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36)

곡두기행 외전 :: 환세기담(還世奇談)

상제의 침전 근처 정무실 문이 열렸다. 봉황과 용이 양각된 떡갈나무문이 쩌억, 입을 벌려주자, 그 틈새로 낯익은 인영이 빠져나왔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도포자락이 바닥을 쓰는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널브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할 여력은 없어 보였다. 목깃을 여미고 단정하게 허릿대를 매긴커녕, 죽다 살아난 시체 꼴로 터덜터덜, 건물 밖을 향했다.

긴 회랑을 지나 중정에 다다르니, 머리맡으로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긴 머리가 산발처럼 흘러내린 이가 비로소 허리를 펴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하늘보다 더 푸르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눈은 바늘처럼 좁고 얇은 동공을 품고 있었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옥황상제의 일을 보필하는 ‘금관소경보좌’라 불렸으며 집에서는 ‘소가주’, 친한 사이에선 ‘한무’, 그리고 단 하나뿐인 반려에게서는 ‘대롱이’라 불리는 청사였다.

“하아아.”

청사는 얼굴 위로 쏟아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끝났다. 끝났어. 끝났다고.”

석 달 만에 본 햇살과 하늘이었다. 그간 정무실에 꼼짝없이 갇혀서 산더미처럼 쌓인 두루마리에 코를 박고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오로지 일, 그저 일, 자나 깨나 다시 보는 일, 일, 일.

이런 일을 시키려고 체력이 뛰어난 천룡을 금관소경보좌로 두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마저 들었다. 용이란 자고로 한번 잠이 들면 수십, 수백 년도 깨지 않고 동면에 드는 신수(神獸)지만, 깨어 있을 땐 몇 달이고 자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더욱이 천룡에게는 일용할 양분이나 다름없는 천계의 가장 고결한 기운을 수미산 정상, 천궁에서 맞고 있으니 배가 고프거나 피곤할 겨를이 있나. 햇살만 쬐어도 그날 하루는 거뜬히 보낼 수 있는 것을.

물론 그것은 구담(口談)일 뿐, 청사에게 석 달 동안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일을 본다는 것은 감금이요,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하루만 더 정무실에 갇혀 있었다가는 상제 침전으로 뛰어들어 두루마리를 집어 던질 뻔했다. 이 능글맞은 노인네는 청사가 딱 폭발하기 일보 직전에 식가(式暇. 관리들의 정식 휴가)를 허했고, 여드레 자유를 얻은 청사는 마치 감옥에서 유예를 받고 나온 죄인의 심정이었다.

“잔인한 노친네 같으니라고. 고얀 상제 머리 위로 벼락 안 떨어지나.”

청사는 나랏님 없는 곳에서 흉을 보는 심정으로 중정을 가로질렀다. 수문장이 지키는 대문이 열리자 그 너머, 수미산 아래로 길게 이어지는 계단이 보였다. 까마득한 계단 높이를 보면서도 청사는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발걸음은 구름 위를 밟는 것처럼 가볍고 산뜻했다. 더덩실, 어깨춤까지 추면서 사뿐사뿐 수미산 계단을 내려왔다.

“무엇을 하면 좋을꼬. 어디 보자. 가자마자 고도를 끌어안고 마당을 빙글빙글 돌아볼까. 어허, 아니지, 체면머리 없게. 일단 고도 손을 꼭 잡고 진수성찬 앞에 같이 앉아보는 게다. 아니지, 날도 좋은데 그냥 먹으면 쓰나. 바구니에 복숭아를 몇 개 따 담고 은장도를 챙겨 근처 냇가에 가서 꽃구경을 해도 좋을 것이오, 천마(天馬)를 불러 들판을 시원하게 달리고 와도 좋지 아니한가.”

그런 계획이 다 무슨 소용인가. 자그마치 석 달 만에 만나는 반려 아닌가. 일단 어화둥둥 끌어안고 사정없이 입을 맞추고, 그간 그리웠던 살내음을 맡으며 힘들었노라 어리광을 부리며 칭얼칭얼 매달려야 하지 않을까. 어디 보자. 고도도 본의 아니게 석 달 내리 수절을 했으니 애가 타지는 않을는지. 그렇다, 오늘은 안방 문을 아예 걸어 잠그고 이불 속에서 다리가 엉킨 채 온종일 시간을 보내자. 그것이 바로 잃어버린 석 달을 보상받는 극락이로다.

“고도.”

그 이름을 입에 담자, 이름의 주인이 눈앞에 아른거릴 지경이었다. 상제는 “오랫동안 집에 가질 못하니, 내 그 사정이 딱하여 반려가 궁에 출입할 수 있도록 허하노라.”고 말했으나, 이런 추레한 꼴은 죽어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예쁘고 향기롭게 다가가고 싶었기에 고도와 최선의 상태에서 만나고 싶었건만. 그 다짐도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져서 ‘일단 얼굴만 봤음 원이 없겠다’고 밤마다 눈물을 찍어낼 지경이었다. 꾀죄죄한 꼴을 고도에게 보이더라도 그에게 달려가 안고 싶었으니, 수미산 계단을 내려오던 발걸음은 어느새 허겁지겁, 안달을 내듯 변하고 말았다.

“고도, 집에 있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청사는 불안해했다.

“지금 당장 보고 싶은데 없으면 울 거야.”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져버린 마음이었다. 이렇게 몇 달, 몇 년 고도를 못 볼 바에야 소경 자리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 무책임한 짓은 스스로도 절대 용납할 수 없지만, 고도와 함께 행복해지고 싶어서 돌아온 천계에서 오히려 얼굴 한번 볼 시간도 없다니. 서글퍼서 울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음이 당연했다.

청사는 한달음에 달려 도착한 제집 대문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어깨 밑으로 줄줄 흘러내린 옷을 잡아당겨 바로 입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비단 끈으로 다소곳하게 묶고는 뻗친 머리들을 손가락에 침을 찍어 꾹꾹 누르기도 했다. 청사는 담벼락 밑에 고인 말간 물웅덩이에 제 얼굴을 비쳐보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됐어, 잘생긴 건 어디 안 가니까.”

청사는 마지막으로 옷을 탈탈 털어서 정리하고 “큼큼” 소릴 내어 목을 가다듬었다.

“이리 오너라!”

문이 열리면 고도에게 달려가야지. 어여쁜 님을 끌어안고 보고 싶었노라 칭얼거리며 품에 파고들어야지. 고도가 보는 앞에서 픽, 쓰러지면서 밥을 먹여달라고 칭얼거려 보거나, 함께 씻자고 손을 잡아 끌고 욕통 안에 발가벗고 들어가도 좋고. 그러다 어디, 셋째 낳아보자고 응큼하게 덤벼들면 고도도 못 이기는 척 웃어주지 않을까.

상상만으로도 좋았던 청사는 “흐흐” 하고 혼자 웃다가 여즉 열리지 않는 솟을대문만 올려다봤다. 두터운 대문은 굳건하게 닫혀 미동도 없었다. 청사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리 오너라!”

이번에도 감감무소식이다.

“아니, 이것들이 집안의 작은 어르신이 왔는데 뭣들 하는 거야!”

직무 유기 중인 식솔들에게 구시렁거리며 소맷단을 위로 걷었다. 성큼성큼 문으로 다가간 청사가 양손에 힘을 주었다.

‘끼이이익.’ 

경칩에서 오래된 쇳소리가 울리며 묵직한 양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그 문 너머로 펼쳐진 광경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문에 가로막혔던 침통한 소리들이 한꺼번에 청사를 덮쳤다.

집안은 발칵 뒤집혀 있었다.

“찾았어?”

“없어, 집안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

“아까 낮에 갑자기 날아서 밖으로 나가셨다며!”

“날아가는 분을 어떻게 뒤쫓니. 헐레벌떡 따라갔지만, 이미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으셨는데!”

식솔들은 대문과 행랑을 따라 분주히 뛰어 다녔다. 비각 아래며, 평소엔 굳건히 닫아두는 사당까지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바깥문에 중문, 안문까지 젖혀놓아 평소에는 은밀하게 가려두는 안채까지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청사는 문을 열어젖힌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게 무슨 난리인고. 귀한 게 사라져서 찾는 분위기다만.

마침 서진이 마당을 가로질렀다. 저고리에 치마 차림으로 여유낙락을 즐겨야할 서진이 허리춤에 검을 찬 채 걸음을 놀렸다. 선녀군단 앞에서나 보일 군장의 위엄을 담아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있기도 했다. 그런 서진을 보지 못했더라면 종들을 붙잡아 세우고 “집안이 어찌 이 모양인지 바른대로 고하지 못할까!”라며 다그쳤으리라.

“누이!”

그녀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본 남동생과 해후를 즐길 틈은 없어 보였다. ‘옳다구나’ 하는 얼굴로 가던 걸음을 휙 돌려 청사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난장판이 된 집안 풍경에 퍽 당황해 있는 아우에게 그간 잘 지냈냐는 안부를 뒷전으로 미루었다.

“마침 잘 왔다! 추적을 해야겠으니 네 능력을 좀 써먹자!”

청사는 얼결에 손목이 붙잡혀 끌려갔다. 물웅덩이에 제 얼굴을 비춰보며 고도에게 지어 보이려 연습하던 예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엔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는 악독업자를 바라보는 듯한 구겨진 미간만 남아 있었다.

“무슨 일인지부터 설명해야 하지 않겠어?”

“그럴 시간이 없어. 아버지와 고도까지 대대적으로 찾으러 나섰으니까.”

“온 가족이 나섰다니. 무슨 큰일이라도 난 거야?”

“큰일이지. 흔적도 없이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가보라도 사라졌어?”

“차라리 그러면 낫게.”

가보보다 귀한 게 사라졌다니. 도통 감조차 잡지 못하는 청사 앞으로 마당을 비질하는 종이 뛰어왔다. 그의 손에는 깃털 방석이 들려 있었다.

“찾았습니다, 여기 아기씨께서 꽃잠자던 방석입니다!”

청사는 이 집안에서 ‘아기씨’라고 불릴 만한 존재가 예그리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청사가 재빨리 물었다.

“무슨 소리냐, 설마 예그리나가 사라졌다는 게냐?”

쩔쩔매는 종 대신에 서진이 대답해준다.

“집 밖으로 날아서 도망갔다고 한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내가 안 본 새 덩치가 산만해지기라도 했나, 누이?”

“아니, 예그리나는 여전히 작고 귀엽지.”

“한데 그 작은 몸으로 날아서 도망갔다고? 어디 포악한 신수에게라도 걸리면 한 입 거리일 녀석이 겁도 없이 가출이라니!”

“가출 수준이 아니야.”

“제발 이 이상 놀랄 소리는 하지 말아줘.”

“예그리나의 기운이 천계에서 완전히 사라졌어.”

청사는 버끔거리던 입을 콱 다물었다.

미쳤구나, 이 아기용이.

집안은 물론, 천계 전체가 발칵 뒤집힐 만한 소리였다.

*

천룡 가문을 기준으로 서남향 십 리 밖으로는 선녀군의 주둔 지대가 있다. 그곳엔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다. 평원을 조금만 넘어가면 키 큰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험준한 산세가 이어지기도 한다. 산속 계곡에는 하계로 내려갈 수 있는 폭포가 자리 잡고 있는데, 선녀들은 훈련받은 후에 더러워진 몸을 씻거나, 월하의 목욕을 즐기고 싶을 때 이곳을 즐겨 찾았다.

방석에 묻은 예그리나의 기운은 바로 그 폭포에서 끊어져 있었다.

“설마 폭포에 휩쓸려서 하계로 떨어지진 않았겠지.”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서진에게 청사가 물었다.

“만약 그러하다면 어찌 되지?”

“어찌 되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는 거지.”

“최악의 상황이라니.”

“인간의 모습으로 화하지도 못하는 아이가 오염된 하계에서 앓다가 병들고, 인간들 손에 잡혀서 보신탕거리로 잡아먹히지 않겠느냐.”

인간이 용을 잡아먹는다고? 감히 인간이?

감히 상상도 못 해 본 일에 청사가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 입술을 다물었다. 굳게 다문 입새로 “끄응”하고 침음하는 소리만 새나왔다. 청사는 침착함을 되찾은 후에야 물을 수 있었다.

“그게 말이 되는가, 누이. 용에게 해를 가해 무슨 불화를 입으려고. 인간들이 신수는 또 어찌나 극진히 모시는가. 아예 신당까지 차려놓고 ‘신령님, 신수님, 노여움을 멈추소서.’하고 손을 싹싹 빌지 않던가.”

“옛말이다. 요즘 인간 세상은 네가 알던 것과 달라.”

“아무리 다르다 해도 성수를 그런 취급하는 건 듣도 보도 못했어!”

“용이 성수라고 생각하는 인간도 없을 거다.”

“그게 무슨…….”

‘쏴아아아.’

대화 소리를 덮어버릴 정도로 우렁찬 계곡 소리가 들렸다. 서진은 청사와의 대화를 멈추고 물소리를 따라 내려갔다. 그 뒤를 청사가 뒤쫓자 어느새 흐르던 계곡물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폭포 끝으로 자살하듯이 떨어지고 있었다. 요란하던 물소리도 뚝 끊어지는 곳. 그 무시무시한 곳 근처에 낯익은 남자가 서 있었다. 청사는 거센 물소리를 뚫고 소리쳤다.

“아버지!”

폭포 바람에 옷자락이 휘날리던 조아반이 뒤돌아선다. 그는 자색에 금실로 꽃이 수놓인 의복을 입고 있었다. 일각에서 은퇴한 나이가 무색하게 젊고도 근엄한 모습이었다. 튀어 오르는 폭포의 물방울마저 감히 조아반의 머리카락 한 올 적시지 못하고 비껴 날아갈지니. 만물의 위엄을 두루 갖춘 아비는 파랗고 청아한 눈을 깜빡이며 청사를 바라봤다.

청사는 조아반 곁으로 다가갔다. 그간의 안부를 물을 정신이 없었다. 바로 예그리나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오늘 퇴궁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자마자 예그리나의 실종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상황을 알 수 있겠습니까?”

조아반 곁에 다가가자 그제야 너풀거리는 자색 옷자락에 가려져 있던 다른 이가 보였다. 폭포에서 날아온 물방울이 조아반을 피해 내려앉은 곳. 그곳은 숱 많고 새카만 머리끝이었다. 젖은 조약돌처럼 까만 눈을 들어 바라보는 사람. 청사가 상사병에 애달아하던 바로 그였다.

‘고도!’

청사는 단숨에 달려가 그리워한 이를 끌어안고 싶었다. 품에 안아 빙글빙글 돌며 보고 싶었노라, 사랑하노라, 그간 입 밖에 내지 못한 연가를 쏟아내고 싶었다.

하나 달려가 입을 맞춘들, 지금의 고도는 웃으며 받아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의 표정은 얼어 있었다. 분위기도 한기가 일 만큼 지독하게 냉랭했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어여쁜 재회를 상상했던 것들이 모두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고도는 청사를 반길 여유도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인지 내가 설명해주마.” 

고도는 바위 밑으로 가뿐히 내려왔다. 잠깐 눈이 마주친 서진에게는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일 뿐, 청사를 위해 입을 열었다.

“천궁 고관들이 춘부장을 뵈러 와선 예그리나를 흉봤다고 한다. 아이는 그 소리를 직접 듣고 상심이 컸던 모양이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와 서러움을 털어내다 폭포에 휩쓸려 떨어진 것 같구나.”

고도의 말에 서진이 울컥해서 소리쳤다.

“남의 집에서 흉을 보다니, 그 고관들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지!”

여유로운 농담을 좋아하던 고도조차 그 순간만큼은 야차처럼 부리부리하게 눈을 뜬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죠, 서진 군장. 제가 속 좁은 인간인지라,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줄 수가 없어서 그들의 세치 혀에 응당 어울리는 벌을 내렸지 뭡니까.”

“응? 벌이라고?”

“간사하게 놀린 그 혀를 뽑아 복숭아나무 위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지금쯤 긴 막대기로 혀를 떨어트리려고 애를 쓰고 있겠군요.”

고도는 왼손을 들었다. 청사의 역린을 뽑아 만든 의수에서 검은 빛이 흘러나왔다. 가장 존엄하고 존귀한 천룡의 일부가 이리도 음산하게 빛나고 있으니, 악독한 환영도사라는 하계에서의 별명이 어디 가진 않았다.

서진은 혀가 뽑힌 고관들 사정을 듣자 속이 시원했다. 그래도 나무에 걸어둔 혀가 햇볕에 바싹 말라붙으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되겠지. 말로 먹고사는 작자들이 혀가 없으면 상제께서도 염려하실 테고. 나지막이 집으로 돌아가서 뒷수습을 해야겠노라 생각할 때였다.

“그래서 예그리나는 이 폭포 밑 어디로 간 거야?”

청사의 질문에 고도는 음산한 기운을 갈무리했다. 혀를 뽑아 나무에 매달아 둘 수는 있어도 하계로 사라진 예그리나를 바로 찾는 것은 고도의 능력 밖이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계속 살펴보고는 있는데, 기운이 명확하게 잡히지 않아.”

“왜? 여기 물줄기가 한곳으로 이어지지 않더냐.”

“그건 아닌 듯하다. 물줄기가 수백, 수천 줄기로 나누어져 있는 듯하구나.”

청사는 다시금 절벽 밑을 내려다봤다. 물줄기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끝도 없이 깊은 아래로 처박히고 있었다. 시종이 헐레벌떡 들고 달려왔던 방석에 남아 있던 기운이 어두운 굴 같은 절벽 안쪽에서도 느껴졌다. 그 기운은 한참을 아래로 이어졌지만, 거리가 멀어질수록 흐려졌고, 종국엔 완전히 끊어졌다.

웅장한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바닥. 하계로 이어지는 구멍 너머를 속속들이 파악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럼 이 물줄기를 따라가 본들, 예그리나를 바로 찾진 못한다는 뜻인데.”

고도는 방법을 강구하는 청사를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거지중천(居之中天)하여 물 위를 걸었다. 그때마다 튀어 오른 차가운 물줄기가 옷자락을 적셨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계곡 소리가 끊어지는 곳까지 다가가니, 어느새 절벽 끝의 허공이라. 발 아래로 아득한 어둠이 펼쳐졌다.

이 물줄기를 따라 태평하게 몸을 던질 수나 있을는지. 하계에 도착하기도 전에 허공에서 비명횡사하지 않을지 걱정이 들 만큼 높이가 까마득했다.

“서진 군장, 하계의 선녀탕이 이 계곡과 바로 이어집니까?”

눈치 빠른 청사가 먼저 소릴 질렀다.

“고도! 감히 뛰어내릴 생각하지 마라! 선녀들은 날개옷이 보호해서 이 높이에서도 무사한 거지, 너는 아무리 도술을 쓴대도 다칠 수 있어!”

그런 청사의 우려를 서진이 거든다.

“선녀 중에서도 하계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이 인도하지 않으면 길을 찾기 쉽지 않아.”

두 남매용의 만류에도 고도는 물러나지 않고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이곳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하계의 폭포 중 기운이 영험한 여러 곳으로 나누어져 흐르거든.”

선녀들의 목욕재계 풍습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하계 사정을 잘 알던 선녀도 그때 그 시절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최근의 하계엔 누가 다녀오기나 했던가. 없다. 마냥 옛일을 더듬어서 이 웅장한 폭포에 한 몸 던지기는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다.

서진은 고도의 고민에 아예 말뚝을 박아버렸다.

