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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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는 조력자들이 돌아간 관아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창틀에 앉아 짹짹 울어대는 바라믓새의 옥구슬 굴러가는 지저귐에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네 시진 넘게 꼬리에 꼬리를 문 안건 검토와 논쟁에 지쳐 버렸다. 정리해야 할 내용이 한가득임에도 손을 놔버렸다.

지금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머리를 조금이라도 더 굴렸다가는 머릿속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죽음이 코앞에 와서 똑똑 두드리는 기분이다. 처음 겪어 본 장시간 회의에 넝마 조각이 된 청사는 엎드린 팔에 얼굴을 묻었다.

조력자들이 돌아가고 텅 빈 199칸 관아엔 청사뿐이었으니 누구 눈치를 보지 않고 편히 쉬고 싶었다. 아비의 정무를 도와주느라 종이에 무언가를 필사하는 백관들을 제외하면 청사는 마음 놓고 한숨을 내쉬며 눈을 붙일 수 있는 여건이었다. 문밖에서 여종들이 “서진마마 납시옵니다.”고 말하는 소리만 없었다면. 그 소리만 없었다면 이대로 저승행도 괜찮을 만큼 까무룩 잠이 들고 싶었건만.

“정무 보는 중에 미안합니다, 오늘은 아우가 귀환한 별스러운 날이니 양해를 구해도 되겠습니까.”

서진은 여종들이 열어 준 문지방을 넘자마자 일을 하는 백관들에게 정중한 사과를 올렸다. 아비의 일을 돕고 있는 백관들을 섬세하게 신경 써주는 서진에게 불평을 토로할 이가 어디 있을까. 그녀의 말마따나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만큼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도 모두들 괜찮노라고 대답해 주었다. 미소로 화답해 준 서진은 상 위에 엎드린 것도 아니고 몸을 똑바로 편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의 청사를 바라봤다. 이제 막 잠이 들려고 했는지 졸린 눈을 찌푸리고 있는 아우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한무야, 각설이가 따로 없구나. 회의가 아니라 몸싸움이라도 했니, 이 꼴이 다 뭐야.”

낭창한 누이의 핀잔에 청사는 안 그래도 엉켜 있는 머리를 손으로 벅벅 긁었다. 잠자기는 글렀구나. 청사는 몸을 바로 세우고 누이를 맞이했다.

“누이가 이 먼 외아까지 어쩐 일이야.”

“네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발길을 재촉했단다.”

그 말에 청사는 “보여 주고 싶은 거?”라고 물으려 했던 입을 벙긋 다물었다. 서진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서진은 수꿩처럼 화려한 자수가 놓인 치마를 흔들었다. 치맛단에 수놓인 금박 나비와 꽃이 햇빛에 비쳐서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치맛단에 그려진 꽃과 나비가 머리에 실제 모양으로 얹혀 있었다. 은사와 곡옥, 백옥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머릿장신구는 서진만큼이나 그 화려한 위용을 뽐냈다.

누군가를 맞이할 때나 입을 법한 옷을 서진이 입고 있는 것이 의아했다. 이런 장신구들은 번잡스럽다면서 선녀옷만 걸치고 다니는 누이가 어언 일인가 싶었다. 이렇게 옷을 차려입을 정도면 누군가를 만나려는 것이고, 그 만남에 청사를 끌고 가려는 것은 아닐는지. 청사는 눈치껏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피곤한데 한숨 자고 일어나서 보면 안 될까.”

“그때쯤이면 아버지께 빼앗길걸. 아버지가 어찌나 마음에 들어 하시던지 그대로 상제께 연락해서 보여 주려고 난리였다니까.”

“별스럽군. 아버지가 장기 외에 다른 것에 마음을 돌리다니.”

“오죽하면 나랑 짝을 맞춰서 내게도 이런 옷을 입혔겠느냐.”

“뭔 소리야?”

“내 옷은 늦게 준비해도 되거늘, 아버지가 지나치게 좋아하셔서 그 분위기에 휩쓸려 나마저 옷 갈아입기 놀이를 하고 말았단다.”

“대체 뭔 소리야 그게.”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동생에게 평소라면 정강이를 발로 찼을 서진이었지만 이번엔 너른 아량으로 넘어가 주었다. 그녀가 문밖에 있는 이를 기분 좋은 목소리로 불렀다.

“도사야, 들어와 봐, 어서.”

고도를 부르는 소리에 청사는 귀를 쫑긋 세웠다. 잠이 깬 얼굴로 얼른 누이의 넓은 치마폭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문 너머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던 고도가 그제야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발을 뻗었다.

문지방을 넘어 들어오는 고도를 본 청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언제나 상징처럼 입고 있던 검은색 두루마기를 벗은 고도는 흰색 포 위에 노을 색과 복숭아색, 홍화색이 아름답게 펼쳐진 훈색 답호를 입고 있었다. 답호 위에는 금색과 홍자색으로 물들인 세조대를 매고 있었는데 딸기술의 길이가 답호 끝자락보다 두 뼘 위에서 멈추었기에 걸을 때마다 단정하게 너울거렸다. 장신구를 최소화했으나 요대를 구성한 보석이 옥과 금으로 세밀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앞머리는 누이의 머리 장식으로 고정하여 넘긴 상태였다. 누이와 같은 모양의 장신구는 길게 내린 은사와 금으로 만든 나는 새 모양이었다. 과하지 않고 딱 알맞은 아름다움이었다.

단정하고 소박한 모습만 봐왔던 청사는 고도의 화려한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도의 옆에서 누이가 말하길, 아버지가 너무 젊은 사람들이 입는 것 같다며 꺼내 입지 않는 옷과 장식물을 찾았다고 한다. 고도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잔뜩 입혀 보고 개중 으뜸으로 마음에 가는 것을 골랐으니, 아비도 좋아서 무릎을 탁 치는 이 차림새가 청사 눈에는 어떻느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불행히도 누이의 목소리는 청사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영 불편한 얼굴로 자신의 차림새를 바라보는 고도만이 청사의 눈에 보이는 전부였다. 고도는 제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청사를 힐끔 보더니 옷자락을 손끝으로 잡아 내리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식을 올릴 때 혼례복을 준비해야 된다고 들었어. 색상을 확인해 보라고 예비로 입어 보라 하셔서 걸친 거고. 아, 음. 아무리 봐도 영 어울리지 않는데 식은 건너뛰면 안 되겠느냐.”

그리 묻는 목소리조차 청사의 귀에는 닿지 못했다. 청사는 멍한 얼굴로 고도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한참이나 반응이 없는 청사에게 고도가 “그리 이상하느냐”고 묻는 목소리만 얼핏 인지했다.

패물과 식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남성 둘의 혼사를 천인들이 쉽게 수긍할지, 물론 용족의 경우는 모체를 남녀 불문하고 잉태시킬 수 있다는 걸 알고는 있다지만, 실제로 그걸 행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천인들이 거부감이 있을 텐데 식을 올릴 때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많은 것을 염두한 누이가 손을 꼽으며 말해 주었다. 누이가 워낙 털털해서 자주 여자라는 사실을 잊었지만, 이번만큼은 귀한 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일일이 신경 써주는 안주인 노릇을 톡톡히 보여주었다.

그러면 뭐할까. 기껏 생각한 바를 간추려 말하는 누이의 소리는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청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냅다 고도를 품에 안고서 들어 올렸는데 말이다.

“어머.”

누이의 짧은 비명에 정무를 정리하고 외아를 나가려던 백관들이 멈추어서 쳐다보기 시작했다. 화려한 꽃분홍색으로 물든 옷을 입고, 금색으로 반짝거리는 장신구들을 허리와 머리에 꽂은 고도를 청사가 두 팔로 안아 올렸다. 고도의 허벅지와 무릎을 잡아 자신의 몸에 바싹 붙였다. 허공으로 들린 고도는 움찔거리며 청사의 어깨를 손으로 쥔 게 고작이었다. 청사의 시선에는 고도의 당황한 얼굴만 보였다. 앞머리를 시원하게 넘겨서 반듯하게 드러난 이마가 살짝 찌푸려진 모습이 그리도 예뻐 보일 수 없었다.

“내게 보여 주려고 이렇게 예쁘게 차려입어 준 건가, 고도가? 응? 네가 정말로?”

들뜨다 못해 살짝 떨려 나오는 목소리였다. 청사가 바싹 붙은 얼굴을 붉히며 고도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청사의 반응을 지켜보던 고도의 얼굴이 차츰 붉어지다가 이내 목 언저리까지 새빨갛게 불타올랐다. 고도가 이리도 부끄러워하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복장 때문에 수치스러워하는 것인지, 청사에게 모든 속내를 꿰뚫려서 당황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고도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청사를 원망하는 시선을 보내는 바람에 청사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고도를 더 세게 안았다.

“부끄럽지도 않느냐. 어서 내려놓아라.”

부끄럽냐니, 그런 당치도 않은 소리가 어디 있을까. 청사는 여전히 홀린 눈으로 고도를 바라보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내 반려가 너무 고와서 걱정이 하늘 같아. 고도야, 네가 이렇게 예쁘면 앞으로 얼마나 피곤한 줄 모르지? 너한테 꽃이 달라붙고 햇살이 뒤따라오고 바람이 머리를 잡아당기고 새들이 옷깃에 파고들어 날개를 비빌 텐데, 만물에게 널 빼앗기긴 내가 싫구나.”

“이게 드디어 미쳤구나. 내가 선녀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잖아.”

“선녀랑 비교를 하다니, 네가 미쳤지.”

“아, 한무야, 제발 그만해라.”

“어쩌지. 예식 올리면 네 이렇게 예쁜 모습을 하늘이 다 알게 된다는 거잖아. 안 되는데, 어쩌지.”

“그만하라니까.”

“자랑하고 싶은 마음 반, 숨기고 싶은 마음 반이야. 미치겠구나. 아, 진짜 미치겠다, 고도야.”

“내가 더 미치겠다. 대체 너희 집안 왜 이러는 거야.”

사람을 얼마나 더 부끄럽게 하려는 거야, 대체. 이렇게 화려한 옷도 극구 입지 않으려고 했지만 청사의 누이와 부친께서 기대하는 눈치가 역력했기에 갈아입었다. 누이는 갖가지 색으로 옷을 입혀 본 끝에 ‘설마 저걸 선택하진 않겠지’라는 고도의 불안감 그대로 훈색 옷으로 결정을 내렸다.

아연실색한 얼굴로 옷을 걸치고 있으니 이것저것 장신구를 가져왔다. 머리가 짧아서 관이나 립을 쓸 수 없기에 대신 여성용 장신구로 머리를 깔끔하게 넘겨주는 기이한 행동까지 보여 주었다. 모두 다 잡아 뜯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그네들의 좋아하는 모습에 억지웃음을 보여 줬는데 “한무에게도 보여 주자!”고 누이가 손바닥까지 치며 들뜰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청룡의 개인 사택에서 외아까지 걸어오는 내내 겸인들의 시선이 꽂혀서 고도는 한참이나 옷소매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누이는 고도를 보며 “미려한 선비 같아서 참 예쁘다”고 말해 줬으나 오랜 세월을 살아와 뼛속까지 보수적인 늙은이에 가까운 고도로서는 젊은 것들이나 입어야 어울리는 미색 복장을 자신이 걸쳐서 무척이나 해괴하다고 여기기 바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청사가 보고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비웃지 않은 일이다. 이제 와 보니 차라리 비웃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반응이 더 곤란하다. 청사가 이 복장을 이토록 마음에 들어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누이, 이런 느낌으로 혼례복도 준비할 수 있을까?”

고도를 여전히 품에 안고 있는 청사가 물었다. 일회성 복장이 아니라 혼례에서도 이런 옷을 입어야 하느냐며 기함한 고도와 달리, 서진과 청사는 죽이 잘 맞았다. 그녀는 고도가 노란색, 분홍색, 파란색이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여러 개의 옷을 갈아입히면서 확인한 후였다. 개중 분홍색이 고도 특유의 무심한 분위기를 한층 없애 줘서 수줍은 청년처럼 보여 주는 덕에 혼례에서는 꼭 분홍색을 써야겠다고 여겼다. 그녀는 청사의 물음에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색깔과 밑단의 자수가 이러면 되겠니?”

“응, 새나 나비, 꽃 등으로 자수를 놓을 수 있으면 더 해줘.”

“금단으로 물들이고 그 위에 은실로 자수를 박도록 하마.”

“장신구는 어떻게 할까.”

“예식에 맞춰야지. 장신구까지는 건드리기 어려울 것 같다. 복식 색은 조금 변화를 줘도 되겠지만 장신구는 전통이니까.”

“옷만이라도 자유롭게 고를 수 있다면 괜찮아. 이 꽃분홍색 정말 마음에 들어. 이런 걸 고도가 입은 모습도 처음 보고, 이렇게 잘 어울릴 줄도 몰랐어. 검고 하얀 것만 걸치고 다녀서 몰랐는데, 고도는 살갗이 하얗고 고와서 이런 부드러운 색도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

청사는 품에 안고 있는 고도를 한없이 바라보면서 웃었다. 눈가까지 빨갛게 물들이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청사를 보자 고도도 그만하라고 그를 밀쳐낼 수 없었다. 청사로부터 기쁨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그 기쁨이 고도 자신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는데 어찌 먼저 밀쳐내고 면박을 줄 수 있을까.

고도는 몸에서 힘을 빼고 편안하게 청사에게 안겼다. 청사는 고도가 얌전히 자신의 목을 안고 있자 행복하게 미소 지었다. 청사와 서진과 달리 분홍색 복식을 기이하게 여기는 고도는 표정이 조금 퉁명스러웠으나, 옷을 벗겠다느니, 하는 고집은 부리지 않았다. 얌전히 청사가 원하는 대로 따라 주는 고도의 마음이 어여뻐서 청사는 두 볼을 붉혔다. 청사의 입술이 고도의 따끈하게 익은 볼을 꾹 눌렀다.

“고도야, 너는 봄 같은 사내구나.”

볼과 턱에 입맞춤을 받으면서 고도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는 이러한 낯간지러운 말들에 면역이 생길 법도 하건만, 여전히 자신을 향해 스스럼없이 쏟아붓는 사랑 고백들이 부끄러운 고도였다. 고도는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 반박했다.

“봄은 너겠지.”

“너야, 고도.”

“나는 겨울이 잘 어울리는 사내라 생각한다만.”

“그럴 리가 있나. 고도는 내게 봄인데. 언제나 봄이야.”

“옷 하나에 이렇게 홀릴 줄 생각도 못했어.”

“내가 나비였다면 네 품에 먼저 날아들었을 거다.”

“윽, 너 그런 말 하지 말래도.”

“새였다면 널 위해 노래 불렀을 거야.”

“으, 으아…….”

“물이였다면 널 적시는…….”

“그만하라고, 이 멍청아.”

