왔다.

구렁이 요괴였다. 정기 가득한 산속에서 토끼나 다람쥐를 잡아먹고 수십 번의 동면을 겪으면서 인간으로 모습을 바꿀 수 있게 된 요괴. 요괴라면 아주 옛날 옛적, 고도의 친구인 구미호를 잠깐 봤던 게 전부였기에 지식이 짧은 예그리나는 대응책도 모른 채 본능적으로 꼬리를 휘둘렀다.

‘퍼억!’

요괴는 갑자기 꼬리로 뺨을 맞는 바람에 멈칫했다. 예그리나는 그 틈에 요괴 손을 콱 깨물었다.

“아악!”

손을 흔들어 터는 순간 날개를 펼쳤다. 재빨리 하늘로 날아가려 했지만 한발 늦고 만다.

“이 건방진 게!”

요괴가 팔을 길게 뻗어 달아나려는 예그리나를 붙잡았다.

“삐익!”

몸부림치는 예그리나의 발톱에 요괴의 살점이 떨어져나간다.

“아오!”

“삑, 삑!”

“가만히 안 있어!”

“삐이이!”

사정없이 물어뜯고 할퀴는 예그리나에 손이 엉망이 된 요괴는 더는 봐주지 않았다. 꼬리를 옮겨 잡아선 바닥에 패대기쳤다. 바위에 쿵, 몸이 던져진 예그리나가 충격에 기침을 토했다. 요괴는 꼬리를 다시 잡아 바닥에 내던졌다. 서너 번, 바닥에 내려치는 공격이 이어지자 머리에 피를 흘린 예그리나의 몸이 축 늘어졌다.

상처투성이인 손을 턴 요괴가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는 예그리나를 잡아 올렸다. 축 늘어진 채 피를 뚝뚝 떨어트리는 긴 몸을 공처럼 돌돌 말았다. 그러곤 한입에 꿀꺽 삼키려는 순간이었다.

“끅!”

무언가가 요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 충격으로 예그리나는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동그랗게 말린 예그리나가 산비탈을 따라 데굴데굴 구르다 돌부리에 걸렸다. 핏물이 배어 든 눈을 간신히 뜬 예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요괴 앞에 집채만 한 덩치의 악귀가 서 있었다. 얼마나 많은 원혼을 집어 삼켰는지, 거인 같은 몸속에 원혼 수백이 갇혀 있다. 그들은 얼굴을 내밀며 스산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내 것이다!”

악귀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예그리나를 잡아 올렸다. 그대로 한입에 삼키려는 것을 구렁이 요괴가 날카롭게 뽑은 송곳니로 다리를 물어뜯어 멈추어 세운다.

“내가 줄곧 노리던 걸 감히!”

요괴와 악귀의 싸움에 다시 바닥으로 내팽개쳐진 예그리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소란한 낌새를 알아챈 악귀들이 여럿 날아오기 시작했다. 머리를 흔들어 간신히 정신을 차린 예그리나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악귀를 보고 허겁지겁 날아올랐다.

뒤에서 내뻗는 손길을 피해 몸을 빙글, 돌려 다른 쪽으로 날아갔다. 그러다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악귀의 손에 잡힐 뻔한 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도망가는 예그리나의 뒤꽁무니를 따라 요괴와 악귀들의 거센 손길이 쿵쿵 내리 찍혔다. 미꾸라지처럼 날렵하게 도망가는 예그리나에 약이 바짝 오른 악귀들이 소리 질렀다.

“정기가 맑은 짐승이야. 잡아먹으면 이곳에 더 머물 수 있어, 놓치면 안 돼!”

“차사들을 속일 수 있어.”

“깨끗한 영혼 흉내를 낼 수 있어.”

“우릴 죽인 새끼들에게 복수할 힘을 얻을 수 있어.”

속살속살, 빠르게 터져 나오는 목소리에 이어 요괴도 외쳤다.

“너흰 귀문이 열린 인간이나 찾아! 신수는 내 꺼야!”

악귀 몸에서 떨어져 나온 원혼들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목 돌아간 귀신들이었다. 그들은 일어나 뒤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놀란 예그리나가 소리 질렀다.

“삐이이!” 

파다닥, 날아 도망치려 했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뻗어오는 귀신들의 손아귀에 몸통이 붙잡히려는 때였다.

“오케이, 내가 찾았음!”

명랑한 여자 목소리다. 누군지 확인할 새도 없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뒤따랐다. 예그리나를 쫓던 귀신들 앞을 막아선 여자가 양손으로 허공을 그었다. 바람 소리와 동시에 산속에 빽빽하게 자라난 나무들이 세로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장작 패는 도끼질을 당한 것처럼 세로로 길게 잘려진 나무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갔다.

꽃가지처럼 꺾어버린 나무 위에 한 여인이 올라선다. 긴 머리가 거친 산바람에 흩날리는 여인은 치마 밑으로 아홉 개의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인간들이 만든 무기보다 더 강력하게 제련된 손톱이 달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그녀를 보고 예그리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안녕, 꼬마 용아. 우리 구면이지? 인사는 좀 나중으로 미룰게.”

몸을 낮춘 미호 주변으로 하얀 요기가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몽혼(夢魂).”

하얗게 피어오른 요기가 구렁이 요괴의 입과 코와 귓속으로 흘러든다. 구렁이는 강한 독에 중독된 것처럼 몸이 굳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구미호와 요괴는 태생부터 달랐다. 날 때부터 요물로 태어나는 구미호와 짐승으로 태어나 요괴가 된 구렁이는 힘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났다.

“넌 뭐냐! 이 산엔 구미호가 없는데!”

“응, 여긴 마을이 너무 작아. 혈액 팩을 몰래 빼돌리면 바로 티가 나서 살 수가 없겠어.”

“그런데 왜 여기까지 와서 남의 식량을 탐내!”

“식량? 식량이라고?”

놀란 미호가 쯔쯔, 혀를 찼다.

“이 무식한 요괴 새끼야. 네가 지금 누굴 건드렸는지 모르나 본데.”

마비된 요괴 곁으로 사뿐히 다가간 미호가 목덜미를 기다란 다섯 손톱으로 잡았다.

“네놈의 무식한 짓거리에 천계의 노여움을 사서 하계에 뇌우가 쏟아질 뻔했어.”

손톱에 힘을 준 순간, 목뼈가 우드득 부러진다. 미호는 산산조각 낸 목뼈에서 머리통을 분리했다. 혀를 축 내민 머리통을 안아 든 채 불그스름한 요기를 피워 올렸다.

“예그리나, 이리 오렴.”

머리통을 안은 채 생긋 웃는 미호의 모습은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다. 요괴 중에서도 급이 높은 미호 특유의 기백에 잠시 얼어붙어 있던 예그리나가 조심스럽게 날아와 미호의 어깨 위에 앉았다. 미호는 예그리나의 머리 상처를 살폈다.

“가엾은 것. 꽤 많이 찢어졌네. 아프진 않니?”

“삐이.”

“튼튼하고 씩씩해서 다행이다. 조금만 있으면 치료해줄게. 그 전에 여기서 한바탕 난리굿을 펼칠 예정이란다. 너무 놀라지는 말자, 알았지?”

예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스럽게 미소 짓던 미호는 주변으로 갈색 꼬리를 가진 구미호들이 다가오자 미소를 지웠다. 그녀는 다정함 대신 요사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천계의 존재를 건드린 죗값을 받아가야겠구나. 안 그러면 대롱이와 고도가 난리를 칠 거야. 너희들 탐욕 때문에 우리 구미호 사는 데까지 망가질 순 없거든.”

여우들이 이빨과 손발톱을 모두 꺼냈다. 그 모습을 본 악귀들이 코웃음을 쳤다.

“산 자가 죽은 자를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으냐!”

“원래대로라면 우리가 너흴 공격하지 못하는 건 맞는데.”

도중에 말을 멈춘 미호가 곰방대 하나를 꺼내들었다. [구미호 만물상]에서 챙겨온 끽연대다. 저승을 오가는 인두조수 요괴가 저승차사에게서 몰래 훔쳐온 것을 사들인 보람이 있었다. 불을 붙인 곰방대를 입에 머금는다. 뻐끔, 피워 올린 연기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주변을 물들였다.

“‘죽은 자의 숨결’ 속에선 우리도 너희를 공격할 수 있단다.”

연기가 순식간에 주변을 덮었다. 갈색 꼬리를 가진 구미호들이 진영을 짜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미호들이 연기 사이를 미끄러지듯이 달렸다. 저마다 꺼낸 단단한 손톱으로 악귀를 길게 그어내렸다.

“크흑!”

구미호 손톱에 악귀의 복부가 찢어진다. 찢어진 몸 밖으로 혼령 몇이 길게 비명을 지르며 빠져나갔지만 다시 붙잡아 삼켰다.

“육시랄! 오늘따라 희한한 재주를 부리는 것들만 몰려서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악귀가 미호의 어깨를 붙들고 있는 예그리나에게 손을 뻗었다.

“내놔!”