“선녀탕은 하계에서도 깊은 산속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반드시 한곳으로 연결된다는 법은 없지. 예그리나의 기운을 따라서 폭포 밑으로 몸을 던진들, 예그리나가 떨어진 곳과 전혀 상관없는 곳에 도착할 수도 있어.”

조아반도 아는 바를 거들었다.

“폭포물이 하계에 도착하는 걸 무작위로 설계해서 그렇다. 선녀들 수백, 수천이 한곳에 몰리는 걸 방지하고자 서왕모께서 이렇게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고 말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고도는 핵심을 바로 알아챘다.

“두 분 말씀대로라면 제가 이 폭포수를 따라 하계로 내려간들, 예그리나와 길이 어긋날 수 있다는 뜻이군요.”

고개를 주억거리는 용들을 보며 고도의 얼굴에 암운이 감돌았다. 걱정이 깊어진 고도가 “일단 뛰어내린 후에 생각해보겠나이다.”라면서 한 몸 거하게 던질 것 같았다. 그런 불상사가 벌어지기 전에 조아반이 냉큼 묘책을 말한다.

“서진아, 네 군대를 지상에 전부 풀어보는 건 어떻겠느냐.”

서진이 기겁하여 소리쳤다.

“아버지! 선녀 수만 명이 지상을 배회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건 누가 책임진답니까!”

“그럼 천계에서 하계로 보낼 만한 이가 없으니 저승에 도움을 요청해야겠구나. 저승차사들에게 직접 부탁하는 건?”

이번엔 고도가 반대했다.

“안 그래도 제게 불만이 많은 족속들입니다. 제 아이를 발견하면 제게 보복하기 위해 예그리나를 이용하면 이용했지, 순순히 되찾아줄 것 같지 않군요.”

서진과 조아반이 번갈아 물었다.

“청호림 신선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산신과 지신들에게 부탁해보는 방법도 있지 않느냐?”

“그러고 보니 고도는 땅의 주인이 지지한 대리자가 아니더냐.”

“땅의 주인도 이런 문제로 부탁을 하면 능히 들어주리라!”

그들의 이야기에 고도는 고개를 저었다.

“신선들은 원래부터 하계와 교류를 하지 않았습니다. 산신과 땅신들은 긴 잠에 들었으며, 땅의 주인은 제가 부르는 방법을 모릅니다. 언제나 주인께서 저를 먼저 찾았던 까닭입니다.”

강구하던 방법들이 모두 요원해지자 조아반과 서진, 둘의 입에서 기다란 침음이 새나왔다.

“으으으음.”

“이를 어쩐다.”

직접 가서 발품을 파는 것밖엔 별수 없으려나. 이렇게 여러 가능성만 늘어놓다가 지지부진하게 시간이 지나면 예그리나가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마침내 고민을 끝낸 청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언제든 폭포 밑으로 몸을 던질 준비를 하는 허공답보 중인 고도에게 물었다.

“하계의 요괴와 도깨비들에게 물어보는 건 어떨까.”

이번엔 고도와 조아반, 서진의 시선이 한꺼번에 청사를 향했다. 그는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존재들을 입에 담았다.

“토월산 구미호는 고도와 친하지. 몽당 도깨비도 고도의 피를 이어받아서 혈족이나 다름없다. 그 둘이라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줄 텐데, 어때, 내 생각이?”

미호와 몽당을 모르는 조아반은 그저 요괴와 도깨비란 존재에 불안함을 내비췄다.

“악독한 요괴가 힘없는 용을 잡아먹으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용의 영험한 기운을 먹고 천계로 올라오겠다 난리를 부릴 수도 있어. 우리 귀한 보배를 위험한 짐승 아가리에 밀어 넣는 격이야.”

“믿을 만한 요괴입니다.”

“어찌 요괴를 믿을 수가 있느냐. 역시 안 되겠다, 내가 직접 내려가서 땅의 주인에게 물어야…….”

“아버지가 천계를 비우면 상제께서 퍽도 가만히 계시겠습니다.”

“그래 봤자 대국 상대를 며칠 못 할 뿐인데!”

“그 며칠도 상제의 인내심으론 받아주지 않으실 겁니다.”

청사와 조아반은 같은 주군을 모셨다. 그러므로 상제의 까탈스럽고 독불장군 같은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조아반은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그가 전전긍긍하는 사이에 절벽 밑을 모두 조사한 고도가 돌아와 말했다.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한번 결심을 마치면 기필코 시행하고 만다. 이러한 고도의 행동력은 천룡 집안이 전부 아는 사실이었다. 고도는 청사를 오랜만에 봤지만, 달콤한 둘만의 대화에 심취할 겨를도 없어 보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천룡 후계자인 예그리나의 안전이었다. 그렇기에 청사를 반려가 아닌, 자신의 주인으로 대하며 공식 업무를 요청했다.

“소경께서 허락해주시면 ‘지상차사’로서 하계를 조사하고, 예그리나를 찾아서 데려오겠나이다.”

그 방법이 최선이다. 천계에 속한 존재들은 하계로 내려감에 제약이 많다. 하나, 고도는 ‘땅의 주인’이 직접 하사한 ‘진명의 보주’를 갖고 있는 몸. 배꼽 위로는 천계의 기운을, 그 아래로는 하계의 기운을 나누어 가진 채 모든 생명이 겪는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난 신선 같은 존재다. 그러니 자유롭게 땅으로 내려간들 대외 명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조아반과 서진은 최선의 방법에 고개를 끄덕였으나, 청사는 달랐다.

“그럼 나도 내려가겠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조아반과 서진이 도끼눈을 뜨고 청사를 돌아봤다. 한 달 내내 상제 곁에서 일을 보좌하고 돌아온 청사였다. 공무(公務)를 마치고 왔다고 쉴 수 있는 몸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제는 공무가 아닌 사무(私務)를 볼 때다. 오랫동안 비운 천룡 가문의 곳간은 풍족한지, 집안의 전통이 잘 보존되고 있는지, 집안 살림에 비리는 없는지, 사용인들의 기강은 해이하지 않는지를 돌봐야하지 않겠는가. 한데 또다시 집을 비운다니.

“할 일이 많아.”

“그래, 네가 확인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다.”

조아반과 서진의 반발에 청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상제께서 여드레 휴가를 주셨다. 고도와 함께 하계를 다녀와도 문제없다는 소리야.”

휴가라는 말에 고도가 나무랐다.

“일하고 얻은 휴가를 왜 공으로 날리려 하느냐. 여기서 쉬고 있어라. 내가 얼른 예그리나를 데려오마.”

고도 말에 조아반과 서진도 동참했다.

“네가 집을 비운 동안 돌보지 못한 집안일이 한둘인 줄 아느냐. 늙은 아비를 부려먹어도 유분수지, 네가 가주인 곳이니 네가 돌보거라.”

“네 둘째 아들에게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련. 안 그래도 애가 조숙해서 일찍 성장하던데, 꽃기운(사춘기 열병)이 잘못 들면 어쩌려고 그러냐?”

둘에게 청사는 냉정하게 말했다.

“아버지 소경 시절엔 저와 누이가 집안 대소사를 돌봤습니다. 은퇴하셨으니, 이번엔 아버지께서 가주의 일을 도와주셔야지요.”

“이런 불효막심한 놈을 봤나.”

“용에게 효도를 바라지 마시죠. 그리고 누이. 나슬 문제는 논외야. 용은 용답게 커야 하는 법. 이참에 내가 비운 집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식솔들의 사정은 어떤지를 배우면 좋겠군. 부탁할게.”

“아니, 내가 왜 남의 아들을 가르쳐야 하니?”

“언제는 금룡 조카가 예뻐 죽겠다며. 다 커서 징그러우니까 내외하는 거야?”

송곳처럼 날카로운 지적에 서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걘 인간화 하자마자 다 큰 청년처럼 보여서 징그러운데, 예그리나처럼 예쁘질 않다고…….”

당사자가 들으면 뛰어난 성장을 칭찬하긴커녕, 외모로 용을 차별한다며 억울해할 소리였다. 조아반도 서진과 마찬가지였다. 예그리나에겐 귀엽다고 껌뻑 죽는 할아비의 마음과 달리, 나슬은 “어린 게 싹수가 노란 것이 용다워서 관심도 안 간다.”며 냉정했다. 그런 둘에게 예그리나는 금이야 옥이야, 청룡 가문의 보배였으니 때아닌 가출 사건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속사정까지 일일이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청사가 고도의 손을 잡았다. 꼭 잡은 부드럽고 커다란 손에 고도는 멈칫했다. 청사를 가만히 올려다보는 까만 눈동자에는 불안과 걱정이 잠겨 있었다.

하여간 사려 깊고 잔정이 넘치는 인간 같으니라고. 차라리 조아반과 서진이 냉정한 편이지, 고도는 예그리나를 걱정하랴, 청사를 걱정하랴, 마음속이 바쁘기도 했다. 그 속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청사였다. 고도의 염려를 덜어주고자 고도가 좋아하는 예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살랑살랑, 봄바람같이 말했다.

“둘이 가자. 예그리나도 일찍 찾고 하계를 구경하다 오면 딱이지 않느냐.”

눈가를 접으며 긴 속눈썹을 깜빡거리는 청사의 모습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지켜보던 조아반이 “저, 저, 저놈 보게.”라며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고도가 대꾸했다.

“대롱아, 휴가받았다고 하계로 겸사겸사 운치라도 즐기러 갈 셈이느냐. 내 그런 네 뒤를 봐줄 여유가 없을 텐데.”

“걱정 마라, 고도야. 내가 상제 뒤치다꺼리하느라 누굴 돌보는 능력이 아주 출중해졌다. 사랑스러운 널 돌보는 것쯤이야 큰일도 아니지.”

“허어, 안 본 새 대범해졌구나. 상제 욕도 하고.”

“나랏님 없는 곳에서 흉도 못 볼쏘냐. 고도를 만나고 싶다고 집에 보내 달라는 데도 천궁에 묶어둔 파렴치한 하늘님이니 실컷 욕할 게다.”

그제야 고도가 웃는다. 만면에 숨겨둔 걱정과 근심이 그 순간만큼은 옅어졌다. 고도의 미소를 보자 청사는 안심이 되었다.

“아버지, 상제께 내 사정 좀 잘 설명해주시오. 누이는 나슬이랑 집안 문제 잘 돌봐주고.”

서진은 속으로 ‘용족 중에 너처럼 사랑에 미쳐서 인간 같은 짓을 하는 개체는 역사상 없었을 거야.’라고 험담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인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얼른 같이 내려가서 데려오거라.”

막내아들의 별스러운 짓엔 면역이 생긴 조아반도 이쯤 되니 그러려니 했다.

“지금 바로 가려는 게냐?”

“시간 끌어서 좋을 것 없겠지. 예그리나가 보신탕거리가 되면 내가 나서서 하계를 초토화해 버릴 테니.”

“그래, 하계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얼른 다녀와라.”

두 용의 배웅을 받은 청사가 계곡으로 발을 내딛었다. 청사는 거세게 떨어지는 물살을 가만히 바라보다 심호흡했다.

“후우.”

눈을 감고 어수선했던 마음에 고요함을 불러왔다. 잔잔한 호수면처럼 변하는 청사를 따라 폭포수와 바람도 덩달아 잠잠해진다. 청사에게 몸을 꾸벅 숙이듯이 반응하는 만물이었다. 청사가 다시 눈을 뜨자 파랗게 날선 용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는 세상을 울리듯이 거룩한 목소리로 명했다.

<물길을 열어라.>

그 말에 계곡이 반응한다. 천룡의 기운을 읽은 물줄기가 스스로 갈라지더니 맨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물속을 헤엄치던 오색 빛깔의 비늘을 가진 잉어들은 맨땅에서 팔딱거리며 입만 뻐끔거렸다. 청사는 가여운 잉어들을 보지도 않은 채 허공을 디뎠다.

<내 님아, 이리 오너라.>

청사가 고도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도는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청사의 품으로 스르륵, 들어오니 반대편 손이 고도의 허리를 감쌌다. 청사는 이런 순간을 빌미로 은근슬쩍 포옹을 하니 기분이 좋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만물이 경배하는 천룡의 힘을 써서 안전하게 절벽 밑으로 떨어질 수 있다. 하나, 고도의 능력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다. 유능한 제 님의 실력을 못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이참에 고도에게 청해보기로 했다.

<고도야, 지상차사의 능력을 보여 주거라.>

명령이 익숙해진 청사와 그런 청사의 분부를 따르는 고도가 시선을 섞는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상하관계로는 보이지 않는 친밀한 시선이었다.

“여부가 있을까.”

고도는 능청스럽게 청사의 명을 받들더니 손을 휘저었다. 역린으로 만든 손이 신비로운 먹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 먹빛은 화선지에 뿌려지는 먹물처럼 습기 찬 폭포 주변으로 번져나갔다. 검은 빛은 투명한 물을 물들이고 땅을 적시며 주변을 가장 순수한 암흑으로 덮어버렸다. 고도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까만 조약돌 같던 눈이 금색으로 변했다.

“어디, 가는 길을 밝혀 볼까.”

고도가 검게 변한 주변으로 몸을 빙글, 돌렸다. 검은 두루마기가 너풀거리며 높게 떠오른 순간, 사방을 적신 먹색이 순식간에 금빛으로 탈바꿈했다. 태양을 조각내 어두운 숲을 밝힌 듯한 찬란함이었다. 그 모습을 본 조아반과 서진은 자신의 신분과 직책도 잊고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대롱아.”

고도가 금빛 물살에 발을 담그며 청사를 잡아끌었다. 청사는 망설임 없이 그 손에 제 몸을 맡겼다. 고도가 폭포 밑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 청사는 그런 고도를 빙글 돌려 자신의 품에 안았다.

‘풍덩!’

두 사람을 삼킨 금빛이 빠르게 사라진다. 몸을 떨던 잎사귀는 잠잠해졌고, 서진과 조아반의 옷자락에 튀는 물도 투명하게 되돌아갔다. 눈부신 장관을 눈앞에서 목도한 두 용이 차츰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슬쩍 서로에게 시선을 주었다.

“인간의 도술이 원래 이렇게 대단한 것이더냐?”

“그럴 리가요. 고도가 특별한 것이지요.”

“이젠 정말 천계에 속한 존재가 다 된 것 같다.”

“그러게 말입니다.”

“으음? 반응이 왜 그렇게 미적지근하지. 뭔가 걱정이 되느냐?”

서진은 여전히 폭포 아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금빛이 사라지고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 폭포. 그 물줄기를 내려다보는 시선엔 진중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천계의 색을 지니게 된 인간이 하계로 되돌아갔습니다. 과연 하계가 도사를 반길까요. 이질적이라며 밀어내진 않을지. 제 걱정이 기우이길 바랄 뿐입니다.”

‘지상차사’라는 직책은 천계에서 부여한 대의명분일 뿐. 그 속 알맹이는 천계인에 더 가까운 고도에게 하계가 어떻게 반응할지 우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고도는 자신을 소중하게 안고 있는 청사를 품에서 올려다봤다. 고도의 도술로 만들어낸 금빛 보호막이 신기한지 이리저리 둘러보는 청사가 어린애같이 보였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는데, 어째 변한 것이 없다. 얼굴은 주름도 없고 머리카락에 새치가 나지도 않았다. 대범하게 결정하고 과감한 판단을 내리기에 좀 어른스러워졌나 싶은데, 지금 모습은 호기심 많고 감정표현이 풍부한 영락없는 소녀였다. 천궁에서 일할 땐 어떨지 몰라도, 눈앞의 청사는 마지막 봤을 때와 똑같은 셈이다.

이미 아랫세상에서 고도를 기억하는 인간은 모두 죽어 사라졌다. 고도가 알고 지낸 인간 중 은덕과 호혜가 깊어 죽은 후 저승에 가지 않고 천계로 바로 올라온 이도 없다. 거의 모든 인간들이 자연의 순리대로 저승에서 심판을 받았다. 살아생전 죗값을 치르는 그들이 천계에 있는 고도와 만날 일은 없었다. 그러니 고도도 더는 하계에 미련이 없을 수밖에.

이젠 기다리는 사람도, 만나볼 사람도 남지 않은 하계엔 특별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다녀오고 싶지 않았건만.

“왜 그렇게 보고 있어.”

청사가 눈가를 접으면서 물었다. 고도는 그런 청사에게 손을 뻗었다. 금빛이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살짝 넘겨주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봐서 좋구나.”

청사는 고도의 애정 어린 손길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배시시 웃음이 터져 나올까 봐 일부러 “큼큼”하고 목을 가다듬고는 새침하게 대꾸했다.

“흥, 이제야? 아까는 하나도 반가운 티가 안 나더만.”

“춘부장과 서진 장군이 있는 데서 그러면 부끄럽지 않겠느냐.”

“금슬 좋은 부부라고만 여길 게다.”

“부부. 으으음.”

“뭐야, 그렇게 불리는 게 싫어?”

“싫은 건 아니고, 으으음.”

쑥스러운 게지.

고도는 콧잔등을 긁적이며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아직 그런 건 뻔뻔하지 않아서 말이다.”

“익숙해지라고 둘이 보는 앞에서 뽀뽀를 많이 해줘야겠구나.”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그러지 마라.”

청사는 고도의 반응이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키득거리는 웃음을 삼키고는 고도의 이마에 피곤해서 불어터진 입술을 꾹 내리 앉혔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반려이니 이제는 익숙해서 마음이 소원해질 만도 하건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도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 애틋해지는 것만 같았다.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어 안달이 나고, 이렇게 마주 보면 입이라도 맞추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렸다. 얼굴만 보고 있어도 방긋 웃게 되니, 고도도 역시나 청사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낯부끄럽다며 하지 말라 타박하기보다는 둘이서 함께 하계로 내려갈 수 있어 기쁜 마음이 더 컸다.

“보고 싶었다, 내 님아.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활짝 웃는 청사를 올려다보던 고도가 입술께로 손가락을 옮겼다. 거칠거칠한 입술과 퀭해진 눈가가 여간 안쓰러웠다.

“괜찮으냐?”

“뭐가?”

“기껏 바쁜 일 끝내고 쉬어야하는데 이런 일에 신경 써도 되는지 묻는 거다.”

청사는 주머니에 부푼 바람이 푸흐흐, 빠져나가듯이 실없이 웃었다.

“혼사를 치르고 처음으로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내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너무 철이 없는 걸까?”

청사는 혼사를 치르고도 바빴다. 신혼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허구한 날 일에 쫓겨서 잠깐 눈 붙일 시간도 없었으니, 고도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어찌나 원망스럽던지. 그럴 때마다 고도는 고도 나름대로 청사를 달래주었다.

‘새로운 환경에 나도 적응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무 내 걱정 하지 말거라.’

청사는 소경 일에 익숙해지느라 바빴고, 고도 역시 천계 생활에 익숙해지느라 서로 짬을 낼 시간이 없다. 그런 둘 중 누가 더 힘들었을까, 겨루어 본다면 친구도, 가족도 없는 낯선 곳에서 혼자 적응했어야 할 고도의 마음고생이 더 컸을 테다. 고도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그를 둘러싼 낯선 상황에 적응하기 힘들어 마음에 병이라도 났겠지. 하나, 고도는 그 모든 시간을 의연하게 버티고 넘어갔다. 그럴수록 청사의 죄책감은 빚처럼 불어났다.

언젠가 꼬옥 진심으로 사과하고, 챙겨주지 못한 시간만큼 더 많은 것을 퍼부어줘야겠다 여겼다.

