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36)

뱅갈보리수 아래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사내는 여울목에 앉아 붉게 핀 만주사화와 나무 끝에 달린 영서화를 돌보고 있었다. 너른 초목을 붉고 하얀 빛으로 물든 꽃은 바람이 일면 고개를 숙였다가 바람이 잦아들면 꽃잎을 펴고 치마폭을 흔드는 무희처럼 가볍게 까딱거렸다. 한적한 자미원 꽃밭에서 꽃을 돌보는 남자였지만, 우담바라 꽃이 아직 활짝 펴지 않았으니, 여래의 지혜가 이곳에 모이지 않은 것을 깊이 안타까워했다.

남자가 붉은 만주사화의 품에 안겨 있는 곳은 도솔천*이었다. 그는 가전연이라 불렸다. 마른 몸에 핏줄과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몸을 지닌 법인이다. 초라한 누더기로 몸을 가리고 여느 때처럼 꽃을 돌보고 있었다. 곧 꽃이 피리란 믿음으로 꽃잎을 정성스레 닦는 중이었다.

“가전연.”

한적한 도솔천에 가전연을 찾는 이가 나타났다. 가전연은 예상하지 못했던 이들의 방문으로 손에 들고 있던 비료와 삽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니, 이런, 스승님들께서 어찌 기별도 없이 찾아오신 겁니까.”

옷에 묻은 흙먼지를 조심스럽게 털면서 가전연은 꽃이 난 길을 피해서 걸어오는 세 남자를 바라보았다. 비바람과 뜨거운 햇살을 막는 것이 전부인 간소한 차림의 세 남자는 인간의 나이로 오십 줄에 들어선 늙은이들이었다. 모두 점잖고 양반처럼 젠체하지 않는 구석이 있으며,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천계의 일을 돌보는 어르신들이기도 했다.

“바쁘지 않다면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물론 괜찮습니다. 꽃을 피해 편하게 앉으세요.”

대접하는 상판도 없고 차 한잔 들일 수 없는 너른 평원이었다. 가전연을 포함한 사내 네 명은 허례허식을 따지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풀밭에 앉았다. 가전연을 방문한 세 남자 중 가장 나이가 젊어 보이는 이가 입을 뗐다.

“그대는 하계의 일을 모두 기억하고, 부처의 설법을 도승들의 꿈에 나타나 알려 주는 분이시지요.”

“그렇습니다.”

“혹, 하계에서 도승들의 꿈속에서 설법을 할 때 ‘고도’라는 이를 접한 적이 있습니까.”

가전연은 대답 없이 세 늙은이를 바라봤다. 가전연이 격렬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구석은 없었지만 적잖이 놀라서 말문이 막힌 상태였다. 하늘님을 보좌하는 가장 높은 하늘의 주인들이 별안간 찾아와 ‘고도’라는 이름을 입에 담은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하늘은 땅과 별개의 존재라 그들의 일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거늘, 어찌 저들 입에서 고도라는 이름 두 자가 튀어나올 수 있을까.

“고도란 자는 제가 각별히 설법을 알려 주던 도승의 절친한 친우였습니다.”

가전연의 대답에 세 남자가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번갈아 가며 입을 뗐다.

“그 도승이 ‘강문’입니까.”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제가 본 땅의 도승 중 가장 법력이 강한 이였으나, 그 재능을 삿되이 쓰는 바람에 지금은 명계에서 벌을 받고 있습니다. 올바른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라고 꿈속에서 매일 같이 설법했으나 잘 통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가전연께선 우리 천인 중 누구보다 ‘고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친우였던 자와 꿈에서 연결되신 분이니.”

“전 그저 강문이 인지하는 도사를 알 뿐입니다만.”

“본인을 낮출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처럼 매사에 눈이 밝은 분이라면 꿈속에서 고도란 자를 충분히 파악하셨지 않습니까.”

“허허, 이런.”

“고도란 자는 그 악명이 세간을 뒤덮을 만큼 자자했다고 들었습니다. 하계를 혼란스럽게 했고 명계를 어지럽혔다는 것은 천계에도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아직도 염라께서는 고도, 그자를 잡지 못해서 매일 밤 이를 버득버득 갈고 있으니 그대도 솔직하게 말을 해주심이 어떻습니까.”

높은 하늘의 주인들이 고도에 대해 묻고자 가전연을 찾아왔다니. 하늘을 다스리는 이들이 땅의 사정에 큰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퍽 기이했다.

“제가 어떤 말을 해드려야 합니까.”

“고도라는 자에 대해 명확하게 알고 싶습니다.”

“딱히 들려드릴 말이 없습니다. 그는 지극히 인간다운 인간입니다.”

“그 악동을 인간답다고 말씀하시다니, 그에게 좋은 평가를 내리시는 겁니까.”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강문이 인식하는 고도만을 알고 있습니다. 개인의 사적인 판단을 거친 인물을 제가 판단할 수 없기에 인간을 인간이라 말한 것 아니겠습니까. 강문과 고도는 분명 서로의 의견이 달라서 크게 대립을 했고, 많은 하계의 존재들이 얽혀들 만큼 크게 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강문이 고도에 대해 긍정적이기도, 부정적이기도 한 여러 가지 생각을 제가 알고 있는데 어찌 한쪽에 치우쳐서 그대들에게 평가를 내리겠습니까.”

고도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니 한 발 내빼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전연이야말로 인간 세상을 누구보다 밝은 혜안으로 지켜보는 이였다. 그가 파악하는 고도에 대한 이야기가 천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었다. 세 남자들은 이대로 물러설 수 없어서 본론을 꺼냈다.

“고도란 자가 하늘로 올라오려고 합니다.”

그 말을 덤덤히 듣고 있던 가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죽었군요.”

“아뇨, 그는 죽지 못하는 몸, 혹여나 죽었다고 해도 무저갱에 처박혀 평생을 썩어야 하는 죄인입니다. 하늘처럼 고귀한 곳에 올 수 없는 존재라고요.”

“그분에게 악한 감정이 많으신가 봅니다.”

“어찌 안 생길 수 있겠습니까. 차기 천룡의 반려자로 하늘에 오겠노라 벌써 공표를 했는데!”

속세와 떨어져 도림천에서만 꽃을 돌보던 가전연은 눈만 껌뻑였다. 분개하는 세 남자의 이야기를 차근히 듣고 나서야 주먹으로 무릎을 탁 칠 수 있었다. 차기 천룡이라면 ‘한무’라는 이름의 어린 용이다. 아직 즉위식을 거치지 않았지만 상제가 그를 각별히 여겨 다음 천룡으로 자신의 오른쪽에 두고 싶어 했기로 유명하다. 이변이 없으면 그가 천룡직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한무는 하계에서 ‘청사’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그는 고도라는 도사와 함께 하계를 떠돌다가 강문과 얽혀서 그를 직접 죽여 버리지 않았던가. 고도와 차기 천룡의 사이가 각별한 것은 그때 알았지만, 설마 하늘의 지배자인 천룡과 땅의 미물인 인간 사이에 반려의 정을 나누었다니 그 참으로 신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도란 자가 확실히 평범한 인간은 아니구나. 고도의 재기 발랄한 앞날에 비식 웃음을 터뜨린 가전연을 보며 세 천인이 답답함을 토로했다.

“고도라는 자를 하늘로 들이는 것을 반대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리도 강력하게 말하는 세 명의 천인들을 가전연은 마다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위시하는 이들에게 손사래를 친다 하여 쉽게 물러날 분위기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가전연의 힘을 얻어 한무의 결정을 뒤집고 고도를 정당하게 하계로 내쫓으려 했다. 그러기 위해 속세의 판단을 가장 올바르게 내린다는 가전연의 힘이 필요했고, 세 남자는 가전연의 협조를 반드시 얻어 낼 심산이었다.

“여기, 차기 천룡의 전령입니다. 저희가 온 이유를 한 번 보시겠습니까.”

가전연은 건네받은 종이를 펼쳤다.

[곧 천계로 올라갈 예정입니다. 귀천한 즉시 즉위식을 거행하고, 그와 관련한 모든 것은 상제와 아버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또한, 평생의 반려자를 데려가므로 그에 대한 서약을 상제와 아버님, 천계에 모두 공표하니 적당한 기일을 잡아 모두를 뵈었으면 합니다.]

전령의 내용을 읽은 가전연은 또다시 웃고 말았다. 한무라는 자의 고집이 쇠심줄보다 질기기로 유명하다. 땅에서 데려가는 반려자가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환영도사 ‘고도’라는 점에 천계의 모든 이들의 태도가 결코 우호적이지 않을 것을 알진대 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런 전령을 보내 놓고 반대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을까. 이러니 반발심이 심해져 높은 천인들이 먼저 나서 고도의 반려 지위 자체를 봉하려 하지 않나.

“왜 하필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시는 겁니까.”

가전연의 지긋한 물음에 흰 수염을 배꼽까지 기른 불환이 대답했다.

“고도라는 자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신 게 바로 그대입니다. 더군다나 이 도솔천의 주인이신 그대가 고도를 마다한다면 정당한 사유가 될 것이지요.”

“설령 제가 반대한다 할손, 천룡께서 일을 진행시키면 도리가 없습니다만.”

“만에 하나 어린 차기 천룡이 고집을 피운다면 그의 즉위식도 무사히 거행되기 힘들 것입니다. 즉위식은 금관대경보좌와 중경보좌의 동의가 합일되어야 천룡의 소경보좌 후임을 인정합니다. 대경과 중경 역시 고도라는 자를 탐탁지 않아 하니 소경을 반대한다면 그도 고도란 자를 반려로 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대경과 중경과도 이야기를 끝내신 것 같은데 왜 저한테 와서 이러는 것이지요.”

“즉위식까지 반대하면 상제의 심기가 불편해져서 정치적인 알력 싸움으로 비출 수가 있을 터, 그런 소란까지는 저희도 최대한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고도, 그자만 차기 천룡의 반려자로 인정되지 않으면 만사가 평온하게 해결됩니다. 천계의 평안을 위해 가전연 그대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천계의 지성이 하계보다 높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기에는 제법 무리가 있는 모양이다. 가전연이 보기에 하늘 위나 아래 모두 권력 다툼으로 서로의 이권 문제가 개입되어 누군가를 초대하고 내쫓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고도를 천계에서 받아 주는 것이 나쁜 선례가 될 수 있지만 이 정도로 반대할 일이던가를 꼼꼼하게 짚어 보았다. 고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하계와 명계에도 자자한 악명 높은 과거 행실 때문이라 함은 단순히 표면적인 핑계였다. 고도를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을 피한 인간이 천계에 올라온다면 지금까지 지켜 왔던 세상의 불문율이 어그러진다. 본디 살아생전 지은 행실에 따라 선과 악의 무게를 재고 그에 따라 윤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거나 지옥에서 노동을 하는 벌을 주지 않은가. 명백하게 구분되어 있는 상벌 제도가 고도 하나 때문에 허점이 생길 수 있는 문제였다. 하계에서 죽은 인간의 사후 세계에 대한 영향력이 곧 명계와 천계의 영향력이었다. 땅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못하는 이들 모두가 인간에게 상과 벌을 내려서 인간의 행동을 판단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데 벌을 받아 마땅한 고도가 상을 내리는 하늘로 온다면 앞으로 하늘과 땅 아래의 역할과 그 위엄에 의문이 생기지 않겠나. 아주 큰 구멍이 생기는 꼴이다. 이것을 천계와 명계 모두에서 받아들일 리가 없다.

“가전연, 그대가 고도를 데리고 명계로 가십시오.”

가전연은 세 남자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말했다.

“여러분, 그자의 뛰어난 능력을 저 혼자 제압하여 명계로 끌고 가라는 것은 잔혹하지 않습니까.”

남자들이 즉시 반박하는 입을 뗐다.

“하늘에서 도술을 부리지 못할 나약한 인간을 그대가 제압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터.”

“명계로 보내는 정당한 사유는 하계에서 보고 들은 고도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충분합니다. 저희들이 그러한 자리를 만들고 전격적으로 지지하겠습니다.”

가전연은 꽃잎을 닦아 주던 손수건을 집어 들어 흙먼지를 털었다. 가전연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세 남자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가전연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면 그보다 높은 불자 천인을 알현하여 끌어들일 속셈이었다. 마침 명상을 마친 가전연이 입을 뗐다.

“인간이 ‘인간’이라 불리기 전, 하늘은 그들을 뭐라고 칭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세 노인은 가전연의 뜬금없는 말에 선뜻 대꾸하지 못했다. 그들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기에 가전연은 편하게 말했다.

“명명자입니다.”

인간들은 피아를 이름으로 구분했고, 그 이름에 매겨진 가치에 따라서 자신의 세상을 구성했다. 이 원동력은 세상과 사물을 온통 궁금해하는 호기심에서 기인했다. 그들의 호기심으로 태어난 이름은 ‘명명자’가 가진 가장 큰 힘이었다. 피아를 구분하여 기록하고, 행동하며 생각한 것이 쌓여 역사가 꾸려졌기에 하늘과 땅 모든 존재들은 인간의 역사를 기억하고 존중했다. 그들의 본질이었기 때문이다.

“명명자는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갖습니다. 이름이 곧 힘을 부여하죠. 도술이나 신선술, 제석천의 폭풍우처럼 눈에 보이는 힘과 다릅니다. 그들은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상대의 가치를 결정하고, 그들의 영향력을 잴 수 있게 됩니다. 정말 신이하지 않습니까. 이름을 짓는 것만으로 상대를 구속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힘을 갖는다니 말입니다.”

“송구스럽지만, 그대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간단합니다. 명명자들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큰 고도가 자신의 반려에게 직접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대롱이’라고 말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가전연은 인자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사랑을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정다운 애칭을 붙여 놓고 과연 고도라는 명명자가 자신의 사랑을 포기할 것 같습니까. 한무의 반려가 되기로 했다면 우리라도 그를 막기 힘들 것입니다.”

천인들이 우려 섞인 걱정을 내놓았다.

“그대는 우리와 대척하겠다는 뜻입니까.”

“아뇨, 원하신다면 고도의 추방을 돕겠습니다. 저도 여래가 오시기 전에 하늘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은 피곤합니다. 하지만 정당한 사유가 없다면 고도의 추방보다는 이곳에 머무는 것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그자가 이곳에 머물러도 될 만한 사유가 없다고 장담합니다. 허면 그대는 우리를 도와주겠다는 것인지요.”

“네, 이곳에 머물 사유가 없다면요. 정당하지 않은 고도라는 명명자를 저 혼자 받아들일 이유는 없겠지요.”

세 남자가 가전연의 협조에 크게 만족하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도 가전연은 그 인사를 받는 듯 마는 듯 애매한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땅과 지하에서도 미움을 받던 고도가 결국 하늘에서도 미움을 받아 추방당한다면 그의 팔자가 원래 그런 것일 테니, 가전연이 고도의 편을 들어준다고 뒤엎어질 판이 아니었다. 만약 고도가 하늘에 머물 수 있다면 그 힘은 전적으로 명명자가 가진 힘 때문일 것이다.

