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36)

*

쫄딱 젖은 고도를 청사가 자신의 옷으로 감싸 안고 나타났다. 미호는 경악하여 꼬리와 귀를 빳빳하게 세웠다.

“어!? 대롱아, 이게 무슨 일…….”

“미호, 아랫목을 데워 두었어?”

“아, 응, 아궁이 땐 지 좀 됐어.”

“고마워.”

집을 나선 지 반나절이 지난 후에 나타난 청사는 품에 안겨서 숨을 헐떡이는 고도를 신중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모르는 미호가 보기에도 고도의 상태는 심상치 않았다. 단순히 젖은 몸으로 고뿔이 들었느냐고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다.

고도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눈을 감은 채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양팔을 감싼 채 어깨를 웅크린 그에게선 뿌연 연기가 몸 밖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연기는 수증기도 아니요, 고도가 만들어 낸 환상도 아니었으니, 갈 길을 잃고 배회하는 정체불명의 기운이 육안으로 드러났다. 기운은 평소의 고도가 보여 주던 초월적인 인간 혹은 신선에 가까웠던 도력과 달랐다. 고도는 저를 안고 있는 청사와 꼭 닮은 하늘의 기운을 내뿜었다.

청사의 힘이 강력해서 고도의 도력을 뒤덮은 것인가. 그리 여길 수도 있었지만 고도가 정신을 못 차릴 만큼 일방적으로 기운에 눌려 있는 모습은 결코 예삿일이 아니었다. 미호가 가까이 다가가 고도를 살피려 하자 청사가 으르렁, 화를 냈다.

“만지지 마. 당분간 고도 곁에는 와서도 안 된다.”

때아닌 경계령에 미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얘가 지금 아파서 죽으려고 하는 판국에!”

“필요한 절차니까 호들갑 피우지 말고.”

“아픈 게 필요한 절차일 리 없잖아!”

“내 말 들어. 당분간 방에는 절대 들어오면 안 돼. 고도의 몸이 전부 열린 상태라 나 외의 정기에 닿으면 오염되거든. 오염된 후의 정화 작용이 더 어렵고 고도의 몸에도 무리가 가는 터라 사전에 방지하려는 거야.”

단호한 청사의 말에 미호는 한 걸음 물러났다. 주변을 경계하는 청사를 보자 미호도 섣부르게 나설 수 없었다. 미호는 고도를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운 청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긴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어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았으나, 청사의 왼쪽 볼과 이마 언저리에 검은 비늘이 돋아 있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운 것이 용의 비늘을 닮아 있었다. 허리께에서 하늘거리던 청사의 머리카락은 땅에 끌리고 있었고, 정리하지 못해서 지저분하게 등 뒤로 펼친 상태였다. 고도를 안고 있는 팔은 기형적으로 근육이 커져 허벅지만 한 굵기로 보였다. 고도의 젖은 옷에 가려 잘은 보이지 않지만 손 또한 사람의 형상이 아니라. 맹금류의 발톱처럼 검고 날카로운 발톱이 길게 자라 있는 양손은 검푸른 비늘로 덮여 있어서 사람의 손보다는 짐승의 앞발로 보였다.

청사가 하는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고도의 상태가 심상치 않고, 청사 또한 평소와 확연하게 다른 모습임은 인지했다. 미호는 더 이상 따져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안 먹었으면 차려 줄게.”

“아니, 괜찮아. 필요하면 말할게.”

“으, 응.”

미호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청사는 비로소 안심하여 안방의 장지문을 열었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어 가장 따뜻한 목을 찾은 후 품에 안고 있던 고도를 내려놓았다.

젖은 옷을 벗겨 주고 보송한 이불로 맨몸을 덮어 주었다. 이불 속에서도 몸을 웅크리고 잘게 떨던 고도가 무거워 보이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꺼풀 너머로 보이는 눈빛은 몹시 지쳐 있었다. 육신에 가해진 맹렬하고도 색정적인 자극에 지쳐서 절실하게 수면을 바라고 있었다.

고도가 도사가 된 후 제 몸이 이 정도로 피곤해 본 적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청사였다. 몸의 피로가 정신을 짓누르면 고도는 도술을 이용해 육신의 피로를 없앴다. 하루 두 시진만 자도 일상생활이 어렵지 않을 만큼 육신의 한계를 도술로 다스릴 줄 알았다. 한데 지금은 그러한 편법이 전혀 통하지 않으니, 무거운 몸이 얼마나 괴로울까.

기분이 이상할 것이다. 도술을 쓰고 싶어도 단전에 모인 기운이 없어서 공허함만 느껴질 것이다. 설령 몸에 운용할 기운이 있다 해도 그것은 익숙한 땅의 기운이 아닌 생소한 하늘의 힘일 테니 자유자재로 부려 먹기는 불가능하다.

“한무.”

고도는 청사의 옷깃을 잡았다. 고도가 희미하지만 이성을 찾아 청사를 알아보았기에 청사는 재빨리 고도의 손을 잡아 주었다. 고도는 자신을 지탱해 주는 청사의 손을 꽉 움켜쥐고 입을 뗐다. 마른 입술을 타고 나온 고도의 목소리가 바싹 갈라져 있었다.

“무슨 교미가…… 이렇게 사람을 피 말리게 하느냐.”

청사는 길고 짙은 손톱으로 고도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죽지 않을 테니 걱정 마라.”

“교미하다 죽다니. 복상사처럼 끔찍한 소리는 농으로도 하지 말지어다.”

이렇게 농담을 할 정도라면 크게 걱정할 상황은 아닌 듯하다. 청사는 안도의 한숨을 작게 흘리면서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하하, 그래, 네가 평범한 인간이 아닌 도사라서 다행이다. 네가 만약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이런 과정을 견디기 쉽지 않았겠지.”

“내가 평범했으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열에 아홉은 죽어.”

죽는다는 소리에 고도는 미간을 찌푸렸다. 청사는 여전히 고도의 손을 잡아 주고 머리카락을 만져 주면서 말을 이었다.

“용의 기운을 잉태할 수 있는 여인은 많지 않아. 여인을 제물로 바치던 풍습이 남아 있을 땐 후계를 볼 때까지 수백의 여자를 하늘에 갖다 바친 역사도 있어.”

요즘에는 무당이나 신기가 있는 여자들로만 제사를 지내서 죽는 숫자가 덜하지만 교미 중 사망하는 숫자가 아예 없다고는 하지 못했다. 고도는 청사가 말하는 용의 교미라는 게 얼마나 혹독한 일인지를 실감했다.

더 이상 물어볼 힘도 없어서 지친 눈을 감았다. 졸음이 몰려왔다. 이대로 기절하듯 잠을 청하면 모든 게 편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손끝은 청사의 손을 쥐고 놓지 않은 것은 물론, 오히려 청사를 끌어당겨 그를 가슴에 품으려고 했다. 청사와 닿아 있지 않으면 큰 갈증이 밀려들었다. 수면욕보다 더 높은 곳에서 넘실거리는 해갈의 욕구에 고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눈을 감고 몸 안을 자세히 살펴보자 단전에 고인 기운을 느낄 수가 없다. 배는 텅 빈 도자기잔과도 같아서 공허하고 배가 고팠다. 땅의 기운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하늘의 기운에 눌려서 단전에 모인 기운들이 흩어져 뿔뿔이 사라진 걸까. 고도는 다시 눈을 뜨고 청사를 바라봤다.

“……한무.”

피곤해하면서도 청사를 놓지 못하는 고도의 이중적인 행동에 청사는 조심스럽게 얼굴을 붉혔다. 매달리는 고도를 진득하게 구경하고 싶지만 고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어서, 청사는 제 욕심을 접었다.

“그래, 고도야. 피곤하지?”

청사가 고도의 등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아랫목에 누워 있어 따끈해진 등을 제 쪽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혹여나 용의 발톱에 살갗이 상처를 입을까 조심하는 손길을 느끼면서 고도는 청사의 얇은 두루마기에 감싸였다. 고도는 청사의 목 뒤에 손을 감아 얼굴을 내렸다.

“그래, 피곤하다.”

그러면서 쪽, 입술을 맞대고 핥았다. 청사는 고도가 입을 맞추기 편하도록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주면서 마른 등을 쓰다듬었다.

“피곤하다면서 이리 유혹하면 내가 어찌해야 할까.”

“꼭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응?”

“제어를 못 하겠어.”

무엇을 제어하지 못하겠느냐 물을 필요도 없었다. 청사를 바라보는 시선과 목소리가 욕정을 간신히 억누르고만 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고도,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

“나도 내가 이상하구나. 내가 원래 이렇게 밝히는 놈이었나.”

다시금 쪽, 청사의 입술을 핥으면서 고도는 진심으로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피곤해서 쉬고 싶다면서 그 피곤함보다 청사와 입술을 맞대길 선택한 고도는 이 넘쳐나는 색욕에 스스로 지친 것 같았다. 지친 몸의 반응보다 청사를 원하는 욕구가 더 크다는 사실을 고도와 청사 모두 느꼈다. 청사는 목을 끌어안은 고도의 손을 슬그머니 내리면서 고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앙큼한 도사야. 내가 네 유혹에 버티지 못하는 걸 알면서 이러기냐.”

청사는 옷고름을 풀었다. 옷 속에서 드러난 판판한 가슴이 고도의 가슴에 맞닿았다. 가슴을 덮은 검은 비늘이 고도의 체온이 닿자 기분 좋은 듯 파드득 몸을 떨었다. 청사는 은하수를 담은 듯,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푸른 눈동자를 감았다 뜨면서 고도를 내려다보았다.

청사의 가슴에 맞닿아 있는 고도는 물러나는 기색 없이 청사의 볼 곳곳에 입을 맞췄다. 고도의 입맞춤을 눈을 감으면서 음미한 청사는 손을 내려 고도의 허벅지를 쓸어 만졌다. 검붉은 순흔과 잇자국이 남은 허벅지를 들어 올려서 허리를 감도록 했다. 청사가 하도 물고 빨아서 울긋불긋해진 고도의 나신에 배를 맞추자 고도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아, 하고 짧게 신음을 터뜨렸다. 즉각적이고 예민한 반응에 청사는 조심스러워하던 태도를 거두었다. 파르르 떨리는 고도의 허벅지를 주무르던 청사가 욕정을 잔뜩 품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욕구가 해소될 때까지 어디 실컷 배를 맞춰 보자꾸나.”

*

고도가 기억하는 것은 많지 않았다. 기억이 끊어졌다가 이어지면 언제나 저를 단단하게 안고 있는 청사만이 생각났다. 기억하지 못하는 때엔 고도가 죽은 듯이 잠을 잤다는 청사의 말이 있었지만 그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잠을 자지 않는 모든 시간을 청사에게 안겨 있었다는 소리 아닌가.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프고 괴롭고 힘든데, 곁에 청사가 없으면 끊임없이 그를 찾던 모습이 떠올랐다. 눈을 떴을 때 청사가 곁에 없으면 고도는 장지문을 열고 나왔다. 신을 발에 끼울 생각도 못하고 눈밭을 맨발로 밟으면서 청사를 찾았다. 그 모습을 청사가 발견하면 마루에 앉아 죽대를 입에 물고 있다가도 황급히 고도를 안아 주었다. 고도가 한기에 노출되지 않도록 안아 주는 것은 물론, 고도가 다시 잠들 때까지 몸을 토닥여 주며 달래 주기도 잊지 않았다.

고도는 청사와 몸을 섞지 않는 시간에도 청사와 손에 깍지를 끼고 함께 누워 있었다. 때론 청사의 머리카락을 베고 가만히 눈을 감으면 몸도 마음도 편안해서 꿈결에서 두둥실 떠다니는 기분이기도 했다. 청사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안심이 되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 감정이 싫지 않았기에 억지로 청사를 제 옆에 바싹 붙여 놓고 팔베개를 하거나 무릎을 베거나 그를 끌어안길 반복했다.

청사는 고도를 귀찮아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고도가 이렇게 자신에게 매달리는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에 그 욕정을 시도 때도 없이 일깨웠다. 고도가 손만 잡고 잠을 자려 하면 부러 맨몸을 쓰다듬으면서 고도의 색욕을 일깨웠고, 고도가 스스로 청사의 허리에 다리를 감도록 만들었다.

“이리 예뻐서 어쩌려고 그러냐.”

귓가에 속삭이는 청사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귓바퀴에만 머물고 날아가 버리는 기분이었다. 고도는 청사를 두 다리로 끌어안았다.

“아, 응.”

몸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뜨거운 기운에 한숨을 내쉬었다. 청사가 안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충만했다. 청사의 등 너머를 끌어안고 있으면 안심이 되었다. 평온에 안락해지기도 전에, 청사는 언제나 삽입한 몸을 움직였다. 땀이 젖은 온돌 바닥에 등허리가 닿아서 찌근덕거리며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한겨울 날씨에 방 안은 습하고 온도가 높으니, 여름처럼 느껴졌다. 청사의 냄새가 좁은 공간에 가득했고, 그의 체액이 몸을 적셨다. 고도는 뜨거운 감각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목을 뒤로 젖히면서 신음했고, 찌그덕거리며 흔들리는 몸으로 청사의 움직임을 따라야 했다.

“한무, 그만, 아니, 더, 아응, 아, 아아.”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도 모르겠다. 고도는 머리를 선회하지 않고 입 밖으로 아무렇게나 쏟아지는 말을 주워 담지 못했다. 한번 뱉은 말은 청사를 쉽게 흥분시켜서 움직임을 더 거칠게 유도했으나, 자신의 본능적인 말들이 청사에게 미치는 영향을 깨닫지 못했다. 고도는 엉덩이 사이를 가르고 들어와 철썩거리며 쳐올리는 청사에게 매달렸다. 매번 신음을 쏟아 뱉기만 했다.

교미와 발정이 온몸의 체력을 소진하는 극단적인 행위인지를 처음 안 고도는 텅 비어 있던 단전이 청사와 똑같은 푸른색의 맑은 기운으로 들어차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치 깨진 독처럼 청사의 기운은 배꼽 부근에서 모였다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면서 사라졌다. 몸에 가득 찬 청사의 기운이 사라지면 고도는 청사의 기운을 다시 받고 싶어서 그에게 매달렸고, 그때마다 청사는 눈까지 붉히면서 좋아한다, 은애한다, 사랑한다 고백을 멈추지 않았다. 몇 날 밤을 그리 청사에게만 안겼는지 모르지만 이대로 더 있다가는 말라 죽겠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눈 안쪽에서 발광하는 빛을 보았다. 최근 들어 워낙 생소한 경험을 겪고 있었기에 빛도 환상으로 치부하려던 고도였다. 안구에서 명멸하는 빛이 발자국을 찍고 몸속 더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자 이것이 환상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빛의 정체는 아리아였다. 귀찮을 정도로 고도를 쫓아다니던 빛에 대해서 까마득히 잊고 있던 고도는 다시금 그네들의 존재를 확인했다. 이번에는 살갗과 머리카락에 달라붙는 것이 아닌 몸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청사와 대립한 후 허공으로 흩어져서 보이지 않았던 빛이 몸 안에 고여 있었다.

고도는 손을 들어 손바닥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반짝이는 빛이 먼지처럼 묻어 있었다. 빛은 살갗과 눈, 머리카락과 음모에까지 군데군데 고여 있었는데 시끄럽게 떠들며 앞뒤가 안 맞는 말을 지껄이던 이들과 달리 순수한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수다스럽던 빛보다 훨씬 농도 짙게 정제된 빛이 고도의 몸속에서부터 환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땅의 대리 주인이니 뭐니 하던 복잡한 말이 생각났다. 고도는 눈살을 찌푸리고 빛의 궤적을 눈으로 좇았다. 몸속에서 유영하는 빛을 모조리 꺼내 바닥으로 패대기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빛은 고도를 위협하지도 않았고 성가시게 만들지도 않았다. 그저 고도의 신체 일부인 양 피부 밖, 안구 너머에서부터 조용히 빛을 깜빡일 뿐이었다.

위협이 안 된다면야. 고도는 더는 깊게 고민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안구 깊은 곳에서 반짝이는 빛을 못 본 체하며 새액, 색 고른 숨을 내쉬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잠의 물결에 몸을 뉘고 떠내려가기 직전, 고도는 감았던 눈을 떴다. 격렬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고도는 빛이 고인 손을 내려 자신의 배를 움켜쥐었다. 겉보기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배이건만, 고도만이 느낄 수 있는 심한 요동이 안쪽에서부터 휘몰아쳤다.

“……읏.”

고도는 난생 처음 느껴보는 복통에 식은땀마저 흘렸다. 몸을 옆으로 돌려 동그랗게 웅크리고 고통을 참아보려 하나, 아픔은 심화되어 고도의 기도마저 막았다. 허억, 허억, 거칠어진 숨을 한꺼번에 토하면서 양손으로 배를 움켜잡았다.

“청사, 대롱아, 한무야.”

익숙하게 청사를 명명하는 모든 이름을 입술 사이로 뱉어보았다. 그 소리는 힘없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방 안에는 아궁이를 끓이는 뜨거운 불기운만 고여 있었다. 청사의 기척은 문밖에서 느껴졌다. 청사로 짐작되는 목소리가 정자에 앉아 미호와 몽당이랑 함께 무언가를 이야기하면서 웃고 떠들다 툴툴거리고 있었다.

고도는 셋의 다정한 분위기를 부러워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몸을 비틀고 손가락으로 바닥을 움켜쥐었다. 바싹 세운 손끝이 방바닥을 긁느라 손톱과 살 사이로 피가 맺혔다.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프다는 느낌과 두렵다는 감정만이 어수선하게 머릿속을 물들였다. 아무리 몸을 비틀고 바닥과 이불을 움켜쥐어도 배꼽 아래에서 요동치는 움직임이 멎지 않았다.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손가락에서 반짝거리는 빛만이 날뛰었다.