지금이 바로 그 날인 듯했다. 고도에게 신경 써주지 못했던 잘못에 용서를 구했다.

“너를 신경 쓰지 못했던 것에 먼저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 함께 있어주겠다고,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노라 약조했는데, 이 미련한 용이 그 약조를 지키지 못했구나. 내 머리를 쥐어박지 않으련.”

나름 진지한 사과였지만, 고도가 넘겨버린다.

“중요한 일을 하는 천룡이 나를 그렇게 신경 쓰면 되나. 나는 나 나름대로 유유자적하게 잘 보냈으니 용서를 구할 것도 없다.”

“널 외롭게 내버려두지 않았더냐.”

“혼자서 복숭아 따먹으며 신선놀음 했노라.”

“예그리나와 나슬을 돌본다고 고생했을 테고.”

“그 둘은 인간인 내가 돌볼 존재도 아니지. 알에서 부화한 이후로 내가 가르쳐줄 것이 없는 영특한 아이들이었다.”

“아버지와 누이 눈치를 보지는 않았더냐.”

“오히려 두 분이 나를 눈치 봤지. 네가 지금 말하는 것처럼 적적하진 않을지, 힘들거나 후회하지는 않을지, 매일 와서 살펴줄 정도였다. 너무 극진한 대접에 내가 다 민망하더구나.”

“천계인들이 네가 인간이라고 얕본다든가…….”

“금관소경보좌가 직접 명한 ‘지상차사’를 업신여길 존재가 누가 있겠느냐. 내가 상전이었다.”

걱정이 무색해지는 의연한 대답이었다. 순식간에 머쓱해진 청사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렇게 대답하면 내가 뭐 해줄 게 없잖아.”

시무룩한 청사를 보고 고도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렇게 유쾌한 웃음은 처음이었다. 아예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는 호탕한 웃음에 청사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고도오오, 나 진지하다고!”

“하하, 대롱아, 너는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구나.”

“나처럼 늠름한 금관소경보좌가 어디 있다고!”

“맞다, 맞아, 너만큼 공무를 잘 돌보는 용도 없지, 그럴 때만 유능하다, 맞다, 맞아.”

“아, 고도.”

청사는 두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저를 놀리기만 하는 야속한 님 덕분에 붉어진 입술을 질근질근 씹으며 퉁을 냈다.

“됐다, 내가 괜한 것에 신경을 썼구나.”

고개를 휙, 돌려버리는 청사를 보며 고도가 더 소중하게 허리를 끌어안아 준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하계에 내려간 김에 네 휴가 내내 놀다 올라오는 건 어떻겠느냐.”

“그 말 물리면 안 된다. 우리가 제대로 신혼도 못 보낸 게 영 마음에 응어리져서 안 되겠어.”

“못 본 새 더 능글맞아졌구나.”

“그럼 누구 남편인데.”

인간들의 호칭을 써먹다니. 서진이나 청사나 역시 남매가 맞구나 싶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커다란 용의 뱃속 같던 길고 긴 절벽도 어느새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폭포가 중간에 끊어졌구나.”

오래전엔 선녀탕으로 이어졌던 물줄기였으나 지금은 모종의 이유로 하계에 닿지 못한 채 하늘에서 흩어지고 만다. 주변을 감싼 금빛이 팍 소리를 내며 터지더니, 그 빛은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맨몸으로 떨어지는 둘을 두터운 구름층이 맞이해줬다.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도 모자랄 판에 청사의 얼굴엔 근심걱정이 없었다. 하늘의 기운을 머금은 천룡. 태생부터 햇볕과 달빛, 바람과 구름의 사랑을 받는 천룡에게 하늘이란 땅보다 아늑하고 안전한 곳이 아니겠는가.

“꽉 잡아.”

청사는 고도의 무릎 밑을 받쳐 들었다. 등과 다리를 안아들자 낯선 자세에 고도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갑작스러운 포옹을 청사가 미소로 무마한다.

청사는 구름을 밟고 사뿐사뿐 내려왔다. 답호가 너풀거릴 때마다 날아가는 새들이 구경 왔다. 바람도 적당히 훈훈하고 햇살도 좋다. 하늘에서 취하는 낭만에 청사는 웃기만 했다.

“저 밑에 보거라. 네 고향 땅이 가까워지고 있구나.”

두터운 구름층을 지나자 녹음이 짙은 사철나무 정수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능선이 아름다운 야트막한 산세는 눈이 시릴 만큼 푸르렀다. 고도는 그 산중을 가리켰다.

“내가 아는 신목(神木)이다. 저기로 가지 않겠느냐.”

“본부대로 하지요, 고도 아씨.”

청사가 장난스럽게 대답하자 고도가 한쪽 볼을 잡고 흔들었다.

“대롱 아씨가 못 하는 말이 없구나.”

볼이 꼬집히고도 히죽거리는 청사는 무당들이 오색 비단을 걸어두는 신목 아래로 내려섰다.

‘쿵!’

가벼운 몸놀림과 달리,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커다란 진동이 산을 뒤흔들었다. 너풀거리며 바닥으로 가라앉는 옷자락과 반대로 나뭇가지마다 앉아 있던 산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수고했다.”

고도는 내려달라는 말 대신 안고 있던 청사의 얼굴을 끌어내렸다.

‘쪽.’

기습적인 뽀뽀였다. 그 작은 소리가 잘 익은 봉선화 열매를 건드려서 톡 터지는 소리를 닮아 있었다. 청사의 두 볼이 순식간에 도홧빛으로 물들었다.

고도는 청사의 목에 감았던 팔을 풀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어디 보자. 내가 잘 온 게 맞으려나.”

고도가 뒷짐을 지고 둘레둘레 주변을 살피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청사가 재빨리 따라붙었다.

“고도야, 내가 참고 있는 걸 정녕 모르고 이러는 게냐.”

“옳지, 저기 길이 있구나.”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수절을 했는데! 이런 내 마음도 몰라주고 불씨를 지르다니!”

“보자, 여 어디 신을 모시는 굿당이 있을 터인데.”

“가지 마라, 내 진하게 입 한번 맞추게 해주면 안 잡아먹으마.”

달아올라서 끙끙거리는 청사를 피해 요리조리 빠져나간 고도가 신목 옆에 난 돌계단을 올랐다. 몇 계단 오르자마자 ‘국사당(國師堂)’이란 현판이 달린 사당이 보였다.

“게 아무도 없느냐.”

고도가 거드름을 피우며 불러보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살짝 열린 문이 바람에 삐걱삐걱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당주가 청소를 하다 잠깐 자리를 비운 게 아닐까 싶다.

문틈 사이로 금단청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단청 위에는 사당에서 모시는 신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단군이나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는 많이 빛이 바래 있었고 기운이 탁했다. 그나마 칠성신들의 그림은 고도를 알아보는 듯, 그림 속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고도는 그들을 소환하기로 했다.

“개양, 옥형, 요광, 천권, 천기, 천성, 천추! 하늘을 빛내는 일곱 개의 별들을 맞이하러 큰 어르신 고도가 왔으니, 이리 오너라!”

들풀만 웃자란 마당에 한차례 모래바람이 일어났다. 반쯤 열려 있던 나무문은 세찬 바람에 덜커덩거렸고, 연약한 문고리는 치렁치렁 소릴 내며 흔들렸다. 신목 가지에 비단과 함께 매달아둔 방울 소리가 요란해졌다. 화창하던 하늘에 두터운 구름이 몰려와 햇살을 가리니, 몰아치는 바람은 한겨울 그것처럼 차가웠다.

그림 속에서 신령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구나. 그 말썽쟁이 환영도사야.’

‘그 천지분간 못하던 고도가 돌아왔어.’

‘어디 뻔뻔한 얼굴 맞이하러 가볼까!’

초상화들이 흔들리며 연기가 피어난다. 사내들이 우르르 그림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들은 그림에서 입고 있는 봉선화색, 치자색, 풀색, 하늘색, 물색과 밤하늘색, 깊은 계곡 색깔의 무복에 북두칠성이 빛나는 검은 무관을 써야함이 마땅할진대, 전혀 딴판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일곱 명의 남신들의 복장은 고도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해괴했다.

“이리 왔구나, 고도!”

바람에 덜커덩거리던 나무문이 요란하게 부서지며 남자 일곱이 달려들었다. 치성 드리던 재단 위 초상화가 감쪽같이 비어 하얀 종이면만 남은 것을 확인한 청사는 이들이 말로만 듣던 칠성신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한데 북두칠성 ‘별의 문지기’이면서 어째 차림새가…… 어찌하여 서역인처럼 해괴망측한 옷을 입고 있는 건지…….

얼이 나가 있는 청사와 그런 청사만큼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는 고도. 칠성신들은 둘을 둘러싼 채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환영도사 혼자가 아니었구나! 옆에 예쁘장한 도령은 누군가?”

“아니, 그보다 요즘 세상이 어느 땐데 아직도 이런 거추장스러운 두루마기 차림샌가! 우리처럼 정장으로 멋있게 차려입지 않고!”

“설마 도술을 쓰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요즘 세상에 그러면 인터넷에 올라가고 한순간에 가짜 영상이니 뭐니, 실검을 차지할 걸세!”

“그러고 보니, 요즘 요괴도 없어져서 고도가 요괴 꽁무니를 쫓아다니지 않아도 되지 않던가.”

“그럼, 그러엄, 요괴들 전부 저승사자 손잡고 명계로 가버렸어. 덕을 좀 쌓은 것들은 천계로 올라갔고.”

“우리를 기억하고 모시는 사람도 없는 때에 요괴는 무슨, 귀신들도 살기 팍팍하다고 미국이나 중국처럼 넓은 대륙 시골 폐가로 숨어드는 판에.”

“걔네도 서양 귀신들과 위화감 없게 모습 다 바꾼다며. 진짠가.”

“진짜일세. 폐가 체험하는 유투버들 놀리는 재미로 산다더군.”

고도와 청사는 칠성신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와르르 내뱉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인터넷은 뭐고 가짜영상, 실검? 요괴들과 귀신들마저 도망갔다니? 유투버와 폐가 체험?

“잠깐, 잠깐만.”

청사는 와글와글 내뱉는 칠성신들을 말렸다. 그러곤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칠성신들의 해괴망측한 차림새를 더 찬찬히 살펴보았다.

초상화에서 봤던 무관과 무복 차림과 거리가 멀다. 턱 밑으로 길게 내렸던 수염은 왜 잘라냈는지. 신체발부수지부모라. 누구보다도 이 땅 위의 인간들이 자식된 도리이자 가치로 여기던 그 머리카락을 칠성신이란 것들이 싹둑 잘라서 목 뒤와 귀 밑을 훤칠하게 드러냈다. 참으로 배은망덕한 꼴이로다.

하늘에서 대업을 하는 청사는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칠성신에게도 부모격인 하늘이 있을진대, 그 하늘의 노여움이 두렵지도 않은가. 모두들 이 해괴한 꼴이 뭐란 말인가.”

청사의 꾸지람에 치자색 넥타이를 맨 ‘옥형’이 소곤거렸다.

“젊은 꼰대군.”

그 속닥거림에 나머지 육성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사는 기가 막힌 반응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한숨처럼 말했다.

“나는 옥황상제를 모시는 금관소경보좌, ‘한무’라고 한다.”

청사의 자기소개에 장난기 가득한 악동 같던 칠성신들이 그대로 굳었다. 그들은 눈알을 도록도록 굴리면서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정말인가?’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생각을 전할 수 있는 전언(傳言)이 이어졌다.

‘거짓말 아냐?’ 

‘무슨 거짓말을 저렇게 그럴듯하게 해!’

‘금관소경보좌가 왜 하계를 내려와! 하늘 일이 얼마나 많은데!’

‘상제가 우리가 인간들 풍습으로 사는 모습을 알고 벌주려는 게 아닐까?’

‘그 바쁜 치가 퍽도 땅에 있는 우리 모습을 신경 쓰려고!’

‘이런 젠장, 어쨌든 망했어!’ 

‘야, 일단 무릎 꿇어!’

하늘색 넥타이를 맨 남자가 무릎을 꿇고 바닥에 넙죽, 절을 하며 외쳤다.

“칠성신, 천권, 거룩하신 금관소경보좌를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여섯 남자들이 뒤따라 절을 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서열을 나누자면 북두칠성을 보좌하는 칠성신도 신은 신인지라, 땅 위의 그 어떤 존재보다 높은 존재임은 분명했다. 하나, 천계 소속인 청사와 하계 소속인 칠성신의 호봉과 급수를 나누면 아무래도 우주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옥황상제와 더 가까울수록 직급이 높다고 봐야할 터. 특히 옥황상제 곁에서 일을 보는 대경, 중경, 소경은 천계 소속 신들보다 더 높은 존재로 통용되기도 했다.

제 앞에 절을 하느라 바닥에 납작 엎드린 짧은 뒤통수를 보며, 청사는 이마만 짚었다. 허연 목덜미가 더 확연하게 드러나서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일어나 보거라.”

칠성신은 서로의 눈치만 보다가 슬그머니 옷을 털고 일어났다. 청사는 이들에게 전후사정을 캐물었다.

“나와 고도는 300년 전쯤에 이 땅을 떠났었다. 하여 하수상한 세월의 변화를 알지 못했고, 신이란 것들이 이런 괴상망측한 꼴로 고도의 부름을 받잡을 줄도 몰랐구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누구 하나 짧게 설명해 보거라.”

신들의 전통마저 흐려지고 요괴와 귀신이 도망간 땅이라니. 그건 곧 죽은 땅을 뜻하는 것이 아닌지.

썩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답변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깊은 계곡 색깔의 넥타이를 맨 신이 나섰다.

“천추라고 하옵니다.”

그가 손을 들어 청사와 고도의 뒤편을 가리켰다.

“설명하기에 앞서 두 분 다 뒤를 돌아봐주십시오.”

갑자기?

의심 많은 고도와 청사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천추는 요지부동인 그들에게 난색을 표하며 웃었다.

“허허, 산 사이로 비치는 이곳 사람들의 풍경을 보여드리기 위함입니다. 저를 믿고 뒤를 한번 봐주시지요.”

고도와 청사는 그 말에도 의심을 거두지 못한 채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남쪽으로 뻗은 새파랗고 청명한 하늘 아래, 오밀조밀 초가집이 모여 밥 짓는 냄새가 구수하게 피어오르는 익숙한 풍경을 기대했건만.

놀랍게도 고도와 청사의 시야에는 첨탑과 키 큰 유리 건물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건물들은 태양빛과 겨루듯이 빛났는데 그 모습이 청사의 둘째 형이 누워 있는 은하수만큼 반짝였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엔 네발 달린 기계가 줄지어 굴러갔다. 사람들도 콩나물시루처럼 수두룩 빽빽하니, 그 숫자가 가히 수천에 이를 듯했다.

이 무슨 별천지인가. 이게 하계 풍경이라고?

청사는 입을 벌렸다. 턱이 밑으로 툭, 떨어져 다물어지지 않았다. 고도는 얼음같이 굳은 상태였다.

놀란 둘을 확인한 천추가 비로소 안심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귀하신 두 분께서 서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빵, 빠앙, 하고 드문드문 경적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청사와 고도는 처음 보는 ‘자동차’들로 가득한 도시 풍경이었다.

*

고도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천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문물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칠성신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들의 차림새를 빤히 살피는가 하면, 사당 지붕 위에 올라 앉아 저 멀리 펼쳐진 도심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기도 했다. 평소라면 그 모습이 귀엽다며 웃었을 청사의 얼굴엔 수심이 깊었다.

“그러니까…….”

건물 보에 기대어 선 청사가 중얼거렸다.

“고작 백년 남짓한 사이에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단 말이지.”

풀색 넥타이를 맨 요광은 목을 가다듬고 응했다.

“저희도 원래 남산에서 치성을 받았습니다. 한데, 국사당이 여기 인왕산으로 옮겨지면서 거처도 이렇게 바뀌었죠. 신들이 모시던 사당이나 신목들은 전쟁으로 사라졌고, 그나마 남은 저희 같은 신들도 더는 인간들이 찾지 않아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칠성신들도 고초가 많았구나. 하계의 변화상에 맞춰 살아가느라 애쓴 것일 테고.

청사는 누그러진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천계로 돌아오는 건 어떠한가. 하늘의 별을 더 가까운 곳에서 돌볼 수 있는데.”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조만간 그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때가 되면 천계에서 소경보좌께 직접 인사하러 찾아뵙겠습니다.”

주변 탐색을 마친 고도가 청사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칠성신들의 옷차림에 큰 관심을 보였다.

“대롱아. 이왕 하계에 온 거 하계 풍습으로 옷을 입어 보는 건 어떠냐?”

질색인 표정을 짓는 청사에게 밤하늘색 넥타이를 맨 천성이 말했다.

“안 그래도 하계의 패션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두 분께서 두루마기 휘날리며 도심으로 나가시면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겠군요.”

청사는 패션이라는 표현에도 영 적응할 수가 없었다. 눈까지 반짝이며 신기한 옷차림새에 관심을 가지는 고도를 끌어당겼다.

“우린 잃어버린 하늘의 보배를 찾으러 왔다. 일만 보고 얼른 돌아갈 테니 뒤숭숭한 옷차림새 권유는 사양하고 싶구나.”

실망한 기색이 가득한 고도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꽤나 적나라하게 울렸다.

“언제는 예그리나를 찾는다는 핑계로 하계에서 실컷 놀고 가자며, 대롱이는 한입으로 두말하는 용이었군.”

청사는 못 들은 척 하고 천성에게 물었다.

“최근에 하계로 떨어진 하늘의 기운을 읽은 적이 있느냐.”

잠깐 고민하는 기색이라도 있을 줄 알았건만, 천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길.

“별똥별 하나가 남쪽으로 떨어졌습니다.”

오호라, 역시 천룡의 후계자이니 하계로 내려올 때도 요란법석했구나.

청사는 반가운 마음으로 되물었다.

“남쪽이라면 어디 말인가?”

“힘을 잃은 이 땅 위에 그나마 문이 열린 몇 군데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이지요.”

“그래서 거기가 어디냐 묻지 않더냐.”

“계룡산이라 합니다. 아직 산신이 살아 있는 동네죠.”

곁에 있던 옥형이 허공으로 손을 휘둘렀다. 허공에 바람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그림은 이 땅 위의 복잡한 도로와 건물들, 험준한 산세 사이의 댐과 계곡까지 세세히 표시된 지도 형상으로 바뀌었다.

“이곳입니다.”

국사당에서 멀리 떨어진 곳. 인간들이 타는 자동차를 타도 네 시간 이상은 걸릴 거리였다. 고도는 지도를 보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축지(縮地)를 해서 가야겠군.”

옥형이 정색했다.

“안 됩니다. 가는 골목마다 이 많은 차들이 달리는 도로가 뚫려 있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자동차에 비견되는 속도로 달려 나가면 세상이 뒤집어집니다.”

“허면 구름을 타고 날아야겠구나.”

“그도 안 됩니다. 그러다가 비행기와 부딪칩니다. 이 땅 위엔 하루에도 수천 대의 비행기가 도착하고 떠나거든요.”

“바다에서 파도를 타고 가는 건?”

“그 또한 역시 안 됩니다. 정찰하는 해군에게 발각되고 군부대로 끌려가 갇힐 수도 있습니다.”

“땅 밑을 뚫는 것은.”

“당연히 안 되고말고요. 지진 계측기가 반응해서 난리가 나겠죠. 혹여나 상하수도관이라도 건드리면 도심의 물 공급이 전부 멈춰버릴 것입니다.”