고도는 두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미 이 차림새에 푹 빠진 청사에겐 무어라 말해도 통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아이고, 이게 그리 좋을까. 그동안 장식에 신경 쓰지 않은 게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때릴 줄이야. 나비와 새, 물에 이어 또다른 헛소리를 하려는 청사를 고도가 먼저 막아 버렸다.

품이 넓은 소맷자락으로 청사의 목을 감싸고 청사의 이마에 쪽 뽀뽀를 해주었다. 고도의 입맞춤을 기분 좋은 눈으로 받아들인 청사가 똑같이 고도의 이마에도 입술을 묻었다. 고도의 이마를 타고 청사의 따뜻한 숨결이 번졌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서진이 남세스럽다며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말리지는 않고 얌전히 지켜보기만 하였다. 누이의 암묵적인 동의를 얻은 청사는 그녀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고도의 이마 선을 따라 콧잔등으로 내려오는 입술이 콧방울에서 멈추고는 둥근 끝을 이로 살짝 깨물기도 했다.

“혼례는 기일이 잡히면 바로 진행하자. 괜찮지, 고도?”

청사가 혼례 일정을 꺼낼 줄 알았지만 일찍 앞당기는 것에는 반대였다. 고도는 고개를 살짝 틀어서 코끝에서 멈춘 청사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쪽 소리 나게 대었다가 떼어 냈다. 아주 가볍고 사랑스러운 입맞춤이었다. 고도의 차림새 덕분에 더욱 만족스러운 청사가 눈웃음을 생글생글 지었다. 고도는 행복해 보이는 청사가 오해하지 않도록 부드럽게 그의 청을 거절했다.

“거절할 이유는 없겠다만, 너무 급하게 진행하면 네가 일정에 치일 것 같은데. 곧 즉위식을 가져야 하지 않느냐.”

“즉위 전에 혼례일이 잡히면 혼례 먼저 할 거야.”

“흐음. 아니, 즉위 먼저 하자. 그게 더 중요하다.”

“내가 두 일정을 소화하기 빠듯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라면 괜찮다. 두 일정을 동시에 진행해도 무리 없어.”

“네가 괜찮다니 다행이지만 보는 눈이 좋지 않을 거야.”

“보는 눈?”

“네가 혼례를 먼저 치르고 즉위식을 갖는다면 상제의 오른편에 서서 대의를 돌보는 것보다 사랑에 빠져서 사적인 일을 중시하는 이로 낙인찍힐 수 있지. 그런 잡음이 생길 일은 내가 반대한다.”

고도의 이야기를 청사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혼사를 먼저 진행하면 고도 말대로 부정적인 여론이 생길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고도를 반려자로 책봉한 점에도 불만을 가진 세력이 있건만 여기서 꼬투리를 더 잡히면 앞으로 천룡으로 살아가는 데에 어려움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즉위식을 거행하고 금경소관보좌에 앉으면 혼례를 치를 여유가 조금도 생기지 않을 테다. 즉위를 하자마자 아비가 아랫것들에게 분산시켰던 일을 다시 정리하여 자신이 도맡아야 하건만, 아비의 일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못해도 오 년에서 길면 이십 년 가까이의 세월이 걸릴 것이다.

용의 수명에 비하면 턱 없이 짧은 기간이나, 인간의 생체 시간이 더 익숙한 청사는 1년 단위로 세월이 변하는 것을 직접 지켜보았다. 그가 생각하는 ‘긴 날’이란 1년을 칭하는 것이었다. 그 긴 날을 한 번도 아닌 다섯 번 이상 보내야만 이리도 예쁜 고도와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있다는 게 못마땅했다. 즉위식 전에 혼례를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언제 혼례를 할지 장담할 수가 없다. 청사는 생각을 바꾸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례가 먼저야, 고도.”

청사의 고집 어린 말씨를 가만히 듣던 고도가 청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땅에 내려 달라는 신호였다. 청사는 고도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고도는 문지방 너머에서 새끼 용을 돌보는 여종을 바라봤다. 용은 눈을 떴을 때 고도가 보이지 않으면 빼액, 소리를 내어 울었다. 다행히 하루 대부분을 잠만 잤기 때문에 눈을 잠깐 떴을 때 밥을 먹여 주고 놀아 주기만 하면 남은 하루를 평온히 보낼 수 있었다.

고도는 그다지 귀찮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열 달 품어 아이를 낳는 인간과는 분명히 다른 방식이었지만 자신을 인간의 자식처럼 따르는 용이었다. 용의 성정 자체가 독립적 운운했지만, 새끼 용은 지극히 인간을 본딴 행동을 보였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아니라도 이처럼 따르는 어린 생명체가 있다면 보살피고 돌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용이 작은 앞발로 옷깃을 꼭 잡고 놓지 않으면 기분이 묘했다. 잘 돌봐 주지 못한 죽은 딸아이가 생각나서 새끼 용만큼은 한 번이라도 더 만져 주고 안아 주고, 같이 놀아 주고 있었다. 하나, 땅에서 먼 하늘까지 와서 용의 보모 노릇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청사의 정치적 위세를 위하여, 그와 함께 있고자 후계자를 낳았다. 그러나 용의 모체로서만 인정받을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새끼 용의 모체는 맞지만, 그걸 무기 삼아 건달처럼 하늘을 주름잡는 행동은 비열하다 못해 촌스러웠다. 날개 달린 새끼 용을 이용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떳떳한 부모의 역할도 못할 것이다. 고도는 청사에게 단호히 물었다.

“한무, 너는 내가 이 새끼 용의 모체로서 하늘에 인정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무 직위나 목적도 없이 그저 용의 어미로서만 인정받으면 만사형통이라는 질문에 청사는 냉정하게 현재의 상황을 설명했다.

“응룡의 모체는 정략적으로 아주 큰 힘을 가져. 너를 내쫓고자 하는 이들을 정당하게 반대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상제의 총애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지. 네가 안전하게 하늘에서 지낼 수 있는 수단을 동원하는 게 잘못된 일이냐.”

“글쎄, 내 출신 성분을 이유로 들어서 내쫓으려는 이들은 지금은 새끼 용 때문에 물러나도 추후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나를 내쫓고자 피곤하게 굴 겠지. 애초에 너희 용족에게 모체의 개념은 희박하잖아. 하늘 위의 모든 이들이 안다. 용이란 자주적이고 독립적이어서 부모의 역할이 필요 없다는 걸. 그걸 알면서도 나를 인정할 리가 없지.”

“하지만 응룡이야. 이 아이가 널 원하고 있잖아. 이 애는 보통 아이와 다르게 행동하고 있고 그걸 하늘이 충분히 알 수 있도록 하면 돼.”

“그것도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해. 어차피 크면 알아서 잘 먹고 잘살 텐데, 그때까지만 나를 거두어들이고 이후에 쫓아내도 할 말 없어져.”

“그건—.”

“한무. 네가 인간인 나와 함께 있느라 지나치게 인간적으로 이 상황을 판단하고 있다. 내가 보기엔 응룡의 모체라는 건 중요하지 않아. 어미가 중요한 것은 사대부 교육을 받은 인간들에 한해서니까.”

응룡이 가치 있더라도 이걸로 모든 위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살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대면하게 될 고도는 고작 응룡의 어미라는 직위만으로 모든 것을 타파할 자신이 없었다. 아주 힘없는 명분에 매달려서 청사 옆에 있다가는 자신뿐만 아니라 청사의 힘마저 약해질지 모른다. 청사의 짐이 되고 싶지 않다. 응룡의 모체로서 인정받는 것과는 다른, 고도 그 자체의 힘이 필요했다. 하늘의 법칙을 따르면서 하늘의 존재들이 모두 인정할 수 있는 방법. 그걸 찾아야 한다.

“고도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청사가 고도의 의견을 물었다. 응룡의 모체라는 직위만으로 앞날이 불안정하다면, 안정적인 해결책을 준비해야 했다. 땅에서처럼 산산수수화화초초 흐름에 몸을 맡기고 팔자의 소관이라 치부하며 살아가기엔 하늘이란 곳이 무서운 고도였다.

고도는 땅에서와 달리 하늘에서는 약자였다. 고도가 뛰어난 도술을 발휘해도 상제의 벼락 한 번으로 몸이 산산조각 날 테고, 천인들이 신선술을 부려 주박을 하고 천라지망을 펼쳐 잡으려고 나서면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인간들 사이에선 뛰어난 힘을 가졌어도 천인들에게는 쉽게 통하지 않을 터. 힘으로 자신의 몸을 지키기 어렵다면 천룡처럼 높은 직위가 필요했다. 고도는 인간인 자신이 천계에서도 직위를 가질 수 있는지를 먼저 확인해보기로 했다.

“네가 나를 필요로 하도록 만들어라. 나만이 너를 도울 수 있도록 해줘.”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원해?”

“네가 천룡직을 수행하는 데에 내가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나를 건드릴 수 없으면 된다.”

“나는 고도와 군신의 예를 맺고 싶지 않다. 난 너와 반려가 되고 싶을 뿐이야. 내가 하는 일을 네게 명령하며 도와주길 원하는 게 아닌걸.”

“반려란 네 공무를 비롯한 모든 생활을 함께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흠. 내 생각이 틀렸나?”

냉정한 고도의 말에 청사는 감정적으로 대답할 수 없었다.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의 안팎으로 모두 힘이 되어 주기 때문에 반려이다. 청사는 고도가 원하는 대로 냉정하게 현 상황을 다시 점검하기로 했다.

“네 말이 맞아.”

“내가 너를 돕는 데 부족함이 있어서 꺼려진다면, 이 얘긴 그만 하고.”

“전혀 아니야. 고도라면 뭐든 맡길 수 있어.”

“그렇다면 날 위해서라도 뭐든 맡길 수 있는 직책을 만들어 줘. 내가 하늘의 그 누구도 수행할 수 없는 일을 오로지 너를 위해 할 수 있음을 공표하게 만드는 거지. 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어.”

고도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고도는 귀찮은 것도 싫어하고 누군가에게 신세 지는 것도 싫어한다. 가급적 하늘에서 소란을 피울 바에야 조용히 사는 것을 원한다고 했던 사람이다. 청사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넌 하늘에서 조용히 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도 정치 일선에서 나를 위해 움직이고 싶단 말을 들으니 내가 어째야할지 모르겠어. 그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알잖아.”

모를 리가 있을까. 이곳과 규모는 비교할 수 없지만, 계략과 정략이 넘치는 왕실에서도 생활해 봤던 고도이거늘. 하지만 신선놀음을 하는 게 여의치 않다고 도망 다닐 수는 없었다. 고도는 눈에 튀는 행동은 자제하려 했으나, 자신과 청사를 지키기 위해서 피곤한 행동을 한다 해도 괜찮다고 생각을 돌렸다. 청사와 함께 평온하게 지내기 위해서 다른 무언가를 희생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응당 그래 줄 수 있다.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그러니 걱정 마라.”

청사는 고도가 어떤 의도에서 자신에게 정치적 힘을 실어 달라고 말하는지를 알았다. 상제의 오른팔이기 때문에 천인들 그 누구도 천룡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이 천룡의 최측근이므로 건드릴 수 없게 해야 했다. 고도를 암살하거나 괴롭히는 일이 곧 천룡의 대의에 어긋나고 이는 상제의 뜻에도 반함으로 연결시켜야 했다.

고도가 응룡의 모체로서 인정받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응룡의 가치가 하늘에서는 몹시도 귀하기에 고도도 함께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청사의 조력자들도 우려한 부분은 현재가 아닌 앞날이었다. 응룡이 자라서 용의 특성인 독립성을 깨우치면 고도는 모체로서의 직위를 잃게 된다. 그때가 되어서 고도를 추방하려는 여론이 다시 들끓으면 고도를 정당하게 보호할 마땅한 대책이 없다.

조력자들이 도와준 부분은 바로 고도의 안전한 생활을 위한 직위를 만들자는 것. 선견지명이 뛰어난 천인들이 머리를 한데 모아 논의했기에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이 해결책은 고도가 합의해야만 가능한 부분이다. 청사 혼자서 독단적으로 끌고 나갈 부분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하늘에 고도를 데리고 와서 살면 그에게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천수를 호강시켜 준다 말했던 다짐에 반하는 부분이었다. 다시금 고도를 고생시키는 일이었고, 고도가 원치 않아도 자신이 명령을 내려야만 하는 일이었다. 고도와 아무것도 걱정 없이 그저 사랑만으로 함께 살기엔 청사가 지닌 지위가 극히 높아서 너무 많은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고도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과 그 행복을 준비하는 일이 서로 달라서 고도를 힘들게 할지 모른다. 때문에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몰라 머리가 녹아내릴 것 같은 치열한 생각 속에서 조금 전까지 지쳐 있지 않았나. 그 고민을 고도가 먼저 거들어 주었다. 고도가 청사를 반듯하게 보면서 말하고 있다.

괜찮다고 말한다. 복잡하고 힘든 일에서 혼자 물러나 멀거니 쳐다볼 생각은 없다고. 청사가 치열하게 준비해 주는 것만큼 자신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 보겠다고. 고도가 먼저 자신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 청사는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을 다잡았다.

고도에게 보답해야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 주고, 자신을 사랑해 준 고도에게 보답을 해줘야만 했다. 고도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청사는 그를 아끼고 사랑하며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용에게 반려란 그가 살아가는 세상 그 자체다.

“누이, 서경권을 행사하는 모든 이들을 불러 줘.”

고도를 한 팔로 안은 청사가 서진을 향해 말했다. 청사에겐 걱정이나 두려움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하늘의 높은 신분들을 상대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요구하는 것을 조금도 염려하지 않았다. 정식 즉위도 받지 않은 차기 천룡이 상제의 일을 돕는 현직 백관들과 언쟁을 벌이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다니. 서진은 청사가 허세가 아닌 확신을 가지고 행동함을 눈치채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책을 받을 수도 있다. 네 지위가 낮아서 백관들을 소집하는 것 자체를 문제 걸고넘어질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으냐.”

“혼나는 거야 상관없다. 어차피 내가 부르면 다 와야 할 것을. 그들도 고도에 대해 할 말이 많겠지. 내가 먼저 그 말을 할 수 있는 자리를 열어 주겠다는데 누가 반대할까.”

“그렇긴 하구나.”

“그러니 고도에 대한 논박의 자리를 마련할 테니 의견이 있는 이는 단 하나도 빠짐없이 모이라고 해줘.”

조력자들까지 머리를 맞대고 고생한 문제를 단숨에 처리하고 고도와 행복하게 혼사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늘은 고도와 자신의 편이다. 응룡을 낳은 순간 확신한 청사는 서진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고도를 하늘에서 내쫓으려는 이들 모두가 모이는 자리로 만들어 줘. 그 자리가 파하는 순간, 누구도 고도를 건드릴 생각조차 못 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

벼르고 있던 백관들이 몰려들었다. 날개 달린 말을 타고 오는 이들은 모두 옥황상제의 33개 하늘을 돌보는 천인으로, 휘하에만 수만이 넘는 가솔을 둔 이들이었다. 그들은 상제의 부름이 없으면 머무는 하늘을 떠나지 않는 것이 진리였다. 아직 천룡으로 봉책되지 않은 어린 용의 부름에 지체 없이 나타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각개별로 얼굴을 보기도 힘든 33개 천궁의 주인들이 붉은 자미사화의 꽃망울이 지평선까지 흐드러지게 심어 있는 천룡의 집으로 속속들이 발을 내렸다. 차기천룡이 서경권 자리를 미리 마련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모두들 준비했다는 듯 일합으로 도착했다. 천룡의 반려자가 고도라는 소문이 퍼진 순간부터 암암리에 모여 천계의 평온을 우려하던 이들이었다.

