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36)

예그리나(Yegrina) 외전(外傳) ::
왁자한 천상의 나날

물살이 천천히 흘러내리는 내천이었다. 도르르르, 작은 돌맹이가 구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물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물은 굽이굽이 흘러내리면서 냇가에 자라난 만주사화의 뿌리를 적셨다. 햇살이 닿은 수면이 바람결에 일렁이는 사이였다. 반짝거리는 수면 위로 어린 용 한 마리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젖어 있는 작은 날개를 흔들어 터는 응룡. 천인들은 팔뚝만 한 작은 용을 ‘예그리나’라고 불렀다.

예그리나는 도솔천을 따라 굴러다니는 조약돌만큼 까맣고 동글동글한 눈동자를 굴렸다. 날개에 묻은 물을 털어내고, 붉고 조그마한 혀를 내밀어 주름 접힌 날개 사이까지 핥아 낸 후에야, 두 날개에 힘을 주어 수면 위로 서서히 날아올랐다. 젖은 꼬리를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서쪽으로 흘러가는 도솔천의 수면에 잔잔한 파원을 만들어 냈다.

예그리나는 내천을 벗어나선, 드넓게 펼쳐진 붉은 만주사화 밭 위를 빠르게 활강했다. 햇살을 머금은 바람이 예그리나의 두 날개 밑을 어루만져 줬다. 꽃이 활짝 핀 만주사화 벌판은 바람이 불 때마다 파도를 치듯 한 번에 고개를 숙였다가 치켜들면서 흔들렸다.

눈부시지 않은 햇살, 포근한 바람, 꽃들은 만개하여 긴 치마폭을 흔드는 아이처럼 춤을 추고, 햇살이 내려앉은 냇물은 조약돌을 굴리며 노래를 부르니, 예그리나가 삐이, 삐이이, 기분 좋은 소릴 내며 높게 솟았다가 낮게 가라앉으며 들썩들썩 날갯짓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분 좋게 날갯짓을 하던 예그리나의 두 눈에 번쩍이는 물체가 들어왔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선녀들 사이에 주저앉아 있는 거대한 무언가가 보였다. 발굽이 두 개로 쪼개어진 네 다리와 킁킁거리며 벌름거리는 들창코. 귀 끝이 뭉뚝하니 반으로 접혀 있는 머리까지. 흡사 돼지 형상 아닌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바라보던 예그리나가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오자 돼지 형상은 돼지 그 자체가 틀림없었다. 돼지는 털빛이 얼마나 번쩍이던지, 햇살이 닿은 투실한 등허리가 금빛으로 번쩍여서 금동으로 만든 조각처럼 보일 정도였다.

호기심 많은 예그리나는 금돼지를 지나치지 않았다. 날개를 젖히며 금돼지 곁으로 날아갔다. 긴 치마폭에 감싸인 금돼지보다, 그 돼지 곁에서 꽃 자수가 놓인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어 주던 선녀들이 먼저 예그리나를 알아보았다.

“어머, 새끼 용이에요.”

“소문의 응룡인가 봐요.”

“천룡의 막내아들이 인간 남자에게서 만들어 냈다는 아이가 이 아이였나요?”

“맞습니다. 예그리나라고 부르더군요.”

선녀들의 귀여움을 한껏 받는 예그리나는 제 날개를 쓰다듬거나 꼬리를 만지는 손길을 요리조리 피하며 금돼지 곁으로 다가갔다. 성인 남성 두 명만 한 덩치의 금돼지가 흙밭 위에 발을 깔고 네 다리를 쭉 펴고 있었다. 두 개로 갈라진 발굽 사이를 천으로 깨끗이 닦아 주는 선녀의 손길을 받으며 들창코를 벌름거리는 것이 호사도 그런 호사가 없어 보였다. 예그리나가 삐이, 하고 부르는 소리에 금돼지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금을 녹여 만든 듯한 휘황찬란한 금색 살갗만큼이나 두 눈도 금빛으로 번쩍이는 특별한 돼지였다.

“이게 누구야. 인간과 용 사이에서 나온 족보 없는 놈 아닌가.”

금돼지의 거침없는 발언에 선녀들은 당황해서 부채로 입을 가렸다. 개중엔 천인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예그리나가 혹시 기분이 상하지 않았나 눈치를 살피는가 하면, 돼지에게 무릎베개를 해주거나 발굽을 손질하던 여인들이 비웃듯이 까르르, 웃음 터뜨리기도 했다. 어린 용은 금돼지의 패악과 놀림을 알아듣지 못했다. 고개만 옆으로 갸웃하면서 금색으로 반짝거리는 눈동자만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순진무구하고 철이 없는지, 인간의 기운이 섞여서 덜떨어지는 놈인지, 금돼지는 히죽 웃으며 빙글빙글 놀려대기 시작했다.

“나는 도락을 아는 금돼지 님이시다. 이곳엔 나와 같은 특별한 짐승들이 몇 있지.”

금돼지는 금빛털을 반짝이며 낙낙하게 이야기했다.

“십수 개의 발이 달려 매일 신을 갈아 신는 뱀이라든지, 뿔 없는 머리에 모자를 쓴 수사슴, 화살 맞은 옆구리를 부여잡고 옹송망송 날아다니는 까투리, 비늘 하나가 조개껍질처럼 예쁘고 귀한 잉어까지. 모두들 오래 살다 보니 웬만한 인간 못지않게 말도 잘하고 장난도 칠 줄 알거든. 그래서 가만 보자, 널 보니 신령하다는 천룡보단 우리처럼 까불거리는 금수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어디 우리랑 놀아 볼 테냐?”

예그리나의 표정은 묘했다. 기분이 나쁘면서도, 자신을 챙겨 주는 듯한 금돼지가 고맙기도 하고, 치맛자락을 내어 준 선녀들의 웃음에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지면서도, 이렇게 예쁜 천인들을 이끌고 다니며 무릎베개를 하는 금돼지의 정체가 궁금하여 한바탕 어울려 놀고 싶기도 했다.

냇가에서 몸을 씻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금돼지 옆에서 얌전히 날개를 접었다. 걱정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던 선녀 하나가 그런 예그리나를 손등으로 톡 쳤다.

“얘, 금돼지 님이 널 놀리시는 거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얼른 날아가 버리렴.”

예그리나는 그 충고에 고개만 모로 숙였다. 새까만 눈을 굴리면서 올려다보는 예그리나가 제법 사랑스러웠던 탓에 선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나설 자리는 아니라 생각했지만, 날개 달린 검고 어린 용은 서른세 개의 하늘과 상제, 천인, 신수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존재였다. 괜히 금돼지가 잘못 건드려서 천룡 집안 전체의 문제로 비화되어 버리면, 금돼지의 시중을 들고 있는 선녀들까지 싸잡혀 혼이 날 수도 있는 일이다. 현명한 선녀는 그리되지 않도록 금돼지 앞에서 절을 하며 말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용과 놀다가 탈이라도 나면, 금돼지 님께서 신경 써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오니, 어린 용을 돌려보내 놓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놀아 보는 것은 어떠하온지요.”

다른 선녀가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며 말했다.

“금관보좌님들도 이런 일로 문책하진 않는단다. 고작 돼지님과 우리와 함께 노는 일을 뭐라 하시겠니?”

금관보좌란 상제의 곁을 지키는 세 가지의 지위를 통칭하는 말이다. 금관대경보좌, 금관중경보좌, 금관소경보좌.

옥황상제의 비서이자, 기록관이자, 그가 내리는 결정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금관대경보좌는 ‘동부’란 이름을 가진 천인 여성이다. 옥황상제의 부인인 ‘서왕모’는 질투가 많아서 동부의 매혹적인 자태와 슬기롭고 총명한 지적 매력에 제 남편이 홀릴까 봐 거대한 검은 사슴으로 만들어 버리곤, 오로지 옥황상제가 하늘의 일을 논할 때만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도록 하되, 사랑을 읊으면 바로 사냥꾼이 쏜 활에 맞는 저주를 내린 것으로 유명하다. 동부를 지키기 위해 천계에 사는 수많은 동물들이 그녀의 곁을 머물고 있다. 금돼지도 대경 동부의 곁을 지키는 짐승 중 하나였으나, 볕이 좋은 날엔 이처럼 냇가나 꽃밭에서 노는 것이다.

금관중경보좌는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의 형상을 지닌 자로, 이름은 ‘옥로’라 하며, 옥황상제의 ‘눈’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워낙 많은 일을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상제를 위해서 그가 미처 보지 못한 과거의 일이나 미리 알아야 할 미래의 일을 볼 수 있다는데, 평소엔 두 눈을 꼭 감고 응애응애 울기만 하던 옥로가 중대한 일 앞에서는 두 눈을 번쩍 뜨며 검은자와 흰자위가 구분되지 않는 그저 새까만 우물 같은 눈을 뜨며 하늘의 뜻을 전해 준다고 알려져 있다.

금관소경보좌는 세 금경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존재 즉, 먹빛 비늘을 가진 천룡이다. 용이란 태초에 물을 다스리는 신령한 금수에 지나지 않아서 바다를 지키는 일만 했었지만, 땅에 속한 존재 중 가장 현명하면서도 천 년이 지날 때마다 여의주를 하나씩 만들 수 있고, 그렇게 늘어나는 여의주에 천인들 못지않은 신령한 힘을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옥황상제는 용들 중 가장 뛰어난 자를 하늘로 승천시켜 자신을 지키는 무관으로서 옆에 두었다. 그 용을 다른 용들과 다르게 ‘천룡’이라 불렀다. 지금까지 소경은 ‘조아반’이라는 천사백 살 먹은 묵룡이 자리를 보전해 왔다. 천계 전체의 질서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딸인 ‘서진’을 ‘선녀 부대’의 장군으로 임명하여 군대의 힘을 키워 온 것도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그러나 최근에 소경 자리 일선에서 은퇴를 선언하면서 그의 아들인 ‘한무’가 차기 소경으로 승격되었다. 아직은 논하기 이르지만, 옥황상제께서 그의 형제인 ‘땅의 주인’의 예쁨을 받았다고 알려지는 ‘예그리나’가 한무를 잇는 차기 소경으로 거론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가 오고가는 중이었다.

이처럼 동부, 옥로, 한무로 나뉘는 세 금경들은 물론, 옥황상제까지 관심을 가지는 존재가 예그리나이거늘, 햇살을 받고 땀을 흘리면 그것이 금가루가 된다는 전설의 금돼지 님이라도 그의 식솔인 선녀들까지 합세하여 예그리나를 어린애처럼 놀렸다가 잘못되면 하늘 전체의 문제가 될 수도 있지 않겠나.

통찰력이 남다른 선녀 하나가 금돼지에게 절을 하며 아뢰었다.

“천계에 친구가 없으신 예그리나 님을 금돼지 님께서 갸륵하게 여기시는 부분은 추앙받아 마땅한 일이옵니다. 하나, 이 어린 용은 아직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한 시기이니 만큼, 저희와 시간을 보내기보단 핏줄들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선녀의 말에 금돼지는 금빛 털을 부르르 떨었다.

“어린 용의 부모라면 얼마 전에 소경이 된 천룡 한무 아닌가. 그 천계의 사고뭉치 말이야!”

한무의 익살에 놀아난 기억이 생각나는 금돼지였다. 번쩍이는 금돼지가 보기도 좋은데 맛도 좋으냐며 활시위를 당기며 농락하던 일이었다. 그때야 워낙 천방지축인 한무를 보고 금돼지가 꿀꿀거리며 도망치기 바빴지만, 의젓해졌다는 지금 다시 만나면 엉덩이로 들이박으면서 사과하라 외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 금돼지 옆에 앉아 있던 선녀가 허리를 낭창낭창 흔들며 말을 보탰다.

“이 애의 아비는 천계의 호색한이었고, 어미는 인계의 말썽쟁이죠.”

어미란 말에 금돼지가 눈을 빛냈다.

“응? 어미는 누군데?”

“모르셨습니까?”

“재물로 데려오는 인간 여자 따위 알게 뭔가.”

“저런, 모르고 계셨군요. 물론, 천룡의 알을 품도록 대대로 인계에서 재물로 여성체를 바쳤습니다만, 이번에는 특수하게도 지상의 어미가 천계에서 천룡을 보좌하고 있습니다.”

“뭐? 그게 가능하단 말이야?”

“무려 날개 달린 용의 어미이니까요. 게다가 땅 위의 일을 살피도록 ‘지상차사’라는 직함을 내렸다고 하니, 이건 용의 어미로서 뿐만 아니라, 소경의 일을 보좌하는 신하나 다름없죠.”

“기이하고 또 기이하구나. 그런 이야기는 내 평생 천계에 살면서 듣도 보도 못했건만. 대체 그 상대가 누구기에 이토록 큰일을 벌인 게야?”

“고도라고 합니다.”

농담과 우스갯소리가 넘실대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햇살을 머금어 금색 털을 바닥으로 흔들던 금돼지도 동상처럼 굳어서 멀거니 선녀들을 살폈다. 선녀들은 금은보화를 몸으로 만들어 낼 수는 있어도, 세상 물정 어둡고 게으른 금돼지가 천계를 발칵 뒤집은 사건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안도 아니고 이런 사안을 모르고 있었다니, 심했다.

“고도라고?”

꿀꿀거리며 코를 삼키는 금돼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농을 하며 놀릴 기분이 아니었는지 콧등을 찡그리고 있었다. 대략 천계의 말썽쟁이 차기 소경 한무가 되돌아오면서 날개 달린 아들을 낳았다고만 들었다. 그들의 혼례식 때도 찾아간 적이 없어서 어미가 누군지 관심도 없었건만. 상대가 고도라니, 이거 참 여러모로 복잡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상제님과 천인들께서 고도가 천계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단 말인가. 그러실 분들이 아닌데. 고도가 저지른 악행이 대수롭지 않은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예그리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고도 얘기가 나올 때마다 날개를 흔들며 기분 좋게 삐이, 하고 울었다. 어른들 복잡한 사정도 모르는 저 천진난만한 새끼 용을 보니, 선녀들도 모진 말은 거를 수밖에 없었다.

“소경께서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대의명분도 그럴 듯했지요.”

“그렇다고 다른 인간도 아닌 고도를 들였다니.”

그리고 그 고도가 설마 알을 품고 용을 낳았다니. 금돼지는 퍽 기이한 시선으로 예그리나를 응시했다. 땅의 축복과 하늘의 축복을 모두 받아 겹경사라고 일컬어지는 응룡, 예그리나. 그 출신 성분과 핏줄 이야기를 들으니 경사가 아니라 말세와 파탄을 예고하는 저주가 아닌가 싶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외형만 봐도 고도라는 도사를 상당히 닮아 있기에 핏줄은 저희가 왈가왈부 논할 수가 없을 듯하옵니다.”

“흐음, 고도의 핏줄이었단 말이지.”

금돼지는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발굽으로 딛고 선 꽃밭을 걸어와, 예그리나 앞에서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짧은 꼬리를 좌우로 흔들 때마다 금색 털이 돋아난 속살을 탁탁 때렸다. 예그리나는 좌우로 움직이는 꼬리를 잡으려고 폴짝폴짝 뛰면서 꽃밭 위를 뒹굴었다. 그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던 금돼지기 말했다.

“아기 용아, 아기 용아, 내 재밌는 얘기를 해줄까.”

재밌는 이야기를 싫어하는 어린 것은 세상천지에 없을 터. 예그리나가 날개를 퍼덕이며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돼지의 눈이 더 밝게 빛났다.

“넌 네 팔자를 모르는 모양이구나. 곧 어미를 잃을 놈이 태평하게 나비를 쫓는 고양이처럼 내 꼬리에 한눈이나 팔고 있고 말이야.”

꽃밭 위를 뒹굴던 예그리나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미를 잃는다는 말에 삐이, 하고 얇은 소리로 울었다. 금돼지는 웃음기를 싹 뺀 얼굴로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여러 사정이 있겠다만, 그건 네가 직접 들어라. 다만, 고도가 제 입으로도 말하지 않을 것 같기에 내가 친히 한 가지를 일러 주마. 너는 조만간에 네 어미를 잃을 것이다.”

놀라서 굳어 버린 예그리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돼지와 똑같은 자세로 엉덩이를 깔고 앉아서는 작은 앞발로 꽃 모가지도 하나 움켜쥐지 못한 채 울망한 눈을 깜빡였다. 놀라서 경직된 얼굴을 보고도 금돼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옥황상제의 형제인 염라대왕은 고도의 철천지원수지. 염마는 인계를 오가는 데엔 제한이 있지만, 천계를 오가는 데엔 제한이 없다.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옥황상제의 허락을 받고 이곳에 와서 고도를 잡아갈 수도 있거든.”

금돼지가 고개를 숙였다. 제 앞발만 한 조그마한 용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오의 햇살은 정수리 위에서 바로 타들어 가기에, 수직으로 떨어지는 햇볕은 금돼지의 얼굴에 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금빛으로 반짝이던 털들이 순식간에 새까맣게 어두워졌다. 그 속에서 금색 눈만 번쩍이는 금돼지를 보고 예그리나는 울망한 두 눈에 물기를 머금었다. 촉촉하게 젖어 가는 두 눈을 보면서 금돼지가 히죽 웃었다.

“네 어미가 널 놔두고 쫓겨날 수 있으니 미리 알고 있으려무나.”

참다못한 예그리나가 삐이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서러운 울음이 만주사화 벌판을 물들였다. 선녀 몇이 예그리나를 치마폭에 감싸서 달래 주었다. 몇몇 선녀들은 그 꼴이 우습다고 허리를 흔들며 웃음을 소맷단 사이로 감추었다. 금돼지만이 울고 있는 예그리나를 보며 흐뭇해할 뿐이었다.

거짓은 아니었다.

염마가 고도를 잡아가고자 한다면 못 할 것도 없는 곳.

그곳이 바로 염마의 형제이자, 천계를 다스리는 옥황상제가 있는 나라.

고도와 청사가 사는 곳이다.