“도술로 거리를 접으면…….”

“당연히 안 되고말고요!”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고도는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고도를 잘 아는 청사는 그 표정만으로도 고도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았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그리 전부 안 된다 말하면 대체 어떻게 가라는 소리냐?”

“자동차, 기차, 비행기. 그런 인간들의 교통수단을 이용하시라 일러드립니다.”

“…….”

능력이 있는데도 써먹질 못한다는 소리에 고도는 말문이 막힌 모양이다. 대중교통밖에 방법이 없다고 여기는 칠성신은 우르르 몰려들어 한마디씩 했다.

“터미널이나 기차역에 가시려면 이 복장으로는 안 됩니다. 옷을 갈아입으셔야 해요.”

“돈은 있으십니까? 예전처럼 보석이나 금화 몇 닢 건네서 물건을 사고팔던 때와 다릅니다. 여기, 위인들 얼굴이 그려진 돈을 써야 합니다.”

몇몇은 고도 옆에 바싹 다가와 엄중하게 경고했다.

“도술로 이걸 복제해서 쓰면 되지 않나, 생각할 테지만 그러면 큰일 난다. 운 나쁘면 경찰서에 잡혀 들어가.”

“우리가 노선 보는 법부터 가르쳐줄까?”

“가만있어 보자. 도사야, 뭘 타고 갈 게냐. 버스? 기차? 비행기?”

와글와글 쏟아지는 의견들에 청사가 손을 들었다.

“다들 그만!”

목소리가 뚝 끊긴다. 청사는 물이 불어난 계곡에서 금사를 한 알 한 알 건지는 마음으로 인내심을 발휘해 상황을 정리했다.

“예그리나가 남쪽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단 건 확실한가?”

칠성신이 한입으로 외쳤다.

“대낮에 그토록 밝은 별똥별이 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곳에 가려면 인간들이 만든 문물을 이용해야 하고?”

“과학이 발달하여 도술을 쓰면 세상이 떠들썩할 테니까요.”

“그 인간들의 문물을 이용하기 위해선 차림새부터 바꿔라?”

“소경과 도사의 차림새는 드라마나 영화 촬영이라 오해받기 십상입니다. 인간들의 이목을 끌어 귀한 천계의 존재를 찾으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드라마나 영화는 대체 뭔지. 청사는 이야기를 더해갈수록 끔찍한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사람들 눈을 피해서 다니는 게 그렇게 어렵단 말이지.”

“서울이라 불리는 이 도시에만 인구수가 1천만이 넘습니다.”

천만. 천계인들을 다 합쳐도 백만에 못 미치거늘. 상상도 못한 숫자에 입이 쩍 벌어졌다.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서울 밖 지역까지 포함하면 도합 5천만에 달하는 인간들이 바글바글합니다. 그들은 ‘카메라’라는 기계의 눈을 이용해서 사람이 없는 공간을 감시할 수 있고 영상물로 녹화할 수도 있습니다. 5천만 인구의 맨눈과 기계의 눈을 피하면서 다니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오, 오천만이라니. 이 비좁은 땅덩어리에 그만한 인구가 어떻게 모여 산다는 걸까.

세상이 변해도 너무 변한 듯했다. 하계에 내려오면 달구지를 타고 가며 서산 너머로 저무는 해를 구경할 생각이나 했다. 꽃이 만발한 정자에 앉아 풍월을 읊으면 좋지 아니한가. 여유가 있다면 문방사우를 구해 난을 쳐도 그만이다.

옛적에 누렸던 여유와 편함을 더는 찾을 수도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복작복작 엉켜서 지내는 세상이다. 답답하고 비좁을 텐데, 그마저도 부족한지 기계를 통해 서로를 감시한다니. 이 무슨 거대한 옥사(獄舍)인가 싶었다.

예그리나를 빨리 찾아서 하계나 여유롭게 노닐려 했던 생각이 와르르 무너졌다. 청사는 의욕을 잃은 눈으로 도시를 내려다봤다. 수십 년 된 소나무 사이로 삐쭉삐쭉 돋아난 건물들은 생경함 그 자체였다.

저렇게 건물을 높게 올려서 무얼 하려는 걸까. 천계에 닿으려는 걸까.

청사는 한숨을 삼키고는 고개를 돌렸다.

“고도.”

그 부름에 까만 눈을 깜빡인 고도가 고개를 든다. 침울해하는 청사와 달리 시종일관 덤덤한 표정은 이 혼란스럽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가늠하기 어렵게 했다. 속 깊고 생각 많은 고도의 그 본성이 이 순간 빛을 발했다.

“토월산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

칠성신들이 번갈아 대답했다.

“이곳이로다. 명칭이 인왕산으로 바뀌었지.”

“허면 이곳에 살던 구미호들은?”

“인간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서 살고 있지. 구미호뿐만 아니라, 도깨비와 반인반요들이 모두 인간 모습으로 새로운 세상에 적응했단다.”

“그럼 하나만 더 묻자. 토월산 구미호들 중 ‘미호’란 처자를 찾고자 한다.”

“미호라면?”

“그 여인은 본디 아홉 개의 꼬리를 가졌지만, 사랑하는 인간에게 꼬리 하나를 빼앗겨 팔미호로 지냈지. 허나, 내가 그녀에게 까만 꼬리 하나를 선물했으니 혹시 아는 바가 있는가.”

물색 넥타이를 휘날린 천기가 우레와 같이 소리쳤다.

“오호라, 외꼬리 구미호 말이군! ‘가연’이라 불리지 않던가!”

외꼬리라니.

고도가 혹시나 하여 물었다.

“어찌하여 외꼬리라 불리는가. 설마 지진아 기질을 못 버려서 인간들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줄 것처럼 사랑하다 꼬리를 다 잃고 하나만 남은 겐가?”

“그런 모자란 구미호는 장닭에게도 먹히기 십상이다. 외꼬리란 것은 새카만 꼬리가 특이해서 붙인 이름이니. 토월산 구미호들의 족장인 여인을 부르는 말이었지.”

그 말에 걱정이 태산 같던 고도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족장이라. 제 아비를 따라 구미호들을 돌보는 듯했다. 울고불고, 짜증이나 픽픽 내던 덜 자란 어린아이 같던 구미호가 어느새 의젓하게 커 나머지 동족들을 지키게 되었다니. 장성한 딸 소식을 들으면 이렇게 뿌듯할는지.

고도는 입가로 번지려는 해묵은 웃음을 얼른 숨겼다. “흠흠”하고 목을 가다듬고는 여전히 무덤덤한 어조로 반응했다.

“그 외꼬리 구미호의 행방은?”

이번에도 네 시간 거리의 남쪽 얘길 하면 ‘카메라’란 것에 잡히더라도 도술을 쓰겠노라 똥고집을 부릴 참이었다.

“을지로 지하상가.”

요광이 수염을 멀끔하게 자른 얼굴로 씩 웃었다.

“그곳에서 도깨비와 무당들에게 물건을 파는 유명한 만물상이 되었지. 모은 돈으로는 구미호들을 지키는 아주 똑똑한 수장이야.”

을지로가 어디인지는 고도도 잘 안다. 다만, 그 도로에 ‘지하’로 상가가 나 있다는 말이 퍽 이상하게 들릴 따름이었다.

땅굴을 파서 시장이 열렸는가.

고도가 그렇게 한 번 더 물을 참이었다.

흰머리가 성성하게 난 노인 하나가 놀라서 소리쳤다.

“워어매?! 여 있던 그림 다 어디 간겨?!”

비질을 하며 국사당 앞까지 왔다가 까무러치려 했다. 제단 위에 부리부리한 눈을 뜨고 있던 칠성신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당주님, 당주님!”

노인은 빗자루를 던지고 어딘가로 달려 나갔다. 칠성신은 저마다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이런, 얼른 돌아가야겠다.”

“도사야, 을지로 지하상가는 산을 내려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잡고 물어봐라. 잘 알려줄 게다!”

일곱 남자가 곧장 연기로 화한다. 모락모락 피어난 흰색 연기가 허공을 빙글빙글 돌다가 문틈 사이로 들어갔다. “당주님!”을 외쳤던 노인이 한 남자를 잡아끌고 오며 소리쳤다.

“아니, 글쎄 그림이 지워진…… 어어? 이게 뭐시당가?”

색색깔의 무복을 입은 칠성신은 초상화 안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노인이 보지 않을 때 고도에게 찡긋, 윙크를 해 보이는 여유도 부렸다. 고도와 청사는 나무 위에 올라가 그런 작은 소란을 지켜보았다.

을지로 지하상가라. 하늘 위로도 건물이 솟고, 땅 밑으로도 사람들이 장사를 한다니 알면 알수록 별스러운 풍경이지 않은가.

“이 사람이 헛것을 봤나.”

“아니, 참말로 이상하구먼, 아무 그림도 없었는디!”

“예끼, 이 사람아. 더위를 먹은 게야?”

“아니, 그것이, 허어어, 이상하네, 이상해. 아, 그렇지, 여 아까 젊은 남자 둘이 있었습니다! 그 둘은 봤을 터인데!”

노인은 뒤를 돌아봤다. 마당에 서 있던 남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조금 특이한 옷차림새였는데, 이상하게도 얼굴을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어어, 어?”

“에잉, 이 싱거운 사람 같으니라고!”

노인은 쯔쯧, 혀를 차면서 가버리는 사람을 붙잡지 못했다. 벽에 걸린 칠성신 그림과 텅 빈 마당을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뒷머리를 긁적였다.

“미치고 환장하겠구먼. 진짜 더위라도 먹었남.”

노인은 보 밑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 고도와 청사가 서 있던 나무에는 참새 두 마리만 앉아 짹짹거렸다.

*

청사는 산을 내려온 직후 느끼는 생경함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흙과 돌길이어야 할 곳은 회색빛으로 평평하게 다져져 있었다. 그 회색 땅 위엔 하얀 줄이 그어져 선 안을 따라 바퀴 네 개 달린 괴상한 모양의 마차, 아니 ‘자동차’라 불리는 기계가 쌩쌩 지나다녔다. 사람들은 하얀 줄이 여러 개 그려져 있는 ‘횡단보도’ 앞에서 멈추어 서선, 사람 키보다 높은 장대에 걸린 사람 표시가 적색에서 녹색으로 변해야 지나갔다.

이 얼마나 철저하게 소외된 기분인지. 천궁에 틀어박혀 일하느라 아래 세상이 이렇게 변화한 줄은 까마득히 몰랐다.

심란해하는 청사와 달리, 고도는 그새 이쪽 세상 문물에 적응을 마쳤다. 까맣고 초롱초롱한 두 눈은 순수한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무슨 음식 냄새가 이리도 고소할꼬. 한번 먹어보지 않으련? 대롱아, 응?”

보채는 고도가 귀엽긴 하다만. 사람들 많은 곳에서 고도를 놓치기라도 할까 봐 청사는 맞잡은 손을 풀어주지 않았다.

“나중에 사먹고, 일단 을지로부터 가자.”

“막대기에 옥수수를 끼워서 무슨 가루를 뿌린 것 같은데, 하나만 먹어보자.”

“난 먹다 체할 거 같아.”

고도는 아쉬움에 입맛만 다시다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다들 머리 색깔이 휘황찬란하구나.”

빨간색, 분홍색, 파란색으로 빛나는 사람들 머리를 구경하다가 자연스레 입고 있는 옷도 관심을 가졌다.

“날이 덥다고 맨팔과 맨다리를 드러낸 복식은 또 어떻고. 으음, 저 처자는 가슴도 보이는데…….”

하계에서 생활할 때는 차마 엄두도 안 났을 짧은 셔츠와 딱 달라붙는 옷들을 남세스럽게 보던 고도가 고개를 들었다. 오가는 사람만큼이나 건물들도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저 봐라. 움직이는 그림이다. 오오, 신기하구나.”

그건 빌딩 전광판이었다. 광고 영상을 흥미진진하게 보던 까만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목줄 맨 강아지가 산책하는 것도 구경했다.

“강아지를 상전처럼 모시는구나. 대롱아, 저기 봐라. 똥을 직접 집어서 치워주지 않느냐.”

두 손을 꼭 잡고 가던 남녀가 드러내놓고 입을 맞추는 장면을 보며,

“어이쿠.”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그 대범함에 진귀한 명품이라도 본 양 두 눈을 반짝이기 일쑤였다.

청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누이가 무심코 던진 얘기가 떠올랐다.

‘요즘 인간 세상은 네가 알던 것과 다르거든.’

‘용이 성수라고 생각하는 인간도 없을 거다.’

그 말이 이 뜻이었나. 어쩐지 선녀탕도 이용하지 않을뿐더러, 선녀들을 하계에 정찰 보내는 일도 그만두더니. 이런 속뜻이 있는 줄 알았으면 조금 더 꼬치꼬치 캐물어 볼 것을.

“천궁에 갇혀 지내느라 세상 돌아가는 꼴을 이리 몰랐다니.”

쯧, 하고 혀를 찬 청사는 고도의 손만 더 꼭 잡았다. 잠깐 한눈 판 사이에 고도가 신기한 것을 쫄래쫄래 따라갈 것만 같았다. 이러다 미아가 되면 어쩌려고 이러는 걸까. 상황의 심각성은커녕 주변이 재밌다고 관심을 가지기 바빴다.

“대롱아, 이거 봐라.”

고도는 매대에서 뭔가를 집어 들었다. 거꾸로 뒤집힌 고깔에 노란 솜뭉치가 붙어 있는 정체불명의 장난감이었다. 고도는 그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다가 볼록 튀어나온 곳을 달칵, 소리 내어 눌렀다.

뿅.

솜뭉치가 위로 튀어 올라 청사의 볼에 맞고 떨어졌다. 고깔 안쪽에 줄로 매달려 있는 노란 솜뭉치가 대롱대롱 흔들렸다. 기가 막힌 표정으로 보는 청사에게 고도가 눈가를 접어 웃었다.

“하하하, 바보 같은 표정이로구나.”

그렇게 천진하게 즐거워할 수가 있는가. 청사는 “고도, 우리 지금 상황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해봐야 하지 않겠니?”라는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여기, 이런 것도 있구나.”

고도는 부채를 집어 흔드는가 하면, 붉은 도깨비 탈로 조막만 한 얼굴을 가려보기도 했다. 해태가 조각된 지팡이며 고궁 사진과 전도가 그려진 손수건까지 한 번씩 만져보나니. 잡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 하루해가 질 판이다.

청사는 고도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러다간 해가 져도 구미호 있는 곳은 찾지도 못하겠다. 구경은 나중에 하고 급한 문제부터 처리하자.”

고도는 손으로 누르면 “꽥” 소리를 내는 닭 모양 장난감을 내려놓았다.

“그래, 그러자꾸나.”

청사는 낯선 복식 차림이 아닌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횡단보도 앞에는 청사도 아는 한복 차림의 여인들이 서 있었다. 지나치게 화려하고 알록달록한 한복이었지만, 저고리에 치마라는 구성은 변함없었다. 신호를 기다리고 서 있는 그 여자들에게 다가갔다.

“처자, 내 하나만 묻겠네. 여기 ‘을지로 지하상가’라는 곳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고개를 돌린 여자들과 눈이 마주치자 청사는 경직되었다. 족두리를 쓴 여인들은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서역인들이었다. 청사만큼, 여자들도 깜짝 놀라 이런저런 몸짓을 해보였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다. 여자들이 혀 꼬부라진 소릴 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했는데, 그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길 가던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다른 사람들마저 청사와 고도를 쳐다봤다. 그러나 그들 역시 고풍스러운 전통 복식에 머리를 길게 내린 청사나, 검은 두루마기 차림새의 고도를 영상으로나 봤을 이 나라 고전 인물로 취급했다.

이래서 칠성신이 그토록 옷을 갈아입으라고 성화였던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이어가면서도 “안녕하세요” 라든지, “고맙습니다”라는 어설픈 말을 내뱉는 여자들에게서 청사는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고도가 그런 청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서역인들 말을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도술을 부려줄까?”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그럼 얘기해보지, 왜?”

“어색하잖아. 여긴 대체 어떻게 되먹은 세상인지, 에잇, 쯧.”

보통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호감을 드러내기도 하나. 몸가짐을 조용히 감추느라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던 태도가 하계에서 겪은 ‘여자’라는 존재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청사에게 지금 상황은 생소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였다. 고도는 그런 청사를 보며 피식 웃었다.

“뭐든 뚝딱뚝딱 해결하던 소경보좌가 이런 일로 쩔쩔 매다니, 귀엽구나.”

“내가 알던 게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서 퍽 당황스러워 이러는 게다.”

“과거의 대롱이가 울겠구나. 도포자락 한번 휘둘러서 여인네들 마음에 불을 지피던 꽃도령이 이젠 그 여인네들을 무서워하다니.”

“으으, 이런 순간에도 놀리기나 할 거야?”

퉁명스러운 청사의 반응에 고도는 손가락으로 허공을 한번 휘저었다. 사르르, 달콤한 구름 한줄기가 고도의 귀와 입을 통해 솜사탕 실처럼 흘러든다 싶더니, 청사가 말을 걸었던 서역 여자들에게 다가갔다.

“반갑네. 내 처자들에게 뭐 좀 물어보고 싶은데.”

다행히 도술이 먹혔다. 여자들은 고도의 입을 통해 나오는 소리를 곧잘 자신들의 언어로 받아들였다. 대화가 통하자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영화 찍는 중이세요?” 

“한국 배우예요?” 

“저희는 여기 좋아하는 가수 때문에 왔어요.” 

“두 분 너무 잘생기셨어요.”

영화, 배우, 가수. 칠성신도 이런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같긴 하다만.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말에 대해서 기억해두고는 나중에 찾아보기로 했다. 고도는 지금 당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을지로 지하상가로 가는 길을 찾고 있는데, 혹 가는 길을 아는가?”

지나가던 한국인들의 표정이 가관이다.

‘외국인에게 한국 지리를 묻다니. 교포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속마음이 훤히 들릴 지경이었다. 고도는 까만 머리에 까만 눈을 가진 다른 사람을 붙잡고 길을 물어야하나 고민했다.

“잠시만요.”

서역 여자들이 네모난 물건을 꺼냈다.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고도에게 서역 여자가 호쾌하게 웃었다.

“인터넷 켜서 얼른 찾아줄게요.”

고도가 고개를 숙여 여자 손에 들린 것을 빤히 내려다봤다.

“그게 무언가?”

“휴대전화요.”

“휴대전화?”

“에이, 왜 그러세요, 여긴 핸드폰 강국이잖아요.”

저를 놀린다고 생각한 서역 여자가 웃는 동안에도 고도는 ‘휴대전화’라는 물건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손으로 톡톡 두드릴 때마다 물건이 번쩍거리며 다양한 걸 보여주었다. 마치 움직이는 그림이라도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들여다봤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 손에 비슷한 것들이 쥐여져 있는 걸 보니 구하기 쉬운 듯한데.

미호를 만나면 핸드폰을 어디서 사냐고 물어봐야겠군.

고도가 고개를 주억이는 동안에 여자는 을지로로 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 골목을 따라 내려가면 을지로 역이 나와요. 그 밑에 지하상가가 있어요.”

여자는 골목 어딘가를 가리켰다. 높고 큰 빌딩들이 시야를 가려서 제대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이대로 쭉 내려가면 되나?”

“네, 큰길 따라 내려가면 돼요. 도중에 다른 골목으로 들어가지 말고요.”

그 정도 길 안내면 충분하지.

“고맙네.”