서경권에서 따져 물을 것이 많았던 터라 천룡의 자택 외아에 모여서 빠르게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 중 고도를 인정하는 이는 없었다. 모두 고도의 전적을 입에 올리며 천룡의 반려자 선택에 유감을 표하는 것은 물론, 쫓아낸 고도가 하계에서 몹쓸 짓으로 분풀이를 할 수도 있으니 명계로 바로 내쫓는 게 어떻겠느냐는 강경한 의견도 내비쳤다.

시끌벅적한 백관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직위가 없는 도솔천의 주인, 가전연만이 침묵하며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가전연은 유일하게 법복을 입고 있는 이였다. 그 역시 33개의 하늘 중 하나를 다스리고 있으나, 이는 높으신 상제의 뜻보다 여래가 올 것을 대비하는 제자의 마음이 더 컸다. 대대로 도솔천의 주인은 정치적으로 잘 얽히지 않음이 공공연히 퍼져 있었다. 그가 회의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금번 서경권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암시하고 있었다.

가전연은 제 뜻보다 다른 하늘의 주인들이 부탁한 바가 있었기에 그 약속을 지킨 것에 불과하므로, 빠르게 교환받는 의견의 틈바구니에는 끼어들지 않았다. 그저 여유롭게 도자기 잔에 차를 우려 조심스럽게 마시기만 하였다. 고요한 그를 제외한 32명의 천인들이 둥근 원형 탁상에 모여 앉아 바삐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차기 천룡은 무엇을 믿고 이 자리를 앞당겼는지 아시겠습니까.”

“글쎄요. 믿는 구석이 있어서 이러는 것 아닐까요.”

“소문을 듣기로는 혼례를 일찍 진행하고 싶어서 서경권과 같은 절차를 미리 처리한다는 분위기입니다.”

“허허, 배짱이 두둑하네요. 혼례를 위해 이 자리를 앞당기다니요. 무엇이 먼저인지 분간을 못 하시는 어린애였습니까.”

“말조심하시지요. 후에 우리보다 높은 곳에서 상제님을 모실 분입니다. 아무리 현재 보위가 낮다 하더라도 앞날을 위해 그리 직설적인 말은 삼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오나, 저는 차기 천룡의 판단을 도무지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옛날엔 여색을 밝히더니, 이제 와 남성 인간을 반려로 맞는다니요. 이리도 일관적이지 않은 분을 어찌 금관소경보좌로 모실 수가 있지요?”

“그것은 그분을 임명하는 상제께 항소를 할 사항이지요.”

“항소는 무슨, 지금 상제의 결정에 반대한다는 소리입니까? 그런 불경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차기 천룡의 행동을 하나도 이해 못 하기에 답답한 마음에 한 말입니다. 그를 명백하게 비난하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차기 천룡 자체에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두들 입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곳에 모인 이유는 그의 반려자 때문입니다. 그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반려의 반대로만 이야기를 진행해 주세요. 차기 천룡 자체를 반대한다는 인상은 결코 심어 줘서는 아니 됩니다. 제 의견에 모두 동의하십니까.”

합심하여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 속에서 가전연만이 고요하게 찻잔을 두 손으로 잡아 올렸다. 말투는 기품 있고 우아했지만 모두들 혀 밑에 가시를 숨기고 차기 천룡을 문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차라리 서경권 자리를 천룡에 즉위한 후로 미루었으면 이 정도로 드러내놓고 반대하는 입장을 보진 않았을 텐데. 금관소경보좌가 자신의 반려자에 대해 백관들이 의견을 내지 못하도록 압박할 수는 있어도 즉위하지 않은 어린 용의 입김은 그만큼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한무가 사랑에 눈이 멀어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못하고 어리석게 군다는 말까지 나온 이상, 서경권 자리가 얼마나 각박할지 벌써 눈에 보였다.

“한무께서 드십니다.”

웅성거리는 소란은 외아의 문이 열리는 순간 멈추었다. 양옆으로 열린 문 너머에서 푸른 답호를 입은 청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청사를 본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사가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진중한 눈을 빛냈다. 여종의 안내로 문지방을 넘는 청사에게서 발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청사가 한 걸음 뗄 때마다 묘한 긴장감이 외아에 모인 천인들에게 비수처럼 꽂혔다. 정수리에서 머리를 높게 묶은 청사는 한때 천계에서 여색을 밝힌다 하여 제 아비가 하계로 내쫓았을 때와는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어리고 철이 없던 때와 달리 신중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볼 줄 알았다. 고위 백관을 단순히 늙은이로 취급하는 대신 정중한 예를 갖추는 우아함으로 대하는 법을 알았다. 그는 자신을 숨길 줄 알았지만 결코 자신을 낮추지도 않았다. 부러 꾸며 낸 분위기가 아니었다. 못 본 새 겪은 수많은 일로 인해 심경의 변화가 있었고, 자신의 위치에 맞게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기에 가능했다.

청사를 철부지 어린애로만 취급하면서 의견을 교환했던 천인들이 서로를 힐끔 쳐다보다가 슬쩍 고개를 저었다. 예상과는 다른 청사의 모습을 보고 그를 도발하거나 업신여기는 행동과 말투는 결코 해서는 안 된다고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었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청사가 원형 탁상의 빈자리에 앉으니 일어났던 백관들도 의자를 당겨 착석했다. 청사가 없었을 때 보이던 견제와 날카로움을 소매 속에 감춘 이들이 어느새 부드럽게 풀어진 눈가와 호선을 그리는 입매로 청사를 맞이했다. 그들은 인자한 어른처럼 웃으면서 덕담을 주고받았다.

“하계에서 편히 쉬다 오셨습니까.”

“이리 뵈니 아버님을 많이 닮으셨습니다.”

“즉위식이 곧이라고 들었는데 따로 시간을 내어 즉위 절차를 배우시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나중에 연락 주시면 현안과 안건을 정리해서 보내드릴 터이니 언제든 편하게 말씀하세요.”

청사는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천인들을 향해 기품 있게 웃었다.

“말씀만으로도 모두 감사합니다. 좋은 이야기 잘 새겨듣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언제든 저희에게 편안히 연락 주시지요.”

천인들은 능구렁이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이 혀끝에 묶여 있는 얼굴로 이리도 너스레를 떠는 것이 청사의 눈에 훤히 보였다. 천인들은 실없는 이야기나 하려고 이리도 급히 모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청사가 그 주제를 입에 올리는 순간 다들 통탄을 금치 못하며 이야기를 쏟아 내리란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덕담을 주고받으면서 시간을 때우기 아까운 것은 청사 쪽이다. 청사는 여종이 가져온 찻잔을 손으로 잡고 조용히 마시면서 말했다.

“제 반려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를 기다렸다는 듯 가장 근엄하게 앉아 있던 ‘불환’***이 고개를 들었다. 대경과 중경의 업무를 돕는 백관들이 먼저 불환을 돌아보며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사가 오기 전에 누가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지 결정한 모양이었다. 청사는 불환에게 완전히 시선을 돌리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천룡의 후계께서 반려자를 찾은 부분에 대해서는 저희 모두 감축드릴 일이오나, 그 반려 대상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청사의 직위에 도전하려는 의식은 전혀 없기에 청사의 선택이나 결정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청사에게 미움을 받으면 후사가 두려워진다. 후환을 피하여 말을 조심하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청사가 차기 천룡 자리에 오를지 여부가 불확실하다면 청사에게도 강경하게 말을 하겠지만, 이미 직위가 내정되어 있는 그를 반대하여 미운털이 박히는 것은 극구 사양하며 조심했다. 청사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 그의 반려에게 우려를 표하는 것뿐, 불환은 청사가 혹 기분 나빠하지 않을지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청사는 용이 평생을 바친다는 반려자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청사는 너르게 받아 줬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걱정하시는 부분이 있으니 서경권을 발휘하시면서 의견을 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청사가 이야기를 받아 줄 수 있는 분위기임을 확인하자 불환에 이어 ‘예류’와 ‘일래’까지도 말을 거들었다.

“반려께서 많은 능력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 능력이 하계뿐 아니라 하늘 위에서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저희는 우려하고 있습니다.”

“하계와 명계에 큰 혼란과 근심을 안겨 주셨죠. 하늘에도 같은 소란을 일으키면 저희들이 전에 없이 강경하게 대처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저희가 감히 천룡의 반려자에게 능력을 봉인할 계약을 맺거나 신선술을 이용해 부적과 진으로 그분의 행동을 제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언제 이 고요한 하늘이 시끄러워질지 모르는 근심과 걱정을 안고 혼사를 축복해 드리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모두들 돌려 말하고 있으나 뜻은 하나였다. 고도의 악평이 자자하니 하늘에서 받아 줄 수 없다는 것. 지금은 이리 우아하게 ‘우려’를 표하는 선이지만 청사가 제 뜻을 굽히지 않는다면 혼사를 축복하지 못한다는 위협이었다. 더해서 고도라는 악인을 천계에서 받아들이는 나쁜 선례는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일종의 경고를 하기도 했다.

청사는 소리를 죽이고 차를 마셨다. 차를 마시는 청사는 한 톨의 불쾌감도 표현하지 않았다. 평온한 눈매와 입가를 유지했다. 청사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안면을 유지하는 것에 32명의 천인들은 청사가 이전과 같은 망나니가 아님을 대번에 파악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자신의 숨은 뜻과 생각을 겉으로 비추지 않았다. 그 어떤 유명한 예언가가 와서 점을 본다 할 손, 그의 아비이자 일선에서 물러난 전(前)청룡과 완전히 똑같은 분위기라며 고개를 저을 것이다. 아무도 그를 읽을 수 없다. 단 몇 년 만에 이러한 경지에 다다른 청사를 바라보는 눈빛이 모두 신중하게 바뀐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청사가 푸르게 빛나는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청사의 속을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적잖이 놀란 분위기를 알면서도 청사는 처음 보였던 부드러운 미소를 끝까지 유지했다. 하나 그의 아름다운 입을 통해서 흘러나온 말은 누구보다도 위엄이 담겨 있었다.

“그대들은 제 반려의 과거 행적으로 현재를 판단하고 있군요. 반려가 하늘에서 결코 소요를 일으키지 않노라 맹세를 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청사의 말에 불환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인간의 맹세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청사의 시선을 받은 불환이 예를 갖추며 말을 이었다.

“인간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존재입니다. 선밖에 없는 천계에서 인간이 지닌 악한 면을 우려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또한 선만이 발을 들일 수 있는 이 극락에 악이 머물면 천계와 하계, 명계를 구분하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어기는 일이 됩니다. 악이 들어 있는 존재는 하계에, 악뿐인 존재는 명계에, 선뿐인 존재는 천계에 있는 것이 인과율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차기 천룡의 반려를 받아들임으로써 깨트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땅에 속한 존재를 땅으로 보내시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마땅한 일을 부디 고려해 주십시오.”

가장 원론적인 이유를 들어서 고도를 반대하고 있었다. 청사는 신중하게 불환이 한 이야기를 곱씹었다. 그의 말에 허점이 없는지를 확인해 보니 역시나 구멍은 존재치 않았다. 역시 말로 먹고 사는 이들다웠다. 청사는 준비된 모범 답안을 하는 불환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고도가 악하기 때문에 하늘에 들일 수 없다는 것이군요.”

“그 불문율은 저희가 아닌 태초에 정해진 바입니다. 저희가 어찌 선조의 뜻을 거역하겠습니까.”

“허면 그대들의 높으신 ‘하늘’께서 고도를 받아들였다면 그 불문율도 깰 수 있겠습니까.”

청사의 질문에 불환은 대답 대신 그를 바라보았다. ‘하늘’이 고도를 인정한다는 청사의 말의 뜻은 하나였다. 신께서 그를 선택했다는 의미이다. ‘신’이란 말은 명명자인 인간이 붙인 말이다. 존재하는 모든 신이한 존재를 줄여서 ‘신’이라 표했으나, 그 의미가 천계로 올라와 쓰일 때는 의미의 폭이 좁아졌다.

신이란, 천인과 천룡, 상제보다 높은 존재다. 제아무리 천인들이라도, 신의 의지는 헤아릴 수 없는, 하늘 밖의 또 다른 존재였다. 이 세상이 생겨난 근원, 이곳을 이루도록 수많은 장치를 둔 이 세상의 설계자. 그를 ‘신’이자 ‘하늘’이라고 불렀다. 그는 태고에만 이곳에 관심을 가졌을 뿐,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난 정치인처럼 누구도 그의 존재를 아는 바 없이 그저 그의 뜻을 이어 받기만 하고 있다. 그런 자가 어찌 차기 천룡의 반려자를 직접 점지했다는 말인가. 불환은 우려를 표했다.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한무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는 결코 세상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뜻을 직접 전하는 일도 없지요. 그가 고도라는 인간을 하늘로 데려와 인과율을 어기도록 했다는 말을 선뜻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것은 조금 있다가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증명한다고. 그분과 직접 내통하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옥황상제도 연결되지 않는 그분을 어찌 감히. 이 불경스러운 말을 내뱉는 청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라서 천인들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아무리 차기 천룡이라지만, 그 선을 넘었다고 생각한 불환이 이전보다 강하게 의견을 말했다.

“한무, 중요한 말을 나중으로 미루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증명해 주십시오. 하늘을 걸고 말하신 만큼 저희를 온당하게 설득하지 못한다면 조금 전 발언은 불경죄로써 상제께 저희가 직접 고할 것입니다.”

청사는 날 선 불환의 반응에도 여전히 평온한 얼굴이었다. 일부러 도발을 하여 화를 돋운 것일까. 예견된 반응이라는 듯 고요한 수면과도 같은 청사의 모습에 불환은 묘한 초조함을 받았다. 청사가 무엇을 믿고 이리도 고요하게 제 뜻을 굽히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하늘이 인정했다면 그대들도 고도를 받아 주실 겁니까.”

“……그것은.”

“제 눈치를 보지 말고 말씀하시지요. 설령 하늘이 고도를 지지한다 할 손, 그대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해도 괜찮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기 위해서 마련한 자리이지 않습니까.”

백관들은 침묵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청사가 눈치 보지 않고 말해도 된다고 했지만, 실제로 청사에게 그리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설령 청사가 지금은 괜찮다고 여겨도 후에 생각해 보니 말씨를 괘씸하게 여겨 천룡으로 즉위를 한 후 불이익을 주면 그것은 누구 탓으로 돌려야겠는가. 백관들은 앞으로 청사를 모시고 살아야 할 자신들의 입장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말을 삼갔다.

