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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 고도의 눈꺼풀 안에서 불똥이 튀었다. 고도는 어둠 속에서 터진 밝은 빛을 느끼고 눈을 떴다. 구름 너머로 달도 숨은 어두운 새벽, 손과 머리카락에 묻은 빛이 파랗게 제 존재를 과시했다. 이불 속에서 손을 꺼낸 고도는 손목과 소맷부리에 묻은 빛 가루를 보고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빛은 창호지 너머에서 은은하게 비치는 달빛보다 밝았다. 고도는 가볍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손끝을 따라 만들어진 바람이 빛 가루를 날려버렸으나 다시 달라와 붙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손가락에 감기는 빛을 보던 고도가 슬며시 옆에서 자고 있는 청사에게 눈길을 돌렸다. 고도가 깬 사실도 모른 채 새액새액 자고 있는 청사의 얼굴이 고왔다. 달게 자고 있는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았기에 고도는 말없이 손끝을 움직여 도술을 펼쳤다.
고도의 손끝을 타고 나온 그림자가 고도를 감쌌다. 그의 몸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방 안에서 마당으로 옮겨졌다. 고도는 옷자락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몸을 일으켰다. 소리 없이 장소를 이동하는 도술을 쓴 고도에게 빛들이 몰려들었다.
‘그분!’
‘그분이야!’
‘그분 맞아!’
사방에서 몰려든 빛이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빛이 제 목숨을 위협하는 기색까진 없어도 밤잠을 괴롭히며 끈덕지게 구는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착이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들의 제멋대로인 행동을 더는 자비롭게 넘어가 주지 않기로 했다. 고도는 전에 없이 차가운 말투로 빛에게 경고했다.
“집착도 이정도면 병증 아니냐. 내게 할 말이 있으면 땅의 주인이 직접 오라 해라.”
고도가 손을 휘둘렀다. 고도의 손길을 따라 바람이 날카롭게 갈라졌다. 휘몰아친 바람을 따라 빛이 하늘로 솟구쳐 날렸지만, 흩어진 빛이 다시 고도를 따라왔다.
‘가자, 가자, 가자, 가자.’
이성이 없는 존재들이라 한번 정한 바를 이루기 전까진 뜻을 꺾지 않는 모양이다. 빛의 행동은 오로지 고도를 땅의 주인에게 데려가는 데에 초점이 맞춰진 상태라 고도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았다. 고도는 자신의 몸에 달라붙는 빛을 피해 몸을 숙였다. 검은 두루마기에 묻은 빛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고도의 손을 따라 만들어진 바람이 품이 넓은 검은 두루마기와 소매를 휘날렸다. 펄럭이는 옷과 머리카락 사이로 고도의 검은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하품만 손바닥에 뱉어 내던 나른한 눈빛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전성기 때 그 어떤 도사도 따라오지 못하는 도술의 경지에 이르는 자였다. 명계와 청호림 신선들이 각별하게 관심을 가졌던 능력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저를 귀찮게 하는 빌어먹을 땅의 주인을 억지로라도 깨울 수 있을 만큼 도력을 방출할 능력이 있었다.
고도는 오른발로 땅을 짚었다. 발바닥이 가볍게 땅을 밀어내는 순간, 청사와 함께 누워 있던 초가집이 등 뒤로 멀어졌다. 축지법을 이용해 달리는 고도가 왼발로 허공을 짚으면 집은 십 리 밖으로 멀어졌고, 다시 오른발을 내딛는 순간 이십 리 밖으로 달아났다. 사방이 산골짜기로 변했다. 깊은 계곡에 닿기까진 눈 깜빡할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고도의 축지법을 쫓아올 존재는 세상에 많지 않았다. 도깨비의 왕도, 요괴들의 우두머리도 숨을 헐레벌떡 하며 간신히 쫓아오는 게 전부였다.
‘가자, 가자, 가자, 가자!’
놀라운 일이었다. 빛은 축지법을 쓰는 고도를 쫓아왔다. 아슬아슬하게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려 할 때마다 고도가 바람을 일으키고 축지를 이용해 높은 나무 꼭대기에 외발로 서기도 하지만 거리는 좀처럼 벌어지지 않았다. 마치 빛에게만 시간과 공간적인 제약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 땅 어디로 몸을 옮긴다 해도 빛은 물리적인 개념을 무시하고 뒤따라올 것으로 보였다.
도법이 통하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라니. 고도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너른 뜰이 펼쳐진 산등성이에 멈추어 섰다. 빛이 와르르 쏟아져 달려왔다. 고도는 재빠르게 몸을 숙여 양손과 맨발로 땅을 짚었다. 짐승처럼 낮게 몸을 숙이는 고도 주변으로 8괘의 진이 펼쳐졌다. 역을 구성하는 64괘의 문자가 육합인 하늘과 땅을 그렸다. 문자들이 사방으로 펼쳐지기 무섭게 괘의 중심인 건, 태, 이, 진, 손, 감, 간, 곤의 힘이 주술진처럼 고도를 감쌌다. 주술진이 강한 도력을 방출할수록 새까만 눈이 금빛으로 일렁였다.
‘꺄아악.’
빛이 비명을 질렀다. 한때 부적을 이용해서 자신의 주체하지 못한 힘을 억누르던 고도였다. 그가 부적의 방해도 없이 도술을 전개하면 지상의 모든 존재가 놀라곤 했다. 땅과 하늘이 우르릉, 흔들렸다. 산 주인인 호랑이가 낮은 사자후를 지르고, 산 호랑이와 대립했던 늑대는 무리를 지어 고도가 서 있는 산등성이의 반대편으로 달아났다. 앙상한 편백나무가 뿌리째 뽑힐 것처럼 흔들리는가 하면 달빛마저 기울어져 고도를 피해 지상을 비추었다. 고도는 금색으로 변한 눈으로 자신에게 곧장 달려들지 못하고 망설이는 빛무리를 노려보았다.
“내가 마지막 친절을 베풀어주며 다시 말한다. 땅의 주인을 직접 데려 와라. 나는 이 산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노기를 띤 고도의 목소리는 이 땅의 지배자인 양 장엄했다. 작은 체구에서 풍기는 기백으로는 믿지 못할 만큼 큰 기운이었다. 빛의 소란이 커졌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대리 주인이 본래 주인의 뜻을 거스르는 거야?’