이대로 뒤돌아도 되겠지만, 신문물을 구경시켜주고 친절하게 길도 알려준 서역 여자에게 간단한 보답 인사를 하기로 했다.

고도는 허공에 손을 부드럽게 휘저었다. 공기를 머금은 손끝에 보슬보슬한 덩어리들이 뭉치더니, 이내 그 덩어리는 예쁜 들꽃 몇 송이로 변해 손바닥 안에서 확, 피어났다. 붉은색, 노란색으로 알록달록하게 물든 꽃송이들을 여자들에게 건넸다.

“자네들 머리색을 닮은 꽃일세. 보답으로 받아주게나.”

여자들이 즐거워했다.

“신기한 마술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술은 또 뭔지.

고도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손을 흔들었다. 여자들이 까르르, 웃으면서 멀어지고 나서야 고도는 청사 곁으로 돌아와 손을 잡아끌었다.

“이쪽으로 가면 역이 나온다는구나.”

길을 물어 답을 구해왔거늘, 청사는 두 볼이 퉁퉁 부어 있었다.

“처음 보는 아녀자들에게 꽃을 선물하고. 너무하는 것 아니냐.”

고도가 그 말에 두 눈만 깜빡였다.

이런 상황에서 퉁을 내다니.

때아닌 질투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귀여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게 마음에 걸렸느냐? 네게도 꽃 한 송이 선물해주련?”

고도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보송보송한 꽃들이 손끝에서 피어났다. 파란 달맞이 꽃이다. 청사의 귀 뒤에 가느다란 꽃줄기를 꽂아주면서 말했다.

“네 아름다운 눈동자를 닮은 꽃이다. 훨씬 아름답고 귀한 꽃이지.”

작고 귀여운 꽃들이 귓가에서 흔들리자 청사는 눈을 내리깔았다. 부끄럽고 민망한데 기분이 좋은 것도 병이라면 병이었다.

“흥, 다신 그러지 말기다, 알았느냐?”

“내가 경솔했다, 앞으론 두 번 다시 그러지 않으마.”

고도에게 진실한 답을 받고난 후에야 청사는 표정을 풀었다. 고도가 꽂아준 꽃을 귀에서 빼지 않으니, 키도 훤칠한 미남자가 화려한 답호 자락을 휘날리며 귀에 꽃을 꽂고 걷는 모습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고도는 까만 눈을 동글동글 굴리며 청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무엇이 꽃인고.”

청사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놀리지 말라니까.”

팔을 툭 치고는 성큼성큼 도망가는 청사를 고도가 붙잡는다. 손을 꼭 쥐고는 어디도 가지 못하게 제 옆에 단단하게 붙여두었다. 서역 여자들이 알려준 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러자 차들이 쌩쌩 달리던 도로는 시야 밖으로 멀어지고, 사람들이 느리게 걸어 다니는 한적한 돌담길이 나타났다.

‘쏴아아.’

한차례 불어온 바람이 담벼락 너머로 길게 늘어선 나뭇가지를 뒤흔든다. 그때마다 푸른 녹음으로 물든 이파리들이 한꺼번에 몸을 흔들며 소란을 피웠다.

온화한 천계 날씨와 달리 하계 날씨는 격동적이었다. 태양은 바닥을 이글이글 끓였고, 일렁이며 피어오르는 한낮의 열기에 인간, 비둘기 할 것 없이 지친 표정이었다. 그러다 바람이라도 살짝 불라 치면 한시름 놓고 숨을 들이마시기 일쑤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계의 요란한 풍경 속에서 청사는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을 바라봤다. 제 손을 꼭 쥐고 있는 사랑스러운 연인이었다.

“고도야.”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빛이 점점이 뿌려졌다. 일렁이는 빛 무리 밑을 걸어가던 고도는 저를 부르는 청사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청사는 살랑살랑 흔들리는 까만 앞머리와 그 밑으로 반짝이는 속눈썹을 가만히 응시했다. 한적한 돌담길 밑에서 비로소 오랜만에 님의 얼굴을 찬찬히 볼 수 있었으니, 이 상황이 야속하면서도 기쁘기도 했다.

“왜 그러느냐, 대롱아.”

나긋한 목소리며, 어떤 상황에서 여유로운 것이 바로 고도라는 사람의 특징이다. 일에 치여 산 청사는 고도와 재회하면 그리움을 토로하며 마주 안아 합구(合口)부터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희일비하기 쉬운 청사와 달리, 고도는 의젓한 거목이었다. 인간들은 이런 존재를 ‘수호수’라고 부르며 치성 드리고 절을 하지 않던가. 고도가 정말로 수호수라면 어디 지역을 지키는 수준이 아니라, 하계의 땅 전체를 돌보는 국가 보호수가 되었겠지.

사철 푸르른 소나무. 누군가는 그런 고도를 재미없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저리 살면 지겹지 않을까, 궁금하기도 할 테고. 하나, 인간의 기준으로 고도를 평가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도는 천계인이다. 명줄이 길어봤자 100년밖에 안 되는 인간이 아닌, 수백 수천 년을 살아갈 존재들과 하늘을 꾸려야 하는 존재다. 특히 청사가 천제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쌓이는 울분을 잘 달래줄 대인배적인 성향이 필요했다.

청사가 홧김에 소경보좌 일을 때려 치고 싶다 외쳐도 고도는 그 입을 틀어막고 천궁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것이다. 청사는 날이 갈수록 소경보좌의 임무에 적격이 되고 있지만, 내심 공무(公務) 외의 모든 마음을 고도에게 의지했다. 일이 힘들어지면서 청사의 어리광은 늘어났다.

“고도야, 하계까지 내려왔으니 하는 말이다만, 천계로 다시 올라가면 내 그냥 천궁에 살림을  차리고 싶다. 갈수록 너와 헤어져 일하는 시간이 늘어나지 않느냐. 이러다 수십 년을 천궁에 갇혀 상제 뒷바라지나 하게 생겼구나.”

청사는 시무룩하니 몇 달간 만지지 못했던 고도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 만졌다.

“이러려고 소경이 된 게 아니지 않느냐. 너와 평생 행복하려고 앉은 자리가 오히려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것 같구나.”

고도는 저를 만지는 청사에게 피식 웃어 보였다.

“어인 일로 이런 약한 소리를 할꼬.”

“너를 보니 몇 번이나 다잡았던 마음이 무너져서 그렇지.”

“그렇게 혼자서 일하는 게 힘들었느냐?”

“힘들고 말고. 휴가를 마치고 상제 곁으로 돌아가면 또 몇 달이나 널 못 만나잖아.”

“몇 달이라고 해봤자, 천계 기준으로 고작 며칠 연이어 근무했다 치면 되거늘.”

“내 시간은 인간 기준이야. 하루해가 뜨고 지는 것에 익숙해져서 천계의 시간이 너무 더디다.”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는 청사의 모습에서 고도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무덤덤하게 세상을 지켜보던 두 눈이 반짝이더니, 이내 빙글, 몸을 돌려 청사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어?”

갑자기 청사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고도는 바스락거리는 답호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 눈동자만 들어 올렸다. 말갛게 바라보는 시선은 온화하고 다정했다. 청사를 무척이나 귀하게 여기는 듯한 시선이었다. 덕분에 청사가 더 당황하고 만다.

“고도, 왜 그러느냐?”

“이거 참 신기한 일이지.”

고도는 얼굴이 붉어진 청사에게서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네가 내게 익숙해져서 그런 사랑스러운 말은 안 할 줄 알았다. 보고 싶다거나 그리워하기엔 우리가 함께 보낸 세월이 많지 않았더냐.”

어색하게 굳어 있던 청사의 얼굴에 표정이 돌아왔다. 여전히 두 볼이 발그레 익은 상태였지만 고도의 말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아서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채였다.

“마치 네게 익숙해져서 소홀해질 줄 알았다는 말투구나.”

“음, 솔직히 그럴 줄 알았지 뭐냐.”

“날 못 믿어서?”

“아니, 애틋한 마음이란 원래 무뎌지기 마련이라.”

“난 안 그런데. 고도, 너는 그래?”

“으음.”

“고민을 왜 해, 나 상처받으라고 이러는 거야?”

당연히 “아니다”라고 답변할 줄 알았건만. 저 혼자만 좋아서 설레발을 쳤다 여긴 청사는 고도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그럴수록 고도는 청사를 안은 양팔에 더 큰 힘을 주었다. 눈물이 글썽이는 파란 눈동자를 올려다보면서 고도는 태평한 소리만 했다.

“난 말이다. 몸이 멀어지면 자연히 그리움도 잊힌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보고 싶다 생각했던 죽은 부인과 딸아이에 대한 기억이 아주 많이 흐려졌거든. 솔직히 말해주마. 그 둘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단다.”

인간이란 망각의 동물. 시간이 지날수록 먼 과거의 일이 기억 속에서 흐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도는 저와 청사 사이에서도 그 당연한 변화가 작용할 것이라 생각했다.

“네가 나를 연인으로 사랑하지 않게 되어도 당연한 변화라 생각하려 했다. 내 몸을 만지고 입을 맞추는 긴장감보다는 무릎을 베개 삼아 눕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편안함을 원할 것이라고 말이다. 한데 나를 그리워하면서, 곁에 두고 싶어 속상해하는 모습이 우리가 여전히 연인 사이라는 걸 실감케 해주는구나.”

청사는 고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눈 깜빡할 사이에 하계가 싹 뒤바뀐 것처럼 고도 역시 청사의 마음에 변화가 생겨도 덤덤하게 받아들이려고 준비한 듯싶다. 청사가 고도에게 흥미를 잃고 내치지는 않겠지만, 사랑이란 감정보다는 정(情)이 깊어져서 연인보단 가족으로 생각할 거라 지레 짐작한 모양이다. 가족이라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면 입을 맞추기는커녕 이렇게 끌어안는 것도 징그럽다 생각하겠지. 조아반이나 서진에게 이렇게 안겨 있다는 생각을 하면 목뒤로 오소소 소름이 돋아서 참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참으로 고도다운 생각이 아닐 수가 없다.

“고도야. 내가 네 앞에서 앞섶을 풀어헤친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며 배때기나 벅벅 긁으며 트림을 꺼억 할 거라 여긴 게냐.”

“음? 내가 편안해지면 그러지 않겠느냐?”

“아서라. 나는 아직도 네가 날 예쁘게 보길 원해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머리를 손으로 빗는다. 옥경에 얼굴을 비춰보며 얼굴에 기미는 생기지 않았는지, 주름의 기색은 없는지 초조하게 살피거늘.”

“그 무슨 바보 같은 짓이냐. 네가 무슨 모습이든 내 마음은 변함없다.”

“바보는 널 두고 하는 소리다. 네가 혼자 지내다보니 외롭다, 쓸쓸하다, 하면서 다른 이에게 눈을 돌릴까 봐 내가 필사적으로 나를 가꾼다는 소리 아니냐.”

청사는 고도의 등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고도의 뒤꿈치가 들리고 까치발이 되어 엉거주춤 매달릴 만큼 아주 꼭 말이다.

“함께 지낸 시간이 오래 되어 사랑이 흐려지고 정만 남지 않을까 생각한 것도 지독히 너답구나. 걱정 마라. 나는 아직도 이렇게 널 안고 싶고, 목에 고개를 묻은 채 네 좋은 향을 맡다 취하고 싶다. 네 두 눈과 콧방울, 입술까지 입을 맞추어서 내 흔적을 남기고 싶고, 머리카락과 속눈썹에 닿는 햇살과 네게 꽃을 받은 아낙네에 질투가 날 지경이다.” 

부끄러운 소리를 읊어대는 청사 때문에 고도의 두 눈이 흔들렸다. 청사는 고도에게 좋아한다 고백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는 열기로 들끓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너라는 존재가 나를 지탱하게 해준다. 내가 아무리 힘든 일에 놓여도 고도, 널 생각하며 버티고, 이겨내지. 그게 너에게 익숙해져서 덤덤해진 마음으로 설명이 되겠느냐? 네게 칭찬받고 싶고, 네가 내 존재를 인정해주길 바라며, 하늘이 우러러보는 내가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네가 없으면 안 되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애를 쓴 게다. 이런 내 사랑이 어떻게 익숙해져서 너에게 소홀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게냐.”

입술을 움칠거린 고도는 한참 후에야 조용히 대꾸했다.

“미안하다. 널 의심해서 한 말이 아니었는데.”

“내 불찰이다. 내가 널 안심시켜 주지 못했구나.”

“미안해, 정말로. 네게 상처주려 한 게 아니었어.”

상처받지 않았는데. 인간인 고도가 인간의 감정으로 관계를 해석하려 한 것이 무엇이 잘못이려고.

“한무야. 내가 나이만 먹고 머리가 둔해진 게 틀림없다. 미안하다, 미안해.”

고도는 청사의 옷자락을 양손으로 꼭 쥐었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진심에 청사가 생긋 웃었다.

“둔해지긴. 너만큼 내 속을 이렇게 깊게 헤아려주는 이가 누가 있겠느냐.”

예전의 고도였다면 난감한 일에 봉착하더라도 여유자적하게 웃기만 했을 것이다. 곤란한 일이 생기면 저만치 거리를 두고 피했을 테고. 지금처럼 온몸으로 맞부딪혀 오던 사람이 아니었다. 고도는 세월이 지나 자신이 둔한 늙은이가 되었다고 여겼다. 청사 눈에는 늙은이는커녕, 사시사철 푸르게 빛나는 소나무처럼 보였다. 그 어떤 역경과 시련이 올지라도, 굳건하게 버티고 서서 청사와 오해를 풀고자 노력할 소나무 말이다.

“음.”

이 분위기를 이어서 논밭 한쪽에서 돌고 있는 물레방앗간을 찾아 들어갔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애석하게도 사랑을 은밀하게 속삭일 장소가 없다. 특이한 차림새의 사내 둘이 꼬옥 끌어안은 모습을 보고 행인들은 놀라 자빠질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상의 표현은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했다.

“자아, 고도, 지진아 만나러 가보자!”

씩씩한 외침에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한 고도도 꼭 쥐고 있던 옷자락을 놔주었다. 고도는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흠흠, 그래.”

귀여워라.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어린애처럼 변한다더니, 고도가 딱 그 짝이 아닌가 싶다. 세월아 네월아, 신선처럼 도가 텄던 고도는 이제 곁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고 자신이 알던 세상도 바뀌면서 비어버린 자리를 점점 청사를 품은 감정으로 메워가고 있었다. 청사는 고도의 삶에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존재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받을 때마다 행복함에 입가가 풀어져 헤실헤실 웃게 되었다.

“이쪽이다, 이쪽!”

청사는 고도의 손을 꼭 잡고 한적한 돌담길 너머로 향했다. 얼마 가지 않아 자동차가 가로지르는 도로가 나타났다. 어느새 시야에 서역인 아녀자들이 일러준 역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을지로입구역. 여기인가 보구나.”

고도는 이국의 언어를 바꾸었던 그 도술로 눈을 씻어냈다. 그러자 영어와 일본어가 뒤섞인 현대식 한글과 한문에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간 지하는 크고 넓었다. 사람들이 끝도 없이 걷고 있는 지하 길목엔 기름 없이 빛을 내는 등불이 있었다. 네모난 유리장 같은 곳마다 간판을 걸어 옷이나 장신구, 음식을 팔고 있었다.

수많은 가게 중 미호가 운영하는 만물상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고도는 노점과는 다른 분위기의 상점 사이를 걷다 소매를 위로 걷어 올렸다. 청사의 역린으로 만든 손이 바로 옆에 있는 가게에서 파는 검은 가죽장갑처럼 반짝거렸다.

“어디 한번 지진아 있는 곳을 찾아볼까.”

고도가 허공에 손가락을 휘젓는다. 손끝에 검은 연기가 피어났다. 그 연기를 입가로 가져오며 외쳤다.

“내 도력이 담긴 꼬리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거라.”

입 바람을 “후” 불자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던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연기는 날개 달린 생물처럼 쏜살같이 지하 길을 내달렸다. 그 뒤를 고도와 청사가 쫓았다.

“여기냐?”

연기가 다른 곳으로 날아간다. 따라붙은 고도가 다시 물었다.

“그럼 여기냐?”

이번에도 문 앞을 어슬렁거리던 연기가 쌩하니 날아간다. 뿔이 난 고도가 구시렁거렸다.

“거참, 미호 이 녀석 온데를 쏘다녔나 보구나. 가는 길목마다 그 애 흔적이 남아 있으니, 원.”

툴툴거리며 상점들을 돌고 돌 때였다. 연기가 빨간 문 앞에 멈추었다. 가게 상호는 정직했다.

[구미호 만물상]

그 얼마나 수상쩍은 상호인지 사람들이 통 가게에 들어갈 생각도 없어 보인다. 창가에 딱 붙여 놓은 진열장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괴기한 물건들이 늘어 서 있었는데, 하얀 소복을 입은 인형 하나가 눈을 도록도록 굴려서 고도와 청사를 보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봤으면 귀신이라 소리치며 도망갔을 귀신 서리 인형이었다.

고도는 문 앞을 빙글빙글 도는 연기를 손으로 흩어냈다.

“여긴가 보다.”

청사는 허리를 숙여 진열장에 놓인 물건들을 살펴보다가 고도에게 말했다.

“전부 도깨비다. 그 팔미호는 물건은 안 팔고 도깨비들을 수집해 여관으로 이 가게를 쓰는 모양인데?”

“흐으음.”

청사는 고민하는 고도 앞으로 나섰다. 고도를 보호하듯이 제 답호 자락 뒤로 물려놓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딸랑, 딸랑.’

문에 매달린 종이 요란하게도 울어댔다. 선반 가득 쌓인 물건에서 뿌연 먼지가 일어났다. 천장 등 대신 초를 켜둔 곳곳에서 그 뿌연 먼지가 반짝반짝 빛이 나기도 했다. 청사는 눈앞을 괴롭히는 먼지를 한 손으로 휘저으며 외쳤다.

“이리 오너라.”

그 소리에 선반을 정리하던 여자가 뒤를 돌아봤다. 새초롬한 눈매와 붉은 입술, 창백한 피부가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다. 카랑카랑 대들던 어린 여우의 모습에서 조금 더 성숙해진 여인. 세월에 따른 우아함을 갖게 된 여인은 고도와 청사를 보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놓쳤다. 도금을 한 술잔이 바닥에 떨어지자 아프도록 소리쳤다.

“악!”

술잔은 데굴데굴 구르다가 선반 밑으로 들어가 흐느껴 울었다. 도깨비였던 것이다.

“고도? 청사?”

우는 도깨비는 아랑곳하지 않던 미호가 소리를 질렀다.

“미쳤어, 세상에! 진짜 도사랑 대롱이 맞아?!”

‘퍼엉!’

그녀의 치마 밑으로 아홉 개의 꼬리가 복슬복슬하게 튀어 나왔다. 서리 맞은 양 하얗게 빛나는 꼬리 사이로 딱 하나의 꼬리만이 검게 빛났다.

“이게 얼마만이야!”

미호의 반가운 비명에 가게 안이 떠들썩해진다.

“도사?”

“용?”

“히익, 난 숨을래.”

“나도, 나도.”

오래된 물건의 모습을 한 도깨비들이 우당탕탕 선반 뒤로 달아났다. 반가워하는 미호와 기겁을 하는 도깨비들의 모습은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여전히 천방지축에 요란한 종족이었다.

“하하하.”

청사가 속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떠들썩한 재회가 썩 기분 좋다는 듯이 말이다.