*

한때 금관소경보좌로서 옥황상제 곁을 지냈던 ‘조아반’은 청사의 친부이다. 천인들의 경외를 받으면서 퇴위식에서도 높은 지지와 사랑을 받았던 그는 냉정하고 차갑다는 소문과 달리, 혼자서 아기자기한 것을 즐기는 취미가 있었다. 조아반은 검고 긴 머리를 혼자서 빗질하는 일을 특히 좋아했다. 소경 시절에는 몸종들이 붙어서 매일 아침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고, 손톱 발톱을 손질해 주며, 시간 맞추어 밥상을 대령하거나 일산을 들고 와 안뜰을 걷다 보면 긴 행렬을 따르는 관료들이 많았는데, 그 호사스러웠던 시절을 즐긴 적은 없었다. 오히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관리 받으니 시무룩해져서 더욱 말수가 줄어들었고, 그 모습을 본 천인들이 ‘역시 천룡 가문은 무섭다’는 소문만 키웠다. 몇몇 옥황궁 관료들은 일선에서 물러나면 이러한 소박한 일상에 박탈감을 느껴서 우울해진다고 하건만, 조아반은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머리를 묶을 비단 끈을 새로 하나 사야지 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겉과 속이 다른 용이었다.

“어르신, 한무 소경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닫힌 문밖에서 들린 소리에 조아반은 허리에 두른 띠를 마저 여미며 대답했다.

“들라 하라.”

양옆으로 열린 문 사이로 청사가 보였다. 옥황궁으로 입궐할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차림새가 간소했다. 머리에 쓰던 무거운 관도 없고, 금사 은사가 화려하게 수놓인 옷도 아니었다. 소매가 넓은 장삼 같은 포제였다. 긴 머리도 무명끈으로 가볍게 묶어 놓은 것이 이대로 다시 잠자리에 들러 간다 해도 믿을 정도였다. 천상제일미녀 자리는 서왕모가 차지하고 있으니, 천상제일미남 자리는 청사로 공식 인정받아야 하지 않을까. 허술한 옷차림으로도 이렇게 빛이 나니, 누구 아들인지 참 잘 키우긴 했다며, 조아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이놈 입궐하여 일할 시간에 왜 집에 있느냐?”

조아반이 허리끈까지 단단하게 여민 후에야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청사가 그의 앞에 거리를 두고 앉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늦게 일을 시작해도 되는 날입니다.”

“언제부터 옥황궁에서의 일이 그렇게 탄력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거지.”

“거기서 일하는 천인들이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상제께서 한 번씩은 늦게 입궐하거나 일찍 퇴궐해도 된다고 허하셨죠.”

“나 다닐 때는 부려 먹기만 하더니, 나쁜 늙은이.”

“그 말 상제님께 고스란히 전해 드리죠.”

“농담도 못 하냐, 이 녀석아.”

귀염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며 투덜거리는 조아반이었다. 느긋하게 입궐한다고 제 아비를 놀리려고 여기까지 행차한 것은 아닐 터. 조아반은 청사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물었다.

“갑자기 어언 일로 찾아왔느냐?”

“거, 너무 서운하게 말씀하신다. 아들이 일 없으면 찾아오지도 못하나요.”

“일 없으면 날 찾지도 않는 놈이 허세는.”

“아, 허세 아닙니다. 얘기 좀 하려고 왔어요.”

“일이나 하러 가거라. 즉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여유부리는 인상 주면 나중에 곤란해진다고.”

“퇴궐하고 오면 주무시고 계시니까 그러죠.”

“너도 늙어 봐. 밤잠은 늘고 새벽잠은 줄어.”

“흐음,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요.”

“어디서 이렇게 속을 살살 긁어대는 성격이 됐나 몰라.”

예전엔 조금 더 감정적이고 예민해서는 좀만 건드려도 표정을 일순 바꾸고 으르렁거리더만, 이제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상대를 떠볼 줄도 알지 않나. 땅에 내려갔다 오더니만 꽤 많은 것이 바뀐 아들이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 조아반이었다. 하긴, 금방 싫증을 내고 변덕을 부렸던 아들이 하늘로 돌아오자마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소경으로서 갖춰야 할 수업을 모두 받겠노라 선언할 때만 해도 솔직히 믿지 않았더랬다. 저러다 금방 하기 싫다고 때려치우고 도망칠 줄 알았다. 근 육십 년 동안 정해진 대로 수업을 받고 규칙적인 일과를 하며 오로지 소경 일을 인계받기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한 결과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다. 이게 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니. 인간들의 낭만적인 면모를 빼닮아서 좋아해야 할지, 흠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만.

“그래서 왜 왔냐니까.”

입궐을 앞둔 아들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해서 뭣하나 싶어 바로 본론을 꺼냈다. 청사 역시 아비와의 아침 문안 인사는 짤막하게 끝내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보주 말입니다.”

보주. 용이 가지면 다른 말로 여의주로 일컬어지는 구슬. 천 살이 넘어야 용의 턱 밑에서 튀어나온다는 여의주는 현재 옥황의 나라에서 조아반만이 생성한 상태이다. 그 귀한 것을 아들인 청사에게 물려준 것으로 모두에게 알려져 있기도 했다.

“진명의 보주 말이냐?”

자신이 준 여의주의 본래 이름을 말하자 청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담 네 첫째형이 바닷속에서 만들어 낸 영면의 보주 말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 가족 중에 여의주라곤 그 두 개뿐인데 무슨 보주를 말하는 거냐.”

“혜안의 보주입니다.”

혜안의 보주라면 ‘땅의 주인’이 가진, 사방정토를 느낄 수 있는 보주 아니던가. 실제로 본 적은 없고, 그런 것이 존재한다더라, 라는 풍문만 떠돌아다니는 도깨비 같은 구슬이었다. 하계와 관련된 보주라서 천계와 관련된 조아반은 그 보주를 딱히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 무관심했던 물건을 아들이 입에 담았다.

“갑자기 그건 왜?”

조아반의 물음에 눈을 휘둥그레 뜰 만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 혜안의 보주가 아무래도 고도에게 옮겨 온 것 같습니다.”

설마하니 땅의 주인이 귀한 보주를 인간에게 주었으려고. 아니지, 고도를 제 대리자로 임명했으니 그 정도는 줄 수 있으려나. 조아반은 청사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 보주란 것을 직접 보았느냐?”

“아뇨, 그건 아닙니다만.”

“그런데 그런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어?”

“음, 그것이.”

청사는 퍽 곤란한 얼굴로 대답을 망설였다. 볼가를 긁적이면서 홍조를 띠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청사가 뱉은 발언은 파격적이었다.

“고도와 아무리 밤을 함께 보내도 그의 가장 깊은 곳까지는 저의 기운으로 물들일 수가 없습니다. 천룡의 힘에 맞설 수 있는 것이 그 보주의 힘이라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아서요.”

아들이 집에 돌아와 제 사람과 무슨 짓을 했는지를 상세히 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몸을 섞어도, 그러니까 ‘시도 때도 없이’ 정사를 해도 고도를 지탱하고 있는 땅의 기운을 몰아낼 수 없다니.

조아반은 어디 아비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다고 떽기, 혼을 내야 할지, 아니면 고작 도사 주제에 천룡의 기운에 잠식되지 않는다니 고도의 단전에 정말로 땅의 주인이 준 보주가 있는지를 살피자고 진지해져야 할지, 아들놈이 기력이 약해서 도사 하나 장악하지 못하는 듯하니 더 강력하게 밤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마, 라고 맞장구를 쳐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결국 조아반이 선택한 행동은 이마를 짚는 것이었으니. 소경이 되기 전에 혼인을 하고 싶다 하여 바람대로 해주었더니, 이젠 제 사람을 천상에 온전히 속하지 못하게 한 것만 같아서 불안해하는 아들은 조아반 눈엔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어렵사리 문제 하나를 해결해 내어도, 다른 하나는 해결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게 소경의 소임을 다하려면 먼 것처럼 보였다.

이러구러 꺼낸 얘긴 아닐 터. 고민하다가 달려와서 이렇게 얘길 하는 걸 보면 진지하게 생각하는 문제 같으니 조아반도 허투루 대하진 않기로 했다.

“내가 네게 준 보주를 써서 땅의 기운을 살펴보지 그랬느냐.”

“당연히 해봤죠. 제가 설마 그걸 놓쳤으려고요.”

“그런데도 안 되더냐?”

“예. 고도의 단전 이상으로는 파고들 수가 없었습니다.”

“흐음, 그야 내 힘보단 땅의 주인의 힘이 더 강하니, 그게 정말 보주라면 파고들 수가 없겠다만. 도사는 제 몸에 보주가 있는 걸 모르더냐.”

“네, 전혀 모르는 눈치입니다. 제가 따로 말을 해주지도 않았고요.”

“말을 해서 함께 논의를 해보지 그러냐.”

“걱정만 키울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아직 보주인지도 확실하지가 않고요.”

“그럼 그게 보주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방법은 있고?”

“글쎄요.”

“허, 그런 대답이 어디 있느냐.”

“확실하지가 않아서요.”

확실하지만 않을 뿐, 그래도 방법이 없지 않은 모양이다. 조아반은 대답을 채근했다.

“말해 봐라.”

청사는 이 대답이 사심으로 비칠까 봐 우려하면서 조심스럽게 꺼내 보았다.

“한 번 더 제 아이를 잉태하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도가 들었다면 마시던 물도 뿜을 소리였다. 가끔 농처럼 둘째 갖자고 살살 웃으며 다가오는 청사를 밀어내며 한숨을 내쉬던 고도였다. 지금은 예그리나 하나를 돌보는 것도 벅찰뿐더러, 청사가 소경의 일에 슬슬 본격적으로 투입되면서 ‘지상차사’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도 검토해 봐야 하는데, 무슨 여유가 있다고 애를 더 낳느냐고 반박하면 청사도 할 말이 없지 않겠나. 물론, 둘째를 가지면 청사야 좋겠다만, 그 사심을 충족하고자 고도의 몸에 보주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로 이용하는 것은 아니 될 말이었다. 사심을 누른 상태에서 생각해 보아도 이 방법 외에 없기에 꺼낸 말이었다.

“예그리나를 잉태했을 때, 고도 주변에 이상한 일이 많았습니다. 땅이 보낸 전령들이 밝은 빛을 내뿜으며 고도 주변에서 떨어지질 않을뿐더러, 나중엔 고도의 몸에서 꺼낸 알이 한동안 전령들과 같은 색으로 빛이 나서 의아했었거든요. 그땐 처음 알을 돌보던 때라 아무 지식도 없고 준비된 것도 없어서 그러려니 하고 넘겼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예그리나에게 날개가 달린 것도 그렇고, 전령들이 고도 곁에 머물던 것도 그렇고, 보주가 고도의 몸속으로 옮겨진 것이 맞지 싶습니다.”

그렇다면 고도의 몸속에서 보주를 잡아 빼내면 그만이지. 그렇게 간단히 해결할 문제는 아니었다. 인간의 몸으로 땅의 기운을 품고, 그렇게 품었던 기운을 잃는 일련의 작용을 쉽게 감당하긴 어려울 것이다. 일단 고도가 보주를 몸 안에 지니고 있는 것이 맞는지, 맞다면 어떤 방법을 강구할 수 있는지를 순차적으로 준비해야 한단 소리였다. 땅의 주인이 ‘대리자’라고 고도를 지목했을 정도면 보주를 넘겨줬을 가능성이 크다만, 다른 이유에서 청사가 고도를 장악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조아반은 흐음, 하고 목 너머를 울리며 고심한 끝에 입을 뗐다.

“둘째를 가지면 보주가 있는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느냐.”

청사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이려다 붉어진 얼굴을 큼큼하는 헛기침으로 달랬다.

“알을 오랫동안 속에 품고 있는데 단전에 머물고 있는 보주의 기운이 완전히 묻지 않을 방법은 없을 테니까요.”

“그럼 굳이 알이 아니라 다른 걸 품게 하는 방법도 있잖아.”

조아반이 대체 얼마나 민망한 말을 했는지, 스스로 알긴 할까. 청사는 설마하고 기겁한 눈으로 제 아비를 쳐다봤지만, ‘알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 얼굴로 그냥 막연히 던진 말에 불과해 보였다. 이런 조언에서 음란한 생각만 한 청사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마음 같아서야 고도의 몸속에 하루고 이틀이고 들락날락거리고 싶지만, 고도가 그런 일을 허락할 리 만무했다.

아, 원 없이 한 일주일만 시도 때도 없이 몸을 섞다 보면 보주의 정체를 알 수 있을 텐데. 이 방법은 도저히 사심을 빼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였다. 조아반이 아는 날엔 망측한 시선을 피할 수는 없을 듯했다. 청사는 속마음을 감추며 큼큼, 목 뒤를 울리고 표정을 바로잡았다.

“저는 고도가 알을 품으면 보주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실하게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있다면 아버지의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보주의 정체를 알자고 아이를 또 하나 낳는 것도 너무한 일이었으니, 건너는 돌다리를 여러 번 두드리려 함이라. 청사의 의도를 안 조아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내가 알아보마. 그 전에 너는 오늘 해야 할 일이나 끝내라.”

조아반이 청사의 입궐 시진을 상기시켰다. 상제가 하루 일과를 시작함을 알리는 누런 봉황이 옥황궁 꼭대기에서 날개를 펄럭였다.

*

청사가 일하는 일터는 천상에서 가장 화려한 곳이었다. 천상의 존재들 모두가 아는 곳. 보장된 직업과 결코 금은보화가 부족할 일이 없는 직업. 그렇기에 가장 많은 일을 처리하는 이. 바로 옥황궁에서 일하며 청사처럼 공무를 보는 이들이었다.

옥황상제의 궁궐은 규모도 장대하고 장식도 화려하여 천하제일의 색과 음이 흘러넘치는 곳이었다. 상제의 궁궐 서쪽으로는 신선들이 사는 청호림이 붙어 있어서, 그곳에서 음악을 하는 신선들 소리가 하루밤낮을 쉬지 않고 흘러들었다. 동쪽으로는 해와 달을 번갈아 굴리는 삼족오의 날갯짓이 있으니, 아침마다 불덩이를 삼키고, 밤마다 달빛을 아롱지는 세 발 달린 까마귀를 따라서 구름과 빛이 창연하고 고고하게 세상을 비추었다. 남쪽으로는 도솔천이 흐르고 흘러 몇 리에 걸쳐 만주사화 벌판이 수를 놓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궁궐보다 더 높은 하늘, 즉 청사의 둘째 형이 거대한 몸을 뉘고 있는 은하수와 밤하늘에 닿을 수 있는 용포로 뒤덮인 계단이 놓여 있었다.

그 모든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옥황상제의 궁궐에서 청사가 걸어 나왔다. 여덟 개의 궁궐 건물을 지나 남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지나치는 건물마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길을 안내하고, 감색 옷을 입은 아이들이 그 여인들을 시중들며 큰절을 하고 있으니, 금관소경대좌라고 불리는 청사가 얼마나 고매한지를 몸소 모든 이들이 보여 준다고 할 만했다.

청사는 상제를 알현할 때 입는 정식 의복을 갖춘 상태였다. 은하수와 묵룡이 수놓은 금색 도포를 입었는데, 호박으로 장식한 허리띠엔 사자와 기린이 붉게 수놓여 있었다. 금사와 은사로 엮은 신을 신고, 머리는 청색 비단으로 단정하게 묶어 놓았다. 팔각으로 재단된 면류관을 닮은 모자를 쓰고 있어서 관의 앞과 뒤로 길게 엮은 벽옥들이 햇볕에 반짝이고, 서로 부딪으며 맑은 소리를 울렸다.

청사는 가마를 대령하는 천인들을 뒤로 물렸다. 대신 제 발로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계단에 느긋하게 앉아 있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색 저고리에 청색 치마를 깨끼옷으로 입은 누이 ‘서진’이었다.

“퇴궐 시간은 칼같이 지키는구나.”

빙글빙글 웃는 모습이 어째 청사를 놀리는 것만 같았다. 청사는 옥황궁 계단에서 이게 뭐람, 하는 시선으로 누이를 흘기다가 멈추었던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누이는 일이 다 끝났나 보지, 옷도 챙겨 입고 나와서 동생 기다릴 시간이 있네.”

“유능하게 모든 걸 마무리 지은 여유야.”

“뺀질거리는 건 아니고?”

“말하는 것도 어쩜 이리 얄밉니. 내가 일 못하는 너랑 똑같은 이유로 시간을 느긋하게 쓰는 줄 아니.”

“아직 배우는 단계라 일이 많지 않은 동생이랑 선녀부대 군장직만 삼백 년째인 누이 입에서 먼저 비교한단 소리가 나오니까 기가 차서 그렇지.”

“그럼 남아서 일을 더 찾아서 해보려는 모습이라도 보이지, 성의 없게 바로 나온 건 맞잖아.”

“일을 더 달라고 해도 안 주던데. 금경과 중경이 일찍 퇴궐할 수 있을 때 나가래. 나중엔 일찍 집에 가고 싶어도 일이 많아서 밤새야 한다고.”

“흠. 나 같으면 숙제라도 내줄 텐데, 너흰 그런 것도 없니?”

“누이 지금 모습 꼬장꼬장한 노친네처럼 보여.”

“어머, 얘는 지금 시집도 안 간 처자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그렇게 신입을 부려 먹고 싶으면 새로 부대에 들어온 옥황천녀들이나 괴롭힐 것이지, 하여튼 선녀들은 예쁘다고 금이야 옥이야 아껴 주면서 제 동생은 어디 흙밭에서 굴러도 상관하지 않을 서진이었다. 그녀가 옥황상제의 전속 부대에 퍼붓는 특혜와 편애를 일일이 나열하자면 끝도 없는지라, 입씨름은 그만두기로 했다. 청사가 돌계단을 내려왔다. 서진은 청사의 옆에서 떨어져 걸었다. 낯간지럽게 같이 집에 가자고 기다린 건 아닐 터. 청사가 서진을 돌아보며 먼저 물었다.

“그보다 나는 왜 기다리고 있었어?”

서진은 말간 하늘 같은 눈을 깜빡이다가 씨익 웃었다.

“얘, 너 둘째 가질까 고민한다면서.”

우뚝 멈추어 선 청사에게 서진이 냉큼 말을 덧붙였다.

“아버지가 알려 주시더라. ‘혜안의 보주’와 관련된 일이라고, 우리 식구들이랑 다 논의해 보고 싶으시다는데, 나만 이상한 냄새를 맡았나 봐. 너 보주 핑계 대고 다른 음험한 생각하는 거 아니니?”

뜨끔한 청사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졌다. 서진이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어머머머’하고 호들갑을 부리는데 눈은 현월처럼 접어 빙글빙글 웃어대기 바빴다.