빛의 소란은 웅웅거리는 메아리처럼 산을 가득 채웠다. 빛이 고도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물러설 기미도 보이지 않자 고도 역시 더 이상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고도는 오른쪽 발을 들었다가 다시 땅을 짚었다. 그의 오른쪽 발이 쿵, 지상을 울리자 맞닿은 지면을 따라 금빛의 팔진도가 펼쳐졌다. 구궁 9합의 진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고도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9합진 속 팔진도가 산등성이를 전부 메울 만큼 넓게 펼쳐졌다.
9합진과 팔진도는 속박의 주술 중 궁극의 힘을 가진 도법이다. 어깨너머로 도법을 공부한 도사라면 인간이나 요괴 등의 생명체를 속박할 수 있고, 실력이 좋으면 귀신이나 망령 등 형체가 없는 혼령을 잡아 둘 수도 있다. 고도가 펼치는 속박술은 망령과 혼을 붙잡는 기술보다 상위의 개념이었다. 그것은 빛과 바람을 가둘 수 있고, 기운과 향기와 온기마저 막아 둘 수 있다. 형태가 없는 것을 힘으로 묶어 둘 수 있다는 사실에 빛들은 소란해졌다.
‘갇혔어!’
‘움직일 수가 없어!’
주술진 속에서 방황하는 빛이 요란스럽게 울었다. 고도는 호박색 눈동자를 깜빡이면서 오도 가도 못하고 진 속에 매여 있는 빛을 바라봤다. 깊은 산에서 잠을 자던 요괴와 귀신들조차 멀리 도망간 지금, 이 산등성이에서 느낄 수 있는 존재는 빛이 전부였다. 죄 없는 생명체들이 애꿎게 얽힐 일이 없다. 고도는 마음 놓고 빛무리를 위협했다.
“그러게 자꾸 괴롭히면 쓰나. 내가 아무리 친절하고 착한 인간이라도, ‘적당히’ 해야 같이 즐기지.”
‘안 돼, 그럴 수 없어!’
“나도 안 돼. 안 따라갈 거야.”
‘어째서?’
‘하늘 때문에?’
‘하늘이 방해해!’
고집 부리긴. 고도는 손을 부드럽게 휘저었다. 진의 구궁에서 휴문과 생문이 닫혔다. 나머지 일곱 개의 문이 닫히면 진은 완전히 봉합된다. 봉합된 진을 소멸하면 그 안에 갇힌 빛의 무리 또한 원래 이 세상에 없었던 존재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아, 안 되는데!’
팔진도의 문이 하나 더 닫히자 당황하는 기색이 커졌다. 어찌 한낱 인간이 그보다 높고 초월적인 존재를 힘으로 가둘 수 있는지 모두들 알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고도는 왼쪽 발로 가볍게 땅을 찼다. 상문과 두문, 경문이 한꺼번에 닫혔다. 무자비한 고도의 반응에 빛은 시간을 지체하지 못했다. 이제 팔진도가 봉합되기 까지 세 개의 모서리만 남았다. 고도가 나머지 세 개의 문을 닫아 버리면 빛은 소멸하게 된다. 결국 빛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주인이 힘을 잃었어. 힘을 보충하려고 아주 깊은 잠에 빠졌어.’
‘주인을 데려오지 못해.’
‘깊이 자니까, 네가 가야 해.’
‘주인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할 사람이 필요해.’
‘네가 대리 주인이야.’
앞뒤의 아귀가 틀어 맞지 않는 이야기에 고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말이 다르구나. 나보고 땅의 주인을 직접 만나러 가자면서 자고 있다면 내가 만날 필요가 있나.”
‘맞아, 가도 주인은 깨어나지 않을 거야.’
“그럼 무엇을 위해서 내가 만나러 가는 게냐.”
‘깨지 않아도 주인의 뜻을 알 수 있어. 네가 대리 주인인 그분이니까.’
이게 다 무슨 헛소리야. 잠을 자고 있는 땅과 내가 교감할 방법이 있다는 소린가. 고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은 상황을 설명할 이성이 없고, 궁금증이 풀릴 만큼 결정적인 단서가 담긴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이는 땅을 주인으로 모시는 그들조차 정확한 땅의 뜻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 봐야 했다. 명확하게 땅의 뜻을 알고 있다면 이렇게 막무가내로 자신보고 가자며 잡아끌지도 않았을 테지. 상황이 급박해서 빛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 여겼다. 예전의 고도였다면 호기심이 동했으리라. 히죽 웃으며 빛을 쫓아갔겠다만 이제는 과거와 같지 않았다.
“일 없다. 돌아가라.”
고도는 묶었던 8진도의 여덟 개 모서리를 풀었다. 진 속에 갇혀 있던 빛이 비처럼 후두둑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고도는 흥미를 잃은 얼굴로 몸을 돌렸다. 이 정도로 단호하게 싫다고 말하면 귀신이든, 요괴든, 인간이든 체념하고 돌아서야 정상이거늘. 상대가 이성이 없는 빛인 게 문제일 줄은 사건이 터진 후에 깨달았다.
‘가자, 가자, 가자, 가자!’
빛이 고도의 눈앞에서 폭발하듯 발광했다. 태양을 육안으로 본 것처럼 망막 너머에서 끔찍한 통증이 번졌다.
“윽.”
고도는 예상치 못한 빛의 공격에 시야를 잃고 비틀거렸다. 두 손으로 눈을 막았지만 망막에 달라붙어 하얗게 타오르는 불길을 잡을 수 없었다. 앞을 구분할 수 없는 눈부심 속에서 고도는 빛이 자신을 허공으로 띄우는 힘을 느꼈다. 재빨리 손을 뻗었다. 시야를 잃었다고 당황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끌려갈 만큼 어수룩하지 않았다. 고도는 재빠르게 투시력을 발휘했다. 하얗게 변한 눈꺼풀 너머로 산등성이와 말라붙은 초목, 자신을 감싼 빛의 존재가 먹물처럼 번지듯 나타났다.