*

향긋한 냄새가 가게 안을 가득 메운다. 위이잉, 돌아가는 기계 밑으로 가느다랗게 흘러내리는 거무튀튀한 물에서 나는 향이었다. 고도와 청사에게 한 잔씩 건넨 미호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커피야. 인간들이 예전에 말하던 구라파나 서반아 같은 곳에서 수출해오는 외국 음료지.”

고도는 따뜻한 도자기 잔을 쥐면서 흥미롭게 물었다.

“사약인가?”

“오랜만에 만난 친우에게 내가 사약을 주겠니?”

“내가 드디어 죽을 몸이 되었는지를 확인해 보려는 게지.”

“그러다 노하신 천룡님께서 벼락을 뿌리겠지.”

“우리 대롱이가 벼락으로 그치겠느냐. 널 그냥 천계로 잡아 올려서 평생 옆에 앉혀 놓고 두루마리를 말게 할 것이야.”

“……뭐야, 그게 벌이야? 너무 간단한데?”

“20년 동안 무릎 꿇고 아무것도 못 먹으며 말아보겠느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어수룩하면서도 눈치는 빠르다. 그렇다고 지혜롭느냐 물으면 또 그것은 아닌 것이, 선택지가 주어지면 제대로 된 정답은 고르지 못하지 않나. 그러다 상황이 악화되어도 씩씩하게 뚫고 나갈 테니 문제없다만.

그 성향이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이 미호가 틀림없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고도는 입 꼬리를 부드럽게 말아 올리며 웃음으로 대꾸해줬다.

“그럼 어디 지진아가 준 사약을 마셔볼까.”

“사약 아니래도!”

경계심이 많아서 커피와 눈싸움을 벌이는 청사와 달리, 호기심이 경계심을 허물어트린 고도가 잔에 입을 댔다.

주르륵.

한 모금 마시자마자 턱을 타고 그 까만 물이 흘러내렸다.

“넌 두루마리 말기 20년행이다.”

청사는 고도의 입가를 소매로 닦아주며 미호에게 윽박질렀다.

“벼락부터 맞고 볼래?”

둘의 반응에 미호만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너희 이거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하는 소리구나!”

미호는 원형 탁상에 둘러앉아서 오순도순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얘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봉착한 난관이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어디서부터 얘기하면 되는 거지.”

커피도 모르는 애들이라니.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끄응”하고 앓는 소릴 내더니 고도에게 물었다.

“청사는 하늘의 정사를 돌보느라 못 왔을 거 같지만, 고도, 너도 하계에 내려온 지 오래됐어?”

“흐음. 몇백 년 됐지.”

“설마 나랑 헤어지고 나서 한 번도 안 내려 왔었니?”

“내려갈 일이 없었지.”

“정말로? 단 한 번도?”

“지상차사 직을 몰아서 수행하고 그다음엔 딱히 안 내려갔거든. 땅의 주인께서도 날 특별히 부르지 않으셨고.”

“지상차사는 뭔데?”

“내 직책.”

눈만 끔뻑이던 미호는 천계의 관급제도까지 물어본들 어디에 써먹을까하여 넘어갔다.

“아무튼 이 세상을 전혀 모른단 거지.”

“암, 모르다마다.” 

눈 파란 서역인들이 손바닥만 한 기계를 들여다보며 돌아다니는 것도, 사륜마차가 바닥에 납작 붙어서 쌩쌩 달리는 것도, 땅의 기운을 끊어버리는 바위 같은 바닥과 고층 건물, 그 무엇도 아직은 낯설고 생소했다. 고개를 들어도 하늘이 좁아서 태양이 건물에 가려질 정도다. 변해도 너무 변해버린 세상에 이방인이 된 심정이었다.

통 적응하지 못하는 고도와 청사를 위해 미호가 두 팔 벗고 나섰다.

“어디 보자, 으음. 그럼 과학기술의 발전부터 얘기해야 하나. 아니지, 그거보단 왕가가 사라진 정치 환경부터 말해야. 아닌가? 사람들이 신체발부수지부모도 잊고 이상한 머리 스타일과 옷을 입고 다니는 것부터 얘기해줘야 할까? 어어, 너무 많다, 야. 어쩌냐.”

그녀는 여전히 표정과 동작에 감정이 풍부하게 묻어났다. 세상만사 무감각하던 고도가 천계에 올라가면서 밝고 상냥해진 것처럼, 미호도 어딘가 달라진 구석이 있을 줄 알았는데 세월이 박제된 존재처럼 여전했다. 변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아주 소중한 것을 다시 만난 기분이 들어 고도는 미호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왕가가 사라진 건 조금 충격이구나. 그것부터 얘기해주지 않으련.”

“오호라, 그래, 전쟁이 있었어.”

“전쟁은 어느 시기에나 있는 법이지.”

“왕가의 씨를 말린 침략과 수탈은 좀 더 가혹했어. 그 후로 나라 사정이 바뀌어서 민초들이 뽑은 사람이 나라 살림을 책임지게 되었거든.”

어쩐지 아주 오래된 친우를 영영 잃은 듯한 기분이 드는 고도였다. 이래나 저래나, 왕가와 얽힌 악연이 있었거늘, 그 연을 끊어내고 천계에 오른 후엔 왕가의 씨마저 끊어졌다는데 내심 복잡한 기분이었다.

좋지도, 슬프지도, 아쉽지도, 동정심이 들지도 않는 이상한 기분. 그 복잡한 심경을 알아본 청사가 고도의 손을 잡아주었다. 고도는 손바닥 안으로 감기는 온기에 마음을 편히 먹었다. 떠나보내는 것에 대한 생각보다는 모든 것이 사라져도 영원히 곁에 남아 있을 청사의 손을 더 꼭 붙잡아 주었다.

“민초가 나라의 주인을 선택했다니, 듣기 좋은 소리구나.”

안정적인 고도의 반응에 미호는 고도와 왕가에 얽힌 옛일을 떠올릴 틈도 없었다. 그녀는 과거지사보다 현재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주었다.

“응, 헌법이라는 것이 국민의 권리를 최우선시하게 되었어. 이곳은 평범한 사람들 하나하나의 의견으로 나라가 굴러가고 있어. 그 개개인의 권리를 인정하니 능력을 펼칠 자리도 많아져서 당연히 과학이고 예술이고 성행하지 않겠어? 사람들이 이 땅 곳곳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귀신이나 요괴들도 집을 잃어 떠돌게 되었어. 덕분에 도사라는 직업도 사라졌고!”

“한 많은 영들은 그럼 어딜 간 게냐.”

“죽으면 바로 저승으로 인도받아. 이 세상에 머물지 않고.”

“그건 신기하구나. 한 많은 영들은 미련이 많아서 하계에 끝까지 붙어 있을 줄 알았는데.”

“저승이 그걸 내버려두지 않았지.”

“오호라.”

“저승도 하계의 속도에 맞춰 발전했거든. 예전엔 차사들이 명부를 들고 와서 이름 세 번 부르고 혼을 저승으로 인도했잖아. 요즘엔 미리 죽을 날짜를 받아와서 죽기 전부터 기다리다가 데려가더라고. 대부분 죽을 사람들이 병원에 모여 있어서 거기 근처만 돌아다녀도 임무 완수인 거 같지만…… 수천, 수만 년 이어온 저승 인도 법칙이라 빅데이터가 많이 쌓여서 가능한가 봐. 아, 데이터라고, 일종의 경험 자료를 다 모아놨다는 뜻이야.”

미호의 설명에 청사도 관심을 보였다.

“저승도 변했단 말이야?”

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옛날 방식을 고수하기에는, 너도 보다시피 세상이 너무 변했거든. 변한 만큼 맞춰가야 하지. 안 그랬다가는 어떤 영혼이 생각도 못한 방식으로 도망 다닐지도 모르니까.”

천계는 그대로인데 저승은 변했다, 라.

내심 저승보다 한수 위라고 생각해온 청사는 미묘한 승부욕과 불신이 들었다.

이러다 저승과 하계가 앞서가면 어쩌지.

“흐음, 저승이 그렇게 빠르게 변화했단 말이지.”

청사가 미호의 말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천계만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의 혼이 귀신이나 도깨비, 요괴로 둔갑하기 전에 멀쩡히 저승으로 인도해야 하는 차사 입장에서는 신문물을 이용해 도망 다니는 영혼을 쫓아다니는 게 일일 것이다. 반면 천계 입장에서는 저승에서 죗값을 치룬 인간만이 들어올 수 있으니, 하계 변화에 예민해질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 해도 왠지 저승보다 천계가 뒤처지는 듯한 기분에 묘하게 자존심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 중인 청사를 보면서 미호가 말 몇 마디를 더 거들었다.

“네가 하계에 왔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인간의 숫자가 늘었거든. 그만큼 죽는 영혼 수도 수천, 수만 배 늘었는데 차사 수는 그대로니 업무가 과해서 놓치는 경우도 많아. 보름달이 뜨는 날에만 모여서 정기를 받고 아주 별의별 방법으로 도망 다녀서, 잡으려면 만월 때만 기다려야 하고.”

시대가 변해가니 천계도 전통만을 고집할 수는 없을 터.

청사는 상제를 만나면 더 이상 저만 죽어라 부려먹지 말고, 체계적인 분업 시스템을 도입하는 건 어떻겠느냐 제안을 해볼 생각이었다. 기왕이면 수천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간신히 도달할 수 있는 천궁도 엘리베이터식 빌딩으로 리모델링하고.

그간 관심 없었던 하계에서 배워갈 것이 많다는 생각에 머리를 도록도록 굴리며 물었다.

“여기 바닥이 딱딱해서 흙의 기운을 느낄 수 없던데, 땅의 기운을 먹고 자라는 신목이나 신수, 여러 잡귀들은 그래서 다 사라졌어?”

“흙바닥이 시멘트와 아스팔트에 덮였다는 뜻이지? 맞아. 땅의 기운이 서린 숲이나 산으로 다 도망가고 도시에는 남은 신이 없어졌지.”

힌트를 얻은 듯 청사가 고도에게 고개를 돌렸다.

“예그리나는 도시가 아닌, 흙이 살아 있는 곳에서 벗어나면 안 되겠는걸.”

“선녀탕을 나와서 돌아다닌다 해도 도시에 머물면 금방 병이 걸리겠어.”

둘의 대화를 들은 미호가 깜짝 놀라 물었다.

“너희 둘 새끼 용을 여기서 왜 찾아? 설마 같이 내려왔다가 미아가 된 거니?”

고도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그리나가 선녀들이 목욕재계를 하는 폭포에서 미끄러지면서 하계로 떠내려 왔다. 어느 선녀탕으로 떨어진지 몰라서 도읍으로 일단 내려왔다가 신문물을 보고 나와 청사가 이렇게 정신이 없는 게고.”

“어머……! 어디로 떨어진 건진 알아?”

“칠성신이 말하길, ‘계룡산’ 위로 별똥별이 떨어졌다는구나.”

“계룡산? 충청도에 있는? 거기 먼데.”

“안 그래도 도술로 가려 했더니, 급구 막아 세우는 바람에 네게 도움을 받으려고 온 것이다.”

그녀는 “음”하고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반 가득 빼곡하게 즐비한 오래된 골동품 사이를 오가던 미호가 두 가지의 물건을 가져왔다. 짚신 한 짝과 정체불명의 나무 함이다.

“이렇게 인사시킬 생각은 아니었는데, 받아. 몽당이야.”

고도의 피를 머금은 몽당 도깨비. 세월에 낡은 지푸라기는 그간 여러 차례 덧대고 보수해 온 듯 색이 조금씩 달랐다. 그러나 짚신에 잠들어 있는 기운만큼은 그대로였다.

“도시에서 생활하려니 낮에는 힘이 빠져서 이렇게 잠만 자는데, 오늘은 만월이라서 저녁에 본래 힘을 모두 발휘할 수 있을 거야. 자, 이것도 받아.”

고도는 미호가 건네준 나무 함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엔 유리 나침반이 들어 있었다. 나침반 주변에는 자성이나 진로를 알려줘야 할 방위 대신 정체 모를 문양들이 그려져 있었다. 원을 따라 그려진 그림은 총 열세 가지였다.

눈, 코, 입, 귀, 손, 발, 불, 물, 나무, 흙, 쇠, 해와 달, 집.

작은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흔들리는 바늘은 현재 사람 눈 모양의 그림에 멈추어 있었다. 고도가 그 물건을 알아봤다.

“신력과 요기에 반응하는 ‘신요나침반’이구나.”

고도의 알은 채에 미호가 뿌듯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맞아. 거기 문양들은 알고 있지?”

물론이다. 고도는 도력을 믿고 까불던 환영도사 시절에도 이런 도구에 의지한 적은 없지만, 자신에게 현상금이 수배되었을 때 따라붙던 도력 낮은 도사들이 쓰던 물건으로 익히 기억하고 있었다.

눈 문양은 어둠 속에서도 광명을 알아보는 신이한 자를 가리킨다.

입은 사람들의 육체와 혼을 잡아먹는 악귀를.

귀는 그런 악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도사를.

손은 찾고자 하는 존재를 붙잡을 수 있는 거리에 도달했다는 뜻이고.

발은 그 존재가 달아나서 자취를 감췄다는 의미다.

자연물인 수화목토금은 찾는 존재의 성질을.

해와 달은 시간의 촉박함을.

집은 존재가 안전한 곳에 들어가 더는 쫓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도력을 자유자재로 펼치는 고도에게는 지금까지 있으나 마나한 물건이었지만, 칠성신이 신신당부한 것처럼 수많은 인간들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고 예그리나를 찾으려면 이러한 작은 도움은 있어야할 듯싶었다.

“나침반이 예그리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단서가 있니? 가령 그의 물건이라든지 발톱 같은 거.”

미호의 말에 청사는 소매 품에서 작은 방석 하나를 꺼냈다.

“사라지기 직전까지 몸을 뉘였다는 방석을 가져왔다.”

“좋아. 그 방석 위에 나침반을 올려 봐.”

“계룡산에 있다던데 이걸로 다시 찾아보려는 게냐?”

“확실해야지. 충청도까지 갔다 오는데 헛걸음할 순 없잖아.”

밑져야 본전인지라.

청사는 방석 위에 나침반을 올렸다.

의미 없이 흔들거리던 자침이 잠시 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자침 끝이 가리킨 것은 처음엔 눈이었다.

“나침반이 예그리나의 신력을 알아봤다는 의미야.”

물건의 사용법을 해석해주는 미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침이 다시 돌아갔다. 이번에 가리킨 문양은 집이었다.

“어……?”

미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상하다. 이거 요괴나 신을 잡을 때나 나오는 표신데.”

잘 나오지 않는 문양이다. 고도는 추적이 종결되었을 때나 볼 수 있는 그 문양을 보고 엄숙하게 물었다.

“예그리나가 다시 천계로 돌아갔다는 의민가.”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이 나침반은 천계나 저승으로 가버린 존재는 추적 못 해. 하계에 있어야만 반응하거든.”

“그럼 무슨 뜻이지?”

미호는 썩 곤란한 표정으로 고도를 바라봤다.

“어딘가에 갇힌 거 같은데……?”

고도와 청사의 몸이 동시에 굳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청사가 매끈하고 부드러운 살갗 위로 천룡 특유의 검은 비늘을 일으켜 세웠다. 청색 눈은 뱀처럼 동공을 좁혀 들었다.

“감히 위대한 천룡의 후손을 잡아두었다고? 내 이 땅을 발칵 뒤집어서라도 그놈 사지를 찢어놓을 것이다!”

분노한 용의 기세에 선반에 즐비한 물건들이 놀라서 바들바들 몸을 떨기 시작했다. 자동필기가 가능한 만년필이 잉크병과 함께 바닥으로 뛰어내려 창고 뒤편으로 숨어버렸고, 몽마가 서린 안대는 귀신 들린 아기 인형 뒤로 숨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시계의 괘종이 댕댕댕, 울리며 요란을 떨었다.

도깨비들의 호들갑에 미호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내 가게를 망가트릴 셈이니! 대롱이, 너, 얼른 힘을 집어넣지 못하겠어?!”

청사는 세로로 길어진 눈을 더 가느다랗게 뜬 채 코웃음을 쳤다.

“여우야, 네가 많이 크긴 했나 보구나. 감히 누구에게 명령을 하는 게냐.”

“아이 참! 명령이 아니라!”

그녀는 반쯤 뒤집어진 선반을 보면서 꼬리털을 바짝 세웠다. 어느새 붉게 칠한 입술 사이로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예그리나가 위험한 상황이면 집 문양으로 안 나와! 해와 달이 표시되겠지! 낮 시간 안에 찾아야한다는 해, 혹은 밤 시간 안에 찾아야한다는 달에 바늘이 닿지 않은 건 예그리나가 그렇게 위험한 상황이 아니란 뜻이라고!”

청사가 그 말에 멈칫하더니, 조용히 힘을 갈무리했다. 심벌즈를 양손에 낀 원숭이 인형이 ‘챙, 챙, 챙’하며 요란하게 악기를 두드리던 소리가 사그라졌다.

가게가 한바탕 뒤집어진 상황에서 고도는 사약이라 부른 커피만 호르륵, 마셨다. 처음 마셨을 때처럼 주르륵 뱉진 않았지만, 여전히 이걸 무슨 맛으로 마시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커피를 홀짝이면서 나침반을 빤히 바라보는 고도와 달리, 청사는 여전히 씩씩거리며 중얼거렸다.

“인간들 풍습에 한여름 보양을 위해 기력에 좋은 동물을 푹 고아 삶는다던데 예그리나를 그렇게 여긴 건…….”

커피만 마시던 고도가 처음으로 대화에 간섭했다.

“그럼 미호 말대로 다른 문양이 나왔을 테니 잡아먹으려던 건 아니었을 테고. 어디 보자.”

달그락.

커피 잔을 내려놓은 고도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게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벽면에 걸린 그림 앞에 섰다.

십장생이 그려진 수묵화였다. 대대로 벽과 창에 그림을 걸어놓거나 병풍, 베갯머리, 문방구에도 그려넣는 흔한 그림이 만물상에 있다는 건 오랜 시간이 지나며 정말로 효험이 있다는 소리일 터. 그 그림 속 거북이나 학과 사슴은 미관상 아름다운 짐승은 아니었다. 눈이 부리부리했다. 등껍질, 날개, 뿔이 불에 타오르는 듯한 형상은 도깨비처럼도 보였다. 범상치 않은 그림 속 동물들을 살펴본 고도가 제 추측을 털어놓아 본다.

“예그리나가 워낙 미모가 출중하니 관상용으로 잡아간 게 아닐쏘냐.”

그 말에 청사는 주먹을 손바닥 위에 팍, 내리쳤다.

“그거 말 된다! 고도, 너를 닮아서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그 아이에게 한눈에 반한 인간이 붙잡은 게야!”

격렬하게 동조하는 청사와 달리 미호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로 입만 꾹 다물었다. 차마 “인간 눈에 예그리나는 징그러운 물뱀이나 도롱뇽같이 보일 텐데…….”라고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귀여워서 함부로 해할 수는 없겠구나.”

“예그리나의 안전이 확보되었다면 조금 더 여유롭게 흔적을 추적해도 될 듯싶다.”

그래도 고도는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았는데 천계에서 신선놀음을 해서 천하태평이 된 게 아닐까 싶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청사의 바보 같은 모습이 옮은 걸 수도 있다. 그러한 생각을 모른 척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미호였다.

“다들 이리 와 봐.”

팔불출 같은 새끼 용 아빠들을 불렀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고도와 청사가 다가오자 미호는 둘에게 해야 할 일을 일러줬다.