“아니거든!”

“그렇게 질색하는 반응을 보니 더 의심되잖아.”

“누이가 시답잖은 소리 해서 그렇잖아!”

“뭘 팔짝 뛰고 그래. 아니면 아닌 거지. 너랑 그 도사가 워낙 금슬이 좋아서 물어본 거다, 뭐.”

“보주라는 중요한 일을 두고 내가 사리사욕이나 채우는 음험한 구렁이 같이 말하니까 그러잖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지.”

“아, 아니라니까.”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누이!”

“꿩 먹고 알 먹고…….”

청사의 팔꿈치가 누이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새초롬한 눈으로 누이를 노려보는 청사를 보고 아무것도 모르는 숙맥 같은 놈이 대체 고도한텐 뭔 짓을 할까 싶어서 속으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나중에 날 잡고 고도와 청사와 함께 술이라도 나눠 마셨으면 했다. 그래도 부부지연으로 맺어진 사이 아닌가. 청사가 고도만 보면 쩔쩔매는 모습이 앙살스럽고 웃겼다. 고도가 얼마나 좋으면 얘기만 나와도 얼굴을 붉혀대나 그래. 둘이 평소에 뭐하고 지내느냐고 꼭 물어보겠다 다짐하는 서진이었다. 남의 이야기에 웬 오지랖이 그리 많냐고 타박한다면 서진도 할 말이 없다만, 그 정도로 청사와 고도가 서로밖에 모르니 괜히 골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튼 서진은 홧홧한 얼굴을 어쩌지 못하고 씨근덕거리는 동생 골려먹기는 그만두기로 하곤 이곳에 온 이유를 말했다.

“보주라는 거, 우리끼리 자체적으로 알아보려고 애써 봤자 소용없다는 거 알려 주려 왔어.”

그녀는 아직도 볼이 빨간 동생에게 덧붙여 얘기해 주었다.

“내 부대에 속한 선녀들은 주기적으로 땅에 내려갔다 오곤 해. 간혹 흑심 품은 나무꾼이 선녀옷을 숨겨서 선녀가 행방불명되는 일이 있긴 하다만, 그런 일은 우리 선에서 결코 용납하지 않으니 자체적으로 샅샅이 조사하느라고 산속 사정이나 인간들 상황에 훤해질 수밖에 없지.”

“선녀들 목욕하는 것과 보주가 관계가 있어?”

“결론만 말하자면, 선녀들이 요즘 목욕하러 하계로 내려가질 않아.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합일하는 날에 목욕을 하면 더 강해져서 하계의 폭포를 이용했지만, 이젠 땅의 기운을 담는 폭포가 없어졌거든. 그게 무슨 뜻이겠어?”

눈치 빠른 청사가 그 질문에 곧장 대답했다.

“땅을 신성하게 만들던 보주가 사라졌구나.”

“맞아. 더불어서 땅의 힘으로 먹고 살던 성수들도 모두 천계로 소환되었어. 청호림 문도 닫혔고, 이무기들도 몸을 오래 묻고 있는다 해서 영험한 힘이 쌓이지 않게 되었어. 요괴의 힘은 약해지고, 도깨비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있다더라.”

좋은 일 같지 않았다. 청사는 걱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보주를 고도가 갖고 있고, 고도가 더 이상 땅에 있지 않아서 생기는 일인 거야? 고도 책임인 걸까?”

“내 생각엔 땅의 주인이 자신의 힘을 땅에 더는 둘 수 없어서 고도와 함께 천상으로 올려 보낸 거 같은데. 옥황상제께서 직접 관리하실 수 있게.”

“왜 그랬을까?”

“보주가 있기 전부터 하계는 인간들이 점령하기 시작했지. 그 어떤 종족들보다 강한 힘과 지력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어. 덕분에 요즘 태어나는 아이들은 요괴나 성수, 도깨비를 본 적도 없고 옛날이야기처럼 치부하고 있다더라고. 그만큼 힘의 균형이 인간에게 기울어 버린 거지.”

“그래서 인간들이 보주를 발견하여 쟁탈을 벌일까 봐 고도를 대리자로 지정해서 안전하게 하려 한 걸까.”

“그럴 가능성이 크지만, 우리들이 땅의 주인의 큰 뜻을 헤아리긴 어렵지. 그래서 우리끼리 자체적으로 보주라는 걸 알아보지 말자고 말하는 거야. 이 건은 옥황상제께 정식으로 고하고, 그분께서 고도를 직접 살피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보주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둘째를 갖는 것보다야 상제가 더 현명한 진단 방법을 내려줄 것도 같긴 하다. 아니, 확실히 말하면 그쪽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보주가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있으면 어떻게 처리할지를 상제로부터 지시받아야 하지 않겠나. 그걸 뻔히 아는 청사였지만, 그러겠노라며 고개를 선뜻 끄덕일 수가 없었다. 청사의 걱정은 다른 데 있었다.

“상제께서 고도를 괴롭히면 어떡하지?”

누가 들었으면 사랑에 맛이 간 남자가 어떤 모습인지를, 청사라는 표본으로 일러 주었을 것이다. 소경이 목숨 걸고 모셔야 하는 상제를 이렇게 얘기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입을 벌리고 경악으로 굳어 버린 서진과 달리, 청사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고도 입장에서도 얼마나 부담스럽겠어. 인간의 몸으로 옥황상제를 알현한다니, 그것만으로 속이 메스꺼울 거라고.”

그래서 그런 고민의 결과물이 둘째를 갖자! 였단 말이니.

서진은 대책이 안 서는 표정으로 청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더 뭐라고 해본들, 청사 귀엔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 도사의 의견을 먼저 물어야겠네. 그렇지?”

그가 상제를 알현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다면, 보주 일은 상제의 명으로 진행하면 될 것이고, 거리낄 것이 있다면 다시 용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 될 일이다. 단순명쾌한 대답에도 청사는 찌푸린 미간을 펼 줄 몰랐다. 고도에게 무언가 결정을 맡기는 것마저도 부담을 지우는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아서리라.

“알았어, 말은 꺼내 볼게.”

“꼭 말해. 약속.”

“알았다니까.”

툴툴거리면서 뒤돌아선 청사는 생각이 깊어질수록 불안이 가중되었다. 얼굴에도 금세 불안하고 초조한 빛이 머물더니 더는 안 되겠는지 누이와 나란히 걷던 것도 잊고 저 혼자 마구간으로 뛰어갔다. 마구간엔 청사가 타고 온 검은색 종마가 가볍게 꼬리를 치고 있었다. 청사는 흑마 위에 훌쩍 올라탔다. 넓은 소맷자락과 도포자락이 불편할 법도 하건만, 익숙하게 말을 타고 상제의 궁을 뒤로한 채 집을 향했다. 문을 열어 주는 가솔들과 시종들에게 간단한 인사만으로 화답한 청사가 한눈팔지 않고 향한 곳은 고도가 머무는 별관이었다.

*

시종들이 열어 준 장지문을 박차고 들어간 청사가 고도를 외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격자무늬 나무창틀 앞에 앉은 고도는 상 위에 두 팔을 포갠 채 그 위에 한쪽 볼을 올리고 색색, 잠이 들어 있었다. 격자무늬로 생긴 그림자가 마당에 심어 놓은 나무 이파리의 그림자와 어우러져 고도의 얼굴 위를 간질였다.

일산이라도 들고 있으면 어룽거리는 저 햇살을 가려 주건만. 어이해 이토록 빛을 모으는 저 얼굴이 애틋하고 해사할 수 있을까.

청사는 종들이 닫아 준 문을 뒤로한 채 조심스럽게 고도 곁으로 다가왔다. 고도가 엎드려서 자고 있는 상 앞에 앉자, 면류관 벽옥들이 맑은 구슬 굴러가는 소리로 울어댔다.

청사는 모자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고는 그 손으로 조심스럽게 고도를 쓰다듬었다. 햇볕이 닿은 목덜미가 따끈따끈했다. 버석한 햇살 냄새와 함께 따뜻하게 익어 있는 촉감이 사랑스러운 나머지 청사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볕 쬐는 고양이 같다. 어떻게 사람에게서 이렇게 포근하고 따뜻한 냄새가 날 수 있는 걸까. 청사는 고도의 귀 뒤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게 얼마만의 고도 체향인지.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음이 나왔다.

“음…….”

귓가를 간질이는 느낌에 고도가 불편한 듯 고개를 뒤치덕거렸다.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도 따라붙는 간지러움에 고도가 햇살이 닿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멍한 시야에 청사가 잡혔다. 금색 도포를 입고 있는 청사는 은하수를 직접 끌어다가 한 올 한 올 옷에 새긴 것처럼 아름다웠다. 햇살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반짝거리며 빛나는 것이 세로로 길쭉한 푸른 눈동자도 선명하게 보여서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정말로 청사가 맞나, 신기루는 아닌가 싶어서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에 청사는 입술이 바싹 말라 갔다. 오랜만에 본 내 님이 아직도 이렇게 곱고 예쁘고 귀여워서 어찌해야 하나, 두 손을 꾸물거리며 고도를 끌어안지도, 잠을 깨라고 미간을 문지르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는 형상 아닌가.

“이 녀석, 왔으면 소리라도 낼 것이지 음흉하게 남이 자는 얼굴이나 들여다보고 있느냐.”

고도의 일침에도 청사는 배시시 웃었다. 위엄 있는 의관으로 상제의 궐에서 소경의 업무를 볼 때와는 지극히 다른 얼굴이었다. 소경의 업무를 보좌하는 이들이 혹여나 실수라도 하지 않을지, 청사의 기분을 언짢게 하진 않을지, 바싹 긴장하여 굳은 얼굴로 눈치를 살폈건만, 지금의 청사를 보면 억울해서라도 맥이 탁 풀리지 않을까. 그 정도로 전연 다른 얼굴을 한 청사가 고도의 이마에 입술을 묻었다. 쪽, 하고 터지는 입술 사이의 소리가 달콤했다. 고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일 잘했느냐, 내 대롱이.”

“우리 고도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아직 해도 기울지 않았는데 벌써 집에 온 건 뭘까나.”

“아버지께서 하시던 일을 인계받는 기간이라 그렇게 바쁘진 않아.”

“농땡이 피우는 건 아니고?”

“아니거든.”

“어떻게 믿을꼬.”

“나처럼 젊은데 유능한 용은 유례가 없다고 그랬어!”

“아하, 그렇게도 내 칭찬이 고프다면 예쁘다고 이렇게 쓰다듬어 줘야겠네.”

“에헴, 대단한 용을 만지는 너도 복 받은 거다. 무슨 뜻인지 알지, 고도?”

“그럼그럼.”

천계에 오기 전의 고도였다면 “무슨 헛소리를 이리도 길게 하는 거냐, 망할 대롱이”라면서 손바닥으로 이마를 찰싹 때렸을 텐데. 요즘엔 두 눈동자가 달콤한 꿀에 젖은 것 같은 모습으로 다정도 병인 양 바라봐 주었다. 덕분에 청사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식힐 겨를이 없었다. 고도만 보면 절로 두 볼에 홍조가 떠오르고, 고도의 다정한 말과 행동에 바르르, 손끝이 떨릴 정도로 기분이 좋으니, 이게 병이라면 필시 중증이렷다.

고소한 볕 냄새가 나는 고도의 머리카락에 고개를 묻고 웃던 청사가 슬그머니 상을 옆으로 치웠다. 흰색의 무명 의복을 입은 고도의 옷고름에 손을 가져갔다. 고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지만, 청사를 밀어내거나 거부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럴 기회가 없던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청사는 옷고름을 이대로 풀어서 옷을 젖혀야 할지, 그렇게 막무가내인 분위기를 잡을 바에야 함께 온양행궁으로 마실을 나갔다 돌아와서 뜨거운 분위기를 이어 갈지를 고민하다 말고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오늘은 널 안아도 되겠느냐.”

그 말에 고도가 눈을 도륵도륵 굴리다 말고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들으면 소박맞은 새색신 줄 알겠다. 이게 대체 뭐라고, 아하하.”

“웃음이 나와? 난 진짜 죽을 맛이거든. 몇 주나 너를 제대로 안아 보질 못했잖아.”

“네놈이 바쁜 걸 어쩌겠나.”

“내가 바쁜 탓만은 아니잖아.”

“하긴, 저녁에 붙어 있으려 해도 쉽지 않긴 해.”

“쉬려고 하면 통 도와주질 않지.”

‘누가’ 도와주질 않는지는 묻지 않아도 빤했다. 고도는 씩 웃으면서 그 범인을 입에 담았다.

“도 선생도 우리 아들만큼 밤잠이 없진 않을 거다.”

“도 선생?”

“세간에선 도둑이라고 부르고, 나는 밤의 영웅이라 하는 담 넘기의 귀재가 있느니라.”

“도둑과 예그리나를 비교하다니, 너도 대단하다.”

“우리 아들이 낮에는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고, 밤에는 나와 놀겠다고 날개를 통 접질 않으니 그러하지.”

“으음. 우리 아들이라…….”

그렇게 친근하게 우리 아들, 이라고 부르기엔 아직까지 영 어색하고 낯간지러운 청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청사가 성룡이 된 지 아직 백 년도 채 되지 않았다. 한 마리의 어엿한 용으로서 자리를 잡기도 전에 후사를 도모하는 아들을 낳았으니, 어찌 익숙해질 수 있을까. 어린아이가 어린아이를 낳은 것과 같은, 때 이른 부자관계였다. 청사 눈엔 제 아들이 사랑스럽고 귀엽다기보다는 저게 정말 자신과 한 핏줄이라니, 라는 어색하고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마음이 앞서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고도는 혀를 차면서 청사의 콧방울을 손끝으로 때렸다. 지금처럼 말이다.

“아야.”

얻어맞은 콧방울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고도는 어깨까지 풀어헤쳐진 옷매무새를 정리하지도 않고 느긋하게 말을 했다.

“예뻐하란 말은 하지 않겠다만, 밀어내진 말라고 내 누누이 일렀을 텐데.”

“언제 밀어냈다고 그래.”

“세상 천지에 제 자식을 불편해하는 아비가 어디 있더냐? 그것도 아비인 네놈이 얼른 낳고 싶어서 무리하여 세상 빛을 봤는데.”

“알아. 누가 모른다나.”

“그런데 왜 그렇게 부담스러워하느냐. 말썽을 피우지도 않고, 얌전하고 의젓한 아이인데, 뭐가 네 마음에 들지 않는 게냐?”

“그런 거 아냐, 그냥…….”

“그냥?”

“아, 음, 내 욕심 때문에 철저한 계획도 잡지 못하고 낳았잖아. 그게 신경 쓰여.”

“죄책감이란 말이더냐.”

“몰라. 어쨌든 내가 누굴 보살피는 게 어설픈 걸 어떡해. 난 고도, 너 하나만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다른 곳엔 눈 돌릴 틈이 없는걸.”

“그 얘길 들으면 네 아들이 퍽 섭섭해하겠어.”

“섭섭하긴. 원래 용은 태어나서 부모에게 의지를 하지 않는 존재다. 예그리나가 특이한 거야. 그 녀석은 왜 그렇게 너를 좋아하고 따를까? 용의 자식 같지 않고, 인간의 자식 같아.”

“인간과 용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 그런 거 아닐까.”

“그건 아니야. 내 어미 역시 이름도 얼굴도 모르던 인간이었는데 나는…….”

청사는 모친을 떠올리다 말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늘에 제를 지내던 풍습에 따라서 인간이 바친 재물 중 하나였다는 사실에 고도를 살피게 된 것이다. 고도가 세상만사 무심하다고는 해도 천륜을 중시하는 인간이었다. 어머니를 재물로 받아들인 씨받이이자, 알을 낳느라 양분을 공급한 뒤에 명이 다해 죽은 취급을 받았다고 설명해도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받아들일 사람은 아니었다. 용족이 잉태되는 방법과 용의 사고방식에 거부감이 들지 않으면 다행이었으니. 청사의 걱정과 달리 고도의 표정엔 큰 변화가 없었다. 청사를 제 반려로 받아들이면서 많은 부분에서 이해와 관용을 베푸는 미덕을 몸소 실천해 보인 결과였다.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솔직할 필요는 없다고 자기반성을 하는 청사였다. 고도가 걱정하거나 신경 쓸 바에야 아무 말도 하지 말자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마음을 숨기거나 고도를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 결과 상황이 개선되든 악화되든 재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게 되었다. 그때마다 너무 솔직한 청사를 보고 고도는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당황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고도와 오해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 청사의 마음이 예뻐서 안쓰럽게 여기기도 했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신경 쓰면서 애를 쓴 덕분에 고도와 청사는 이제 서로의 표정이나 눈빛만 봐도 생각하는 바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고도는 두 손으로 청사의 볼을 감쌌다. 갓 찧은 떡처럼 따끈따끈하고 보드라웠다. 손바닥으로 살갗을 음미하다가 입술에 쪽, 뽀뽀를 해주었다. 눈가까지 붉어져서 새치름한 시선을 내리는 청사가 어찌나 예뻐 보이던가. 고도는 입술에 이어 손끝으로 괴롭혔던 콧방울과 붉어진 눈가까지 입술로 어루만져 주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던 청사도 곧 고도의 애정 어린 행동에 감화되었다. 고도의 흐트러진 옷자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는 몸을 바싹 붙였다. 고도가 입고 있는 무명 학창의가 그리 얇은 편도 아니건만, 맞닿은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서로에게 들릴 정도였다.

풀어 내린 옷고름 안쪽으로 파고드는 청사의 손길을 느끼면서, 고도 역시 청사의 옷고름을 풀었다. 동정깃에 감싸여 있던 단정하고 곧은 목선에 고도가 입술을 붙였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쪽, 하고 입술 사이로 힘을 주어 문대니 뽀얀 살갗 위로 붉은 자국이 덧입혀지는지라. 그 따끔한 압박에 목울대를 울린 청사는 두 눈에 정염이 가득해졌다.

“하아.”