명명자임에도 스스로 이름이 없어 ‘고도’라는 인생을 산 이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애칭을 붙여 줬다는 것을 가전연은 몹시도 큰 의미로 받아들였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모를까, 고도만큼 삼라만상의 운명의 수레바퀴가 얽혀 있는 이에겐 그것이 아주 큰 영향력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이번에도 고도가 이긴다면, 여래께서 어째서 인간들 사이에서 수행을 하셨는지, 그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전연은 명명자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고도를 생각하며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내비쳤다.

*

“에취.”

고도가 터뜨린 소리에 용과 도깨비, 여우 각 한 마리씩이 일제히 고도를 돌아봤다.

“고도 감기 걸렸어?”

“몽당 몽당?”

“어라, 웬 기침?”

미호가 집에 오다가 잡아 왔다던 까투리를 끓는 물에 넣고 털을 뽑는 중이었다. 까투리의 배를 갈라서 가을에 말려 놓은 당귀와 감초를 집어넣어서 먹음직스럽게 푹 고아 내고 있었다. 몽당 도깨비가 자기도 일을 거들겠다며 아궁이 불 앞에서 입김을 후욱 불었다가 불이 거세게 번져 미호의 머리끝을 태워먹은 덕에 둘이서 머리끄덩이를 잡고 티격태격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옆에서 청사가 애들도 아니고 그만하라면서 둘의 목덜미를 잡고 떨어트려 놓았지만 여전히 솜방망이 주먹질을 하는 어린애와 철부지 여인의 다툼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셋이서 투닥거리는 모습을 정자에 앉아 지켜보던 고도가 때마침 기침을 작게 터뜨린 덕에 셋의 소요가 일순 중단되었다.

관심을 표하는 데에 그친 미호와 몽당이에 반해서 청사는 고도에게 얼른 달려왔다. 고도에게 달려가 끌어안았으면 품 안에서 고도가 괜찮다면서 올려다보는 귀여운 표정을 감상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선수를 다른 이에게 빼앗겼다.

“삐이이이.”

고도의 품 안에서 작은 새소리가 울렸다. 처음엔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바닥에 질질 끌고 다녔던 날개를 이젠 제법 탄탄하게 고정하고 퍼드득거리는 새끼 용이었다. 새끼 용은 고도의 옷자락을 잡고 목덜미까지 기어 올라왔다. 네 발로 고도의 옷과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연달아 기침을 콜록이는 고도를 빤히 쳐다보았다. 커다란 눈망울로 고도를 바라보다가 머리통을 돌려 둥근 이마로 고도의 목을 간질였다. 고도가 한참 후에 멋쩍은 얼굴로 용의 턱 밑을 손가락으로 긁어 주었다.

“귀엽구나. 내 몸을 걱정해 주는 것이냐.”

턱 밑을 긁어 주는 손길에 눈을 감고 가르릉, 목 너머를 울리는 새끼 용은 고도를 꼭 쥔 채 머리를 부비적거리며 행복해했다. 고도를 안아 주려 했던 청사는 고도가 완전히 새끼 용에게 정신이 팔린 모습을 보고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새끼 용이 미호와 몽당이에게까지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건 그러려니 넘길 수 있었는데 고도까지 저렇게 다정하게 웃어 주니까 입술이 절로 삐쭉 튀어나왔다. 청사는 고도의 옆자리에 바싹 앉아서 고도에게 고개를 내밀었다.

“고도야, 왜 감기에 걸린 거냐. 추우면 안아 줄까.”

청사의 애교 섞인 걱정에 고도가 새끼 용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렸다. 청사가 평소보다 훨씬 잔망스럽게 눈웃음을 쳤다. 청사가 왜 이러는지 알 것 같기에 고도는 픽, 소리를 내어 웃었다.

“누구 때문에 감기에 걸렸는지 정녕 몰라서 묻느냐. 이런 옴팡진 놈을 봤나.”

“나 때문이란 거야?”

“시도 때도 없이 벗겨댔잖아.”

“설마 그 때문에 나는 멀리하고 새끼 용만 안고 있는 건 아니겠지.”

“네놈 지금 네 새끼한테 질투하는 거냐.”

“아니다!”

“그래, 이리 와라. 내 안아 주마.”

“질투 아니라니까!”

청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필 다른 이도 아니고 제가 석 달하고도 보름 넘게 못에서 끌어안고 부화를 기다린 아이가 고도에게 매달린 것에 불만을 표했다는 게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청사를 고도가 다정하게 안아서 등을 토닥여 주었다. 얼굴이 불타오르는 청사는 고도의 익숙한 체향을 맡으면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청사는 고도에게 매달리는 새끼용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터였다. 용은 부모 자식 간에 도타운 정이 없다. 부모의 피를 물려받는 다른 생명들과 달리, 용은 피보다 진한 하늘의 기운으로만 잉태가 가능하며, 부모의 체온보다는 알 속에서 스스로의 팔과 다리를 동그랗게 말고 눈을 감은 채 제 체온에만 의지를 해야 했다. 그래서 알을 깨고 나왔을 때 부모를 찾기보다는 하늘의 정기가 강한 이를 먼저 찾기 마련이다. 용이라면 종족과 계급을 막론하고 제석천을 으뜸으로 치면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그를 배반하지 않았다.

용은 독립적이고 자아와 주체성이 강한 종족이다. 자신의 판단을 최우선으로 치기에 외골수에 고집불통이라는 나쁜 평도 뒤따라 다녔다. 자주적인 특성은 알을 깨고 나온 그 순간부터 발현되어 스스로 먹이를 찾아 나서고 하늘의 정기를 꿀떡꿀떡 삼키느라 바쁜데 왜 고도와 청사가 낳은 새끼는 인간처럼 어미를 먼저 찾고, 어미를 그리워하며 따르고 그 체온에 기대어서 어리광을 부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성이 덜 떨어지는 놈인가 하여 청사가 지긋하게 쳐다보면 새끼용은 아직 이성이 완고히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도 청사가 자신보다 더 높고 고귀한 용임을 알아 스스로 고개를 숙였다. 청사가 몸속에 담고 있던 하늘의 정기를 내뱉어 새끼용에게 먹이로 주면, 용은 그 정기에 포근히 감싸여서 청사에게 고마움과 존경심을 표현했다. 아기 새처럼 삐이익, 울어댔지만 은하수를 빼다 박은 검은 눈동자를 굴리며 날개를 퍼덕일 때는 새끼용의 주변 공기가 일그러지면서 산골짜기에서 깊은 바람이 휘몰아치기도 했다.

용이 분명했다. 또한, 그 능력이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걸출했다. 제대로 교육을 받고 큰다면 어쩌면 청사보다 더 이른 시기에 천룡의 즉위에 어울리는 실력과 성품을 갖출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자신이 낳은 새끼가 총명하고 눈치가 빠르며 재능이 뛰어나다는 점은 마냥 흐뭇했지만, 어째서 청사 자신에게는 용의 예우를 잘 갖추는 새끼가 고도에게는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며 매달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새끼 용은 고도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잡고 조금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잘 때도 고도의 배 위에서 몸을 동글게 말고 잠이 들었고, 밥을 먹을 때도 고도가 직접 찢어 준 꿩이나 토끼 살점을 받아먹었다. 고도가 비행 연습을 기대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 잘 날지도 못하면서 기우뚱, 허공을 날다가 땅에 처박혀서 빼애액 울기도 했다.

고도는 특별한 교미를 통해서 새끼용의 정기를 한동안 품고 있었다지만, 몸 밖으로 꺼낸 정기는 여의주에 가까웠고, 그것을 청사가 따로 돌봐 알의 형태를 갖고 태어났기에 자신이 낳은 자식이라는 생각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태어난 아이도 인간의 형상이 아닌 짐승의 형상이었기에 조금 낯설어했다. 단지, 어리고 약한 짐승을 돌보게 되어서 그만한 책임을 다할 뿐이었다. 먹을 것을 챙겨 주고, 잠자리를 돌봐 주고, 원한다면 같이 시간을 보내는 정도다. 자신의 자식을 위하는 마음보다 연약한 생명을 보호하는 감정에 가까웠다. 어린 용은 그러한 고도의 시간을 독점해 버렸다.

청사는 그가 자신의 후계자라는 것도 잊고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였다. 용이 이렇게 귀찮은 존재일 리가 없는데 어째서 이 녀석만큼은 제 모체를 분명하게 인지하고 매달리는지 통 모를 일이다. 새끼 용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기에, 용이 부화한 이후로 청사는 고도와 잠자리도 갖지 못했다. 입을 맞추는 행위는 간단하여 불편하지 않았으나, 포옹 이상의 밀접한 접촉을 시도할라치면 청사와 고도 사이에 낀 어린 용이 불편함을 토로하며 꼬무작거렸다. 그동안 제대로 고도를 만지지도 못했던 청사였기에 고도가 포옹을 해준 지금이 몹시 고맙고 소중했다. 곧 새끼 용이 불편하다고 울어대어서 짧은 접촉 후 떨어져야 했으나, 고도가 자유로운 한쪽 손으로 청사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와서 한쪽 품에나마 안기라는 소리였다.

너풀거리는 도포자락을 다잡지도 않고, 청사는 그대로 고도의 팔 안을 파고들었다. 한쪽 어깨엔 새끼 용을, 반대편 손엔 청사의 긴 머리와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오갔다. 고도니까 저 둘을 감당하지, 다른 존재였다면 일찍이 지쳤겠다는 생각을 하는 미호였다.

“둘 다 어쩜 저렇게 어리광이 심할까. 부전자전이네.”

미호는 몽당이가 홀라당 태워 버린 머리 한쪽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잘라 내면서 중얼거렸다.

“고도의 인내심이 대단해. 아니면 저런 행동 자체가 별로 짜증나지 않나 봐. 너는 어떻게 생각해?”

잘라 낸 미호의 그을린 머리카락을 한데 모으던 몽당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몽당이는 잘 모은 머리카락을 매듭지어 허리춤에 달고는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양쪽의 집게손가락을 톡톡 치면서 까르륵 웃는 모습을 미호가 이해하고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하긴, 좋아하면 뭐든 다 용서할 수 있겠지.”

푹 고아서 삶은 꿩을 국자로 퍼서 녹 그릇에 담았다. 몽당이는 허리에 묶었던 미호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 풀어서 입으로 바람을 후 불었다. 자신과 똑같은 아기 도깨비 네 명을 둔갑술로 만들어 낸 몽당이가 미호가 국을 떠준 녹 그릇을 머리 위에 지고 도도도도 달려 나갔다.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제법 그럴듯하게 도깨비 요술을 부리는 몽당이가 귀여웠기에 미호는 뿌듯하게 웃었으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새끼 용이 고도의 어깨 위에 턱을 올리고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하루 중 눈을 뜬 시간이 모두 합쳐 두 시진도 안 될 만큼 어린 용은 하루의 대부분을 잠자는 데 보냈다. 새끼 용이 고롱고롱 코를 골면서도 편하게 자는 동안 청사는 고도의 턱 끝을 손으로 짚으면서 쪼옥, 뽀뽀를 해주었다. 고도도 따뜻한 청사의 입맞춤이 싫지 않은 듯 작게 입을 벌리고 넘어오는 청사의 혀를 받아 주고 있었다. 장소와 때를 구애받지 않는 둘의 애정 행각은 몽당이가 도도도 달려오다가 발이 걸려 넘어지는 통에 바닥에 쏟아 버린 꿩 죽으로 잠시 중단되었다. 몽당이가 음식을 엎은 죄책감에 눈물을 글썽거리자 청사가 먼저 손을 뻗어 그런 몽당의 옷에서 쌀알과 꿩 고기들을 털어 주었다.

“조심해야지.”

음식을 엎었다고 혼나기보다 뜨거운 음식에 데지 않았는지를 먼저 살펴 주는 청사를 보면서 미호가 한 그릇 더 국자로 떠 담아 가져왔다.

“진짜 둘 다 많이 변하긴 했네.”

몽당이의 분신들이 모두 사라지고 죽에 쫄딱 젖은 본신만 남았을 때, 미호는 옷고름으로 몽당의 젖은 몸을 닦아 주었다. 정자에 펼쳐 놓은 상 위에 꿩 죽을 올려놓은 미호는 청사와 고도를 빤히 바라봤다. 고도가 어깨에서 자는 새끼 용 때문에 팔을 움직이기 불편해하자, 청사가 말없이 먼저 죽 그릇을 챙겼다. 녹 숟가락으로 떠먹여 주는 음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먹는 고도와 그런 고도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청사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미호가 중얼거렸다.

“예전엔 그렇게 외로워해서 곁을 떠날 때도 찝찝하게 만들더니, 이젠 아무 걱정 안 해도 되겠네.”

그 소리에 고도가 미호를 빤히 쳐다봤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

“혼자 있는 게 익숙한 척 굴어도 엄청 외로워했잖아. 그러니까 나 같은 애가 달라붙어도 졸졸 데리고 다녔으면서.”

“아주 먼 옛날 얘기를 하는 구나.”

“그러게. 인간 남자 하나 때문에 꼬리 잃고 엉엉 울던 때가 오래되긴 했어.”

짧게 숨을 뱉은 미호가 반듯하게 편 치마폭에 두 손을 얌전히 올려놓고 말했다.

“자리 잡은 너희를 보니 나도 마냥 철부지처럼 굴 순 없겠구나. 슬슬 고향에 돌아가 내 소임을 다하려고 생각 중이야. 이번에 가면 아마 평생 동안 인간들 사는 곳에 내려올 일은 없을 거야.”

여상하게 내뱉는 그 한마디에 고도는 청사가 떠먹여 주던 죽을 더는 받아먹지 못했다. 미호는 씩씩한 말투답게 이별을 우울해하지 않고 개운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 와서 청사와 고도를 재회하고 둘과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고도의 일행과 토월산에서 헤어진 후에 고향에서 안정적으로 살며 아버지가 점지해 준 이와 혼사를 하면 우여곡절을 겪지 않고 안락하게 살 수 있었지만, 한편으론 고도 일행과 함께했던 일상의 시끌벅적함이 깊은 그리움으로 남아 있었다.

한밤에 달을 보다가도, 어두운 산 그림자를 보면서도 고도가 아직도 요괴를 잡으러 다닐까, 혹은 그가 바라는 대로 죽음을 소원으로 빌었을까, 궁금해했었다. 고도가 죽지 않고 청사가 그와 함께 사랑을 나누기로 맹세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날 기쁨과 그리움으로 앞뒤 생각하지 않고 달려 나왔다. 집을 나오면서 아버지는 또다시 인간에게 정을 주는 미호를 크게 꾸짖었고,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집으로 들어와 살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그런 꾸지람이 듣기 싫어 일부러 고도와 청사를 만나고도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도 산 곳곳에서 백여우들이 아버지의 전언을 미호에게 전해 주고 있다. 이 이상 말썽을 부리면 구미호들을 전부 동원하여 미호를 억지로라도 끌고 오겠노라 엄포를 놓았다. 아버지의 노여움이 솔직히 많이 무섭고 후한이 두려웠다. 그러나 미호는 아버지에게 고집이 먹히는 동안만이라도 청사와 고도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미호가 보기에 고도와 청사가 서로를 아끼고 위하는 모습이 참으로 어여뻤다. 둘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도 저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이를 찾고 싶었다. 말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취하지 않아도 서로를 신뢰한다. 서로의 마음을 배신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고, 상처를 입히는 것마저도 조심스러워했다. 양보하고 손해를 보면서도 가진 것을 내어 주고 있었다. 고도가 외로워하지 않고 포근한 표정으로 작게 코를 골며 자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의 마음이 얼마나 편안하고 안락한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미호는 저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고도가 행복해 보였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행복과 편안함으로 고롱고롱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낡은 집에서 넉넉하지 않게 먹고 입고 살아도 그 부족함을 조금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을 만큼, 그는 청사와 함께 보내는 이 시간을 몹시도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청사 역시 고도와 함께 시간을 지내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최선을 다해 수행했다.