“거기 상자 안에 문양이 다른 카드가 있지? 그걸로 바꿔 끼워 봐.”

청사는 미호 말대로 함 아랫부분을 들추었다. 나침반 밑에 끼울 수 있는 모양 다른 그림들이 몇 장 더 나타났다.

“방위와 숫자로 표시된 카드판으로 교체해 봐. 여기에서 어디로 가면 되는지 알려줄 거야.”

문양판을 바꾼 나침반의 자침이 새롭게 돌기 시작했다. 빙글빙글 멋대로 돌던 바늘은 속도가 줄어들더니 이내 완전히 멈추어 섰다.

바늘이 가리킨 곳은 남쪽으로 400리, 현대 계량법에 따르면 160km가 채 되지 않으니, 차를 타고 2시간 이상은 능히 걸린다는 뜻이다.

“어디 보자.”

그녀는 선반 사이를 오가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 지도 어디 있더라. 여기 어디쯤 쑤셔 넣은 거 같은데.”

물건들을 까뒤집자 가라앉아 있던 먼지가 뽀얗게 일어난다.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샅샅이 뒤지던 미호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찾았다!”

누렇게 낡은 책이다. 겉표지에는 제목 하나 적혀 있지 않아 수상쩍은 물건이었다. 미호는 익숙하다는 듯이 책을 받아 들어서는 조심스럽게 표지를 넘겼다. 그 안엔 절첩식으로 묶여있는 지도가 들어 있었다. 지역별 산과 들과 강의 모습이 목판인쇄 되어 있었다. 세밀한 도판 지도는 지극히 평범한 골동품처럼 보였지만, 그 지도 위에 작은 점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움직이고 있었다.

“요괴들 위치를 알 수 있는 지도야.”

흥미롭게 내려다보던 고도가 한마디 한다.

“이런 걸 만들어두면 요괴를 잡으러 다니는 도사들이 옳다구나 가져갈 것 같은데.”

“요괴들이 서로 돕고 살려고 만들었지, 도사한텐 안 주는 게 당연하잖아.”

세월이 흘러 이기적인 요괴들도 서로 연락하며 상생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참으로 요지경인 세상이다.

고도는 어쩌다 요괴들 사정이 이리 처량 맞아졌는지를 묻는 대신 지도 위에 나침반을 올리는 미호를 지켜봤다. 그녀는 나침반에 표시된 거리를 따져보더니 요괴들이 우글우글 몰려 있는 산을 가리켰다.

“예그리나는 계룡산에 있는 게 확실하다.”

가만히 지도 위를 지켜보던 고도가 말했다.

“요괴들이 몰린 산이라면 산의 정기가 풍부하다는 소리겠고, 그런 산이라면 선녀탕이 유지된단 소리군. 그러니 예그리나가 이리로 떨어진 것이 분명하겠구나.”

“맞아.”

“그럼 출발하자, 대롱아.”

고도가 나침반과 지도를 모두 챙겨가려 하자 미호가 바로 제동을 걸었다.

“차표 예약해야 해! 그리고 혹시 요괴들과 대치할 수 있으니 나도 좀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겠니?”

“지진아, 너도 가려는 게냐.”

“그럼 이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너희 둘만 어떻게 기차에 태워 보내겠어! 사건사고 뉴스에서 너희 얼굴 보고 싶지 않거든?!”

뉴스는 또 무엇인지. 대충 현상금이 붙은 죄인에 대해 방을 붙여놓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했다.

“요괴가 득시글한 곳에 우리끼리만 가면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구나.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려 했건만 계획을 바꿔야겠어.”

톡톡, 미호가 짚신짝을 건드렸다.

“꽃잠 그만 자고 일어나거라, 몽당아, 귀한 손님이 오셨어!”

짚신은 잠잠했다. 미호는 반응 없는 짚신을 가차 없이 바닥에 패대기쳤다.

“일어나래도!”

바닥을 철푸덕, 나뒹군 짚신짝이 덜그덕, 덜그덕, 흔들리기 시작했다. 선반마다 자리 잡은 소란스러운 도깨비들이 갑자기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까불거리던 도깨비들이 모두 고개를 조아리자 덜그덕거리던 짚신이 허공으로 한 바퀴 풀쩍, 뛰어 올랐다. 하얀 연기가 짚신 주변을 메웠다. 연기는 단숨에 부풀어 펑, 하고 무언가 터지는 소리마저 났다.

“몽당!”

엉덩방아를 찧은 도깨비가 씨익씩거리며 일어났다.

고도는 오랜만의 재회에 감격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 가끔 눈앞에 아른거리기도 했다. 예그리나만큼은 아니지만, 알밤만한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조그마한 손을 활짝 펼치며 “몽당, 몽당!” 외치는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귀여운 도깨비를 두 손바닥에 폭 끌어안을 생각으로 들떠있었건만.

웃을 준비가 되어 있던 입 꼬리가 묵직하게 가라앉는다. 내려다봐야 할 시선은 고개를 서서히 뒤로 젖히면서 천장까지 높아졌다. 엉덩이를 두드리면서 일어나는 도깨비는 덩치가 커도 너무 컸다. 도깨비 머리에 천장의 갓등이 닿아서 흔들리고 있었다. 갓등의 불빛을 등지고 선 도깨비 얼굴은 벽에 그려진 도깨비 그림보다 훨씬 무시무시했다.

“……몽당이 맞느냐?”

구척장신의 거인이다. 그의 과거 현신이었던 도깨비 수장 ‘소’보다도 두 뼘 이상은 더 컸다. 어깨와 떡대도 널찍이 벌어져서 인간은 성인 장정 열 명이 달라붙어도 이길 수 없을 체구였다. 턱은 수염에 뒤덮였고, 망나니처럼 길게 기른 머리는 정수리에서 헐겁게 상투를 틀어놨다. 부리부리하게 뜬 두 눈은 무시무시했지만, 그 안의 눈망울은 별빛이 흐르듯 반짝이고 총명하게 빛났다.

“몽다앙?”

감히 어떤 인간이 자신을 알아보느냐고 순식간에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도깨비답게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지옥에서 곧장 올라온 야차처럼 보일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몽다아아아앙!”

온몸에 도깨비불이 붙어서 화르륵 타올랐다. 빛나던 검은 눈 안에도 불이 담기며 이글거렸다. 커다란 덩치로 고도를 밟아 죽이려 할 때였다.

“얘, 고도잖아. 왜 못 알아보고 그래.”

미호가 요사한 부채를 휘휘 흔들면서 말했다. 뭐든 다 잡아먹고 활활 불타는 도깨비불이 그 부채 바람에는 흔들리는 촛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몽당은 미호 말에 화르르 타오르던 불을 사그라트리고 다시 송아지처럼 순박한 눈으로 되돌아왔다.

“몽당?!”

“그래, 고도야, 네게 서전검을 준.”

허리춤에서 잘그락거리는, 지금의 덩치엔 그저 이쑤시개 같아 보이는 서전검을 한 번 바라본 몽당이가 고도를 돌아본다. 자글자글하게 일그러져 있던 험상궂은 얼굴이 만개한 꽃처럼 확 핀다. 순박한 어린아이 표정을 지은 몽당이 양팔을 활짝 벌렸다.

“몽당, 몽당!”

고도를 끌어안아 들었다. 좋아서 뱅글뱅글, 강강수월래라도 하듯이 도는 바람에 그 커다란 덩치에 쿵쿵 부딪친 만물상 물건들과 미호의 비명 소리가 이어졌다.

“몽당이, 이 녀석! 지금은 그렇게 기뻐할 때가 아니야!”

“몽다앙, 몽다아앙.”

“꺄아, 가게 다 부서지겠어!”

“몽당당당~!”

참다못한 미호가 부채로 몽당의 뒤통수를 갈겼다. 몽당은 고도를 내려놓고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그 사이에 고도는 비틀비틀 바닥을 돌았다. 청사가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우당탕탕 넘어졌으리라.

“아이고, 고놈 참 힘도 좋네.”

허허실실 웃는 고도를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청사였다.

고도를 대신해서 미호가 따끔하게 일갈했다.

“예그리나라고 고도와 대롱이네 귀한 아들이 여기로 떨어졌어. 우리가 귀한 천룡을 찾아줘야겠는데, 해후는 그 이후에 즐기는 게 어떠련?”

몽당인 예그리나가 누군지 몰라서 눈알만 도록도록 굴렸다. 미호는 과거를 비춰준다는 거울을 들어 보였다. 오래된 거울 틀과 달리 매끈한 유리면에는 예그리나의 날개 달린 까만 몸이 비쳤다.

“몽당!”

기억난다는 듯이 반응하는 몽당이에게 미호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시내에 있는 도깨비들을 모두 불러주겠니? 오늘은 만월이라 나 역시 숨어 지내는 구미호를 불러보려 한다. 어때?”

“몽당!”

“좋아, 인해전술이다.”

고도는 이제야 빙글빙글 돌던 천장이 제대로 되돌아왔다. 청사의 부축을 받으며 똑바로 서는 고도에게 미호가 종이 가방을 안겨주었다. 고도의 까만 눈이 끔뻑였다. 이게 무어냐고 묻는 시선에 미호가 그런다.

“귀신 손님들이 부모 얼굴도 못 보고 떠날 때 빌려주는 제대로 된 양복 한 벌이야.”

“음?”

“너희 너무 눈에 튀니까 그걸로 옷 좀 갈아입어주라. 특히 대롱이! 너는 머리도 묶고! 여긴 남자들이 그렇게 머리를 기르지 않아서 예그리나 찾다가 온 시선을 다 끌게 생겼어!”

미호는 얼굴이 일그러지는 청사에게 당부했다.

“준비해서 종묘 입구로 나와 있어. 어딘지는 알지? 거기 건물은 변함없거든!”

“그래, 알았다.”

몽당은 고도를 꼭 끌어안았다.

“몽다앙.”

고도는 그런 몽당의 까슬까슬한 수염에 푹 파묻혀서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 나도 다시 만나 기쁘구나. 수염에서 냄새가 나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안 씻은 게지.”

“몽당, 몽당.”

“내가 작아진 게 아니라 네가 무시무시하게 커진, 커흑, 너무, 큭, 세게 안지 말거라, 늙은이 뼈 부러지겠, 컥.”

힘을 주체 못하는 몽당이 고도를 놓아준다. 그는 여전히 아쉽다는 듯이 쩝쩝 입맛을 다시지만 미호의 말마따나 해후를 뒤로 미루기로 했다.

연기에 휩싸인 몽당이 파란 도깨비불로 변했다. 파란 불빛이 가게 안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미호는 정신없는 몽당이를 휘휘 저어내면서 청사 손에 종이 몇 장을 움켜주었다.

“혹시 우리가 늦으면 이거 들고 카페 가서 뭐 사먹어도 돼.”

“카페?”

“커피 파는 곳이야.”

“아니 저 맛없는 걸 팔기까지 해?”

“익숙해지면 너희도 이것만 찾게 될걸. 일단 받아.”

“이 종이쪼가리는 뭔데.”

“돈.”

금화도 아닌 종이가 돈이라니. 참으로 세월이 하수상하다 싶어 격세지감을 느끼는 청사와 달리 고도는 그 얼굴을 알아봤다. 그도 그럴 것이 아주 유명한 왕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지 않은가.

“도술로 여러 장 만들어서 쓰면 되나?”

외출 준비를 마친 미호가 기겁했다.

“절대 안 돼! 요즘 가짜 돈 판독이 얼마나 쉬워졌는데! 너 감옥 가!”

“어차피 예전에도 금덩어리, 은괴 이런 것들을 내가 가짜로 많이 만들고 지냈다만.”

“그때보다 훨씬 치밀해져서 안 된다니까.”

“복잡한 세상이로다.”

시간을 확인한 미호가 외쳤다.

“더 늦기 전에 움직일게. 고도, 대롱이! 그럼 이따 보자!”

먼저 떠나버린 도깨비불과 구미호에게 인사할 틈도 없었다. 떠들썩하던 가게는 몽당 도깨비의 머리에 부딪쳐 흔들거리는 갓등 불빛만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고도는 종이 가방에 담긴 옷과 청사를 힐끔 바라봤다.

“미호가 당부했으니 우리도 한번 맞춰서 준비해볼까?”

“고도야, 어째 즐거워 보인다.”

“언제 하계 생활을 또 이렇게 즐겨보겠느냐. 신기한 것투성이니 열린 마음으로 누려보자꾸나.”

예그리나가 손톱만큼이라도 다치면 산을 갈라버릴 환영도사 고도의 태평함이란. 그만큼 위기의식이 많이 부족한 평화로운 천계 생활 탓도 있지만, 고도는 간만에 벌어진 엉뚱한 사건에 진심으로 재밌어 보였다. 여유롭고 느긋한 고도도 좋았으나, 지금처럼 생기가 넘치는 모습도 마냥 싫지 않은 청사였다.

고도가 이토록 즐거워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우리도 준비해볼까?”

웃으며 말하는 고도에게서 청사는 눈을 떼지 못했다. “귀신들에게 빌려주는 옷을 감히 나보고 입으라니…….”라는 퉁을 내지 못한 건 지극히 당연한 이치였다.

*

“고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닌 것 같다.”

“대롱아, 뭘 그렇게 낯설어 하느냐. 길거리에 있던 사람들도 똑같은 복장이지 않느냐.”

“그네들 입는 것과 내가 같으냐, 으으.”

청사는 자신의 낯선 차림새 때문에 쭈뼛거렸다. 언제나 금사, 은사가 수놓인 고급 비단옷만 입고 다니던 청사는 새카만 정장바지에 흰색 와이셔츠를 입은 상태였다. 어깨와 팔을 조이는 재킷은 너무 어색해서 입지 않았고, 소매단도 단추를 잠그면 손목이 너무 조였기에 접어서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상태였다. 바지와 맞춘 듯한 검은 구두도 불편한지 걸음걸이도 부자연스러웠다.

청사는 망측한 옷차림을 훌훌 벗어던지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하계 문화에 장단을 맞출 필요가 있느냐는 불만이 목구멍을 간질였다. 하지만 고도는 시종일관 싱글벙글 웃었다. 청사의 숱 많고 부드러운 머리를 직접 빗질해주고 끈으로 묶어서 이곳 사람들 심미안에 깔끔하고 단정하게 만들어주며 좋아했다. 이런 고도의 즐거움을 쉽사리 앗아갈 수가 없었다.

청사는 입술을 삐쭉였다.

“어쩐지 놀림감이 된 기분인데.”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목 뒤에서 묶은 정장 차림새. 그 차림새는 청사의 마르고 늘씬하면서도 다부진 몸을 매력적으로 부각시켰다. 원체 우아한 분위기의 소유자인지라, 하늘하늘 부드러운 한 폭의 그림 같은 옷과 장신구들이 찰떡이지만, 이렇게 온몸의 선이 드러나는 정장 차림새는 차가우면서도 근엄한 그의 두 눈과 잘 어울렸다. 고도는 평생 본 적 없는 청사의 색다른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청사는 그 시선이 못내 좋고도 민망하여 얼굴을 붉혔다.

“으으, 억울하다. 고도, 너도 갈아입자.”

종이 가방에 함께 담겨 있던, 한 치수 작은 정장을 건네며 하는 말이었다. 고도는 그 옷 대신에 진귀한 물건으로 가득 차 있는 미호의 만물상 선반에서 안경 하나를 집어 들었다. 현대에서 ‘선글라스’라고 불리는 물건이었고, 미호가 장사할 때 소개하는 상품명으로는 ‘어둔 밤 밝히는 도깨비 눈 안경’이었다. 어둠속에 숨어 있는 인간 아닌 모든 존재를 보여주는 선글라스를 낀 고도는 입고 있는 검은 두루마기 차림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나는 옷이 새까매서 괜찮을 것 같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너처럼 금사 은사로 꽃이 수놓인 답호가 눈에 튀지, 나는 그림자 속을 숨어 다닐 차림새 아니느냐?”

선글라스 밑으로 히죽, 드러난 미소가 청사를 놀리는 듯했다. 청사는 억울했다.

“이런 식으로 복수하기냐. 나를 능멸하는구나, 고도.”

“복수는. 능멸도 아니로다.”

“이거 얼른 입어. 나 혼자만 입기 싫단 말이야.”

“자, 가볼까?”

“으윽, 고도!”

오랜만이라 당했다. 고도와 너무 오랜만에 함께 시간을 보내는 애틋함에 눈이 멀어 능글맞은 그의 본성을 잊었던 것이다.

청사를 흐뭇하게 올려다보던 고도가 안경을 고쳐 썼다. 그는 [구미호 만물상]을 나와 지상으로 올라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고도와 청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지만, 고도는 태평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대롱아, 용안을 열어 보거라. 인간들 속에 다양한 것들이 섞여 있다.”

정장 차림새로 실랑이를 벌이려던 청사가 한숨만 푹 내쉬었다.

“두고 보자, 고도.”

그렇게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긴 채 용안을 열었다.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스쳐 지나가는 도로변, 구석진 골목으로 음산한 음기가 고여 있었다. 고개를 내밀고 자세히 살피니 골목길 쓰레기통 앞에 키 작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조그마한 함 옆에 쭈그려 앉은 노인은 백발이 성성해서는 눈도 잘 뜨지 못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주 연락한담서 이리도 매정할 수 있을꼬. 요 작은 것을 챙기기 뭐가 그리 어렵다고 이사하며 버리고 간단 말이냐. 이 애미 죽었다고 잊고 산단 게지. 억장이 무너진다, 억장이 무너져.’

한이 서린 낡은 함 사이로 종이가 누렇게 뜬 편지지가 보였다. 노인은 고개를 들지 않고 함 옆에서 그저 중얼중얼, 바닥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고도는 청사의 손을 잡고 뒤로 물러났다.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구나. 저승차사가 못 찾은 건지.”

인력난을 겪는 차사들이 대다수 병원에서 죽을 사람들 옆을 지키고 있다 하니, 무연고로 죽은 혼령을 데려가는 건 늦어지는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한이 쌓여 악귀가 되어가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오지랖을 부렸을 고도가 매정하게 말했다.

“얽히지 말자. 일이 복잡해진다.”

미호가 말한 종묘로 향하는 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 낡은 간판이 걸린 오래된 구옥들 사이로 치마를 입은 여인이 양손에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들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그들이 걸을 때마다 딸랑딸랑, 종소리가 났다.

“저것 역시 딱 봐도 인간이 아니구나.”

청사의 예리한 한마디에 고도가 중얼거렸다.

“복식이 달라 못 알아볼 뻔했지만, 호구아씨인 듯하다.”

“그건 누구지?”

“역병을 옮기고 다니는 신이지.”

“역병을 옮긴다고?”

“내가 하계에서 생활할 때는 어린아이들에게 홍역을 묻히고 다녔어. 그러다 더는 목숨이 붙어있기 힘든 아이들과는 저렇게 손을 잡고 다녔는데, 그 당시엔 아이들이 수백, 수천 명이 뒤로 길게 늘어설 정도로 많았단다.”

“왜 아이들에게 병을 옮긴 게냐.”

“묻진 않았단다. 신의 주관을 한낱 인간이 어찌 알까 싶어서. 아이들을 좋아해서 죽여 데리고 다니는 것도 같다만.”

시대가 바뀌어 홍역이 아닌, 더 다양한 새로운 병을 아이들에게 묻혀보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의학이 발달되어 죽는 아이보단 살아남는 아이들이 더 많아졌고, 길게 줄지어 걸어가던 아이들 풍경도 단출하게 바뀐 듯했다. 고도와 청사는 그 신과도 얽히고 싶지 않아 또 다른 골목길로 들어갔다.