청사가 장탄식을 하며 고도의 상의를 완전히 뒤로 젖혔다. 달아오르는 열기에 고도는 부끄러움과 욕망을 동시에 느꼈다. 환한 햇살 아래서 몸을 드러내기 꺼려지면서도, 오랜만에 보는 청사의 색기 어린 얼굴엔 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혼례를 치른 지 몇 달 지나지도 않았다. 천계에 와서 혼롓날에 처음으로 육신의 합일을 이루었다. 청사의 친부와 누이가 워낙 관심이 많았던지라, 첫날밤을 치르는 신방처럼 사방에 꽃과 향을 물들여 놓질 않았던가. 심지어 청사의 아비께서 귀하게 보관했던 비단으로 침구를 만들어 선물을 보냈기에 이 은덕을 갚으려면 두 번째 알이라도 낳아야 하나, 하고 진심으로 청사와 머리를 맞대어 고민을 하기도 했다.

아직은 첫째를 의젓하게 키우는 데만도 신경이 쓰이고, 초보 부모답게 익숙하지 않은 것들투성이라, 둘째는 보류를 했다. 그러나 청사가 금관소경보좌에 있는 이상, 후대를 무리 없이 지키기 위해서는 예그리나를 보위할 수 있는 형제나 예그리나가 믿고 따를 혈족을 만들어 주는 게 좋기도 하다.

천계에는 용족의 개체수가 많지 않다. 그러니 청사나 예그리나가 안전하게 믿고 의지할 혈족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 무엇보다 선녀군장인 서진이 혼인에 생각이 없고, 후사를 낳을 생각 없이 일평생을 선녀들과 지내고 싶어 하는 생각이 많은 만큼, 대를 잇는 일은 청사와 고도가 고심해야 할 문제였다.

용의 잉태 방식은 인간처럼 자식을 열 달 배불리 보듬지 못하는 것이 장점이자 곧 단점이다. 고도는 기일을 잡아 청사의 기운을 몸에 받아들이는 것이 그렇게 거북스럽지도 않았다. 청사가 아버지로부터 일을 인계받는 요즘이 그나마 덜 바쁠 시기이고, 보좌에 올라서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해야 할 시기가 온다면 자식이고 뭐고 신경 쓰기 어렵지 않을까. 차라리 지금 둘째를 잉태하는 게 청사가 보좌에 자리 잡고 일을 진행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도 같은데.

고도는 손바닥으로 청사의 가슴을 밀어냈다. 응? 하는 사이에 청사는 뒤로 천천히 넘어가 등을 바닥에 붙이고 누운 자세가 되었다. 너풀거리는 금색 옷과 그 위를 검게 물들인 청사의 머리카락이 비단 한 폭을 끊어 내어 바닥에 펼친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을 음미하듯이 고도는 손끝으로 청사의 가슴팍을 어루만지면서 배 위에 올라앉았다.

“우, 우앗, 고도?”

맨살을 더듬던 손끝이 단단한 복부를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손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힘줄이 도드라지는 것이 어지간히도 긴장을 한 듯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올려다보는 청사의 얼굴이 새빨갰다. 고도가 적극적으로 먼저 만져 주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손길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하아, 읏.”

풀어헤쳐진 옷 속을 더듬어 들어온 손길이 속곳 위를 문질렀다. 오른 무릎을 세우며 허리에 힘을 주는 청사의 모습을 보면서 고도 역시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속곳 위를 문지르는 손바닥에도 열기가 고였다. 옷 속에서 부풀어 가는 형태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단단하게 심지가 세워지는 물건에 고도의 기분도 묘해졌다. 머리와 옷이 흐트러진 채 얼굴을 붉히며 신음하는 청사가 왜 이렇게 예뻐 보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대롱아.”

속곳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가던 청사가 허리를 뒤틀었다.

“하윽, 고, 고도, 오늘따라 왜…….”

“내 대롱이, 왜 이렇게 예쁘지.”

“뭐, 뭐?”

“이렇게 예쁘니까 널 닮은 애들을 보고 싶어서 욕심이 생기나 싶기도 하고.”

“날 닮은 애들이라니.”

고도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하늘을 담은 듯한 이 우물 같은 눈을 가진 아이도 보고 싶고.”

눈가를 동그랗게 덧그리던 손길이 귓가에 흘러내린 긴 머리를 넘겨 주었다.

“은하수가 가득한 하늘을 한 폭 끊어낸 듯한 이 머리 또한 보고 싶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손이 부드러운 턱 선과 목선을 지나 가슴팍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건장한 몸을 가진 아이가 네 곁을 지켜 줬으면 하는 마음도 생기거든. 아니면 어여쁘게 태어나 네 누이 밑에서 가르침을 받아도 좋지.”

담백하게 만지는 손길이 왜 이토록 야살스러운가. 이 손길에 욕망이 부채질당했다고 말하면 또 밝힌다고 한소리 듣겠다만, 이런 손길에 아무 반응이 없다면 그게 더 큰 문제가 될 것만 같았다. 아이 얘기는 흘려들었다. 지금은 그런 것에 집중할 틈이 없었다. 청사는 이 이상 욕망을 자제할 자신이 없었다.

부풀어서 주름이 펴진 팽팽한 귀두 끝에 고도의 엄지가 문질러졌다. 요도 구멍을 누르며 비벼지는 감촉에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도가 저를 놀리는 것인지, 흥분시키는 기술이 늘어서 이렇게 쉽게 반응하는 것인지, 청사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단지, 고도는 흥분한 청사를 보면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신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청사를 보면서 포만한 동물처럼 웃기도 했다.

하여튼 못 이기겠다니까.

속으로 중얼거린 청사가 한 손을 뻗어 고도의 목 뒤에 둘렀다. 성기를 만지작거리며 흥분시키는 손길을 내버려 둔 채 목 뒤에 두른 손에 힘을 주어 얼굴을 내렸다. 맞닿은 입술을 열었다. 부드럽게 젖어 있는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자 고도가 눈을 감았다. 제 입 안으로 들어온 혀를 음미하듯 핥고 빨면서 고개의 각도를 틀어 주었다. 고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혀를 가진 청사는 언제나처럼 고도의 혀를 제 혀로 꼬듯이 감쌌다. 청사가 제 입 안으로 끌고 들어온 고도의 혀를 맛보고, 혀뿌리에서부터 혀끝까지 애무했다. 고도의 닫힌 눈꺼풀 사이가 움찔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속눈썹을 보면서, 고도가 이 입맞춤을 맘에 들어 하노라고 확신한 청사는 이젠 입천장과 치열까지 훑었다.

고도가 조금 더 몸을 기대어 왔다. 청사의 귀두를 문지르고 기립한 기둥을 위아래로 쓸어 만지던 손길도 조금 더 빠르고 강해졌다. 흥분해 있던 청사만큼이나 호흡이 가빠진 고도가 잠시 입을 뗀 사이에 말했다.

“침보 펼까?”

오늘따라 왜 이렇게 고도가 귀여워 보이는 걸까. 몇 주 동안 잠자리를 같이 못 해서 그런 거라면, 가끔 한 번씩은 이러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청사는 고도의 목에 두르고 있던 팔을 내려 허리를 감싸 안았다. 손으로 매만져 주던 성기와 그 성기를 감싼 고도의 손과 그 위를 다시 내리누르는 샅을 느끼면서 속삭였다.

“내가 누워 있을 테니, 네가 움직일래? 두 무릎을 바닥에 대고 내 몸에 타고 앉아 있으면 돼. 그럼 침보를 펴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청사가 자세까지 잡아 주는 적나라한 요구를 해보였다. 고도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이것 봐라, 하고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목 너머를 흐음, 하고 울려 보지만, 왜 앙큼한 생각이냐고 타박하는 말은 내뱉지 못했다. 그 앙큼한 생각을 청사와 고도할 것 없이 서로 품고 있다 못해 행동으로 이행하려 했으니.

고도는 장난스러운 대꾸 대신에 청사의 장단에 맞추어 주었다. 허리를 바로 세웠다. 청사의 속곳 안을 문지르던 손을 빼내고 제 바지와 속곳을 벗었다. 옷고름과 띠가 모두 풀어헤쳐진 고도가 속곳 없는 맨살로 올라앉은 자세였다. 청사는 그 모습을 황홀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벌어진 옷 사이로 고도의 맨몸이 얼핏 드러났다. 인계에서처럼 도술을 쓰며 요괴들을 상대하거나, 잠을 줄여 가며 여정을 재촉할 일이 없어서인지, 말랐던 팔목과 허벅지에는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있었다. 해를 거의 보지 않던 예전과 달리, 볕이 좋으면 누각에 올라 거문고도 켜고 마음 편히 새근새근 자기도 하면서 살갗은 옅은 밀색으로 변하기도 했다. 건강해지고, 편안해진 고도를 확인할 때마다 청사는 자신이 연인을 위해 하는 일이 영 쓸모없지는 않구나 싶어 뿌듯하고 기분 좋았다.

청사는 고도를 제 가슴팍에 기대어 엎드리게 했다. 빠꼼 올려다보는 고도의 볼에 입을 맞추면서 손을 내렸다. 옷춤 사이로 손을 넣고 포동하게 잡히는 엉덩이를 양쪽으로 잡아 벌렸다. 자세가 불편해서 미간을 찌푸리는 고도를 보았지만, 청사는 손가락을 입에 넣어 침으로 적시고 다시 벌린 엉덩이 사이로 밀어 넣었다.

“아, 응.”

작게 신음한 고도가 청사의 옷깃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자세도 그렇고, 청사와 매번 몸을 섞는데도 익숙해지질 못해서 그런지, 이런 관계에 좀처럼 의연해지지 못했다. 그런 고도가 귀여운 나머지, 청사는 눈을 떼지 못했다. 아무리 반복해도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는 얼굴이 오히려 청사를 자극했다. 청사를 넘어트리며 주도권을 잡던 고도는 어디 가고, 귀여운 고도만 남아 있었다.

청사는 젖은 손가락으로 고도의 몸 안을 들썩였다. 구멍 입구를 덧그리며 만지작거리는가 하면, 그 안으로 밀어 넣어 움칠거리는 내벽을 문지르고, 손가락을 빙글 돌리면서 안팎으로 자극을 해주었다. 물기 없이 단단하게 굳어 있는 바깥과 달리, 손가락을 휘감는 안쪽은 부드럽게 젖어 있었다. 무심한 얼굴이나 여유로운 표정만 지어 보이는 고도에게 이렇게 뜨겁고 촉촉한 속이 있다는 사실을 청사 외에 누구도 알지 못했다. 청사가 침투하면 눈가와 귓가까지 붉어져서 이 내벽만큼이나 젖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비밀을, 누구에게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아, 읏, 갑자기 두 개로 늘리면…….”

검지와 중지가 동시에 파고들어 입구를 늘리는 바람에 고도가 허리를 꺾었다. 아무리 햇살에 달궈진 바람이 따끈따끈하다고 해도, 청사가 벌려 놓은 구멍 속으로 새들어오는 것을 느끼면 낯설음에 흠칫 놀라기 십상이다. 바람이 들락거릴 정도로 벌려 놓은 구멍에 손가락 개수도 세 개로 늘어났다. 청사의 옷깃을 쥐고 있던 손에 하얀 뼈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흥분한 몸을 타고 열기가 밖으로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뜨거워진 숨소리로, 그다음엔 얼굴의 홍조로, 마지막으론 고여 있던 몸 안에서 억지로 열어 놓은 다리 사이를 통해서.

고도는 앞머리 사이로 촉촉하게 젖어드는 땀을 훔칠 새도 없었다. 손가락 세 개가 파고든 엉덩이를 들썩이면서 청사에게 조금 더 몸을 바싹 기대었다. 민망할 정도로 바라보는 청사의 시선을 마주했다. 누가 더 홀려 있는지도 모를 시선이었다. 고도와 청사는 둘 다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조금이라도 더 곁에 붙어 있기 위해서 몸을 뭉근하게 비볐다.

시선이 섞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입을 맞추었다. 상대의 숨을 빼앗아 삼키는 것으로도 아쉬워서 혀나 침을 섞었다. 네 것과 내 것이 구분 없이 녹아들게 만들었다. 반쯤 벗겨진 옷을 모두 바닥에 떨어트리면서 양팔은 목이나 허리를 감싸며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천천히 쏟아지는 청사의 숨소리를 삼키면서 고도가 허리 끝에 힘을 주었다. 부풀어서 쿡쿡 쑤시는 청사의 성기를 엉덩이 사이로 문질렀다. 젖어 있는 귀두 끝이 고도의 회음부에 닿아서 누를 때마다 고도는 청사의 목에 순흔을 새겼다.

“얼른…….”

입술 자국이 선명한 낙인처럼 찍혀 있는 목에 고도가 볼을 기대며 속살거렸다.

“얼른, 응?”

무엇을 보채는지는 청사도 잘 알고 있었다. 엉덩이를 위아래로 느릿하게 움직이면서 발기한 성기의 기둥을 따라 비비고 있는 고도였다. 그 움직임을 보노라면 애간장이 바싹 졸아서 얼른 수직으로 꿰뚫어 버리고 싶은 청사였다. 손가락 세 개를 삼키고도 움칠거리는 이 구멍에 기립한 성기를 넣으면 고도가 어떻게 허리를 뻣뻣하게 세우면서 신음을 토해 낼지, 상상만으로도 성기가 욱신거릴 지경이었다.

스스로 올라앉아서 허리를 들썩이는 고도를 올려다보고 싶었다. 땀방울이 맺혀서 머리칼을 타고 방울져 떨어지면, 땀 한 방울 놓치는 것도 아까워서 핥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테니. 고도의 허리를 움켜쥐고 먼저 강하게 쳐올리거나, 흥분을 다스리지 못해서 몸을 뒤집어서 고도의 다리를 벌리고 앞뒤로 거세게 흔들지도 모른다는 상상 역시 피할 수가 없었다.

청사는 거칠어지는 숨을 참지 못했다. 훅, 후욱, 숨을 몰아쉬면서 고도의 몸 안을 휘젓던 손가락을 빼내었다. 빠끔거리는 구멍 안으로 귀두 끝이 젖어들 정도로 흥분한 성기를 밀어 넣으려던 찰나였다.

“삐이이이!”

나무 이파리가 그림자로 흔들리던 격자무늬 나무창이 요란하게 부서졌다. 흠칫 놀란 고도가 허리에서 힘을 풀었다. 입구를 벌리며 파고드는 귀두에 집중을 하지 못했기에 두터운 기둥까지 한꺼번에 몸 안으로 삼키고 말았다.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에 숨을 급히 들이마신 고도가 당황한 것만큼, 기별도 없이 고도의 안쪽으로 확 빨려 들어간 청사도 눈앞에서 별이 부서지는 듯한 충격에 신음했다. 이렇게 한 번에 밀어 넣어 본 게 얼마 만일까. 성기 전체를 압박하는 강렬한 뜨거움에 청사는 창문을 부순 소란에 관심을 돌릴 수가 없었다. 고도가 스스로 허리를 흔드는 모습을 지켜보겠다던 일념 또한 파도에 휩쓸린 모래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예그리나?”

당황한 고도가 부서진 창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사가 몸을 뒤집었다. 엇, 하고 눈이 휘둥그레 커진 고도를 입다 말았는지, 벗다 말았는지도 알기 어려울 정도로 엉망이 된 도포만 걸친 청사가 내려다보았다. 하나로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끈은 오간 데 없이 바닥으로 넓게 펼쳐진 은하수를 닮은 머리가 출렁였다.

“하아, 하, 고도.”

벌어진 다리 사이를 청사가 철썩, 쳐올렸다. 머릿속을 하얗게 만드는 충격에 고도가 짧게 신음을 토했다. 긴 도포를 걸치고 있는 청사 덕분에 고도의 벌어진 다리를 비롯해 맨몸이 드러나는 일은 없었지만, 도리어 긴 머리와 도포에 감싸여서 꼼짝없이 청사에게 붙잡힌 기분을 자아냈다.

“자, 잠깐, 대롱아, 예그리나가…… 아읏, 아.”

부서진 창틀과 함께 바닥을 뒹군 예그리나는 어지러운지 머리를 흔들어 털고 있었다. 고도는 제 얼굴 양옆을 짚고 있는 청사를 불렀지만, 청사는 응답하지 않았다. 세우고 있던 두 팔을 굽혀서 몸을 더 바싹 붙여서는 고도의 다리로 제 허리를 감게 하고 거침없이 움직였다. 뜨거운 안쪽을 들쑤시는 거대한 성기에 고도가 고개를 젖히면서 괴로운 숨을 토했다.

“아앗, 아! 자, 잠깐만, 이놈아, 앗!”

짧게 비명을 지르는 고도 소리를 듣고 예그리나가 정신을 차렸다. 널브러진 몸을 일으켜 세운 예그리나가 날개를 펄럭였다. 부서진 창틀 잔해를 떨쳐 내고 고도에게 날아갔다. 몸 안을 쾌감과 열락으로 감싼 청사 덕분에 두 눈에 눈물이 맺힌 고도를 보고 예그리나가 다시금 삐이이, 울었다. 당황한 고도가 고개를 돌려 제 얼굴을 붙잡은 조막만 한 용의 손을 바라봤다. 밖에서 무슨 일을 겪은 건지, 예그리나는 겁에 질려 있었다. 고도를 끌어안고 삐이이 삐이이 울 정도로 뭔가 서러운 것 같았다.

“아, 아아, 아!”

들썩이는 고도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버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부서진 고도가 숨을 헐떡였다. 너무 좋아서 눈가를 새빨갛게 붉히면서 앓는 소리를 토해 냈다. 엉덩이 사이를 철썩철썩 꿰뚫는 소리가 음란하게 울려 퍼졌지만, 어린애가 보는 앞에서도 멈추지 못하는 청사나, 이 행위가 뭔지 몰라서 그저 고도만 끌어안고 삐이이 울어대는 예그리나나, 누가 부자관계 아니랄까 봐 자기밖에 모르는 건 똑 닮아 있었다.

“하아, 학, 고도, 고도.”

“삐이이이이.”

“고도, 하읏, 아, 기분 좋아, 아읏, 아!”

“삐이이이!”

머리 위에서는 청사가 좋아서 신음을 터뜨리며 거세게 움직이고 있고, 청사가 만들어 낸 순흔 자국이 가득한 목에는 예그리나가 매달려서 서럽게 울고 있으니, 고도만 정신이 없었다. 이 부자가 대체 무슨 짓인지, 맨 정신으로 생각해 낼 만한 상식을 가진 사람은 고도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쪽을 먼저 달래지도 못했다. 청사는 고도의 다리 한쪽을 어깨까지 들어 올려 걸쳐놓고 흔들 정도로 흥분에 휩쓸린 상태였다. 예그리나는 고도가 얼굴을 붉히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어딘가 아픈 게 아닌가 싶어서 덜컥 겁을 먹고 더 고도의 얼굴에 매달리는 상태였다. 고도는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용이라지만, 이게 무슨…….

