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36)

때는 만물이 노곤노곤하게 익어가는 오시(午時). 

온정을 담뿍 머금은 햇살이 대청 안으로 달음박질치고 들어왔다. 흐드러지는 빛이 창틀에 걸터앉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한가로운 낮이었다. 사건은 언제나 이런 평화로운 때를 기습하는 법이다.

“은퇴하신 전(前) 소경을 뵙는 게 얼마 만이랍니까.”

바깥채 너머 중정(中庭)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귀를 쫑긋한 예그리나는 깃털 방석 위에 동그랗게 말고 자던 몸을 일으켰다. 까만 조약돌처럼 반짝거리는 두 눈에 나란히 걷는 천인 둘이 들어왔다. 복식을 보아하니 천궁에서 일하는 천인들인 듯했다.

“소경의 종실댁은 언제 와도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군요.”

“기실 상제의 덕이 충만한 곳에 터를 잡고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

“확실히 집안 곳곳으로 은덕이 내리쬐니 기운이 좋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그려.”

붉은색 장옷을 입고 있는 천인들은 누군가의 손님으로 보였다.

누구 손님이려나. 금관소경보좌, 한무는 아니지 않으려나. 지금쯤 옥황상제의 궁에서 하늘의 일에 대해 논하고 있을 테니 주인 없는 집에 초대하지 않았을 터. 

예그리나는 자연스럽게 제 조부모나 다름없는 천룡 조아반의 손님이라 유추해냈다. 은퇴 후 상제의 바둑 상대가 된 그를 보러 왔다면 말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평화로운 낮잠을 잠깐 방해받았다만, 다시금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예그리나가 스르륵, 잠에 빠지려던 때였다.

“한데 어이하여 그 은덕이 가장 나어린 새끼 응룡에게는 미치질 못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고이 다물어지던 눈꺼풀이 번쩍 뜨인다. 예그리나는 놀란 표정으로 천인들을 바라봤다. 그들이 말하는 가장 나어린 새끼 응룡. 그건 예그리나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저 천인 고관들이 감히 예그리나의 앞날에 천룡의 은덕이 미치지 못한다 저주를 하는 겐가.

고관 중 나이가 더 많은 쪽이 주변을 슥 둘러보고는 젊은 고관을 책망했다.

“어허, 남의 집에서 무슨 흉을 보는 겐가.”

젊은 고관은 제 패기를 믿고, 이전보다 높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새끼 응룡의 탄생에 천계 전체가 떠들썩 연회를 벌인 지 어언 300년이 지났습니다. 하계는 이미 세상이 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요. 그동안 새끼 응룡에게 무슨 변화가 있습니까? 덩치도 그대로고, 사람 모습으로 바뀌는 법도 모르고, 심지어 사람 말도 못합니다. 아직도 갓 부화한 어린 새처럼 삑삑거리니 어찌 우려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이까.”

“이 사람아, 쉿!”

“누가 들으면 어떻습니까. 저는 천계의 태평성대를 위해서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새끼 응룡이 차기 금관소경보좌가 될 것이라는데 사람 말도 못하는 것이 어찌 하늘의 일을 돌볼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그 용이 가치 있다고 해서 하계에서도 악명 높았던 도사를 천계로 들였지 않습니까. 천계의 근간이 되는 예법과 도를 어기고 내린 특혜입니다. 언제까지나 우리가 모른 척할 수는 없기에 이 점을 논하려고 오늘 전(前) 소경을 뵈러 온 게 아니겠습니까!”

“크흠흠!”

“필시 하늘의 영험한 기운보다 땅의 탁한 기운이 강해서 용의 자질이 발휘되지 못하는 겁니다. 이대로는 천운을 맡길 재목으로 자격 미달이라는 것만 만천하에 알리게 될 겁니다. 천계에 혼란을 가져오면 어찌할 겁니까! 조아반 재상을 뵙고 이 점에 관해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해 봐야겠습니다.”

“예끼! 남의 집 사정에 어찌 그리 오지랖을 부리려는 겐가.”

“오지랖이라니요! 이건 천계 전체의 문제입니다!”

젊은 고관은 강건했다. 

“천룡 한무의 후계 자리는 둘째 ‘나슬’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땅과 하늘의 기운을 함께 품은 예그리나는 음양의 기운이 혼재되어 있어 양의 기운이 가득한 이 천계와 잘 맞지 않습니다. 허나, 나슬은 태어난 지 20년도 되지 않아 바로 인간의 형상을 할 수 있던 출중한 재능을 지닌 재원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라는 재목으로 마땅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를 지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슬. 그는 예그리나의 남동생 이름이다. 지상에서 태어난 예그리나와 태생부터 다른 동생은 천룡 가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비늘까지 몸에 품고 태어난 교룡(蛟龍)이기도 했다. 그 모습은 누가 보아도 태양신의 현신(現身)이라 여길 정도였다. 어디 비늘뿐이랴. 두 눈은 푸르른 창공을 품은 벽안이지 않던가. 몹시 신비롭고, 고귀한 분위기로 태어나자마자 옥황상제의 이쁨을 받았다. 상제가 나슬을 바구니에 직접 담아 천궁을 거닐었다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로 말이다.