“어허, 오늘따라 귀신과 도깨비들이 소란스럽구나. 또 어언 길흉화복이 넘치려고 이러시나.”

삼베로 만든 빨간 셔츠를 입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하얀 반바지를 입은 남자가 손에 든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중얼거렸다.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남자는 한쪽은 붉은 눈을, 다른 한쪽은 검은 눈을 가진 기이한 외모였고, 이는 고도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번엔 모르쇠로 지나치지 않았다.

“곽곽 선생.”

저를 부르는 소리에 부채질을 하던 손이 멈춘다. 뒤돌아선 남자는 고도를 한눈에 알아봤다.

“아니, 이게 누군가. 천방지축 환영도사 아니신가.”

별의 눈을 가진 이였다. 눈동자 대신 흰자위에 무수히 박힌 붉고 푸른 별들이 고도를 퍽 반가워하다가 예의를 갖추기 시작했다.

“과거를 탈피하여 하늘에 몸을 맡긴 땅의 대리자, ‘진명의 보주’를 소유한 고도를 뵙나이다.”

음양오행을 읽어내어 천기를 꿰뚫어 국운(國運)까지 점지하던 일종의 신령이었다. 점술과 역학에 능통해서 세상 만물 돌아가는 이치를 손바닥 안에 훤히 꿰뚫고 있는지라, 한때는 고도를 잡으려는 저승차사 편에서 점괘를 봐줘서 도망 다니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그새 세월이 많이 흘러 서로를 쫓고 쫓던 지간에서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만 남은 사이가 되었다. 아니다, 서로를 의식하기엔 고도가 너무 먼 존재가 되었으니 더는 개인적인 감상이 남을 수도 없으리라.

“하늘을 떠난 별이 오늘 새벽 이곳으로 떨어졌더니만, 그게 그대일 줄은 몰랐군요.”

곽곽 선생의 시선이 고도 옆에 선 청사를 향했다. 그는 물끄러미 청사의 관상을 살폈다. 현대 복식을 입어도 숨길 수 없는 청사의 본래 모습을 바로 알아본 듯했다.

“하계로 해가 떨어질 일은 없으니, 잠시 들렀다가 떠날 분까지. 이곳에 떨어진 다른 별 조각을 찾으러 온 두 분께 제 미천한 점괘를 봐드리겠나이다.”

부채를 든 손이 숲 하나를 가리켰다. 햇살이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 건물 사이로 나무 그림자만 어둑하게 잠겨들어 있었다.

“별 조각이 나무 잎새에 걸렸노라. 돌아갈 길을 몰라 헤매는 별의 앞길에 귀하신 분의 햇살이 어둠을 밝히길 기원한다.”

점괘라기엔 퍽 아리송한 이야기들뿐이었으니. 청사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고도는 그의 말을 알아들은 듯 자세히 묻질 않았다.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건넬 뿐이다.

“해후를 즐겼으면 더 좋았을 것을. 이렇게 떠나서 미안하오.”

“귀하신 분을 직접 뵌 것만으로도 복채를 이미 받았지 않습니까.”

그는 접은 부채를 다시 펼쳐서 살랑살랑 흔들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곽곽 선생이 사라진 후에야 고도가 점괘를 해석하곤 말했다.

“예그리나는 나무에 떨어져서 걸린 모양이다. 산을 헤매느라 도시까지 내려오진 않을 것 같아.”

청사는 입가를 찌푸렸다.

“그럼 계룡산을 다 뒤집으면 되겠느냐?”

“그랬다간 칠성신이 거품을 물겠네. 미호도 ‘뉴스’에서 우릴 본다며 노발대발할 테고.”

“하아, 신경 쓸 게 어찌 이리 많더냐.”

그래, 신경 쓸 것이 많지.

고도는 곽곽 선생이 사라진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을 빤히 바라봤다. 스쳐 지나치는 사람들 중엔 가끔 귀문(鬼門)이 열린 이도 있었다. 그들은 인간들 틈에 섞여 든 신령을 알아보고 멈추어 서는가 하면, 아주 적은 확률로 고도와 청사와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하나, 세상이 탁해진 탓에 고도와 청사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고도와 청사의 정체는 점술가, 역술가, 무당, 종교인들조차 알아볼 수가 없다. 하물며 평범한 인간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리. 고도는 변해버린 세태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생각했다.

알아봐 주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지내는 것도 자유롭고 마음이 편할 수는 있겠구나. 모든 이들이 제를 올리고 상을 차려주면서 모시던 과거는 부담스럽지 않았더냐. 이게 현대의 편함일 수도 있겠어.

“머리 아프게 고민하기보단 미호와 몽당이가 돌아올 때까지 느긋해보지 않으련.”

“어디서?”

고도는 종묘 맞은편에 있는 가게 하나를 가리켰다. [구미호 만물상]에서 맡았던 향기와 똑같은 커피 내음이 풍기는 곳이었다.

“카페서 기다리자.”

사약이라면서 또 마실 생각을 하는 고도가 어찌 보면 제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청사였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간 고도가 빈 의자에 앉는다. 두 눈 초롱초롱히 실내를 돌아보면서 청사에게 부탁했다.

“미호가 준 돈으로 커피 사 보자.”

“응, 사 마셔, 난 됐어.”

“네가 사주지 않겠느냐. 어떻게 사는지 난 구경하겠다.”

일그러지는 청사 얼굴을 올려다보며 고도는 천진하게 웃으며 카운터를 가리켰다.

“저기 저 처자가 우리를 빤히 바라보지 않느냐. 어서 다녀 오거라.”

할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청사가 입을 방긋거렸지만, 이내 묶은 머리만 긁적였다. 한숨을 삼킨 청사는 사사로운 입씨름을 포기하고 직원에게 다가갔다. 직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커피 두 잔.”

반말에 직원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다가도, 청사의 파란 눈을 보고는 외국인인가 싶어서 미소를 잃지 않고 응대했다.

“아메리카노 말씀이시죠? 따뜻하게 드릴까요, 아니면 아이스로 드릴까요?”

“아이스는 뭐야?”

“얼음 넣어서 차갑게 드리는 음료입니다.”

귀한 얼음을 그 사약에 넣다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이던 청사가 주문을 바꿨다.

“얼음 커피 두 잔.”

“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주문받았습니다. 사이즈는 어떻게 드릴까요?”

“사이즈?”

“앞에 있는 컵 크기 중에 고르시면 됩니다.”

사약을 많이 먹긴 힘들 테니 제일 작은 컵을 가리켰다.

“이거.”

“네, 아이스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 두 잔 맞으시죠?”

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의 대화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청사는 미호에게 받은 지폐들을 꺼냈다. 전부 다 주고 떠나려하는 그를 직원이 다급하게 잡았다.

“손님, 너무 많이 주셨어요! 여기 거스름돈이랑 초과 금액 받아가세요!”

다른 색깔의 지폐를 섞어서 되돌려주기에 청사는 어이가 없었다.

물건을 사며 돈을 지불했는데, 어째서 돈이 더 늘어난 건지.

금전 단위의 개념을 전혀 알지 못하는 청사는 잠시 기다리자 유리잔에 나온 커피를 들고 고도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돌아갔다.

“하아, 뭐가 이렇게 복잡하지.”

차가운 얼음 잔을 내밀자, 주문하는 청사를 기특하게 바라보던 고도가 생긋 웃었다.

“수고했다, 대롱이.”

그 미소에 청사는 툴툴대지도 못했다. 고도가 웃어주는데 주문 따위 두 번을 못할 쏘냐. 청사는 미소로 화답하며 받아온 커피를 자랑했다.

“커피에 얼음을 탄 거래. 신기해 보여서 주문했어.”

“오호, 정말이구나. 석빙고(石氷庫)에서 귀하게 캐던 얼음이라니.”

한입 마시자 미호네 가게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르륵, 흘려보내는 고도였다.

“이번엔 차가운 사약이로다.”

고도의 반응에 청사는 그저 키득거리며 웃기만 했다. 그렇게 고통스러우면 입을 대지 않아도 될 텐데, 고도는 거의 무의식중에 한 모금씩 홀짝거렸다. 청사는 잔에 맺힌 물방울을 손끝으로 닦아내며 물었다.

“나침반은 변화 없어?”

방위 문양도, 상태 문양도 그대로다. 고도는 도깨비 눈이 담긴 안경까지 손가락 사이에 쥐고 흔들며 말했다.

“나침반에 반응할 것도 주변에 없으니 말이다.”

“그건 그래. 아까 그 골목 외엔 귀신도 보이지 않아. 양기가 음기를 모두 누른 것 같은데?”

“도시에서 내몰린 귀신들이 산에 득시글할 듯헌데, 마찰 없이 예그리나를 데려갈 수 있을는지, 그게 걱정이로다.”

하계에 온 지 반나절 만에 돌아가는 세상을 읽어낸 고도였다. 신문물과 예상 못 한 방향으로의 문명 발전이었지만, 그것을 썩 불결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고도는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유리잔을 흔들며 말했다.

“대롱아.”

“응?”

“일이 커지면 말이다. 내가 ‘진명의 보주’를 써서 땅의 주인을 불러 양해를 구해볼 것이니, 너는 천룡의 힘을 절대 쓰지 않았으면 한다.”

과거와 달리 지금의 하계는 많이 오염되어 천계의 힘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을 우려한 듯했다. 이 상태에서 청사가 하늘을 조각내서 땅으로 떨어트리거나, 천둥번개를 산처럼 쌓아 바닥에 내던지기라도 하면, 각종 전선으로 촘촘하게 연결된 세상이 한순간에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무너질 것 같았다.

맨 흙바닥에 낙뢰를 떨어트리는 것은 그 주변 땅에게만 사과하면 될 일이나, 높은 빌딩과 자동차들이 천룡의 힘에 휩쓸리면 사상자가 수백수천 단위로 늘어날 수도 있다. 그렇게까지 피해가 심각해지면 뒷일을 수습하기 위해 상제까지 나서야 할지도 모를 일. 모든 일을 하계에서 나고 자란 고도가 책임지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계룡산이 정기를 품고 있어서 요괴들이 날뛸 수는 있으나, 이무기도 아니고 요괴들일 뿐이다. 내가 도력으로 바람만 일으켜도 허무하게 쓰러질 것들이다. 조용히 처리하자꾸나.”

그것이 청사와 같은 생각이 아님이 유감이었다.

“소란을 피워서라도 예그리나의 안전을 최우선시할 거다.”

청사의 반발에 고도의 손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던 잔이 멈춘다. 검은 눈에 담긴 다정하고 포근한 시선은 그대로지만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청사가, 아니 상제의 오른팔인 천룡이자 금관소경보좌가 선언했다.

하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예그리나를 우선시하겠다고.

“하계는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다. 신은 현존하는 존재가 아닌, 상상의 존재로 전락했구나. 솔직히 말해서 천계에 속한 우리가 더는 보살필 필요가 없는 곳이라고 생각된다.”

고도가 추구하는 것, 이를테면 강문과 치열하게 싸우며 인간의 본성을 지키고 싶었던 믿음마저도 낡은 찌꺼기가 되어 저 아스팔트 바닥 아래 묻혔다. 이제 와서 무엇을 더 보호하려 들 필요가 있단 말인가.

오랜만에 하계로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청사의 마음은 이러지 않았다. 고도의 고향이다. 오랫동안 청사를 위해 천계 생활을 해준 만큼, 청사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여가 시간을 하계에서 쓸 생각이었다. 그러나 가슴에 부풀었던 기대는 금세 실망과 환멸로 바뀌었다. 고도가 그리워하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하계가 천계를 단절했다. 천계는 그것도 모른 채 하계에 무심했고. 시시비비를 가리기 어려워질 만큼 간극이 벌어졌구나. 신을 믿지 않는 세상에 신이 강림한들, 그것에 위엄이 있겠느냐? 그럴듯한 눈속임이라 생각하겠지. 그러니 나 역시 신을 필요로 하는 천계의 입장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 

상제 곁에서 하늘의 위엄을 걸치게 된 청사가 말한다.

“예그리나가 최우선이다. 설령 하계에 혼돈을 불러일으키더라도, 그 뜻은 변하지 않으리라.”

고도는 제 앞에서만 천진하고 수줍음 타는 소녀 같은 용이 실은 천계의 뜻을 대변할 만큼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고도가 청사 곁을 떠나지 않는 이상, 그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사실도.

“그래, 알겠다.”

덤덤한 대답에 청사가 움찔한다. 너무 강하게 말해서 고도가 상처받지 않았나, 눈치를 살폈다.

“……날 이해해 주는 게냐, 고도.”

“엄밀히 말하면 나도 이제 천계에 속한 존재 아니더냐. 네 뜻이 그러하다면 당연히 나도 천계를 우선시해야지.”

그 대답에 뿌듯하긴커녕, 마음이 복잡해지는 청사였다.

고향을 등져서라도 청사와 예그리나를 우선시하고 천계의 뜻대로 하겠다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할까.

고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거릴 때였다.

카페 밖이 어수선했다. 도로 위를 지나치던 사람들이 한데 멈추어 서서 일제히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웅성거리는 소란에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마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도로에 해괴한 무리가 나타났다.

갈색 머리띠를 이마에 두르고, 같은 색 저고리와 흰 바지를 입고 있는 남자 수십 명이었다. 바지 밑단에 행전을 하고 버선에 집신까지 한 무리는 하나같이 기골이 장대하고 광대와 눈썹 뼈가 툭 튀어나온 인상에 두 눈이 부리부리했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무리는 얼쑤, 소리를 내며 어깨춤을 추는가 하면 어깨에 기대어 있는 방망이를 휘두르기도 했는데 그 꼴을 보면 누구 하나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굴 분장이야, 가면이야? 도깨비 같아.”

“오늘 무슨 행사 있나 본데. 어우, 덩치들 무섭다, 야.”

이렇게 드러내 놓고 올 줄은 상상도 못 한지라.

고도와 청사는 황망한 얼굴로 우르르 카페 창문에 몰려드는 도깨비들을 바라봤다. 인간들 모인 곳에서 씨름을 하자고 달려들거나 요술 방망이를 흔들어 혼을 쏙 빼놓는 장난꾸러기들은 주목받는 이 상황에 신나 있었다. 그나마 키도, 덩치도 어마어마하게 커진 몽당이가 다른 도깨비들을 통솔하고 있어서 불미스러운 사고를 피할 수 있었는데, 이들이 통제되지 않고 골목 곳곳에 장난을 걸면 일대가 얼마나 아수라장이 될지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핼쑥해지는 일이었다.

“몽당!”

신난 도깨비가 창문에 손자국을 냈다. 그것이 오래된 염원을 기원하는 행위라도 되는 듯이 우르르 몰려든 도깨비들이 카페 유리벽을 두드렸다.

쾅쾅쾅, 쾅쾅쾅!

박자에 맞춰서 유리벽을 두드릴 때마다 사방이 흔들렸다. 직원들은 겁에 질려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고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손에 아직 다 마시지 못한 커피 잔을 든 채 카페 문을 열었다.

“도깨비 선비들이 오랜만의 외출에 신이 난 것 같구나.”

몽당은 수염이 벌어질 정도로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몽당, 몽당.”

“다 같이 예그리나를 찾아준다니 퍽 고맙긴 하다만, 인간들이 놀라지 않겠느냐.”

“몽당? 몽당, 몽당!”

“오호라, 도깨비감투를 쓴단 말이지.”

그 말에 도깨비들은 대번에 바지춤에서 감투를 꺼냈다. 망건을 쓴 머리에 감투를 얹으니 카페 앞에 장사진을 쳤던 도깨비들 수십이 한꺼번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구경하던 사람들 입에서 짧게 비명이 터졌다. 핸드폰을 꺼내 영상을 찍던 사람들은 녹화 영상을 돌려보며 정말로 눈앞에서 사라진 마술에 흥분했다. 그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 한동안 화제가 될 것이란 사실을 고도도, 청사도, 몽당이와 도깨비들도 추측하지 못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럼 어디 한번 움직여볼까?”

고도를 뒤따라 청사까지 커피 잔을 챙겨 나오자, 인간들 눈에 보이지 않는 푸른 도깨비불이 일제히 어딘가를 향했다. 고도가 축지를 써서 사람들 시선에서 사라졌다. 청사는 인간들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천룡의 힘을 개방해서 눈 깜짝할 사이에 고도를 따라갔다.

도깨비불을 쫓는 둘은 바람처럼 빨랐다. 사람들은 고도와 청사가 지나갈 때마다 거센 바람만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돌풍이 날아오는 골목길에서 담뱃재를 털던 사람들과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사람들이 머리카락이 뒤집어져 깜짝 놀랐지만, 그 누구도 고도와 청사를 맨눈으로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고도와 청사는 사방으로 휙휙, 지나가버리는 주변 풍광을 구경할 것도 없이 여유롭게 커피만 홀짝거리며 안마당에 뒷짐 지고 구경나온 듯한 여유만 보였다.

“대롱아, 도깨비들이 어딜 가는 것 같으냐.”

“흐음. 물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하는데.”

“나루턴가?”

“맞구나. 저 봐라, 물가로 몰려든다.”

한강 주변으로 새파란 불빛이 번쩍거렸다. 고도와 청사는 아무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다리 밑으로 향했다.

그림자가 짙게 진 다리 밑에 검은색 버스 한 대가 보인다. 앞 유리창엔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종이엔 누군가 붓으로 휘갈겨 쓴 한문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人外生延壽院(인외생연수원)’

인간 외 모든 존재들이 대절해서 쓰는 버스가 아닌가 싶었다.

“오, 다들 빨리 왔네?”

앞쪽 차문을 열고 미호가 나타났다.

“어서 올라 와. 한꺼번에 움직이자.”

버스 안은 고도와 청사가 상상하지도 못한 풍경이었다. 겉보기 네모난 차에 몇십 명 타지도 못하게 생겼더니만.

“도깨비들이 잔꾀를 부렸구나.”

안쪽은 수백, 수천 명도 더 탈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도깨비들이 요술 방망이로 공간을 뚝딱뚝딱 자르고 못질해서 붙여 넣은 덕분이었다. 너른 공간에는 이미 타고 있던 구미호들이 득시글했다.

“어머? 진짜 그 유명한 환영도사네?”

“천룡도 왔어.”

“신난다, 진짜 오랜만에 이렇게 모이잖아.”

사람 형상으로 의자에 앉아 있거나, 동물 형상으로 의자 밑에 숨어 있는 기운이 대략 백 명쯤. 구미호를 전부 불러들인 모양이다.

“몽당, 몽당!”

몽당이의 외침에 도깨비불들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너른 버스 안에 덩치 큰 도깨비들이 한가득 자리 잡자 여기저기서 구미호들이 볼멘소릴 터뜨렸다.

“아이참, 밀지 마!”

“꺅, 내가 챙겨온 과일을 왜 뺏어 먹어!”

“아유, 냄새. 너희 씻긴 하니?”

버스는 시끌벅적한 여러 존재들을 태우고 시동을 켰다. 운전사는 뾰쪽한 송곳니를 감출 줄 모르는 어린 구미호였다.

“그럼 계룡산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꺅, 좀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 꽉 매십쇼!”

“우앗!”

수백 요괴와 도깨비, 용과 인간까지 태운 버스가 묵직하게 굴러갔다. 도깨비와 구미호 사이에 치이는 고도와 청사 꼴만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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