“하윽, 고도, 고도!”

“삐이이!”

두 부자의 제멋대로인 행위에 고도만 남아나질 않았다. 고도는 머릿속을 새하얗게 뒤흔드는 쾌락 속에서도 예그리나를 쉬이쉬이, 달래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

“대롱이, 네놈 정말 미친 거지. 애가 보는 앞에서 무슨 짓이야.”

“커흠, 미, 미안. 나도 모르게 그랬네.”

“모르는 게 어디 있느냐. 뻔히 네 눈앞에서 애를 봤는데.”

“그게…… 눈앞에 있긴 했는데 내가 전혀 신경 쓸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해야 할까.”

“흥분을 그렇게 조절 못하는 것도 병이다.”

“상대가 너일 땐 그 아무것도 조절하지 못하는걸.”

“그게 병이라고.”

“그럼 난 죽을병 걸린 용 할래.”

“…….”

“화 풀어, 고도. 응?”

고도는 맥이 빠지는 얼굴로 청사를 먼 산 바라보듯 바라봤다. 어디서 배워 온 건지, 저 불리한 상황이 있을 때면 살살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낸다거나, 고도를 꼭 끌어안고 예쁜 표정으로 바라보기 일쑤였다. 소녀 같은 놈, 이라고 몇 번 놀리기는 했지만, 이제는 이러한 모습들이 어린 계집들이 하는 짓과 뭐가 다를까 싶었다.

남성체라고 상냥하거나 나긋한 말투와 행동을 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 청사는 소경이라 불리는 옥황상제 바로 아랫단계의 높은 지위에 앉은 이였다. 안 그래도 젊은 용에다가 어린 시절의 객기로 천녀들을 꼬아내어 꽃선비처럼 도포자락을 휘날리고 다닌 이력을 나이 지긋한 천인들은 좋게 보지 않았다. 그 결점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인정받을 만한 능력과 위엄, 존경과 경외를 풍겨야만 했다. 실제로 공적인 자리에서는 파란 눈을 치켜뜨면 주변 분위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을 정도로 기백이 남달라졌다. 목소리를 낮게 깔며 으르렁거리면 사나운 맹수를 생각나게 할 정도로 상대를 움츠러들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사적인 자리에서는 꼬리 여덟 개 달린 구미호보다 더 되바라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의 부친인 조아반 역시 소경으로 지내던 시절엔 명철하기론 둘째가 서러운 천룡이었지만,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분위기가 정반대로 바뀌었다. 사택에서 장기나 두며, 장기 상대로 고도를 졸졸 쫓아다니다 못해 ‘보배는 왜 날 자꾸 피하느냐! 아무리 늙은이가 미워도 그러는 거 아니다!’는 기겁할 소리를 해댔다. 사리에 밝은 존재가 그 무슨 망측한 짓이란 말인가. 그 바람에 고도가 이마를 짚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르신을 공경함이 마땅하거늘, 왜 제가 춘부장을 미워하겠습니까.’

‘나만 보면 저 멀리서부터 슬그머니 발길을 돌리더만.’

‘제가 늙으니 노안이 침침해져서 멀리서 오시는 춘부장을 알아보지 못하는 듯합니다.’

‘새파랗게 어린 게 노안 타령이라니.’

‘제가 이래 봬도 회갑을 세 번은 더 치렀지 않습니까.’

‘새파랗게 어려!’

‘아이고, 눈이 침침하여 춘부장 머리가 희끗하게 보이니 장기 말을 두는 오동나무판의 가로세로 줄도 못 알아보겠습니다.’

눈덩이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며 골골 앓는 소리를 해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천룡의 비기뿐이었다.

‘용안(龍眼)으로 만들어 주마.’

천상의 물줄기를 끌어다가 눈을 깨끗이 씻겨 주니, 아침에 자고 일어나 제대로 떼지 못한 눈곱은 물론이요, 수십 년 묵은 먼지 한 톨 없이 청결하게 씻겨 주는 게 아닌가. 맑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제 눈을 보아하니 이젠 노안 운운해도 소용이 없는지라, 그 길로 조아반이 손을 꼬옥 잡고 데려간 장기판 앞에서 세 시진은 승부를 겨루었다고 한다. 그때를 생각하니 다시금 찾아오는 희미한 두통에 고도는 침음을 삼켰다.

이건 역시 집안 내력이겠지. 첫인상은 차갑다 못해 얼어붙을 듯이 냉정해 보이는데, 실제론 칭얼거리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어린애처럼 요구하는 게 조아반과 한무 둘 다 똑같은 데다가, 예그리나도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나.

고도는 쪽쪽 뽀뽀를 해대는 청사에게서 슬그머니 눈동자를 돌렸다. 폭신한 면포에 앉아 있는 예그리나는 까만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창을 부수고 들이닥쳐서 관계 중인 고도의 얼굴을 붙잡은 채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던 것이 제가 무슨 남세스러운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청사 말마따나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리라. 다시 생각하면 얼굴이 홧홧해지며 열이 오르는 터라, 고도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애써 의연해지려고 노력했다. 다시금 무미건조한 평소의 고도로 돌아온 후에야 예그리나를 잡고 물었다.

“아이야, 뭐가 그리 급해서 창을 부수고 들어온 게냐.”

말간 눈으로 고도를 보던 예그리나가 그 말에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해맑던 얼굴이 삽시간에 충격으로 뒤덮였다. 평소처럼 손에 다과라도 쥐고 있었으면 면포 위에 뚝 떨어트릴 정도로 작은 발톱이 난 손을 떨고 있었다. 애가 고뿔이라도 들었나 싶어 걱정 어리게 바라보고 있으니, 예그리나의 그 왕방울만 한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삐이이, 삐이이이이 무어라 무어라 외치며 우는데 통 무슨 말인지를 알 수가 있나. 이게 작은 발톱을 달달 떨면서 면포를 움켜쥐다 못해 주저앉아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데, 그 꼴이 흡사 망국의 하나밖에 남지 않은 왕자로 볼 만큼 사연이 구구해 보였다.

고도는 예그리나를 답싹 들어 어깨와 가슴팍에 기대어 안았다. 고도의 옷자락을 쥐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 내는 통에 옷이 짙게 젖어 갔다. 고도는 청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럽게 울어대는 아들을 보고도 얘가 왜 이러나 싶어서 멀거니 바라만 보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 부자지간이 아니라 아들 둘을 보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대롱아.”

고도의 부름에 엉엉 울기만 하는 예그리나를 멀거니 바라보던 청사가 시선을 마주했다. 고도는 그 시선에서 청사의 감정을 읽었다. 저건 질투였다.

“나는 용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서 말이다. 예그리나가 대체 뭐 때문에 이리 우는지 너는 알겠느냐.”

청사는 대답 대신 입가만 찌푸렸다. 등을 토닥여 주는 고도의 손길을 보자니 예그리나가 샘이 나기도 해서 대답이 모나게만 들렸다.

“새끼 용 옹알이는 나도 못 알아들어.”

삐쳐도 단단히 삐친지라. 하, 이거 참, 고도는 퍽 난감한 기분으로 청사에게 눈짓을 해보였다. 한 걸음 다가온 청사의 이마에 뽀뽀를 해주니 뾰족하게 모가 나 있던 눈매가 사그라진다. 감정적인 만큼, 단순하기도 한 청사의 반응에 고도는 피식 웃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네 아긴데 그래도 옹알이하는 태는 벗어날 때까지 돌봐줘야 하지 않을까. 춘부장께서도 널 그 정도는 돌보셨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렇게 구슬려 보아도 청사는 누군가를 돌봐 본 경험이 없는지라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나 누이께 도움을 청해 볼까?”

“우리가 해결해 보고, 그래도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부탁해 보는 건 어떠하느냐.”

“으음, 좋아. 일단 왜 우는지를 알아보자, 그거지.”

청사는 여태 울고 있는 예그리나를 바라봤다. 고도의 옷자락만 꼭 쥐고 우는 모습이 고도가 어디 멀리 가기라도 할 것처럼 불안해하고 있었다. 청사가 소경으로서 할 일을 모두 인계받아서 고도에게 하사한 ‘지상차사’ 직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게 된다면, 고도가 몇날 며칠 동안 땅에 내려갔다 올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었다. 일단, 청사가 제 할 일을 할 수 있게 되어야 고도도 함께 바빠질 텐데, 그런 복잡한 정치 사정을 이 어린 용이 알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담 고도가 차사직을 수행하느라 자리를 비울 것을 미리 걱정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청사는 천천히 용의 힘을 개방했다. 파랗게 넘실거리는 기류가 순식간에 고도와 예그리나를 감쌌다. 세상을 푸른색으로 물들이지만, 보기만큼 차갑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도와 예그리나를 보호하듯 포근하고 부드러웠다. 예그리나는 삐이이 터뜨리던 울음을 그쳤다. 눈물콧물을 고도의 어깨에 쏟아 내던 얼굴을 들고 청사를 바라봤다. 청사가 보여 주는 기운에 무르춤해져서 날개를 접다가도, 청사가 자신을 보호하려함을 깨닫곤 감사 인사라도 하듯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울며불며 난리를 피우던 예그리나가 진정하자, 청사도 그에게 편히 말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차분하게 얘기를 해보아라.”

청사의 명에 예그리나는 작은 손으로 젖은 얼굴을 닦아 내곤 얌전히 면포 위로 돌아왔다. 고도를 돌아보면 다시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지만, 이번에는 대책 없이 울어대는 대신 손짓과 날갯짓을 해보였다.

“삐이이이.”

앞발 두 개를 최대한 양옆으로 벌려서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표현하더니 주둥이를 손바닥으로 눌러서 코를 들추고선 그 들창코로 바닥을 파헤치는 시늉을 해보였다. 부서진 창틀로 엉금엉금 다가가서 내리쬐는 햇살에 반짝이는 금색 볕을 가리켜며 나른하게 네 다리를 펴기도 했다. 청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주사화 벌판에 사는 금돼지를 만난 거군.”

그 말을 듣고 고도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대체 예그리나의 무엇을 보고 청사가 말귀를 알아듣는 것인가. 흥미 없다고 손사래 칠 땐 언제고 이 망할 대롱이가 아기 용의 옹알이를 해석하고 있다.

예그리나는 너스레를 떨던 금돼지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앞발로 고도를 가리켰다. 고도가 오랏줄에 붙잡힌 것처럼 짧은 앞발 두 개를 등 뒤로 돌리고선 뒤뚱뒤뚱 걷기 시작했다. 부서진 창틀 밑으로 폴짝 뛰어내린 예그리나는 바닥에 드러누워 네 다리를 휘저으며 짐짓 고통스러운 모습을 흉내내더니 그대로 꼴까닥 죽는 시늉도 해보였다. 청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고도가 저승차사들에게 붙잡혀서 지옥에 끌려간다는 말이더냐. 금돼지가 그리 말했던?”

죽은 시늉을 하던 예그리나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금 삐이이, 정신 사납게 울어대려 하자 청사가 번쩍 들어 달래곤 되물었다.

“누가 감히 고도를 잡아간단 말이냐.”

예그리나가 긴 수염을 배꼽까지 길러 쓰다듬는 척해 보였다.

“염라대왕이 그럴 수 있단 말이지. 으음, 그래, 그럴 자격은 있지. 하나, 제 형인 옥황상제도 인정한 게 고도라는 존재이거늘, 형의 뜻을 거슬러서까지 이곳으로 쳐들어와 고도를 끌고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예그리나는 탈춤이라도 추듯이 방방 뛰어 보였다.

“그래, 고도가 지상에서 말썽을 많이 피우긴 했다만, 이미 그것과 관련된 일은 사했는데. 이제 와 또다시 과거 일을 들추는 건 치졸하고 옹졸하지 않겠느냐.”

예그리나는 앞발로 부서진 창밖, 하늘과 땅과 산과 내천을 가리켰다.

“맞다. 너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구나. 저승의 동쪽은 이곳의 서쪽과 맞닿아 있다. 그곳에 흐르는 원천강은 이곳에서 흘러내린 도솔천의 지류이지. 원천강의 물을 먹고 자라 수많은 꽃이 피어난 서천꽃밭이 있고, 그 지류가 더 흐르고 흘러 인간들의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삼색물이 흐르는 곳까지 번져 간단다. 하늘을 천계로, 땅을 인계로, 지하를 마계로 분류하지만 실제론 그렇게 높이가 구분되어 있지 않으며, 모든 세상이 하나로 통하는 수많은 출입구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고도처럼 죽지 않고도 저승을 갔다 오는 존재가 있는가 하면, 극락왕생하지 못한 존재가 길을 잃어 천계로 오는 경우도 적지 않단다. 그걸 걱정하는 거라면 이해한다만.”

예그리나는 발톱을 동그랗게 말아서 구멍을 만들었다. 반대편 앞발들을 움직여서 그 구멍을 두 개, 세 개로 늘려 보았다.

“이곳은 불안정해서 몰래 들어와 고도를 납치하려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 혹은 천인 중에 삿된 마음을 품고 고도를 기절시켜 도솔천에 던져 버리면 저승에서 건져 올릴 테니, 흔적도 없이 처리할 수도 있는 일이고.”

대체 예그리나의 무엇을 보고 저렇게 심오한 해석을 할 수 있는지 몰라서, 가관이란 표정으로 바라보던 고도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 대롱아.”

예그리나의 손짓발짓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하던 청사가 고도를 돌아봤다. 어떻게 예그리나와 대화를 이어 갈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고도를 제법 진지하게 보고 있었다. 고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고도, 내가 옛날 얘기 하나 들려줄까?”

대뜸 옛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청사의 말에 고도는 눈을 깜빡였고, 예그리나는 흥미가 동하는 얼굴로 청사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둘이 똑 닮은 검은 눈을 제게 고정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청사는 배시시 웃고 말았다.

“옛 이야기 들려줄게. 이 아이가 왜 널 붙잡고 울었는지 그 기원을 말이야.”

*

옛날옛날 아주 먼 옛날, 땅과 하늘이 맞닿아 구분이 없던 때가 있었다. 어둠과 빛의 구분이 없이 혼돈뿐이던 세상이었다. 어느 날 들썩이던 세상 사이에 틈이 생겨났고, 그 틈으로 거대한 신이 하나 일어났다. 거신은 양손과 어깨로 위를 받치고, 굳건한 두 다리로 아래를 밀어내면서 자연스럽게 하늘과 땅을 만들어 냈다. 하늘과 땅 사이에 푸른 이슬이 맺히며 비가 되고 구름이 되어 세상은 오랫동안 젖어 있었다. 비가 그친 후엔 하늘을 떠받치던 거신의 앞쪽 얼굴에 난 두 개의 눈은 떨어져 나와 태양 두 개가 되었고, 뒤통수에 달린 두 개의 눈은 달 두 개가 되었는데, 훗날 신들이 두 개씩 떠 있는 태양과 달을 하나씩 떨어트려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태초의 어둠과 빛이 태어났다.

어둠과 빛이라 불린 부부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했다. 세상이 너무도 적막하고 고요하여 희망이 없으니, 그 밝음을 심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어둠과 빛은 그 길로 각자가 아이 하나씩을 잉태하여 한날한시에 낳았다. 어둠과 빛에서 태어난 형제를 보며 이르길, 둘이 이 세상을 잘 다스렸으면 한다는 이야기였다.

형제는 위아래와 앞뒤가 없는 이 세상을 공평하게 나누어 보기로 했다. 위와 아래를 갈라 높은 쪽을 하늘이라 부르기로 낮은 쪽을 땅이라 부르기로 했으며, 앞과 뒤를 구분하여 사방을 동서남북이라 칭하고 해와 달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도록 하되, 남쪽으로는 꽃과 곡식이 왕성하게 잘 자라도록 하고, 북쪽으로는 얼음과 바람이 태어나도록 하였다.

세상을 구획하여 구분하는 것엔 형제가 합심하여 잘했지만, 세상을 하나둘 쪼개다 보니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라. 좀 더 비옥하고 밝은 곳을 자신이 다스리고 싶어 하다 보니, 사시사철 꽃내음이 풍기고 복숭아가 자라는 하늘을 누가 다스리느냐로 다투게 되었다.

다툼은 끝날 줄을 몰랐다. 그들이 싸울 때마다 당황한 땅이 우르르 흔들리며 지진이 벌어지는가 하면, 지진으로 쾅쾅 부딪치는 땅들이 융기하거나 침잠하며 산과 계곡이 만들어졌다. 비가 몇날 며칠을 내려 바다를 만드는 일까지 생겨 버렸다. 이러다간 자신들이 다스리기로 한 세상이 다시 어둠과 빛이라는 부모 품으로 돌아갈 판이라. 하는 수 없이 싸움을 중단하고, 하늘을 누가 다스릴지로 내기를 하기로 했다.

그 내기란 것은 간단했다. 산을 서른세 개 쌓아 보되, 더 빨리 쌓은 사람이 하늘을 다스리자고. 형은 동생보다 산 하나를 더 쌓아 내기에서 이겼다. 형이 그곳 중앙에 궁을 지어 ‘옥황상제’가 되었고, 내기에서 진 동생은 형이 꼴 보기 싫어져서 땅이 아닌 그보다 더 낮은 지하로 들어가 ‘염라대왕’이 되었다.

“대롱아, 그럼 상제와 염마는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거냐?”

옛 이야기를 들려주던 청사가 흐음, 하고 목 너머를 울렸다. 면포에 앉아서 다과를 우물우물 씹는 예그리나나, 그런 예그리나 손이 비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다과를 쥐어 주는 고도나,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세상만사 모든 걸 다 안다고 알려진 환영도사 고도조차 천계의 일은 몰랐다니. 그걸 알려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청사는 기분이 좋아져서 목에 힘을 주었다.

“지금은 사이가 좋은 편이야. 처음에는 정말 서로 보기만 해도 으르렁거렸거든.”

“왜?”

“지금이야 땅 위에 사는 금수와 풀과 나무, 인간과 요괴, 도깨비가 모두 늘어나서 옥황상제가 더는 관여할 수 없는 규모가 되어 버린 거지, 처음에는 인간들도 몇 명만 모여 살고, 나라다운 나라도 없었어. 서로 쓰는 말도 달라서 상제를 부르는 말도 제각각이었지.”