이러한 분위기를 먼저 읽은 이는 가전연이었다. 가전연은 사전에 백관들이 찾아와 부탁한 바를 수행하기로 했다. 차기 천룡인 한무에게도, 그의 반려라는 고도에게도 유감은 없으나 하늘의 뜻을 결정하는 자리이니만큼 사감은 삼가기로 했다.

“차기 천룡께 인사드립니다. 33천 육계 일부인 도솔천을 다스리는 승려, 가전연이라고 합니다.”

청사는 불환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가전연을 바라봤다. 공손하게 인사하는 가전연의 눈이 맑았다. 정치적 실세와 득실을 따져서 행동과 말을 계산하는 백관들과는 달랐다. 그에겐 꾸밈이 없었다. 청사에게 잘 보일 필요도,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유리와 같은 이다. 투명하여 안이 비친다. 비치는 내용물은 부유물이 없고, 탁함이 없으니, 청사가 접한 모든 천인 중 가장 정갈한 이였다.

“제가 한 말씀 올려도 괜찮습니까.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하시면 내쫓으셔도 됩니다만.”

청사는 정면에서 부딪히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땅에서는 백구미호와도 매일같이 부딪혔다. 사소한 일상생활에서부터 중대 결정까지 생각을 부딪으며 자신을 굽히지 않은 끝에 결론을 내렸다. 그랬기에 가전연의 태도는 반가웠다. 다른 고위 백관들이 몸을 사리며 정치적 보복을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 그에게는 묻어나지 않았다. 순수하게 맞부딪힐 수 있는 이였다. 청사는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물론입니다. 말씀하십시오.”

“감사합니다. 말하기 전에 제가 이곳에 온 이유를 얘기해 드리려 합니다. 저는 고도라는 당신의 반려를 잘 알고 있습니다.”

청사는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였다. 한 번도 고도와 마주한 적이 없는 천계의 승려가 어찌 고도를 상세하게 알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저는 하계에서 ‘논의제일(論議第一)’이라 불립니다. 불법을 설파하는 도승들과 꿈에서 만나 부처의 뜻을 전해 주며 하계의 일에 끊임없이 개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때 하계에서 가장 유명한 승려였던 ‘강문’과 밀접하게 꿈속에서 만났습니다. 꿈 속에서 저는 나비로 화해 그의 어깨에 앉은 적이 있으니, ‘고도’라는 자를 파악함에 천계의 누구보다 박식할 수 있었습니다.”

청사는 강문이란 말이 갑작스러웠다. 오랜 옛날, 고도와 이념적인 대립을 나누었던 이다. 한때 고도의 둘도 없던 친우였으나 결국 이별을 맞이한 이였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하고 덕한 성자로 알려져 법력에 있어서는 역사 속 누구보다 큰 대업을 이룬 승려. 하지만 여래의 뜻을 잘못 해석하여 개인의 사사로운 목표를 앞세우게 되었으니, 청사가 고도를 돕게 되어 하늘의 처단을 내렸었다. 그자의 이름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 천계의 승려의 입에 올라왔다. 이미 죽어 버린 이가 고도의 앞날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이다.

청사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고도는 자신의 첫째 형에게 소원을 빌어 모든 악연을 끊어 냈다. 이제 와 고도의 악연인 강문이 고도가 하늘에서 살 수 있을지, 없을지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 강문의 이름을 이 자리에서 들을 줄은 몰랐으나 이게 상황을 악화시킬 만한 계기는 되지 못할 터. 그러니 천계에서 고도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다는 ‘논의제일 가전연’을 설득하자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논의제일만 설득한다면 그 어떤 천인들도 고도에 대해 가부를 따지지 못한다는 뜻과 상통한다. 한 번에 가장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기회다. 청사는 가전연을 반갑게 맞이했다.

“하계는 물론, 천계에서도 속세에서 벗어난 승려이시거늘, 도솔천의 주인께서 직접 제 반려의 문제에 대해 나서 주셔서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공손한 청사의 태도에 가전연은 기분 좋게 웃었다. 확실히 정치에 물든 백관들과는 달리 생각이나 행동이 시원했다. 청사와는 눈치 볼 것 없이 의견을 주고받기로 하며 가전연이 먼저 입을 뗐다.

“인간이 팔자대로 산다는 게 무슨 뜻인지 차기 천룡께서도 아시죠? 인간의 팔자는 하늘의 소관이라, 인간은 결코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태어난 이는 어떻게 살든 팔자를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아주 시원한 비판이었다. 청사는 유쾌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래서 고도도 변하지 않을 것이란 뜻이군요. 어차피 하늘 아래에서 태어난 인간이기에 그의 팔자가 세상을 망치는 악동으로 정해졌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인지요.”

“네, 본성이란 바뀌기 힘들죠.”

“만약 고도의 팔자가 땅에서의 10만 가지 악행을 저지른 후, 하늘에서 100만 가지 선행을 하는 것이라면 어쩌실 겁니까.”

“음. 팔자가 그리도 괴발하다면 제가 뭐라 드릴 말씀은 없겠습니다. 아무리 제가 33개의 하늘 중 하나를 돌보고 있다 해도 개별 인간의 팔자까지 확인할 수는 없겠군요.”

“확인할 수 없으니 확신하는 것도 그만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반려께서 결코 하늘을 휘젓지 않으리라 굳게 믿으시는 군요.”

“예, 그대들이 우려하는 게 무엇인지 알지만, 그 우려는 결코 벌어질 리가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믿음의 근거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대들은 고도의 불변을 우려하나, 저는 그의 변화를 믿고 있으니 서로가 보는 시각이 다르지 않습니까. 이를 가지고 무엇이 맞는지를 따질 수가 없습니다. 하늘은 앞날을 우리에게 알려 주지 않으며, 앞날은 직접 겪어야만 그것이 맞는지 틀렸는지를 후에 구분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옳은 말이었다. 벌어지지도 않은 앞날을 걱정하여 이 자리를 마련했으나, 가전연은 이 모임이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터였다. 벌어지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고 있다. 나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면 사전에 예방하고자 노력할 필요는 있다. 하나, 그 예방법이 오로지 고도를 내쫓는 일이고, 청사가 그 일만큼은 극구 거부하겠다고 하면 결론이 나지 않는 무의미한 말싸움과 다를 바 없었다. 가전연은 이 모임이 헛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한무의 말씀대로라면 백관들을 모아 서경권을 행사하는 자리를 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서로를 설득할 수 없다면 서로 대립하며 계속 나아가야만 할 텐데요.”

“아뇨, 저는 그대들을 설득할 겁니다만.”

“그대가 직접 서로 보는 시각이 달라서 합의점을 찾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설득할 부분은 고도의 본성이 악하건 착하건, 하늘 위에 소란을 피우건 말건, 그 부분이 아닙니다.”

“매우 위험한 발언입니다. 만약 인간이 천계에서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하계에서 지은 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무겁게 다스려집니다. 고도는 하계에서 요괴를 9,999마리 잡는 벌을 받았지만, 천계에서는 바로 명계로 추방시킬 수도 있습니다. 고도가 명계로 간다면 염라대왕이 결코 놔주지 않을 것입니다. 반려를 그런 가혹한 처벌을 받도록 내버려 둘 것입니까. 그럴 바엔 하계에서 데리고 오지 않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오해하셨군요. 고도가 하늘에서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여러분은 그를 탓하지 말고 저를 탓하라는 뜻입니다.”

“반려의 잘못을 천룡이 책임지고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무거운 대리 책임으로 느껴진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반려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희생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도는 반려 이전에 제가 아끼는 최측근 신하입니다. 소경의 일을 가장 가까운 곳에도 도와주게 될 고도가 잘못을 한다면 그의 직속 상부인 제가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게 당연한 겁니다.”

최측근 신하. 뜻하지 않은 단어에 가전연과 나머지 천궁의 주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고도를 소경의 신하로 두겠다는 소리인가. 그럼 이 자리는 청사가 반려를 들이고 말고로 싸우는 게 아니라, 그가 신하로 두느냐 마느냐로 논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 아닌가. 듣고 있던 불환이 몹시 화가 난 얼굴로 청사에게 반박했다.

“하계의 인간을 반려도 아닌 신하로 들인다면 저는 반대합니다. 반려이기에 논의 가치가 있는 것이지 감히 신하 따위를 이야기할 자리가 아닙니다.”

거친 불환의 반박에 몇몇 이들이 말을 조심하라 일렀지만, 대다수가 불환과 뜻을 같이 했다. 반려 문제이기에 골머리를 쌌는데 일개 신하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체 없이 추방이다. 그들이 한뜻으로 말하자 청사가 웃었다. 어찌 하나같이 다들 반대하느냐고 화를 내도 모자랄 분위기에서 생긋 웃는 청사의 미소에서는 큰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의 미소를 본 모든 천인들이 움찔하며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청사의 눈은 고요했다. 그는 드디어 논쟁다운 논쟁을 시작했다는 얼굴로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원탁 위에 두 팔을 올려서 가볍게 깍지를 끼는 행동을 취하면서 이야기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닿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천인들 모두가 그의 연출을 훌륭하다 칭찬할 수 없었다.

어린 용이 하늘의 주인들을 모아 놓고 모험을 하고 있지 않나. 인간을 신하로 들이는 안건이었으면 애초에 모이지도 않았을 33명의 주인들을 데려다 놓고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

“고도가 저를 위해서 할 일은 일개 천인 따위가 할 수 없는 종류입니다.”

고도를 낮잡아 본만큼 청사가 똑같은 말씨로 부드러운 보복을 시작했다.

“그것은 전례 없는 보직입니다. 제가 직접 만들 것이기 때문이죠. 제가 땅 아래를 굽어 살필 때 고도를 땅과 하늘을 잇는 차사로 부릴 겁니다.”

땅과 하늘을 오갈 차사로 쓴다니. 그런 시도는 과거에 해본 적이 없었다. 하늘에 속한 이들이 땅에 내려가면 많은 혼란을 준다. 직접적으로 계절과 만물의 생활을 비틀어 버리는 힘을 발휘할 수 있으므로 하늘과 땅을 자유자재로 오고가는 것은 큰 위험을 동반한다. 하지만 날 적부터 땅에 속한 이라면 이러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땅에 속한 인물이 땅에 계속 내려간다 하여 그의 아버지인 땅이 화를 낼 일이 없지 않은가. 청사는 예기치 못한 이야기에 신중한 표정이 된 백관들이 물었다.

“차사가 왜 필요합니까. 지금까지 없어도 땅을 잘 다스렸습니다.”

“잘 다스렸다고요. 정녕 그렇게 믿으십니까.”

청사가 날카롭게 물었다. 천인이 된 후 단 한 번도 하늘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이들에게 땅을 두 차례나 직접 밟은 청사가 비판했다.

“제가 본 땅은 하늘과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땅 위를 살핀다 해도 그 복과 덕이 하계에 닿지도, 미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땅은 신이함을 잃어 도깨비와 귀신의 힘이 약해졌고, 하늘에 제를 올리지도 않으며, 인간들은 재물과 영토를 탐내며 싸울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전한 뜻이란 소리입니까.”

땅의 일에 그렇게까지 관심도 없는 서른세 명에게 말해 무엇하리. 그들은 하늘의 위계질서를 지키는 데에 더 급급하다. 땅에서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면 인간이 하늘을 잊기 전에 하늘이 인간에게 손을 뻗었을 터다. 무관심은 하늘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 무관심에 버려진 인간들이 서로의 문제에 얽혀서 욕심을 부리며 삿된 것을 가까이하는데 이러한 사실조차 까마득히 모르고 있지 않았나.

청사는 파랗게 빛나는 안광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백관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저희보다 보직이 낮은 청사의 질책에 불만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도를 천룡의 신하로 책봉함에 반대할 만한 근거조차 수집하지 못했기에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반려로서 반대할 구색을 찾는 데에만 시간을 보냈지, 그를 하늘과 땅을 잇는 차사직으로 논할 거라곤 애초에 생각도 못 한 바였다.

“고도를 제 밑의 직속 후임으로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 앉히려 합니다. 서경권은 직책이 적합한지를 논하기 위해 만든 자리입니다. 저는 그대들에게 고도가 제 직속 후임으로 적합한지를 동의해 주십사 모신 것이지 제 반려를 찬성하고 말고를 물으려고 모은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제가 사랑하는 이를 데려와 살겠다는데 그걸 왜 남에게 묻겠습니까.”

그렇지 않느냐며 되묻는 청사에게 몇몇 백관들이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거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고도를 내쫓을 생각만 했지, 그의 후임으로서 인사권을 결정할 줄은 몰랐기에 백관들은 빠르게 생각을 달리했다.

차기 천룡이 새로운 보직을 정해서 신하를 앉히겠다고 한다. 그것도 생전 들어 본 적이 없는 신생 보직이다. 그 보직이 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시점에서 일방적으로 반대하거나 찬성하기도 어려웠다. 무려 천룡의 입에서 “소경의 일을 보좌할 수 있는 자리에 고도를 지목했기 때문에 하늘과 땅을 오가는 ‘차사’의 직함을 새로 내려주면 천룡의 주된 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하늘 위도 순조롭다”는 말이 나왔다. 소경의 일에 도움이 되면서도 땅의 인정까지 받은 이를 밑에 두고 부리는 신하로 인정해 달라고 하면 반박할 말이 없었다. 가전연이 다시 입을 뗐다.

“소경의 일을 왜 하필 반려에게 맡기는지요.”

“그만이 자격이 있습니다.”

“그 자격이란 것을 대체 누가 주었다는 뜻입니까. 제석천께서요?”

“그보다 위대한 존재요.”

“무엄하군요. 아무리 차기 천룡이라도 이 이상의 발언은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전 사실만을 말한 것입니다. 제석천보다 위대한 존재입니다.”

“하늘이 직접 임명했다는 것입니까.”

“아뇨, 땅입니다.”

일순 모든 이들의 입에서 탄식과 탄복이 쏟아졌다. 지금껏 그 어떤 소란과 혼란 속에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던 존재가 한 인간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늘의 배다른 형제가 땅이다. 하늘의 대리 주인이 옥황상제이나 땅은 한 번도 그 주인을 결정한 적이 없었다. 땅의 침묵을 보다 못한 염라가 땅 위의 일을 심판하여 저승으로 끌고 왔으나, 땅의 대리 주인이 아니었기에 직접 땅 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펼치지 못하고 땅 아래에 있는 것이다. 땅 위의 대리 주인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은 하늘의 대리 주인인 상제와 의형제가 된다는 말과 같았다.

청사가 거짓을 고할 리는 없으니 이는 뜻하지 않은 충격이 되어 모든 천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가전연 역시 충격을 받았으나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땅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근거라 하시면—.”