한무야, 한무야.

소리가 되지 않은 입만 뻐끔거리면서 고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배를 감싸고 몸을 반대편으로 뒤집었다. 통증을 동반한 뱃속의 정기가 육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청사의 기운과는 또 다른 강한 정기였다. 이런 것을 맨몸으로 버텨 본 적이 없기에 술에 취한 것처럼 몸에 힘도 들어가지 않고 머릿속이 뒤엉키는 기분도 들었다. 고통으로 흐트러진 숨을 한꺼번에 내뱉었다. 혼미함을 참을 수 없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만큼 고통을 삼킨 고도가 힘을 쥐어 짜내 소리쳤다.

“한무……!”

짤막한 외침에 밖에서 도란도란 떠들던 소리가 멈추었다. 침묵이 고도의 귀에 닿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장지문이 벌컥 열렸다.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힘들어하는 고도를 발견한 청사가 당황해서는 신도 벗지 않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고도!”

고도가 내민 손을 움켜쥔 청사가 고도를 품에 꼭 안아 줬다. 청사의 옷깃을 움켜쥔 고도는 괴롭게 숨을 토하면서 청사에게 띄엄띄엄 말했다.

“머리가…… 깨어질 것 같다.”

“많이 아프냐?”

“잉태…… 의 영향이냐, 배도 지독히 아프다. 죽을…… 거 같아.”

엄살과는 거리가 먼 고도다. 발목이 부러져도 덜렁거리는 발목을 무심히 바라보기만 하던 고도였다. 손목이 잘리든, 신체 일부에 날카로운 쇳조각이 박히든 아프다는 호들갑보다는 미간을 찌푸리고 상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이가 아닌가. 그런 고도가 바닥에 엎어진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청사는 다급히 고도의 배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고도의 단전 부근에서 기운이 날뛰고 있었다. 이것이 잉태의 당연한 절차인지, 아니면 아무리 뛰어난 도사인 고도라도 하늘의 기운을 한데 모아 품는 것은 무리라서 몸에서 거부 반응을 보이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청사는 자신의 기운을 고도에게 밀어 넣어 몸 안을 진정시키려 해보았다.

“아악!”

고도는 더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놀란 청사는 다급하게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기운을 회수하고 싶어도 이미 고도의 몸속에서 뭉쳐지는 기운은 엉킨 실타래와 같아서 풀어내는 일은 불가능했다.

“고, 고도야.”

청사는 식은땀까지 흘리며 헐떡이는 고도를 잡고 급히 말했다.

“안되겠다. 기운을 통째로 드러내자.”

그 말에 고도가 식은땀이 맺힌 눈을 깜빡이면서 청사를 올려다보았다. 바닥을 기듯이 납작 누워 꿈틀거리던 고도가 새된 목소리로 물었다.

“잉태한…… 기운을 빼내자고……?”

“말하지 말고! 내가 빼주겠다!”

“……자…… 잠깐. 그러면 잉태는…….”

“지금 그게 문제냐! 네 몸에서 거부 반응을 보이는데!”

잉태는 나중에 다른 기일을 잡아서 시도해도 될 일. 괜히 무리를 해서 고도가 큰일을 당할까 봐 청사는 다급히 자신의 기운을 방출했다. 잉태 자체를 무로 되돌리려는 청사의 기운이 몸 안에 뒤섞이며 역류했다. 후계 문제가 중요해서 그 난리를 쳤으면서 고작 한 번 고통스러워하는 걸로 그걸 전부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후계 문제는 고려 대상 자체가 아닐 만큼 고도를 먼저 챙기는 바람에 고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고도는 아픔으로 정신이 없으면서도 청사의 손목을 잡고 그를 말렸다.

“아니…… 아니, 하지 마.”

역류한 기운을 통째로 잡아 빼려던 청사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가만히 있어, 이러다 더 아파.”

“괜찮아……. 참아 볼, 읏, 테니까 내 손만 잡고 있어.”

“그러다 잘못되면 어쩌려고 고집인데!”

“나 때문에…… 네가 곤란해지는 건 더 싫어.”

고도는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면서 힘겹게 청사를 올려다보았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내뱉는 숨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이 고통을 한 번 못 참아서 앞으로 청사의 앞길을 방해하고 가로막는 존재가 되는 일은 사양이었다. 청사가 잉태라는 작업을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했던 만큼, 고도도 그 수단을 감내하고 싶었다.

“후계 문제가 중요하다며…… 그 중요한 걸 고작 아픈 모습 하나 보이는 걸로 포기하면, 어떡하느냐.”

고도가 점점이 이어 간 말을 듣고 청사가 눈을 부라렸다. 그는 당장 고도의 몸속에서 기운을 빼내려 했다. 아픈 상태에도 고도는 그런 청사의 손을 정확하게 맞잡고 밀쳐냈다.

“고도!”

지금 무엇이 우선순위인지를 명백하게 보여 주는 청사가 고마웠다. 하나 고마움은 고마움일 뿐, 옳고 그른 가부의 판단을 감성적으로 결정해서는 아니 되었다. 고도는 다시 기운을 소멸시키려는 청사를 붙잡고 말했다.

“내가 네 후계를 잇고 싶으니까 없애지 마.”

뜻하지 않은 대답에 청사가 먼저 당황했다. 억지로 잉태를 요구했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는 고도가 자신이 원하니 잉태를 계속하겠다는 말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청사는 고도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고도는 손가락 사이사이를 엮어 깍지를 끼워서는 청사가 멋대로 기운을 없애지 못하도록 막았다. 청사가 입을 벌리기도 전에 고도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차피 내가 낳아야 할 후계라면, 더 미룰 것 있느냐. 괜찮다. 이대로 손만 잡고 있어 줘.”

“이러다 네가 잘못되면 나는 나 자신을 용서 못할 거야.”

“괜찮다.”

“전혀 괜찮지 않잖아!”

“난 아이를 싫어하지 않으니까. 그것도 네 피가 섞인 아이라면 분명히 많이 아끼고 사랑할 테니까. 그 미래의 행복을 앗아 가지 마…….”

고도는 힘없이 뱉은 뒷말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후계 문제는 뒤로 미뤄도 돼.”

“…….”

“고도! 몸 상태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줘!”

고도는 힘들어서 대답하지 않았다. 청사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고도의 아랫배를 누르려 하면 그 손에 깍지를 껴서 막았고, 몸의 기운을 살피려 하면 청사의 몸을 끌어안고 하지 말라 속삭였다.

“……고도.”

저 때문에 고도가 괴로워진 모습을 보고 청사가 눈물을 보였다. 미안하다고 반복해서 사과하는 소리가 축 처진 고도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고도는 힘없이 청사의 손을 토닥이고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뱃속의 요동이 심해졌다. 뜨거운 기운이 용솟음치며 몸 안 곳곳을 돌아다녔기에 고도는 잠들 수도 없이 고통 속에서 몸을 비척거려야 했다. 식은땀에 옷이 젖고 이불까지 축축해졌다. 청사는 꿈틀거리는 고도의 움직임이 멎으면 깜짝 놀라서 그의 코밑에 손을 대거나 왼쪽 가슴에 귀를 댔다. 고도가 잠시 정신을 잃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시무룩한 눈으로 고도의 앞머리를 쓸어 주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 밑으로 인간은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얼굴이 보였다. 많이 지치고 피곤해 보여서 당장 숨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상한 얼굴이었다. 청사는 고도의 얼굴을 안타깝게 만지다가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덜커덩, 마룻바닥에 물건이 부딪는 소리가 닫힌 장지문 바깥쪽에서 들려왔다. 고도를 꼭 끌어안고 있던 청사가 고개를 들었다. 땀이 식은 고도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문밖을 투시했다.

마루에 쌀 톨, 조그마한 돌멩이, 지푸라기, 산에서 구해 온 듯한 한겨울 산수유 열매까지. 잡동사니가 한 움큼 모여 있었다. 마침 죽은 참새의 시체를 잡동사니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몽당빗자루 도깨비가 보였다. 몽당이는 청사의 엄포에 결코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내리 고도가 방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잠을 자거나 신음하며 청사를 끌어안고만 있었기에 제 딴에는 걱정이 되어 선물을 잔뜩 모아 오는 걸로 보였다.

어린 도깨비가 배려심을 보이고 있다. 도깨비만큼 저희들 장난과 농지거리에 온 정신을 빼앗긴 개구진 존재가 없거늘, 기이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은 성숙한 도깨비들만 보일 수 있건만.

고도의 피로 만들어져서 그런 건가. 인간의 염원이 담겨 귀신이 붙은 물건이 도깨비로 화하는 것과 달리, 고도의 피가 묻어 그 기운으로 영이 생긴 도깨비이니 태생부터가 남달라서 인간적인 면모를 많이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고도의 아기 때 모습을 보는 것처럼 커다란 눈망울에 찹쌀떡처럼 보드랍고 통통한 두 볼을 가진 모습이 귀여워 미워할 수 없는 도깨비이다만.

청사는 또 다른 선물을 구하러 가는 도깨비불에게서 투시를 그만두었다. 대신 고도를 가느다란 눈으로 응시했다. 그 시선은 몽당도깨비를 종족 특성으로 따질 때보다 더 큰 의문을 담고 있었다.

잠이 든 고도의 몸 주변으로 빛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도의 머리카락을 만질 때마다 손에 묻어나는 빛은 특별했다. 익히 보았던 바로 그 빛이었다. 고도를 데려가려고 잔뜩 벼르고 있던 아리아. 그것들이 이젠 침묵으로 입을 가린 채 고도의 몸 곳곳에서 새 나오고 있었다.

고도의 몸에서 빛이 흘러나온다. 마치 몸에서 생성이 되어 새 나오는 듯했다. 아리아의 존재와 그 역할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청사는 빛이 고도를 해할까 봐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안 그래도 배를 움켜쥐고 기절해 버린 고도를 이 이상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고도가 아파서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눈으로 볼 때 후계자 잉태를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것 같아 죄스러웠다. 고도에게 지극한 죄책감이 들어 그가 움켜쥔 손을 더 센 힘으로 맞잡아 주었다.

앞으로는 욕심이 앞서서 고도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으리라. 두 번 다시 이렇게 괴로울 일을 만들어 내지 않을 것이다. 고도와 연관된 모든 일을 신중하게 접근하리라. 고도의 빛나는 이마에 대고 달빛 아래 맹세하는 청사는 천천히 고도의 옆에 몸을 뉘었다. 고도가 더는 아프지 않길 바라며 그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청사의 포옹에도 곤히 자고 있던 고도가 눈을 뜬 건 달이 중천을 가로지르는 첫새벽이 되어서였다.

멍하니 시선을 든 고도가 피곤함과는 다른 느낌으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쳐 있기도 하고, 기운이 없기도 하지만 더 이상 복통을 괴롭게 토로하지 않았다. 고도는 기운 없이 눈을 깜빡였다.

“……배고파.”

졸려서 시야의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고도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고도의 혼잣말을 듣고 청사도 옅게 잠이 든 정신을 잡아 깨웠다. 청사는 눈을 뜬 고도가 더는 복통을 호소하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괜찮느냐.”

“으음. 그래, 아프지 않구나.”

“정말 놀랐어.”

“놀래켜서 미안하다. 그보다 배가 몹시 주린데.”

“—….”

“왜 그러느냐.”

청사는 대답 없이 고도를 바라봤다. 청사는 고도의 눈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겼다. 빛이 묻어 있어 반짝거리는 속눈썹 안쪽으로 동공도 구분할 수 없는 새까만 눈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익히 알고 있던 고도의 까만 눈동자가 어째서인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공허해 보이는 눈동자와 허기를 입에 담는 입술 모두가 특별해 보였다.

청사는 고도의 시선에 단숨에 사로잡힌 자신을 보면서 미처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교미는 수컷의 신체적 변화와 암컷의 향기 변화가 동반된다는 것이 뒤늦게 생각났다. 고도가 실제 짐승처럼 수컷을 매혹시키는 향을 내뿜는 것은 아니었지만, 배를 맞댄 수컷이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성적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일상으로 느껴지는 시선과 입술 등이 모두 색정적으로 와 닿는 것. 그 변화로 고도의 지친 얼굴마저 연약한 아름다움으로 보이게 된다는 것.

맙소사, 고도. 청사는 그 말을 잇지 못했다. 고도는 평범하게 눈을 뜬 것이었지만 그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청사의 손이 본능적으로 고도의 등 뒤를 파고들었다.

“아, 고도—.”

고도의 귀 밑에 코를 붙인 청사는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숨을 들이마셨다. 콧바람이 간지러운 고도가 어깨를 움츠렸지만 청사를 밀어내진 않았다. 고도는 온몸을 내리눌러 오는 청사의 압박에 짧게 숨을 끊어 쉬고는 조금씩 멍한 눈에 초점을 맞췄다. 청사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정신을 차린 고도가 힘없는 손으로 청사의 얼굴을 밀어냈다.

“갑자기 왜 이러느냐.”

복통이 사라졌기에 고도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침착하고 단정한 말투에 청사는 꿈틀, 용솟음치는 욕구와의 처절한 싸움을 시작했다.

“고도.”

“그래, 잠깐 비켜 보겠느냐.”

“고도, 고도.”

“왜 그러냐니까.”

참을 수 없는 허기에 고도가 몸을 움찔거렸다. 고도가 움직일 때마다 맞댄 살이 비벼지고 색욕이 자극되었다. 청사는 목울대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고도가 눈을 깜빡이는 모습 하나, 숨이 흐트러지는 소리, 빛이 묻어난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손끝으로 제 목뒤를 더듬는 감촉까지, 청사의 오감이 모두 열려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청사는 어떻게든 뜀박질이 심해지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 뜻과 달리 두 손은 다급히 고도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 고도? 응?”

청사가 땀이 식은 옷을 벗기는 손길을 고도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온천에서 몸을 맞대었을 때보다 더 다급해 보이는 그의 색탐에 고도는 말려야 하는 기세마저 밀리고 말았다.

“……한무, 왜 이러지. 난 밥이 먹고 싶을 뿐인데 눈 뜨자마자 뭐하는 짓이냐.”

“안 돼. 하늘의 정기가 여기 꽉 차 있는데 땅에서 난 음식을 먹으면 기운이 오염된다.”

“하지만 며칠을 굶었는데.”

“조금만, 조금만 더 참자, 응? 후계를 포기하지 말자고 한 건 너잖아.”

“맞는 말이지만, 한무, 잠깐만, 왜 이렇게 달려드느냐.”

“못 참겠어.”

“뭐…….”

“참을 수 없어, 고도, 미안해, 다리 좀 벌려 줘.”

“내 분명 배가 고프다 말했거늘, 지금 허기진 사람을 덮치려는 게냐.”

“미안한데 한 번만, 응?”

“무슨…… 앗.”

허기에 눈을 떴더니 이런 봉변이 있을 수가. 고도는 다급하게 자신의 다리를 활짝 벌리는 청사를 미처 말리지 못했다. 직접적인 자극을 주지도 않았는데 빳빳하게 고개를 든 청사의 성기를 보고 놀란 고도가 눈을 크게 뜨기도 전에 청사가 허리를 숙였다.

“……아!”

전희도 없이 파고든 굵고 울퉁불퉁한 성기에 고도가 헛숨을 삼켰다. 다급하게 터진 신음에도 청사는 고도의 몸속을 파고든 물건을 전진시켰다. 성기의 끄트머리만 들어왔을 때는 기분이 좋아서 부르르 몸을 떨던 청사는 기둥을 오물오물 삼키는 고도의 아랫입을 보며 더없이 흥분했다. 음경 바로 앞, 성기의 가장 두꺼운 부분을 지나고 기둥 전체를 몸에 품었다. 고도가 헐떡거리며 힘들어하자 흥분과 색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 아, 하, 한무, 잠깐, 기다려……!”

고도가 편안한 자세를 잡기도 전에 청사는 물건을 한꺼번에 뺐다가 모조리 고도의 몸속으로 밀어 넣었다. 팡, 거칠게 뱃속을 후려치는 삽입에 고도가 떨리는 손으로 청사의 어깨를 잡았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서 반질반질한 까만 조약돌 같은 눈이 흔들리는 것이 정말로 많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젠장, 고도. 청사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고도 본인은 지금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청사가 무엇에 흥분한지도 모르고 갑작스러운 삽입에 완전히 혼비백산했다. 허우적거리는 그 몸짓이 오히려 청사를 자극했다. 옆으로 뒤틀린 얇은 허리와 청사를 밀어내는 어깨 위의 손바닥, 방바닥으로 정신없이 흩뿌려진 검은 머리카락, 숨을 몰아쉬느라 들썩이는 가슴까지 모든 것이 청사에게는 색욕을 부추기는 원동력이었다.

“아앗……!”

고도의 허리를 양손으로 쥔 청사가 다시 허리를 바깥으로 빼내었다가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매끈하지 않은 성기가 빠져나갔다가 처박히는 힘에 몸 안이 쑤욱 딸려 나갔다 밀려들어 오는 기분이 된 고도가 청사의 어깨를 쥔 손에 손톱을 세웠다. 꺼슬한 비늘에 손가락이 눌렸다. 손끝이 비늘에 베였다. 날카롭게 벌어진 상처를 타고 피가 나왔지만 고도는 흥분 상태의 청사를 말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 한무, 그만, 그만해라! 뭐하는 거야!”

“하아, 미안해, 미안한데 고도, 한 번만.”

“갑자기 왜…… 아앗, 그, 그만 넣…….”

“한 번만, 제발.”