쭉 내뻗는 귀신의 손을 보고 미호가 갈무리했던 손톱을 꺼냈다. 날아온 악귀와 미호의 힘이 부딪히기 직전, 금빛 기운이 쏜살처럼 그 사이를 막았다.

‘팡!’

마치 허공의 공기를 밀어내는 것처럼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휘몰아친 바람에 구미호와 악귀들이 동시에 날아갔다. 예그리나도 미호의 품에서 밀려나 허공으로 빙글빙글 솟구쳤다.

“삐이이!”

놀라서 소리 지르는 예그리나를 누군가 잡아서 품에 안는다. 예그리나는 정신없는 시선을 들었다. 그러자 머리를 하나로 높다랗게 묶은 청사의 파란 눈과 마주쳤다. 울상이던 예그리나의 만면에 반가움이 퍼지려 할 때, 자신을 날려 보냈던 바람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팡, 팡, 팡, 팡!’

소리 가운데에 검은 두루마기를 휘날리는 이가 서 있었다. 그가 손짓 한 번 휘두르면 악귀들이 이리 밀렸다가 저리 밀리며 와르르 쓰러졌다. 돌풍이 일어나며 바람에 옷깃이 나부끼고, 소매가 고운 산 능선처럼 흩날린다. 콧잔등에 성의 없이 걸친 검은색 선글라스를 고쳐 쓰면서 달아나려는 귀신들까지 쫓았다.

“천룡을 알아보지 못한 우매한 네 자신을 탓해라. 알면서도 건드렸다면, 소멸을 각오했다고 봐야겠지?”

환영도사 고도. 한때 이 땅 위에 그 악명이 자자할 정도로 명사(名士)였던 이.

천계 생활에 익숙해져 자신의 능력을 조절하는 법을 익히지 못해 잠시 애를 먹었지만, 그에게 천부적인 재능은 언제나 노력 이상의 결과를 가져왔다. 청사의 조언 하나로 하계에서의 능력 운용을 감 잡을 수 있었다.

‘네가 편하게 느끼는 힘을 배꼽 아래로 눌러라. 단전에 있는 진명의 보주에 힘을 모아두는 게다. 그리하면 네가 쓰지 않았던 도력들이 자연스레 네 몸속에서 퍼져나갈 것이다. 모르겠으면 도와주랴?’

몸도 마음도 편해지는 천계의 힘을 억지로 구석에 밀어 넣고, 이젠 어색하게 느껴지는 하계의 힘으로 사지를 묶어두었다. 몸이 뻐근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어쩌랴. 이렇게 불편을 감수해야만 산을 통째로 날려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을.

넘치는 능력을 일부러 낭비하는 방향으로 도력을 연달아 운용했다.

“인영분신(人影術法).”

오른쪽으로 손을 휘두르자 자신과 똑 닮은 분신들이 수백 튀어나와 귀신들을 속박했다.

“하도태을풍(河圖太乙風).”

허공에 붓질을 한 것처럼 바람이 소용돌이쳤으니, 손을 왼쪽으로 휘두르자 바람이 올가미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는 귀신들을 끌어왔다.

“방방하연지라!(方方河演池)”

거세게 불던 바람이 한곳에 모여 용오름으로 솟구치니, 그것이 만약 물이었다면 거스를 수 없는 물살에 잔잔한 못도 흔적도 없이 뒤집혔을 것이다. 고도로선 고작 능력치의 반의 반도 안 되는 힘을 개방한 것이지만, 귀신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큰 힘이었다.

“키이이익!”

바람을 이기지 못한 악귀가 땅으로 처박힌다. 억지로 삼키고 있던 귀신들이 그 충격에 밖으로 일제히 뛰쳐나왔다. 원혼이 허공으로 달아나 자취를 감추면서 악귀의 힘도 급속도로 약해졌다.

“자, 잠깐, 끄억!”

나무 사이로 숨는 악귀를 고도의 분신이 쫓아가 바닥에 냅다 꽂아버린다.

“안 쫓을게! 용 안 잡아먹는다고! 으어어!”

“반성이 늦다, 이놈아.”

땅 밑으로 사라지려는 악귀는 또 다른 분신이 목덜미를 잡아 질질 끌고 와 바닥에 패대기쳤다.

“젠장맞을 도사 놈!”

“어쭈, 반성하는 척한 게야? 아직 더 두들겨 맞아야겠어.”

아직 원혼을 다 토하지 않아 힘이 정정한 악귀들이 쏜살처럼 위로 솟구쳤다. 고도가 무릎을 살짝 굽혔다. 몸을 조금씩 낮추자 부드러운 흙이 움푹 파이기 시작했다. 고도는 푹 꺼지는 바닥을 박차 올랐다. 악귀들을 향해 약간의 힘을 더 개방하려던 찰나였다.

“어딜 가니, 얘들아?”

미호가 더 빨랐다. 그녀는 귀신의 허리를 붙잡아 그대로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커억!”

땅이 흔들리는 충격에 산신이 놀라서 우르르, 몸을 떨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마을에서 키우던 개들이 동시에 컹컹 짖어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가로등 불빛도 껐다 켜지며 반짝거리는 것이 은하수 춤사위처럼 보이기도 했다.

미호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얘들아, 한 놈도 빼놓지 말고 붙잡아! 달의 정기를 먹어서 오늘은 좀 싱싱하게 날뛸 테지만, 이것들 잡아다 저승차사랑 거래하면 솔찬한 돈벌이가 되지 않겠느냐?”

미호의 손짓을 따라 갈색 꼬리 여우들이 따라붙었다. 그들 역시 미호만큼 신나 있었다.

“맛없는 혈액팩 대신 싱싱한 간을 사먹을 돈!”

“싸그리 붙잡아 저승차사에게 팔아넘기리라!”

미호가 곰방대를 꺼내 후우 불었다. 뿌옇게 번지는 안개 속을 고도의 분신이 파고든다. 구미호와 고도의 분신들이 우당탕탕 합작을 벌여 귀신들을 붙잡기까지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소란을 듣고 도깨비들이 날아오기도 전에 상황이 종료되었다.

뒤늦게 나타난 몽당이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며 남은 귀신들 머리를 쿵쿵 내려찍었다. 귀신들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만, 미호는 어찌되었든 상관없다며 까르르 웃기만 했다.

“하하, 오늘 진짜 쏠쏠하다! 당분간 잔치만 벌이면서 생간을 실컷 사서 먹을 수 있겠어!”

미호는 귀신 머릿수를 보며 군침을 흘렸다. 요괴의 미덕인 악독함을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은 바람직한 모습이었다.

*

고도의 도술로 예그리나의 머리 상처는 깨끗하게 치유되었다. 상처는 사라졌지만, 오랫동안 혼자서 고군분투했던 예그리나는 기운이 없었다. 평소엔 청사의 위엄에 고개를 조아리던 아이가 지금은 품에 안겨 옷깃을 꼭 붙잡고 놔주지 않을 만큼, 마음이 약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빤히 구경하던 미호가 눈치 없게 그런다.

“하이고, 애기는 그대로네. 어떻게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일까? 얘는 대롱이, 너처럼 사람 모습 못 하니?”

그 말에 청사 품에 안겨 있던 예그리나 얼굴이 순식간에 서럽게 변한다. 울먹이는 모습을 보고 청사는 미호를 노려봤다.

“애가 좀 성장이 느릴 수도 있지, 지진아, 너 같은 입장이 아니야.”

“이익, 귀엽다고 한 걸 뭐라 그래? 궁금해서 묻는 거지!”

“눈치도 없는 여우가.”

“자기 새끼만 이쁜 줄 아는 이 팔불출 용이!”

망태기에 잡아들인 귀신은 도깨비들이 책임지고 저승차사들에게 인도하러 갔다. 차사들은 야근과 잔업에 시달리는 저승 공무원의 삶을 토로하느라 도깨비들을 붙들고 놔주지도 않았다. 신세 한탄하는 저승 공무원들에게서 빠져나오느라 갖은 애를 다 먹은 도깨비들은 고도 일행에 뒤늦게 합류한 뒤에 저들이 시달린 사연을 들려주었다.

‘요즘은 자살하는 김서방이 늘었다며.’

‘술 마시고 홧김에 같은 김서방을 죽이기도 한대.’

‘그뿐이랴, 차에 치여서, 공사하다 뭐 떨어져서, 길가다 미친 김서방한테 당해서 죽기도 한다며!’

‘저승차사들이 살생부를 업데이트하는 것도 일이라고 울더라, 으하하하.’

‘우리와 요괴 도움이 없으면 365일 철야를 했을지도 모른다며 이번에도 고맙다던데. 환영도사야, 네 얘기는 쏙 빼고 말했으니 탈은 없을까 걱정하지 말거라.’

고도는 저승차사들의 고통과 고뇌를 퍽 즐겁게 들었다.

“더 고생했으면 좋겠구나. 퀭한 얼굴이 더 퀭해지면 좋겠어.” 

해맑게 저주하는 고도를 청사가 거들어준다.

“차사 일을 마치면 인간으로 환생하거나 천계로 올라올 텐데, 뭐가 됐든 차사직을 계속 이어가면 좋겠구나.”