청사가 입을 벙긋 하는 순간 문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소란에 말을 끊은 청사가 문가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선가 빼애애액 새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소란에 눈치를 살피던 백관들도 청사를 따라 문밖으로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알겠다, 알겠노라, 이 사랑스러운 아이야, 네 아비만 보고 얼른 어미 품에 안겨 주마, 그리 서럽게 울지 마라.”

문밖에서 선녀 군장 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관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계 최강의 군력을 가진 군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모두들 공손하게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서진은 인사를 받아 주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급히 청사에게 다가갔다.

“조심해서 데려왔는데 도중에 잠에서 깼어.”

“이런, 잠에서 깨지 않게 잘 데려오라니까.”

“아 귀여워 죽겠는데, 고도만 찾으니, 원.”

“고도랑 떨어진 지 오래 됐어?”

“한 시진도 안 되었다! 진짜 금방 떨어진 거라니까!”

“누가 보면 하루종일 떨어져 있는 줄 알겠어.”

“우는 모습도 귀엽긴 해.”

“그거 되게 위험한 발언인 거 알지, 누이?”

“호호, 사실이잖아.”

청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진으로부터 빼애액 우는 아이를 받아 안았다. 서진의 품에 안겨 있어 그 형태가 잘 보이지 않던 것이 청사에게 건네질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실체를 육안으로 확인한 백관들이 위엄과 체통도 잊고 하나같이 입을 벌렸다. 턱이 아래로 떨어질 만큼 큰 충격을 받은 이들의 시선이 하나같이 청사의 손에 들린 생명체로 옮겨졌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서럽게 울고 있는 생명체는 날개가 달린 작은 새끼 용이었다. 새까맣고 얇은 피부를 가진 아이는 청사의 두 손바닥에 폭 감길 만큼 작았다. 등에는 제 몸만큼 커다란 두 개의 날개를 달고 있었는데 아이가 빽 울 때마다 파닥거리면서 흔들리는 것이 예삿힘이 아니었다. 몇 년만 지나면 너른 천공을 우아하게 선회하며 날아다닐 힘 있고 아름다운 날개였다.

“맙소사.”

“으, 응룡이라니요.”

“이렇게 어린 응룡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역사에 단 한 번도 기록된 바가 없는 초유의 사태에 백관들은 고도의 신하 책봉 문제를 더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들의 시선은 한결같이 청사에게 건네진 새끼 용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이는 청사의 손 안에서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청사의 손을 낯설어하면서 무언가를 찾는 듯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새까만 조약돌 같은 두 눈망울에 눈물이 잔뜩 고여 뚝, 뚝 떨어지고 있으니 그 모습이 어찌나 안타깝고 사랑스럽던지. 백관들은 홀린 듯 응룡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청사는 파드득거리는 날개 너머로 작은 용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 줬다. 그러곤 아직도 얼이 나가 있는 백관들에게 깜빡했다는 듯 너스레를 떨면서 말했다.

“아, 그대들에게 소개해 주고자 누이에게 부탁했습니다. 고도가 낳은 제 후계입니다. 그리고 그대들이 보고 싶어 한 땅이 임명한 ‘자격’입니다.”

청사가 자식을 보았다는 소문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 자식에게 날개가 달렸다는 것도 까마득히 모르고 있던 백관들은 응룡을 본 것만으로 고도를 추방해야 한다는 모든 생각을 날려 버렸다. 그 귀한 응룡이 청사와 고도 사이에서 나왔다면 이것은 하늘 전체가 잔치를 벌일 일이었다. 청사가 고도를 반려로 밀어붙인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한데 청사는 이 논의를 뒤로 미뤄 두고 고도를 신하로 봉책하면서 그 근거를 귀한 응룡에게 두었다.

“용에게 날개란 불필요한 부속물입니다. 날개가 없어도 하늘을 날 수가 있기 때문이죠. 하여, 날개는 오로지 상징적인 의미만이 존재합니다. 하늘에 속한 용이 땅에게도 인정을 받는다. 그것은 제 부친께서 수백 년 전, 날개를 꺼내 보이셨을 때 증명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날개는 지극히 하늘 아래의 존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단 하나의 도구이기 때문이죠. 그런 날개가 어린 새끼 용에게도 닿아 있으니, 이는 땅이 고도와 그가 낳은 자식을 땅의 일환으로 인정하여 하늘에 닿아도 됨을 증명한 것 아니겠습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백관들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반박하자면 여러 가지의 반박거리를 내놓을 수 있었다. 먼저, 고작 날개 달린 새끼 용을 근거로 고도라는 인간 자체를 하늘에서 받아들인다는 말을 지나친 비약으로 여긴다는 처사였다. 고도의 존재 가치는 그에게서 직접 찾아야 함이 응당 당연하거늘, 어찌 그 자식에게서 찾는다는 말인가. 또 다른 하나, 응룡의 가치 자체가 하늘에서는 특히 귀했기에 백관들이 함부로 그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응룡에 대해 논하려면 백관의 선으로는 부족했다. 삼재상을 모두 부르고, 옥황상제가 주관하는 규합장에서 다시 사안을 꺼내어 말해야 할 부분이었다. 백관들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엔 그 사안이 너무 거대했다.

눈치를 보던 백관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내려앉았다. 빽빽 울어대는 어린 용을 손으로 흔들어 주면서 달래 주던 청사가 갑작스러운 행동을 하는 이를 바라봤다. 그는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청사에게 머리를 숙였다.

“앞으로 제석천과 하늘의 일, 땅의 일을 두루 살펴 주시는 복된 천룡이 되십시오. 귀한 자식은 진심으로 감축드립니다.”

여전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백관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고도라는 인간이 아닌, 응룡이라는 대경사를 두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다는 듯, 모두들 고개를 저었다. 백관들은 하나둘 보존하고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공손하게 청사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저희는 천룡의 반려를 땅과 하늘을 잇는 차사로서 새로운 직위를 내림에 이견이 없습니다.”

“후계를 일찍 본 것을 감축드립니다.”

“감축드립니다.”

하늘이 고도를 받아들였다는 데에 청사는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아무도 고도의 존재 가치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를 못되게 취급하지도 않았고 욕하지도 않았다. 지금 불만을 품고 있는 자가 있을지언정, 한번 고도를 하늘에서 받아들이기로 한 결정을 뒤늦게 엎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청사의 눈가에 작은 눈물이 맺혔다.

고도가 인간들에게 외면받아 혼자서 깊은 산에 들어왔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스스로 고립하며 외로움을 벗 삼아 고요하게 지냈던 그에게선 서러움이나 아픔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배척당하는 것이 으레 당연하다는 그의 태도에 오히려 청사가 가슴 아파하며 속상해했을 뿐, 저를 멸시하는 타인들의 태도를 덤덤하게 받아들이기만 했다. 한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인간이 이해하기엔 고도가 너무 높은 존재라서 겉돌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하계의 아버지인 땅이 그를 사랑하고, 하늘이 인정하여 이렇게 받아 주지 않겠나.

‘만약 고도의 팔자가 땅에서의 10만 가지 악행을 저지른 후, 하늘에서 100만 가지 선행을 하는 것이라면 어쩌실 겁니까.’

가전연에게 했던 말은 청사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고도의 악행을 변호할 수는 없었다. 그는 실제로 하계와 명계를 모두 혼란에 빠트린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땅과 지하에서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을 타고난 이가 자신의 힘을 과시하다가 잘못을 저지르고, 그 잘못을 반성했는데 지나간 괴로움에 영원히 얽매여 불행해질 필요는 없다. 죄값은 요괴 9,999마리를 잡았을 때 모두 치렀다. 그 이후에 속세를 떠나 홀로 지내며 죄값 이상의 것을 혼자 감내한 것 아닌가.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그래서도 안되고. 행복이 익숙하지 않은 고도가 행복해지는 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청사는 품에 든 응룡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붙였다. 빼액 울던 응룡이 머리에 닿은 뜨뜻한 체온에 울음을 그쳤다. 커다란 눈물이 맺혀 있던 눈망울이 청사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청사의 긴 속눈썹이 응룡에게 닿았다. 뜨겁게 차오르는 열기가 속눈썹 너머로 느껴지는 것 같아서 응룡은 오랫동안 감긴 눈꺼풀을 빤히 쳐다보았다.

응룡이 작은 앞발을 내밀었다. 청사의 볼에 닿은 자그마한 손바닥과 발톱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청사는 눈을 뜨고 응룡을 마주 보았다. 자신을 쳐다보는 새끼 용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이었다. 그저 두 앞발로 청사의 뜨거운 볼을 가만 대고 있을 뿐, 울지 않고 청사를 마주하고 있었다. 청사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응룡에게 미소를 보냈다. 청사의 웃음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관찰하듯 빤히 바라보는 응룡은 곧 날개까지 퍼득이면서 청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모두들 고맙습니다.”

청사의 손에서 더는 울지 않는 새끼 용을 어깨와 가슴팍에 올려놓았다. 누이에게 이 자리의 정리를 부탁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이는 청사의 얼굴을 몹시도 생소하게 바라보았다. 무언가 차오르는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는 모습이 울음을 터뜨릴 것도 같았고, 웃음을 환히 피울 것도 같이 이상야릇했다. 동생이 고위 백관들을 내버려 두고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을 질책하지 못했다.

“내가 정리하마. 너는 그만 나가 봐도 괜찮다.”

청사가 달싹이던 입술을 열었다.

“고마워.”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떨려 나오고 있었다. 서진은 말없이 청사의 등을 두드렸다. 청사가 긴 답호 자락이 끌리지 않도록 잡고서 외아를 나서자 등 뒤에서 서진이 고도의 새로운 직책은 청사가 천룡으로 즉위를 하자마자 만들 것이고, 상제께 고할 것이니 이에 협조를 바란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청사는 외아의 대청을 지나 신발을 신고 앞마당으로 내려섰다. 엎드려서 바닥을 닦던 청지기들이 청사를 보고 곱게 인사를 하려다가 그의 얼굴에 엉망진창인 표정을 보고 깜짝 놀라 몸을 떠는 장면이 벌어졌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호들갑스럽게 청사의 상황을 걱정하며 챙길 수가 없었으니, 청사가 신을 신자마자 빠르게 앞마당을 가로질러 달렸기 때문이라.

송글송글한 땀이 이마에 맺혀도 청사는 한 지점만을 향해 달렸다. 인사하는 종들의 말을 모두 무시하고 만주사화가 고개를 숙인 곳으로 쉬지 않고 뛰었다. 뜨거운 숨이 입 밖으로 들쑥하게 뱉어질 때쯤, 부친의 사택 마당에 놓인 정자에서 혼자 앉아 있는 고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청사는 비로소 뜀걸음을 멈추고 헉헉 밭은 숨을 골랐다. 자리에 멈추어 서서 고도를 한동안 바라봤다. 고도는 도화꽃이 만발한 복숭아나무 밑에서 혼자서 장기를 두고 있었다. 아버지가 자주 고도를 불러 장기 대국을 두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제께는 일방적으로 지는 아버지였지만, 고도와는 그 실력이 비등했다. 고도와 아비는 대국 승패를 나누어 가졌다. 처음에는 예의상 천룡과 장기 대국을 하던 고도가 호적을 만나 진심으로 겨루는 상태였다. 오늘도 아버지와의 대국을 복기하면서 뜰장 공격을 검토하느라 청사의 접근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는 복숭아 꽃잎이 고도의 까만 머리 위와 어깨에 내려앉을 무렵, 고도가 장기판 위에서 고개를 들었다.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사부작 다가오는 청사를 뒤늦게 발견했다. 고도는 청사와 눈이 마주치자 장기 말을 든 채 굳은 표정이 되었다. 장기에 푹 담겨 있던 침착한 얼굴이 청사를 향해 당혹스러움을 표했다. 그는 곧 말을 내려놓고 청사에게 손을 뻗었다.

“왜 울고 그래.”

혹여 무슨 안 좋은 일을 겪었는지 고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청사가 그런 고도가 앉아 있는 작은 정자 앞까지 다가가자 청사를 올려다보던 고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도는 양팔을 벌려 청사를 끌어안았다. 청사는 고도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나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부터 울었던 걸까. 달려오면서 여종들이 식겁하여 쳐다보던데 그때부터였을까. 어쨌든 외아에서는 감정을 조절할 수 있었지만 뛰면서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모르는 상태가 되지 않았나. 청사는 심장이 뜨거운 감각이 뛰어온 여파일 거라 치부할 수 없었다. 고도를 보자마자 왈칵 차오른 감정을 입 밖으로 한숨처럼 토했다.

안아 주는 고도를 마주 안아 주었다. 두 팔로 으스러지게 고도를 감쌌다. 품에 안긴 고도는 작고 연약했다. 언제나 강한 모습만을 보아 왔던 연인이 실은 아주 작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청사가 지켜야 할 세상이었다. 자신의 단 하나뿐인 존재였다. 청사는 고도를 끌어안은 채 눈물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서경권을 행사하는 고위 백관들과 외아에서 논쟁을 벌였다.”

품 안에서 고도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청사의 등을 토닥이는 손길만 이어졌다. 고도는 울고 있는 청사의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쓸어 만져 주었다.

“괜찮다. 나 때문에 일이 잘 안 풀렸다면, 나한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내가 네 발목을 잡아서 미안하구나.”

청사가 울고 있는 모습에서 논쟁의 결과를 유추한 듯했다. 고도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평온해서 평소와 다를 바 없었는데, 결과가 잘 나오지 않은 것마저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태도가 청사의 심장을 더 뜨겁게 달궜다. 고도는 조금 더 행복에 욕심을 내도 되는데 어이하여 이렇게 불행만을 당연하다는 듯 손에 쥐고 있는가. 청사가 더 세게 고도를 끌어안았다.

“고도.”

청사의 품 안에서 고도는 말없이 청사의 머리만을 다독였다. 고도의 어깨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든 청사는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어 고도의 얼굴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잡았다. 아무 표정도 읽을 수 없는 고도의 얼굴을 꼭 잡고 입술에 입을 맞춰 주었다. 청사의 위로에 고도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고도의 입에서 한숨이 새 나왔다. 청사의 머리를 다독여 주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고도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같이 지낼 수 있는 날은 분명 있을 것이다. 안락하게 지낼 수 있을 때가 분명 있을 테니까, 그동안만, 그동안만 잠시 떨어져 지내자. 나 때문에 매번 고생을 시켜서 미안하다, 한무야.”

이별을 암시하는 발언에 청사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잘되지 않은 결과에도 반발하는 기색 없이 받아들이는 고도를 보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자신의 연인이 불행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그 모습만으로도 그저 눈물이 나는 청사였다. 청사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고도, 지금까지 정말 수고했다, 진심으로, 정말 수고 많았어.”

감고 있는 고도의 눈가가 붉어졌다. 고도는 청사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었다. 그의 옷깃을 핏기가 가신 손으로 꽉 잡고 고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이 이상 청사를 울리고 싶지 않아서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것을 청사가 모를 리 없었다. 청사의 입장이 곤란해질까 봐 모든 말을 뜨겁게 삼키고 있었다. 청사가 마음고생을 할 바에야 자신이 모든 슬픔과 아픔을 안고 버티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보였다. 청사보다 잘 견딜 자신이 있다며 옷깃을 꽉 쥔 채 눈을 감고 있는 고도에게 청사는 목이 꽉 메는 목소리로 마저 말했다.