사정하는 청사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한순간에 폭발할 듯 기립한 성기를 밀어 넣은 청사가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고 고도의 허리를 양손으로 꽉 쥐었다. 고도는 청사의 몸에 엉켜서 억지로 다리가 벌려졌다. 그 사이로 청사가 육중한 기둥을 강렬하게 쳐올리자 숨을 다급히 삼켰다. 뻑뻑하게 몰려드는 아픔과 함께 예고도 없이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드는 쾌락이 뒤섞이면서 고도는 맨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아, 아파, 한무, 천천히, 아, 읏…!”

청사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고도의 볼에 이를 살짝 박아 넣었다. 찌푸려진 눈가와 눈꼬리 끝에 매달린 눈물이 애처로웠지만 청사는 멈추지 못했다. 붉게 변한 고도의 새하얀 살결이 잘 익은 복숭아보다 탐스러워 보여서 허리를 앞뒤로 흔드는 움직임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아아, 아, 아.”

고도는 머릿속까지 뒤흔드는 강렬한 삽입에 입을 벌리고 헐떡였다. 입술 밑으로 흘러내린 침을 청사가 다급하게 핥으면서 “한 번만, 미안, 미안, 고도.”하며 끊임없이 밀어붙였다. 청사는 뒤로 물러나려는 고도의 허리와 엉덩이를 양손으로 단단하게 고정했다. 거대한 맹수가 사냥감을 짓누르듯이 고도를 다리에 끼고 허리를 흔들었다. 고도는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청사의 거친 움직임에 눈앞이 새하얘졌다. 벌어진 입을 통해서 젖은 신음만 쏟아냈다. 아프다고 청사를 말려도 보고,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밀어도 보았지만, 단단하게 맞물려 고정된 하체는 꿈쩍도 않았다. 이 때문에 청사가 움직이는 힘대로 고도는 박자를 맞춰 몸을 들썩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읏, 아, 으……!”

고도는 쾌락이 극도로 느껴지는 지점에 청사의 성기가 끼워 맞춰지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성감대를 정확하게 찌르고 올라온 성기가 그보다 더 깊은 곳으로 전진하는 기분이었다. 이미 뱃속을 가득 채운 청사의 성기는 고도의 몸 안에 맞물려 완벽하게 고정되었다.

“그, 그만, 그……! 아, 아앗……!”

힘겹게 헐떡이는 소리가 온 방안을 메웠다. 고도는 파르르 떨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찌거덕, 등살이 바닥에 쩍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마찰에 등이 홧홧한 뜨거움만을 느꼈다. 눈앞이 새하얗게 질려서 머릿속은 온통 청사가 주는 쾌락이 독식하고 있었다. 청사가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었다가 출렁이며 바닥으로 흩어졌다. 시야가 눈물 때문인지, 머리카락 때문인지 모를 것들로 흐려지고 엉망이 되어서 고도도 더는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아……! 너무 깊어……, 아, 아!!”

청사가 가슴을 완전히 맞댄 채 들썩이는 허릿짓에 고도는 호흡할 시점도 놓치고 숨을 내뱉었다. 이미 청사와 자신의 아랫배에 눌린 고도의 성기가 찔끔거리며 토정을 하고 있었다. 엉덩이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 거대하고 울퉁불퉁한 뜨거운 기둥 덕분에 고도는 쾌락에 완전히 함락되었다.

“하아, 하, 고도, 하읏, 젠장…….”

미칠 것 같은 기분으로 청사는 고도의 몸을 뒤흔들었다. 청사의 이성을 날려 버리는 고도의 분위기를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박지 않으면 죄가 될 것 같은 이 야한 몸이 수컷을 유혹하고 있지 않나. 박아 달라고, 음탕한 짓을 하자고 눈웃음을 치는데 어떻게 이성으로 버틴단 말인가. 힘겨워하며 우는 고도의 모습이 지나치게 적나라하고 야해서 머릿속이 어떻게 될 것 같았다. 이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핥아서 삼켜 버리고 싶었다.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을 매달고 자신을 부르는 고도를 보고 있노라니 딱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고도의 허리가 불편할 정도로 꺾인 상태로 청사가 삽입의 속도를 올렸다. 달큼한 신음 대신 강렬하고 급한 비명소리가 청사의 귀를 울렸다.

“그, 그만, 한무, 그만……!!”

이미 청사의 움직임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은 고도가 절박하게 매달렸다. 청사의 등 뒤를 움켜쥔 고도의 손이 미끄러졌다. 둔중한 삽입과 쾌락이 쏟아지자 고도는 얇은 목선이 드러날 정도로 고개를 꺾었다. 몸이 떨리는 절정에 휩쓸리고 말았다. 아랫배에 눌려서 선단 끝으로 물을 흘리던 고도의 성기는 꺼떡거리며 새하얀 정액을 토했다. 짧고 강렬한 쾌감 속에서 고도가 사정을 하는 동시에 청사의 물건을 삼킨 입구가 움칠거리며 조여들었다.

청사도 고도의 몸에 성기를 박고 액체를 모조리 쏟아 뱉고 싶었지만 절정에 달해서도 사정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후계를 양성할 씨앗은 절정의 한계까지 버티다가 터져 나오는 방식을 택했다. 고도의 내벽은 물론 엉덩이와 허벅지, 배를 모조리 흥건하게 적실만큼 많은 양의 액체를 쏟는 것이 그들만의 교미 방식이었다. 인간보다 사정에 달하는 시간이 길었고 또한 집요했으며 거칠고 무자비하다는 것을 고도는 여전히 허리를 앞뒤로 흔드는 청사를 통해 똑똑히 배웠다.

“고도, 하아, 하, 응, 그렇게, 옳지.”

끈적거리는 정액으로 음모가 모두 젖어 아랫배에서 물이 흘러내리는데도 청사는 고도가 탈력감에 지쳐 누울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바닥으로 털썩 누워 버리는 고도의 허리를 다시 붙잡아 들어 올렸다. 힘없이 딸려 올라오는 고도를 위해서 청사는 자리에 드러눕고 고도를 제 몸 위에 앉혔다. 성기는 여전히 철썩이며 젖은 엉덩이 사이를 쳐올렸다. 자세만 바뀌었을 뿐, 삽입 상태가 지속되자 고도는 힘이 풀린 허리를 다스리지 못하고 몸을 흔들었다. 청사의 가슴 위에 양손을 얹어 몸을 지탱하려 애를 썼다. 손바닥 아래로 감기는 먹청 색의 비늘이 파르르 떨리면서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 느껴졌다.

“고도, 흔들어 줘, 어서, 응, 응?”

보채는 청사의 말에 고도는 본능적으로 바닥에 두 무릎을 댔다. 양팔로 상체를 세우고 허리를 위아래로 움직여 보았다. 누워서 삽입할 때보다 성기가 더욱 몸속 깊숙하게 박혀서 고도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벌어진 구멍이 청사의 양물을 품고 오물거리며 놔주질 않았지만 그는 제 의지가 아니었다. 고도는 이미 남은 체력이 없어서 숨을 헐떡이는 게 고작이었으니 말이다.

자세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어진 고도는 청사의 가슴 위로 엎드려 얼굴을 기댔다. 쿵쿵 뛰는 왼쪽 가슴팍에 볼을 기대고 힘겨운 한숨을 뱉었다. 청사는 힘들어서 지친 연인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줬는데, 그것은 체력적으로 따라오지 못하는 고도를 향한 연민보다 다리를 벌린 채 자신의 양물을 삼키고 기대어 누운 모습이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애정 표현에 가까웠다. 청사는 고도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자세를 변경하는 일 없이 허리를 위로 쳐올렸다.

“하응, 하, 으으, 으……!”

벌어진 엉덩이 사이를 쑤시는 움직임에 고도가 또다시 흐느꼈다. 청사의 팔에 안겨서 상체가 고정된 상태였기에 엉덩이만 들썩이는 음탕한 모습이었다.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을 끊임없이 출입하는 양물은 고도의 몸 안에 끊임없이 자신의 길을 새겼다.

고도가 어떤 방향에서든 청사의 양물을 받아들이는 데에 익숙해지고, 쾌락에 허리를 떨며 절정에 달하도록 길을 들였다. 고도의 밑이 빨갛게 부어서 입구에 상처가 날 만큼 오랜 시간의 교합 끝에 마침내 청사가 고도의 허리를 붙잡아 온몸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고도의 몸속에 박힌 성기 끝이 열리며 내용물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내벽을 가득 채운 뜨겁고 진한 액체가 넘쳐흘러 구멍 밖으로 새 나왔다. 벌어진 엉덩이와 허벅지까지 완전히 적신 액체는 연결된 청사의 몸까지 적셨다. 분탕질에 지친 고도가 청사의 가슴 위에서 기절할 듯 눈을 감았다.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고도의 상태를 확인한 청사는 심각한 갈등에 빠졌다.

교미 중 암컷의 향기에 끌리는 본능과 고도의 몸을 살피고 돌봐야 하는 이성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미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할 만큼 지쳐 버린 고도의 몸을 씻기고 편히 뉘여 재우는 것이 최선임을 알지만, 난생 처음으로 교미를 해본 용의 첫 경험에 대한 욕심은 그런 냉철한 이성으로 다스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흥분을 조절할 수 없었다.

고도의 몸 안 감도를 기억하고 다시금 안달을 내는 검붉은 성기가 꺼떡거리며 기립했다. 청사는 뻐끔거리는 고도의 입구에서 자신이 뿌려 놓은 하얀 액체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손가락을 더듬어 엉덩이 사이를 만지면 부어오른 입구가 여전히 청사의 성기를 오물거리며 삼키고 있었고, 잘 맞물리지 않은 부위에선 내벽에서 흘러넘치는 액체가 몸 밖으로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너무 야해서 참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다시 고도의 허리를 잡고 고도가 허우적거리는 그 쾌감에 푹 빠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 이상 심하게 고도를 괴롭혔다간 고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다.

결국 청사는 삽입되어 있는 성기를 빼내고 고도를 편안하게 눕혀 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릿속에서 고도를 돌보라 말을 해도 고도의 몸 안의 감촉을 떠올리는 성기는 찬 공기 속에서도 꿈틀거리며 고도를 찾고 있었으니, 짤막한 청사의 이성이 끊어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청사는 누워 있는 고도에게 다가갔다. 달빛을 가로막는 커다란 그림자를 느낀 고도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고도는 청사의 물건이 고도의 입가에 닿은 것을 보고 움찔하며 어깨를 떨었다.

“배고프다고 했지, 고도, 응?”

입술에 닿은 축축한 양물을 향해서 고도가 차츰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입술 사이로 가르고 들어오는 선단을 피해 고개를 돌리고 청사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가만…… 안 둘 줄 알아라.”

갈라진 목소리마저 야하게 들린다면 이미 중증인 걸까. 청사는 안달이 나서 허리를 들썩였다. 고도가 말할 때 흘러나오는 숨결이 성기에 닿았을 때 더는 참지 못하고 그것을 고도의 입에 물려주었다.

“마셔도 돼. 괜찮으니까.”

선홍빛으로 빛나는 고도의 입술과 그 안의 혀가 정액으로 새하얗고 끈적이게 젖는 모습을 상상한 청사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버렸다. 쏟아진 정액을 모두 삼키지 못한 고도가 턱 밑으로 그 끈적이는 액체를 흘리고 가슴과 얼굴 부근으로 정액이 튀면 청사는 더는 아무것도 생각 못 하고 다시 고도의 입이나 엉덩이 사이로 성기를 밀어 넣느라 정신이 없어질 것만 같았다.

상상은 청사의 머릿속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도망가려는 고도를 억지로 붙잡아 그의 따뜻한 입 안에 양물을 밀어 넣었다. 청사는 눈앞이 아득해질 만큼 극락을 오가는 기분을 처음 느꼈다. 너무 커서 다 삼키지 못하는 양물을 고도가 한참이나 망설인 끝에 핥아 주는 것을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돌기가 난 기둥을 손으로 주무르고 귀두와 선단을 어설프게 핥아 주었지만 그 작은 혀 놀림과 손의 움직임만으로 청사는 완전히 짐승의 영역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박아도 돼? 응? 박게 해줘, 고도.”

청사는 대답도 듣기 전에 고도가 핥아 줬던 물건을 다시 그의 엉덩이 사이로 찔러 넣었다. 고도가 힘들다고 그만하라 애원하는 소리를 흘려들으면서 고도의 볼과 이마에 쪽쪽, 입을 맞추며 혀를 내밀어 핥아 주었다. 고도는 교미라는 괴팍한 성행위를 따라가지 못해 힘들어했다. 그러면서도 깊은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음란함에 머리가 멍해지면 스스로 청사의 허리를 감고 목을 끌어안으면서 매달렸다.

더 해달라고 조르는 것은 더 이상 청사가 아닌 고도가 되었다. 귓가에서 더 해달라고 보채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은데 확신은 할 수 없었다. 청사는 이미 고도의 몸 안팎을 전부 자신의 흔적과 냄새, 느낌과 온도로 가득 채우면서 피부 안쪽과 바깥에 자신의 존재를 새겨 넣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교미 내내 고도와 청사는 오로지 서로를 탐했다. 얼굴만 봐도 서로 고개를 틀어 입을 맞췄다. 고도가 지쳐서 잠이 들다가도 몸속을 왕복하는 감각에 눈을 뜨면 둘은 또다시 짐승처럼 헐떡이며 허리를 흔들었다. 고도가 먼저 청사의 가슴 돌기를 빨았고, 청사는 고도의 성기를 입에 물고 핥으면서 엉덩이를 손으로 주무르기도 했다.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시간에 서로에게 취해 있었다. 상대의 몸을 탐한 시일이 무려 나흘 넘게 이어질 정도로 서로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것도 미호가 남세스러운 얼굴로 알려 주고 도망가 버리지 않았다면 날짜의 변화도 몰랐으리라.

청사는 이불로 고도를 둘둘 감싸 안고 꼭 끌어안았다. 나흘 밤낮으로 몸을 섞은 고도가 완전히 정신을 잃고 죽은 듯이 잠만 자는 모습을 몹시도 사랑스럽게 바라보면서, 청사 역시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

[남성의 몸으로 잉태라니 네가 정녕 해괴망측함의 도를 넘고 있구나. 아버지께서 이 일을 아시면 꼬리를 휘둘러 네놈을 묵살 내버리려 함이 눈에 빤하여 골이 아플 정도야. 네 고집이 온 하늘에 정평이 나 버렸어. 네가 하고자 함은 천지가 무너지더라도 해야 하고, 하기 싫은 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니, 천룡의 후계 문제를 일선에 내밀고 네가 원하는 이에게만 씨를 뿌리겠다고 고집을 피우면 상제님이라도 어쩔 수 없겠지. 일족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모든 것을 알려 주마. 남성의 몸으로 잉태가 가능한 방법은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 중 네가 필요한 것을 취하여라.]

청사는 얼마 전, 봉황을 통해서 누이를 통해 받은 전서를 다시 꺼내 보았다. 고도와 교미를 하고 싶으나 청사는 교미 경험도 없고, 남성체를 잉태시키는 방법도 몰라서 누이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누이는 청사의 결정에 기함하여 구구절절 그를 비판하고 그릇된 일로 말미암아 하늘에 큰 소란이 일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가족이기에 누구보다 막냇동생의 성향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청사 성격에 하지 말라고 말린다고 안할 용이 아니지 않나. 하는 수 없이 청사가 원하는 정보를 낱낱이 기술해 주었다.

누이의 길고 자세한 설명 덕에 청사는 처음 해보는 일에서도 크게 당황하거나 동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서진은 마치 어미 된 심정으로 용의 교미 행태와 습성, 특수성과 주의점을 알려 주었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남자의 몸에 잉태가 가능한 기일과 장소, 준비해야 할 것을 세밀하게 일러 주었기에 청사는 고도의 변화를 보면서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잉태한 이는 성별을 불문하고 너에게 모든 반응이 맞춰질 것이다. 신체가 교합되는 만족감과 즐거움뿐만 아니라 정서상의 충만감과 기쁨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 것이기에 만약 너와 반려자의 궁합이 좋다고 판단되면 혼사가 가능한 지름길이 열릴 수도 있다. 반대로 잉태한 몸을 징그럽게 여겨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씨를 뿌린 이를 저주를 할 가능성도 있다. 이 확률은 반반이라, 만약 네가 영원을 맹세한 이가 후자의 반응을 보인다면 차라리 네 손으로 잉태한 기운을 끄집어 없애 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계에서 인간만큼 감성에 충실한 존재가 없다. 사랑과 미움에 가장 극단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네가 사랑하는 도사도 아무리 뛰어난 지성과 강인한 마음을 지녔다 할 손, 인간이라는 태고의 특성 아래에 자유로울 수는 없는 법. 혹 후자의 반응을 보인다면 지체 말고 내게 연락을 취하거라. 잉태한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기운을 없애는 것을 도와주겠다.]

남성의 육신으로 잉태하는 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누이의 뜻을 청사는 잘 알고 있었다. 여인의 몸으로도 종족이 다른 이의 기운을 품기 버겁거늘, 애초에 잉태의 개념과 느낌을 알지 못하는 남성이 그 충격적인 변화를 감당하기란 열에 아홉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청사의 누이인 서진이 혹여나 사랑하는 이의 변심 변모에 충격을 받을지 모를 막냇동생을 위해서 두 팔 걷고 도와주겠으니 문제가 생기면 지체 없이 말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누이의 관심은 청사에게 몹시 고마운 일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혼자 그 문제를 품에 안고 앓으며 괴로워하기보다 누이를 불러 함께 상황을 타파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럴 일은 없었다. 오히려 누이가 ‘가능성이 낮으니 언급만 하고 넘어간다.’고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 일로 인해 청사는 행복해서 어쩔 줄을 모를 지경이었다.