고도와 청사는 정말 강한 존재라 생각했다. 미호가 본 그 어떤 인간과 요괴, 도깨비보다도 마음이 단단하고 올곧았다. 고도 같은 사람만이 하늘을 품을 수 있고, 청사 같은 용만이 땅을 굽어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둘은 특별했다. 특별했기에 미호처럼 평범한 백여우가 부러워할 만큼 완벽한 사랑을 하는 것이리라.

“고향에 돌아가면 아버지가 점지해 주신 남성과 부부의 연을 맺겠지. 그리고 아버지와 남편의 도움을 받아 내가 일족을 이끌어야 할 거야. 일족장이 된 나는 평생 인간을 만날 수도, 인간과 정을 나누지도 못하는 건 당연해. 물론, 인간이 되겠다는 생각도 두 번 다시 할 수 없을 거야.”

미호의 덤덤한 고백을 고도가 물었다.

“그걸로 만족하느냐.”

만족하느냐고. 어찌 요괴가 만족하는 삶을 살겠는가. 언제나 끊임없이 바라기에 요괴라 불리는 것을.

“모든 선택엔 후회가 따른다는 것을 고도, 네가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런 질문은 삼가렴.”

앞날에 확신이 있다면 그 어떤 존재도 방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방황하지 않으며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는 오로지 신만이 가능하지 않을까. 언제나 확실한 결론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신이 아닌 이상, 모든 존재는 불완전한 선택 속에서 기쁨과 속상함을 번갈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일 테다.

미호가 느끼는 삶이란 그러했다. 후회하고 안타까워하면서도 결국은 원하는 것을 조금씩이라도 긁어모으는 것에 행복해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만족하면서 기쁘게 살아가는 존재는 절대자만이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정해진 미래대로 살아가는 절대자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할지도 모른다. 삶은 불확실하기에 살아가는 일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지 않나.

미호는 고도와 청사의 사랑을 부러워했지만 그것이 사랑의 결실의 완전한 형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상황에 맞는 소소한 행복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어쩌면 자신처럼 평범한 존재에게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기 위해선 그만한 열정과 희생과 치열함이 있어야 하거늘. 딱 한 번의 실패한 사랑에 그렇게 힘들어했는데 그저 사랑에 대한 이상이 높아 마냥 올려다보고 쫓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불행한 일이었다. 미호는 자신의 위치에 맞는 행복을 선택하기로 했다.

“읏차.”

자리에서 폴짝 일어난 미호가 고도와 청사를 바라봤다.

“잘 놀았다. 이제 인세에 미련을 두지 않고 훌훌 털고 고향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 한바탕 어울려줘서 고맙다, 대롱아, 고도야.”

그녀의 이별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이는 의외로 몽당이었다. 도깨비로 태어난 후 미호의 주머니 속에서 항상 살아왔던 존재였기에 그녀와 헤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몽당이가 자리에서 폴짝 뛰며 손을 흔들었다. 자신을 두고 가지 말라며 매달리는 모습에 미호는 요사스러운 눈꼬리를 접으면서 웃었다.

“너도 나랑 같이 갈래? 저 둘보다는 내가 더 편하지 않니?”

미호가 몽당이를 손바닥에 올린 채 고도를 바라봤다. 몽당이는 고도와 청사와의 이별이 싫어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미호와의 동행을 선택하는지라,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몽당이의 추후 거처까지 결정되자 비로소 고도가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이 지진아가 혼자 결정하고 통보하는 거 보게.”

고도의 한마디에 청사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러게. 혼자 여기 와서 자아성찰하고 도깨비도 끌고 가는 거 봐.”

“내가 뭐랬느냐. 지진아는 그냥 시달림이 싫어서 여길 도피처로 삼은 거래도.”

“맞는 말이야. 그냥 떠나기 부끄러워서 제법 그럴듯한 말을 하는 거 봐.”

“그래도 하나도 감동적이지 않느니라.”

“감동은 무슨, 혼자 어른인 척 구는 게 가소롭네.”

고도와 청사를 한 대씩만 때릴 수 있다면 원이 없겠다는 미호였다. 어쩜 쌍으로 이렇게 얄미울 수가 있을까. 고도가 청사를 닮아 갔는지, 청사가 고도처럼 변했는지 모를 정도로 이제는 죽이 착착 맞는 둘을 괘씸한 눈으로 보는 미호였다. 평생 못 보리라 말을 해도, 둘에게서는 진지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너흰 내가 떠나는 마당에 고운 말도 못 해주니?”

야속하다 여기는 미호의 반응에 오히려 고도가 고개를 갸웃했다.

“영원한 이별이 아니지 않느냐.”

“내가 족장이 되면 인간 세상에 못 내려온대도!”

“그럼 내가 가면 되지. 안 그러냐, 한무야.”

고도가 직접 찾아온다는 말을 할 줄 몰랐기에 미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고도라면 시원하게 자신을 보내 버리고, 인연이 닿으면 후에 만나자며 손을 흔들 줄 알았다. 고도가 재회라는 앞날을 기약하는 말은 처음 들었다. 언제나 죽음만 앞두고 살아서 그 어떤 미련도 남기지 않는 고도가, 미호가 듣기엔 난생 처음으로 미래를 약속하고 있었다.

“어? 나는 하늘로 가면 땅에 못 내려올 텐데.”

“그럼 나 혼자 내려가고.”

“싫어, 안 보낼 거야.”

“내가 언제 네 허락 받고 움직였더냐.”

“너무해 고도! 이제 하늘도 너와 내 사이를 알거늘!”

“그래그래, 너는 각별히 챙기면서 지진아 보러 가마.”

“가능할까.”

“내가 하겠다는데 누가 상관이야.”

“그래그래, 친우를 만나러 땅에 내려가겠다는데 천인들이 간섭하는 것도 모양새가 우습겠어. 실컷 내려가거라.”

헤어짐을 영원한 이별로 받아들이지 않는 둘을 보면서 미호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렸다. 미래를 보는 시야도, 앞날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도, 그 앞날을 혼자가 아닌 청사와 함께하려는 의지도 모두 미호의 눈에는 신기한 모습이었다. 처음 봤을 때의 불안정하고 갑갑한 화로 가득 차 있던 고도가 이제는 모든 것에 초월하여 뭐든지 제 뜻대로 하겠노라 여유를 부리는 모습이 얄미운 신선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럼 둘을 오랫동안 보지 못할 테니 내 하나씩 선물을 주마.”

다정하게 미래를 약속하는 고도의 속내를 눈치챈 미호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선물까지 챙겨 주는 고도라니, 세상도 살아 볼 일이다.

“고도의 선물이라니 불안하네. 안 받으면 안 돼?”

“거절은 거절하마.”

고도는 우선 미호의 손바닥에 앉아 있는 몽당에게 고개를 숙였다. 손끝을 휘두르자 몽당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도술 걸린 서전검이 붉게 빛났다. 몽당이 깜짝 놀라서 검을 꺼내 높이 들자 서전검에서 용트림하듯 꿈틀거리는 기운이 몽당의 몸 주변을 감쌌다. 그 기운은 고도와도 연결이 되어 있었다. 붉은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힘이 고도와 서전검, 몽당을 한데 어울리듯 감쌌다. 고도와 연결되어 있던 기운은 서서히 끊어지고 고스란히 몽당에게 옮겨졌다. 고도를 감싸고 있던 커다란 붉은 연기가 서전검과 몽당에게 반씩 나누어 전해졌다. 몽당은 갑작스레 연기를 들이마셔 제 배가 부풀어 오른 모습을 보고 왕 구슬만 한 눈만 깜빡였다.

“주인의 서약을 다시 맺었다. 이 검은 이제 네 것이니라.”

“몽당?”

“너는 이제 땅에 남은 유일한 내 흔적이다. 내 피로 만들어진 아이이다. 너를 끝까지 돌보지 못해 미안하구나. 이 검이 너를 대신 지켜 줄 것이야.”

고도의 귀한 물건을 받은 몽당은 당황스러워서 입술을 우물거렸다. 동해 용왕의 눈을 찌른 명검을 선뜻 준 것도 모자라 아예 주인의 서약마저 바꿔 버리다니. 고도가 더는 검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몽당.”

몽당은 귀한 서전검을 선물 받아서 활짝 웃었다. 사소한 것에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몽당의 순수함이 고도를 물들였다. 고도는 몽당을 마주보고 웃었다. 고도는 몽당에게 이 검을 선물해 줄 생각을 일찍이 품고 있었다. 몽당이 서전검을 아무렇지 않게 접하고 만질 때마다 그가 이 검을 이어받을 주인이라 줄곧 생각해 왔다. 도깨비는 자고로 죽지도 살지도 않은 존재라, 이매망량과 인간을 이어 주는 중간자에 위치해 있다. 외발이라서 인간을 홀려 씨름을 하는 씨름 도깨비도 있고, 요술 방망이와 감투를 들고 애먼 사람들에게 장난을 거는 요술 도깨비도 있으며, 이유를 불문하고 사람을 악하게 괴롭히는 독각귀도 있건만, 고도에게 작은 손을 뻗는 몽당이는 이 세 종류 중 어떤 도깨비인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았다.

몽당이는 해가 뜨면 물건으로 돌아가는 밤의 권속인 일반적인 도깨비들과 달랐다. 그는 해와 달의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았다. 낮에 힘이 약해져 눈을 감고 잠을 자긴 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기지개를 켜며 활동할 수 있었다. 몽당이에겐 방망이도 감투도 없었고, 사람을 홀려 씨름을 거는 얄궂은 면도 없었다. 그렇다고 삿된 기운을 흘리는 악 도깨비 독각귀도 아니니, 물건에 혼이 담겨 인간의 형상으로 변하는 도깨비 특유의 능력만 없다면 이것이 과연 도깨비가 맞는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몽당이처럼 도깨비이면서도 도깨비의 특성이 변이된 존재라면 지금의 도깨비 세상을 바꿀 수 있을 수도 있다. 도깨비는 태초에 물건에 깃든 신이한 존재로, 신을 향한 믿음이 작을수록 신은 그 힘을 잃고 소멸하는데 도깨비들이 점차 사라지는 과도기에 놓여 있다. 이대로 영영 도깨비란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작은 존재가 도깨비의 세상을 바꿀 등불을 비출 수도 있다.

“내가 도사로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단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무학관 무술’이란 것을 만들어서 알려 준 일이란다.”

고도의 차분한 말에 몽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성이 낮음에도 고도의 말을 침착하게 이해하려고 애쓰는 몽당이 기특하여 고도는 부드럽게 풀어진 입으로 설명을 이었다.

“무학관 무술은 약하고 늙고 어리며 병들고 신체 일부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무술이었단다. 스스로 강해지고자 단련을 위해 만든 무술과 다르단다. 약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그가 보호하고 싶은 것을 지킬 수 있도록 약점을 보완하는 무술이었지. 상대를 다치게 하는 것보다 지키고자 하는 것을 안전하게 하는 무술. 그것이 도읍에서 가장 귀한 무술로 취급 받으면서 대대로 이어지는 것이 나는 고맙고 대견하단다. 그러니 또 다른 나와 다름없는 아이야. 이번엔 네가 그 무술로 인간이 아닌 이들을 도와주지 않겠느냐.”

몽당이 두 눈을 끔뻑였다. 어려운 말을 다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의 마지막 말만은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무학관 무술을 이용해서 인간이 아닌 이들을 도와달라. 몽당은 서전검과 고도를 번갈아 바라봤다.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이 검을 몽당이 쓴다면 고도의 뜻을 이어받는 것이 도깨비의 의리로써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몽당!”

몽당의 활기찬 대답에 고도가 만족스러움을 표했다.

“도깨비는 오래전 그들의 지도자를 잃고 힘을 잃어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왕을 모시고자 유능한 도깨비 무리인 ‘독각부대’가 그를 호위하려고 모였으나 결국 왕은 소멸되었어. 이 세상에 낡은 짚신 한 짝만 남기고 사라졌지. 그 명맥을 네가 한번 이어 보지 않겠느냐.”

몽당은 조금 전의 활기찬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곧장 당황스러운 눈으로 미호를 바라봤다. 미호는 어린 도깨비에게 막중한 임무를 넘긴 고도를 걱정하면서도 굳이 나서서 말리지 않았다. 혹 몽당이가 고도의 부탁을 잘 해결하지 못한다면 곧 백여우들의 족장이 될 미호가 도와줄 생각이었으니. 미호는 영악한 도사, 고도가 이 점까지 고려해서 어린 도깨비에게 서전검을 준 것이라 생각했다.

“네게 왕이 될 자질이 있다면 도깨비의 명맥을 이어 보거라. 만약 자질이 없다면 왕이 될 자를 평생 도우며 지키고 모시고 살아가 주었으면 한다. 이 검으로 무학을 실천하고, 약해진 도깨비들을 다시 모아 번성하거라. 왕국을 재건하고 행복하게 살아 주길 바란다. 내 바람이 거창하고 어깨를 무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내 이 땅에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이다.”

몽당이는 서전검을 꼭 쥐었다. 한동안 고민을 하던 몽당은 커다란 눈망울을 들어 올렸다. 몽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깨비 왕을 찾겠다, 혹은 도깨비 왕국을 건설하겠다. 흩어진 도깨비를 모으겠다. 적어도 고도처럼 대범한 피를 이어받은 몽당이라면 앞날에 펼쳐진 시련과 역경을 무사히 헤쳐 나갈 것으로 보였다.

“독각부대를 찾아가거라. 부대장인 비형랑을 찾아 이 검을 보여 주고 내 뜻과 네 뜻을 보여 주거라. 이것이 도깨비의 왕국을 재건하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리고 미호야.”

고도는 쳐다보는 미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호가 “어?”하고 반응하기도 전에 고도의 넘실거리는 도력이 미호의 몸속을 파고들었다. 낯선 이의 힘을 들인 미호가 화들짝 놀라 온몸의 털을 세웠지만 강력한 기운은 미호를 해칠 의도가 전혀 없이 그의 엉치뼈에 모여들었다. 고도의 힘은 조금씩 뭉쳐지다가 미호의 살갗을 뚫고 나와 검고 풍성한 꼬리 하나를 만들었다. 기겁한 미호가 빼액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고도가 잽싸게 말을 가로챘다.

“내 도력이 담긴 꼬리니 잘 써보거라. 도력이 마르지 않을까 걱정 말고. 내 기운을 땅과 연결해 놨으니 아마 끊이지 않는 샘처럼 네 뜻대로 도력이 넘쳐흐를 것이다.”

“말도 안 돼!”

“음? 너무 귀한 선물을 줬나?”