고도는 바람 위에 몸을 실었다. 빛이 고도를 완전히 감싸기 전에 바람을 밟고 산 밑으로 미끄러지듯 달려 내려갔다. 축지법을 써도 그들을 따돌릴 수 없다는 걸 이미 확인했기에 멀리 도망가지 않았다. 고도는 민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땅을 주인으로 모시는 빛은 신령한 힘을 갖고 있으므로, 인간들이 사는 곳으로 가면 힘을 잃을 가능성이 컸다. 신성하지 않은 땅은 그들에게 오염된 곳이나 다름없으니, 민가로 가서 빛의 힘을 약하게 만든 뒤에 완전히 소멸해 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가자, 가자, 가자, 가자!’
무서운 기세로 따라붙는 빛을 피해서 민가의 중심으로 달렸다. 민가의 입구를 통과하자 예상대로 빛무리의 움직임이 더뎌졌다. 작은 촌마을의 입구에서 주술 걸린 신령수와 정승을 발견한 고도는 바람에서 뛰어내려 두 발로 땅을 밟았다. 늦은 밤이기에 민가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사내들이 모여서 활을 쏘고 노는 공터에 도착하자마자 고도가 왼쪽 발을 들어 바닥에 찍었다. 흙이 묻은 맨발을 따라 뜨거운 바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어서 양손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오른손으로 하늘을 그리고 왼손으로 땅을 표했다. 뜨거운 바람과 차가운 공기를 한데 모아 인의 주지를 조절했다.
한 번에 잡아서 없애 주마.
고도가 주술을 소리 내어 말했다.
“원수 백천만 귀신은 욕사지귀야아 불욕사지귀야아 욕사지귀는 당아하고 불욕사지귀는 피아할지니― .***”
검붉은 응어리가 고도의 외피를 뒤덮었다. 옷과 피부에 달라붙은 형상들이 아가리를 벌리는 짐승처럼 위협적으로 움직였다. 꿈틀거리며 고도를 휘감는 것은 짐승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었다. 진흙탕처럼 뒤섞인 검은 소용돌이 속에서 얼굴을 닮은 것들이 수십 개나 튀어나왔다. 그슨대처럼 주변 어둠을 삼키며 순식간에 몸집을 키웠다. 달려드는 빛을 향해 고도의 등에 타고 있는 어둠이 위아래로 입을 찢기 직전이었다.
“몽당?”
인을 그리며 주술을 외던 고도가 고개를 돌렸다. 한 어염집 아낙네 쌀독에 빠져서 장난을 치던 몽당 빗자루 도깨비가 고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에 탄 끈적한 어둠이 빛을 공격하려다 말고 가까운 곳에 있는 몽당 도깨비를 집어삼키려고 움직였다. 고도는 황급히 인을 풀어 반대의 주술을 외웠다. 도깨비를 향해 달려 나가던 어둠이 비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어둠이 땅속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왜 하필 음과 양, 밝음과 어둠의 대척된 기운을 몸에 품을 때 도깨비가 근처에 있단 말인가. 자칫 인의 주술에 휩쓸리면 도깨비의 혼까지 퇴마가 돼버릴 수 있는 도술이었다.
“몽당아.”
고도는 전개하던 모든 술수를 풀고 몽당에게 향했다. 민가의 입구에 선 장승을 통과하면서 빛의 무리는 그 움직임이 현저히 느려졌으나 여전히 신이한 힘을 뿌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붙잡는 손길을 간발의 차이로 피한 고도는 몽당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고도의 손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몽당은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면서 빛을 피해 도망치는 고도를 바라봤다. 이게 무슨 술래잡기라 생각하는지 까르륵,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철없는 어린아이 모습이었다. 재빠르게 축지를 펼쳐 골목 사이를 달리자 빛무리가 우왕좌왕하며 그런 고도를 뒤쫓느라 정신이 없었다. 초가지붕 위를 풀쩍 뛰어넘고 장독대를 발판 삼아 담벼락을 넘나드는 고도는 빛의 놀라운 집착에 조금 질린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런 철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모, 몽당.”
“알았다, 혼내지 않으마. 그럴 시간도 없고. 그 대신에 음, 부탁 하나만 하자.”
고도는 비로소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아직도 눈앞이 뿌예서 사물의 구분이 명확하진 않았지만 실명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청사에게 가서 이 상황을 전해 주지 않겠느냐.”
“몽당?”
“나 혼자 감당하다가 민가까지 피해를 입힐 것 같다. 도저히 정도를 모르는 것들이라 도움 좀 받았으면 하는데. 내 말뜻을 알겠느냐.”
“몽당 몽당!”
“물론이다. 이 마을도 무사해야지. 근처 산으로 토끼몰이를 할 터이니 내가 해결하지 못하면 청사가 뒤처리를 해달라고 전해 주거라.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몽다아아앙!”
주먹을 불끈 쥐는 조그만 도깨비가 기특했다. 고도는 씨익 웃으면서 산속 움막이 있는 방향으로 몽당이를 힘껏 던졌다. 산 중턱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몽당이의 비명 소리를 뒤로했다. 고도는 우물을 밟고 섰다. 몽당 때문에 멈추었던 음양 인법을 다시 전개했다. 쫓아오던 빛무리가 투명하게 만들어진 눈앞의 결계를 뚫지 못하고 고도 뒤로 날아가 버렸다. 고도는 몸을 돌려 다시 양손을 물결치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고도에게 달려들던 빛무리는 또다시 고도가 만들어 낸 결계에 막혀 고도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결계 밖에서 빠르게 휘저어 날아다녔다. 고도에게 닿질 못한 빛은 결계에 달라붙었다. 마치 양손으로 잡고 흔드는 것처럼 결계가 크게 휘청였다.
‘고집쟁이!’
‘같이 가는 게 뭐 그렇게 어렵다고!’
지성이 없는 존재에게 꾸지람을 듣다니. 오래 살면 못 볼 꼴을 많이 본다던데. 고도는 어쩐지 제 자신이 측은해졌다.
“이것들이 누구한테 고집불통이라 말하는 건지, 원. 이정도 집착이면 병증이래도.”
‘대리 주인이면서!’
‘대리 주인이 본 주인을 만나기 싫어하다니!’
‘이 영광을 모르다니!’
“시끄럽다, 이 먼지터럭같은 놈들. 더 이상 귀찮게 하면 정말로 소멸시켜 버린다.”
‘꺄아아악.’
고도의 힘을 이미 경험한 빛무리는 소멸이란 말에 도망을 쳤다가 다시 나타났다.
‘공격 안 할게.’
‘너도 공격하지 마.’