저승과 얽힌 고도의 개인적인 원한이 어느새 천계를 대표하는 천룡의 저주로 번졌으니, 그 얼마나 불행한 일일까. 이래서 사람 일은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지라, 성실하고 착하게 살라는 어르신들 말씀이 있는 거라며 옆에서 듣던 미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희 둘 다 오늘 바로 천계에 돌아갈 거니?”

고도는 미호가 살고 있다는 옥탑 평상에 앉았다. 계룡산의 일을 마무리 짓고 서울로 다시 돌아온 터였다. 고도는 알전구가 주렁주렁 매달린 난간 너머 서울의 밤풍경을 바라봤다. 인왕산과 북악산이 둘러싸고 있는 언덕길에 위치해 있어 풍경을 감상하기 좋았다. 빌딩과 자동차, 사람이 넘치던 도심과 달리, 이곳은 한적하고 하늘이 넓었다. 달빛이 잘 드는 집이 아니면 구미호로서 인간의 모습을 잘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선택한 거처라던가. 사방이 탁 트이고 북으로 산들이 귀문을 막고 있어 기운이 좋은 곳임은 분명했다.

이대로 하계를 떠나면 언제 또 내려올 수 있을는지.

시원섭섭하면서도 아쉬운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글쎄. 바로 올라가지 않아도 되긴 한다만.”

예그리나는 피곤한지 곯아떨어졌다. 여전히 청사의 옷깃을 꼭 쥔 채다. 이곳에서 가장 믿을 만한 청사 곁을 떠나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미호가 그런 예그리나를 이용해서 고도를 붙잡아 보았다.

“그럼 더 놀다 갈래? 애기도 피곤해 보이는데 좀만 쉬다 가.”

“음.”

망설인다, 망설여.

미호는 고도에게 시원한 맥주를 건네며 눈을 빛냈다.

“산해진미가 가득한 세상이라고. 인간들이 먹고 입고 노는 거 보면 입이 떡 벌어질걸?”

거품이 하얗게 올라오는 맥주를 한입 꼴깍 삼킨 고도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걸 위해서라도 반드시 남아야겠구나.”

같이 놀 친구가 생긴 것처럼 미호가 까르륵 웃었다.

“세계 맥주 다 마시고 올라가.”

“이런 게 많더냐?”

“당장 저 편의점에만 가도 20종 넘게 살 수 있어. 안주로 이 과자도 먹고.”

바사삭, 입안에서 부드럽게 부서지는 감자칩에 고도의 목소리가 한층 더 감격에 젖는다.

“세상에.”

고롱고롱고로롱, 잠이 든 예그리나를 대나무를 엮어 만든 과일 바구니에 동그랗게 말아서 내려놓은 청사가 평상 밑으로 다리를 뻗었다.

“지진아, 자꾸 그렇게 고도 꾀어내면 내가 잔소리한다.”

“에잇, 대롱이, 너도 한입 마셔보고 이것도 먹어 봐.”

“치워라. 나 원래 밤늦게 뭐 안 먹는다.”

“다이어트하니?”

“그게 뭔데.”

“살 안 찌려고 식단 조절 하냐는 질문이야.”

처음 듣는 질문이었지만, 청사는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고도에게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거품이 뽀르르 터지는 맥주와 과자 안주에 홀린 고도는 이제 미호보다도 어려 보였다. 구미호가 늙지 않는 아름다움을 영위하는 대표적인 요괴라고 하지만, 영원히 청년의 모습으로 사는 것은 아니었다. 요사스럽게 나이를 먹을 뿐이다. 대부분, 그렇게 늙기도 전에 도사에게 잡혀 죽어서 잘 안 알려졌지만 말이다. 아무튼 300년 넘게 살아온 미호는 우아한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표정과 몸짓에 밴 기품이 인간들 기준에서는 삼십대 청년쯤으로 느껴졌으니, 신문물에 눈을 반짝이며 뭐든 다 접해보려는 고도가 오히려 아이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만년을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갈 반려자 곁에서 청사만 볼품없이 늙어갈 수는 없는 법. 살도 찌지 않게 조심하고, 피부 탄력도 고민해볼 때가 됐다.

“그 다이어트란 거 어떻게 하는 거냐.”

진지한 물음에 미호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청사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눈치 빠른 여우답게 바로 알아챘다.

“히히, 화장품도 챙겨줄까?”

“여자들 연지곤지 찍는 걸 나한테 왜?”

“안티에이징에 남녀 차이가 어디 있어.”

“안티, 뭐?”

“노화 관리, 피부 탄력 관리를 말하는 거야.”

“……줘 봐라. 써보게.”

구미호가 알려주는 미용관리 팁을 천룡이 열심히 듣고 있는 해괴함을 눈치채지 못한 고도가 평상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천계에서 보던 하늘보다 훨씬 멀고 어두웠다. 반짝이는 별무리에선 청사의 둘째 형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도가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건 무슨 별이기에 저리도 크고 아름답게 반짝이느냐.”

미호가 하늘을 힐끔 보며 말해준다.

“인공위성.”

“별이 아닌가.”

“응. 지구를 돌고 있는 인류 문명의 집합체야. 저거 덕분에 사람들이 핸드폰으로 멀리 있는 사람이랑 연락도 하고, 영상도 시청하고, 땅 위의 변화를 포착하기도 해.”

“호오.”

천계인보다 훨씬 유용한 ‘눈’을 가진 셈이로구나. 바스락, 과자만 집어먹던 고도가 청사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화장품 이야기에 더없이 진지하던 청사에게 말한다.

“하계에 더 머물다 가고 싶구나. 네 생각은 어떻느냐?”

고도가 살짝 웃어 보인다. 붉은색, 노란색, 알알이 반짝이는 전구 불빛 속에서 고도가 요정처럼 보였다. 어쩜 볼 때마다 저리도 예뻐지는지. 밖에 내놓으면 남정네, 여인네 할 것 없이 졸졸 쫓아올 것 같이 생겨서는 영 경계심도 없는 저 분위기를 풍기는 건 죄악이었다.

역시 저렇게 예쁜 고도에게 혼자 하계 구경을 시킬 수는 없지.

“당연히 같이 구경해야지 않겠느냐.”

“휴가를 여기서 보내게 되는 셈인데 아쉽진 않고?”

“집에 있어본들 집안 재정 관리해야 하니 쉬는 게 쉬는 게 아닐 테다.”

“그럼 카페도 다시 가보고 싶다. 맥주 파는 곳도 가보고 싶고.”

“너 가고 싶은 곳 다 가보자꾸나.”

“좋다, 좋아.”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미호가 기뻐서 소리쳤다.

“그럼 우리 차 타고 근교 놀러가자! 내가 운전할게!”

“어딜 가보려는 게냐.”

“놀이공원이나 워터파크!”

“거긴 또 어디고.”

“아, 있어. 짱 재밌는 곳인데 나 혼자서는 가기 좀 뻘쭘한 그런 곳들이야. 다른 구미호들이랑 가보려고 했는데 다들 연예인이나 모델 일 한다고 사람 눈치 보인대.”

“연예인? 모델?”

“직업 중 하나야. 사람들한테 물건 파는 직업. 거기 술병에 있는 사진. 우리 부족 애야. 예쁘지?”

초록색 유리병에 웬 처자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황갈색 털을 가진 구미호였는데 미호보다 아랫세대 요괴인지, 요기가 많이 약했다. 구미호들끼리 짝짓기를 하기 어려운 환경이라 인간과의 혼혈이 많이 생긴 탓이라고 능히 유추할 수 있었다.

“신기하구나. 이렇게 얼굴만 보이고 살 수도 있구나.”

“네 때는 상상도 못한 직업들 천지거든!”

“너도 그런 새로운 일을 하지, 왜 만물상에 처박혀 있느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 그런 건 남사스럽더라. 인간 눈치 보면서 살기도 싫고. 오래된 물건들 정리해서 필요한 이들에게 파는 게 더 재밌어.”

“역시 늙은이들끼리 놀아야 하느니라. 젊은 애들은 따라가기가 쉽지 않아.”

“아, 우리 늙은 거 아니거든?!”

누구보다 가장 젊고 아름다운 외양으로 이미 세상 다 산 노인처럼 홀홀거리며 웃는 고도가 기가 막힌 미호였다.

“나 참, 어른들 모시고 여행 다니는 것도 아니고.”

“모셔봐라. 어디 한번 우리 지진아의 여행 안내 실력을 봐야겠구나.”

“아, 됐거든?! 대롱이 너는 얠 데리고 천계에 가서 뭘 보여줬기에 이런 신선이 된 거야!”

“서로를 아끼며 알콩달콩 살았지.”

“아오, 물어본 내가 바보지!”

미호의 반응이 재밌어서 고도와 청사는 서로를 보며 씩 웃기만 했다. 저승차사에게 귀신 인도를 마친 몽당이가 뒤늦게 합류했다. 평상을 모두 차지할 정도로 큰 덩치를 구깃구깃 접어 앉은 그가 술 단지를 열었다.

“몽당, 몽당!”