“그건 나도 안다. 태상노군, 원시천존, 옥천대제, 제석천, 천공, 천주, 노천야, 옥황야, 옥황상제, 상제, 하늘님.”

“맞아, 그중에 고도, 너희 조상들이 상제를 뭐라 불렀는지 알아?”

“음, 글쎄? 상제? 하늘님? 그 둘 중 하나 아니었을까?”

“천지왕이라고 불렀어.”

“오호라, 그때까진 하늘과 땅 위의 일에 모두 관여해서 하늘과 땅의 왕이라 불렀던 거군.”

“그래, 지금이야 하늘만 관여하니 하늘님이나 옥황상제라고만 불리는데, 태초엔 땅을 상제와 염마의 중립지대로 만들었었거든. 오죽하면 상제가 잠깐 인간 세상에 내려갔다가 인간 여자에게 제 자식을 본 일이 있을 정도일까. 그때 낳은 두 아들인 대별왕과 소별왕을 땅으로 보내서 인간들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도와주다가 지금은 둘 다 저승으로 가서 염마의 양측을 보위하고 있어.”

하늘과 땅을 분리하여 잘 다스리고자 했으나 문제가 생겼으니, 그 문제점이 크게 두 가지라. 하나는 한번 땅에서 분리된 하늘이 끝 간 데 없이 높아지며 멀어지려고 했고, 다른 하나는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인간 세상을 다스릴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곰곰이 고민을 하던 옥황상제가 두 가지 꾀를 내었다. 하나는 깊은 바다 속에만 살던 ‘용’을 하늘 위로 불러들여서 바다뿐만 아니라 하늘도 오고갈 수 있도록 허락할 테니, 저 높은 하늘을 꼬리로 묶어서 더는 멀어지지 않도록 붙들고 있어 달라는 것이었다.

옥황상제의 제안을 받아들인 용은 그 후로는 ‘여의주’를 얻으면 하늘로 승천하여 상제와 염마가 쌓은 서른세 개의 산인 ‘수미산’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개중 능력 있는 용은 상제가 왼편에 두어 ‘천룡’이라는 이름하에 하늘에서 처리해야 할 많은 과업을 내렸다. 천룡 중에 만약 덩치가 우람하여 하늘을 받들 만한 힘이 있다면 하늘이 더는 멀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두거나 다시 땅 위로 떨어져 태초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지지하게 하였다. 이들을 훗날 ‘미리내’라 부르며 넓고 길게 펼쳐진 은하수 모습을 용의 등뼈라고 부르는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고도가 이 이야기를 듣고 청사의 둘째형이 하늘을 받들고 있어 주는 그 노고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혼자서 오랫동안 차갑고 어두운 하늘에 몸을 묻고 있는 둘째 형을 위해서라도, 그가 외롭지 않도록 등뼈를 다져 줄 또 다른 천룡이 필요하겠다는 생각 역시나.

“상제는 하늘이 멀어지는 일은 해결했지만, 다른 한 가지 고민거리는 해결하지 못했어. 그 고민이 무언고 하니 인간세상을 다스릴 사람이 없다는 거야. 인간들은 천지왕을 신성시하여 자기들 사이에서 그 왕이 하던 일을 물려받을 사람이 태어날 거라 감히 생각도 못 했거든. 게다가 온갖 신들을 땅에 내려보내서 옥토를 비옥하게 하거나 삼망할매를 통해서 아이 낳는 일도 점지해 주는데 그걸 어떻게 인간들이 할 수 있겠다고 믿겠어. 상제가 아무리 인간들 왕을 뽑아 널리 이롭게 하라고 말해도 다들 난색을 표하며 고개를 저은 거지.”

하늘과 땅을 분리하여도, 땅에 속한 존재들이 하늘의 뜻을 기다리고 믿고 의지하니, 저희들끼리만 의지하여 살기 두려워하더라. 이에 옥황상제는 ‘땅을 다스릴 존재’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천인’ 중에서도 수양이 부족하여 낙원에서 말썽을 부리는 이들은 저 땅 위로 쫓아내어 부처의 가르침을 몸소 배우도록 한다. 그리고 명이 다한 후엔 동생인 염마가 다스리는 저승으로 보낼 것이다. 그 저승에는 천계에서 흐르는 오색찬란한 도솔천의 지류인 ‘은하수 천궁길’을 포함한 삼색물이 흐르는데, 이 삼색물은 지옥으로 가는 붉은 물과 극락으로 가는 금빛물, 천계로 승천할 수 있는 오색물로 나뉘어 흐른다. 죽은 천인들은 인간들과 똑같이 이 삼색물을 건너면서 살아생전 지은 죄에 따라 지옥이나 극락으로도 갈 수 있었다. 그러니 땅에서 자식을 낳고, 나라를 꾸려, 인간들 혼자 겁을 내는 나랏일이 실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란 사실을 알려 주며 덕을 베풀어 천상으로 되돌아오도록 노력하라. 그러면서도 원래 땅에서 살았던 종족들 이를 테면 도깨비와 요괴들과 어우러져 보라.

이렇게 땅으로 쫓겨난 천인들이 나라를 만들고 자식을 낳아서 스스로를 ‘왕’이나 ‘백성’으로 칭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천계에서의 자신을 잊은 채 더 많은 죄를 지으면 삼색물에서도 은하수 천궁길을 따라가는 배를 타지 못한 채 염라대왕이 이끄는 지옥의 시왕들 손에 끌려가 더 많은 고초를 주기도 했다.

제아무리 천상의 존재였다는 천인이라 할지라도, 천상에서의 기억을 지워 버렸으니 땅에서 평범한 인간으로 사는 이도 있었다. 천인인 것도 모른 채 인간과 혼인해 씨를 뿌리다 보니, 평범한 인간은 갖추기 힘든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태어났다.

신선의 핏줄을 이어받은 도사. 귀신이나 도깨비를 부리는 술사와 부처의 가르침에 능통한 법사와 아라한과.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무속인. 지덕체를 두루 갖춘 왕의 자질을 가진 이.

이들이 한데 엉키며 세상은 혼란스러워졌다. 그 혼란을 저희들끼리 중재하기 위해 ‘왕’을 모시기 시작하면서, 옥황상제가 바라던 것처럼 인간들은 하늘의 법칙이 아닌 자신들의 법칙으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그러다 보니 인간들은 천상과 더욱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어. 고도, 생각나? 예전에 나와 함께 추운 겨울 산에 갔을 때 도자기를 굽던 노인이 있었잖아.”

“아아, 콩팥을 장수로 부리던 이 말이지. 당연히 기억한다.”

“그런 존재가 바로 천상에서 자신이 할 일을 잊고 땅 위에서 평범하게 사는 천인이거든. 이런 이들이 늘어만 가니까 세상이 점점 혼란스러워지게 된 거야.”

지하를 다스리는 염마나 하늘을 다스리는 상제처럼, 땅 위의 ‘왕’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것은 아닌 법. 오히려 왕이 앞장서서 인간들 세상을 더 많은 욕심으로 혼탁하게 만들기도 했다. 다시금 고민에 빠진 상제가 제 부모인 어둠과 빛에게 청을 했다.

하늘의 주인과 지하의 주인이 있듯이 땅의 주인인 막냇동생을 하나만 더 보내 달라. 인간들이 갈 길을 모르고 해야 할 일을 알지 못해 헤매지 않도록 길라잡이가 될 동생을 보내 달라.

어둠과 빛은 첫째 아들의 청을 들어주어 별을 뭉친 셋째 아들을 상제에게 보내 주었어. 상제는 자신과 염마와는 다른 형태로 태어난 막냇동생을 보고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막냇동생이라고 건네받은 형태가 커다란 알이었기 때문이다.

붕우에게 그 커다란 날개로 감싸 보라 하자 붕우는 그리 답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 날개로 다 덮을 수 없습니다.”

해가 토하는 불덩이를 먹고사는 세 발 달린 까마귀에게 부탁하자 삼족오는 그리 답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품으면 알이 다 녹아 버릴 것입니다.”

상제는 자신의 부인이자 인간들에게는 서왕모, 바지왕 등으로 불리는 여인에게 부탁하자 서왕모는 그리 답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대별왕과 소별왕을 인간 세상에 보내고도 제대로 일을 처리 못 해 염마 곁으로 되돌렸는데, 당신의 동생까지 잘 맡아 키우고 인도할 자신이 없습니다.”

고민하던 상제는 천일성과 태일성으로 뭇별을 다스리는 별의 신인 칠성님과 옥녀부인을 찾아갔다. 그들의 빛을 먹고 태어난 막냇동생이자, 일곱 아들 북두칠성이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지해 주는 능력이 있는 만큼, 땅을 다스리는 운명을 미리 알고자 함이었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그리 답했다.

“인간은 아직 껍데기밖에 없는 갓 태어난 아이들과 같습니다. 그 속이 여물지 못하여 욕망에 쉽게 흔들리고 마니, 이를 주신(主神)인 어둠과 빛께서 파악하시어 그들의 알맹이가 될 수 있는 상제님의 막냇동생을 만든 것입니다. 인간의 겉을 감싸고 있는 껍질을 ‘몸’이라 하고, 알맹이는 ‘얼’이나 ‘혼’이라고 부름이 마땅하니, 막냇동생께 그런 이름을 붙여 주시고, 달의 여신에게 데려가는 게 어떠하십니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상제는 막냇동생을 인간들의 ‘혼’이라 부르기로 정하고 별들이 점지해 준 대로 달의 여신을 찾아갔다. 달에는 세 여신이 살고 있었다.

땅에서 태어난 아리따운 처녀였지만, 옥황궁 선비인 궁상이를 사랑하게 된 해당금이.

사람이 살고 죽는 것, 잘살고 못 사는 것을 정해 주는 운명신 감은장아기.

옥황꽃밭을 좋아하여 천진한 처녀처럼 뛰어 놀며 사람들에게 타고난 복을 전해 주는 노가단풍자지명왕.

세 여신들은 은하수가 펼쳐진 하늘, 옥황궁, 옥황 꽃밭과 옥황 목장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신성한 짐승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세 여신은 상제가 품에 안고 온 별빛 머금은 알을 받아 들고 말했다.

“저희가 잘 보살펴서 때가 되면 땅으로 내려보내겠습니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혼은 여러 악재와 고난과 고초를 겪은 후, 많은 것을 잃고 얻은 후에 땅에 몸을 뉘어 땅 그자체가 될 수 있었다. 그 누구보다 인간을 사랑한 덕분에 그의 마음과 얼과 혼이 혼란스럽고 욕심만 많으며 어리석었던 인간들을 조금 더 현명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껍데기뿐이던 인간들도 혼과 얼이라는 알맹이가 단단해져서 제법 서로를 의지하고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나라를 꾸려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들의 원형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잊게 되었다. 혼을 자신의 몸속에 품게 된 인간들 덕분에 원래 이름의 주인이었던 혼은 본래 이름을 잃고 그저 ‘땅의 주인’이라고만 불리게 되었다.

“그건.”

이야기를 듣던 고도가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그건 인간 세상에서 내게 아리아를 보내던 땅의 주인을 뜻하는 게 맞느냐. 그게 네가 말한 혼이란 이름을 가진 존재인가.”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을 거야.”

“어째서냐.”

“천상과 저승의 존재들이 인간을 뭐라 부르는지 알지?”

“그럼. 명명자라 부르지.”

“맞아, 이름을 짓는 존재들. 그게 인간이야. 피아(彼我)를 구분하기 위해 이름을 붙이는 행위가 어느새 모든 존재를 바라보는 인간만의 시선을 갖게 했거든. 그 명명자들이 땅의 주인을 과거에 무어라 불렀을지, 달에 사는 여신들을 어떻게 정의내리고 해석했을지는 알 수 없을 거야. 왜, 옥황상제를 수많은 이름으로 부르는 여러 나라가 있듯이, 이곳의 존재들이 저 밑에서 어떻게 불리든 그건 그들이 원해서 부르는 거잖아.”

“잠깐 이야기에 벗어난 주제다만, 혹시 인간들의 명명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느냐.”

“나쁠 것까지 있을까?”

“가령, 천상이나 지하의 존재들이 의도한 것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여 이름 붙여서 해석했을지도 모르잖느냐.”

“그것도 인간이 만들어 낸 영역이라 생각해.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흘러가는 것. 그게 고도, 네가 강문보살과 싸워서 지켜 내려 한 것이기도 하잖아.”

심중을 헤아리기 어려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고도에게 청사는 여느 때처럼 햇볕 같이 웃어 주었다.

“네가 나를 어떤 의도로 ‘대롱이’라 부르든, 나는 그게 좋다. 너에게 불리는 그 자체가 좋아.”

그러니 땅의 주인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건, 그의 존재를 인간들이 어떻게 접근하고 있건, 크게 우려하지 않는다는 포용력을 너스레처럼 부려 보았다. 고도의 입에서 나온 ‘대롱이’라는 부름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지 알고 있는 청사였다.

“……하여튼 멋있는 말만 늘어난다니까.”

투덜거리면서도 결국은 피식 웃고 마는 고도도, 청사의 너스레를 닮아 가고 있었다.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하계의 모든 혼을 대표하는 존재의 대리자라니. 너무 막중한 임무에 뱃속이 찌르르 아파 올 지경이야.”

정말로 윗배를 문지르는 고도였다. 얼마나 오래전의 얘긴지도 모르겠고, 사람들이 만들어 낸 신화나 설화쯤으로만 들리는 이야기들이 실은 이 옥황의 나라에선 실존했던 역사이자 과거의 한 단면이란 사실에 기분이 이상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오고 가는 느낌이었다. 우스갯소리가 사실이었다. 사실들은 증명할 수 없어 희미했다. 증명할 수 없는 희미함이 지금의 고도의 신분과 위치를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모든 게 난해하기만 했다.

“그런데 그런 옛이야기들이 예그리나가 날 붙잡고 운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

다과를 먹던 예그리나는 그 말에 다시금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서럽게 울음을 터뜨릴까 봐 청사는 예그리나의 주둥이에 복숭아 과즙을 부어 만든 다과를 쑤셔 넣으며 대답했다.

“하늘과 땅과 지하가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는 걸 말해 주고 싶어서 꺼낸 얘기야.”

“그래, 네 얘길 들으니 알았다. 한배에서 태어나 필요에 의해 위아래로 갈라진 세상이지만, 실은 다 통할 수 있단 뜻이지.”

“맞아. 네가 땅에서 운이 좋으면 신선들이 사는 청호림으로 들어갈 수 있는 돌계단을 발견하는 것처럼, 땅에는 하늘로 들어올 수 있는 무수한 구멍이나 샛길들이 존재해. 마찬가지로 도솔천 냇물이 흘러흘러 저승의 삼색물 지류가 되는 것처럼 저승과 천상을 오고갈 수 있는 방법도 많거든.”

“오호라, 네 말인즉, 저승에서 마음만 먹으면 천상으로 쳐들어올 수도 있단 소리네.”

“하물며 상대가 염라대왕인데 하늘로 오는 길을 모를까. 널 정말로 잡아가서 지옥의 불구덩이에 던져 버리고자 하면 언제든 납치해 갈 수 있는 여건인 셈이지.”

그러니 금돼지가 예그리나에게 “저승사람들이 고도를 끌고 가버린다”고 말한 것은 순전히 허풍만은 아닌 셈이다.

고도는 눈을 굴리며 생각했다. 어린 용이 불안해서 울며불며 난리를 부렸는데 말로만 괜찮다고 걱정 말라 달래 봤자 소용이 없을 듯했다. 예그리나는 용인데도 자주성이 부족하다고 천인들 사이에서도 자주 입방아에 올랐다. 겉보기엔 하늘이 점지해 준 최고의 용이지만, 하는 짓을 보면 팔푼이가 아닌가 곁눈질로 바라보곤 했다. 역시 모체가 인간이라, 그것도 말썽 많은 환영도사라 천룡 가문에도 액운이 낀 것으로 치부하는 이도 있었다. 아무래도 오래도록 조아반의 가문이 천룡직을 독식했으니, 인계를 살펴서 깜냥이 되는 용을 승천시켜 천룡직을 경쟁 붙여 보고 더 나은 용을 소경에 앉히는 게 어떤고 하는 뒷말도 자자했다.

고도는 저를 욕하는 일이야 대수롭지도 않고 신경 쓰지도 않았지만, 자신 때문에 청사와 예그리나가 피해를 보는 일만큼은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읏차.”

무릎을 짚고 일어난 고도가 노인처럼 허리를 두드렸다. 헐겁게 띠를 둘러 두었던 학창의를 반듯하게 입은 모습에서 여유가 묻어났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살랑거리며 가볍게 흔들리는 머리칼 사이로, 밤하늘보다 깊은 눈동자가 웃음기를 머금은 모습이 보였다.

“내가 산몸으로 저승을 가 차사들을 족치고 염마의 살생부까지 강탈하여 이름을 지운 방법, 궁금하지 않느냐?”

청사가 반색했다.

“그들의 약점을 아는구나.”

“눈치가 빨라졌어, 대롱이.”

“난 원래 눈치 하나는 둘째가 서러운 몸이었지.”

“눈치가 덕지덕지 붙은 대롱아, 그럼 어디 한번 걔네 약점 잡아서 몰래 천계로 숨어든다 한들, 나를 잡아갈 수 없다는 걸 증명해 보자꾸나.”

“좋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청사와 입가에 다과 부스러기를 잔뜩 묻힌 채 눈만 깜빡이는 예그리나였다. 고도는 청사와 예그리나에게 양손을 내밀었다. 고도의 얼굴엔 둘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웃음이 활짝 피어 있었다.

“우리 귀여운 아기 용이 즐거울 잔치다.”

*

조아반은 오동나무로 만든 장기판 위만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양반다리를 한 왼쪽 무릎에는 팔을 올리고 손바닥으로 턱을 괬고, 오른쪽 무릎엔 차(車) 말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오전에 청사가 들이닥쳐서 고도의 몸에 있다는 혜안의 보주 얘기를 해서 머릿속이 복잡한 터였다. 둘째를 보는 일이야 청사와 고도의 문제이니, 그들의 선택과 결정에 맡긴다고 하더라도 혜안의 보주가 정말로 고도의 몸속에 있다면 이것은 상제에게 어떻게든 알려야 하는 문제였다. 잠깐 서진을 불러서 얘기를 했을 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만큼 고도가 더 대단하단 소리 아닙니까. 상제께서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네요. 혜안의 보주가 있는 게 확인되면 꽃가마 태워서 옥황궁으로 보냅시다. 상제께서 눈물을 흘리며 안아 주실 겁니다.’