“이 더러운 검은 꼬리는 뭐야! 나처럼 하얀 백여우한테 안 어울리게!”

“…….”

“으으! 토월산 아래 강에서 씻으면 하얘지려나? 어쩜, 고도는 미적 감각도 없지, 이런 흉측한 걸 어여쁜 처녀 엉덩이에 붙여 놓느냐!”

귀한 선물을 받고도 적반하장으로 소리치는 미호의 괘씸함에 고도가 한 손에 도력을 불어넣어 미호를 공격하려 했다. 청사가 적절하게 고도의 팔을 쥐고 웃으면서 “쟤 외모에 죽고 못 살잖아. 참아.”라고 말한 탓에 고도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물러났다. 미호가 검은 꼬리를 정색하며 싫어하자 고도도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을 바라봤다. 그러다 미호가 엉엉 울려는 기색을 비추자 손가락 두 개를 마주쳐 딱 소리를 내었다.

고도의 신이한 도력으로 검은 꼬리가 순식간에 화사한 백색 꼬리로 변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던 미호의 얼굴이 맑은 하늘처럼 활짝 개었다. 그녀는 본래 색과 똑같은 순백의 꼬리를 잡고서 방방 뛰었다. 저런 이중적인 지진아 같으니라고. 고도는 도력 담긴 꼬리의 존재보다 하얀 꼬리가 하나 더 생겼다는 사실 그 자체를 좋아하며 “고향 가면 아홉 꼬리 전부에 보석이나 주렁주렁 달아야겠다”는 철부지 발언을 한 귀로 들어 넘겼다.

“그럼 토월산에 언제 올 거야? 내가 성대한 잔치를 준비해 둘게!”

가슴을 내밀고 당당하게 차기 족장의 능력을 보여 주겠노라 말하는 미호에게 고도는 손사래를 쳤다. 꼬리를 만들어 줬으니 보답하겠다는 속셈을 모를까 보냐. 고맙다는 한마디면 될 것을 일을 키우는 데에 특화된 성격이 아닐 수 없다.

“생각나면 가마. 그동안 잘 먹고 잘살아라.”

“흥, 네 걱정 없어도 잘살 거야. ……진짜 언제 올 거냐니까?”

“몰라, 생각나면 간다고.”

“……혹시 삐쳤어?”

“내가 한무 같이 속이 좁은 줄 아느냐.”

“삐쳤네.”

“잠깐! 나는 왜 걸고넘어지는 건데!”

“네가 고도 성격을 저렇게 바꿔 놓은 거 아냐.”

“아니다!”

고도의 한마디에 미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신경을 긁는 소릴 뱉었고, 엉겁결에 대화에 끌려 들어온 청사가 발끈해서 외치는 소리가 한동안 소란스럽게 울렸다. 옆에서 몽당이가 선물 받은 서전검을 들고 방방 뛰면서 좋아하고 여우 한 마리와 용 한 마리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도는 눈 덮인 산등성이를 향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미호와 몽당에게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시끄러우니까 둘 다 어서 가버려.”

고도의 축객령에 미호가 흥, 하고 말싸움을 하던 청사에게서 고개를 팩 돌렸다. 청사도 더는 말싸움을 그만두고 팔짱을 낀 채 영 아니꼬운 얼굴로 미호를 노려봤지만 말이다.

“몽당아 우리 그만 갈까?”

“몽당!”

미호가 아홉 개의 꼬리를 휘둘렀다. 고도의 도력이 미호의 요술에 섞이면서 평소의 요력보다 몰라보게 증폭된 힘이 미호의 몸을 감쌌다. 그녀는 고도와 청사에게 손을 흔드는 몽당이를 손에 꼭 쥐고 산길로 향하는 입구에 섰다.

“꼬리 고마워. 잘 꾸밀게.”

“꾸미라고 붙여 준 게 아닐 텐데.”

“꾸며도 되지, 이 꼬리 이제 내 거거든?”

“철부지.”

“뭐, 이 용밖에 모르는 팔불출아.”

혀를 베에 내뺀 미호가 씨익 웃으면서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었다.

“또 보자 도사야. 그리고 하늘의 용아.”

헤어짐의 슬픔은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고도 역시 손을 살랑살랑 흔들 뿐이었다. 고도의 성의 없는 손 인사를 보고 한쪽 눈썹을 찌푸린 미호였지만 곧 몸을 숙였다. 두 발이 눈에 언 땅에 움푹 파일 만큼 구미호의 뒷발로 변화했다. 전신을 인간의 외형으로 유지하되, 두 발에만 요력을 담은 미호가 마지막으로 고도와 청사를 힐끔 돌아보고는 문밖으로 튀어나갔다.

반짝이는 백색 털만 몇 가닥 휘날리며 눈앞에서 사라진 미호가 산의 능선을 따라 달렸다. 미호가 토월산으로 귀환한다는 소식을 들은 산속 여우들이 캥캥 울면서 그를 배웅하고 있었다. 여우들의 소란에 놀란 멧새가 날아오를 때마다 잔치에 초대받은 귀객처럼 신이 난 몽당이 요술을 부려대는 통에 나무 위에서 노랗고 파란 도깨비불이 펑펑 터져나갔다. 여우의 소리가 아득한 곳에서 메아리처럼 울릴 때가 되어서야 고도는 성의 없지만 줄곧 흔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시끌벅적하던 여우 요괴와 도깨비가 사라지자 집안이 순식간에 한적해졌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사람은 안다고, 벌써부터 적적한 집안 분위기에 고도는 가만히 정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하늘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능선을 바라보던 고도가 눈을 감았다. 차츰차츰 여운처럼 남은 온기 두 개가 자리를 떠나갔다. 유일하게 남은 흔적인 발자국도 바람에 쓸려갔다. 기억이란 참으로 무서워서 어제 일이 까마득한 옛날처럼 멀게 느껴지는가 하면 아주 오래전의 일도 아침에 겪은 것처럼 생생했다. 미호, 몽당이와 함께한 시간은 인간의 세월로는 셈할 수 없을 만큼 꾸준히 그리고 오랫동안 켜켜이 쌓여 고도의 가장 선명한 기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또렷하게 남은 기억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곧 보러 가마. 고도는 그리 말했으나 장담할 수 없는 기약이었다. 청사가 하늘로 돌아가 천룡으로 즉위하면 영원토록 땅으로 내려오지 못한다고 한다. 그의 후계를 낳는 데에 일조한 고도는 자연스럽게 청사의 곁에 거처를 두고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상제의 허락 없이는 땅을 밟기 쉽지 않다는 말을 미호에게 해주지 않았다. 영영 못 만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대신에 마치 내일 곧 만날 사람처럼 손을 흔들었다. 헤어짐이 특별하면 두고두고 그녀와 아이를 그리워하며 곱씹을까 봐, 먼 훗날이 되어서도 선명하게 기억을 되새김질하면 비참할 것을 알기에 여상하게 맞이한 고도였다.

매일 밤 파도가 치는 곳에서 긴 치마폭에 휘감긴 어린 딸아이와 그녀의 손을 맞잡은 아이 엄마의 모습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즐거운 기억이 선명하면 행복하지만 슬픈 기억이 바로 어제 일처럼 떠오르면 그 어찌 불행한 일이 아닐꼬. 고도는 그 어떤 슬픔도 가슴 깊이 묻어 두고 싶지 않았기에 어쩌면 평생 동안 만나지 못할 미호와 몽당이를 그렇게 여운도 없이 떠나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어디서든 잘살 것이다. 사랑에 그토록 아파한 여인은 그 어떤 사내보다도 강할 수 있는 존재이다. 몽당이 도깨비 왕국을 재건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지 못하더라도 그 반가운 소식을 먼 훗날 들을 수만 있다면 그때 비로소 빙그레 웃으며 둘의 기억을 아련하게 곱씹는 것도 행복한 일일 테니.

“고도야, 벌써부터 그리워하는 얼굴이구나.”

손을 맞잡아 다정하게 말해 주는 목소리를 듣고 고도가 눈을 떴다. 고도가 매일 아침 빗으로 곱게 빗어서 서툰 솜씨로 비단 끈에 묶어 주는 청사의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너풀거리고 있었다.

가끔은 여인처럼 따보기도 하고, 때론 대국 무사처럼 정수리에 높이 묶어도 보며, 어느 땐 머리를 돌돌 감아 족을 채우기도 하는 등, 고도는 부드러운 청사의 머리를 갖고 노는 일을 즐거운 소일거리로 여기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청사는 머리를 내어 주었다. 불평불만은 없었다. 서툴게 묶다가 머리채를 잡아 뜯어도 아프다는 투정 없이 “호 해줘.”라면서 오히려 눈웃음을 치며 애교를 부리지 않던가. 이번에도 꼭 그 짝이라. 덤덤한 고도의 표정을 보고도 그 깊은 곳에 있는 마음과 속내까지 빠르게 눈치챌 수 있었다.

청사는 머리카락을 내어 줄 때처럼 고도에게 따뜻한 품을 내어 주었다. 고도가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용의 방식으로 교미를 하고 알을 품고, 이젠 하계와 연결된 모든 인연을 끊어 스스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구는 것에 많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불안감을 표출하면 앞으로 함께 지내야 할 청사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혼자 삼키며 묵묵히 견디고 있었건만. 다정한 청사의 손길과 목소리에 그간 애써 공들여 왔던 평정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고도는 결국 청사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젠 정말 다 버렸다.”

친우도, 과거의 인연도 모두 끊어 냈다. 불필요한 인연을 만들지 않으려고 고립된 산에 들어와 조용히 살고 있었다. 다른 이와 소통하지 못하고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알지 못했다. 불안하고 외롭고 답답한 마음도 들었지만 아침마다 뜨는 해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외부의 요건에 의해 요괴를 잡느라 인간들에게 미움을 받고 고립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일은 힘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 없던 것마저 모두 떨쳐내고 이제 손에 남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버렸다.

“고도야.”

물밑까지 가라앉는 기분이었던 고도는 그 목소리를 듣고 가만히 제 손을 바라봤다. 다 버렸다고 말했지만, 아직 손에 쥔 것이 보였다. 청사가 손등을 어루만지면서 고도의 이마에 정중한 입맞춤을 해주었다.

“해줄 말은 하나다. 고맙다, 고도야.”

무엇이 고마운지 나열하지 않아도, 고도는 이해했다. 고도가 산속에서 살아가는 이유와 미호, 도깨비를 한꺼번에 떠나보낸 사연을 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 뜻을 이해하는 바였다.

“무엇이 가장 두려운지 말해 봐.”

청사의 나긋한 말씨에 고도는 한참 동안 다물어져 있던 입술을 떼어 냈다.

“이 세상에서 잊히는 게 두렵구나.”

“잊힌다, 라.”

“죽는 것이 싫어서 명부를 어지럽게 하여 영생을 얻었다. 살아 보니 때론 죽음이 편하다는 것을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알게 되는구나. 유한한 삶의 미련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게 됐단다.”

“그래, 맞구나, 고도야.”

“유한한 목숨에 이어 새로이 무서운 게 생겼단다. 그건 바로 누군가에게 잊히는 거란다. 소중한 이에게 내 얼굴과 목소리가 더 이상 기억나지 않게 되는 걸 생각만 해도 슬픔이 몰려오는 구나.”

“그건 네가 이 세상과 맞닿은 인연이 얼마 남지 않아서 더 애틋하게 여겨지기 때문일 테다. 한땐 유명한 도사로 살았다. 모든 사람들이 널 알고 기억했단다. 하지만 지금은 너란 존재를 아는 이가 하계에 딱 둘뿐이니, 그마저도 너와 같은 인간이 아니고 구미호와 도깨비뿐이구나. 그래서 둘에게서도 잊히면 너란 존재가 영영 이 세상에 필요 없을 것 같아 무섭구나.”

“이런 천방지축 대롱이에게 위로를 받다니. 난 이제 글렀어. 세상이 망해버리면 좋겠네.”

“감동적인 순간이라 생각했는데. 또 장난기 터지는 게 누가 고도 아니랄까 봐.”

“사람은 잘 안 바뀌는 법이지. 이 한결 같은 나를 봐라.”

“에휴, 뭐, 내가 매번 지니까 이번에도 져 줘야지. 그간 내가 네게서 많은 위로를 받았으니 돌려줘야 할 차례기도 하고.”

생긋 웃은 청사는 고도를 끌어안았다. 어깨에서 자고 있는 새끼 용이 불편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고도의 허리를 끌어안고 자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게 해주었다. 청사는 고도의 머리카락을 쓸어 만졌다. 짧지만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바닥 아래에서 얌전히 매만져졌다. 천천히 숨을 내쉬는 고도의 숨결이 정겨워서 청사는 고도의 머릿결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서늘한 겨울 공기가 맺힌 머리카락은 언제나처럼 그립고 사랑스러운 향기가 풍겼다. 자신의 연인이며, 평생토록 함께 살 반려자에게서만 나는 향기였다.

“내가 널 기억한다. 영원히 기억한다. 내 숨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나만은 너를 기억하겠다. 그런 나로도 부족하느냐, 고도.”

고도는 대답 대신 두 손으로 청사의 옷자락을 꼬옥 쥐었다. 아니, 충분하다. 그리 말하는 소리가 그의 손가락 끝을 타고 울리는 듯했다. 고도에게 고마운 것은 그가 살아서 곁에 있는 것 하나뿐이었다.

청사가 하계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오로지 고도라는 님이 살아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내쉬는 공기가 아름다웠고, 그의 눈에 맺힌 햇볕이 포근했고, 그의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봄바람과 머리카락에 앉은 작은 멧새들이 귀여웠다. 고도가 걸어가는 길엔 한겨울에도 꽃이 피었다. 고도가 쳐다보는 허공엔 한밤중에라도 빛이 번졌다. 고도의 손이 닿은 곳은 선명한 색으로 와 닿았고, 고도의 미소가 세상 전부를 포근하게 만들었다. 고도라는 사람 하나로 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의 존재만으로 자신이 다스릴 하계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바라만 봐도 벅차고 사랑스러운 임이 자신을 사랑해 준다고 한다. 사랑하는 임이 오직 청사, 그 하나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과거에 묻어 두었다. 현재와 미래는 오직 청사만을 위해서 존재했다. 청사가 전부였고, 그를 위해 어떤 것도 준비가 되었노라 말했다. 아름다움이 한낱 스러지는 유한함이라 누가 말했던가. 임의 사랑이 존재하는 한 청사의 세상은 영원토록 아름다울 것이다.

고맙다, 고도야. 사랑해 줘서 고마워.

사랑할 수 있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

“내가 널 기억한다. 영원토록, 이 세상이 사라지는 그때까지 기억하마. 고도야, 고맙다.”