빛무리는 고도가 더 이상 도망가지 않길 바랐다. 고도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타협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빛이 먼저 저를 집착하며 못살게 굴지 않았을 것이다. 고개를 옆으로 숙였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금안이 말갛게 빛났다. 빛이 억지로 끌고 가려는 걸 그만두었다고는 하지만 고도는 결계를 풀지 않았다. 괜히 마음을 놓고 도술을 거두었다가 전처럼 빛에 눈이 머는 경험은 사양이었다. 지성과 이성이 없는 빛이라지만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자신을 잡아 가는지에 대해서는 꽤 명확하게 아는 듯했으니 말이다.
“땅의 주인이 뭔지를 정확하게 말해.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 정체불명의 이상한 놈을 직접 찾아갈 생각 없어. 너희들이 아무리 억지로 잡아 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쑥덕거리면서 고도의 똥고집에 불만을 토하던 빛들이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고도는 제 눈처럼 호박색으로 빛나는 군집을 빤히 응시했다. 모여든 빛은 박쥐의 날개 같은 형상을 띄었다. 두 개의 손바닥을 포개어 놓은 것처럼 얇은 피막이었다. 흰점이 곳곳에 수놓인 모습이었다. 실제 짐승의 날개에선 보기 힘든, 점박무늬 피막이었다. 빛이 고르게 퍼지지 못하고 몇 군데에 응집하면서 한쪽은 환한 점이, 다른 한쪽은 상대적으로 어둡게 보이느라 그런 듯 했다. 하지만 날개만 구분이 될 뿐, 몸체의 형상은 흐릿해서 진정 박쥐의 형상이 맞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날개 두 장만 박쥐처럼 생겼고 얇은 피막 끝에 갈고리 같은 발이 달려 있으니 요괴처럼도 보였다.
‘우리는 그분을 따르기 위해 보내진 존재.’
‘명명자인 인간은 우릴 아리아라고 불러.’
아리아. 그 말에 고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리아는 엄숙하고 신령한 존재다. 대다수가 성수나 고귀한 땅에 붙어서 노래를 부르는 이들인데, 주로 맑고 깨끗한 숲에 살아서 수피아라고도 불렸다. 이들이 인간인 자신을 쫓아다니는 것도 놀라울진대, 자신을 데리고 가고 싶어서 안달을 낸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늙으니 별의별 꼴을 다 보네.”
기린이나 해태 주변에서 반짝거리며 별빛을 뿌리는 아리아가 인간인 자신에게 속해 있다니. 고도는 허탈한 웃음을 뱉었다. 아리아들은 숙덕거리면서 이어지지 않는 문장으로 저마다 한마디씩 하느라 바빴다.
‘아리아를 뭐라 설명할 수 있지.’
‘그게 뭔지 우리도 몰라.’
‘명명자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리 알 뿐.’
‘이름을 중요시하는 건 인간들의 특성, 우리는 달라. 우리는 뭐라 불리든 상관없어.’
‘그분을 도울 수만 있으면 돼. 그분과 함께 주인의 뜻을 이룰 수 있으면 돼.’
뭘 돕겠다는 걸까. 고도는 말을 할수록 그들의 사고방식을 헤아리길 포기했다.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떠드는데 귀를 기울이지 않고 뒷머리만 긁적였다. 없애 보려고 노력을 할까, 아니면 청사가 올 때까지 버텨 볼까. 갈등하면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왜 자신에게 이런 피곤한 일이 생겼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른 존재와 나를 헷갈려서 귀찮게 하는 건 아니겠지.”
빛은 그 말에 박쥐 날개를 파드득 떨었다.
‘틀림없어.’
‘네가 그분이야.’
‘너를 데리고 가야 해.’
대체 뭘 믿고 땅의 대리 주인이라 하는 걸까. 저희도 아는 바가 없으면서 고집을 부리다니. 고도는 슬슬 화가 나서 눈을 매섭게 뜨고 말했다.
“나는 그저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져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하찮은 인간이다. 나처럼 속세에 찌든 인간이 신령한 땅의 주인이라 말하니,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어. 차라리 성수인 기린에게 가서 빌붙어라. 나보다 훨씬 신령한 존재다.”
결계로 만들어 둔 인법을 펼쳐 빛을 공격하려 하자 아리아가 날개를 흔들었다.
‘너는 주인을 뭐라 생각해?’
땅의 주인을 묻는 것이라면 고도는 할 말이 없다.
“내가 알 수가 있나. 너네 주인을 왜 나한테 묻느냐.”
‘괘씸해!’
‘맞아, 네가 주인의 믿음을 받고 있는데 왜 그걸 몰라.’
뭔 개소리지. 고도는 뜬구름을 잡는 대화에 지치기 시작했다. 지성이 없는 것들과의 대화는 굉장히 피곤했다.
“나처럼 지은 죄가 많은 사람이 무슨 땅의 믿음을 받는단 거야. 아무리 말을 해도 끝이 없네. 무식한 먼지터럭들, 헛소리 작작 안 하면 정말 없애 버린다.”
‘아냐, 맞아!’
‘전 주인이 직접 인정한 대리 주인!’
‘하늘과 다시 이어지길 바라며 너를 그분으로 지목하고 대리 주인으로 임명했어.’
“거, 참,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야. 왜 하필 난데.”
‘하늘의 사랑을 받으니까.’
‘하늘의 권속에 속한 유일한 땅의 존재이니까.’
성의 없이 빛의 이야기를 듣던 고도의 표정이 처음으로 진지해졌다. 고도는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금빛 눈동자를 움직여 빛의 날개를 바라봤다. 처음으로 아리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하늘의 권속이 만약 청사라면 청사와 정을 나누고 있는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청사와의 사랑은 지극히 사적인 감정 표현이다. 이를 땅의 주인이 간섭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청사를 사랑하는 건 사적인 감정일 뿐. 땅의 주인이 관여할 만큼 큰 대의가 엮여 있지 않아.”
고도의 반응은 차가웠다. 청사를 좋아하는 마음을 땅이 관여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청사를 좋아하는 마음엔 그리 큰 의미가 없다. 청사와 좋아하는 사이가 된 것에 의미를 부여할 생각도 없다. 사랑이 그리 거창한 것이었다면 시작도 못 했을 것이다. 일상적이고 아름답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음이 간 감정이다. 땅의 대업을 엮고 싶지 않았다.