“정말 수고 많았으니까.”

청사의 말을 다 듣지 못하고 고도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감은 눈에 맺힌 눈물이 붉게 상기된 눈가를 타고 흘렀다. 볼에 길을 내면서 턱에 고인 방울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앞으로는 내가 평생토록 널 행복하게 해주겠어. 그 어떤 고생도 슬픔도 모르게 해주겠다. 행복해서 지쳐 쓰러질 때까지, 널 영원히 행복하게 해주마.”

바닥으로 떨어진 눈물방울 위로 또 다른 눈물이 겹겹이 쌓였다. 고도는 한참이나 감은 눈을 뜨지 못했다. 청사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로 옷깃만을 꼭 쥔 채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맺힌 속눈썹이 청사의 눈앞에서 깜빡거렸다. 붉어진 눈시울과 그 안에 꾹 참고 고여 있는 눈물이 서럽게 매달려 있었다. 눈물자국이 번진 고도를 보면서 청사가 결국 커다란 눈물을 터뜨렸다. 그럼에도 웃음이 멈추지 않아서 일그러진 입가로 바보 같은 웃음을 뱉었다. 울면서 활짝 웃고 있는 청사의 얼굴을 고도는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봤다. 청사가 조금 더 고도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내가 해냈어. 내가 널 지켰어.”

아직도 이야기를 잘 이해하지 못한 고도는 느리게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겨우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찾은 고도가 청사의 옷을 꽉 움켜쥐고 눈물에 가라앉은 목소리를 울렸다.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말 그대로다. 내가 해냈어. 너와 함께 지낼 수 있게 됐어.”

“이런 순간에 농을 하면 아무리 너라도 미울 수 있어.”

“농이 아냐. 농이라면 내 혀를 잘라 버리거라. 너한테 이러한 가증을 떨 이유가 없잖아.”

“……어째서?”

“어째서라니. 내가 말했잖아. 너와 함께 이곳에서 살겠다고. 그런 날 믿고 따라 준 너에게 보답해 주겠다고. 왜 못 믿는 거야.”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고도가 안쓰러워서 청사는 다시 고도에게 입을 맞춰 주었다. 믿어도 된다고, 이젠 행복을 욕심내며 탐해도 된다고 몇 번이나 속삭여 주며 달래 준 후에야 고도는 힘 빠진 손을 들어 다시 청사의 옷깃을 잡았다. 고도는 자신의 젖은 얼굴을 핥아 주는 청사에게 물었다.

“그러면, 나는 너와 헤어지지 않아도 되느냐.”

떨리는 목소리가 아직도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청사는 쐐기처럼 그의 심장에 사실 그대로를 박아 넣어 주었다.

“응. 여기서 평생 나와 살 수 있어.”

“네 신하로, 네 반려로 영원히?”

“응. 아무도 널 건드리지 못해. 내가 아니라 땅과 하늘이 널 지켜 줄 테니까. 고도, 정말 고생 많았어. 진심이야. 정말 고맙고 미안해. 내가 모자라서 널 일찍이 행복하게 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고도는 두 볼까지 붉히며 울고 있는 청사 때문에 어째서인지 자신 역시 눈물이 멎지 않았다. 흉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그 어떠한 흐느낌도 꾹 참았으나 눈물만큼은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굴러 떨어진 물방울이 턱에 모여 똑똑 바닥으로 떨어지자 청사가 젖은 자국을 핥으면서 고도를 달래고 있었다. 정말로 헤어져야만 할 줄 알고 심장이 쿵, 발치까지 떨어졌다가 튕겨 올라왔는데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으니 다른 의미에서 머리가 멍해졌다. 고도는 자신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청사의 옷을 당기며 힘없이 말했다.

“한무야.”

“응.”

“한무.”

“응, 고도.”

“……한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오직 청사의 본명인 것처럼 고도는 한참이나 그의 이름만을 중얼거렸다. 고도가 천천히 시선을 내리며 바닥을 바라볼 때까지 청사는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여 주면서 연신 대답을 해주었다. 그가 부르는 한무라는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이 맞다며 연거푸 각인을 시켜 주자 고도가 비로소 눈을 감고 그의 이름을 달싹이던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드디어 믿어 주는 고도를 보면서 청사는 말없이 그의 볼과 입술에 입을 내려 앉혔다. 정답게 뽀뽀를 해주자 고도는 청사의 품에 안겨서 중얼거렸다.

“한무야. 앞으로 너를 한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될까.”

눈물을 삼킨 여파인지 고도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이렇게 감정이 억눌려 있는 고도의 목소리는 배를 맞출 때나 들어 봤기에 청사는 비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갈라진 고도의 목소리를 듣고도 애욕을 느낄 만큼 청사는 고도의 모든 면이 사랑스러웠다.

“왜 내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아?”

청사의 다정한 반문에 고도가 여전히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늘 아래에선 네가 ‘한무’라는 것을 아는 이가 나뿐이었어. 그래서 너를 한무라 부르는 유일한 내가 좋았다. 하지만 이곳은 아니구나. 모든 이가 너를 ‘한무’로 부르고 한무로서 사랑해 주고 있어. 그래서 나는 네 이름을 나 혼자만 갖고 있지 못한 기분이라 많이 서운하거든.”

“그러면…….”

“대롱이라고 다시 부르고 싶다.”

청사는 겨우 멈추었던 눈물을 다시 흘렸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청사는 아랫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청사의 반응에 비로소 미소를 지은 고도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고도가 구김살 없이 웃으면서 자신을 바라봐 주는 모습이 어여쁘고 사랑스러워 이대로 영원히 끌어안고 싶었다. 이번엔 고도가 젖은 청사의 볼을 핥아 주면서 입술을 맞대었다.

“대롱이, 내 사랑아. 고맙다. 모든 게 다 고마워.”

“……내가 할 말이잖아.”

“은애한다, 대롱아.”

“……고도.”

안겨 있는 청사가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도를 끌어안고 있어야 했다. 고도의 품이 아니면 빽빽 울어대던 새끼 용이 처음으로 청사의 어깨에서 얌전히 앉아 있었다. 작은 날개를 파드득거리며 움직거렸다. 청사 때문에 몇 번이나 눈을 뜨고 젖은 청사의 얼굴에서 눈물을 할짝거리며 핥아 주기도 했다. 새끼 용은 고도만큼이나 청사를 편안하게 생각했고, 청사는 새끼 용이 더 이상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 사실 하나에 다시 눈물을 쏟고 말았다. 고도도, 사랑도, 아이도, 후계도, 모든 것을 다 지켰다. 자신처럼 미숙한 용이 너무 크고 거대한 것을 지킬 수 있어서 이 벅찬 심정을 그 어떤 말로도 할 수 없었다.

“대롱이, 울지 마라.”

볼과 입술에 뽀뽀를 해주는 고도를 막연히 끌어안고 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었다. 청사는 자신의 생에서 가장 벅찬 감정에 오랫동안 펑펑 울었다. 지나치게 행복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는 심정을, 청사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

청사가 반려자로서 땅에서 악명 높았던 고도를 지목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흉흉한 일을 어찌 해결할꼬, 머리를 맞대었던 일은 하루아침에 사라져 있었다. 고도가 땅의 주인이 직접 임명한 땅의 대리인이며, 그 증거로서 청사와 합일하여 낳은 새끼 용의 등에 땅의 기운이 담긴 날개가 붙어 있다는 소문이 넓게 퍼졌다.

고위 관료들이 전부 천룡의 집에 혼례에 쓰일 비단 장신구를 선물로 보내느라 아우성이었다. 그 선물을 등에 진 소와 말이 지평선까지 늘어설 정도였다. 모든 이들의 선물을 물리던 고도였지만, 어느 날 만주사화 벌판에서 마주한 가전연의 선물만큼은 유일하게 받아들였다.

본인을 ‘도솔천의 주인’이라고 소개한 젊은 남성은 고도에게 찢어진 옷자락을 주었다. 무엇인지 묻는 고도에게 가전연은 염화미소를 띠며 대답해 주었다.

“그대의 친우가 마지막으로 남긴 선물입니다. 부처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만, 그럴 자격이 되지 못하여 지금쯤 불꽃 속에서 염을 외고 있겠죠. 그의 마지막에 닿아 있던 저에게 남긴 선물입니다. 저보단 그대에게 의미 있는 물건일 테니.”

피 묻은 옷자락은 손으로 성기게 뜯어내어 솔깃이 모두 벌어져 있었다.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준 흔적이었다. 친우라는 말에 고도는 고개를 들었다. 가전연은 타고 온 소의 등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강문입니까.”

고도의 질문에 가전연은 그저 두 손을 합장하여 가지런히 인사할 뿐이었다. 고도는 먼 길을 돌아가는 소와 그 위에 올라타서 염을 외고 있는 가전연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오도카니 박혀 있었다. 손에는 피와 때가 묻은 옷자락만 꼭 쥐고, 고도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가전연을 통해 잊었던 친우가 떠오르나, 그것은 아이와 임금처럼 하나의 과거가 되었다. 더는 미련을 두지 않을 수 있었다.

고도는 옷자락을 함에 담고 뚜껑을 닫았다. 뚜껑의 자개 문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밖에서 서진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도는 함을 가장 깊고 내밀한 곳에 밀어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제와 서른세 개의 하늘을 다스리는 주인들은 청사의 천룡 즉위식을 위해 면류관을 포함한 복식을 정비하는 것은 물론, 그가 새로이 일하게 될 장소와 신하들을 새로이 임명하느라 바빠졌다.

천인들이 가장 중히 다루는 직책이 ‘지상차사’직이었다. 자고로 하늘에 속한 이들이 땅으로 내려갈 시엔 선녀 중에서도 높은 직급의 군사들만이 착용 가능한 선녀옷을 챙겨야 하고, 선녀옷을 챙기지 못할 시엔 상제에게 직접 땅으로 내려가도록 허락받아야 했다. 하지만 ‘지상차사’는 출천(出天)과 귀천(歸天)하는 시기만 기록하면 상제의 허락 없이도 자유자재로 땅과 하늘을 오고갈 수 있는 특수 보직이었다. 지상차사에 고도의 이름이 올라간 상태이며 고관들의 이견이 없으므로 청사가 천룡으로 즉위하여 그를 위한 신하들이 새로 꾸려질 때 문제없이 지상차사의 보직이 거론될 예정이었다.

즉위식이 원활하게 진행되는 덕분에 청사는 혼례에 모든 관심과 노력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누이의 도움으로 청사의 혼례복은 금방 정해졌지만 고도의 혼례복에 문제가 생겼다. 어쩌면 사소한 문제였는데 고도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아서 언쟁이 길어진 부분이었다.

옥신각신 다투는 소리가 안방에서부터 번져 나왔다. 봄바람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친부의 사택에 도착한 청사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여종들이 그 다투는 소리에도 까르륵 웃는 것을 보아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청사가 문을 열고 안방을 향하니 온 방에 색색들이 화려한 옷이 펼쳐져 있었다. 펼쳐진 옷과 장신구의 숫자만도 익히 기백은 넘는지라 눈이 아플 정도였다. 넘치는 옷의 틈바구니 속에서 친부가 고도에게 무언가를 내밀며 부탁 아닌 부탁을 하고 있었다.

“이봐라, 얼마나 예쁜가, 한 번만 제대로 보래도.”

“춘부장께서 뭔가 오해하셨습니다만, 혼례를 한다고 해서 제가 여성용 장식품을 찰 거라고 누가 그럽니까.”

“이게 어디가 여성용이지? 남성 혼례복을 장식하는 혁대와 요대다! 딸기술 끝에 진주를 달고 훈색 도포에 금색으로 승천하는 용과 봉황과 암벽 사이에서 고개를 내민 현무와 계곡 사이의 백호가 위엄 있는 기품으로 수를 놓인 남성 혼례복이야!”

“옷만 남성용일 뿐, 장식품은 어딜 봐도 여성용입니다.”

“기일에는 이런 장식을 하는 게 예의거늘! 보배는 어찌 그리도 검소하단 말인가.”

“어디서 약을 파십니까. 제가 천계에 머물면서 이쪽 풍습과 예의범절을 배우도록 춘부장께서 직접 지도해 주셨습니다. 그 가르침 아래에 어디에도 기일날 남성이 여성용 장식을 하라는 말씀은 없었습니다만. 그리고 저를 보배라고 부르는 건 그만두시죠.”

“어허, 이걸 얼마나 어렵게 구했는 줄 아느냐. 장인에게 맡겨서 직접 가공한 것이라 아주 귀한 물건들이란다.”

“춘부장께서 직접 하시죠.”

“내가 아니라 보배가 해야지!”

“아, 그 놈의 보배 소리, 으으.”

“언제는 얼굴을 붉히며 내가 좋아하면 좋아해줬으면서! 우리 귀여운 보배가 변했구나, 변했어!”

“제, 제가 언제 말입니까.”

“보배야!”

“으아아.”

“보배가 검소해서 내 이길 수가 없다. 딸아, 보배를 설득해 보거라.”

“아버지가 심하셨는데요, 저 머리장식은 누가 봐도 화관이잖아요. 저걸 남자가 어떻게 씁니까.”

“너도 그럴 거냐? 보배한테 잘 어울리잖느냐. 이런 날 써야지 언제 쓴단 말인지.”

“아버지, 지금 제가 시집갈 기미가 안 보이니까 한무의 반려한테 여성용 복식을 입혀서 대리만족을 하시려는 것을 누가 모를 줄 압니까?”

하나뿐인 딸과 막내아들의 반려가 요대와 옷에 다는 장신구까지는 백번 양보해도 머리장식은 용납할 수 없다는 말에 천룡은 기운이 빠졌다. 청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버지의 손에 놓인 물건을 바라봤다.

장신구는 꽃과 나비와 새가 한데 어우러져 오색찬란한 색으로 화려하게 솟은 머리장식이었다. 양옆으로 은사와 금사로 길게 늘어뜨려 있었다. 머리에 쓴다면 마치 휘항처럼 허리까지 내려올 장식은 심히 화려하다 못해 그 화려함이 과하기 그지없었다. 고도가 쓴다면 필시 잘 어울리겠지만 훈색 도포도 백번 양보해서 입어 주는 고도에게 저런 화려한 물건은 숨 넘어 갈 만큼 징그러운 벌레 취급할 것이 뻔했다.

청사는 자신의 미적 기준이 아비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저 예쁜 장식을 고도가 머리에 써주지 않을 생각에 함께 시무룩해졌지만 그런 티를 내면 고도가 언짢아할 것이 분명했기에 내색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고도, 고도.”

청사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안방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장식 외에 모든 걸 다 받아 주겠노라고 천룡과 약속해 준 고도가 소맷부리에 금단과 은단을 입히기 위해서 여종에게 몸을 맡긴 채로 청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청사는 고도가 온갖 여자들 틈에 둘러싸여서 피곤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웃기느냐, 이 망할 대롱이.”