아니, 그러면 정말 좋겠다만, 그게 말처럼 쉽나. 상제에게 있어 고도란 존재는 오랫동안 골칫거리였다. 지금이야 천룡 가문의 새색시가 되어서 내버려 두는 것이지, 조금만 신경에 거슬리면 남보다 배는 더 큰 벌을 내리는 식으로 복수를 꿈꾸지 않을까 싶다. 그런 그에게 혜안의 보주 이야기를 꺼내면 독이 될지 꿀이 될지 가늠이 안 되었다. 덕분에 조아반은 복잡해진 머릿속을 비우고자 고도와 말을 나누었던 장기판을 되짚고 있었다.

고도에게 졌던 장기판을 복기하니, 고도의 특징이 보이는 듯했다.

고도는 장기를 거꾸로 두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자신이 “장이오” 소리를 들을 가능성과 그 소리를 뱉을 가능성을 딱 하나씩만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결말을 정해 두고, 그 정해 둔 결말로 가기 위한 모든 포석을 준비한다. 장기란 것이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기에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끝을 내는 것이 불가능할진대, 고도는 수를 주고받으면서 자신이 설정한 끝에 가까워지도록 가능성을 지워 가는 전략을 취하는 것이다. 가령, 마를 움직여 좌측에서 왕을 먹기로 했다면, 그 마가 좌측으로 가기 위해 포와 차까지도 포기하는 것이다.

장기에 유능한 이는 몇 수 앞을 내다본다고 하지만, 고도는 끝을 확정짓고 시작한다. 확정짓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이 이길지 질지의 여부일 뿐, 마지막 남겨 놓는 말은 장기를 시작하는 순간 결정해 놓는 것이다. 이러니 고도가 무슨 말을 고집할지 초반에 꿰뚫어 보지 못하면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고도의 차나 포를 먹고 신나서 뒤통수를 맞기 일쑤였다. 그래서 고도가 지는 판은 모두 고도가 정해 놓은 마지막 말이 도중에 잡혔을 때였다. 마지막 말만 살아남으면 조아반이 졌다. 서로 주고받은 승부가 정확히 반절이 될 때까지 고도의 이 비밀을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오래 산 인간이라 해도, 혜안은 용인 나보다 못할진대, 참으로 기이하단 말이야.”

조아반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색 차가 빙글 돌며 옮겨 다녔다.

“변수가 한두 개도 아니고, 마지막 남기려고 작정한 말을 어떻게 끝까지 살려서 끝을 보는 걸까.”

혹, 이것도 다 혜안의 보주가 힘을 보태 주는 것은 아닌지.

빙글 돌던 말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서 멈추었다. 장기판을 내려다보던 조아반이 눈살을 찌푸렸다. 안뜰을 가로지르며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수행하는 이를 옆에 대동하지도 않고 너른 치맛자락을 흔들고 있으니, 여인의 몸으로 그토록 대범하게 다닐 수 있는 이가 이 집안에는 딱 한 명뿐이지 않은가. 고운 깨끼옷을 입은 딸, 서진이었다.

“아니, 우리 예쁜 딸이 여긴 어언 일이느냐.”

검밖에 모르는 여인네라 선녀들과 달이 뜰 때까지 검을 섞던 딸이 집에 일찍 돌아왔다. 기이하면서도 반가운 마음에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돌리던 장기 말을 판 위에 내려놓았다. 가까이 다가온 서진은 고개를 모로 살짝 숙이면서 다소곳하게 인사를 하곤 바로 평소의 털털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천궁의 계단 앞에서 한무 놈을 만났는데 이 자식이 글쎄 저만 내버려두고 저 혼자 말을 타고 집에 돌아온 거 있죠.”

냅다 고자질하는 서진을 보던 조아반이 히죽 웃었다.

“사내란 게 그렇다. 사랑하는 이가 생기면 주변 따위 돌아보질 않지.”

“사내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한무를 보면 동생이라도 가관일 때가 많아요. 걘 머릿속에 도사 생각밖에 없나 봐요.”

“그 도사 하나 때문에 지금의 소경 자리까지 올라왔으니 봐주거라.”

“에휴, 언제 철이 들는지.”

“왜 그러느냐. 난 보기 좋던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게 얼마나 갸륵한가. 그게 가끔 공과 사가 구분이 안 되고 뒤섞여서 정신없이 휩쓸리는 일도 있긴 하다만, 청사와는 반대로 생각이 많고 침착한 고도 덕분에 일이 완전히 틀어진 적도 없으니, 둘의 관계는 균형이 잘 맞다고 할 수 있었다. 어느 한쪽도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고, 끌고 가려 하지도 않으면서, 서로를 보듬으며 생각하며 애를 쓰는 게 겉으로도 모두 드러나지 않은가. 보기 좋기만 하건만, 군을 통솔하느라 적확한 방향으로 생각하며 결정하는 데에 익숙한 서진이 보기엔 불안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혜안의 보주요. 그 문제는 옥황상제께서 직접 아시는 게 먼저라고 말을 해두었는데, 그 녀석이 잘 따를지는 모르겠습니다.”

서진은 아비가 앉아 있는 누마루로 올라왔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꽃바람에 허술하게 흘러내린 조아반의 머리카락도 덩달아 흔들리고 있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끼니도 대충 때우고 하루 종일 장기판만 들여다보는 모습이 영락없는 한량의 모습이다만, 그동안 소경의 자리에서 어떤 고생을 했는지 알기에 누구도 지금의 조아반을 나태하다 욕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쉬셔야지, 저러다가 지겹다고 자리 털고 일어나서 다시 옥황상제 옆에서 일을 달라고 손을 내밀까 봐 걱정일 정도였다. 혜안의 보주 건도 옥황상제에게 맡기자 먼저 말한 이가 서진이었다. 안 그랬으면 아비 반응은 뻔했다.

“상제도 바쁜데 그냥 우리끼리 처리하는 건 어떠냐.”

보나마나 이랬을…… 아니, 너무 예상에 맞는 반응이라 서진은 이마만 짚었다.

“혜안의 보주가 용들끼리 결정 내릴 문제가 아닌 건 아시잖아요.”

“그렇다고 냅다 상제에게 맡기는 건 너무 무책임하잖느냐. 우리가 뭐라도 해봤는데, 그래도 안 되더라, 하고 최종 보고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아버지, 아버지가 언제부터 그렇게 상제님께 충심이 깊으셨습니까.”

“누가 들으면 정말로 내가 상제랑 맞먹으려는 줄 알겠어.”

“예? 아니셨습니까? 상제님께서 매번 ‘새 마누라 얻은 기분’이라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던 기억이…….”

“커흠흠흠.”

혜안의 보주가 신경 쓰이기는 하나, 천상 생활이 그러하듯,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느긋하게 지켜보다가 느지막이 상제에게 보고를 올려도 누가 뭐라 할 이가 없는 세상이었다. 아마도 그런 여유가 몸에 배어서인지, 조아반도 서진도 더는 보주를 두고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엄밀히 따지자면 보주와 관련된 문제는 온전히 고도와 연관이 있는 것. 그것을 청사가 신경 쓰는 것은 당연하나, 둘의 문제를 가족 전체의 문제로 키워서 머리를 맞대고 하루 종일 골몰할 필요는 없다. 둘이 알아서 처리해 보도록 내버려 두어도 될 문제였다. 당장 급하게 해결해 본다고 닦달해 봤자, 지금 둘 사이에 다른 문제가 눈에 들어올까 싶기도 하고.

조아반은 적당히 식은 차를 마시면서 내려놓았던 장기 말을 집었다. 서진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판 위를 그 장기 말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고도라는 도사 말이다. 한 번에 속을 꿰뚫기가 어려워. 인간 주제에 그 정도로 만물의 이치를 꿰뚫고 있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 뛰어난 혜안을 겉으로 드러내지도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심성도 참 독특하단 말이야.”

조아반이 그렇게 판단할 만한 가치가 고도와 겨루었던 장기판을 복기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양인가. 서진은 특별할 것 없는 장기 말들을 살피며 대꾸했다.

“인간들이 사는 흐름과 속도가 우리와 달라서 그렇겠지요. 더 많은 것을 더 빨리 익히고 생각하며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현명해 보이기도 하고, 결단력이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솔하거나 아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 살아온 세상의 흐름과 가치가 다르니 이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말도 맞지만, 이런 분야에서까지 내가 고작 인간 하나의 속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지 않느냐.”

“이런 분야라 말씀하심은 혹시, 장기 말이신가요.”

“그래. 장기를 두면 상대의 생각과 성향을 알기 마련인데, 몇 번 손을 섞어 봤지만 판단할 수가 없어. 무슨 생각인지 잘 모르겠거든.”

조아반의 장기 말이 톡톡, 판 위를 두드렸다.

“혹시 승부는 별로 관심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자기가 살리기로 한 말을 끝까지 살려 놓는 게 목표일 뿐, 이기는 건 목표가 아닌 걸 수도 있고.”

방어만 하는 장기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니, 어쩔 수 없이 공격을 하더라도 끝까지 가져가기로 한 말만은 살려 두는 것. 도중에 그 말이 잡히면 그 말을 대처할 다른 전략을 고려해 두지 않았기에 패배로 이어지는 것.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일지도 몰랐다. 장기만 이렇게 두는 게 아니라, 평소에도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흐음.”

목 너머를 울리던 조아반이 무언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서진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누마루 너머 안뜰과 바깥뜰까지 고개를 돌려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쩐지 마당과 밭이 어수선했다. 힘깨나 쓴다는 종들이 양손에 무언가를 가득 들다 못해 등에도 한 짐을 이고지고 움직였다. 부엌에서 일하는 여종들도 웬 둥근 소반에 나무 숟가락, 젓가락을 올려놓고 부산히 날랐다. 옷에 수를 놓고 박음질하는 종들 역시 분홍색 버선과 신이 한가득이니 이건 어떤 손님을 맞이하려고 하는 모습일까.

“오늘 집안에 무슨 일 있습니까?”

서진은 일하는 이들까지 죄 나와 있는 모습이 의아하여 물었다. 조아반은 고개만 갸웃했다.

“나도 모르겠구나. 뭘까, 이건.”

“보아하니 위험한 일은 아닌 것 같군요.”

“한번 가볼까?”

“가보아야지요.”

조아반이 장기판을 물려놓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서진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누각 계단을 밟으며 내려왔다. 부산스러운 종을 잡고 뭣들 하는 거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지만, 붙잡고 물어보다가 자칫 저들이 일을 제때 끝내지 못하면 이런 일을 시킨 이에게 뭇매를 맞을까 싶어서 참아 보았다. 이런 일을 시킬 사람이 이 집안에 누가 있겠는가. 청사나 고도밖에 더 있을까.

“보배야, 보배야.”

조아반이 고도를 부르며 너른 마당을 가로지르니, 높은 문설주와 돌벽담 밑으로 복작거리는 사람들이 보이는지라. 힘 좋은 종들이 양손과 등에 이고지고 가던 것이 작은 묘목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안 조아반이었다.

“보배야, 이게 다 무슨 일이냐.”

이젠 보배 소리에 두드러기가 난 표정을 짓던 고도도 많이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묘목 한 그루를 바닥에 심던 고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아반과 그 뒤를 따라오는 서진에게 바르게 인사를 했다.

“춘부장, 지난밤 평안하셨습니까. 서진 군장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고도 옆에서 함께 묘목을 심던 청사도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랑 누이가 여긴 무슨 일이래요.”

부드럽고 촉촉한 흙을 온몸에 묻히며 바닥을 뒹굴거리던 예그리나가 삐이이, 하고 기분 좋은 소리를 내기도 했다. 서진이 그런 예그리나만큼이나 높은 목소리로 좋아서 꺄아아, 하고 비명을 질렀다. 저렇게 어린 용만 보면 귀엽다고 방방 뛰는데도, 시집가란 말을 하지 않는 조아반이나 애 낳는 것과 보는 것은 별개라고 딱 자르는 서진이나 주변에서 신기하게 볼만했다.

예그리나를 품에 안고 빙글빙글 도는 서진을 내버려 둔 채 조아반은 그들과 같이 묘목을 심던 종들 일동이 절을 하며 인사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문설주를 중심으로 담벼락 밑에 정체 모를 묘목을 가득 심고 있었다. 동문 옆엔 여종들이 챙겼던 둥근 소반과 밥그릇, 수저가 놓였고, 나무 접시 안에는 탐스러운 복숭아들이 볕을 받아 반짝거렸다. 남문에는 꽃분홍색 깨끼적삼과 장옷이, 서문에는 버선과 꽃신이 다소곳이 놓여졌다. 묘목이며 그릇, 옷, 신에서 한결같은 향기가 풍겼다.

“집안을 복숭아밭으로 만들 셈이냐.”

조아반의 의아한 물음에 고도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송구합니다. 이곳 천상에서 만주사화만큼 복스럽게 여기는 것이 복숭아라 들어서, 집안 가득 심어 보려는데 혹 불편하십니까.”

“나무만 심는 것도 과해 보이는 규모지만, 문마다 복숭아 물을 들인 옷감과 복숭아나무로 만든 상차림을 보니,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구나.”

“하하, 역시 어르신 눈을 속이지 못하겠습니다.”

“재밌는 일이라면 나도 끼워 주거라.”

“별거 아닙니다. 저승차사들이 오지 못하게 해두는 것뿐입니다.”

아니, 인계도 아니고 천상에서 웬 저승차사 타령일까. 이해하기 어려운 수를 두는 장기처럼, 고도의 맥락 없는 이야기의 연유를 물었다.

“염마의 사신들이 여기 오는 걸 막으려고 복숭아로 가득 채웠다고?”

“차사들이 가장 질려 하는 나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복숭아나무지.”

“맞습니다. 예부터 차사들이 무서워하던 것이 셋 있으니, 하나는 귀신을 내쫓고 액막이로 신령하게 쓰이는 복숭아요, 둘째는 살아 있는 사람이오, 셋째는 염라대왕이죠.”

자고로 저승차사들은 복숭아 향기만 맡아도 속이 메스꺼워지고, 복숭아 나뭇가지로 때리면 상처가 나고, 복숭아로 물들인 옷은 무거워서 입지도 못하고, 나뭇가지를 죽에 쑤어 잘 말려 만든 신을 신으면 발병이 나기 마련이라. 이승에서야 산사람들은 조상님 혼령이 집에 잘 들라고 향나무를 심어 두고, 복숭아나무를 심어 두지 못하게 만들지만, 천상에서는 저승차사들을 볼 일이 없으니 그 향긋함과 달콤함만 즐기느라 사방에 깔아둔 게 바로 복숭아였다. 그것들을 고도가 조금 더 이용 하겠다 하여 문제될 것은 없었다.

차사가 싫어하는 것이 산 사람이란 말은 죽은 자여야 저승으로 끌고 가서 일을 끝마칠 텐데, 명부에 이름이 적혀서 죽은 줄 알고 끌고 가려 했던 이가 살아 있으면 일이 배로 늘어나서 질려 함이오, 염마를 두려워하는 것은 나라와 종족과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모든 이들은 선배와 스승과 상사를 싫어한다는 뜻 아니겠나.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게 된 고도가 천상까지 와서 몰래 잡아가려는 차사들을 상대하기 적당한 것은 역시 복숭아였다. 복숭아로 사방 천지를 물들이니 예그리나도 안심하며 더는 울지 않아서 다행이었고. 이렇게 아기자기한 소꿉놀이처럼 한 가족이 담 밑에 둘러앉아 묘목을 심는 모습이 될 줄은 몰랐다만.

“차사들이 너를 잡아갈까 봐 이렇게 사방을 도홧빛으로 물들이는 게냐.”

집주인인 조아반이 괘념치 않는 모습이 다행이었기에, 고도의 대답에서도 긴장감이 한결 가셨다.

“감히 천룡의 집을 쳐들어올 정신 나간 차사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흠, 차사들이 모두 정상은 아니더라고요.”

“마치 겪어 본 말툰데.”

“많이 겪어 봤죠. 머리에 복숭아 화관을 쓰고 허리에 복숭아 나뭇가지를 두르고 주머니엔 복숭아씨를 한 움큼 챙겨가서 덤비는 차사들 입에 쑤셔 넣었거든요.”

“저런, 차라리 똥을 먹이지.”

“똥은 삼킬 수라도 있지 않습니까.”

“역시 잔혹한 환영도사일세.”

“제가 복숭아나무로 변신해서 차사들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려 준 얘기도 언제 시간 나면 들려드리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청사가 고도를 보며 조용히 박수를 쳤다. 그렇게 차사들을 농락했으니 염마가 입에서 불을 뿜으며 고도를 잡으려고 안달이 난 게 이해도 되었다.

“이 나무들에 열매가 나면 우리 집 식구끼리 다 먹지도 못 하겠어.”

청사는 식솔들이 팔을 걷고 심는 묘목 개수를 눈으로 헤아리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봄마다 만개하는 복숭아꽃에 온 집안이 분홍빛으로 물든 모습을 보면 괜히 설레서 일도 못 하는 거 아닐까 싶었다. 고도는 턱 밑을 긁으며 흐음, 하고 목 너머를 울리더니 그리 대답했다.

“이웃에 다 뿌리는 건 어때.”

“나눠 주자는 뜻이야?”

“복숭아는 오래 보관도 못 하는 과실이니, 뭣하면 옥황궁에서 일하시는 분들께 모두 돌려도 되고.”

“그럼 환심도 살 수 있어서 좋겠어. 잘 키워 봐야겠네.”