[그 도사가 남성의 몸으로 잉태하고 너를 몹시 좋아해 줄지, 나는 장담할 수 없겠구나.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기면 기쁘게 여기고 넘어가거라. 뭐,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으니 문제 생기면 연락하고.]

남성의 몸으로 잉태가 긍정적일 리 없다고 말한 누이의 예견이 완벽하게 빗나갔다. 하긴, 이럴 줄은 청사도 모르지 않았는가. 이렇게까지 기분 좋은 일이 펼쳐질 줄은 솔직히 조금도 생각 못 했으니까.

“한무야.”

청사는 수십 번도 더 읽어 보던 서신을 품속에 냉큼 갈무리했다. 청사가 무언가를 숨기는 행동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고도였다. 교미 기간 동안 복통을 호소하며 힘들어하던 고도는 어느 순간부터 운신이 편해져 평상시처럼 집안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불편해 보이는 기색이 전혀 없는 고도가 청사에게 쪼르르 다가왔다. 방문만 열고 주변을 둘러보던 고도가 정자에 앉아 있는 청사를 발견하고 지체 없이 다가와 안기는 바람에 청사는 행복한 미소로 고도를 마주 안아 주었다.

“몸이 찬데 왜 나와 있느냐. 들어가자.”

자신의 머리를 다정하게 넘겨 주는 고도 때문에 청사는 심장박동수가 빨라지는 것을 주체하지 못했다.

“금방 있다가 들어가려고 했는데, 너야말로 나와 있다가 몸이 약해지면 어쩌려 그러느냐.”

청사의 배려에 고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불사의 몸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텐데.”

“그런 말 하지 말고! 죽지 않는다 해서 아프지도 말란 법은 없어!”

“으응? 아, 그래, 네가 원한다면 방에 있으마.”

“착하구나, 내 어여쁜 고도.”

“어쩐지 과보호하는 기분인데.”

“넌 당연히 보호받아야 하는 상태니까.”

“내가 약해진 거 같아서 기분이 묘해.”

“이럴 때 양껏 수발 들어주는 나를 부려먹어 봐라.”

“그래, 내 돌쇠가 되려면 마님하고 함께 있어야지. 너도 얼른 들어가자.”

“명령이야?”

“어허, 당연하지. 어디 돌쇠가 마님 말을 거역할까.”

농도 던지는 게 이제 좀 여유를 되찾은 것 같다. 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말하는 모습은 콩깍지가 씐 청사 눈엔 애교가 흘러넘치는 귀여운 얼굴로 보였다. 세상 그 어떤 어여쁜 요물도 고도를 능가하진 못하리라. 어쩜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럽고 귀여울까. 어딜 봐도 사내이다. 요즘 활동량이 줄어서 근육도 줄었다지만 단단하고 평평한 몸과 제 기능을 충실히 임하는 건강한 아랫도리까지 달린 인데 그 어떤 어린아이보다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나흘 넘게 교미를 이어 갔던 행위가 끝나자마자 고도는 이틀이나 기절해 있었다. 고도의 몸에 문제가 생겼을까 봐 청사는 잠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고도의 이마에 찬물을 적신 수건을 얹어 주면서 스스로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용의 씨앗을 인간이 품는다는 게 이리도 고통스럽고 인내가 필요한 일인 줄 알았으면 백번은 더 고민해 볼 것을, 스스로를 끊임없이 책망했다. 고도가 교미 행위를 경멸하면 어떡할지, 불안감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혹여나 고도가 자신을 미워하고 밀쳐내면서 끔찍하게 여길까 봐 애간장이 끓었다. 청사는 고도의 새끼손가락만 꼬옥 쥐고 눈물이 핑 도는 눈가를 여러 번 닦아 냈다.

고도가 쓰러진 동안 오만 가지 부정적인 생각을 다 했던 청사는 고도가 눈을 뜬 바로 그때에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끊임없이 고도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울면서 사과하는 청사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보던 고도는 청사가 우려하던 그 어떤 행동이나 표정, 말씨도 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정리가 안 되는 청사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비단 끈으로 소중하게 묶어 주면서 “괜찮다” 말할 뿐이었다.

괜찮다는 말이 빈말이면 어찌하나. 고도가 자신에게 정이 떨어져 혹여나 떠나지 않을는지. 청사는 여전히 노심초사하며 고도의 동태를 한순간도 빠짐없이 살폈다. 다음 날이 되어도 그다음 날이 되어도 고도는 복통을 호소하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몸을 움직이면서 청사를 책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청사의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고도는 청사를 아껴 주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따뜻한 감정으로 바라봐 주었다. 청사가 긴 머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니 여인네처럼 머리를 곱게 묶어 올려서 미호에게 받은 비녀로 고정해 주기도 했다. 미호와 함께 산으로 나가 멧돼지라도 한 마리 잡는 날이 있으면 제일 맛있는 머리 고기부터 떼어다가 청사에게 먹여 주기도 했다. 밤이 되면 청사를 꼭 끌어안고 잤다. 가끔은 먼저 청사의 도포 속으로 손을 넣고 “오늘 밤 안아 줄 수 있느냐.”고 먼저 묻기도 했다. 고도 쪽에서 잠자리를 청하는 건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청사는 온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서 교미할 때와는 다른 심정으로 고도에게 몰두했었다. 고도가 행위를 통해 청사에게 먼저 입을 맞춰 주고 그의 목을 끌어안아 주었다. 청사는 고도가 자신을 밀어낼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씻은 듯이 지울 수 있었다.

고도가 저를 사랑하고 있다. 이건 착각이 아니었다. 다정하게 바라보는 시선만 봐도 청사는 고도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정자에 나와 있는 청사에게 먼저 다가와 긴 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쳐다봐 주는 얼굴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표하는 애정과 존경이 보이지 않은가. 이건 하늘이 보우하사 땅이 맺어 준 인연임이 틀림없다.

교미 후에 고도가 경멸하는 반응을 보일까 봐 마음속으로 단단하게 준비했던 청사였다. 경멸이 아닌 사랑과 호의가 이전보다 더 커졌으면 좋겠다는 것은 욕심에 가까웠기에 엄두도 내지 않았다. 헛된 기대를 가졌다가 상처를 입을 것을 염려했다. 저를 싫어하게 될 고도의 마음을 돌릴 방법만 끊임없이 탐구하던 청사는 그러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고도의 반응에 결국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청사는 고도를 향해 부풀어 오르는 끝없는 마음을 속으로 갈무리하면서 고도를 품에 끌어안았다. 제 머리를 만져 주는 고도의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고도를 제 두 다리 위에 앉히면서 그의 볼과 입술에 쪽, 쪽 뽀뽀를 해주었다. 하루 종일 입을 맞추고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청사는 고도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네 의수가 보기 흉하게 망가졌기에 내가 하나 만들고 있었어. 볼래?”

“그래, 보자.”

청사가 반대편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고도의 오른 손바닥에 올려 주었다. 새까만 의수였다. 숲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편백나무나 참나무 따위로 만들었을 것을 예상하고 있던 고도는 의외의 색상과 재질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하고 놀란 소리를 내뱉는 고도가 사랑스럽고, 또 그를 놀라게 했다는 뿌듯함에 청사는 다시 한 번 젖은 입술을 쪽쪽 빨면서 속삭였다.

“내 비늘로 만들었어.”

그 말마따나 비늘을 가공해서 만든 의수는 표면이 검었지만 햇빛에 비쳐 보자 오색빛깔로 찬란하게 빛났다. 그 어떤 고급 자개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신비로운 빛의 향연은 낮과 밤을 고스란히 녹여 만든 하늘을 닮아 있었다. 낮엔 해가 뜨고 밤엔 빛과 달의 은은한 포말이 이는 어두운 하늘. 무겁지도 않고 색감과 온도가 청사의 몸을 닮아 있어서 익숙하게 느껴지는 의수였다.

서로 떨어져 있어도 의수를 왼손에 달고 있으면 언제나 청사와 손을 잡고 걷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고도는 청사의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놓았다. 연신 입술을 맞대고 있던 청사가 그 새침한 반응에 실바람처럼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만드느라 고생했다. 아주 예쁘구나. 내 몸에서 한시도 떨어트리지 않으마.”

“아으, 고도야, 너 갈수록 어여뻐서 미치겠어. 왜 갈수록 예뻐지지.”

“사내에겐 그런 표현을 쓰는 게 아닌데.”

“내 눈엔 삼라만상을 무너뜨리는 그 어떤 절세미인보다 네가 더 예쁘다. 그네들은 볼 게 외모뿐이지만, 너는 하는 짓도 이리 예뻐서 나를 미치게 만들잖아.”

“예쁜 짓은 나보다 네가 더 심하지.”

“내가 뭘.”

“픽하면 이리 입술을 비비면서 뽀뽀를 조르는데 당연히 나보다 네가 더 예뻐 보이지 않겠어?”

“그…… 으음. 고도야. 내가 예쁘냐.”

“응.”

“고도 마음에 드는 용 맞는 거지.”

“물론이지.”

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청사는 샐쭉이 웃으며 고도의 목과 어깨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행복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몰라서 청사는 시큰시큰 웃기만 했다. 이 행복이 언제까지고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고도를 고통스럽게 한 것이니까, 고도가 희생해서 얻게 될 행복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청사는 등을 쓸어 만지던 손을 앞으로 돌려 고도의 납작한 배를 어루만졌다. 외형상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러나 고도에게 복통을 안겨 주었던 기운들이 단전에 암석처럼 모여 단단하고도 둥근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여의주만큼이나 높은 밀도로 압축된 하늘의 힘이었다. 고도가 죽을 것 같다며 처음으로 가감 없는 복통을 호소했던 부분에 고도의 주먹보다 작은 정기가 밀도 높게 뭉쳐져 있었다.

날 것의 기운은 최근 며칠 동안 매우 안정적인 기색을 띠고 있었다. 몸 안에서 하늘과 땅의 정반대 기운이 충돌하거나 뒤섞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의 정기가 오염되면 안 된다고 고도에게 땅에서 난 그 어떤 것도 섭취를 막았었지만 이제는 평소 식단 그대로 먹어도 무리가 없었다.

청사는 안정적으로 뭉쳐진 기운에서 손을 떼고 고도를 바라봤다. 고도의 시선에 사르르, 눈 녹듯이 기분이 좋아진 청사가 입을 뗐다.

“오늘 밤에 그 온천 못에 다시 가자. 잉태한 ‘알’을 낳으러.”

그 말에 고도가 자신의 복부를 힐끔 보고 다시 청사를 응시했다. 알을 낳는다는 개념은 몇 번 들어도 생소했다. 배도 불룩하지 않고 몸속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 꿈틀거리는 느낌도 없어서 솔직히 이게 잉태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직 한 달이 안 됐어.”

“안 돼도 괜찮을 거 같아. 굉장히 안정적이라 꺼내도 문제없어 보여.”

“너무 이르게 빼냈다가 알이 잘못되면 어떡하지.”

“그럴 걱정이 없으니 알을 낳자고 한 거야. 이대로 네가 몸속에 품고 있어도 달라질 것이 없을 것 같다. 요 며칠 동안 알의 크기를 섬세하게 재고 있었는데 네 주먹 크기에서 자라질 않아. 이 이상의 성장은 못에 맡기는 게 맞는 것 같아.”

아는 게 없으니 반박할 말이 없다. 고도는 용의 생태를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가 없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청사는 고도가 자신을 믿어 주는 태도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의심하지도 않고 불안해하지도 않는 고도의 태도를 보니 이젠 정말로 그의 반려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소한 것으로 싸우고 웃고 울 수도 있지만 그 감정의 기저엔 서로를 믿고 아끼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 청사는 고도의 손을 꼭 잡고 정자 밑으로 발을 내렸다.

“어이, 팔미호!”

청사가 집 안에서 미호를 찾았다. 목소리를 듣고 문을 쾅 열어 “왜!”하고 대꾸해야 할 그녀의 반응이 없었다. 방바닥에 서전검을 굴리고 그 검에 얼굴을 비쳐 보면서 희희낙락대는 도깨비 몽당이만이 조막만 한 손을 흔들며 청사의 부름에 응했다. 어디 간 건지 의아해하는 청사에게 고도가 대신 답해 줬다.

“산에서 여우들이 불러 잠깐 나갔다.”

“여우들이 불렀다니?”

“산을 수호하는 백여우 집단이 이 산 깊은 곳에 살더구나.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요즘 시도 때도 없이 이 집을 여우들이 찾아와. 지진아가 짜증내면서 도망 다녔는데 이번에는 피하지 못했더군.”

그녀에게 몸보신 할 꿩이라도 한 마리 잡아 오라고 말할 셈이었는데 하필 운수도 없지. 청사는 고도에게서 ‘알’을 낳게 하면 몸이 허할까 봐 퍽 걱정을 보였다.

“그럼 내가 꿩 한 마리 잡아다가 푹 고아 놓아야겠구나.”

“으음? 꿩이 먹고 싶으냐?”

“너 보신시켜 주려 그러지. 알 낳고 나면 잘 먹어야 해.”

몸속에서 덩어리가 빠져나오는 것이니 용의 잉태나 인간의 출산이나 매한가지려나. 재밌어서 히죽 웃어 보이는 고도였다. 그는 청사의 말투를 지적하는 짓궂은 행동을 잊지 않았다.

“나 때문에 지진아를 부려 먹으려 하다니. 이게 어디서 고얀 걸 배웠을꼬.”

“걔가 어디 가서 이런 취급을 받겠어, 우리가 실컷 부려 먹어야지.”

“흥미진진한 노비 대우구나. 고향에서는 손발 다 씻겨 주는 무수리를 열댓 명은 이끌고 행차할 여자를 이런 식으로 부리는 존재는 우리가 유일할 테지.”

“걔 성격에 집에서 얌전히 수발 받고 그러겠냐. 온갖 패악을 빽 부리겠지. 이 토끼는 털이 거칠어서 먹기 싫어! 하고.”

“옷도 마음에 안 든다고 던지겠지.”

“하하하, 맞아. 집에서는 예쁨받는 아가씨니까 우리까지 그런 취급해 주면 버릇 잘못 들잖아.”

“뻔뻔한 당위성이구나.”

말은 그리 해도 미호를 부려 먹는 일에 오히려 앞장설 고도였기에 “그럼 나중에 꿩 사냥하라고 내쫓아야겠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그 모습이 귀여웠던 청사는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만져 주었다.

“몽당이, 나와 고도는 잠깐 외출하겠다, 집 잘 지키고 있어라.”

청사의 말에 몽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사는 몽당에게 집을 맡기고 고도와 교미를 시작했던 온천으로 향했다. 처음 왔을 때보다 익숙한 길은 도달하는 시간을 반으로 단축시켜 주었다. 해가 지기 전에 무성한 편백나무 숲과 대롱나무 군집을 지나 설원 중 초목이 자라는 신비로운 온천에 닿았다. 온천은 여전히 뿌연 수증기에 갇혀 있어서 이곳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연이라도 찾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고도, 여기 앉아.”

청사는 고도가 온천물에 발만 담글 수 있는 평평한 바위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고도가 두루마기 자락이 젖지 않도록 한 손으로 잘 그러쥐고 앉아서는 청사를 얌전히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청사로부터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알게 된 즐거움에 푹 빠진 고도는 그가 주는 아픔이나 고통에도 무뎌지고 있었다. 청사가 저를 괴롭히려고 고의로 악한 짓을 했더라면 실망하여 그를 밀어냈겠지만, 사랑이 지나쳐서 아픔을 안겨 주었고 그것이 제 뜻에 반하는 결과가 되어 두 눈에 눈물을 매달거나 훌쩍이는 모습을 보노라면 청사가 밉고 괘씸하기보다는 짠한 마음이 더 커졌다.

잘해 보려고 애쓰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서 성토하는 청사가 예뻤다. 무슨 일이든 고도를 우선순위에 두고 행동하며 생각하는 것이 어여뻐서 고도는 청사의 얼굴만 봐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요즘엔 눈을 떼지 못하고 쳐다보면 그 시선에 얼굴이 홧홧해져서는 눈가를 발그레 붉히는 모습이 그리 예쁠 수가 없다.

고도는 자신의 빤한 시선에도 가슴을 크게 부풀리고 좋아하는 청사에게 자연스럽게 입을 맞췄다. 청사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 고도의 허리를 감쌌다.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가 둘의 몸속으로 번졌다.

“고도야, 아기집이 있는 여인이라면 알이 다 클 때까지 알을 품을 수 있지만, 네 몸에서는 크게 자라기 어려울 것 같아. 그러니 이 성스러운 못에 담가 두고 알이 부화할 때까지 내가 돌보도록 하마.”

참방, 청사가 옷을 입은 채 온천물에 들어갔다. 고도의 허리를 잡고 있는 손이 검게 변했다. 비늘이 파드득 일어나는 손은 인간의 형상일 때보다 두 배 이상 커졌다. 광대와 볼을 지나 턱과 목으로 이어지는 검은 비늘이 피부 밖으로 돌출되어 단단한 갑옷 같은 형상을 만들어 냈다. 푸른 도포자락 밑으로 꼬리가 드러나기도 했다. 꼬리는 못을 한 바퀴 돌아오고 나서도 자리가 좁아 땅 위까지 삐죽 튀어나왔다. 꽤 크다고 여겼던 못조차 청사의 꼬리 하나 담그지 못한다는 사실에 새삼 청사가 상당히 큰 용이라는 것을 상기하게 된 고도였다. 고도가 단정하게 묶어 주었지만 몇 가닥 흘러내린 긴 머리는 수면 위를 부랑했다. 청사는 이 신령스러운 연못의 기운을 닮은 목소리로 고도에게 양해를 구했다.