“우앗! 잠깐만, 몽당이 너 이 녀석! 갑자기 그렇게 앉으면 평상 부러져!”

“몽다앙!”

신난 몽당은 미호의 비명 소리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무게를 감당 못 한 오래된 평상이 우두둑! 소릴 냈다.

“꺅!”

한쪽 다리가 부러지며 고도와 청사, 미호, 몽당 모두 한쪽으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미호가 씩씩거리며 몽당의 수염을 잡아당겼지만, 몽당은 술만 거나하게 마실 뿐이었다. 시끌벅적한 소란에 앞집 아저씨가 “거, 저녁인데 조용히 좀 합시다!”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고도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모두 재밌었다.

“아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고도가 또 실없는 소릴 뱉었다.

“내 피를 이어받아서 호탕하기 그지없어. 어린 도깨비가 이렇게 성장한 동안 지진아, 너는 뭐했느냐? 인간 남자들 다 꿰찼어야지?”

“나 비혼주의자거든?!”

“그건 또 무엇이냐.”

“결혼 안 하고 살 거라고!”

“허어, 너처럼 외로움을 많이 타는 여우가?”

“흥, 친구들이랑 노는 게 더 재밌다, 뭐.”

“너랑 놀아주는 친구들이 보살인 게다.”

“아악, 고도, 너 더 얄미워졌어!”

이야기꽃은 저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용과 인간, 구미호와 도깨비의 이야기에 길 잃은 귀신들도 잠시 앉아서 얘기를 듣고 가는 신비롭고 이상한 밤. 그날은 유독 보름달이 큰 만월의 새벽이었다.

*

풀썩.

욕실에서 씻고 나온 고도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미호의 옥탑 집은 방 하나에 그 방과 분리되어 있는 주방과 욕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방은 침대 하나, 옷장 하나 들어가면 가득 찰 정도였는데 미호는 바퀴 달린 가방에 짐을 싸더니 말했다.

‘차사들에게 귀신 잡아다주고 번 돈으로 생간 파티를 벌이기로 했어.’

‘몽당, 몽당.’

‘도깨비들도 만월이라 대보름축제 한대. 대롱아, 고도야, 우린 해뜨기 전에 돌아올 테니까 좀 쉬고 있어!’

그렇게 미호와 몽당이 떠나가고 빈집엔 고도와 청사만이 남았다. 새벽 산책을 즐겨도 되겠지만, 천계에서 내려와 늦은 시간까지 예그리나를 찾아다니지 않았나. 모처럼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요괴의 기운이 묻어나는 몸도 씻고, 바닥에 요를 까는 천계 생활과 달리, ‘매트리스’라는 곳 위에 이불보를 펼쳐서 잔다는 푹신한 침대에 몸을 묻었건만.

“고도.”

청사가 욕실에서 나온다. 고도 다음으로 씻고 나온 그는 수건으로 긴 머리를 말아 올린 맨몸 차림새였다.

고도는 오랜만에 본 청사의 맨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천궁에 틀어박혀 두루마리만 들여다봤다더니. 하루 종일 사무에 매달렸다고 하기엔 튼튼하고 단단하게만 보였다. 옷을 입고 있을 때는 상상도 못 했다. 워낙 인상이 곱기도 하고, 머리가 길어서 그 인상이 한층 더 부드럽게 보일 수밖에 없다지만, 이렇게까지 눈속임을 할 수가 있다니.

고도는 탄탄한 가슴을 따라 잘게 쪼개진 배와 그 아래의 거뭇한…… 아, 아니, 차마 그 아래까진 볼 수 없어서 황급히 다시 시선을 들었다.

“홀딱 벗고 나오다니. 몸매 자랑을 하는 게냐?”

가볍게 물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묵직했다.

“마음에 드느냐.”

“어흠흠, 뭐라고?”

“천궁에 갇힌 동안 할 일이 운동밖에 없었느니라.”

아니, 이렇게 부지런할 수가. 고도는 제 앞까지 다가온 청사를 놀라움을 금치 못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나라면 퍼질러 잤을 텐데, 대단하구나.”

“그렇게라도 몸을 써야 조금 버틸 수 있었거든.”

“무엇을 말이냐.”

“이거.”

청사는 고도 앞에 몸을 더 붙였다. 침대에 걸터앉은 고도의 앉은키와 청사가 내민 것의 높이가 딱 적당했다.

툭.

고도의 입술에 무언가 닿는다. 고도는 눈동자만 천천히 내려 제 입술에 닿은 것을 바라봤다. 힘줄이 뚜렷하게 서 있는 불그스름한 성기였다.

“어, 음…….”

당황한 고도가 작은 신음을 흘리니, 그 입 바람과 뜨거운 체온에 청사가 목울대가 울릴 만큼 크게 침을 삼켰다.

꿀꺽.

예전 같으면 고도가 거부감을 보이진 않을지, 그러다 청사 본인이 상처받게 될까 봐 이런 식의 접근은 조심스러운 편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본의 아니게 수절 아닌 수절 생활을 해왔다. 고도와 손을 잡고 을지로를 걸을 때도, 계룡산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옷 위로 고도의 허리와 허벅지를 만질 때도, 샅 사이가 뜨겁게 달아올라 곤욕일 정도였다. 눈가를 휘면서 웃어 보이는 고도의 미소라든지, 그의 목덜미에서 나는 자연스러운 살 내음이라든지, 바람결에 흔들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숱 많은 속눈썹을 깜빡일 때라든지, 매순간 청사는 고도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했다.

그 모든 인내심이 이제는 바닥이 나버렸다. 씻고 나왔더니 몸에서 같은 향이 난다. 입술과 머리카락은 젖어서 촉촉하고 탐스러웠다. 두루마기 대신 미호가 남자 사이즈로 사두었다는 넉넉한 윗도리와 반바지를 입고 있다. 언제나 옷 속에 감추어 두었던 맨팔과 맨다리를 본 순간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이 뚝, 소릴 내며 끊어진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후우, 고도, 괜찮지? 응?”

저도 모르게 보채는 청사에게 고도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성적으로는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야릇해진 분위기를 고도도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모양이다.

역시나 쌓인 게 많았던 거야. 그 금욕적인 고도도 참지 못할 정도로.

청사는 미칠 지경이었다. 아무리 참아 봐도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었다. 청사는 다른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위로 솟아 오른 자신의 흥분한 성기를 고도 입술에 대고 비볐다.

“흐, 읏, 고도, 할게, 응? 안 되면 바로 말하고.”

청사를 올려다보는 고도의 시선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많이 놀란 듯했다. 귀두 끝이 젖은 채로 입술을 문지르다 볼을 툭툭하고 두드릴 때마다, 불쾌함과는 다른 감정으로 청사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고도가 입술을 천천히 벌려준 건 청사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

밀어낼 줄 알았던 입술이 벌어진다. 고도의 입술과 볼 위에 말간 액체를 묻히던 귀두가 그대로 뜨겁고 좁은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청사는 양손으로 고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귀두를 삼킨 입안으로 성기 기둥도 뒤이어 들어갔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쉰 청사가 힐끔, 협탁 위에 놓인 대나무 바구니를 살폈다. 예그리나는 몸을 동그랗게 만 채 미동도 없었다. 점차 달아오르는 열기와 청사의 짙은 신음 소리, 그리고 젖은 입안에서 찌걱거리며 울리는 타액 소리에도 반응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고도의 머리카락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고도, 후으, 좀만, 더 삼켜줘, 조금만 더.”

기둥의 반을 삼켰지만, 이미 귀두가 목젖에 닿았다. 이 이상 삼키는 건 너무 어려웠지만 고도가 최대한 몸에서 힘을 빼고 목구멍을 열어주었다. 입안을 지나 목구멍에 조금 들어갈 정도로 깊은 삽입이었다.

청사의 손가락이 움켜쥔 머리카락 밑으로 목덜미까지 붉어진 고도가 보였다. 힘겨운 듯 눈썹을 찌푸린 채 숨을 간신히 내쉬는 그 모습에 청사는 기묘한 쾌감을 느꼈다. 여유롭게 모든 것을 척척 해결하는 고도가 유일하게 힘겨워하는 것은 이 관계였다. 미호와 몽당이와 수다를 떠는 동안에 핸드폰으로 궁금한 것들을 찾아봤던 청사는 이것이 ‘딥쓰롯’이라 불리는 행위라는 것을 습득했고, 지금 이 관계를 인간들은 ‘섹스’라고 부른다는 것도 공부했다. 서로의 입술을 빨고 핥으면서 다리 사이로 성기를 파묻는 것만이 성행위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천계에선 이런 걸 공개적으로 알려주지 않았으니 청사도 알 길이 없었다.

하계에 내려와서 이렇게 배울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인간들이 높은 성처럼 유리 건물을 세우고 별이 떠 있는 하늘에 기계를 올려놓을 만큼 성장하더니, 이런 방향으로도 급진적인 성취를 이룬 것이 틀림없었다.

청사는 자꾸만 바싹 말라가는 아랫입술을 혀로 훑고는 핸드폰으로 습득한 행위들을 직접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고도.”