덕분에 소외감과 질투를 느낀 예그리나는 제 동생을 멀리했다. 드넓은 천룡의 저택에서 동생을 의식적으로 피해 다니며 서로 마주칠 일도, 얽힐 일도 만들지 않았다. 한데 이젠 외부인들까지 들어와 예그리나는 기대에 못 미친단 험담이나 하다니. 예그리나는 그동안 참아왔던 설움이 터져 나왔다.

“삐이.”

새소리 같은 예그리나의 울음이 길게 울려 퍼졌다. 마당을 비질하고 빨랫감을 옮기던 종이 그 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렸다. 예그리나가 잠을 청하던 방석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삐이, 삐.”

예그리나는 손바닥만 한 날개를 폈다. 동그랗게 말고 있던 몸을 펴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어어, 아기씨!”

깜짝 놀란 종이 비를 집어던지고 소리쳤다. 냉큼 쫓아가보지만, 예그리나는 담장을 훌쩍 넘어 날아가 버렸다.

“아기씨, 아기씨이!”

종의 애처로운 외침으로는 예그리나의 날갯짓을 멈추어 세우진 못했다. 예그리나는 너른 만주사화 꽃밭을 가로질렀다. 눈물이 앞을 가려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 싱그럽게 물이 오른 꽃도 알아보지 못했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향했다. 천인과 신수(愼獸)들도 찾지 않는 깊은 숲 속. 한때는 선녀들이 하계로 내려가 목욕을 할 때 이용했고, 지금은 금줄을 쳐서 이용을 엄금한 곳. 예그리나는 폐쇄를 표시하는 금줄을 보지도 못한 채 지나쳤다. 깊은 곳, 더 깊고 깊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을 향했다.

주변이 캄캄해졌다. 빛이 들지 않는 바닥에는 물이끼가 암녹색으로 피어났다. 고개를 들어도 우거진 나무가 하늘을 가려 햇볕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삐이?”

예그리나는 주춤하며 주변을 돌아봤다. 사방은 온통 물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고개를 들어도 해는 보이지 않는다. 음산한 짐승 소리가 어둑한 나무 그림자 사이로 구우구우하고 울렸다. 방향성을 잃고 제자리만 빙빙 돌던 예그리나가 나무 위로 올라가 보려 했다. 하나, 물안개에 젖은 날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물안개가 예그리나를 붙잡고 놔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겁에 질린 예그리나는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날아갔다. 물안개를 피워 올리는 근원인 계곡이 보였다.

‘쏴아아아.’

물길은 커다란 구멍처럼 보이는 깊은 골짜기 밑으로 떨어졌다. 폭포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새카만 구렁텅이로 거센 물살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 숲에 있는 폭포는 자고로 하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전해졌나니. 오죽하면 선녀들이 두레박을 타고 하계에 가 목욕재계를 마치는 풍습까지 생겼겠는가. 비록, 그 풍습은 수백 년 전부터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지만, 폭포가 마르거나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선녀들이 이용하던 폭포가 이리도 험하고 섬뜩할 리가 없건만.

예그리나는 기이한 폭포 주변을 걱정 많은 얼굴로 살피다가 근처 바위에 내려앉았다.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고관들의 말마따나, 예그리나는 300년 동안 몸집도 그대로고, 사람 말도 못 하고, 인간의 모습으로도 변할 수 없었다. 제 아비들인 고도와 한무는 예그리나의 더딘 성장에 단 한 번도 우려하거나 성체가 얼른 되라고 보채지 않았다. 나슬 때문에 기가 조금 죽었지만, 집안에서 사랑만 받고 자라났다. 하여 외부인들의 시선이 어떤지를 몰랐다. 이렇게 적나라한 평을 듣기엔 마음이 단련도, 준비도 안 되어 있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성장할 수 있을는지. 어찌하면 제 몫을 제대로 해결할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래서 예그리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하고 말았다. 바위들은 튀어 오른 폭포수에 오랫동안 젖어 있었다. 젖은 바위 위로는 잘 보이지 않는 물이끼가 매끄럽게 피어 있었다. 날개옷을 챙긴 선녀들만이 이 폭포를 찾아오는 이유는 하나였다. 날개옷도 없이 호기심에 들렀다가 미끄러져서 하계로 통하는 구멍에 빠지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예그리나가 마음을 다잡고 몸을 일으킬 때였다.