고도가 위험해질 일을 줄이면서 천인들에게 환심을 살 수 있는 일석이조 방식에 고도와 청사는 마주보고 웃었다. 고도의 곁으로 예그리나가 날아왔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몸을 고도의 어깨에 기대어 머리를 들이밀었다. 기분 좋게 웃어 보이는 예그리나에게선 창문을 부수고 날아와 엉엉 울고 손짓발짓 다 동원하며 고도가 제 곁을 떠날까 봐 두려워하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 나무를 심고 문설주마다 차사를 대접할 옷과 신, 음식상을 마련하는 것은 이승의 법칙이었다. 저승차사란 자고로 자신이 잡아가야 할 인간에게 극진히 대접받으면 함부로 끌고 갈 수가 없는 제약이 있지만, 천상에서도 그런 방법이 통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염마도 바보가 아닌 이상 산 사람을 끌고 가는 이승의 저승사자나 바리데기보단, 옥황상제에게 협조를 구하여 복숭아의 효험도 없을 저승시왕 중 일부를 보낼 수도 있는 노릇이니. 이 모든 일이 소용없는 헛짓거리가 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의 고도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예그리나가 불안해하며 울지 않는다. 청사도 탐탁치 않아 하던 예그리나를 먼저 찾고 흙먼지를 털어 주고 있다. 집주인인 조아반도 제집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것에 괘념치 않았고, 가솔들 특히 여종들은 꽃을 따러 꽃밭에 갈 일이 앞으로 없겠다며 복숭아꽃으로 화관을 만들 이야기에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삐이이!”

예그리나가 무어라 외쳤다. 고도가 그 뜻을 몰라 고개를 갸웃했더니, 옆에서 청사가 예그리나의 말을 해석해 주었다.

“금돼지를 잡으러 가자는데.”

“음?”

“네가 저승차사들한테 끌려간다고 말한 성수.”

“아아, 뭘 그런 걸로 잡으러 갈 필요가 있나.”

그 말에 예그리나가 눈을 치켜뜨며 외쳤다.

“삐이이이, 삐이, 삐이이이.”

이번에도 예그리나의 말을 해석하는 일은 청사 몫이었다.

“괘씸해서 금색 털을 모조리 뽑아 버려야겠대.”

“저런, 우리 아이가 누굴 닮아 이렇게 광포한 말만 골라 쓰나 모르겠구나.”

“삐이이이!”

“그게 바로 용의 덕목이라고 말하네.”

광포함을 용의 덕목이라 말하면, 청사는 그 자질을 갖추지 못한 것 같고, 딱히 고압적이지도 않은 조아반 역시 그 덕목에서 탈락해야 하지 않을까.

주변을 둘러보던 고도는 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조아반의 시선을 마주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운, 그 담담한 조아반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고도는 용의 혜안으로 제 속마음을 읽었나 싶어 뜨끔했다. 그러나 조아반이 먼저 웃어 보이는 바람에 고도 역시 이유도 모른 채 따라 웃고 말았다.

조아반은 고도가 신기했다. 아무리 곁에 두고 지켜봐도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하늘에 닿았던 지상에서의 악명도, 그런 악명에 스스로 묶여 힘들어하고 죽고 싶어 하던 고통도 보이지 않았다. 외로운 섬도 아니고, 고통의 길도 아니고, 옛 도읍도 아닌, 고도였다. 아마도 이젠 새로운 의미가 필요할 그 이름의 주인.

“혜안의 보주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긴 하지. 그건 느긋하게 알아봐도 아무 문제없느니라.”

조아반의 혼잣말에 고도는 혼자 그런 생각을 했더란다.

이 망할 천룡 집안은 모두들 자기 말만 하고 그 뜻을 알려 주지 않는 게 특징인 것 같다고. 딱히 제 말에 설명을 덧붙이진 않은 조아반이 고개를 주억였다. 앞으로 장기 상대로 고도를 찾을 바에야, 옥황궁에 올라가서 상제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선에서 물러난 천룡이 자기가 심심하다고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을 놀이 상대로 지목하면 상제는 기가 막혀 하겠지만, 알 게 뭔가. 어차피 상제도 장기를 둘 상대가 없어서 심심해할 텐데, 이렇게 뒷방 늙은이들끼리 놀아야지.

천상에선 모두들 근심 걱정 없이 즐겁게 사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 당연한 일을 비로소 영위하고 있는 듯한 고도를 보자 조아반이 고도를 대신해 예그리나를 품에 안았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도 웃고 있는 어린 용만큼이나 제 얼굴에 묻은 흙을 털어 주는 청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고도였다.

문설주에 걸어 놓은 옷자락이 복숭아 향을 풍기며 바람결에 흔들렸다. 누가 자기를 해치러 온다는 얘길 들어도 소꿉놀이하듯이 웃고 있는 고도였다. 그 미소를 보면서 청사는 오랫동안 밝은 표정으로 제 님을 바라봤다.

*

수련이 핀 못가에 고도가 즐겨 가는 누각이 있었다. 기분이 좋을 때면 그곳에서 거문고를 켜곤 했던 고도가 청사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혼자서 줄을 뜯는 것보다 더 기분 좋은 것을 찾은 사람처럼, 그는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대롱아, 우리 둘째 가질까?”

고도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던 청사가 그대로 굳었다. 달큼한 복숭아 내음만큼이나 단내가 나던 청사의 눈동자도 세로로 기다랗게 줄어들고 있었다.

“예그리나 동생을 낳자고?”

당황한 모양이다. 고도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청사의 목 뒤로 두 팔을 돌렸다.

“왜, 무서우냐.”

둘째 이야기에 잠깐 잊고 있던 사실들이 새록새록 생각난 청사였다. 여러모로 복잡한 심정이었다. 고도에게 보주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생각하면서도, 두 번째 알을 보면 자연스럽게 보주의 존재를 이야기할 만한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지금 이야기했다가 괜한 걱정을 하게 하면 어쩌지, 하는 여러 가지 고민도 들었다. 청사는 고도가 이젠 아무 걱정 없길 바랐다. 아무 걱정 없이 그저 행복하고 태평하게만 살았으면 하는데.

“이런 소릴 하는 네가 더 무서워.”

세상은 여전히 너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것만 같구나. 그렇게 혼잣말을 삼킨 청사였다. 청사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 고도는 고개를 갸웃하더니만 흠, 하고 목 뒤를 울렸다.

“둘째까지 가지면 감당하기 어려우려나?”

보주의 정체를 알 수 있다면 갖고 싶지만……. 복잡한 심정으로 고도를 내려다보던 청사가 빙긋 웃었다.

“너 예그리나의 알을 품었을 때, 몸속에서 기운이 들끓어 죽을 고비를 넘긴 거 기억 안 나는 거냐.”

“그걸 걱정하고 있구나.”

그것도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다. 보주 이전에 고도가 알을 품게 되었을 때의 건강 악화가 제일 신경 쓰였다.

“당연하지. 네가 그렇게 고생했는데 어떻게 둘째 갖자는 말에 기뻐해?”

“거긴 땅이었고, 땅에서 천기를 받으려니 몸이 남아날 리가 없지. 여기선 다르지 않겠어?”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물어도 될까.”

“예그리나가 많은 형제들과 함께 오순도순 행복하게 자랐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들이 너를 도와 작건 크건 천상과 지상, 지하의 일을 했으면 좋겠고.”

하늘의 기운을 품는 일이 말만큼 쉽지 않은 일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고도는 자신이 겪을 고통보다 청사나 예그리나의 행복을 기원했다. 보통의 용들과 달리 어리광도 심하고 의존도도 심한 예그리나가 조금만 불안해지면 서럽게 울면서 매달리는 모습을 본 이상, 언제까지나 그를 따라다니며 달래 줄 수는 없는 법. 제 형제들과 뒤섞여 살다 보면 용으로서 가져야 할 자질을 배우게 될 것이다. 혼자 자라서 천계에서 쓸모없는 천룡 취급을 받으면 예그리나를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고도도 슬퍼질 터였다. 용들이 하는 일이 많아서 청사를 돕지 않으면, 청사가 그 일들을 모조리 혼자 떠맡아야 하니 힘들고 괴로울 테고. 자식들에게 일을 분배할 수 있다면 청사도 훨씬 편하고 행복해질 것이다.

“널 닮은 벽안의 용을 보고 싶은 것도 있거든.”

장난스러운 고도의 말에 청사는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워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고도는 몇 달 전 혼롓날이 떠올랐다.

혼례 준비로 지친 고도가 잠깐 잠이 들었을 때였다. 멀리서 들려오던 풍악 소리가 지척에서 귀를 따갑게 울렸다. 파도처럼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환호가 앞으로 쓸리듯 들어왔다 뒤로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소리는 피부에 먼저 닿았다. 옷 너머에서 북소리에 맞춰 흔들리기도 했다. 고도는 귀와 살갗을 어지럽히는 소리의 향연에 멍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비어 있던 공간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감각들로 가득 차서 아직 그 느낌을 따라가기 벅찼다.

‘잘 잤어, 고도?’

포근한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고도는 발끝을 간질이는 햇살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햇빛을 등지고 있어서 정수리부터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사내가 몸을 숙였다.

차르륵, 흔들리는 구슬 소리가 들렸다. 면류관을 본딴 혼례용 모자가 가지런히 올려 묶은 청사의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멍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고도에게 청사가 햇살처럼 웃더니 쪽쪽, 입술과 볼에 입맞춤을 내려앉혔다.

고도는 옥과 금, 투명한 보석들로 알알이 꿴 구슬들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돌들이 저희끼리 몸을 부대끼며 새처럼 울었다. 하늘보다 파랗고 청명한 눈으로 고도를 빤히 내려다보던 청사가 고도가 앉은 의자 앞에 다리를 포개어 앉았다. 고도의 무릎에 볼을 기댄 청사는 고도의 훈색 혼례복이 행여나 구겨질까 봐 여종들이 고정해 놓은 집게와 장신구들을 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고도였으나, 자기 자신을 살피지 못할 만큼 청사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곧 식을 올려야 한다. 끝나면 실컷 재워줄 테니 조금만 힘내 보자, 고도.’

고도의 손끝을 이로 살짝 깨무는 청사였다. 그는 고도를 일으켰다. 안절부절못하는 여종들의 태도를 눈치챘기에 고도의 손을 잡고 자연스럽게 방을 가로질렀다.

청사의 손가락이 고도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끼어 들어왔다. 다정하게 깍지를 낀 청사와 고도가 여종들이 열어 준 방문을 넘어갔다. 마당으로 이어진 돌담길 너머에 새소리처럼 삐이익 울고 있는 예그리나를 달래는 조아반과 고도의 옷가지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서진, 직접 행차하지 못한 동해용왕의 바다 사신들과 상제의 천궁에서 보낸 축하 사절단, 온 마을 천인들과 관료들, 서른세 개의 하늘에서 띄워 보낸 연등과 꽃이 세상을 오색빛깔로 물들였다.

고도는 난생 처음 받아 보는 환대에 얼떨떨해졌다. 자신을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기다리고 지켜보는 장면은 생에 처음이라. 서진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들어온 예식의 순서를 까먹을 정도로 얼어붙고 말았다. 청사가 그런 고도의 어깨를 붙잡아 빙글 돌려 세웠다. 고개를 숙여 입술에 입을 맞췄다. 사방에서 몰려 있던 사람들이 한차례 소란을 피웠다. 식도 올리지 않은 둘의 순서가 엉망이었다. 청사가 모든 식순을 무시하고 멋대로 진행하는 모습에 서진이 멀리에서 뭐라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둘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고도야, 앞으로 어떤 길이든 함께 걷자.’

청사가 말갛게 웃으면서 다시 입을 맞췄다.

‘네 길 위에서 평생 이 꽃을, 저 구름을, 온 향기와 노래를 내 모두 알려 주리라.’

어느새 어린아이들이 와르르 달려와 청사의 머리에 화관을 씌우고 꽃잎을 뿌려대는 통에 말릴 틈이 없었다. 풍악대가 청사 귀 바로 옆에서 악기를 울어대고 광대들이 좋아서 공중제비를 뛰어다녔다. 아이들에게 꽃을 한 아름 받은 고도가 산적한 꽃송이에 오도 가도 못하고 곤란해했다. 청사는 준비된 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소란에 한바탕 자지러지게 웃었다. 청사는 자신의 옆에 선 고도를 품에 안아 들었다. 주변에서 와아아, 귀가 멍멍할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청사의 품에 안겨 꽃세례를 받고 있는 고도는 전에 없이 수줍은 얼굴로 청사의 품만 파고들었다.

길의 목적지가 중요할까. 그 위에서 보는 풍경이 중요한 것을.

시작은 하나였으나, 와중에 둘 이상이 되는 것이 바로 길을 걷는 즐거움이다. 그리고 이젠 그 즐거움을 청사에게 되돌려줄 차례였다.

“둘째라.”

청사는 눈을 굴리다가 생긋 웃었다.

“네가 좋다면 나야 환영이지.”

“이 녀석, 내가 먼저 이런 얘길 꺼내길 기다렸단 툰데.”

“당연하지. 난 고도랑 합일하는 거 너무 좋아.”

“색골이야, 색골.”

“내가 하늘의 힘을 개방하고 너를 완전히 잠식할 때, 그때 정말 기분 좋아.”

“색골 맞네.”

평범하지만은 않은 그 합일의 과정을 생각해 낸 고도는 볼만 긁적였다. 과정에 더 만족해하는 청사와 달리, 고도는 결과를 위해 다시금 운을 뗐다.

“둘째 가지자.”

“응, 가지자.”

“좋은 기일 잡아 보자.”

“여긴 지상과 달라서 그렇게 꼼꼼히 따지지 않아도 될 텐데.”

“떽, 그러다가 윤사월 그믐날에 알이라도 생겨 봐라. 삼년 액과 세 가지 살이 다 드는 날에 우리 아이가 불행해지면 어쩌려고.”

“걱정이 되면 바로 알아보마.”

“그래 주면 고맙겠구나.”

청사는 고개를 숙였다. 고도의 반듯한 이마에 입술을 꾹, 누른 청사가 미소를 머금고 속삭였다.

“사랑해, 고도.”

그 말은 언제까지고, 아마도 용으로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다하여 둘째 형이 누워 있는 하늘로 올라가는 그때까지도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변함없다는 말은 달리 받아들이면 지겹다고 할 수도 있건만, 고도는 청사의 사랑 고백에는 언제나 처음 듣는 것처럼 설레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삶조차 지루하여 반드시 끝내고 싶다고 생각했건만, 이제는 그 삶이 매순간 행복했다. 이 행복은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그 덕분이었다. 청사가 없다면 존재하지 않을 행복. 고도는 청사가 만들어 준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언제나 말하지만.”

다시금 부드럽게 앞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에 꼽아 주면서, 고도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내가 더 사랑한다, 내 대롱아.”

고도의 승부욕은 조아반과 겨루는 장기판 위에선 존재하지 않았다. 고도가 언제나 이기고 싶은 것은 청사의 마음이었다. 그가 겨루고 싶은 것은 상대를 누가 더 생각하는지, 그 마음의 크기였다. 아마도 어렴풋하게 이 사실을 깨달은 조아반과 달리, 고도는 자신의 모든 것이 온통 청사에게 쏠려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고도의 시선에 눈가를 붉히는 청사 또한 알지 못할 일이라.

“그런데 나 하나 말할 거 있는데.”

분위기 좋은 때에 주춤주춤 말하는 청사 덕분에 입이라도 맞춰 주려던 고도가 멈추었다. 청사는 새파란 눈을 굴리다가 결국 입을 뗐다.

“너, 땅의 주인이 품고 있던 ‘혜안의 보주’를 갖고 있는 거 같아. 아마도. 확신은 안 가지만, 아마 맞을 거야.”

그게 뭔지는 몰라도 어쨌든 큰일이라는 것만큼은 눈치챈 고도였다. 고도는 대체 왜 이런 얘길 이 시점에서 하는지 몰라 머리만 굴리다가 한숨을 삼켰다. 입을 맞추어 주려던 달콤함 대신이 손가락으로 청사의 콧방울을 퉁기며 말했다.

“상제님을 알현하고 말씀 드려야겠다. 내일 입궐할 때 나도 함께하자.”

“어, 뭐? 정말? 바로 상제님께 고하게?”

“땅의 주인과 관련된 일인데 당연히 보고해야지.”

“안 돼! 그럴 거면 둘째 갖고 얘기하자!”

“왜지?”

“보주 때문에 네가 잉태하는 걸 상제님이 반대하면 나도 거역할 수가 없잖아!”

이왕 낳기로 한 거, 하계에서 반밖에 드러내지 못했던 합일의 방식 말고, 온전한 방식으로 고도를 품고 싶었다. 그 ‘온전한 방식’이란 고도는 상상도 못 할 야하고 음탕한 방식이지만, 그걸 위해 둘째를 갖자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으니 청사 속만 까마득하게 타들어 갔다. 고도는 멀거니 그런 청사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소경이란 감투를 뒤집어쓰면 뭐할까. 청사는 여전히 고도 문제에 있어선 일희일비하는 소녀였다.

“상제께서 낳지 말라면 낳지 말아야지. 천룡이 드높은 하늘의 뜻을 어길 셈이냐.”

“그, 그건!”

“뭘 이런 걸로 실망하고 그래.”

“넌 죽었다 깨나도 모를 거야!”

“이거 가만 보니 둘째 낳자는 빌미로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구먼.”

“……넌 절대 모를 거라고.”

“흐응.”

“부부지정을 내 입으로 어떻게 다 설명하겠느냐. 용이 반려를 두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알잖아. 반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어떤 식으로 육신이 변화하는지, 저번 예그리나 때는 맛보기만 보여 준 거란 말이다.”

“흐으으응. 거기가 이만해지기라도 하느냐.”

“아, 팔뚝 내보이지 말고오!”

“아님 허벅지나 허리가 이마안해지느냐?”

“아, 고도오오!”

놀리는 고도와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청사의 투덜거림이 한참을 이어졌다. 어르고 달래는 고도와 마지못한 듯 기분을 푸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도의 손만 꼭 잡고 있는 청사를, 주변에서 일하던 이들이 보고 양팔만 북북 긁어댔지만 말이다.

고도를 닮은 용과 청사를 닮은 용이 매번 뒤엉켜 싸우다가도 서로를 꼭 끌어안고 따뜻한 볕 아래에서 자는 모습을 가솔들, 조아반, 서진, 청사, 고도는 물론이오, 사택으로 논쟁을 하러 온 관인들조차도 소중하게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은 아주 조금 더 지난 훗날의 일이었다.

아주 조금 더 지난 훗날.

여전히 즐겁고 왁자한 어느 날 말이다.

예그리나(Yegrina) 외전(外傳) :: 왁자한 천상의 나날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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