목구멍까지 깊게 들어갔던 성기를 빼냈다. 고도는 허리를 숙였다.

“콜록, 콜록.”

청사는 고도의 바로 옆에 앉았다. 손등으로 입을 막고 기침을 하는 고도의 턱을 잡아 올렸다. 침과 프리컴이 섞여서 흘러내린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댔다.

“으, 응, 음, 음!”

안 그래도 숨 쉬기 힘들었는데 바로 혀까지 들어오자 고도가 더는 못 참고 청사의 어깨를 퍽, 때렸다. 하지만 청사는 푸른 눈을 세로로 좁히며 혀를 더 깊게 밀어 넣었다. 인간보다 훨씬 긴 뱀의 혀가 조금 전 귀두가 닿았던 목구멍까지 들어간다. 고도는 눈을 크게 떴다. 밀어내던 어깨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입을 벌렸다. 숨쉬기 힘들어하던 고도는 도술을 써서라도 벗어나려 했지만, 어림없었다.

청사는 자신의 역린으로 만들어준 고도의 손에 천룡의 힘을 불어넣었다. 도력은 모이지 않고 고도의 몸속에서 흩어졌다. 청사의 기운이 지배하기 시작한 고도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흐읏, 으, 응.”

고도가 도술을 써서 갑자기 도망칠 일은 없겠노라, 확신이 든 후에야 청사는 맞닿은 입술을 떼어냈다.

“하아, 하, 콜록, 대롱이 너…….”

이불 위에 엎드린 고도를 보며 청사가 묵직하게 몸을 겹쳤다. 청사의 손이 품이 큰 윗도리 속으로 들어간다. 고도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만 움찔거렸다. 맨살을 훑는 낮은 체온의 손길에 청사를 거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리 너무 오랜만이다, 그렇지?”

‘무엇이’ 오랜만인지 말 안 해도 알 수 있다. 고도는 제 가슴 위로 천천히 올라오는 손길에 마냥 몸을 맡길 수가 없었다.

“하아, 하, 여긴 미호 방이다.”

“알아.”

“처자 혼자 사는 방에 염치없이 무슨 흔적을 남기려는 게야.”

“우리가 깨끗하게 정리해두면 되지.”

“이러라고 빌려준 방이 아니야.”

“이러라고 빌려준 방 맞던데?”

그런 말을 언제 했다고. 눈만 깜빡거리는 고도에게 청사가 피식 웃어 보였다.

“그렇게 구박하는 여우 눈치는 따라가지도 못하는구나.”

엎드려 있던 고도 몸을 반듯하게 눕힌 청사가 고도의 배 위에 올라탔다. 머리를 감쌌던 수건이 귀찮은 듯 침대 밑으로 던지자, 젖은 머리카락들이 고도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촉촉하게 젖어있는 얼굴과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도 더 다부져진 몸을 번갈아 보던 고도의 시선이 이젠 갈 길을 잃고 허공을 배회했다. 목에서부터 어깨까지 이어지는 선이 생각보다 훨씬 단단했다. 근육이 붙은 가슴은 큰 편이었다. 고도의 배를 누르고 있는 허벅지는 안쪽까지 단단했다. 부러울 정도로 보기 좋아진 청사의 몸매에 고도의 두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넌 어떻게 그 예쁜 얼굴로 감쪽같이 숨기고 있던 게냐. 힘으론 도저히 못 밀어내겠다.”

당황한 고도의 모습에 청사는 눈가까지 접으면서 웃었다. 낯선 장소, 그것도 ‘미호의 방’이라는 곳이 마음에 걸려서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종종 시선을 들어 청사와 눈을 마주치는 그 표정에 거부감은 없었다.

담백한 인간이지만, 성욕까지 퇴화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고도는 정말로 신선이 되었을 테니.

“예그리나는?”

고도의 질문에 청사는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면서 속삭였다.

“잠들었다.”

“우리가 이러다 깨어나면 그 무슨 낭패냐.”

“안 깰 것 같구나. 동면이라도 든 것처럼 꼼짝도 안 하거든.”

“아니, 그래도…….”

“어허, 고도.”

당황하는 고도에게 몸을 더 숙인다. 가까이 다가오는 청사를 보면서 움찔거리던 고도였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으음.”

망설이던 고도가 시선을 내리 깔았다. 길게 그늘이 지는 속눈썹을 황홀하게 내려다보던 청사에게 고도가 다시 시선을 올려서 말했다.

“예그리나가 잠에서 깨지 않을 정도로만 부탁하마.”

너무 격해서 신음이 터지지 않게 부탁한다는 소리로다. 허락을 받은 청사가 고개를 살짝 틀었다. 손으로 고도의 턱을 쥐어 입술을 벌리게 하고는 자신의 입술을 내리 눌렀다.

‘쪽.’

짧은 소리가 촉촉하게 울려 퍼졌다. 이번엔 뱀의 혀로 희롱하지 않았다. 고도가 좋아하는 방식의 입맞춤이었다.

그 입맞춤에 고도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아닌 척 굴었지만, 내심 이 관계에 많이 굶주려 있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합구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청사는 그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으면서 중얼거렸다.

“하아, 어떡하지. 한두 번으로 못 끝낼 거 같은데.”

그 말에 고개를 틀면서 입을 맞추던 고도가 손을 뻗어 청사의 어깨를 쥐더니 당황해서 빨라진 어조로 말했다.

“그러다 예그리나가 깨면 어쩌려고. 한입으로 두말하기냐.”

예전 같으면 “역시 안 되겠지?”라며 시무룩해졌을 청사지만, 그간 쌓인 욕정이 너무 짙어진 듯싶었다. 청사는 밀어내는 고도의 손을 제 목 뒤에 두르게 했다. 그러곤 에라 모르겠단 심정으로 일을 저질러 버리듯이 고도에게 입맞춤을 쏟아냈다.

“하아, 으, 음, 대롱, 아, 잠깐, 하, 한무, 읍.”

하도 못살게 굴어서 퉁퉁 부어오르는 입술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기다란 용의 혀가 고도의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혀를 꼬듯이 감싸며 애무했다. 혀뿌리까지 비비는 깊은 입맞춤에 청사의 목에 둘러진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물기를 꼼꼼하게 닦아내지 않은 어깨에서 손이 미끄러졌다. 고도는 엉겁결에 그 손이 떨어지지 않도록 손톱을 세워 청사의 날갯죽지에 박아 넣었다.

꿈틀거리는 등 근육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너무 크지 않은, 얇게 몇 겹이나 쌓아 올린 듯한 탄탄한 근육이었다. 청사가 조금만 움직여도 꿈틀거리며 반응했다. 마치 남의 몸인 양 생소함을 견디지 못한 고도가 입맞춤에 날아가려던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으, 모 참게쓰며, 응, 음, 아랠 입으로 할타줄, 아으응.”

얽힌 혀 때문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자극적인 입맞춤이 길어지자 고도의 숨결도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하읏, 자, 자까, 아, 아.”

청사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눈을 똑바로 떴다. 품 안에서 움찔거리는 고도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적당히 해달라던 고도의 청은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자극적으로 빨던 혀를 놔준 청사가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셔츠를 목 위까지 뒤집어 올리자 숨을 들썩이는 가슴이 드러난다. 깨끗하고 뽀얀 살갗에서 청사가 쓴 바디 워시와 같은 향이 풍겼다. 햇볕에 잘 말린 빨랫감 냄새였다. 포근한 면화 냄새.

“하아, 하아.”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을 턱밑으로 떨어트리는 고도를 보면서 청사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고도의 가슴을 입에 머금었다. 하얀 살점 위에 깨끗한 선홍색으로 자리 잡은 유두를 입에 머금고 굴리자마자 고도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고도의 시선은 자꾸만 예그리나를 향했다. 소리를 죽이는 고도를 놀리듯이 청사가 유두를 깨물었다.

“응……!”

다급히 입을 더 틀어막는다. 예그리나에게 자꾸 시선을 주면서도, 청사를 밀어내지는 못한다. 청사는 일부러 유륜까지 큼지막하게 깨물었다.

“!”

빨갛게 잇자국이 새겨졌다. 날카로운 용의 송곳니는 유륜과 하얀 살갗 사이에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청사는 고도가 보고 싶어 대침으로 허벅지를 찌르던 세월을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이젠 용을 더 낳을 것도 아닌데, 몸을 왜 섞느냐면서 고도가 열없는 눈으로 바라볼까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청사는 고도의 덤덤하고 잔잔한 품성을 좋아하지만, 워낙 강한 도사인지라 평소에는 당황하고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으니, 몸을 섞을 때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열띤 시선과 거칠어진 숨소리, 힘겨워하는 목소리에 애착이 깊은 편이었다.

세상만사 무심하고 그저 흥미 위주로만 접근하며 휘적휘적 걷는 도사가 청사 아래에서는 진심으로 감정이 요동치고 진지해지니, 어찌 애착을 주지 않을 수가 있겠나. 육욕의 만족 그 이상이다. 고도가 청사를 여전히 사랑하는 증거를 청사가 누리는 순간이었다.