‘큰 뜻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숨어 있어. 그걸 주인은 알고 있어.’
‘네가 모르는 거야.’
‘네가 알도록 우리가 도와줄게.’
청사와 마음이 통하는 일을 땅이 신경 쓸 바가 없다고 말하려는 순간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결계를 통과한 바람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심상치 않은 힘이었다. 고도는 빛의 날개를 담고 있던 금색 눈동자를 등 뒤로 돌렸다. 제일 먼저 본 것은 너른 하늘 위로 길게 똬리를 튼 검은 그림자였다. 그림자의 움직임 하나에 산세가 울었다. 우르릉, 땅의 묵직한 진동이 전해지면서 잠을 자고 있던 멧새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새까만 새 떼의 비상 너머로 달보다 더 크고 아름답게 빛나는 청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정확하게 고도를 향했다. 그 검은 골짜기 같은 동공 너머로 새파란 보석 같은 홍채가 수축했다. 분노를 담은 시선을 느낀 고도는 온몸을 저릿하게 울리는 기백에 눈을 홉떴다.
살면서 몇 번 느껴 본 적 없는 힘이었다. 고도가 자신이 결코 이길 수 없다고 본능적으로 판단하게 만드는 살기였다. 파란 눈 너머에서 일렁이는 노기와 그 노기가 찌를 듯한 칼날이 되어 쏟아지는 감각의 홍수에 고도는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청사?”
하늘을 전부 덮을 정도로 거대한 용이 산등성이 너머에서 몸을 일으켰다. 100장이 넘는 길고 거대한 몸이 지진을 만들었다. 꼬리는 산등성이를 휘감았다. 달빛에 반짝이는 검은색 비늘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물결처럼 파도쳤다. 그 긴 몸에 갈고리처럼 자라난 앞발이 산등성이를 움켜쥐자 나무와 바위가 통째로 부서져 먼지처럼 휘날렸다. 뒷발을 반대편 산등성이에 올릴 땐 한참이나 먼 거리에서 울린 쿵—하는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도 안 돼.”
고도는 진심으로 놀랐다. 청사가 언제 저렇게 위엄 있는 용이 되었는가. 처음 목격했다. 고도가 마지막으로 본 청사는 삼십 장을 간신히 넘었고 자신을 등에 태울 수 있을 만큼 크지 않은 용이었다. 이제는 그의 등에 타면 미끄러질 크기다. 손바닥 위에도 넉넉하게 드러누울 수 있는 면적 아닌가. 청사는 맨발로 결계 속에 서 있는 고도를 보고 눈동자가 신경질적으로 곤두섰다. 청사의 비늘이 뻣뻣하게 서면서 눈이 섞인 비바람이 몰아쳤다. 단숨에 눈비구름을 몰고 와서 계절을 부리는 청사의 능력에 고도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한 하늘까지 거대한 먹구름을 만들어 내는 용의 능력을 직접 보고 헛숨만 들이켰다. 빛무리가 회오리에 휩쓸려 날아가면서 기다란 비명이 울렸다. 고도가 청사의 본모습에 놀라서 방심한 사이에 바람을 견디지 못한 결계가 유리알처럼 부서졌다. 부서진 결계 조각들이 빛무리와 한데 뒤섞여 위로 솟구쳤다. 하지만 빛무리 중 일부가 고도에게 달라붙었고, 이들은 고도의 살갗을 파고들어 몸속으로 들어왔다. 고도는 피부에서 발하는 빛을 보고 금색 눈을 심각하게 굴렸지만 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청사가 산등성이를 앞발로 우지끈, 부숴 버리면서 땅을 향해 경고했기 때문이다.
[한 번만 더 고도를 멋대로 다루려 하면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 어떤 땅과 하늘의 규율을 어겨서라도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니 한 번이라도 더 내 사랑을 내 곁에서 떼어 놓으면 용서하지 않겠노라!]
파르르 떨리는 지상의 겁먹음이 심상치 않았다. 하늘의 권속의 노여움을 땅이 버티기 힘들어하는 것을 느낀 고도가 청사에게 재빨리 손을 뻗었다.
“대롱아!”
고도의 목소리는 바람에 뒤섞여 청사의 귀에 닿지 못했다. 고도는 도술을 이용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대롱이, 너!”
온 산이 울릴 만큼의 사자후를 내지르자 분노로 시퍼렇게 빛나는 청사의 시선이 고도를 알아보았다. 고도가 도력이 머문 목울대를 다시 울렸다.
“땅을 전부 부술 셈이냐!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라!”
고도의 재빠른 저지에 청사가 불만족스럽게 눈을 빛냈다. 그의 노여움을 따라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이 불길한 소용돌이를 만들며 꾸물거렸다.
[하지만 너를 억지로 데려가려는 이들이다! 본보기라도 보여 줘야 할 것 아냐!]
“본보기는 무슨, 명령이다! 내 명령이라면 듣겠노라 약조했다, 네가 직접 내 손을 잡고 약조했어! 그러니 당장 내 말을 들어라!”
벙긋, 입을 껌뻑이며 반박하려던 청사가 분함을 삭이지 못한 듯 앞발에 힘을 주었다. 강인하게 뻗어 있던 산맥이 청사의 앞발에 바스러져 무너졌다. 산사태가 나고 땅에 지진이 이는 바람에 곤하게 밤잠에 취해 있던 민가의 사람들이 놀라서 뛰어나왔다. 고도는 산맥을 부순 청사에게 다시 사자후를 내질렀다.
“청사!”
부서진 산맥을 움켜쥔 앞발에서 천천히 힘을 푼 용은 이내 어둠 속으로 몸을 웅크렸다. 사람들은 와르르 무너지는 산과 지진에 허겁지겁 도망가느라 모습을 숨기는 천룡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꿈틀거린 어둠이 하늘을 덮고 있다가 서서히 사라진 정도로만 인식할 뿐이었다. 고도는 시야에서 사라진 청사로부터 마을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구궁 팔진도를 전개하여 민가를 덮치는 암석과 언 흙들을 묶어 두면 될 일이었지만 진을 펼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도술이 필요했다. 고도는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았다.