두피 속으로 파고드는 청사의 숨결을 느끼면서 고도는 다시 눈을 감았다. 청사가 “울지 마라”고 티 없이 맑게 말했을 때 처음으로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슬픔도 아쉬움도 아닌, 그저 행복 때문에 사람이 울 수도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묻어 놓았던 함을 열어서 묵혀 두었던 귀한 물건을 꺼낸 기분이었다. 고도는 오랫동안 청사의 옷을 쥔 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

천룡 가문은 어제부터 하늘 위의 모든 관심을 피해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늘을 떠들썩하게 만들어 낸 사건의 중심지였기에 모든 눈과 귀와 입이 천룡의 가문에 쏠려 있었다. 직위 일선에서 물러났음에도 종종 상제가 부르면 천궁에 가서 장기를 두는 천룡에게 사건에 대해 물어보려고 수많은 정치 관료들이 몰리는 일이 일상이었다. 서로 사건의 전말을 한마디라도 들어 보려고 천룡과 점심 약속을 잡으려는 아우성을 벌였다. 때론 예물에 가까운 고급스러운 선물을 집에 직접 보내면서 “일선에서 물러나신다는 얘기를 듣고 그간의 노고에 감사드리고자 작은 예를 갖추었으니 받아 주십시오.”란 말과 함께 “시간이 괜찮으면 잠깐 차를 마시려 하는데 댁으로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라며 천룡에게 직접 말을 한번 붙이려고 안달이 난 이들도 수두룩했다.

차기 천룡의 즉위식이 코앞이기에 떠들썩할 수 있다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였다. 속사정은 차기 천룡이 치미를 통해 보낸 서신 속 ‘반려자’의 정체에 쏠려 있었다. 제물로 바쳐진 인간 여자에게 천룡의 씨를 심고 후계를 보는 것이 전통인지라 용에게 ‘반려’의 개념은 지극히 약했다. 세상에서 가장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개체로 정평이 난 용이 무려 인간을 반려로 들였다는 것도 놀라운데, 하물며 그 인간이 하계와 명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소란의 주인공이란다. 천인들은 하나같이 불편하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면서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반려와의 혼사를 저지하려는 움직임마저 보였다.

천계의 증폭된 관심과 달리 천룡은 동요하지 않았다.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서책을 보고 상제와 장기를 두는 일상을 이어 갔다. 금관소경보좌의 일은 믿을 만한 이들에게 뿔뿔이 나누어진 후였다. 선녀 군장인 자신의 딸인 ‘서진’에게 군사력을 일임하고 나머지 정치와 행정 일은 아래 백관들이 해결하게 한 뒤, 총괄과 검토만 천룡이 책임지고 있었다. 그에게 차기 천룡 후계이자 막내아들인 한무의 일을 물어도 “아들이 사랑하는 인간과 혼인하겠다는데 아비가 뭘 어쩌겠습니까.”라며 혼인하는 데에 축복도 반대도 하지 않는 중립적인 입장을 지켰다.

바위 같이 단단하고 묵직한 천룡에게서 소문의 실제적인 이야기를 캐묻는 것보단 아직 미숙한 그의 아들에게 따지는 것이 더 좋을 터였다. 많은 천인들이 한무가 반려자와 함께 하늘로 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물을 것이 많았고 질책해야 할 부분도 있었다. 군장인 서진이 직급이 높은 선녀들을 하계로 내려 보내 한무의 귀천 마중을 맡은 일정이 소문나자 여러 이권다툼이 얽힌 이들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빠른 기류로 뒤섞이는 이권다툼을 마냥 관망할 수 없었기에 서진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서진 본인이 직접 한무와 그의 반려를 맞이하려던 것까지 남에게 맡기고 중요한 일을 처리하기로 일정을 조율했다.

서진은 자홍색 활옷을 입고 있었다. 무지기를 덧댄 대란치마에는 천계에서도 가장 귀하다는 만주사화가 금박 금직으로 화려하게 수 놓여 있었다. 점점이 꽃이 핀 문양이 저고리까지 이어졌다. 하계에 내려갈 때 입는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무명 선녀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활강에 쓰일 생각은 없는 듯 너울거리지 않고 얌전히 그녀의 등을 덮고 있었다. 칠보로 장식된 화관만 머리에 쓴 서진은 대례복장을 입고서도 불편함 없이 마당을 가로 질렀다.

“서진 마마 드시옵니다.”

어린 여종의 목소리에 비질을 하던 무수리와 음식을 나르던 아낙들이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허리를 굽혔다. 그녀들의 공손한 인사를 고갯짓으로 받아 준 서진은 여종의 도움으로 품이 넉넉한 치마를 발목까지 들어 올려 계단을 올랐다. 그녀가 향한 곳은 친부가 머무는 서재였다. 낡은 종이 냄새는 매일같이 물에 적신 숯과 솔방울을 교체해도 서재 안을 퀴퀴하게 감싸는 곳. 종이 냄새가 거북한 서진과 달리 아비는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도 변함없는 물먹은 종이 냄새에 코끝을 찡그린 서진은 볕이 잘 드는 곳에 앉아 서책을 팔락 넘기는 친부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보는 눈이 있을 땐 ‘아바마마’라고 정히 예를 갖추고 인사를 올려야 했지만 다행히 곁에 있는 이들이 집안일을 하는 사용자들뿐이다. 그들은 입이 있되 혀가 없는 존재들로 어디 가서 허투루 혀를 놀릴 족속들이 아니었다. 서책에서 눈을 뗀 중년의 남성이 서진을 바라봤다. 햇볕이 닿아 청명한 하늘빛을 띠는 눈동자가 서진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래, 어서 오거라. 옷이 참 곱구나. 잘 어울려.”

이런 속 편한 소리나 내뱉다니. 아버지가 위기의식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 아닌가 싶어서 서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으셨습니까. 한무가 하늘로 올라오는 날입니다.”

“으음? 벌써 그렇게 됐느냐?”

“벌써라니요, 반려와 함께 돌아오겠다고 전령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아하, 그랬던 것 같구나.”

“아버지!”

“미안, 미안. 상제에게 연달아 장기를 지고 있어서 수를 연구하느라 정신이 팔렸지 뭐냐.”

그러고 보니 읽고 있는 서책이 장기와 관련된 것이었다. 상 옆에 관련 책을 한가득이나 쌓아 놓고 골몰하는 것이 천계의 큰일도 아닌 소일거리 장기였다. 이 뛰어난 인력을 어찌 장기 대국 상대로 낭비하는지. 상제며, 상제의 장기 상대를 마다하지 않는 아버지며, 참으로 태평한 이들이라면서 서진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한무가 천상으로 올라오면 어떤 풍파가 일 줄 알고, 대책을 준비해도 부족할 때에 태평하게 장기를 연구하는 아버지였다. 나이가 들어 세상만사에 허허실실해진 것일까. 하늘 위와 아래를 통틀어 아비만큼 근엄하고 엄격하며 날카로운 용도 없었는데 역시 세월에 모난 구석이 깎이고 둥글어졌나 보다.

아버지는 천룡의 나이로 1,500살이 넘었다. 인간의 외형에 비유하면 불혹인 사내였다. 하나, 몸은 여전히 건장했으니, 얼굴에는 이마와 입 주변에 굵은 주름이 있을 뿐, 금관소경대좌에서 완전히 물러날 만큼 몸이 허약해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일을 그만둔 건 순전히 하루 종일 장기만 두려 한 셈이 아니었을지. 상제에게 계속 지고 있으니 앞으로는 이기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승부욕을 불태운다 오해가 될 정도였다. 아버지라면 충분히 그러실 분이라면서 서진은 아버지가 보고 있던 서책을 제 맘대로 덮어 버렸다.

“엇.”

“준비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더 지체되면 정말 늦어요. 어서 한무가 도착하면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정치 일선에서 견제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그에게 알려 주어 대비책을 준비토록 일러야 합니다.”

친부가 눈에 띄게 시무룩해하는 걸 알면서도 서진은 여종을 시켜 아비의 예복을 준비했다. 단정하게 묶어 놓은 머리를 여종 하나가 붙어 빗질하고 관을 씌우자 천룡도 결국 그 손길에 몸을 맡겼다. 다른 여종들이 손과 발을 씻기고 손톱과 발톱을 정리하는 동안 서진이 옷 상태를 살폈다.

상제를 뵐 때만큼 옷의 가짓수가 많거나 관이 높고 화려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후계를 대하는 모습을 누가 보더라도 예를 잘 갖췄으니 흠을 잡을 곳이 없었다. 색상도 아비의 검은 머리와 푸른 눈에 잘 어울리는 청색이고, 금실로 수가 놓여 있으니 고급스럽고 우아해서 좋았다. 서진이 옷 상태를 만족스럽게 확인한 뒤에 여종이 신기는 버선에 발을 내민 부친을 돌아보았다.

“아버지,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동생의 혼약을 지지할 겁니다.”

부친의 시선이 서진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는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얼굴이었다. 동생의 혼약을 지지하거나 반대함으로써 얻게 될 어떠한 것도 계산하지 않았다. 득실을 따지지 않고 동생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다니, 현재 천계의 떠들썩한 분위기를 생각하면 제정신이 아니었다.

“의외구나. 너는 혼약 자체를 싫어하지 않느냐.”

“그건 제 문제고요, 동생 문제는 다르죠.”

“막내가 반려자로 데려오는 이는 전 천계를 적으로 돌린 인간인데도 지지하겠느냐. 그럼 너만 피곤해질 텐데.”

“저는 그 반려자가 누군지 예전에 하계에서 본 적 있습니다. 그 인간의 과거 행적이나 출신 성분은 그다지 환영하지 않지만 보통 인간과는 다른 그릇이라 막내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그릇?”

“네. 막내가 아주 홀딱 반했거든요. 정말 심할 정도로요. 그 철부지가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을 앓고 있는 상대인데 반대할 건 없잖습니까.”

그래, 그 사랑 때문에 태어나서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후계자 수업을 단 60년 만에 속강으로 해결하는 기염을 토하지 않았나. 막내가 다른 용보다 똑똑한 건 알았지만 워낙 여색만 밝혀서 큰물에서 놀 용은 아니라 여겼던 생각을 단숨에 엎는 일이었다.

한번 마음먹고 자리에 앉으면 부친이 요구한 내용을 깨우치기 전에는 일어나지도 않았다. 집중력을 요할 때는 몇 주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면서 그 일에 몰두하기까지 했다. 하계에 갔다 왔더니 철이 들었다고 감격할 새도 없이, “후계 수업 일찍 끝나면 즉위식 전까지 하계에 있다 와도 되죠?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어 미칠 거 같아요”라는 말을 들었다. 막내아들이 눈에 불을 켜고 후계 수업을 들은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한무마저 후계 자리를 원치 않는다면 새로운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부친으로선 한무가 천룡으로 즉위하는 데에 나름 욕심을 낸다는 것을 알고 다행이라 생각했다. 사랑 때문에 야망도 알게 되고, 그 야망으로 다시금 사랑하는 이에게 복을 주고 싶어 한다는 선순환 구조를 생각하는 아들이다. 부친 역시 딸과 마찬가지의 의견일 수밖에 없다.

“천룡의 반려는 상제님이라도 점지하지 못하는 존재이지. 그거야말로 온 은하와 땅과 하늘의 교합이 이루어 내는 ‘운’일 뿐인데 우리가 반대하느니, 찬성하느니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나.”

“말이 어렵네요, 아버지. 그럴 땐 그냥 한무 뜻대로 한다고 말씀하시면 되는 겁니다.”

“내가 그래도 위치가 있는데 그럴 듯하게 말해야 하지 않겠느냐.”

“저만 있을 때는 오히려 그런 예가 번잡스럽습니다만.”

“엇, 그렇다면 깔끔하게 말하마. 나도 찬성이다.”

천룡은 여종들의 도움으로 예복을 모두 갖추어 입었다. 큰 키의 천룡은 반듯하게 허리를 세우고 소맷단을 정리했다. 멍한 얼굴로 걷기만 해도 여인들이 얼굴을 붉히며 좋아할 만큼 외형이 정말로 근사한 아버지였으나 일을 처리할 때 지나치게 하늘의 뜻에 맡기는 경향이 있었다. 문제는 “되면 되는 거고 안 되면 안 되는 거겠지. 수인사대천명이라”고 말하는 아버지가 하는 일이 뭐든지 좋은 방향으로 풀리는 데에 있다.

만사형통인 천룡을 향해 많은 천인들이 수군거렸었다. “둘째 아들이 은하수에 누워 있어서 그 아비에게까지 복이 간다”거나 “겉으로는 귀찮은 척해도 모든 일을 완벽하게 끝내 놓고 아닌 척하는 능구렁이 같은 사내라서 그렇다”거나 “진짜 운발 하나는 억수로 좋네” 등등의 평가를 1,000년도 넘게 받아 오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천룡이 진행한 일이 부정적인 결과를 낳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은 칭송받아 마땅했다. 하나, 그를 가까운 곁에서 보필한 서진은 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부풀려졌다고 생각했다. 순수하게 존경하기엔 아버지는 너무 세상만사를 내버려 두는 기색이 강했다. 서진은 이 옷을 입고 이제 뭘 하면 되느냐고 멀뚱히 쳐다보는 아버지의 손을 잡아당겼다.

“한무가 도착하면 대청에서 기다리라 일렀습니다.”

낫 모양의 용마루를 지나면서 서진은 여종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을 일일이 받아 주었다. 딸에게 손이 잡혀 끌려가는 모양새가 썩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지만, 이 가문의 여식이 사내대장부보다 골차다는 것은 천계에도 익히 알려진 터라, 아무도 그 모습을 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여인의 몸으로 선녀를 모두 이끄는 군장이 되었을까. 혼사도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제 할 일에 매진하는 데 바쁜 서진은 웬만한 사내 몫을 거뜬히 할 수 있었기에 아비를 휘어잡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서진이 곧 가문의 안주인이나 다름없었다.

“사랑채에서 기다리라 하지 뭣하러 대청에서 기다리라 했느냐.”

“사랑채는 너무 멉니다.”

결국 본인의 편의를 위해서 오랜만에 보는 동생이 머물 곳도 정했다는 소리네. 서진다운 패기에 부친은 마음대로 하라며 더는 따지고 들지 않았다. 대청이 가까워질수록 청지기들이 부지런하게 뛰어다녔다. 겸인들이 대청을 중심으로 바삐 움직인다면 그곳을 이용하는 객이 이미 도착했다는 뜻이다. 분주히 먹을 상을 차리고 옮기는 모습을 본 서진이 자리에서 우뚝 멈추었다. 그녀는 가슴이 들썩였다. 후우, 크게 숨을 들이마신 그녀가 아비를 바라봤다.

“제가 막냇동생의 혼사를 지지한다지만 그 마음을 드러낼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처음 만났을 때는 위엄을 다하여 막냇동생을 꾸지를 것입니다. 그가 멋대로 반려를 정하여 천계를 혼란스럽게 한 점을 제가 아니면 누가 대놓고 혼내겠습니까.”

“마음대로 하거라.”

“아버지도 제 뜻을 알아주세요. 저는 결코 막냇동생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의 반려자도 밉지 않습니다. 그러나 집안에 한 명이라도 동생의 중심을 잡아 줘야 앞으로 겪게 될 문제를 냉정하게 잘 헤쳐 나가지 않겠습니까.”

“알았대도.”

“그럼 문 열겠습니다.”