“하아, 고도, 하계에 올 때 말이다.”

청사는 고도의 배 위에 자리 잡고 있던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뱀처럼 미끄러지듯이 고도의 다리 사이에 앉아서는 반바지의 허리춤을 잡았다.

“고향이 그리웠노라고, 이곳에서 지내고 싶다 말할까 두려웠단다.”

바지를 벗기자 속옷도 입지 않은 사타구니가 드러난다. 청사가 아니면 그 아무도, 심지어 고도 본인조차 큰 관심이 없는 샅 위로 반쯤 일어선 성기가 드러났다. 청사가 한 손으로 꿈틀거리는 성기를 감쌌다. 고도의 흉곽 안쪽이 요동쳤다. 숨을 몰아쉬는 고도는 저도 모르게 무릎 사이를 벌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 머물고 싶다 했지? 계속 있고 싶으냐. 변한 하계를 만족할 때까지 즐기고 난 후에야 천계로 돌아가고 싶냐는 뜻이다.”

청사의 손 안에서 고도의 성기가 딱딱해졌다. 완전히 기립한 성기에 청사는 본인 것을 가져와 붙였다. 맞붙인 두 개의 성기를 손으로 비볐다. 고도는 허리를 뒤틀면서 움찔거리다가 간신히 신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 그게 아니라, 흣…….”

“나는 오래 머물지 못해. 휴가도 짧지. 네가 만족할 때까지 여기서 놀고 싶다면 우리가 떨어져 지내야 할 시간이 길어질 수 있어.”

“흣, 대롱아, 그게 아니라.”

이불을 움켜쥐고 있던 고도의 손이 청사의 손 위를 덮었다. 둘의 겹친 손바닥 안쪽에서 쿵쿵 뛰는 맥박이 느껴지는 성기가 떨리고 있었다.

“하아, 하아.”

그 성기만큼 붉어진 볼로 뜨거운 숨을 토하는 고도는 땀과 물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청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더없이 야릇해서 청사는 홀린 듯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너와 잊지 못할 마지막 하계 추억을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겠느냐.”

고도의 말에 청사는 멈칫했다. 마지막 하계 추억. 그 한마디에 담긴 감정과 생각이 무겁게 와 닿았다.

“미련 없이 즐기고 가고 싶다. 네가 천궁에 갇혀 일하는 동안 정신 빠지게 놀고 싶은 생각은 없단다. 그 오랜 세월 날 겪었음에도 아직도 날 모르겠느냐.”

청사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쪽’하고 젖은 입술에 짧은 합구를 했다. 입술은 떨어질 새도 없이 고도의 살갗 위를 핥듯이 내려갔다.

‘쪽, 쪽.’

송곳니로 상처를 낸 가슴을 핥았다. 단단하게 곤두선 젖꼭지를 혀로 누르고 돌리면서 쪽쪽 빨기도 했다. 고도의 어깨에 소름이 돋아났다.

“은애란 감정은 말이다. 어찌 매번 확인을 해야만 만족하는 것일까. 오래도록 보존하고 싶은데 계속 잊어버리고 네게 날 얼마큼 사랑하는지를 묻게 되는구나.”

청사는 그 작은 돌기가 퉁퉁 부어오를 때까지 빨면서 중얼거렸다.

“난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고도, 널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매번 네게 이렇게 묻겠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날 사랑할 수 있느냐고. 그때마다 네가 날 한심하게 바라봐주면 얼마나 좋을까. 같은 대답을 몇 번 해야겠느냐고 꾸지람 놓는 것을 상상한단다. 그게 내 소박한 행복이구나.”

위대한 소경보좌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상제가 알면 어찌 될는지. 고도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청사를 보며 배시시 웃고 말았다.

“내가 널 불안하게 하느냐.”

“그건 아니지. 너만큼 내게 믿음을 주는 이가 어디 있겠느냐.”

“나도 그렇다. 나 자신보다 널 더 믿는단다.”

“고도…….”

“우리가 서로의 생각을 전부 공유하지 않는 한, 불안함은 계속될 수밖에 없겠지. 내 하나 제안을 해보마.”

“……어떤 것을?”

“상대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정확하게 말하기로. 속에 품어두고 고민하지 않기로.”

그 제안은 청사보다 고도가 지키기 더 어려울 듯했다. 고도의 예쁜 입은 실없는 소리를 내뱉기에만 특화가 되어 있어서, 진지한 내면을 드러내기는 무척 부끄러워하지 않던가.

그만큼 고도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노력하겠다는 뜻임을 알아들은 청사였다. 이럴 때마다 눈물 나게 예쁜 반려자가 아닐 수 없다. 눈물을 또르르 흘리며 “고도, 고마워.”라고 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만. 제 반려를 닮아 능글맞아진 청사가 씨익 웃으며 물었다.

“그럼 지금 그 솔직한 제안을 해봐도 되겠느냐?”

“물론이지.”

“네 가슴을 원 없이 빨고 싶다.”

상상도 못한 말에 고도는 눈만 깜빡였다.

“응?”

사랑스럽고 감동적인 분위기를 생각하던 고도는 다시금 휩싸이는 열기에 당황하기까지 했다.

“대롱아.”

말려 봐도 소용없다. 청사는 천궁에 갇혀 고도와 관련된 온갖 음란한 상상엔 도가 튼 상태였다.

“인간은, 하아. 아이를 가지면 여기서 젖이 나온다며. 고도야, 너는 예그리나와 나슬을 품었을 때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용족의 알을 단전에 품고 있었을 뿐, 유선도 없는 인간 남자의 가슴에서 어찌 젖이 나올 수 있겠는가.

항변할 새도 없이 청사의 애욕을 담은 두 눈이 활활 타올랐다.

“빨고 싶구나. 네 속에 품은 것들을.”

청사가 푸른 눈을 깜빡였다. 천룡의 힘이 일부 개방되면서 그에게 복속되어 있는 고도의 몸에 변화가 일었다. 단전 안에 꽁꽁 숨겨 두었던 천기가 순식간에 고도의 손끝, 발끝까지 뜨겁게 번져 나왔다. 도력이 있던 혈전 자리를 천기가 뒤덮으면서 가장 하늘에 가까운 존재인 청사에게 곧바로 반응했다.

“아!”

온몸에서 뜨겁게 휘몰아치는 기운이 그대로 가슴을 타고 청사의 혀끝에 닿았다. 청사는 제 혀를 타고 흘러드는 고도의 정기를 꿀꺽, 삼켰다. 그건 뜨겁고 달콤하고 아주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고도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이런 법이 어디 있나. 천계 소속이 되고, 반려가 되어 서로의 기운에 영향을 미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걸 이용하는 법이! 

인간이라서 용의 기운을 운용할 줄 모르는 고도와 달리, 청사는 자신의 역린까지 지닌 반려의 몸 안쪽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아, 아, 잠깐, 하, 한무, 잠깐.”

달콤해서 쪽쪽 빨아 마시는 청사와 달리, 가슴 돌기를 통해 기운이 빠져나가는 감각을 난생 처음 느껴보는 고도는 허리가 들뜰 정도로 오싹한 기분이었다. 가슴이 예민해져서 간지럽고 뜨거웠다. 몸 안을 부유하던 기운들이 한꺼번에 물살처럼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청사가 말한 대로 젖이라도 나오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예민한 정기가 가슴에 고여 분출되고 있으니, 그 낯설고 뜨거운 이상함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도가 허리에 더 힘을 주었다. 이불 위로 동그랗게 들뜬 허리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하윽, 하, 아, 그만, 아.”

가슴을 내민 채 덜덜 떠는 고도의 모습을 청사는 그저 황홀하게 바라봤다. 핸드폰에서 본 정보가 사실이었다. 가슴이 이토록 예민한 부위가 될 수 있다니.

인터넷이라는 거 좋은 거구나. 천계에도 그 통신망이란 걸 깔 수 있으려나.

상제 직속 공무원답게 천계의 안녕과 발전을 틈틈이 고민하며, 묵직해진 샅을 밀어붙였다. 부풀어 오른 중량감이 고도의 벌어진 다리 사이에 꾹 맞붙었다. 엉덩이 사이로 꾸욱, 맞닿은 뜨거움에 고도가 화들짝 놀랐다. 젖은 눈동자를 돌렸으나, 정기가 빨리고 있어 거부할 힘이 없었다.

“하윽, 으, 응.”

청사에게 반응하는 몸은 쉽게 변화했다. 검고 까맣던 눈이 금색으로 물들면서 온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청사가 고도의 정기를 빨아들일수록, 천기를 잃어가는 몸은 굶주린 짐승처럼 청사를 더 원하기 시작했다.

“한무, 그만, 그만…….”

아직 그나마 남아 있는 이성으로 청사를 말리려고 하지만 소용없다.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 고도는 힘 빠진 손으로 청사의 머리통만 끌어안는 게 고작이었다.

“제발, 그만, 아, 아.”

몸 안이 순식간에 불안정해졌다. 고도는 걸신들린 아귀의 심정을 처음으로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목 안이 바짝 타들어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이상 천기가 빠져나가면 불안해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 고도.”