“구국단망 중천대신 내합아신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
인을 그린 손바닥을 펼치자 고도를 중심으로 그를 똑 닮은 분신이 수십 개 생겨났다. 모두 검은 두루마기에 짧은 머리를 가진 고도가 심각한 표정으로 산사태를 바라보았다. 고도는 곧장 손을 휘둘렀다. 고도의 손동작을 따라 흩어진 백 명의 고도가 낙석 앞으로 뛰어갔다. 민가로 쏟아져 내리는 산사태에 미처 대처가 느린 분신들이 떨어진 바위에 깔리며 사라졌다. 분신이 피해를 받을 때마다 고도의 몸속 기운이 역류했다. 기운의 역류에 휩쓸리면 주화입마를 당할 수도 있는 일이라 고도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두 번째 인을 맺었다.
“통제건곤 하재불멸 천라지망(天羅地網)****.”
저마다 낙석 앞에 자리를 잡은 분신들이 일제히 양손을 뻗었다. 고도가 진을 따라 원을 그리듯 한 바퀴를 유려하게 돌았다. 동시에 각각의 분신들 손을 타고 거미줄처럼 섬세한 도력이 뻗어나갔다. 하얗게 빛나는 섬광은 지붕 위로 떨어지는 암석을 꽃가루보다 미세하게 부서뜨렸고, 쏟아지는 흙과 얼음을 붙잡아 고정했다. 초가지붕을 박살내기 직전의 바위들을 모조리 허공에서 붙잡은 고도가 내뻗은 손을 잡아당기자 분신들도 일사분란하게 손을 당겼다. 민가를 쑥대밭으로 만들 뻔한 바위와 흙이 고도의 힘이 분산된 분신들을 통해 산으로 되돌아갔다. 쏟아지는 방위와 나무들을 거미줄처럼 촘촘한 망을 펼쳐 산에 고정해 두었다. 다른 산맥이 터져 바위와 흙이 토사물처럼 쏟아져 내릴지 모르기에 고도는 무너진 산맥을 지탱하면서도 사방을 꼼꼼하게 살폈다. 지진을 만들어 내는 산의 울음을 고도의 금색 눈이 여느 때보다 매섭게 바라보았고, 산맥의 등이 터져나간 상처를 봉합하는 데에 집중했다.
산의 분노를 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산에게 입힌 상처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바였음을 인식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다행히도 고도의 노력을 알아본 산의 분노는 잦아들었다. 지축을 울리던 거대한 지진과 산사태가 소강되기 시작하면서 분신들이 간신히 붙들고 있던 낙석과 쏟아져 내리던 흙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민가에 전연 피해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집 한두 동만 바위에 지붕이 내려앉고 나머지는 멀쩡한 것은 하늘과 땅의 보살핌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우르르 울리는 땅의 분노가 잦아드는 것을 확인한 고도의 입술을 타고 작은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제 되었다 싶어서 인을 그렸던 손을 갈무리하고 몸을 바로 세웠다. 손바닥을 뒤집었다 펼치면서 분신들을 하나둘, 거두니 산사태를 막는 데에 큰 공을 세운 여러 명의 고도들이 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차례대로 사라졌다. 오랜만에 광범위한 도력을 사용한 고도는 조금은 지친 얼굴이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노곤하게 풀린 정신머리로 한숨 푹 자면 원이 없겠다 생각할 때였다.
“고도!”
청사가 바람을 타고 내려와 자신을 있는 힘껏 끌어안는 힘에 고도는 아무런 대응도 못 하고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도망치는 마을 사람들의 혼란과 소란이 똑바로 멈추어 선 고도와 청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뛰어서 도망가는 사람들과 달리 고도는 한참이나 청사에게 안긴 채 움직이지 않았다. 바닥을 향해 떨어져 있던 오른손을 들어서 청사의 등을 다정하게 다독여 주고 나서야 비로소 금색 눈동자가 본래의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분을 삭이지 못하는 청사는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고도에게 화풀이처럼 외쳤다.
“젠장!”
긴 머리를 쓸어 넘기는 청사는 눈까지 질끈 감고 분을 삭였다. 고도가 큰일을 당할 뻔했는데도 태평하게 잠이나 자고 있던 스스로에 대한 분노인지, 고도를 끌고 가려던 빛을 향한 분노인지 그 화살의 방향이 명확하지 않았다. 누구를 향한 비난이건, 고도의 눈에는 청사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모습이 불편했다. 지금 본인의 짜증 때문에 민가가 폭삭 가라앉을 뻔했는데 어찌 이리 감정 조절을 못할까. 청사의 경솔한 행동으로 마을에 어떤 악재가 닥칠 뻔했는지는 신경 쓰지도 않는 건가. 고도가 청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윽, 하고 정강이를 잡고 무너진 청사를 내려다보면서 고도가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애 같은 놈. 지금 네가 인간들에게 어떤 재앙을 던지려 했는지 모르겠느냐.”
청사는 고도를 올려다보면서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다. 위대한 힘이 있으면서 그걸 조절하지 못하면 어떤 불행이 닥치는지 네놈이 정령 몰라서 이런 짓거리를 한 게냐?”
반박하려던 청사가 입을 다물었다. 산을 통째로 옮겨 놓을 수도 있는 뛰어난 도술을 가진 고도가 그 힘을 바로 사용하지 않고 자만으로 굴었다가 인간 세상에 어떤 나쁜 영향을 미쳤는지가 떠올랐다. 하늘의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 자제를 하지 못해 산맥 하나를 통째로 부서뜨린 후 민가 사람들까지 다 죽일 뻔한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청사는 반박할 말을 꾹 삼켰다. 고도가 지적하지 않아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 있었다. 또한 인간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칠 뻔했는지 인식했지만 머릿속에서는 냉정한 판단이 불가능했다. 고작 자는 사이에 고도를 잃을 뻔했는데 어찌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천룡의 후계자가 되면 더 바빠져서 고도를 신경 쓰지 못할 일이 많아질 텐데 이번처럼 고도를 노리는 세력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도 있지 않나. 물론, 고도는 제 한 몸 지키기에 충분한 힘과 능력을 지녔지만 이번처럼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따라붙는 경우가 벌어진다면 청사는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게 되리라 확신했다.
“이럴 거면 천룡직을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마음 같아서는 차라리 누구에게 떠넘겨 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치달았다. 고도에게 집중할 수 없어진다면, 천룡직에 앉아도 소용이 없었다. 고도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천룡이 되려는 것이다. 그 주객이 전도된다면 당연히 다시 생각해 볼 문제였다. 청사의 생각이 깊어지기 직전에 고도가 날카롭게 반문했다.