[참기 힘들 정도로 아프면 말하여라. 바로 그만둘게.]

고도의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이 조심스럽게 고도의 아랫배로 내려왔다. 옷고름을 풀고 옷자락을 벌린 후엔, 날카로운 검은 손톱이 나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고도는 칼날처럼 예리한 손톱이 조금씩 배꼽을 파고드는 느낌을 받았다. 이물질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눈가를 찌푸렸다. 뱃속에서 기운을 끄집어내는 것이 이리도 무식하게 배를 가르는 행위를 동반하는 것이었다니. 고도는 여인의 몸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자처한 결과겠거니 여기며 그 아픔과 통증을 최대한 견뎠다.

청사의 손톱만 찔러 들어왔던 상처가 벌어졌다. 청사는 피가 흐르는 고도의 뱃속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청사는 고도의 혈색을 면면히 살피고 있었다. 몸을 찢고 들어오는 용의 발톱을 견디고 있는 고도였지만, 조금이라도 힘들어한다면 행위를 당장 중단할 태세였다. 고도는 참을 수 있을 수준의 통증이었기에 고통을 별달리 호소하지 않았고, 청사는 그런 고도의 도움을 받아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찢어낸 배 속으로 밀어 넣은 손끝에 작은 구슬 같은 정기가 만져졌다. 손톱을 세워 구슬을 건드리니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반응을 보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작은 구슬을 손톱 끝으로 조심스럽게 굴리면서 잡아 꺼냈다. 벌어진 상처를 타고 구슬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자 피가 동반되어 한꺼번에 고도의 옷을 적셨다.

청사는 검고 작은 알을 신중하게 끄집어낸 뒤에 찢어진 부위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청사가 지긋한 힘을 가하자 찢어진 배는 천천히 봉합되어 결국 상처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상처를 없앤 청사의 능력이 신기하여 눈을 깜빡이는 고도였다. 청사는 제 신이한 능력을 자랑할 새도 없이 그저 안도의 한숨만 내쉬었다.

[네게 아무 문제가 없어서 천만다행이야.]

고도는 단전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러 보다가 청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청사는 ‘알’이라 부른 정기 덩어리를 손에 쥐고 있었다. 알은 고도의 피를 흡수하는 기현상을 보였다. 고도의 피를 먹은 구슬 안쪽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생명체보다는 휘몰아치는 기운의 덩어리에 가까웠다. 검푸르게 휘몰아치는 형상이 불길한 연기 같기도 했고, 폭풍우가 치는 성난 바다의 파도를 닮은 것도 같았다. 묘한 분위기의 알을 경계하는 고도와 달리 청사는 냉정하게 알의 상태를 확인하고 신령한 연못에 퐁당 던졌다. 물 위를 두둥실 떠가는 알을 청사의 꼬리가 낚아채서 연못 한가운데로 가져갔다. 다른 곳으로 떠내려가지도, 가라앉지도 않게 고정을 시켜 놓고 하늘의 정기를 계속해서 불어넣어 주었다.

둥둥 떠 있는 알을 바라본 고도가 청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간 기운을 품고 있느라 수고했다고 토닥여 주는 청사의 손길을 받아들이니 참으로 기분이 묘한지라. 후계가 중요하여 그 난리를 부리면서 알이란 것을 품고, 몸속에서 꺼내기까지 했는데 이 이상 자신이 할 일이 없다는 사실에 고도는 착잡함과 서운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걸로 정녕 끝인가. 남은 일이 있을까 하여 고도는 신중한 얼굴로 청사에게 물었다.

“저대로 내버려 두어도 정말 괜찮은 건가.”

고도가 걱정하는 기색을 읽은 청사는 자신 있게 대꾸했다.

[알은 내가 돌보겠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이 못에 있을 건 아니잖아.”

[부화할 때까지 못을 떠날 생각은 없었어.]

“그럼 먹지도 자지도 않고 이 못에 앉아 있겠다고?”

고도는 청사가 지극정성인 성격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고생을 감수하겠다는 말은 의외라서 눈을 껌뻑였다.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고도의 말간 시선이 귀여운 청사는 고도의 입술에 쪽, 뽀뽀를 해주면서 웃었지만 말이다.

[먼저 집에 가 있겠어? 가서 맛있는 거 먹고 푹 쉬어라.]

집으로 내쫓는 배려에 고도는 청사의 긴 머리카락을 콱 잡아당겼다.

“부화를 언제 하는데. 그동안 여기 있으면 넌 뭘 먹고 지낼 거냐, 잠은 어떻게 자고. 차라리 나랑 낮과 밤을 나누어서 돌보는 게 낫지 싶다.”

[아니다, 이건 내가 할 일이야.]

“나와 분담하여 알을 돌보자.”

[안 된다, 집에 가서 쉬어라.]

“너 혼자 이걸 하루 종일 돌본단 말이냐.”

[내 예쁜 고도가 만들어 준 기운이다. 내가 반드시 지키마.]

“하지만—.”

[고도야. 진짜 괜찮다. 정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얼마나 기쁜데.]

고도는 따지려던 입을 다물었다. 청사가 하늘의 위엄을 두른 반인반용의 형상이 되어서까지 한결같은 태도로 고도를 대하고 있었다. 만물이 그를 중심으로 굽어보며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정작 외경심을 받는 존재가 빨리 가서 몸조리나 하라며 토닥여 주고 있다니. 고도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두 손을 들고 말싸움의 패배를 시인했다. 하늘에서 상제 다음으로 높은 직책까지 거들먹거리는데 말싸움을 해서 무엇 하나. 고도는 알을 휘감은 청사의 긴 꼬리와 용의 앞발로 변형된 손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가서 네가 먹을 거라도 챙겨 오마.”

청사는 끝까지 자신을 신경 써주는 고도가 고마워서 눈가를 현월처럼 접어 웃었다.

[못해도 여섯 시진 뒤에 오거라. 그동안 잠도 푹 자고 네가 먹고 싶은 것도 잔뜩 먹고, 그리한 후에 내가 생각나거든 천천히 찾아오면 된다.]

“오냐. 차기 천룡의 명이라면 받잡아야지.”

[참 어여쁘구나, 내 사랑아.]

쪽, 입술에 맞닿은 청사의 입을 고도도 함께 맞춰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사가 온천물에 담근 상체를 빼내어 바위에 기대서는 고도가 가는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다시 불러다가 옆에 와 앉으라 말하고 싶은 욕심을 꾹 참고 고도가 뒤돌아보면 손을 흔들면서 [푹 쉬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따뜻한 온천의 기운과 청사의 시선을 몇 번이나 돌아보던 고도는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둘이 함께 걸을 땐 신경 쓰이지 않던 계곡의 매서운 바람과 발이 푹푹 빠지는 눈 쌓인 길목이 뼈에 시리도록 차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도는 느린 발걸음으로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청사가 만들어 준 의수를 왼쪽 손목에 걸었다. 기운을 운용해 왼손에 도력을 불어넣자 용의 비늘로 만든 의수는 나무로 만든 것과 달리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청사의 체온이 왼손에 머무는 기분이었다. 단전은 아직 비어 있고, 갑작스레 높은 도력을 사용할 만한 몸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변화와 은신, 축지와 투시, 투청, 주박과 비행 등 주술진을 그리거나 인을 맺는 일과는 별개로 행하는 간단한 도술은 무리 없을 수준이었다.

고도가 신의 앞코로 언 바닥을 툭툭 두드리며 축지를 시전하려 할 때 문지방 너머에서 몽당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쳐다봤다. 고도는 서전검의 손잡이에 달린 붉은 술을 꼭 쥐고서 쳐다보는 몽당이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검과 함께 몽당의 몸이 붕 떠올라 고도에게 날아왔다. 고도는 검에 숨 바람을 후 불어넣어 그 크기를 몽당의 손에 꼭 맞게 줄여 주자 몽당이 뛸 듯이 기뻐했다.

“그 검은 앞으로 네가 원하면 크기가 자유롭게 변할 것이다. 검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으니 당분간 마음대로 쓰거라.”

몽당은 검을 든 채 입을 쩍 벌렸다.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몽당이 신이 나서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난생처음 선물을 받은 도깨비는 그 선물을 자기 목숨처럼 귀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고도는 잘 알고 있었다. 바다 용왕의 눈을 찌른 귀한 검이나, 더 이상 땅 위의 만물 이치를 어지럽힐 수 있는 일은 하지 않기로 한 고도였다. 하여 검이 쓰일 일이 없을 테니 귀하게 여겨 줄 이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와 함께 꿩 사냥 한번 해보겠느냐?”

검을 받은 몽당은 고도의 어깨에 앉아서 힘껏 대답했다.

“몽당!”

*

몽당은 서전검을 제 팔처럼 휘둘렀다. 신이 나서 돌리는 검날에 까투리 한 마리가 날아오르다 말고 꽁지깃이 잘려 눈밭을 굴렀다. 다람쥐 한 마리가 검에 잘린 나뭇가지를 머리에 맞아 죽기도 했다. 거칠었지만 정확했고, 어수선하지만 날카로웠다. 서전검을 잘 다루는 몽당이를 신통한 얼굴로 바라보는 고도는 그저 몽당이 죽인 사냥감을 주루목에 담아 줍는 일만 하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미호와 함께 음식을 만들었다. 미호는 마을에서 구한 참빗으로 고도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솔깃이 삐져나온 고도의 두루마기를 시침질해 주기도 했다. 부엌 아궁이에 지펴 놓은 불 앞에 모여서 아랫마을에 내려오는 기이한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했다. 늦은 밤까지 웃고 떠들던 미호와 몽당이가 서로의 이마를 기대고 쌔액쌔액 잠든 사이에 고도는 문지방을 희붐하게 밝힌 빛을 바라봤다.

문지방 너머로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차가운 빛은 손이 얼 만큼 온도가 낮았다. 방문을 흔드는 겨우내 바람, 달빛을 타고 흘러드는 차가운 공기가 고도는 생소했다. 가장 익숙하게 곁에 두고 있던 차가움과 외로움이 이제는 밤잠을 몰아낼 만큼 낯선 것이 되어 고도를 공격했다. 고도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괴고 달빛만 어슴푸레 비치는 방바닥을 응시했다. 문밖에서 부엉이가 울고, 산짐승이 부엌 아궁이를 파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퍼드득, 뛰어 오르는 살쾡이의 그림자가 지붕 위에 머물고 있는 듯했다. 잠을 맞이할 분위기가 아니라. 고도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여미고 방문을 열자 눈발 섞인 바람이 고도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몽당이와 함께 산에 나가 잡아온 까투리가 짚더미 위에 던져져 있다. 살쾡이가 파헤쳐 눈알이 뽑히고 가슴팍에 벌건 피가 흥건했다. 날이 밝는 대로 고기를 손질하여 어설프나마 음식을 만들어 청사에게 가지러 갈 생각이었건만. 부정 탄 음식을 챙겨 갈 수는 없기에 고도는 까투리의 모가지를 움켜잡아 지붕 위로 던졌다. 암수 살쾡이 두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 까투리를 입에 물었다. 찢어지는 살 소리와 지붕에서 튀는 핏자국, 날리는 깃털을 지켜보던 고도는 입가를 찌푸렸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지붕 위에서 쳐다보는 노란 눈동자도, 피도, 새의 울음소리도, 어찌 보면 무서운 종류의 존재들이었다.

“길들었구나.”

익숙한 것이 낯설어지고, 낯선 것이 익숙해지는 경험 앞에서 고도는 하얀 입김만 내뱉었다. 청사의 사랑과 애정, 온기에 길들어진 자신은 이제 고기를 짓씹어먹는 포식자의 모습을 똑바로 보기 불편할 만큼 마음이 나약해지고 말았다. 약한 것이 강한 것에게 먹히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거늘, 그 이치를 봄에 있어 연민이라는 감정이 섞였다. 평생을 모를 줄 알았던 감성이라는 걸 직접적으로 깨닫는 바람에 고도의 한숨은 깊어졌다.

‘아빠!’

부엉이와 살쾡이 울음소리에 익숙한 것이 섞여 들었다. 고도는 움찔하고 어깨를 떨었다. 잊고 지냈던 아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아빠아—!’

까르륵 터진 웃음소리가 모래알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닮은 아이였다. 아이를 기다란 치마폭으로 감싼 여인이 해풍에 말린 생선 코다리를 들고 고도에게 어서 빨리 오라 손짓하고 있었다. 말린 생선을 모아 장에 내다 파는 부인을 대신하여 고도는 아이 손을 잡고 산으로 바다로 자주 놀러 다녔다. 자고로 여인은 조신한 몸가짐을 으뜸으로 쳐야 했다. 하나, 고도는 딸아이가 사내아이처럼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녀도 그 모습이 마냥 예뻐서 바깥으로 나돌아 다녔다. 해가 지고 나서 집에 돌아오면 부인은 아수라 같은 얼굴로 모래 먼지를 뒤집어쓴 아이와 고도에게 벌을 내렸다. 부녀는 모두 무릎을 꿇고 저린 다리를 주무르기 일쑤였다. 둘 다 입을 삐쭉 내민 채 툴툴거리면 불만의 어조를 귀신 같이 알아들은 부인이 어느새 고도와 아이에게 졌다는 얼굴로 바라보곤 했다.

‘가족들이 아직도 그리운가.’

아이와 부인을 바다가 삼키고 나서 오로지 분노로 가득 찼던 고도를 받아 준 사람이 도성을 지키는 인간들의 우두머리, 왕이었다. 고도는 높은 자리에 앉은 것들이란, 없는 이들을 박복하게 착취하여 짓밟고 깨부수는 게 업이라고 생각했다. 삐뚤어진 사고방식으로 왕을 대했었다. 왕을 도력으로 괴롭히기도 하고, 그를 놀렸다. 업무를 방해하고 헛것에 취하게 만들어 도성 안을 하염없이 빙글빙글 돌게도 했다.

왕은 그저 고도의 능력을 신기해했다. 골탕을 먹어도 웃었다. 실없는 왕의 태도에 고도의 독기가 먼저 수그러들었다. 자신을 좋아하며 곁에 두려 하는 왕의 의존도가 고도는 내심 마음에 걸리는 터였다. 그를 괴롭히던 것도 그만두고 도력을 써서 왕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도와주거나 그를 감시하는 이들 몰래 도성 밖으로 놀러가기도 했다. 자유롭게 구름을 타고 땅과 하늘을 오갔다. 그때마다 왕은 고도를 부러워하며 고도가 바라본 세상 이야기를 들려 달라 어린아이처럼 보챘다.

임금이 사냥을 나가거나 소리꾼을 모아 잔치를 벌일 때도 꼬박 고도를 챙겼다. 고도가 서책을 읽어 주는 목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면서 행복한 얼굴로 잠들기도 했다. 모든 인간 위에 군림하여 바른 결정을 내려야 하는 왕이 고작 자신을 곁에 두기 위해서 신하와 대립하고 싸우기도 했다. 고도는 그러한 친우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왕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기에 왕이 강제적으로 자신을 붙잡아도 끝내 그의 곁을 떠났다.

가족도 지키지 못했다. 친우였던 임금에게 그릇된 판단을 내리게 했다. 부부지정도, 자식에 대한 사랑도, 군신의 예도 모두 고도에게는 망가진 베틀이었다. 틀에 끼워진 씨실과 날실에는 애초에 자신과 같은 인간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팔자나 운명이란 것들은 고도를 같은 종족으로부터 고립시켰다. 염라대왕의 명부에서 스스로 이름을 지운 순간부터 그는 세상으로부터 인간다운 행복을 한 톨도 누릴 수 없도록 운명 지어졌다.

인간임에도 인간답게 살도록 허락받지 못한 존재. 하늘과 땅 모두의 분노를 이끌었기에 평생에 걸쳐 그 죄업을 씻어야 하는 몸. 고도는 머릿속을 울리는 지난 세월의 과거 파편을 바라보다가 그만 눈을 질끈 감았다.

청사야, 대롱아, 한무야.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잡고 버틸 것이 그 이름뿐이었다. 그의 이름을 입술에도 담았다.

“대롱아. 한무야.”

그를 부르지 않으면 과거의 어둠에 집어삼켜질 것만 같다. 누구보다 어둠을 닮았고, 그 어둠 속이 포근했던 고도였건만, 이제는 그가 무서웠다. 청사가 곁에서 느끼게 해준 밝은 빛이 익숙해져서 어둠이 두려웠다. 고도는 혼자가 된 지금이 낯설었다. 더는 망령 같은 부인과 아이, 옛 친우에게 붙잡히고 싶지 않았다.

눈꺼풀 위로 눈이 떨어졌다. 굳어 있던 몸이 외부의 자극으로 인해 감각이 되살아났다. 과거의 망령된 것에 끌려 들어가던 고도를 일깨웠다. 한 번 톡, 두어 차례 톡톡, 누군가 고도를 부르는 두드림이었다.

고도는 감았던 눈을 떴다. 평범한 눈앞의 풍경 속에서 숨을 쉬기 어려운 것처럼 거칠게 호흡을 하던 고도였다. 입에서는 하얀 김이 나오는데 이마와 등허리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간신히 현실로 되돌아왔지만 아직도 부엉이 울음소리에 아이와 부인, 임금의 부름이 섞여 들렸다.

그 순간, 우르르, 땅 밑이 울렸다. 짚신 아래로 느껴지는 미묘한 진동에 밤 새 잠을 자던 금수들이 놀라서 사방으로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평온했던 공기가 뒤섞였고, 산을 넘어오던 바람이 막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달빛이 일렁였다. 고도의 왼쪽 가슴과 손 부근에서 아리아의 잔해들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빛이 모여 고도를 감싸자 달과 바람과 향기가 모두 그를 빗겨 가기 시작했다. 고요하지만 분명히 변화하는 주변 상황을 보면서 고도는 땀에 젖은 앞머리를 손바닥으로 쓸어 넘겼다.