대청과 이어진 장지문 앞에 몸을 숙여 서 있던 여종들이 문을 잡아당겼다. 아비의 손을 놓은 서진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턱을 밑으로 당겼다. 호선을 그리는 애교 만점인 눈가를 경직시켜 진지함을 품은 그녀는 휘하의 수하들을 다룰 때 으레 짓곤 하던 엄격한 입매를 만들었다. 치마를 한 손으로 그러쥔 서진이 냉정하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대청에 구십구 종의 반찬상을 펼치던 여종들이 허리를 조아렸다. 근엄함과 냉정함이 담긴 서진의 태도에 상대가 혈족일지라도 옳고 그름을 확실하게 분간케 하겠다는 의지가 묻어났다.

“한무. 아우를 오랜만에 보는 구나.”

서진은 대청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한무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목소리에 차를 마시던 청사가 고개를 돌렸다. 천계를 떠날 때 약소하게 입었던 복식 그대로, 청사는 파란 눈을 들고 제 누이를 바라봤다. 검은 비단처럼 부드럽고 긴 머리를 여인처럼 비녀로 묶어 놓은 것이 이상했지만, 반듯하게 앉아 있는 모습에서 아버지와 똑같은 분위기를 느꼈다. 대청의 문짝을 모두 올려 천장에 걸어 둔 만큼 볕이 여과 없이 마룻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그로 인해 남쪽을 바라보는 청사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났다.

날 때부터 신의 은혜를 입은 용이었다. 천계의 모든 실바람과 햇살과 향기가 그의 곁을 머물렀다. 누이를 향해 몸을 일으켜 인사를 하지 않아도 능히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누군가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상대가 곧잘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접게 만드는 분위기가 자연스러웠다. 부친을 빼다 박은 천룡 특유의 기운을 몸에 품고 있어서다. 같은 용족이며 아버지의 씨라는 점이 동일한데 어이하여 청사만이 천라만상의 기품을 품고 있는지 의아한 서진이었다.

지금은 손아래 동생으로 대하고 있으나 즉위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아버지의 대업을 잇기 시작하면 청사는 아버지만큼 고귀한 지배자가 될 상이었다. 아니다. 300년도 안된 어린 용에게서 벌써부터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면 아버지와 똑같은 나이를 먹었을 때는 전에 없이 위대하고 훌륭한 은하수의 지배자가 되어 아비의 업적을 뛰어넘을지도 모를 일이다.

“누이, 오랜만이야.”

생긋 웃어 보이는 미소를 보고 서진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가 장기에만 홀딱 빠져서 다른 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만큼, 청사는 제가 사랑하는 임에게 흠뻑 젖어서 주변을 의식할 틈이 없는 모양이다. 저리 예쁜 미소를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니 겸인들이며 여종들이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어쩔 줄 몰라 하지 않나.

“아무 때나 실실 쪼개는 얼굴은 집어치우지 그러냐.”

“음?”

반가운 재회임에도 누이가 면박을 주자 청사는 제 볼을 손으로 긁었다.

“보기 흉해?”

“기생오라비 같아서 영 보기 안 좋아.”

“자제해야겠네.”

그 미소로 천인 여자들에게 상사병을 앓게 하는 건 아니 될 소리지. 반려도 있는 용에게 반해서 쫓아다닐 여자들이 많진 않겠다만. 서진은 치마를 잡고 청사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종들이 차려 준 상에 딱히 젓가락질을 하지 않는 청사를 본 서진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뵌 막내 도련님을 위해서 분주히 움직이는 종들만 보이고 정작 서진이 찾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대청을 두리번거린 서진이 지체 없이 물었다.

“그 도사는 어디 있느냐? 네 반려라고 데려온다면서 같이 안 왔느냐?”

“같이 왔어.”

“그런데 어디 있지?”

“일이 있어서 마당에 나갔어.”

“무엄하네. 지금 시누이 될 사람한테 인사도 않고 집안 구경을 다닌다는 거야?”

“시누이? 아하하하, 누이 그런 단어는 어디서 배웠어? 선녀들 따라서 하계에서 목욕재계하더니 하계 풍습이라도 배워 온 거야?”

“아니 뭐, 인간을 반려로 둔다고 하니까 나도 인간들의 풍습이 뭐가 있나 다 알아본 거지, 얘는 그런 걸로 박장대소할 건 뭐야? 인간들은 시집살이라는 개념이 있던데 나도 그거 시키면 되는 거 아냐?”

“아서라, 고도 손에 물 한 방울 묻히기만 해봐. 내가 누이 손을 바라믓 강물로 적셔 버릴 거야.”

“이 패륜아!”

“뭐래. 헛소리는 누이가 먼저 시작해 놓곤.”

“네 반려자 냉큼 데려와, 인사도 안 시킬 거냐!”

“성질머리하곤. 알았어, 아버지 오시면 같이 인사드릴게.”

“아버지도 함께 오셨…… 어라? 어디 가셨지?”

조금 전에 분명히 자신의 손을 잡고 끌려온 부친이었다. 여종이 대청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 줄 때까지만 해도 옆에 나란히 서 계셨던 분이 감쪽같이 사라지셨다. 청사와 서진이 함께 남쪽 마당으로 고개를 돌렸다. 음식상을 차리고 부엌간으로 돌아가던 이들이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주인댁 사람들과 눈을 맞추면 안 된다는 예의도 잊고 서로 짧게 비명을 지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청사와 서진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청사의 귀천 소식을 접한 고위 백관이 혹 암살자라도 보낸 것인지, 혹은 예를 잊고 무엄한 행동을 하기 위해 쳐들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침묵을 금으로 아는 하인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질 정도면 예삿일이 아니다. 더욱이 그 비명 소리가 고도가 나간 방향에서 터졌기에 청사가 먼저 벌떡 일어났다. 청사를 뒤따라 치마 속에서 은장도를 꺼낸 서진이 대청마루 밑으로 내려설 때였다.

“아니, 왜 이 아이는 나를 이렇게 싫어하느냐.”

손에 쥔 은장도의 손잡이를 손등으로 유려하게 돌리면서 언제든 자객을 처리할 준비를 했던 서진이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쩔쩔 매는 부친을 보고 서진은 엉성하게 은장도를 쥔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부친이 흑의를 걸친 사내와 마주 서 있었다. 부친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사내에게 손을 내민 채 발만 동동 구르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위엄이란 것을 부러 꾸며 낼 줄 모르는 분이셨지만, 그래도 금관소경대좌라는 중책을 맡고 계신 분이 저리도 경망한 표정을 지으실 줄이야. 아버지의 부끄러운 행동에 서진이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은장도를 다시 갈무리하고 치마를 잡은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버지, 뭐하시는 겁니까!”

서진의 사자후 같은 외침에 짧은 머리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서진은 사내를 알고 있었다. 하계에서 보았던 얼굴이다. 그땐 보기만 해도 불길한 기운을 내뿜은 무거운 죽통을 등에 매고 오라비를 애꾸눈으로 만든 검을 차고 있었지만, 오늘의 그는 홀홀하게 느껴질 만큼 가벼운 차림새였다. 청사의 반려임을 떠나, 그가 오만가지 사건을 끊임없이 끌고 다녔기에, 이번에도 아비에게 망령된 짓을 했다 생각하여 버럭 소리를 지르기 직전이었다.

죽통에 무겁게 짓눌려 있던 어깨가 아니라, 그 여느 때보다도 가벼워 보이는 어깨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서진은 한쪽 눈썹을 휘며 그 어깨의 생명체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어깨 위 생명체의 정체를 확인한 서진은 턱이 툭, 떨어지는 것도 잊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생명체는 갓 태어난 어린 용이었다. 꼬리 길이까지 합치면 팔뚝만 하고 몸통만 보면 양손으로 감싸도 포근히 안을 수 있는 아주 작은 용이었다. 새까만 몸엔 비늘이 없었기에 청사나 서진처럼 교룡이 아니었다. 어린 용은 새까만 눈을 가져 동공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는데 그 모습이 사내의 눈과 모양이 똑같아서 귀엽고 순하게 보였다. 매끈한 피부에 커다란 눈망울, 조막만 한 네 개의 발로 사내의 두루마기를 꼭 쥐고 쳐다보는 모습까지 뭣하나 빼놓을 것 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게다가 화룡점정으로 날개까지 갖추었다. 날개를 파드득거리며 쩔쩔매는 부친의 손길을 경계하며 크르릉, 목을 울리다니. 용족의 미관상 그것은 신이 빚은 탐스러운 외모였다.

“어머머머머.”

어린애에게는 관심이 없어서 혼사조차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서진이 두 손으로 입을 막고 호들갑스럽게 소리쳤다. 서진도 부친처럼 양손을 뻗어 어린 용을 잡으려했지만 어린 용이 눈동자를 세로로 흡착하며 경계했기에 섣불리 다가갈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청사가 아비와 누이를 피해 사내에게 다가갔다.

“고도.”

고도라 불린 사내와 어린 용이 동시에 청사를 돌아봤다. 천룡과 서진의 접근은 철저하게 거부하던 어린 용은 청사에게만큼은 발톱을 숨기고 순한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천룡에게도 대드는 발칙한 용이 청사에게는 자발적으로 순종하니 그 모습이 해괴했던 아비와 누이가 청사를 기이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둘의 시선을 신경 쓸 틈이 없는 청사였다. 고도와 새끼 용을 등 뒤로 돌리는 데에 급급했다. 눈앞에서 사라진 어린 용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부친과 누이의 표정이 똑같았다. 아니, 근처에 몰려들어 구경하는 청지기들의 표정까지 모두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다.

아, 한 번 더 보고 싶은데.

“뭣들 하시는 겁니까, 대체.”

고도를 왜 괴롭히냐면서 잔뜩 비늘을 세우는 청사에게 부친과 누이가 동시에 말했다.

“저 용은 대체 무엇이냐.”

“저 귀여운 애는 누구 애니?”

고도가 청사의 팔 너머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고도가 난처한 표정으로 청사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아버님께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다. 누님 분께도.”

고도와 그런 고도에게 매달려서 함께 청사를 올려다보는 어린 용의 모습에 서진은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믿을 수 없게도 귀여운 모습이 빼다 닮았다. 인간과 용이 닮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일까 싶다만, 청사를 빤히 쳐다보는 용과 인간의 시선은 누가 봐도 부모 자식 혹은 형제로 느껴질 만큼 쏙 빼다 닮았다. 인간을 귀엽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천하제일미모의 새끼용과 똑같은 눈동자를 가져서일까. 고도가 문득 사랑스럽다고 여겨지는 서진이었다.

청사는 고도의 등을 손바닥으로 토닥여 주며 “내가 말할게.”라고 대답해 주었다. 청사의 아비와 서진은 긴장한 고도와 그런 고도를 살뜰히 챙기는 청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청사는 수십 명에 달하는 청지기들과 아비, 누이의 과도한 관심에 썩 곤란한 음성을 흘리다가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아버지,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들, 한무가 돌아왔습니다.”

청사의 정중한 인사를 신경 쓰는 이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고도와 어린 용에게 쏠려 있었다. 천룡이 아들의 귀환 인사마저 단박에 자르고 급급하게 물었다.

“됐고, 저 애는 누구냐.”

“……저보다 이 아이가 더 궁금하신 겁니까.”

“내 평생 저렇게 사랑스러운 용은 처음 보는 구나.”

“아, 예. 마음에 드셔서 다행입니다. 경황없는 분위기입니다만, 이렇게 되었으니 바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 반려인 고도입니다. 고도와 함께 후계를 낳아서 데려왔고요, 제 자식입니다.”

청사는 부드럽게 고도의 허리를 잡아 자신의 앞쪽으로 데려왔다. 평소 긴장이라는 걸 전혀 보이지 않던 고도였다. 그래도 사랑하는 이의 아비와 누이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인지 묘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정식으로 자리를 보존하여 인사를 드려도 부족한 때에 마당에 엉거주춤 서서 인사를 드려야 한다니. 고도는 청사의 눈치를 살피다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고도는 최대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고도라 합니다.”

고도는 잠깐 뒷말을 멈추었다. 차기 천룡의 반려자로서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야 하는지 몰라서 뜸을 들였다. 그럴듯한 미사 어구와 화려한 수식어를 생각해 보아도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기에 고도는 덤덤하게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평범한 인간입니다. 귀한 천룡의 자제분을 정식으로 제 반려로 맞이하고자 인사드립니다.”

누가 보면 고도가 청사라는 신부를 데려가기 위해 신부 측 집안에 허락을 구하는 모습이었다. 고도의 입에서 정식으로 반려를 맞이한다는 말을 듣고 얼굴을 붉히는 청사의 모습을 보면 누가 봐도 고도라는 신랑과 청사라는 신부의 조합으로 보이기 충분했고 말이다. 정식으로 허락을 구하는, 짐짓 긴장한 기색의 고도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천룡의 분위기에 고도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정면으로 그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천룡의 눈은 청사와 같았다. 맑은 하늘을 품은 새파란 눈동자였다. 푸른 눈동자는 신비롭고 맑아서 어둠을 닮은 자신과는 정반대의 속성으로 반짝거렸다. 고귀한 존재임을 시선 한 번으로 뽐내는 그의 대답이 늦어질수록 고도는 입 안이 말랐다.

침묵이 길어지면 이는 혼약을 반대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 터. 만약 천룡이 고도의 과거 전적이 요란하고 흠잡을 곳이 많아서 이 혼약을 반대한다고 말하면 고도는 어찌해야 할지 다음 행동을 생각했다.

고도는 가진 것이 없었다. 얼마 없는 것을 모두 하계에 버리고 와서 각설이보다도 더 가난한 상태였다. 하늘을 가진 천룡의 마음에 찰 만한 재물도, 천룡이 인정한 귀하고 품위 있는 직책을 가진 것도 아니다. 더욱이 여성도 아닌 남성이다. 한때 다른 여인을 품은 적이 있어서 제물로 여성을 받아들일 때 처녀성을 따지는 용들의 풍습에서 보면, 아무리 남자라지만 하자가 많은 인간이었다. 성격이 좋으냐면 또 그것도 아니다. 고도는 자신이 얼마나 고집스럽고 제멋대로에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사는 한량인지 알고 있었다.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보잘 것 없는 인간이 하늘을 품은 사내를 달라 한다면 과연 어떤 집안에서 그 청을 들어주겠는가.

혼사를 반대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반대하는 말을 뱉으면 우선 무릎을 꿇고 마음을 돌리실 때까지 기다리겠노라 말해야 했다. 늦은 밤을 지새우고 날이 밝을 때까지 가만히 이 마당에 앉아 있으면 천룡도 다시 돌아보지 않을까. 그리해도 허락을 받지 못한다면 종노릇을 하며 마음을 돌릴 때까지 기다리겠노라 말해야 했다. 비록, 집안일이란 걸 제대로 할 줄 몰라 그릇을 다 깨먹고 빗자루를 다 부러뜨릴지라도 그렇게까지 끈덕지게 굴면 미운 정이라도 들어서 받아 주지 않으려나.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노력을 해본 적 없는 고도로서는 머릿속에 떠올리는 많은 방법들이 낯설고 어려웠다. 그렇게 해서 청사와의 혼약을 허락받을 수 있다면 노력해봐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꼭 쥔 주먹 안에서 땀이 꼬여도 옷에 닦아 내지 못할 만큼 고도는 긴장한 기색을 내비추지 않으려고 했다.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이 정도는 각오하고 하늘로 올라왔노라. 고도는 자신의 다짐을 다시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천룡이 그 어떤 잔인한 말을 내뱉어도 덤덤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할 때였다. 천룡이 긴 팔을 내밀었다. 설마 때리려는 걸까. 맞는다는 상황까진 생각지도 못했기에 질끈, 한쪽 눈을 감으며 얼굴에 내려칠 과격한 타격감을 기다릴 때였다.