가슴을 쪽쪽 빨던 청사는 갑작스러운 고도의 움직임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고도가 벌린 다리로 청사의 허리를 감싼 채 몸을 맞붙였다. 숨을 헐떡이면서 청사에게 매달렸다. 씻고 나왔던 몸이 땀에 미끄러워질 정도로 열기가 높았다.

“돌려줘.”

고도는 청사의 목을 꽉 끌어안은 채 애원했다.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네 기운, 돌려줘, 한무.”

고도는 도력으로 제 다리 사이를 적셨다. 부드럽고 미끄러운 액체가 구멍을 적시며 꽉 다물어져 있던 입구를 강제로 열어버렸다. 고도가 그대로 제 엉덩이 사이에 묵직하게 눌려 있던 청사의 성기를 삼켰다.

“!”

빨려 들어가듯이 삼켜지는 성기에 청사가 살짝 입을 벌렸다.

“하아, 흣, 고도.”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고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를 안정시켜줬던 청사의 기운이 빠져나가 몸이 비자, 불안함을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매달렸다.

“하아, 하, 한무, 어서.”

보채는 고도를 보자 코 밑으로 피라도 후두둑 쏟아질 것 같은 청사였다. 아무리 꿈속에서 고도를 안는 상상을 했어도, 이 정도로 적극적으로 안겨오는 모습은 감히 상상도 못 했건만. 뜨거운 고도의 내벽 안에 꽉 조이듯이 자리 잡은 자신의 성기는 가만히 있어도 흥분될 지경이었다.

“적당히 해달라며, 응?”

“흐읏, 움직여줘.”

“뭐든 태평한 척 굴더니.”

“하아, 아, 아.”

“내가 없으면 불안했구나.”

“아!”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이 더 늘어난다. 이미 다 발기되었다고 생각한 청사의 성기가 더 부풀어 고도의 몸 안쪽, 가장 깊은 곳에 틀어박혔다. 고도는 단숨에 밀려들어 오는 묵직함에 허리를 덜덜 떨었다. 청사의 성기가 비어버린 단전이 있는 곳, 배꼽 아래까지 들어오는 듯했다.

“!”

고도는 비명도 나오지 않는 입을 벌렸다. 비어 있던 몸 안을 충만하게 채우는 그 힘에 숨이 막혔다. 청사가 네 발 달린 짐승처럼 몸을 엎드려 자세를 잡았다. 그의 아래에 깔린 고도는 허벅지를 더 눌러서 옆으로 벌리는 청사의 움직임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날개뼈에 찔러 넣었던 손톱이 다시 미끄러져 이불 위로 툭, 떨어졌다.

“흐, 하아, 하, 고도, 고도.”

성인 남성 체구의 둘을 담기에 침대는 지나치게 좁았다. 몸을 조금만 돌리거나 움직여도 바로 밑으로 떨어질 정도였다. 청사는 그렇기에 고도의 허리를 더 세게 잡았고, 평평한 아랫배가 불룩 튀어나올 정도로 제 성기를 가차 없이 밀어 넣으며 움직였다.

“끼익, 끽, 끽, 끽.”

철제 침대 틀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거치적거리는 이불은 아예 바닥으로 떨어트렸고, 매트리스 하나만 남은 채 위태롭게 흔들렸다.

고도는 몇 번이나 터지려는 신음을 참기 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청사가 그 손에 깍지를 껴서 고도의 얼굴 양옆에 붙여버렸다. 고도는 벌어진 다리 사이를 퍽퍽 치고 들어오는 강한 힘과 입을 틀어막을 수가 없어서 터지는 신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읏, 하, 아, 아아, 아!”

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일렁였다. 눈물이 차올라서 붉어진 눈가를 순식간에 적셨다. 힘겨운데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게 속박한 청사 때문에 아래에서부터 쳐올려지는 과도한 자극을 피할 길이 없었다.

“아응, 아, 아, 하아!”

몸서리치게 자극적인 움직임에 눈물을 흘리는 고도를 보며 청사도 이성이 완전히 날아갔다. 한계 이상으로 벌어진 구멍에 몇 달을 참고 버틴 성기가 인내심이 바닥난 듯 끈질기게 구멍을 들쑤셨다. 하얗고 동그란 엉덩이는 앞뒤로 거칠게 흔들리는 움직임에 이미 빨갛게 익어버렸고, 그것보다 더 붉게 곤두선 성기는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다시 귀두만 걸치듯이 빠져나와 쳐올리길 반복했다. 고도는 깍지를 낀 청사의 손을 꼭 잡은 채 스스로는 가눌 수 없는 몸에 흔들리는 시야를 내버려두고 말했다.

“네가 너무, 흐윽, 보고 싶었다, 한무.”

고도의 울먹임은 아이처럼 순수했다.

“나를 혼자 내버려두고, 아, 하윽, 일하지 마라, 흑, 흐윽, 외로워서, 아, 아!”

솔직하게 터져 나오는 그 눈물과 신음이 뒤범벅되어 아무렇게나 흘러나오는 진심에 청사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황홀경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하윽, 너, 너와 영원히 함께 있고 싶으니, 흑, 입궁할 때도 날 데려가, 아, 하윽!”

힘겹게 쏟아내는 말을 더는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청사는 고도의 깍지 낀 손을 풀어주었다. 대신 두 손이 가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청사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앉힌 채 그를 끌어안고 밑에서 위로 쳐올렸다.

“내가 미안하다, 고도.”

“아응, 아, 너, 너무 깊, 아!”

“내가 미련했어.”

“다, 단전에 바로 닿아, 아!”

“천계로 돌아가자마자 상제하고 결판 지으마. 너 없인 일 못 한다고.”

수직으로 꽂혀 올린 성기가 그대로 고도의 단전 안으로 들어왔다. 고도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고도의 몸속에서 누구도 닿을 수 없는, 온전한 힘의 원전에 청사의 정액과 함께 정기들이 터져 들어왔다.

“흐, 응, 아, 아아, 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일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온전하게 스스로를 유지하는 장소. 고도를 고도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성역이 청사의 기운으로 물들었다.

“하, 아아, 아.”

생전 처음으로 외부의 것이 침입해 들어온 고도의 몸이 덜덜 떨렸다. 몸을 거의 가누지 못하는 고도를 끌어안은 채, 청사는 크기도 길이도 줄어들지 않은 성기를 다시 움직였다.

“후으, 살짝 흘렸구나. 아직 멀었는데, 그렇지?”

금색 눈은 멍했다. 고도는 붉게 물든 몸을 청사에게 기댄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몸 안에 정액이 한 사발 쏟아져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청사 기준에 그것은 찔끔, 흘렸을 뿐. 쌓이고 쌓인 천룡의 기운은 아직 구할 이상 남았다. 이걸 모두 고도에게 퍼부으려면 행위가 이렇게 단순하게 마무리 지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로 다시 채워달라고 했지, 고도.”

청사는 멍한 고도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진득하고 붉었다.

“기대하거라. 앞으로 네 근원은 내가 될 것이니.”

*

비좁은 침대에 청사가 누워 고도를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 팔베개를 해준 고도를 품에 꼭 끌어안은 그는 혹시나 고도가 침대 밖으로 떨어질까 봐 제가 대신 끄트머리에 모로 누워서 방벽을 쌓은 상태였다. 덕분에 벽과 청사 사이에 갇힌 고도는 한동안 잠이 든 청사를 빤히 바라봤다.

세월이 흐를수록 청사는 말을 붙이기도 어려울 만큼 고귀해지고 있었다. 처음 천계에 올라가 청사의 친부를 만날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부드럽고 잔잔한 호수 같지만, 실은 파도가 치지 않는 고요한 바다 같은 존재였다. 그 넓은 존재를 품기에 하계는 너무 작았다.

완벽하고 유일무이한 존재가 고도와 관련해서만 확신을 갖지 못하니,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도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은퇴할 때까지 기다리려 했는데 어찌할까…….”

이렇게 예쁜 님과 또다시 몇 달을 못 보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고도 자신이 먼저 청사를 덮치리라 확신했다. 하계를 구경하는 척 애써 청사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다만. 천계로 돌아가면 꼼짝없이 청사만 내리 바라보는 시선을 들킬 테니. 유능하고 인기 많은 님을 어떻게 제 옆에만 꼭 붙여놓을 수 있을까 고민할 때였다.

‘바스락.’

고도는 청사의 어깨너머,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바라봤다. 잠잠하던 대나무 바구니가 움직인다. 예그리나가 눈을 뜨더니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몸 상태가 이상해 보였다. 젖은 솜뭉치처럼 똑바로 서질 못한다. 날개는 바닥에 축 늘어져 있고, 두 눈은 멍했다. 놀란 고도가 청사를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그리나!”

좁은 침대 가에서 아슬아슬하게 자던 청사는 그 바람에 침대 밑으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깜짝 놀라 눈을 뜬 청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침대 밑으로 뛰어내린 고도가 바닥에 축 처진 예그리나를 안아 올렸다.