“천룡직을 수행하고 싶지 않다고 아무렇게나 행동할 셈이라면 내가 흠씬 두들겨 패줄 거야. 고작 나 하나 때문에 네 직위와 자리를 포기하고 멋대로 굴고 싶으냐고.”
고도가 스스로를 낮추어 말하자 청사는 화가 났다. 고도를 행복하게 해주겠노라 약속했다. 그 행복을 위해서 천룡이 되기로 결심했는데 자신의 마음까지 부정하는 듯한 말에 화가 났다.
“고도는 직위가 더 중요해?”
“그럼 넌 지금 내가 직위보다 중요하다는 소리냐.”
“왜 당연한 걸 묻는데.”
고도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열 마디 비난의 말보다 한 번의 실망의 눈초리가 청사는 견디기 힘들었다. 무너졌던 산의 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심장이 무너졌다. 고도는 굳어 있는 청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시선이 동일한 선상에 위치할 때까지 머리를 끌어 내렸다. 진심으로 화가 났을 때의 고도가 어떤 눈빛을 보이는지, 그제야 청사는 처음으로 알았다. 그의 분노는 고요했고, 빙점 이하로 떨어지는 차가움을 내포하고 있었다. 화가 나면 뜨겁게 타오르는 청사와 정반대의 성향이었다. 평소의 냉정함보다 더욱 냉정해져서 분노를 속으로 눌러 담는 쪽이었다.
“사랑에 휘둘리는 짓은 팔미호 같은 지진아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리 완벽한 하늘의 존재도 휩쓸리는 불완전한 감정이란 말이더냐.”
낮게 울리는 고도의 목소리엔 감정이 철저히 거세당해 있었다. 청사는 가만히 고도를 올려다보다가 바싹 마른 입술을 뗐다.
“고도…….”
“네가 정말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아니, 고도. 내 말을 먼저 들어 봐.”
“들을 필요도 없지. 넌 지금 네가 수행할 업보다 나를 먼저 둔다고 말했어. 그 말이 거짓이라 변명할 셈이 아니라면.”
“아냐, 그 뜻이 아니다.”
“사랑이 그렇게 중요하느냐. 사랑에 미치고 실수를 하는 걸 날 통해 보고서도 그럴 수 있느냐. 내가 사랑을 잃고 자식을 잃어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하는 걸 똑똑히 보지 않았느냐. 너처럼 위대한 존재가 누구보다 내게 가까운 곳에서 내가 하는 짓을 보고도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려는 마음을 갖느냐.”
“고도.”
“내가 너를 흔드는 존재냐? 내가 너를 불완전하게 만드느냐? 내가 그리도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바보 같으며 쓸데없는 존재이냐?”
“아냐, 아냐 고도!”
“똑똑히 듣거라, 한무.”
본명을 말하는 고도의 기세에 눌린 청사였다. 청사가 불안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데에 반해 고도는 여전히 살얼음이 지는 눈으로 청사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난 네 것이다. 누구에게도 가지 않아. 나를 이리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건 너뿐이다. 그런데도 네 걱정은 무엇이냐. 내가 내 몸 하나 지키지 못할 것을 우려하는 것이냐. 내가 그리 약해 빠진 듯이 느껴지는 모양이야.”
“난 그저 널 지키고 싶을 뿐이야.”
“내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노인네로 보이는 게지.”
“그 뜻이 아니잖아!”
“아니면 뭔데.”
“굳이 고생하지 않아도 될 일은 내가 다 막아 주고 싶다는 뜻이야! 네게 집중하면 네게 닥칠 모든 불행과 어수선함을 내가 막아 줄 수 있으니까!”
“네 사랑은 결국 나를 속박하고 싶다는 뜻이잖아.”
“고도!”
“네 판단은 어리석게 들리기만 한다. 나는 여전히 강하다. 여전히 이 세상을 혼란에 빠트릴 만큼 강한 힘이 있지. 내 도술은 쓰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야. 내가 아무런 힘을 내보이지 않는 것을 네가 모르고 있었다니 내가 더 서운하구나.”
지켜 주고 싶은 마음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마음의 대립은 팽팽했다. 청사는 고도의 비난이 억울했다. 왜,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싸잡아 욕을 들어먹어야 하는지 분했다. 고도가 제 한 몸을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과 별개로 뭐든 나서서 도와주고 보듬어 주고 싶다는 뜻 아닌가. 왜 고도는 그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는 걸까. 청사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고도는 내 방식의 사랑을 조금도 이해해 주지 않는 구나.”
푸른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냉정하게 제 말을 잇던 고도가 그 모습에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톡 건들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후두둑 떨어트릴 듯한 청사를 보자 고도의 날 선 반응이 주춤거렸다. 고도가 독한 마음을 먹고 자신을 욕한 것이 아니라는 걸 청사는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지만 자신의 마음과 노력을 인정해 주지 않는 고도의 태도가 서러워서 몇 번이나 목 너머로 삼켰던 말을 뱉었다.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된다. 한데, 넌 아닌가 보다. 그 온도 차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서러워.”
매서웠던 고도의 눈가가 당황으로 젖어들었다. 고도는 청사의 눈물방울에 모진 말을 더는 뱉지 못했다. 대신 빨갛게 물든 볼과 눈가를 보면서 입술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내가 아무런 간섭도 안 하면 되는 거냐. 너도 땅에 있고 싶으면 그래도 된다. 네 뜻을 따르마. 내가 내 마음을 표현해도 돌아오는 게 이렇게 차가운 반응이라면 고집부리지 않으마.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결국 맺혔던 눈물이 후두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방울진 눈물이 턱 끝에 모여 청사의 신 위로 툭 떨어졌다. 청사는 흐느낌을 꾹 참았다. 다 큰 사내가 눈물을 보인 사실이 퍽 부끄러울 법도 한데, 고도의 태도에 받은 상처가 더 큰 것처럼 청사는 자신의 꼴불견인 모습은 하나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청사의 상처 받은 얼굴과 우는 눈을 보는 고도의 표정도 조금씩 안타까움으로 무너졌다.