“이 혼사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벌린 팔로 고도를 와락 끌어안은 천룡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머릿속에 염두 해 본 적 없는 천룡의 반응이었다. 고도는 꽉 감았던 눈을 한참 후에야 슬그머니 뜰 수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지 몰라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지못해 찬성해도 감사하다고 절을 해야 하는데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말을 듣다니. 혹, 환청을 들었나 싶어서 천룡을 올려다보았다. 환청이라 생각한 천룡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천룡이 기분 좋은 미소를 만면에 띠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응룡인 자식을 낳은 게냐. 이건 하늘이 점지해 준 부부의 연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상제가 반대한다면 내가 그 자식 머리통을 갈겨 버리마. 아무 걱정 마라.”

고도와 고도의 어깨에 달린 새끼용을 함께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부모의 포근함을 지니고 있었다. 용은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개체라 부모와 자식간 효도의 관념이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것은 어찌된 것일까. 부모의 정과는 다른 애정인 걸까. 용은 같은 용족에게 너그러운 호의를 베푼다고 들었다. 그로부터 발현된 마음인 걸지도 모른다. 천룡은 후계를 중시하니, 후계가 여기서 큰 역할을 한 것일지도 모르고. 귀하다는 응룡 새끼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조금씩 이해하게 된 고도는 경직되어 있던 어깨에서 천천히 힘을 풀었다.

고도는 쿵쿵 뛰는 천룡의 가슴 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감았다. 너른 천룡의 품 안에서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 한편을 갉아먹던 미약한 두통이 옅어지고 있었다. 식은땀이 척척하게 밴 손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하늘에 올라오기 며칠 동안 뜬 눈으로 밤을 새며 정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달을 바라봤던 모든 심란함이 서늘하게 심장을 적셨다. 청사가 자신에게 해준 애정 어린 행동들, 자신을 믿고 지금까지 곁에 남아 준 사랑이 머릿속에 넘실거렸다. 지금까지 청사가 마음 고생했던 것을 모두 되갚아 주겠다며, 하늘에서 그 어떤 모진 취급을 받아도 덤덤하게 받아들이겠노라 다짐했던 고도였다.

명계로 끌려가더라도 이 심장만큼은 청사에게 내놓고 가겠노라. 오로지 청사의 사랑에 보답하겠다는 생각만으로 두렵고 낯선 천행을 감행했다. 가족의 반대, 하늘의 반대, 정략적인 암투와 자신을 명계로 끌고 가기 위한 세력과의 다툼 등 모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던 고도는 개중 청사의 가족이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 준다는 사실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귀한 응룡 덕분이라 하더라도, 그 모체인 자신을 인정해 준 것이 고마웠다. 새끼를 뺏어 가고 자신을 명계로 넘기려고 하지 않아 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부러 자신을 반기는 척 뒤로는 다른 생각을 품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고도를 반겨 주는 사실에 서늘했던 가슴이 뜨거워졌다.

고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잠도 자지 못하고 달만 멍하니 바라봤던 과거가 어리석게 느껴진 나머지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힘없이 흘러나왔다. 고도와 응룡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천룡 옆에서 누이가 허탈한 웃음을 뱉었다. 제 아비에게 동생의 기강을 잡아 보이겠노라며, 혼사를 지지하는 티를 결단코 내지 않겠다 선언한 그녀였다. 하지만 아비가 이리도 막내아우의 반려자를 두 팔 벌려 환영했는데 이제 와 목소리를 무겁게 내리까는 것도 우스운 모습이지 않나. 그녀는 아비의 품에 안겨 있는 고도에게 다가와 다정하게 말했다.

“이 혼사를 저지하려는 이가 있으면 내가 모든 동원령을 내려 군대를 풀겠다. 걱정 마라,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둘을 우리가 지켜야지, 누가 지키겠느냐. 아무 걱정 말고 나를 친누이처럼 따라 주거라, 도사야.”

아비와 누이의 지지에 백만 군대를 얻은 것처럼 든든한 청사였지만, 곧 짜증난다는 얼굴로 뒤바뀌었다. 청사는 고도와 부친을 떨어뜨려 놓는 데에 사력을 다했다.

“아, 그만 안고 있으라고요, 아버지! 누이도 좀. 아, 둘 다 왜 이래!”

고도를 꼭 안고 햇볕 냄새가 난다는 머리카락에 고개를 비비적거리는 천룡과 그런 천룡을 따라서 자기도 고도를 한번 안아 보겠다며 다가오는 서진을 말리느라 청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눈물을 보였던 고도는 어느새 자신을 한 번 더 안아 보려 하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려는 천룡과 서진 때문에 식은땀만 흘렸다. 시끄러운 용들의 말다툼에 새끼 용이 미간을 찌푸리고 빽 울어 버렸다. 천룡과 선녀 군장이 위엄도 잊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새끼용을 달래느라 한동안 마당은 정신이 없었다.

*

차기 천룡의 귀환과 소문만 무성하던 반려의 등장, 반려와의 사이에서 응룡이라는 자식을 보았다는 겹경사에 집안은 떠들썩했다. 하나 경사 속의 즐거운 분위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으니, 청사가 집안의 겸인들을 모아 외부에는 결코 응룡의 존재가 알려져서는 안 된다며 누설할 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청사의 즉위식에 앞서 상제의 최측근들이 서경권**을 행사하는 자리가 있을 예정이다. 서경권이 진행되기 전에 최측근은 사적으로 통하여 고도에 대한 간쟁과 논박을 끄집어낼 것이다. 청사는 고도를 부정하는 최측근들의 분위기를 부친과 누이를 통해 전해 들었다. 천룡의 즉위식을 수월하게 거행함은 물론, 고도의 평안한 앞날을 위해서는 청사가 고위 백관들을 설득하여 생각해야만 했다. 청사는 환송 잔치를 벌이는 집안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준비했다.

아버지께 요청하여 서경권과 즉위식 절차에서 예상할 수 있는 논쟁을 정리할 만한 전문가들을 비밀리에 접촉했다. 고도의 존재를 부정하는 백관 세력이 어디인지,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청사가 선택해야 할 득실관계를 면밀히 따져야만 했다. 부엌간에서 나온 잔칫상 음식들이 소분되어 청사와 청사가 불러들인 비밀스러운 전문가들의 규합장으로 향했으나, 그 누구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고도는 저를 내버려 둔 채 사라진 청사 때문에 덩그마니 대청마루에 앉아 있었다. 청사가 있을 때는 멀찍이서 힐끗거리며 쳐다보던 여종들이 집안 주인들 없이 홀로 있는 고도에게 무수한 관심을 표했다. 유독 고도의 어깨에서 옷자락을 움켜쥐고 색색 잠이 든 새끼 용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새끼 용이 잠결에 날개라도 펼쳐서 퍼덕거리면 어디선가 까르륵 웃음이 터졌고 속살거리는 밝은 목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하늘에서는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게 목표인 고도로선 하는 수 없이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고도는 마당을 가로질러도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 때문에 몹시 곤욕스러워하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깊은 산골짜기의 버려진 집에서 살면서 심마니들 외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사람 소리보다는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더 익숙한 고도는 수백 명이 왁자지껄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집안의 분위기에 통 동화될 수가 없었다.

최대한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 외진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워낙 넓은 곳이라서 가다가 길을 잃으면 어쩔까 하는 생각이 잠시 잠깐 들기도 했다.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날 줄은 고도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음.”

눈앞에 펼쳐진 동산의 모습을 보고 고도는 한참이나 신음을 삼켰다. 사방에 무화과와 복숭아나무가 즐비했다. 꽃을 피우지 않은 만주사화가 따뜻한 바람결에 온몸을 흔들며 지평선까지 붉은 물결을 만들었다. 바람이 불면 으레 볼이 어는 차가움만 기억하던 고도로서는 때 이른 봄을 맞이한 듯 따뜻한 바람과 햇살, 눈앞에 펼쳐진 싱그러운 봄 분위기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익숙하지 못하다는 것이 곧 낯설음으로 다가오는 곳이었다.

이곳은 인간들이 사는 곳과 달랐다. 지나치게 화사했고 포근했으며 풍요로웠다. 근심 걱정이 있을 수가 없는 극락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주어진 곳은 지금까지 고도가 느껴 왔던 부족함, 아쉬움, 빈곤과 안타까움과는 정반대의 속성들로만 뭉쳐 있었기에 고도는 구름 한 점 없는 포근한 하늘을 무척 생소한 눈으로 오랫동안 쳐다보아야 했다.

이런 곳에서 살려고 인간은 살아생전 복된 일을 하려고 애를 쓰는 구나. 현생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왜 극락을 꿈꾸는지, 눈으로 직접 보고 깨달은 고도는 서글픔을 삼켰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극락 동산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미래란 무저갱의 깊은 어둠뿐이라 믿어 왔던 그에겐 넉넉하게 주어진 이 모든 세상이 눈을 감았다 뜨면 사라질 신기루로 느껴졌다. 청사가 왜 구김살 없이 밝고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넓은 그릇을 갖게 되었는지, 이곳의 아름다움을 보며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곧 고도 자신의 부정으로 이어졌다.

이런 곳에서 청사와 사랑하며 살아도 되는 것일까. 분수에 맞지 않는 지나친 아름다움을 곁에 끼고 살아도 세상이 노여워하지 않을 것인가. 고도는 볼을 스치는 봄바람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문득 가슴속이 답답했다. 무거운 추를 가슴에 매달아 놓은 기분이었다.

“길을 잃은 얼굴이구나.”

어두워진 얼굴로 발아래에서 고갯짓하던 만주사화를 멍하니 바라보던 고도가 그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고도는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 인기척을 전혀 알 수 없었기에 짐짓 놀란 시선이 스쳤다.

고도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상대의 내공이 자신의 내공을 선회한다는 뜻이었다. 고도가 밟고 있는 마당을 품고 있는 별채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별채 건물에는 청사의 부친이 홀로 앉아 장지문을 모두 열고 복숭아나무를 그늘 삼아 장기를 두고 있었다. 예복을 벗어 어깨에만 걸친 채 저고리와 바지만 입은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벗어 놓은 복대 위엔 관모를 성의 없이 던져 놓은 것이 그에겐 상하관계와 사대부의 예절을 엄격하게 따지는 양반들과 다른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풍겼다.

고도는 바보처럼 눈을 깜빡이며 천룡을 바라봤다. 천룡은 고도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더 위대한 존재였다. 고도가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만으로도 깜짝 놀라서 쳐다볼 정도였는데 실제 두 눈이 마주치고도 천룡의 기운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그는 고요한 하늘같았다. 누구든 그를 우러러볼 수 있지만 하늘이 품은 원대한 뜻을 한낱 인간이 헤아리지 못해 미래를 준비하기 어려운 것처럼 천룡의 뜻, 의지, 의미, 능력 모든 것을 측정할 수 없었다. 놀라웠다. 천룡의 그릇이 이 정도인 줄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

고도는 몸을 숙여 바닥에 가만히 앉았다. 제아무리 해괴망측한 도사로 악명이 높은 고도조차 그가 섬기던 왕 앞에서 격식을 차릴 때는 요망한 소리를 하는 입을 다물 줄 알던 상식인이었다. 그 상식이 발휘되는 상대가 하늘 아래 오직 왕뿐이었기에 고위 백관들의 미움과 반발을 사기도 했다.

고도가 인정하는 존재가 적었을 뿐이었다. 고도 그 자체가 하늘과 땅, 지하라는 경계를 넘나들며 사건 사고를 부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고도가 인정할 만큼 위대한 이가 없던 것뿐이었다. 순수한 힘만을 봤을 때, 고도는 청사의 기질을 인정했다. 그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에 이의가 없었다. 임금보다 위대한 존재가 세상에 있단 것을 처음 알려 준 이가 바로 청사였다. 한데 그 청사의 위에도 누군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누군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옥황상제라고만 생각했거늘, 그의 아버지조차 이토록 원대한 하늘을 닮았는데 이 천룡을 수족으로 부리는 상제는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고도는 인간으로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그들을 외경심으로 대했다.

“천룡께서 머무시는 개별 사택인 것을 모르고 들어왔습니다. 죄송합니다. 곧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정중한 고도의 태도에 천룡은 손가락 사이에 끼운 장기 말을 빙글 돌렸다. 천룡은 지그시 고도를 바라보다가 장기판 위에 말을 올렸다. 나른한 태도였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고도를 살피고 있었다. 고도는 본능적으로 천룡이 자신을 시험대 위에 두고 자질을 평가하고 있는 중이라 눈치챘다. 청사와 있을 때는 좋은 말을 해준 천룡이지만, 본심은 그게 아닐 수도 있으니 독한 말이 비수가 되어 날아올 수도 있다. 어떤 이야기든 받아들일 준비를 하겠노라며 고도가 숨을 크게 들이마실 때였다.

“특이한 체질이구나. 땅에 속한 인간일진대 몸에서 느껴지는 것은 하늘의 기운이야. 두 개가 절묘하게 교합되어 가슴 위로는 하늘이, 배꼽 아래로는 땅이 느껴진다. 원래 날 때부터 그런 체질이었느냐.”

청사의 곁을 떠나 저택에서 나가라는 말에 준비를 하던 고도는 움칠했다. 무슨 말인지 곱씹어도 잘 이해가 안 되었기에 슬그머니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달칵, 천룡이 손가락 사이로 돌리던 장기 말을 장기판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홀로 주고받는 수를 살피면서도 고도를 허투루 살피는 것이 아니니,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말을 이때 쓰는가 싶었다. 천룡이 손쉽게 도력을 꿰뚫어보자 고도는 더는 당해 낼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공력이 높은 도사나 신선이 자신의 등이나 머리에 손을 대고 전력으로 기운을 불어넣어야지만, 읽힐 수 있는 내공을 눈길 한 번 준 것만으로 파악하는 그를 무슨 수로 이기겠나.

“제 체질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라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고도의 단정한 대답을 듣고도 천룡의 파란 눈동자는 장기판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양반다리로 앉은 무릎 위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자세로 미간을 찌푸렸다. 복기를 하는 모양인지, 효율적인 수를 떠올리지 못해서 애먹고 있었다. 그는 사방이 꽉 막힌 장기 형국을 보면서 손에 쥔 포를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려 말했다.

“본인 체질에 대해 모르면서 도술을 썼단 말인가.”

“땅의 기운을 이용해서 도술을 썼던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제 체질이 바뀌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저는 동일한 방법으로 도술을 쓸 수 있습니다만.”

“그래? 그렇다면 여기서 한번 보여 주겠느냐.”

“그 말인즉, 천룡 앞에서 재주를 부려 보라는 뜻입니까.”

“그래. 내 아들이 그대의 무엇에 그렇게 푹 빠졌는지 한번 보고 싶구나.”