예그리나는 저를 안아들고 있는 고도를 반밖에 뜨지 못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실은 새벽까지 고도와 청사가 어떻게 몸을 섞었는지 알고 있었다. 개중 기억 남는 것은 젖은 고도가 무릎을 꿇고 매트리스를 짚은 상태로 청사를 받아들이는 장면이었다.

엎드린 고도 뒤에서 몸을 움직이고 있는 청사는 길게 흘러내리는 머리가 거슬리는 듯 몇 번이나 손을 들어 쓸어 넘기길 반복했다. 맞붙은 다리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정체 모를 액체는 고도의 몸속을 가득 채우고도 더는 들어갈 공간이 없어서 줄줄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의 아이가 봤다면 본능적으로 느꼈을 금지된 것의 두려움을 예그리나는 겪지 않았다. 예그리나에게는 그저 두 아비가 붙어 기운을 공유하는 것으로만 보이는 행위였다. 더 정확하게는 고도의 몸에 남아 있던 도력이 사라지고, 청사의 기운으로 가득 차는 과정. 그건 마치 청사가 고도에게 자신의 명줄 절반을 내놓는 것처럼 느껴졌다.

몸을 거의 가누지 못하는 고도가 성기를 통해 묽은 정액을 토해내자 한줌 남은 도력마저 완전히 그의 신체 밖으로 빠져나오게 되었다. 고도는 더는 도력이랄 것이 남아 있지 않게 된 후에 그대로 엎드렸다. 정신을 잃었는가 싶은데 엎드린 상태에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느라 들썩이는 등을 보니, 괜찮은 듯했다. 청사는 엉망이 된 주변을 손가락 하나 휘둘러 깔끔하게 정리하고는 땀과 정액으로 얼룩진 고도의 몸도 청결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후엔 몸이 식을 새라 함께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속살속살, 잠이 들 때까지 무언가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예그리나는 끊어진 기억 끝을 눈앞에 있는 고도의 모습으로 이어 붙였다. 힘을 개방하지 않아도 금색 눈을 유지하고 있는 고도에게 예그리나는 힘이 없다며 매달리지 않았다. 어린 용의 감은 무서울 정도로 예민했다. 더욱이 예그리나는 자신보다 위대한 천룡에게는 고개를 조아릴 줄 아는 용이었다.

꾸벅.

마치 청사에게 하듯이 고도에게 예를 갖춰 인사한다. 고도는 그 모습을 크게 뜬 눈으로 바라봤다.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굳어버린 고도와 달리, 청사가 대략적인 것을 얘기해주었다.

“고도, 네 도력을 걷어내고 내 정기를 넣었다.”

고도는 청사의 푸르른 눈에 비친 자신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안다. 다만, 내게 어리광부리던 아이가 이러니…….”

“평범한 천기가 아닌 천룡의 힘이라서 그렇지.”

“……무슨 차이가 있지?”

“내 생명력의 절반을 너에게 줬다는 뜻이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고도는 얼어붙은 표정이었다.

“왜 그랬느냐.”

고도는 화가 나서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았다.

“난 어차피 죽지도 못하는 불사의 몸. 네 생명력을 나눠받을 이유 따위 없다. 도로 가져가라, 어서!”

사랑하는 이의 생명력마저 갉아먹는 사이라니. 그만큼 비참한 관계가 어디 있을까 싶어 절로 울분이 터졌다. 고도의 심정을 알면서도 청사는 덤덤하게 말했다.

“천계에 돌아가면 알 것이다. 필요한 작업이었어.”

“네 생명까지 갉아먹으면서 필요한 작업이라고? 그런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청사를 우선시하는 발언이었다.

“아니, 네가 건강하게 내 곁에 계속 남아 있다면 내 생명에 아무런 지장이 없지. 잠시 내 목숨을 맡아준 거라 생각하면 되지 않겠느냐.”

“……한무야.”

“자세한 얘기는 올라가서 하자. 지금은 아이가 더 중요하니.”

고도는 손에 들고 있던 예그리나를 이불 위로 올렸다. 예그리나는 고개를 들다가도 푹, 이불 속으로 코를 박았다.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비실거린다. 그 모습을 본 고도는 덜컥 겁이 났다.

“어디 아픈 건가. 역시 하계의 오염된 기운에 병을 얻은 게야?”

“아니다.”

“아무래도 한시바삐 천계에 올라가야겠다.”

“아니야, 고도. 이건 탈피 현상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끙끙 앓던 예그리나가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작은 손으로 이불을 움켜쥐면서 몸부림치자 고도도 긴장해서 손끝을 움찔거렸다. 긴 몸을 돌돌 말아 배배 꼬는 그 모습에 당황한 고도가 물었다.

“위험한 거 아니지?”

청사가 딱 잘라 말했다.

“위험해. 절반은 탈피하다 죽어. 탈피도 못 견디면 앞으로 용으로 살기 더 험난할 테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만.”

“나슬은 이러지 않았는데.”

“그 애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탈피하고 인간형의 모습을 갖게 되었지. 나슬은 우리 가문에서도 드물게 능력이 출중한 편이라 속도가 빨랐어.”

“그럼 예그리나는 능력이 모자라서 탈피 시기를 놓친 건가.”

“능력이 모자라다기보다는…….”

비늘 하나 없는 매끈한 예그리나의 껍질을 응시한다. 여리고 부드러워 바늘에 찔려도 쉽게 상처가 날 것 같은 외피였다. 날카롭고 두터운 견갑비늘로 몸을 보호하는 용과는 전혀 다른 생김새. 예그리나는 일종의 돌연변이였고, 돌연변이의 숙명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죽거나 기존 종보다 더 뛰어나게 적응하는 방향이었다. 청사가 보기에 예그리나는 후자였다.

“잠재되어 있던 능력이 폭발하게 될 신호로 보이는구나. 내 판단이 틀렸다면 여기서 죽겠지만 말이다.”

냉엄한 적자생존의 법칙으로 제 아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한다. 아무것도 도와줄 수가 없는 고도가 초조하게 바라볼 때쯤 예그리나의 매끈한 피부 사이가 복숭아 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순식간에 작은 몸을 감쌀 만큼 커졌다. 둥근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예그리나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고도는 더 이상 기다려 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천계로 급히 올라가자. 차라리 천계에서 탈피하는 게 안전하지 않겠느냐. 하계의 오염된 기운에 잘못될까 봐 두렵다.”

“그것도 운이다. 이 정도 시련도 극복 못 하면 우리 가문의 용이라 할 수 없지.”

둥근 빛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고도를 제 쪽으로 끌어당긴 청사가 구를 응시했다. 구 속의 움직임이 서서히 빛 밖으로 드러났다. 놀랍게도 그것은 사람의 다섯 손가락이었다.

매끈한 하얀 손가락이 이불을 움켜쥐는 순간 팍, 터지는 빛에 고도와 청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조금 전까지 고도가 누워 있던 자리에 한 남성체가 앉아 있었다. 침대 밑으로 흘러내릴 정도로 긴 머리카락을 가진 큰 키의 남성체가.

“…….”

“…….”

고도와 청사는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잔뜩 긴장한 고도와 달리, 청사는 천룡의 눈을 열고 변화한 예그리나를 샅샅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허물을 벗기 전보다 성장했는지, 성장했다면 그 능력치가 어느 정도인지.

세로로 좁아진 청사의 두 눈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피어올랐다.

“이 정도면 차기 천룡으로 내세워도 손색없겠어.”

천궁에 갇혀 일만 하던 자신의 일거리를 나누기에 충분한 재목이라 생각했는지, 청사의 입 꼬리에 흐뭇함이 맺혔다. 반면에 긴장한 고도는 청사의 계획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초조하고 불안한 눈으로 긴 머리를 쓸어 넘기는 남성체를 바라봤다.

탈피를 마친 예그리나의 현인(現人)은 고도보다는 다부진 외형에 청사보다는 왜소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청사의 청안, 고도의 금안과 달리 예그리나의 두 눈의 색깔은 달랐다. 한쪽은 먹물처럼 짙은 흑안이오, 반대쪽은 새벽녘 별빛에 물든 하늘 같은 자색안이었던 것이다.

“어…….”

무인보다는 문인에 가까운 체형과 호리호리한 외형. 그런 자신의 모습이 어색한 듯 양손을 내려다보던 예그리나가 불안정한 시선으로 고도와 청사를 바라봤다.

“어, 저, 저, 저, 머, 멀쩡한 거 맞나요…….”

자신 없이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비로소 고도가 안심한다. 고도는 말없이 양팔을 벌려 예그리나를 꽉 안아주었다. 민망하고 부끄러운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예그리나가 힐끔, 청사의 눈치를 살폈다. 고도에게 끌어안긴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 송곳니를 씰룩이며 노려보고 있었다. 예그리나는 황급히 기운을 운용하여 고개를 조아렸다. 청사는 한번 봐준다는 투로 말했다.

“하늘로 올라가면 바로 천궁에 입궐할 준비를 하거라.”

계획만으로도 신난 청사가 씨익, 웃었다.

“차기 금관소경보좌로 널 키워봐야겠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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