무언가가 고도의 발밑까지 다가왔다. 그것은 너무 거대하여 고도가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바싹, 입안이 타들어 갔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과 경험으로 발밑의 존재를 노련하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고도는 일렁이는 땅의 움직임 속에서 퍽 당황하여 몸이 비틀거렸다.

깊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울렸다. 폐부 끝까지 들이켠 흡기를 느리고 융성하게 뱉는 소리였다. 땅의 호흡은 거대한 바람이 되어 능선 너머에서 계곡까지 한꺼번에 흘러내렸다. 미미하게 느껴지는 진동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사라락 흩날리는 속눈썹의 움직임이었다.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소리는 거인의 걸음걸이처럼 쿵쿵 울렸다. 산이 흔들렸다. 나무가 들썩였다. 시끄럽던 부엉이와 살쾡이 울음소리가 사라진 대신, 지진처럼 고도의 몸을 휘청, 흔들었다.

“이런.”

고도는 몸을 숙여 자리에 앉았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중심을 잡지 못해 비틀거리게 되는 지진을 감당할 수 없었다. 땅 밑의 존재가 움직였다가는 바다가 갈라지고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던 대지가 융기하게 될 것이다. 지축 밑에서 녹은 심장처럼 흐르는 뜨겁고 붉은 기운들이 대지 위의 모든 인간을 삼키게 될 것이다. 가까이 다가와 고도에게 손이라도 뻗으려 했지만 고도에게 닿고자 하면 지상이 반쯤 뒤집히니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존재는 지면의 반대편으로 들어갔다. 고도에게서 최대한 멀어져 땅속 깊은 곳에서 몸을 웅크렸다. 덕분에 고도가 몸을 일으켜 세우기도 힘들던 지진이 잦아들었다. 바닥에 양손을 짚고 앉아 있던 고도는 당황한 얼굴로 여전히 발아래만 바라봤다.

조금 전의 감당 못할 진동은 사라졌지만 흙바닥에 닿은 손바닥이 뜨거웠다. 흙 바로 밑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기색으로 느껴졌다. 머릿속의 어둠을 몰아 준 것은 고마웠지만, 이렇게 요란하게 대지를 모두 울리는 일은 지나치게 소란스러웠다. 고도는 점점 뜨거워지는 땅 밑의 기운에 슬며시 손바닥을 치웠다. 고도는 자신이 감당 못할 존재와의 친밀한 연결이 부담스럽고 두려웠다.

“땅의 주인이십니까.”

조용한 고도의 목소리가 듣기 좋은지, 고도가 발을 딛고 선 땅이 바르르 떨렸다. 마치 웃음소리를 삼키는 여인의 몸짓처럼 정갈했다. 고도의 머리 위에서 나무에 매달려 있던 눈이 툭, 떨어졌다. 고도는 자신의 어깨에 묻은 눈을 바라봤다. 옷 속으로 스며드는 젖은 물기가 땅의 대답이었다.

잠꾸러기라 들었거늘, 이렇게 친히 행차하다니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 고도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에서 거대한 존재의 기척만 느껴지고 실체를 볼 수 없어서 어디를 보고 대화를 시도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툭, 정수리로 눈이 떨어졌다. 고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 제가 고도라는 도사입니다. 당신의 아이들이 한동안 저를 찾아와서 괴롭혔었지요. 당신을 만나라고 아우성이었는데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땅 밑이 다시금 들썩였다. 고도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어도 주저앉은 채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보이지도 않는 존재와의 교감이 오로지 흙바닥을 통해서라면, 다른 곳으로 피신할 방도도 마땅치 않다. 땅은 세상을 구성하고 있으니, 세상 그 어디로도 도망갈 수가 없다.

“그대는 나를 보고 싶으셨습니까.”

고도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다시금 땅이 울렸다. 무슨 대답인지, 그 음성은 없었다. 다만 땅의 울림이 공격적이지 않고 부드럽다는 데에 고도는 미약하나마 안심했다. 땅이 혹시나 자신을 직접 벌하러 왔다거나 해악을 끼치려 한다면 어쩌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고도는 세상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공포를 감당할 자신이 없던 것이다.

“으, 음.”

아무리 유능한 도사라도 땅의 힘을 빌려 주술을 쓰는 만큼, 힘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땅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고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손가락만 꼬무작거렸다. 아비에게 매 맞는 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참으로 난감하고 어려웠다.

“이렇게 절 찾아오신 이유가 있을 텐데, 저는 아직 그대의 뜻을 읽지 못하겠습니다.”

고도의 난감한 기색을 느꼈는지 땅이 부르르 흔들렸다. 웃음을 참는 것 같았다. 고도는 지금이라도 당장 청사에게 찾아가 이 사태를 도와달라 말하고 싶었다. 땅의 주인을 하늘에 속한 천룡이 대면하는 게 격식도 더 잘 맞을 터이다. 한낱 인간인 자신이 이 원대한 존재를 알현하는 것은 너무도 부담스러웠다. 고도는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요 며칠 자신에게 집착했던 아리아의 태도가 떠올라 그것을 먼저 묻기로 했다.

“저를 당신의 ‘대리 주인’으로 명했다던데 맞습니까.”

땅이 다시금 부르르 흔들렸다. 긍정의 대답이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대는 나를 미워하지 않습니까. 원망하실 텐데요. 당신이 아끼는 이 모든 땅 위의 세상을 나 혼자서 어지럽혔습니다.”

가족도, 군신의 예도 저버린 인간에게 어이하여. 고도는 뒷말을 삼켰다.

“나에게 왜 중한 직책을 주려고 하십니까.”

땅은 고도의 어깨에 다시금 눈발을 떨어트려 물기로 적셨다. 젖은 어깨를 보면서 고도는 심란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땅과의 교감은 난해했다.

“대리 주인이라는 게 대체 뭡니까.”

이번엔 땅이 흔들리지 않았다. 눈발도 떨어지지 않았다.

“저는 그런 직책을 원치 않습니다. 물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여전히 땅은 대답하지 않았다.

“선정 기준도 모르겠고요, 제가 대체 땅의 무엇을 대변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중하고 귀한 일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삿된 도사일 뿐입니다만.”

이번엔 머리 위에서 커다란 눈뭉치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정수리에서부터 폭삭, 눈 벼락을 맞은 고도는 옷 속으로 들어온 차가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속눈썹에 걸린 눈을 손등으로 닦아 내면서 파랗게 언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어쨌든, 대리 주인이라는 직책을 물릴 생각이 없다는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아니, 그러니까 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이런 일을 시키는 거지.

땅의 신을 믿고 따르느라 제사를 지내는 인간보다 흙을 뒤집어 경작하고 불을 지르는 이들이 더 많아진 세상이다. 땅은 인간에게 사랑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사랑이 없어도 침묵을 지키며 존재하는 것이 땅이었다. 고도가 땅의 위치에 있었다면 인간들이 고약하고 괘씸해서 한번 거대한 지진을 일으키거나 흙 밑의 불덩이를 토해서 집을 모두 불태울 텐데, 그런 복수조차 없지 않았나.

“대리 주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라도 알려 주십시오. 역할이라도 알아야 제가 그 일을 맡을지 말지 선택할 것 아닙니까.”

이번에도 머리 위에서 눈이 한 바가지나 쏟아졌다. 고도는 이미 쫄딱 젖은 옷에서 눈을 털어 낼 의지마저 상실했다.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신이 이 막무가내인 아비에게 어떻게 대들어야 하는지 답 없는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제가 그대의 명을 안 듣고 도망 다니면 어쩔 겁니까.”

이번에도 눈이 쏟아졌다. 고도는 굴하지 않았다.

“적어도 인간의 언어로 말이라도 해주세요. 저는 ‘대리 주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또다시 눈이 쏟아졌다.

“콜록, 저는 하늘로 올라갈 몸입니다. 땅에 머물면서 그대의 뜻을 이어 갈 여력이 안 됩니다.”

눈이 멈추었다. 고도의 몸 위로만 주변보다 수 배에 달하는 눈이 쏟아졌으나, 이번에는 떨어지지 않았다. 고도는 잔기침을 손등에 쏟다가 대답이 달라진 땅의 기색을 읽었다. 눈을 쏟지 않았다는 것은 고도의 말이 옳다는 소리였다.

“제가 하늘로 올라가도 된다는 겁니까.”

고도의 예상이 맞았다. 고도에게만 집중 포화되던 눈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당신이 임명한 ‘대리 주인’이 해야 하는 일 중 하나라는 뜻입니까. 땅에 머물지 말고 하늘로 올라가라는 겁니까?”

고도는 무릎 밑의 땅이 따뜻해지는 기운을 느꼈다. 생동하는 봄의 기운과 비슷했다. 조금 전 고도가 손바닥으로 짚고 있었을 때 느꼈던 열기. 그 열기가 고도를 덮고 있는 눈을 한꺼번에 녹였다. 고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을 녹이고 고도의 젖은 옷을 말려 주는 포근함이 마치 부모의 손길 같았다.

땅의 손길이 고도의 머리카락을 지나 그의 가슴과 배에 머물렀다. 고도가 한동안 품고 있었던 또 다른 생명이 머물렀던 공간에도 빛이 모여들었다. 고도는 몸에 닿는 따뜻한 아리아들을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는 눈으로 응시했다. 하늘의 존재들이 성수를 치미로 이용하는 것처럼, 땅은 이 빛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었다. 심장과 배. 그 두 기관에서 그나마 공통된 의미를 추측해 보자면 하나는 고도의 ‘삶’이었고, 다른 하나는 얼마 전까지 품고 있던 ‘또다른 생명체의 삶’이었다.

“저와 제가 잉태한 용이 살길 바라십니까.”

침착한 한 마디에 빛들이 사그라진다. 고도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간 빛은 더 이상 환하게 발하지 않았다. 고도는 확신이 서지 않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살면 되는 것입니까. 아무런 대가도 목적도 없이, 그냥 이 목숨을 이어 가면 되는 것입니까. 제가 잉태한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고 키우면 되는 것입니까. 그게 당신의 대리 주인이 당신을 위해서 해야 할 임무입니까. 그게 땅의 주인께서 신경 쓰셔야하는 문제였습니까. 저같은 인간을 왜. 아, 아니, 하늘의 문제를 그대가 왜…….”

고도의 몸을 따뜻하게 녹이던 온기가 조금씩 사라졌다. 저 깊은 곳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존재가 조심스럽게 팔다리를 펴는 바람에 한차례 지진이 일었다. 그러나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는 듯 고도의 바로 밑에서 울리던 진동이 산등성이 쪽으로 멀어졌다. 명확한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으면서, 고작 녹아 버리는 눈 한 덩어리로만 어깨를 어루만지고 등을 돌렸다.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는 땅이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낸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것이 고도를 선택했다. 무리한 것을 요구한 것도 아니다. 그저 살아 주길 바란다. 고도를 위해서, 고도가 품었던 생명을 위해서. 그것만을 위해서 살아 주길 바란다는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 아리아를 고도의 몸속에 심어 주었고, 다가와 만져 준 것이다.

그것에 무슨 깊은 뜻이 있는지, 여전히 고도는 알지 못했다. 그 이유를 설명할 만큼 땅은 자상한 아비가 아니었다. 좀만 헛된 소리를 하면 커다란 눈 바가지를 정수리에 뿌리는 엄격한 이였다. 그러니 멀어지는 그를 도술로 따라잡은 뒤에 대체 무슨 의미냐고 따져 물어봤자 소용이 없을 듯했다. 땅이 고작 한마디를 전하기 위해서 존재를 드러냈다. 고도가 그의 대리 주인으로서 살길 바란다는 그 한마디를 위해서. 이유는 지금 당장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직접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건가. 그러려고 아리아들이 과도하게 땅의 주인과의 교감을 요구한 것이었고, 이젠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인가.

고도는 머리카락을 뒤흔드는 바람이 더 이상 차갑지 않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고개를 들자 말간 달빛이 자신을 정면에서 내리쬐고 있었다. 산새들이 고도의 머리 위의 나뭇가지로 몰려들었고, 어둠 속에서 노루나 토끼들이 눈을 도록도록 굴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의 만물이 고도에게 관심을 표하고 있다. 그에게 다가가고 싶어서 애정을 담아 쳐다본다. 고도를 감싼 세상이 분명히 변하고 있었다. 무서워하며 피하는 대신, 사랑스럽게 다가오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이 외면했던 자신을 땅의 주인이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고도는 저도 모르게 힘 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변한 것은 없었고, 앞으로 변할 것도 없지만, 어쩐지 자신이 살아가는 모든 삶이 땅의 의지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자 목숨이 중하게 여겨졌다. 언제나 가볍게 생각했던 목숨이 청사를 만난 후 한 번 무거워지고, 땅을 만나면서 배가 되었다.

“……나는 내 사랑을 위해 살 것인데,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당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면 어쩔 겁니까. 그래도 여전히 저를 당신의 대리자로 명명하실 것인지요.”

물어도 대답 없는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고도는 집으로 되돌아갔다. 이유는 조만간 알아낼 것이다. 왜 자신에게 ‘대리 주인’이라는 명목 하에 삶의 무게를 더해 줬는지를 다시 물어볼 것이다. 살라 명을 내린 이유를 알아낼 것이다. 그 이유를 알아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의뭉스러운 땅이 직접 대답해 줄 것 같지는 않으므로, 고도 혼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누군가 고도에게 왜 사느냐고 물었을 때, 고도는 ‘죽지 못해서’ 혹은 ‘삶의 이유를 찾으려고 살고 있다’는 대답만 했다. 이제는 ‘청사 때문에’라는 대답이 더 익숙해졌다. 청사를 위해서 살아갈 삶이 땅의 의지와 맞닿아 있으리라 생각하자 심란하고 어색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살쾡이 두 마리가 저희들이 잡아먹었던 까투리를 보은이라도 할 셈인지, 토끼 두 마리를 놓고 갔다. 살아 있는 토끼였다. 마당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새하얀 눈토끼를 살쾡이들이 지붕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든 게 낯설고 이상하기만 한 짐승들의 모습을 보면서 고도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마를 맞대고 누운 미호와 몽당이 옆에 몸을 뉘였다.

뒤척거리며 잠을 자지 못했던 이전이 거짓말 같았다. 고도는 눈을 감았다. 쌔액쌔액, 고른 숨을 내쉬었다. 악몽도 없는 단잠이 눈꺼풀을 적셨다.

*

참방, 수면을 적시는 소란에 청사가 눈을 떴다. 하반신만 못에 담근 청사는 상반신은 바위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잠이 들려는 찰나였다. 새파란 눈동자만 굴려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봤다. 긴 꼬리로 감은 알이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요동이 거세서 꼬리 바깥으로 물이 튀어나갔다.

청사는 팔짱을 풀고 몸을 바로 세운 뒤 알을 조금 더 자세히 관찰했다. 고도의 몸에서 꺼냈을 땐 고도의 주먹만 한 보주처럼 생긴 알이었다. 겉은 새까맸지만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밀도 높은 하늘의 정기가 폭풍처럼 그 안을 무언가가 요란하게 휘젓고 있었다.

알을 보자마자 대번에 든 생각은 이렇게 농축된 하늘의 정기를 고도가 품고 있느라 얼마나 곤욕이었을까, 하는 미안함이었다. 두 번째로 떠오른 생각은 보통 인간은 이 정도로 하늘의 기운을 담고 있으면 몸이 견디질 못하고 터지거나 죽었을 텐데 고도는 그것을 극도로 압축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는 점이다.

알은 못에 꺼내 놓자마자 하루가 다르게 크기가 커졌다. 껍질은 단단해졌고, 휘몰아치던 내벽이 더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청사의 꼬리에 감겨 미동조차 없던 알은 세상 밖으로 나온 지 석 달 보름이 되었을 때부터 움직임이 생겼다. 처음에는 껍질 안에서 꿈틀거리며 생명력이 느껴졌지만, 이제는 알을 겉으로 움직일 만큼 힘이 세졌다. 부화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다. 청사는 부화의 신호를 마냥 기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예상보다 부화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다.

[짧게는 반 년, 길게는 십 년까지 알의 부화 속도가 달라. 기록에 의하면 십 년 간 알 속에 있던 용은 너무 커져서 수미산 꼭대기가 아니면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더구나. 그게 어떤 용인지는 한무, 너도 잘 알 거다. 네 둘째 형이야. 지금 은하수에 몸을 뉘고 하늘을 지탱하고 있는.]

누나의 서신 속 내용을 떠올린 청사는 알의 부화에 대해 충고한 누이의 마지막 말을 여러 차례 곱씹었다.

[일찍 태어날수록 미숙아에 가깝겠지. 부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면 태어나자마자 죽을 수도 있어. 장애가 있을 수도 있어. 그건 네가 판단하여 직접 죽이도록 해라. 용은 크고 강할수록 대접을 받는단다. 크기가 클수록 하늘의 정기를 더 많이 몸에 품을 수 있는데 조그마한 애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니. 크기가 너무 작으면 네 첫째 형처럼 하계로 내려 보내 땅이나 바다를 다스리는 경우도 있단다. 천룡의 후계자로 키우지는 못한다는 뜻이야.]