장기판 위를 쳐다보던 하늘빛 눈동자가 생긋 웃음을 머금고 고도를 향했다. 고도는 뜻하지 않게 시선을 회피해야 했다. 놀랍게도 청사와 닮은 얼굴이었다. 웃는 모습이 똑같아서 고도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설렐 뻔했다. 부드럽고 우아해서 누가 봐도 기품이 넘치는 모습. 청사가 나이가 든다면 저러한 외형으로 변하게 될 것만 같았다. 지금은 예쁘고 사랑스럽기만 한 연인이 그땐 멋지고 우아한 모습으로 자신을 휘어잡게 될 것만 같았다. 어찌 같은 사내를 홀릴 만큼 멋있는 얼굴이란 말인가. 애써 천룡의 외형에 동요하지 않으려고 주먹을 꼭 쥐었던 고도가 숨을 내쉬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고도는 손가락 하나를 휘둘러 도력을 운용했다. 아직 꽃망울만 맺혀 있던 머리 위의 복숭아나무가 손짓을 따라 꽃을 만개했다. 꽃은 곧 다시 봉오리를 닫았고 그 속에서 단단한 열매를 만들어 갔다. 초록색 과실들이 주먹만 한 크기로 커지며 알알이 익어 갔다. 뽀얀 연홍빛으로 물든 복숭아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 만큼 자태가 탐스러웠다. 나무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한 도술이다.

겉보기엔 간단한 도술이었으나 시간을 원하는 만큼 앞당겨 만물의 지고한 법칙을 깨트리는 수준 높은 능력이었다. 시간이란 신이 기록하는 무형의 역사와 같아서 잘못 건드리면 가혹한 벌을 받기 마련이거늘, 명부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 시간의 법칙에 속하지 않는 존재로 스스로를 나락에 떨어트린 고도가 그 위험성 앞에서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다시금 시간을 움직인 것이다.

천룡은 고도를 보면서 입 꼬리에 호선을 그려 웃었다. 고도에 대한 인상은 하나였다. 배짱이 두둑한 인간이다. 청사가 본인의 후세를 인간 남성에게 보았다기에 여자와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는 여성성을 가졌는가 했더니만 아무리 봐도 청사보다 감정의 동요가 적고 맡은 바를 잘 처리해 나가는 지혜와 용기를 가진 듯했다. 맨바닥에 허리를 펴고 앉은 자세나 천룡을 앞에 두고도 기죽지 않는 모습은 물론, 인간이라면 과거의 과오를 떠올려서 다시는 건드리기 싫을 능력을 아무렇지 않게 운용하는 배짱까지 모든 것이 아들보다 더 사내답고 듬직했다. 이렇게 올곧으니 아직 미숙한 아들이 푹 빠진 것이려나. 천룡은 생긋 미소 짓고 새로운 장기 말을 손가락 사이로 굴렸다.

“하늘에서 땅의 능력인 도술을 쓸 수 있구나. 하늘이라는 강한 곳으로 오는 인간은 그 힘에 압사당해 죽기 마련이거늘, 본연의 기질을 잃지 않는 모습은 처음이다. 땅에서 많은 미움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그 풍문은 거짓이었나 보군. 땅의 인정을 받았으니 하늘에서도 완전할 수 있겠지.”

고도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복숭아를 피해 고개를 옆으로 움직였다. 그 모습이 마치 천룡의 말에 의구심을 갖고 고개를 갸웃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아까 체질 얘기도 그렇고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 고도는 침착하게 물었다.

“송구스럽지만, 무엇을 인정해 주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더 대단하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땅은 누구도 편들지 않는다. 하늘과 같지. 중심을 잡고 자신을 지켜야만 한다. 이유 없는 애정도 미움도 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한데 땅의 사랑을 받는다고 여겨지는구나. 그대는 신의 실수로 땅 위에서 태어난 존잰가 보다. 아무리 봐도 용이나 그보다 높은 존재로 났어야 했어. 인간이 아니라.”

고도는 심장과 배로 들어왔던 빛을 떠올렸다. 망막에도 남는 빛의 무리는 몸으로 흡수된 후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아리아와 얽혔던 때를 생각하니 이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땅의 주인이 나타나질 않나, 한겨울 찬바람이 그다지 차갑게 느껴지지 않지 않나. 까투리를 잡아먹었던 살쾡이가 산토끼를 보은처럼 내려놓은 적도 있었다. 깊은 산천의 수목이 눈과 얼음에 뒤덮여 있는 동안에도 고도가 머무르는 초가집은 따뜻한 햇살이 내리 쬐고 금수의 노래 소리가 들렸다. 이곳으로 오기 전의 땅 위에서의 생활이 참으로 아늑하고 행복하다고 느꼈던 터였다. 그것이 땅의 대리 주인으로서 받은 영광이고, 그 영광됨이 지금 천룡이 말하는 것과 상통하는 것일까. 그것이 맞다면, 고도는 그 영광이 과하다고 여겨졌다.

“저는 그런 그릇이 아닙니다. 땅의 품에서 태어난 한갓 인간일 뿐입니다.”

“과소평가를 하는구나.”

“아닙니다.”

“과소평가가 맞다. 제석천이 하늘의 대리 주인이 된 이유를 알려 줄까. 그가 바로 하늘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가 태어난 핏줄이 있고 계보가 있거늘, 제석천은 하늘 그 자체에서 난 하늘의 아들이다. 그대는 인간과의 연이 끊어졌다. 더 이상 인간이라 할 수 없지. 그럼에도 땅의 숨결, 땅의 의지, 땅의 소리를 모두 편파적인 생각 없이 들을 수 있는 뛰어난 지성을 지녔으니, 이 어찌 땅에게 사랑받는 이유로 부적합하다는 뜻이겠는가. 그대는 지금 땅에 속한 몸임에도 하늘에서 그 기운을 쓸 수 있다. 땅이 발에 붙어 있고 머리는 하늘에 닿아서 어려움이 없구나. 위와 아래가 모두 그대와 연결되어 있으니 명계에서도 신선계에서도 바다에서도 모두 그대의 능력이 통한다. 아주 특이한 체질이다. 아니, 귀한 체질이라고 말해야 맞겠구나.”

칭찬인가. 칭찬이 맞는 듯싶은데 하늘과 땅과 바다와 지하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과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천룡이 말하는 귀한 존재가 아니었다.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삿된 존재였다. 청사의 부친이 그런 자신을 받아만 줘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여겼던 고도로서는 뜻하지 않은 칭찬 앞에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천룡처럼 위대한 존재가 실없는 칭찬을 해봤자 얻을 것이 없을 것이다. 이는 진실로 고도를 좋게 봐준다는 의미지만 줄곧 제 능력을 세상 사람들이 무서워하며 경멸하는 태도만 받아 봤기에 칭찬이 어색하고 의아함은 당연했다. 고도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천룡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에 홀려 멍하니 쳐다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좋게 봐주셔서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당혹스럽게만 여기는 고도를 딱한 눈으로 바라보는 천룡이었다. 자신의 능력에 자각이 없는 것인지, 칭찬이 인색한 동네에서만 살아온 것인지, 고도는 왜 천룡이 저를 좋게 보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도가 하늘에서 배울 것을 정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천룡은 그에게 한 가지 숙제를 내렸다.

“앞으로 내 아들을 보필하면서 그대가 왜 땅의 선택을 받았는지 이유를 찾아내어라. 찾아내어서 내게 설명을 하면 합격을 해주마.”

“—갑자기 그리 말씀하시면.”

“그래, 이유를 찾을 수 있도록 작은 도움을 줘야겠지. 네가 낳은 응룡 말이다. 본디 용은 태어날 때 날개를 지니고 있지 않단다. 1천년 이상 살아 환골탈태를 한 후에야 등에서 날개 뼈가 돋아나지. 한데 날 때부터 날개가 있다는 길조가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에서 너의 피를 이어받은 용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을 단순히 운이라고 생각하느냐.”

“이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었습니까.”

“왜 대단한지 찾으라고 숙제를 낸 것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보배롭다.”

“이 아이가 그렇게 보배롭고 대단하다면―.”

“아이는 둘째 치고 그대 말일세. 그대가 보배라는 뜻이야.”

입을 벙긋한 고도는 곧 얼굴이 새빨개졌다. 위대한 존재가 자신을 인정해 주는 것도 모자라 귀하다며 극찬을 하고 있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그것도 청사를 닮은 멋있는 얼굴로 지체 높게 웃으며 그리 내뱉으면 당할 재간이 없지 않나. 아니, 왜 이 집안 사내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지.

청사가 눈만 마주치면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사실이 떠올랐다. 말은 자주 뱉을수록 그 힘이 약해진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방식과 달리, 좋은 말을 많이 해야 하늘이 그 이야기를 듣고 기운을 북돋아 준다는 용들의 방식 차이로 빚은 일이었다. 칭찬도 칭찬 나름이라, 이런 극찬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청사의 부친이 부끄럽고 원망스러웠다. 칭찬에 면역이 없는 고도로서는 식은땀만 삐질 흘렸다.

고도의 어깨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던 새끼 용은 자신의 둥근 머리통에 닿은 고도의 볼이 평소보다 훨씬 뜨끈한 바람에 눈을 떴다. 고도의 따뜻한 볼을 졸린 눈으로 끔뻑거리며 바라보던 새끼용이 곧 머리통을 고도에게 들이밀면서 비비적거렸다. 새끼용의 정다운 애교까지 이어지자 ‘이 망할 용 집안’이라 생각한 고도는 한참이나 곤욕스러움을 삼켜야 했다. 이러한 고도의 심정을 훤히 꿰뚫어본 천룡의 입가에 더 짙은 미소가 걸렸다. 짓궂은 표정으로 고도를 놀리는 일을 무척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대를 데려오고 지키려는 아들 녀석도 마음에 드는구나. 이제야 슬슬 천룡다워진다. 보는 눈도 생기고, 결단력도 생겼어. 본인이 선택한 것을 위해 포기해야 하는 법도 배웠지 않느냐. 이게 다 그대 하나를 위해 성장하는 것이라면 내가 먼저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구나.”

그만해, 대체 얼마나 더 부끄럽게 할 작정인 거야. 용들의 성정이 솔직하고 과감하게 표현하는 것이라 봐야 할지, 혀가 길고 매끄러운 만큼 그 위에 얹힌 말도 들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미끄덩거리는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고도는 무릎을 꿇은 옷자락을 움켜쥐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고도의 붉은 얼굴을 한 번 꼬집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빠진 천룡의 칭찬이 도를 넘기 시작했다.

“여태껏 살면서 아직 반려를 찾지 못한 내가 보기에 내 아들은 참 복이 많은 것 같다. 용에게 반려란 정말 많은 상징성이 있거든. 인간들은 잘 모르겠지만 용족은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지 않는다. 개별적인 판단과 믿음으로만 움직이지. 본인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용이 평생을 함께할 반려를 찾는다는 건, 타고난 체질을 바꾸는 것에 준하는 아주 큰 변화이다. 고작 300년밖에 안 된 어린 아들이 벌써 반려를 찾아 혼약과 즉위식을 함께하려 하다니. 내 아들은 정말 복 받았나 보다. 아주 부러워. 나도 못 찾은 반려를 찾았는데 그게 천상천하의 보배라니.”

더는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외형은 아직 젊어도 용들의 나이로써는 늙은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늙어서 노망이 난 거라며, 고도는 그를 존경했던 바로 직전의 마음을 잃고 다급히 그의 말을 잘랐다.

“장기 상대가 없으면 제가 상대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보배를 얻고 응룡이라는 후세까지 보다니. 이렇게 된 거 그대가 힘써서 아들 셋에 딸 셋 정도를 낳아 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말을 잇던 천룡이 눈을 껌뻑였다.

“오, 그래 주겠나?”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때 청잣빛 동공을 가느다랗게 좁히면서 시선을 빛내는 게 부전자전이라. 천룡이나 청사나 좋아하는 것에 푹 빠지는 성향은 한 핏줄다웠다. 고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천룡의 앞에 공손히 앉았다. 상제 외엔 번듯한 장기 상대를 둬본 적 없던 천룡은 잔뜩 들뜬 얼굴로 고도의 손에 장기 말을 쥐어 주었다. 고도가 보여 준 첫수에서 초보적인 티는 보이지 않았다. 아주 날카로운 한 수였기에 즐거운 대국을 할 수 있겠노라, 천룡이 생긋 웃었다.

“그대 손도 참 곱구나. 혈색도 건강해 보여. 짧아서 그렇지 머리도 길면 웬만한 여인들이 부러워하겠는걸.”

“춘부장 차례입니다.”

“눈이 새까만 건 그대의 새끼나 그대나 판박이구나. 해에 가린 달그림자처럼 예쁘구나.”

“춘부장.”

“보배야, 보배.”

그만하라고, 이 자식아.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고도의 시선에 천룡은 웃음을 삼켰다. 고도를 놀려 먹는 게 이리도 즐거울 줄 몰랐다. 반응이 참으로 사랑스러운지라, 이는 자신이 아닌 상제나 고위 백관들도 고도의 단정하고 무심한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원망 어린 기색을 보이면 매한가지의 생각을 하겠노라 여겼다. 천상의 존재들은 전부 해탈한 이들이라서 이렇게 감정을 표현할 주체가 없으니, 고도는 한동안 정치 세력의 즐거운 연락에 시달리지 싶었다. 천룡이 고도를 향해서 예쁘게 웃어 보였다.

“내 살아생전 아들을 부러워하긴 처음이야.”

이 용들의 가문과 얽히면 자신의 과거 행적 때문에 불편한 일이 여럿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던 고도였다. 지금은 그 고민거리가 바뀌었다. 이 집안의 용이 나이에 상관없이 주책맞아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심해야만 했다.

“어머나. 여기 새색시가 있었네.”

고도는 사례라도 걸릴 것 같았다. 이젠 누이 차롄가. 대체 이집안은 다들 이상한 말만 하고 있지 않나.

차를 준비해 온 서진이 고도를 발견하자 그에게 어울릴 만한 옷이나 장신구를 챙겨 주느라 부산을 떨었다. 고도는 몹시 곤욕스러운 얼굴로 장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머리에 온갖 장신구를 꽂고 비단옷을 대보는 서진과 무슨 색을 걸쳐도 다 예쁘다고 맞장구를 치는 천룡에게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해졌다. 고도는 온갖 화려한 물건을 온몸에 걸친 채로 장기를 두는 것인지, 제 얼굴을 감상하는 것인지 모를 천룡과의 대국에 두 볼만 빨갛게 물들였다. 그런 고도를 보면서 귀엽다고 까르륵 웃는 서진과 흐뭇해하는 천룡이었다. 청사가 부산스럽고 일희일비하는 성격은 이 집안의 내력이구나. 그걸 똑똑히 깨우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 천계를 지탱하는 수미산에는 꼭대기에 제석천의 천궁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바로 아래 33개의 하늘이 있고, 이 하늘을 각각의 능력을 부여받은 천인들이 다스린다. 그중 욕계 육천(欲界 六天)중 제4천인 도솔천이 있다. 여래의 묘음과 32상을 볼 수 있다는 도솔천은 장차 부처가 될 보살이 사는 곳이다. 한때 석가도 현세에 태어나기 전에 이 도솔천에서 머물며 수행했다고 알려졌다. 도솔천은 천인들에게도 각별히 신성시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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