휘청인 예그리나가 바위 밑으로 떨어졌다. 풍덩, 하고 쾌속으로 내달리는 계곡 물살에 휩쓸렸다. 날아오를 틈도 없이 계류에 빙글빙글 돌아가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예그리나는 다급히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도 수면 밑에서 이는 물보라에 끌려 내려가 꼬르르, 하얀 숨만 토해냈다. 그대로 폭포 끄트머리까지 순식간에 떠밀렸다. 

“삐이!”

물줄기와 함께 구멍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사방이 새카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날개를 퍼덕여도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작은 물뱀 같은 몸뚱어리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끝없는 아래로 처박혔다.

‘풍덩!’

예그리나는 부족한 숨을 빨아 마시기 위해 거친 물살 위로 필사적으로 올라왔다.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예그리나는 가슴이 부풀 정도로 숨을 헐떡이다가 근처 돌멩이를 잡고 뭍으로 기어나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서 가슴이 쿵쿵 뛰고, 숨을 허겁지겁 쉬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핑 돌았다. 그래서 머리맡으로 내리쬐는 햇살이 평소 가옥 내에서 나른하게 받는 햇살보다 차갑고, 덜 폭신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 도롱뇽이다, 도롱뇽.”

낯선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자마자 몸이 잡혔다. 버둥거리기도 전에 물이 반쯤 채워진 커다란 페트병에 갇혀버렸다. 머리 위에 플라스틱 뚜껑이 비틀어져 꽉 잠겼고, 그 안에서 예그리나는 자그마한 발가락을 쫙 펼친 채 페트병 안쪽을 짚었다.

페트병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아이는 네댓 살쯤 되어 보였다.

“헤헤, 까만 도롱뇽!”

페트병 안을 들여다보며 기뻐하는 아이의 부모들이 계곡 밑에서 외쳤다.

“거기 너무 가까이 가지 마! 물살 세다!”

“이쪽으로 와. 수박 먹어야지?”

아이는 페트병을 들고 돗자리에 앉아 있는 부모님에게 달려갔다. 아이가 페트병을 제 엄마에게 내밀었다.

“도롱뇽이야!”

여자는 페트병 안에 잠긴 까만 물뱀 같은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도롱뇽이라고, 이게?”

등 뒤에 작은 날개가 나 있다. 네 발가락을 꿈지럭거리며 페트병을 짚고 일어선 모습이 어째 교과서에서 보던 도롱뇽과는 좀 달랐다. 

물에 사는 파충류이니 도롱뇽이 맞긴 할 텐데, 이런 종도 있던가.

여자는 퍽 걱정스러웠지만, 어린 아들이 너무 신나 하고 있어서 빼앗지도 못했다. 그녀는 남편을 불렀다.

“여보, 이거 봐. 도롱뇽 맞아?”

“맞겠지.”

“아이 참, 그렇게 관심 없어 하지 말고.”

“집에 가져가서 수조 안에 넣어두고 며칠 있다가 방생해.”

“징그러운데…….”

“그럼 어쩌려고. 애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몰래 풀어주게? 애 우는 거 감당 못 한다. 자기가 달래든가.”

아이는 아까부터 두 손바닥을 짝짝 부딪치며 웃었다.

“도롱뇽, 내 동생!”

저런 아들에게서 도롱뇽을 빼앗아 풀어줬다가는 하루 종일 바닥에 드러누워 울음을 터뜨릴 판이다. 남편 말대로 며칠 데리고 있다가 나중에 풀어주는 수밖에.

“어쩔 수 없네. 우리 아들 동생 데려가자∼.”

“와!”

이 상황을 예그리나만 따라가지 못했다. 눈앞의 인간들은 누군지, 자신을 웬 투명한 통에 가둔 이유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예그리나는 돗자리 위에 펼쳐진 낯선 물건 중 하나를 바라봤다. 네모난 종이상자에 튀긴 닭고기가 담겨 있었다. <동네치킨>이라는 상호명과 함께 봉지 안에 들어 있는 전단지에는 예그리나가 읽을 수 없는 글자로 된 축제 안내지가 들어 있었다.

<시원한 계곡 물놀이! 계룡산의 정기를 받고 시원한 여름 보내세요!>

‘그렇지 않습니까. 새끼 응룡의 탄생에 천계 전체가 떠들썩 연회를 벌인 지 어언 300년이 지났습니다. 하계는 이미 세상이 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요.’

300년이 지난 이 땅은 이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이라는 수도를 가진 곳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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