고도의 배 속에 약 이십 일을 있었고, 못에서 석 달 보름동안 있었다. 도합 네 달도 되지 않는 짧은 시일에 용이 태어나면 뜻하지 않은 문제가 하나둘 터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무리해서 후계를 낳으려던 이유가 무엇이었나. 고도를 하늘로 데려가서 반려자로 공표할 때 반대하는 세력이 없도록 사전 작업을 한 것 아닌가. 후계자 문제에 집중하느라, 태어날 용의 건강 상태를 고려하지 못한 게 실수였다. 남자의 몸으로 정기를 품는 이례적인 거사를 치르는 데에 준비가 미흡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억지로 누이를 땅으로 불러들여 더 많은 조언을 얻을 것을, 성급했던 걸까.

청사는 수증기가 닿아 물기가 맺힌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손끝에서 심란함이 느껴졌다. 알이 잘못되면, 혹여나 그런 일이 생기면 지금까지 고생했던 고도의 배려가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저런, 내가 곁에 오는 것도 모르고 있구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하느냐.”

뿌연 수증기 사이로 달콤한 향기가 맡아졌다. 표정을 읽어 내기 힘든 얼굴로 가만히 알만 응시하던 청사는 얼굴에 드리웠던 진중함을 걷어내고 고개를 돌렸다. 달빛과 공기마저도 고개를 숙이고 마는 천룡의 우아함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고도를 반기는 기쁨만이 그 얼굴에 자리 잡았다.

[고도.]

청사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고도가 가까이 다가가 그 팔 안에 안겨 주니, 청사는 고도의 목에 고개를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달콤한 향기였다. 고도 몸에서만 맡아지는 달콤한 꿀을 닮은 꽃향기. 교미를 했던 영향인지, 이젠 산 어디에 있어도 고도의 기척을 느낄 수가 있고, 가까이 오면 기분이 절로 들뜨게 되는 냄새가 맡아져 청사는 정신을 못 차렸다. 용이 반려를 정한다는 게 원래 이런 걸까. 아니면 고도에 대한 사랑이 깊어져서 머릿속에서 고도의 향기를 만들어내 혼자 취하고 마는 걸까. 청사는 고도의 살갗과 머리카락에까지 코를 묻고 깊숙하게 호흡한 뒤에 속삭였다.

[오늘은 조금 늦었구나.]

하루 중 유일하게 고도를 만나는 소중한 순간이었다. 해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도는 청사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왔다. 주로 전날 손질한 산나물로 만든 반찬에 보리, 피, 수수가 섞은 밥을 가지고 오는데 고도가 얼마나 음식 솜씨가 없는지, 청사는 간을 맞추고 양념을 묻힐 바에야 그냥 생나물을 들고 오라고 말할 정도였다. 고도가 식탐이 없어서 맛있는 음식이나 요리 자체에 별 관심이 없다는 걸 알지만 이 정도로 생활력이 부족한지는 같이 살면서 안 사실이었다.

요괴를 잡으러 다닐 때야 바빠서 끼니를 거르는 게 일상이었다지만, 하루 종일 한가하게 서책이나 보고 금을 뜯는 사람이 밥 먹는 것도 깜빡해서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아, 오늘 한 끼도 안 먹었구나.”라는 말을 하는 게 정상일까. 이러니 고도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빨래는 했는지, 아침은 먹었는지를 일일이 확인해야만 했다. 청사가 연못에 몸을 담그고 알을 보호하는 동안 좋아진 일이라면 고도가 청사를 먹이기 위해 꼬박꼬박 아침을 함께 먹게 된 일이다. 적어도 하루 중 오전은 고도가 음식을 먹는다는 사실이 청사로서는 다행이었다.

“아침에 눈이 많이 녹았더구나. 잠깐 근처를 돌아본다는 게 산수유나무를 발견해서 열매 몇 알을 따다가 늦었어.”

고도가 등에 멘 주루목을 펼쳐 그 안에 담아 온 빨간 열매들을 보여 주었다. 상록수의 푸른 나뭇잎으로 감싼 열매가 군데군데 터져서 붉은 물이 흘렀지만 고도는 괘념치 않고 멀쩡한 알맹이들을 꺼내 보였다.

“밥 먼저 들겠느냐. 아님 이걸 먼저 먹겠느냐.”

밥이라고 해봤자 조와 수수를 삶아 찐 것에 민가에서 받아온 김치가 전부였지만, 고도는 청사가 맛있게 먹어 줄 생각에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 예쁘던지, 뭐든 상관없으니 먹여 달라는 소리가 목구멍 위에서 넘실거렸다. 아무렴, 생활력이 없으면 뭐 어떠한가. 이렇게 예쁜데, 인간이라면 응당 허술한 구석이 있어야지. 완벽한 건 제 자신이 있으니 뭐. 청사는 행찬과 산수유 열매를 양손에 들고 빤히 쳐다보는 고도에게 손을 뻗었다. 양손의 음식을 모두 바닥에 내려놓은 청사가 짓궂게 웃으며 고도를 끌어당겼다.

[너 먼저 먹으면 안 될까?]

살살, 여인처럼 눈웃음을 치는 청사를 보며 고도는 처음엔 무슨 소린지 몰라 눈을 끔뻑이더니 곧 손날을 세워 청사의 이마를 쿵 쳤다.

“밝힘증이 심해졌다.”

[아파.]

“나만 보면 왜 이렇게 달려드느냐. 시도 때도 없이.”

[하지만 너한텐 정말 맛있는 향기가 난단 말이야.]

“음식 냄새가 밴 건가?”

[아니, 네 향기다. 침이 꿀떡 삼켜질 정도로 달큼한 향은 네 고유의 냄새다. 난 고도 너를 먼저 먹고 싶은데 말이다.]

동의를 구하기도 전에 벌써 고도를 연못 안으로 첨벙, 끌어당겼다. 고도를 허벅지에 앉힌 순간 이미 빠져나갈 구석을 원천 봉쇄해 버린 청사였다. 고도는 젖은 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엉덩이를 조물딱 만지는 청사를 눈만 가느다랗게 뜨고 쳐다봤다. 식욕보다 색욕을 앞세우는 청사를 나무라기엔 고도의 이마와 머리카락에 쪽쪽 뽀뽀를 해주는 행동이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먹고 하자.”

[하고 먹자.]

“하루에 딱 한 번 먹는 끼니를 이렇게 미루면 안 된다.”

[하루에 딱 한 번 보는 고도를 계속 안고 싶어서 그러지.]

“먹고 해도 안 도망간다.”

[좋아, 절충안이다. 하면서 먹자.]

“뭐시라.”

농이 아니었다. 청사는 고도의 바지를 벗겼다. 당황한 고도가 몸을 뒤척이느라 잔잔한 못 수면에 파도처럼 거친 물보라가 일었다.

“아침부터 정말――.”

[벌써 며칠째 못 했는 줄 아느냐. 어젯밤에 꿈에서도 네가 나와서 죽는 줄 알았어.]

“여기서 옷 하나 더 벗기면 정말로 죽여 주마.”

[기대되는걸.]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 걸 알면서 능청 떨다니.”

[기대할게, 날 한 번 질펀하게 죽여줘 봐라, 고도야.]

적나라한 표현에 얼굴이 새빨개진 고도를 보면서 청사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곤욕스러워하는 고도가 선뜻 청사의 행동을 받아 주기 힘들어하자 청사는 고도의 턱을 잡고 슬며시 고개를 어깨 너머로 돌려주었다.

[저 녀석을 낳으면 다 끝난 줄 안 게냐. 저게 시발점인걸. 이제 넌 내 반려자라서 내가 어디에도 못 가게 꽁꽁 묶어 버릴 테다.]

고도는 청사의 손길에 고개를 등 뒤로 돌리고 눈을 깜빡였다. 못을 휘감은 거대한 꼬리 가운데에 수면에서 반쯤 잠긴 알이 떠 있었다.

[알이 제법 커졌다. 네 두 손바닥보다 클 것이야. 보이지? 이제 제법 알다운 껍질도 가졌어.]

미려한 비늘이 붙은 꼬리 끝이 살랑살랑 흔들리며 위치를 알려 주었다. 꼬리 끝을 감아 올려 물속에 담긴 알을 반쯤 꺼내 보여 주자 고도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청사는 눈을 반짝이는 고도가 귀여워서 웃음을 삼켰다. 고도가 신기해하는 눈으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걸 알 법했다. 몸 안에서 품어 낸 것이 세상 밖으로 나와 청사의 기운과 온천물의 따뜻함에 감싸여 점점 자라나고 있으니 만감이 교차할 것이 분명했다.

“내가 정말 저걸 보름 동안 몸에 품고 있었단 말이지.”

[그래, 정말 수고했어. 고도가 정말 강한 도사여서 알 속의 기운도 강하게 압축된 것으로 보인다. 내가 지금까지 본 알 중에 가장 작거든.]

“이런, 좋은 징조가 아니란 건가?”

[좋은 징조일 거다. 태동이 강해. 건강하게 자라고 있으니 크게 염려할 것은 없어 보여.]

“알에 문제가 없다면 다행이다만, 용의 알이 저렇게 작아도 되는 건지, 내가 아는 바가 없어서 걱정이 되는구나.”

[사서 걱정이다. 원래 용의 알은 작아.]

“정말?”

청사는 웃었다. 사실을 알려주면 고도가 얼마나 신경 쓸지 알기에 거짓말을 했다. 손끝으로 찌푸려진 고도의 미간을 펴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럼.]

“그러면 괜찮지만…… 한무, 너 그 사이에 손을 움직이는 버릇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거지.”

노려보는 고도에게 고개까지 비죽이 틀면서 예뻐 보이는 각도를 자처한 청사는 대화하는 사이에 벗긴 고도의 바지를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쫄딱 젖은 옷 아래로 차르륵, 쏟아지는 물소리는 잠시였다. 청사는 아래 춤을 푼 허벅지에 고도를 올렸다. 뿌연 온천 속의 사정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둘 모두 상의는 옷고름도 풀지 않은 채 아래만 훤히 드러내고 살을 맞댔다. 고도가 느끼기엔 옷을 모두 벗은 것보다 음란했다.

청사는 물속으로 집어넣은 손을 굴려 고도와 자신의 성기를 두 손에 담았다. 미끈한 물에 감긴 성기 두 개를 함께 문지르면서 훑어 내자 고도가 어깨를 움츠렸다. 고도는 이곳에서 벌어졌던 교미 때와 달리 청사의 성기가 그때보다 조금 작으며 돌기가 없다는 점에 안도했다. 교미를 위해 변형된 생식기가 아니라, 평소와 다름없었다.

청사에게는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교미를 위한 성기는 너무 커서 온몸에 버거운 기분이었다. 성관계가 정도 이상으로 과하게 느껴져서 무서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청사의 성기도 충분히 크고 두터웠기에 굳이 변형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만족스럽고 좋았다.

“아, 음.”

청사의 손길에 고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부터 벌어진 관계에 고도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청사는 고도와 자신의 물건을 함께 흔들었다. 고도가 남자라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자리를 가질 때 초반에는 좋고 싫음의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우선 성기를 잡고 흥분시키면 이성보다 본능의 침식을 강하게 받는 게 남자 아니던가. 우선 고도를 흥분시키면 청사가 밀어붙여서 끝까지 가는 일이 태반이었다. 이번에도 그리 해볼까. 청사는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리면서 고도에게 입을 맞췄다.

[밥 먹여 준다 하지 않았나. 산수유 먹여 주면 좋겠는데.]

어리광을 부리는 청사를 보면서 고도는 젖은 숨을 내뱉었다. 꿈틀거리는 성기가 언제 엉덩이 사이를 가르고 올라올지 몰라서 당황스러운데 이런 상황에서 청사가 뭔가를 먹여 달라는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갈수록 청사가 성관계에 능숙해지고 고도는 그 능숙한 청사에게 끌려가는 기분이라 곤욕스러웠다. 주도권을 잡지 못하겠다. 예전의 청사라면 고도가 싫어하진 않을지 눈치를 살피고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는데 이제는 고도의 반응을 모두 꿰뚫고 있기에 그가 유도하는 대로 고도가 움직이는 형상이었다. 침착함을 찾아야 하는데. 고도는 이미 교미 때 달려들던 청사의 강렬함이 뇌리에 박혀서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청사가 고도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그 관계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한번 각인된 청사의 행동이 고도의 생각을 유연하게 만들었다. 고도는 바위 위에 올려놓은 열매로 손을 뻗었다.

고도가 열매를 집기 위해 몸을 들어 올린 그 사이에 고도의 물건에 비벼지던 청사의 성기가 몸속을 가르고 들어왔다. 불시의 공격이었다. 손가락으로 풀어 주지도 않고 미끈한 온천물을 이용해 어려움 없이 쑤욱 들어오는 솜씨가 아주 계획적이었다. 고도가 산수유를 집자마자 청사가 허리를 손으로 잡고 확 내려 버린 탓에 고도는 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색정적인 감각에 탁한 숨을 삼켰다. 꿈틀거리며 내벽을 비비는 성기의 귀두 끝이 고도를 괴롭혔다.

“너 이 녀석―…….”

[고도야, 아.]

생글생글 웃으면서 입만 벌리고 산수유를 받아먹을 준비를 하는 청사가 얄미웠다. 고도는 열매 하나를 손가락으로 눌러 터뜨렸는데 청사가 그 반응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과즙에 젖은 고도의 손가락을 핥았다.

[입으로 먹여 줘.]

어디까지 기어오르려고. 고도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청사는 꼬리를 휘저어 알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벌써 석 달 넘게 알만 지키고 있다. 고도한테 이렇게 어리광 부리는 거 싫은가? 나 혼자 여기서 외롭고 쓸쓸해서 그러는걸.]

자신의 예쁜 얼굴을 참으로 잘 이용하는 족속이로다. 고도는 미호보다 더 여우같은 이 검은 용을 어쩌면 좋을지 난감함이 가득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눈가를 찌푸리고 쳐다보는 고도를 보채던 청사가 허리를 흔들었다. 고도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청사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한무…… 하나만 하자, 하나만……!”

열매를 먹든, 고도를 먹든, 한 가지만 정해 놓아야 사람이 헷갈리지 않지, 준비도 못 하고 불시에 이런 행동, 저런 행동을 요구당하는 탓에 고도는 애먼 청사의 어깨만 세게 쥐었다. 이러한 행위가 익숙해지면서 고도는 본의 아니게 쾌감을 찾는 몸짓을 보였고, 그것은 청사의 성욕에 더욱 불을 지피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고도가 허리를 세우고 허벅지 안쪽을 조였다. 청사의 성기는 제 길을 익숙하게 자리 잡았다. 이왕 배를 맞추는 것, 고도도 기분 좋게 응할 수 있도록, 청사는 아랫입술을 핥았다. 고도가 즐거움을 느끼는 부분이 청사가 느낄 수 있는 고도의 가장 뜨거운 내부였다. 서로의 흥분을 극대화하는 데에 일조한다는 점이다. 고도가 수동적으로만 쾌감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찾는 행위는 청사에게도 즐거움을 줬다. 사랑스러운 연인이 허리를 비틀면서 “거기, 응…….”하고 작게 속삭이는 소리를 가끔 들을 때마다 안달이 나서 고도의 볼이나 입술을 자꾸만 깨물게 되었다. 더 보채 달라고, 더 찔러 달라는 말을 내뱉도록 청사가 자진해서 고도의 탐닉을 거들어 줄 정도였다.

[여기 기분 좋지?]

청사가 수직으로 세운 물건을 고도의 안으로 밀어 넣어 찌르자 고도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됐다. 이젠 전희나 애무가 없어도 삽입만으로 바로 느끼게 된 것은 고도의 몸 안이 야해서일까, 청사의 기술이 그만큼 능숙해져서일까. 어느 쪽의 영향이 크건, 변화에 대한 적응력은 청사가 앞섰다. 고도가 아직도 삽입의 쾌감을 거리낌 없이 느끼기엔 망설임이 있는 반면, 청사는 고도가 망설일 시간조차 아까워하면서 제가 원하는 바를 요구하게 됐다.

[나 산수유 먹여 준다면서, 안 먹여 줄 건가.]

고도 대신 열매를 손바닥에 올려 준 청사가 긴 속눈썹을 흔들면서 웃었다.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성기가 느릿하게 가장 예민한 곳을 찌르는 덕에 고도는 색, 색 가쁜 숨을 내쉬었다. 청사의 행동이 얄미워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확 밀어내려 했지만 청사가 그런 고도의 손을 부드럽게 옭아매면서 열매 몇 알을 고도의 입술 안으로 밀어 넣었다. 혀 위를 굴러다니는 열매들이 고도의 잇새에서 터지기 전에 청사의 손이 고도의 뒤통수를 잡고 입을 맞췄다. 고도의 혀 위에 있던 열매를 자신의 입 안으로 빨아 당긴 청사가 다시 고도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고도는 열매와 함께 입 안으로 넘어온 청사의 혀 때문에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이 사이로 들어온 열매가 톡 터지면서 입 안 가득 시큼한 향이 번졌다. 과육을 맛보면서 고도의 입 안을 샅샅이 핥은 청사가 다시 고도의 허리를 잡았다. 고도가 반응하기도 전에 허리를 위아래로 직접 흔들었다. 찰싹, 살끼리 맞붙으면서 물살이 커졌다. 청사가 허리를 쥐고 위아래로 움직이는 탓에 고도는 강제적으로 몸속 깊은 곳에 삽입을 당해야만 했다.

“하아, 아, 너, 밥 먹을 생각이 애초에, 아, 응, 없었…… 아아.”

청사의 어깨를 쥔 채 고도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청사는 젖어서 몸에 달라붙은 고도의 가슴을 바라봤다. 옷 너머로 단단하게 솟은 유두가 보였다. 관계 중 붉어지는 얼굴만큼이나 맛스럽게 익는 유두 역시 홍조를 띠고 있었다. 억지로 아랫도리를 쑤셔 들어갔고 허리를 흔들도록 유도하는 일은 청사의 강제성이 다분했지만 고도는 이 강제적 행위에서도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허리를 흔들면서 쾌감을 받아들인 고도의 몸은 누가 봐도 이 관계를 탐닉하고 있었다.