알록달록한 옷감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 퍽 재밌었다. 답호 안에 입을 두루마기 형식의 내의와 바지저고리까지 휘황찬란한 색으로 물들어 있어서 고도가 온갖 색체에 뒤범벅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예복의 가장 겉 옷감은 은하수를 내려 받아 만든 실로 짠 꽃분홍색이었고, 그 안에 세 겹이나 받쳐 입는 옷들은 노란색, 풀색, 하늘색이었고 그것들을 모두 금단과 금실, 은단과 은실로 엮고 잇고 있으니 고도는 마치 색색별의 봄꽃에 파묻혀서 숨 막혀 하는 듯한 모습인 것이다. 세상을 이루는 모든 색과 문양이 고도를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어쩜 이리도 모든 것이 잘 어울릴까, 의아할 정도였다.

이 세상이 모두 고도를 위해 이루어진 듯하다. 청사 자신보다 하늘이 고도를 더 큰 마음으로 사랑하는 건 아닐지 삐죽 질투가 날 정도였다. 청사는 의자를 끌어당겨 등 받침대를 앞으로 돌렸다. 등 받침에 두 팔을 얹고 한 팔로 턱을 괴고서는 고도가 여종들의 손에서 이러저러한 옷과 신체 규격을 맞추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청사가 바라보는 모습을 힐끔, 눈동자만 굴려 쳐다보던 고도가 물었다.

“할 말 있는 얼굴이네.”

“응, 치수 다 재고 나면 나랑 어디 좀 가지 않을래?”

“어딜?”

“내 둘째 형 만나러 가자.”

그 말에 치수를 재던 여종들도, 여종들을 지휘하면서 옷감과 색상, 문양을 꼼꼼하게 바라보던 서진도, 저 혼자 기운이 없던 천룡도 한꺼번에 고개를 돌려 청사를 바라봤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청사를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엔 무거운 기류가 실려 있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청사를 바라보고 다시 제 할 일로 돌아갔다. 찰나의 침묵은 고도에게 잔류처럼 남았다. 둘째 형이라는 존재에 동요를 한 것이다.

고도는 의아한 시선으로 청사를 바라봤다. 청사만이 암묵적인 침묵의 기류에 휩쓸리지 않고 고도를 마주보고 있었다. 고도의 마음속에 작은 의문이 파원처럼 커졌다. 여태껏 청사의 형제들을 봐왔었다. 그의 첫째 형은 동해를 다스리는 해룡이고, 누이는 선녀 군단장이다. 그 사이에 위치한 둘째 형은 본 적도 없고 무슨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그것이 가족원들이 침묵한 이유라면 청사는 중요한 가족사를 고도에게 알려 주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청사가 원한다면.

“그래.”

고도가 가족원들의 불편한 기류에도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이 무언가 한마디를 하고 싶은 표정으로 고도를 바라봤다. 그녀는 중요한 이야기를 꺼낼 것처럼 고도와 시선을 맞춘 채 파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고도는 묻지 않았다.

“누이, 치수를 재는 일은 오래 걸릴까?”

서진은 청사를 힐끔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다 끝났어. 도사는 데려가도 괜찮다.”

고도가 수십 가지의 옷감을 몸에 더 대본 후에야 서진이 실제로 사용할 것들을 추렸다. 고도의 치수를 기록한 여종들은 서진이 고른 옷감을 꼼꼼하게 기록했고 장식할 물건들도 꼼꼼하게 확인했다. 고도가 더 도울 일이 없나 하여 쳐다보았으나, 다 똑같은 분홍색 원단을 손에 들고 어느 게 더 나은지를 토론하는 분위기에 끼어들 수가 없어서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청사는 고도의 손목을 잡고 몰래 자신 쪽으로 당겼다. 손목을 당겨서 쪽, 볼에 입을 맞추었다. 수십 가지 옷을 걸쳐 보느라 지쳐 있던 고도의 얼굴이 조금이지만 부드럽게 풀렸다. 청사는 흐뭇한 미소로 마주하면서 고도를 품에 안았다.

“아버지,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와라.”

천룡에게 고도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천룡은 물끄러미 고도를 바라보며 청사와 함께 나가는 그를 잡아 세우지 않았다. 청사가 손목을 잡아 이끄는 대로 마당으로 나간 고도는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붉은 꽃밭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았다. 오로지 붉은 물결로만 출렁이는 한가운데에 청사가 우뚝 섰다. 여종들이 손질해 주어 지상에서보다 훨씬 부드럽고 가지런한 머리카락들이 비단 끈에 묶여 너울거렸다. 휘날리는 푸른 옷자락이 붉은 땅과 대조되었다.

“여기보다 더 높은 하늘로 갈 거야.”

고도는 꽃보다 아름다운 청사가 말하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말없이 응시하는 고도의 시선에 청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문제 있어, 고도?”

청사의 질문에 고도가 비로소 눈을 깜빡이면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실바람 같은 웃음을 흘리는 고도의 주변으로 꽃바람이 일었다. 봉우리에서 떨어진 붉은 꽃잎이 훈색 답호를 입은 고도를 감싸고 넘실거리자, 그 모습이 선녀도 부럽지 않은 아름다움이라. 청사는 꽃잎 속에서 웃고 있는 고도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대롱아, 넌 내가 봐온 만물 중 가장 아름다운 존재야.”

그 말을 어찌 되돌려주지 않을 수 있을까. 저를 아름답다고 칭하는 고도야말로 그의 주변 꽃들이 먼저 고개를 숙이며 펴지 않은 치맛자락을 너울거리며 반갑게 맞이하거늘, 한낱 천룡이 이 귀한 인간보다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당장이라도 그의 머리와 옷자락에 붙은 붉은 꽃잎을 떼어 주며 그 아름다움은 네게 안착해 있노라며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청사는 붉어진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저를 사랑스럽게 바라봐 주는 고도가 아름답고 고마워서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어려웠다.

“네 형님을 뵈러 가자면서 이리 서 있기만 하면 어쩌느냐. 어서 가자.”

고도가 다가와 청사의 머리카락에 붙은 꽃잎을 떼어 주며 물었다. 청사는 여전히 고도의 주변에서 살랑거리는 꽃바람의 향기에 한숨만 삼켰다. 하늘 위의 이 땅이 고도를 좋아하고 있었다. 고도에게서 느껴지는 땅의 기운을 상서롭게 생각하고 그의 곁에 머물러 한 번이라도 손을 대고 싶어 한다. 고도가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해지길 바라고, 언제나 따뜻한 감정들에 둘러싸여 있길 원했으나, 이러다 누군가에게 빼앗기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없잖아 있기도 했다. 이곳의 많은 존재가 고도를 사랑하고 싶어 할 텐데. 질투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대롱이?”

청사는 말없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고도에게 훈색 답호가 더없이 잘 어울리는 것처럼, 언젠가는 그에게 무표정한 얼굴보다 미소를 담은 표정이 더 잘 맞다는 것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고도에게 어울리는 것을 하나둘 찾아주기 위해서라면 그의 어깨에 머무는 꽃바람을 시샘해선 안 될 것이다.

“응, 가자.”

청사가 고도의 손목을 잡아끌어 마당 한가운데에서 멈추니 그제야 고도는 사방을 둘러보다가 의아하게 물었다.

“걸어가면 되는 건가. 흐음. 더 높은 하늘로 갈 만한 수단이 보이지 않는데.”

“마른하늘을 어찌 밟을 수 있겠어.”

“그럼?”

“날아서 가야지.”

그 말에 고도가 손등을 덮는 기다란 옷소매를 걷으면서 거들 듯이 말했다.

“날아가는 도술이야 내 특기지.”

“하하, 하늘 길도 모르면서 네가 주도하여 날아가면 어쩌려고.”

“여기보다 높은 하늘이라면 하나밖에 더 있느냐. 상제가 있는 천궁에 네 형이 기거한다는 소리로 들린다만.”

“아니, 상제보다 높은 하늘에 살아.”

“오오.”

“둘째 형이 어떤 용인지 얘기했지?”

“그래, 은하수에 몸을 담그고 있다면서. 큰 하늘에 누워서 하늘을 받치고 있다 했지.”

“맞아. 저 하늘, 저 높은 곳에 있어. 그러니 나한테 맡겨라. 내가 안전하게 안내하마.”

생긋 웃은 청사가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몸을 낮췄다. 그의 유려하고 미려했던 손등이 커다란 용의 앞발로 변했다. 길게 풀어헤친 검은 머리가 머리에서 등까지 뻗은 갈기로 변했다. 하얀 피부에는 조각 같은 검은 비늘이 튀어나와 날카롭지만 아름답게 빛났다. 등은 길어지고, 길어진 등이 다리 너머로까지 이어지면서 기다란 꼬리로 변했다. 아름다운 얼굴이 용의 머리로 바뀌면서 조금씩 부피가 커졌다. 청사는 순식간에 백 장에 가까운 길이의 거대한 용으로 바뀌었다. 그 모습을 아무리 봐도 신성하게만 느껴지는 고도가 순수하게 탄복했다.

“왜 이 모습으로는 평소에 지내지 않는 거냐? 상당히 멋있는데.”

고도가 손바닥으로 청사의 왼쪽 볼을 쓰다듬었다. 청사는 커다란 머리를 뉘면서 이빨보다 작은 고도가 저를 편하게 만질 수 있도록 했다. 아주 작은 손이 차가운 비늘에 닿았을 뿐인데도, 고도의 온기가 선명하게 만져지는 듯했다. 청사의 목소리가 인간의 형태일 때와는 전혀 다른 깊은 울림으로 마당을 적셨다.

[이 모습으로 있으면 게을러지거든.]

“왜?”

[계속 누워 있으니까 졸리잖아. 한번 잠들면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눈 뜰 생각도 못 하고 자게 되더라고.]

“움직이기 귀찮다는 소리군. 이런 게으름뱅이를 봤나.”

[커서 운신하기 힘드니 어쩔 수 없지.]

“네가 몇 년이나 잠을 자는 건 나도 싫구나. 심심하지 않게 계속 놀아 주면 안 되겠느냐.”

[바보야, 내가 왜 널 내버려 두고 잠을 자겠냐. 걱정 말고 내 손 위에 올라와. 심심하지 않도록 형님을 만나러 가자.]

청사가 내민 커다란 손바닥은 묵직한 암석 같았다. 고도는 청사의 뺨을 쓰다듬던 손을 떼고 답호 자락을 잡았다. 단단한 손바닥 위에 발을 올린 고도가 청사를 올려다봤다. 커다란 푸른 눈동자가 고도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고도는 깊은 골짜기처럼 세로로 기다란 청사의 동공과 그 주변을 깊은 심해처럼 감싸고 있는 푸르른 빛이 무섭지 않았다. 이곳에 기거하는 천인들조차 천룡의 눈에 담긴 신비로움을 똑바로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고개를 조아리곤 하는데 고도는 두려움 없이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청사 본연의 존재를 봐주는 고도 덕분에 청사는 마음 놓고 웃었다.

[편히 앉아 있거라. 떨어지지 않게 내가 잘 잡아 줄 테니.]

“오냐, 이 몸을 잘 모셔 보거라.”

[하하, 물론입니다.]

고도가 너른 용의 손바닥 안에 자리를 잡았다. 청사는 행여나 고도가 떨어질세라 두 발을 포개어 고도가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 용의 발톱 사이로 빠끔, 고개를 내민 고도는 청사가 몸을 일으켜 하늘로 천천히 떠오르는 부유감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철썩, 꼬리를 한 번 휘두르자 붉은 바다처럼 보이는 만주사화가 한꺼번에 동에서 서로 고개를 꺾었다. 청사가 일으킨 바람에 복숭아 꽃잎이 하늘로 솟구쳤다. 팔랑팔랑 날아든 붉은 꽃잎을 손바닥에 쥔 고도는 청사가 소중하게 감싸 안은 손바닥 안에서 바깥 풍경을 구경했다.

천계 어디든 꽃과 나무와 풀밭의 동산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엔 천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고 시를 지으며 글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들은 천계를 한 길로 꿰뚫는 바라믓 강에 기도를 했고, 작은 배를 띄워 낚시나 수영을 하기도 했다. 모두들 안락함을 벗으로 삼아 하고 싶은 일을 원 없이 하고 있었다. 서로 사랑하며, 웃고 떠들었다. 재력과 명예 등에 얽매였던 하계 생활과는 달리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면서 마음껏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그들은 33개 하늘의 주인과 천룡, 상제를 모셨으나, 하계에서처럼 강제적으로 나뉜 상하관계가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외경심으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래서인지 모시는 분들을 대하는 행동이 편했고, 그들을 부리는 이들도 강제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천인들이 사는 평원보다 높은 곳에는 구름과 부유하는 땅으로 이루어진 33개의 하늘이 보였다. 수평으로 펼쳐진 서른세 개의 조각난 하늘에는 각각 그 하늘을 돌보는 부처의 제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여타의 천인들보다 고요하며 맑은 얼굴로 비상하는 청사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치에 힘을 쓰는 이들은 상제를 뵈러 가거나, 상제가 시킨 일을 처리한다고 하늘에 덜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대신하여 수많은 제자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누군가가 시키지 않아도 기꺼이 자신을 바쳐서 하늘을 돌보는 일이 숭고하게 느껴졌다.

33개의 하늘을 지나 더 높은 곳에 달하니 수미산 정상에 있는 옥황상제의 거처, 천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33개의 하늘을 모두 합쳐 놓은 것보다 더 큰 천궁은 겉면이 금으로 도색되어 있었다. 하나, 금색은 하계에서 귀하게 여기는 보석과는 그 성질이 조금 달랐는데, 천궁을 뒤덮은 금색 물결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은하수 빛이었고, 달빛이었으며 태양의 빛이기도 했다. 세상의 가장 귀한 빛들이 천궁에 모여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하며 천궁 안에 사는 이들에게 경배를 하고 있었다. 천궁 동쪽에는 상제의 부인인 서왕모가 사는 곤륜산으로 가는 길이 있고, 곤륜산 바로 아래 신선들이 머무는 청호림이 보였다. 염라가 사는 명계, 인간이 사는 하계를 지나 청호림, 곤륜산, 수미산으로 이어지는 모든 길이 하나로 통했다.

하나로 이어진 모든 길이 얇은 실처럼 멀어졌을 때, 봄볕처럼 따사로웠던 햇살이 사라지고 머리 위에는 드넓은 은하가 펼쳐졌다. 검푸른 색으로 끝을 볼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큰 하늘에 별들이 군집하여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은하는 다리를 놓듯 서로서로 연결되어 커다란 하천처럼 흐르는가 하면, 어딘가에는 부서진 조각처럼 고립되어 외롭게 흐르고 있기도 했다. 포근하기만 하던 천계의 땅과 달리 은하에 가까워질수록 살을 에는 차가움이 느껴졌다. 태양의 권위가 닿지 않는 곳이었다.