조금 더 즐기면 좋겠다. 먼저 하고 싶다고 조르는 고도를 보고 싶다. 기분이 좋아서 허리가 뒤로 휘고, 청사의 목에 팔을 감고서 박자에 맞춰서 허리를 흔들고, 청사의 물건을 위와 아래로 오물오물 핥으면서 눈가를 붉히는 고도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욕심은 인간만 지녔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다르지 않구나.

청사는 시간이 지나도 고도를 원하는 욕심을 주체할 수 없어 갈증이 난 목 너머로 침만 꿀떡 삼켰다. 움직임에 속도가 붙으면서 찰박거리는 물의 파동이 거세졌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고도가 허리에 힘을 잘 주지 못하는 모습마저 안타까움보다는 귀엽고 사랑스러워 더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컸다.

“조그, 조금만 천천히…… 아앗.”

청사는 고도의 목과 얼굴을 한 손으로 감쌌다. 큰 손 안에 넉넉하게 잡히는 얇은 턱과 가느다란 목이 붉어져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사랑스러워서 얼굴과 목에 입술 자국을 잔뜩 남긴 청사가 몸을 빙글 돌렸다. 고도를 바위에 앉히고 그의 다리로 직접 허리를 감싸도록 만들었다.

“아, 아읏, 한무야.”

[하아, 아 미치겠구나, 고도.]

“아읏, 잠깐, 잠깐만.”

청사의 팔목을 쥔 고도가 당황하여 말했다. 엉덩이를 퍽퍽 쑤시는 성기는 이미 검붉게 부풀어 올라서 고도의 몸속을 출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심줄이 튀어나올 만큼 팽창한 성기는 짐승처럼 고도의 안쪽으로 쑤셔 박혔다. 고도의 불그스름한 속살까지 쫀득하게 잡아먹을 심산으로 몸 안의 가장 깊은 곳을 공격했다. 고도가 허리까지 뒤틀며 견디기 힘들어하는 쾌감의 지점이었다. 고도는 새빨개진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멈춰 보라니까…… 아읏, 아……!”

[하아, 읏, 여기서, 여기서 어떻게 멈춰.]

“뒤, 뒤에……! 아, 아아……!”

[흣, 여기? 여기가 더 좋다고?]

“그 뜻이 아니라……, 으응, 아, 으으응…….”

흐느끼는 고도는 허리가 짜릿하게 울리는 청사의 허릿짓에 속수무책이었다. 청사에게 몇 번이나 “뒤, 뒤를……”이라고 문장이 되지 못한 말을 내뱉었다. 청사는 고도의 허리를 끌어당겨 하체가 완벽하게 맞물리도록 자리 잡았다. 고도가 숨을 헐떡였다. 청사의 허리를 감은 새하얀 다리가 흔들리면서 발가락들이 곱아져 꼬옥 다물려 있는 모습이 고도가 어찌나 쾌감에 정신이 없는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뒤…… 아앗, 아……!!”

더 이상 참지 못한 고도가 목을 젖히면서 괴로워하는 사이에 고도의 성기가 폭발하듯 사정했다. 동시에 뒤가 수축하며 움츠러들기에 청사 역시 깊은 곳에 몸을 묻고 부르르, 떨었다. 고도의 몸 안을 뜨겁고 축축하게 적신 청사는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고도가 예민해진 몸을 움찔거리면서 숨을 골랐다. 탈력감에 바닥에 누워서 한 팔로 눈을 가리고 숨을 고르느라 흉곽이 도드라져 위아래로 크게 들썩였다. 어쩜 이리도 야하고 예쁠 수가 있는지. 청사는 그대로 고도의 다리를 다시 벌렸다. 눈을 가린 손을 치우면서 당황하는 고도에게 살살 웃어 보인 청사가 두 번째 관계를 연이어 가지려 할 때였다.

“하아…… 하……, 망할 용 같으니라고.”

느리게 내벽을 성기로 긁고 고스란히 연이어 몸을 섞으려던 청사를 고도가 확실한 손길로 밀어냈다.

“멈추라고…… 했잖느냐. 뒤를 보라는 그 말이 그렇게 들리지 않았느냐.”

청사는 제 어깨를 잡고 돌리는 고도에게 미간을 좁혀 보였다.

[뒤는 잘 풀어졌잖아.]

“내가…… 아니라 네 뒤를 보라고!”

[한 번만 더 하고.]

“발정 난 것도 아니고, 정말…… 아, 아읏.”

또다시 흔들리는 몸을 다잡지 못한 고도가 결국 청사의 어깨를 두 손으로 때리면서 다시 강하게 말했다.

“네, 네 등 뒤를 보라고……! 아……!”

대체 뭘 보라고 하는 건지. 청사는 고도에게 성기를 쑤셔 박으면서 슬쩍 등 뒤를 돌아봤다. 뿌연 연못에는 수증기만 자욱했다. 청사가 고도를 바닥에 뉘고 그 위에 올라타느라 둘의 젖은 옷을 타고 물기가 뚝뚝 연못 안으로 흘러내렸지만 연못 안을 몇 바퀴 돌아서 한가운데에 있는 알을 감고 있는 꼬리는 그대로였다. 아니, 다시 보니까 그대로가 아니다. 꼬리 바깥으로 알이 빠져나왔고,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알껍데기 겉면이 갈라지고 있었다.

청사의 눈이 세로로 더욱 수축됐다. 청사는 알이 왜 이 시기에 부화를 하려는 건지, 혹시 관계 중에 꼬리를 흔들어서 그 충격으로 알이 바위에 부딪힌 것이 아닌지, 알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웠다. 몸 안으로 파고든 이물감을 피하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허리를 뒤트는 고도가 저도 모르게 아래를 꽉 조였다.

[아.]

청사는 머릿속으로 떠올린 수많은 생각들이 단숨에 날아갔다. 알도 중요하지만 고도도 포기할 수 없었다. 도중에 그만둘 수 없을 만큼 흥분해서 청사는 몸을 더 빠르게 앞뒤로 흔들었다. 고도가 앓는 소리를 내면서 그 박자에 맞춰 움직였다. 완전히 몰입해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고도를 끌어안은 채 청사는 마지막으로 속도를 올렸다.

“아, 아으, 아, 응—……!”

헐떡이면서 숨을 억지로 삼켰다. 쥐어짜는 청사의 움직임에 고도는 그만두라느니, 멈추어 보라느니 하는 말을 더는 뱉지 못했다. 고도가 결국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단숨에 두 번째 사정을 유도당해서 사정한 내용물의 질감이나 색깔이 이전보다 연하고 양도 적었다. 고도는 완전히 진이 빠져서 털썩 바닥에 드러누웠고, 청사는 고도가 바닥에 눕기 전에 그의 몸 안에 사정을 마쳤다. 급박하게 속도를 올린 탓에 지치기는 청사도 마찬가지였던지라 고도의 몸 위에 풀썩 쓰러져서 숨을 골랐다. 귀에 닿는 청사의 숨결을 의식하던 고도가 청사의 등판을 짝하고 손바닥으로 힘껏 때렸다.

[아파!]

청사가 빽 소리를 높이자 고도가 야차처럼 부릅뜬 눈으로 청사를 노려봤다.

“내 분명히 그만하라고 했지.”

[윽, 그렇지만……!]

“이유 불문, 그만하라고 하면 우선 멈추어야지 왜 절제를 못하는 거야, 너 이녀석.”

[미, 미안해.]

“알. 어서 알을 가져와 봐.”

청사는 억지로 고도의 몸을 취한 죄책감이 들었기에 군말 없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꼬리로 감고 있던 알을 뭍으로 끌고 나왔다. 물살을 가르며 다가온 꼬리가 소중하게 감고 있던 알을 고도의 품 안에 안겨 주었다. 양손에 가득 담길 만한 크기의 알을 고도는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용의 덩치를 감안하자면 꽤 작은 크기의 알이었다. 인간으로 치면 열 달을 채우지 못하고 나온 미숙아의 개념과 비슷했다. 오랫동안 못에서 자라나 크기를 키워도 부족한 판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껍질이 깨어지면 문제가 있지 않을까.

“어떡하지, 한무. 죽은 거 아니냐.”

적잖이 당황한 고도가 품에 알을 안고 걱정스럽게 청사를 바라봤다. 관계의 후희나 탈력감에 몸을 맡길 새도 없이 바로 알을 살피는 고도의 표정이 진지했다. 청사는 젖은 머리를 뒤로 넘겨서 시야를 확보한 뒤 고도가 불안하게 안고 있는 알을 바라봤다. 껍질이 깨어져 금방이라도 파스스 부서질 것처럼 잔금이 간 상태였다. 이대로는 부화가 임박한 용이 아니라면 더는 알 속에서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알이 정말 자신의 부주의로 깨진 것일까. 기껏 고도가 고생을 하여 만들어 낸 정기가 청사의 한낱 욕심 때문에 모두 물거품이 될까 봐 철렁, 심장이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때였다.

[어?]

갈라진 껍질 안쪽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청사는 못을 휘감고 있던 꼬리를 단숨에 몸 안으로 갈무리하고 고도의 앞에 앉았다. 고도는 걱정스레 바라보던 알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을 느끼고는 청사를 바라봤다.

“벌써 부화하려는 거야?”

[부화하는 건가?]

“네놈도 모르면 누구한테 물으라고?”

[내가 어찌 아냐, 그걸.]

“이건 네가 안고 있어.”

[아니, 못 한다.]

“네 새끼를 무서워하면 어떡해.”

[네가 품은 새끼야.]

“네가 안아야지.”

[그, 그치만!]

“한무.”

[나, 나도 몰라, 이런 거!]

“같은 용이 무서워하면 인간인 나는 어쩌라고.”

아무 지식도 없는 상황에서 어린 용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에 고도와 청사 모두 우왕좌왕이었다. 세상을 춥게 느끼면 어떻게 하냐면서 알을 들고 못 속으로 들어간 고도와 그런 고도를 따라서 물속에 앉은 청사는 부화하는 알에게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갈라진 알 속에서 움직이는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고도의 집게손가락보다 작은 팔이 보였다. 아주 가느다랗고 연약한 피부를 가졌는데 네 개의 발톱을 동그랗게 말아 쥐었다가 펴면서 꼬무작거렸다. 청사처럼 단단한 비늘을 가진 교룡은 아니었다. 먹구렁이처럼 검은 피막이 피부를 구성하고 있는 용이었다.

용은 두 팔로 힘겹게 알껍데기를 깼다. 팔보다는 조금 더 큰 넓적다리를 내밀었다. 팔처럼 네 개의 자그마한 발가락과 발톱이 달려 있었다. 그 밑의 엉치뼈로부터 기다랗고 통통한 꼬리가 나왔다. 껍질을 조각내며 힘겹게 팔과 다리, 꼬리를 꺼냈던 새끼용이 곧 무거운 머리 위의 세상을 깨고 고개를 내밀었다. 물속에 몸이 잠겨 머리만 반쯤 내놓고 있는 용은 쪼글쪼글한 피부를 가졌고, 눈도 뜨지 못한 상태였다. 새처럼 삐이익, 가느다란 울음을 토한 용은 도롱뇽처럼 앞으로 툭 튀어나온 넓은 입 밖으로 이빨도 나지 않은 붉은 혀를 날름거렸다.

새끼용은 천천히 찌푸린 눈을 떴다. 커다랗고 까만 눈동자를 가진 용은 물속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신을 잡고 있는 고도와 처음으로 시선을 맞췄다. 뱀과 도롱뇽을 합쳐 놓은 듯한 이상한 모습을 가진 새끼용이었다. 고도는 새끼 용과 청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무야.”

이제 뭘 하면 되는 거지. 이 새끼 용한테 먹을 것을 구해다 줘야 하는 걸까.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고도는 아까부터 식은땀까지 흘리며 어린 용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몸을 전부 펼쳐 봤자 고도의 두 손바닥만 한 아이였다. 아이는 물속에서 고도만 빤히 바라보다가 고도의 가슴팍에 양팔을 벌려 덥썩, 옷을 붙잡고 매달렸다.

어린용이 옷에 납작 달라붙어서 기어 올라오더니 고도의 목과 어깨에 자리를 잡았다. 고도의 목을 중심으로 몸을 동그랗게 만 새끼 용은 고도의 목에 고개를 묻고 다시 눈을 감았다. 새액, 색, 인간의 호흡보다는 빠른 속도로 숨을 내쉬다가 그대로 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처음 본 자신을 어미로 인식했는지 네 개뿐인 발톱을 세워 고도의 옷을 꽉 움켜쥐고 한 치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고도는 심각한 표정으로 새끼 용을 바라보는 청사에게 쉬이 말을 걸지 못했다. 고도의 어깨에 매달린 용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청사의 표정이 근래에 본 얼굴 중 가장 심각했다. 역시 외형이 조금 남다르다 싶었는데 알 속에 있던 기간이 짧아서 미숙아나 장애를 갖고 태어난 걸까. 고도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청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문제 있는 거지, 그렇지?”

청사는 고도에게 대답하는 대신에, 알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에 풀어 놓았던 자신의 기운을 갈무리했다. 달과 풀이 스스로 고개를 숙이던 하늘의 정기를 더 이상 방출하지 않자 청사를 향해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산이 그제야 깊은 안도를 표하며 몸을 웅크렸다. 능선을 따라 핀 상고대가 곁가지를 오므리면서 잔잔해졌다. 청사에게 산맥 하나가 잘리고도 그 어떤 해코지도 못하는 산이었기에, 청사가 하늘의 기운을 갈무리한 것만으로도 매우 감사하다는 느낌이었다. 힘을 되돌린 청사는 살갗 곳곳에 번져 있던 비늘이 사라지고 길게 자랐던 머리가 허리까지 짧아졌으며, 커다란 용의 앞발과 뒷발이 사라져 인간의 형태로 되돌아왔다.

청사의 모습이 교미를 운운하던 모습 이전의, 고도가 익히 알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여인의 섬섬옥수 같은 손을 내밀어 고도의 어깨에서 잠이 든 새끼용을 매만졌다. 청사의 손이 잡아 올린 것은 작은 날개였다. 등허리에 붙어 있는 피막 같은 날개 끝에는 두 개의 갈고리 발톱이 달려 있었다. 날개는 박쥐처럼 얇았다. 날개를 억지로 잡아 펴자 쭈글쭈글한 안쪽 피막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겉날개와 달리, 속 날개엔 흰점이 곳곳에 수 놓여 있었다. 점박무늬 피막이었다. 고도는 기시감이 들었다. 하얀 점이 유별난 검은 날개가 마치 한밤중에 찾아온 아리아들을 떠올리게 했다.

“혹, 내 잘못으로 새끼에게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땅의 주인으로부터 대리 자격을 받을 때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다. 청사에게도 미처 말하지 못한 사실이 있다. 땅의 주인과 직접 소통한 일. 땅의 큰 뜻을 인간이 헤아릴 수는 없으나, 그의 뜻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청사에게 분명히 설명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아리아와 땅의 주인, 그 둘과 얽힌 영향으로 새끼 용이 가져서는 안 될 것을 갖고 태어났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고도의 잘못이었다. 새끼 용에게 문제가 있으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책임을 지겠노라. 그리 다짐할 때 청사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응룡이다.”

응룡이라 함은 날개가 달린 용을 말할지니. 고도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대꾸했다.

“장애가 생긴 건가.”

“이건 장애와는 비교가 될 수 없는 사안인데.”

“그렇게 심각한 문제란 말이지. 미안해, 내가 미처 말 못 했는데 아리아가 내가 알을 잉태했을 때 뱃속으로 들어와서…….”

“아니, 고도.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다.”

청사는 날개를 활짝 펼쳐서 그 크기가 새끼 용을 덮고도 남을 만큼 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몸과 연결된 관절과 근육이 지금은 연약하지만 앞으로 튼튼하게 자랄 여지가 다분했다. 이 정도면 장식으로 날개를 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훗날 비행에 필요한 역할을 능히 할 수 있을 정도다.

“현생하는 용 중 날개가 있는 이는 내 부친이 유일하다.”

청사는 이 상황을 아직 인지하지 못하는 고도를 바라봤다. 용의 태생에 대해서는 인간인 고도가 잘 알지 못했다. 이 일을 길조인지 흉조인지, 어떤 방향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몰라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청사는 그런 고도의 표정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속삭였다.

“한동안 조용히 지냈는데 제법 떠들썩해지겠구나. 괜찮겠느냐, 고도.”

“대체 무슨 일인지 얘기 좀 해줘.”

“내 선택 사항이 늘어났다는 의미다.”

“선택 사항? 넌 네 아이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하다니.”

“용족에게 아이는 그저 후계일 뿐, 인간처럼 애정과 내리사랑으로 보살펴야 하는 존재가 아니란다.”

“매정하네.”

“나 또한 그렇게 컸지. 매정이 아니라 용의 습성인 것이다.”

“그래서 이 아이를 어쩌려고. 날개 달린 것이 그리도 기괴한 것이라면 내가 뭔갈 해보겠다.”

“글쎄.”

“한무야.”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줘. 머릿속이 정리되면 모든 걸 말해 줄게.”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는 고도를 보면서 청사는 생긋 웃었다. 의미를 모르는 고도는 길조인지 흉조인지를 대답하라 보챘으나 청사는 제 생각에 푹 빠져 있느라 대답을 하지 않았다. 불안해하는 고도의 감정을 읽은 새끼 용이 미간을 찌푸리며 칭얼거렸다. 걱정과 불안이 섞인 침묵은 참으로 기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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