햇살의 포근함은 검푸른 어둠 속으로 집어삼켜져서 그 어디에도 생명의 박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땅에서 볼 때는 더없이 아름답게만 보이던 은하가 실은 끝없는 어둠 속에서 추위와 함께 얼어붙어 있었다 하니, 고도는 머리 위에 바싹 붙은 은하에 손을 뻗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끝없이 상승하기만 하던 청사가 드디어 멈추었다. 비상하느라 고도를 손바닥에 꼭 쥐고 있던 청사가 비로소 천천히 포개어 있던 손바닥을 펼쳤다. 너른 손바닥 중앙에 가만히 앉아 있는 고도와 눈이 마주친 청사가 하늘의 별을 빼다 박은 눈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고도, 은하수를 천계인들은 무엇이라 부르는지 아느냐.]

하계에서는 미리내라 하지만 천계에서는 무엇이라 부를지. 청사가 열어 준 손바닥 밖으로 고도는 하염없이 검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가만 쳐다보자 청사가 대신 대답했다.

[용의 등뼈라고 불린단다.]

고도는 두 눈에 무수히 박히는 별빛을 바라봤다. 용의 등뼈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흘러내리는 은하수의 모습은 규칙이 있었다. 열 맞춘 은하수들이 한꺼번에 동쪽이나 서쪽으로 움직이는가 하면 뱀이 지나간 자리처럼 그 흔적을 남기고 한동안 빛을 내다 사라지기도 했다. 그것은 여러 개의 은하수들이 이어져서 만들어진 거대한 하나의 등줄기였다. 등줄기를 따라서 기다란 용이 하늘 전체에 똬리를 뜨고 있었는데 그 크기가 하늘 전체를 뒤덮을 정도라 머리가 어디 있고 꼬리 끝이 어디인지를 구분할 방도가 없었다.

검은 하늘 속에서 외롭게 꿈틀거리는 거대한 용을 발견하자 고도는 입이 절로 벌어졌다. 용의 등뼈 하나가 거대한 은하수 하나를 표현하고 있으니 얼마나 넓은 하늘을 지탱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형에게 고도를 인사시키고 싶어서 데려왔어.]

그 말에 고도는 어쩐지 목구멍 너머가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늘을 구성하는 그의 형은 불행히도 청사의 가족 중 그 누구와도 달랐다. 형에게는 형체가 없었으며, 그저 별들로 이루어진 등뼈가 존재할 뿐, 움직이는 등의 모습도 어떠한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저 무수한 별빛의 흐름으로 이루어진 뼈대로만 보였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영원불멸의 존재처럼.

[형은 죽지도, 살지도 못한 존재다. 하늘에 몸을 묻은 순간 육신은 녹아 버렸고 그의 의지만이 별로 화하여 이렇게 하늘을 지탱하고 있지. 그래서 우리 가족들은 형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아. 첫째 형은 하계의 바다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고, 누나는 천계의 안보를 지키는 군장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지만, 둘째형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하늘을 지탱하기 위해서 자신을 버렸거든. 그건 아주 슬프고 또 고귀한 일이라 우리가 뭐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입에 잘 담지 않지.]

고도는 은하를 담았던 눈을 돌려 청사를 바라봤다. 별빛이 닿은 청사의 검은 비늘이 하늘의 일부분처럼 보였다. 이 먹색이 하늘에 녹아들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였다. 고도는 행여나 자신이 떨어질까 봐 소중하게 감싸 안고 있는 청사의 발톱을 손으로 꽉 쥐었다. 청사가 하늘을 닮아서, 영원히 그 하늘이 될 것을 우려하는 몸짓이었다. 자신만의 하늘로만 남아 있어 주면 안 되겠는가. 고도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지 못하는 청사는 그저 고도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기쁨에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형은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알고 느끼고 있어. 그러니 나와 너의 사이도 축복할 것이야. 형에게 이리도 어여쁜 반려를 데려왔다고 정말 많이 자랑하고 싶었거든.]

턱 밑에 숨겨 놓은 여의주를 손에 쥐더라도 이처럼 소중하게 안고 있지는 못할 터. 청사는 세상의 그 어떤 보주보다 중요한 고도의 머리를 투박한 발톱으로 넘겨 주었다. 영원히 자라지 않는 그 짧은 머리카락이 실낱처럼 흔들렸다.

“네 형에게 어떤 예를 갖추어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구나.”

[인사는 이미 받았단다. 아까부터 네 머리카락에 형의 눈길이 닿아 있거든.]

고도는 자신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발톱으로 넘겨주는 청사와 그 너머의 하늘을 바라봤다. 은하수가 유독 자신과 청사의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다른 하늘은 공허한 어둠도 머물러 있건만, 둘의 하늘은 별무리가 빼곡하게 자리 잡고 언제든 쏟아질 준비를 하는 듯했다.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다운 빛의 폭포 속에서 청사가 온 하늘을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있지, 고도. 옥황상제의 딸 중에 직녀라는 여인이 있는데 견우라는 인간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 칠월 칠석 날만 천계에 사는 까치와 까마귀들의 도움을 받아 만나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해.]

그 이야기를 어찌 모를까. 청사가 실제로 그네 둘이 머물고 있는 별을 향해 몸을 틀었다. 고도는 청사가 가리킨 방향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 하늘에 견우와 직녀가 있다는 소리냐.”

[응. 형의 첫 번째 등뼈와 두 번째 등뼈에 속한 별이야. 저기 보이지?]

“까치와 까마귀가 자신들의 몸으로 다리를 놔주더라도 만나기 어려운 거리구나.”

[하루를 꼬박 뛰어야 겨우 만날 수 있는 아주 먼 거리야. 쉼 없이 달려야 겨우 중간에서 한 시진 정도 서로를 만질 수 있거든. 도중에 지쳐서 쉬어 가기라도 하면 만나지 못하고 다시금 일 년을 기다려야 하는 거리지.]

야속하구나. 상제가 그만 제 딸에게 자비를 내려 주어도 될 것을, 어찌 저리도 먼 극단의 별에 딸과 딸의 사랑을 홀로 내버려 두고 일 년에 딱 한 차례만 만날 수 있게 하는가.

겉보기 아름답기만 한 별이 아니라는 것은 고도도 알고 있었다. 머리 위의 수많은 별에는 고도를 낳은 어미도 있을 것이고, 고도가 먼저 보낸 처자식도 있을 것이다. 고도가 지금껏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윤회를 마치고 나면 이 평온한 어둠에 누워 밝게 빛나며 영원토록 하늘과 땅을 우러러볼 것이다. 그리고 고도는 죽어서 돌아갈 곳이 될 수 없는 곳. 모든 인간들이 영원을 묻는 그곳 대신, 고도는 무(無)로 돌아갈 것이다.

고도는 별이 되지 못하는 자신의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별이 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청사가 죽기 전에 자신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청사가 제 아비처럼 늙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노인이 되어 흰 머리가 희끗해지더라도, 얼굴과 손에 세월이 깊이 팬 주름이 맺히더라도 고도는 영원히 청사의 곁을 지킬 생각이었다. 그가 죽어 다음 생에 또 만날 수 있다면 고도는 다시금 청사를 기다릴 것이고, 이번 생이 청사의 마지막 생이라면 청사의 끝을 모두 보고 난 후에 제 발로 명계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시작은 청사가 먼저 했으니, 그 끝만큼은 고도가 지켜 주고 싶었다. 설령 견우와 직녀처럼 청사를 일 년에 한 시진만 볼 수 있더라도, 아니, 그의 다음 생을 수천 년이나 기다려야 한다고 하더라도 행복할 자신이 있었다. 다음 생에서 청사가 고도를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서운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랑을 선택한다고 해도 야속해하지 않을 것이다. 고도는 그만큼 청사를 위하고 행복하게 빌어 줄 마음으로 가득했다. 자신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수많은 고통과 인내 속에서 알려 준 이다. 이 귀한 이를 위해서 그 정도는 마땅히 지키고 버텨야만 했다. 그러니 청사가 연을 끊지 않는 한 평생을 후회 없이 아끼며 사랑해 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 고도는 청사에게 영원을 바쳤다.

[내가 너를 배신하면 나를 죽여라, 고도.]

용의 커다란 눈망울이 고도 앞으로 가까워졌다. 고도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용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살벌한 이야기를 다정하게 건네는 청사에겐 거짓도 두려움도 없었다. 고도는 얼굴과 머리카락을 쓸어 만지는 발톱을 손바닥으로 마주 쥔 채 피식 웃었다.

“왜 나한테 그런 무거운 이야기를 하느냐. 어차피 인간은 용을 죽이기 힘들지. 더욱이 이런 단단한 비늘을 무기도 없는 내가 어찌 뚫겠어.”

[용을 살해하는 방법을 알려 줄까. 용의 반려자는 용을 죽일 수 있어.]

청사는 비늘로 덮여 있는 가슴을 내보였다.

[이곳은 그 어떤 무기로도 뚫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너에게 나를 살해할 수 있는 무기를 왼손으로 만들어 주었다.]

고도는 청사가 자신의 비늘로 만들어 준 왼손을 보았다. 검은색 비늘을 깎아서 만든 의수는 왼쪽 손목에 걸려 있었다. 그 의수는 고도의 간단한 도술로 실제 손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고도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보다가 청사를 바라봤다. 청사는 눈가를 접어서 웃었다.

[용이 반려자를 잘 만들지 않는 이유는 이 때문이란다. 반려자만이 용을 살해할 수 있거든. 사랑하는 이에게만 이 단단한 가슴이 부드럽게 열리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철갑보다 단단한 나의 비늘을 네 왼손으로 뚫으면 나를 쉽게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너를 배신한다면 네가 나를 처단하거라. 네가 네 영원을 내게 준 것처럼, 나는 이번 생을 너에게 주마. 용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내 말을 믿어도 좋다.]

청사의 그 말에 고도는 멍하니 있다가 설핏 눈물을 보였다. 끝이나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이 저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어이해 영원을 사는 자신과 영원만큼 천수를 누릴 용이 내일 당장 죽을 시한부보다도 더 마지막을 염두에 두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아쉬워서일까. 청사와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 있는다 해도, 이 아쉬움은 평생을 가도 느낄 듯하여, 서로 마지막을 내일 일처럼 받아들이는 것일까.

“바보 같은 놈. 내가 어찌 그러겠어. 설령, 네가 나를 배신한다면 말이다.”

고도는 왼손을 흔들어 보였다. 청사가 직접 비늘을 떼어서 만들어 준 검은색 의수가 청사의 가슴과 동색으로 움직였다.

“이 손이 아니라 내 멀쩡한 오른손으로 네 뺨을 때리고 명치에 주먹을 찔러 넣고 정강이를 차버릴 것이다. 너를 죽이는 게 아니라 너를 내 방식으로 길들일 것이다. 이 점에 불만 있느냐.”

길들인다는 말이 이렇게 설렐 줄 누가 알았을까. 고도이기에 가능한 그 말을 듣고 청사가 배시시 웃었다.

[없구나. 전혀 없단다. 고도, 앞으로 나를 잘 길들여 주면 고맙겠다.]

이렇게 착한 용이 어디 있을까. 고도는 양손으로 청사의 뺨을 어루만졌다. 은하수가 내려앉은 검은 비늘이 기분 좋게 흔들렸다. 뜨겁고 묵직한 용의 숨결 속에서 고도는 청사처럼 맑게 웃었다.

“우리가 낳은 아이의 이름을 아직 안 지어 줬지. 내가 며칠 밤을 새면서 곰곰이 생각한 끝에 우리 아이 이름을 뭐라 지을지 결정했어.”

고도는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푸른 시선에게 속삭였다.

“예그리나.”

그 한마디를 입에 담은 고도는 청사의 뺨에 입을 맞췄다.

“사랑하는 우리 사이라는 뜻이다.”

아이는 청사의 후계자로 훗날 천룡의 대업을 잇게 될 것이다. 최초에 그를 낳기로 결심한 것은 청사와 방해받지 않는 삶을 영위하기 위함이었으나, 결론적으로 아이는 그러한 가치로서 이용되지 않았다. 아이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던 것과 달리, 땅이 나서서 고도를 도와주었다. 아이에게 날개를 달아줌으로써 고도를 땅의 대리 주인으로, 하늘의 귀객으로서 인정받도록 해준 것이다. 이처럼 고도와 청사 사이를 이어 주는 소중한 존재이고, 땅과 하늘을 결합해 주는 새끼 응룡에겐 마땅히 귀한 이름을 지어 줘야만 했다. 이 아이가 하늘과 땅을 굽어 덕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도록 고도가 올바로 잘 키우겠다는 다짐을 삼켰다. 청사가 고도에게 모든 것을 준 것처럼, 사랑하는 둘의 결실이 바로 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말이다.

“대롱아. 말이란, 하면 할수록 힘을 얻는 것이라 생각한단다.”

말을 할수록 천기누설이 되어 힘을 잃는다는 인간의 사고방식과 정반대였다. 고도는 용의 방식대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다.

“앞으로는 사랑을 박하게 말하지 않으마. 네가 지칠 만큼 끊임없이 사랑을 속삭이겠다. 사랑한다, 대롱아.”

그리고 고도는 용의 방식이 인간의 방식보다 옳다고 생각했다. 말은 할수록 힘을 잃는 것이 아니라, 힘이 더해지는 것이니. 이미 많이 들어온 그 고백에서도 고도는 언제나 새로운 감정과 기쁨과 행복을 느꼈다. 청사가 말하는 ‘사랑’이란 고도에게 겹겹이 쌓이는 행복의 옷감과도 같았다. 여종들이 화려한 옷감을 몸에 대어 주는 것처럼, 고도는 청사의 사랑한다는 한 마디가 그를 포근하게 감싸 안는다고 생각했다. 실제 옷감과 달리 사랑은 정겨우며 따뜻하지 않은가.

고도는 예그리나, 라는 자식의 이름을 곱씹다가 웃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밝고 맑은 미소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아름다웠다. 고도는 누구보다 견디는 데에는 자신 있었다. 불행에도, 고통에도 익숙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젠 새로운 익숙함을 배워 보려 한다.

“잘 부탁한다, 대롱아.”

은하를 촘촘히 엮어 만든 청사의 푸른 눈에 고도의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꽃봉오리만 져 있던 만주사화가 치마폭을 펼친 것처럼, 푸른 눈에 그의 사랑이 춤추고 있었다.

곡두기행 외전(外傳) :: 예그리나(Yegrina) 終

*** 잘 정비된 소승 불교의 교학(敎學)에서는 성인을 예류(預流)·일래(一來)·불환(不還)·아라한(阿羅漢)의 사위(四位)로 나누어 아라한을 최고의 자리에 놓고 있다. 강문을 모셨던 ‘아라한과(阿羅漢科)’들은 천계의 ‘아라한’이 되기 위해 수행하며 스스로를 ‘아라한’이라 칭하는 자들일 뿐, 실제 천계의 아라한을 뜻하는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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