이렇게 울리려고 한 말이 아닌데. 고도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설움에 젖은 뺨을 잡았다. 손길을 쳐내고 뒤로 물러나도 고도는 할 말이 없었지만, 청사가 오히려 고도의 온기를 찾듯이 그 손바닥에 볼을 기댔다. 때리고 밀어내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대응하는 청사에게 고도는 스스로가 너무 모질게 느껴졌다. 고도는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부푼 볼을 쓸어 만지다가 입술을 뗐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심했어. 미안하다, 대롱아.”
다정한 고도의 태도에 청사는 눈을 감았다. 흘러내린 눈물이 왼뺨을 감싼 고도의 손톱 끝을 적셨다. 청사가 스스로 감정을 다스리면서 눈물을 멈추려고 노력하는 동안에 고도는 자신을 위해 뭐든지 해주려는 청사의 마음을 단순히 어린애 같다고 치부한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다. 세상 모든 사람이 고도 자신처럼 이성을 따지는 것이 아니거늘, 왜 청사의 가치마저 짓밟고 그의 마음을 무시했는지.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것이 틀림없었다. 상대방의 사랑을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한 것이 너무도 미안했다.
“대롱아.”
고도의 부름에 청사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눈을 떴다. 눈물은 멎었으나 젖은 눈동자 너머는 여전히 슬픔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고도는 청사의 뺨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거두었다. 고도의 체온이 멀어지자 움찔하면서 그 손을 좇으려는 청사였다. 고도는 모든 삶이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청사의 마음이 어여뻐서 조금이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일 수 있었다.
청사는 고도에게 조심스럽게 입술을 가져갔다. 쪽, 고도의 볼에 입을 맞춘 소리가 고도의 귀에도 닿았다. 고도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청사를 바라봤다. 청사는 자신의 설움을 고도에게 토로하며 위로해 달라고 떼를 부리지 않았다. 고도의 뜻에 반박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고도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 사실 하나에 고마워하면서 애정을 표할 뿐이었다. 고도는 청사의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청사를 꼭 끌어안고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와 하늘에서 같이 살지 않겠느냐.”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까만 시선이 청사에게 다시 올라왔다. 그 시선엔 거부의 의지가 없었다. 원한다면 고개를 끄덕이겠노라, 대답을 준비하는 고도가 청사는 못내 사랑스러웠다. 당장이라도 고도를 끌어안고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그의 얼굴에 입술을 내려앉히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섣부른 행동을 자제하면서 청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하늘에서도 널 지키고 싶다고 하면, 너는 또 내가 사랑 때문에 직위를 포기하는 바보라 생각할까.”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난 너와 함께하고 싶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너랑 영원히 함께하고 싶단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절차가 있다고 했지.
고도는 잠들기 전 청사가 했던 말을 생각해 보았다. 차기 천룡 후계자가 자신이 가진 모든 걸 걸고서라도 고도를 안전하게 옆에 둘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그것은 고도가 고민하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뒤로 미뤄 둔 문제였다.
“그럼 내가 후계를 낳아야겠지.”
청사는 그렇노라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벙긋거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후계자 문제가 얽혀서 고도와의 사랑이 더럽혀진 기분이었지만, 그런 섬세한 감정을 설명한다 한들, 고도는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볼 것이었다. 청사가 걱정하는 유일한 것은 오직 고도를 잃는 일이다. 그와 하늘에서 같이 살지 못할 것이 무섭다. 땅에게 그를 빼앗길 것만 같아서 어깨가 떨렸다. 그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고도가 후계를 낳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적어도 천룡으로 즉위하기 전과 후 모두 걱정 없이 고도와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정치적인 변수도 없이 상제와 가족, 천인들 모두에게 가장 신뢰 받을 수 있고 보장된 해결책이었다. 고도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솔직히 청사는 아무런 걱정도 안 할 자신이 있지만, 문제는 그 방법이 지극히 청사에게 맞추어진 이기적인 방법이라는 점이다. 하늘에서 고도를 반대하는 정략적인 힘에 맞서기 위해서 그가 후계를 낳길 바랐다. 후계의 모체로서 인정받으면 감히 누가 차기 천룡을 낳은 모체를 해하려 하겠는가.
그 모든 해결책이 겉으론 고도를 위해서라 하지만 속사정은 청사가 고도를 포기하지 못한다는 이기적인 욕심에 비롯된 것이었다. 고도를 곁에 두기 위해 고도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남자에게 잉태를 부탁할 수 있는지, 청사는 스스로 뻔뻔하기만 한 요구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알면서 포기하지 못하겠다. 고도를 포기하는 건 세상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원한다면 낳겠다. 그것으로 네가 걱정하는 모든 상황이 타파될 수 있다면 그 정도도 못하겠느냐. 낳을 테니까.”
고도의 답변을 청사는 마음 편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청사는 고도가 억지로 자신의 제안을 승낙했다는 불편한 감정으로 고도의 표정을 살폈다. 고도는 조금 전에 눈물을 보였던 용이 육체적, 정신적 폭력의 가해자를 전전긍긍하며 바라보는 시선에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고도를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이 지극히 크고 한결같아서 고도는 그를 위해 뭐든 해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까지 청사가 희생하는 사랑을 많이 보여 줬으니까, 앞으로는 모두 되갚아줄 것이다. 청사가 원치 않고 힘들어하며 버거워할 때까지 모두 다.
“날 평생 포기하지 마라, 한무.”
고도의 고백을 이해한 청사는 눈물을 참았다. 그리곤 참다못해 고도를 양팔로 세게 끌어안았다. 정강이를 맞고 언성이 높아지는 말싸움을 벌였지만 이 한마디를 들어서 족했다. 청사가 원하던 말이었다. 후계를 낳겠다는 그 말보다 더 원하던 말.
“고도, 난 널 포기하지 않는다. 절대.”
고도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세졌다. 고도의 어깨에 청사는 고개를 묻었다. 고도가 뒤통수를 토닥여 주는 손길이 다정해서 청사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우르르 흔들리던 지축과 땅의 울음이 멎었다. 산사태와 지진이 일어났던 일대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한 밤의 장막을 다시 거두어들였다.
*
청사는 도포를 펼쳤다. 고도의 부탁을 받고 청사의 잠을 깨운 몽당빗자루 도깨비와 한밤중에 때 아닌 소란을 듣고 부스스 눈을 뜬 미호가 마룻바닥에 기대어 앉았다. 쌓인 눈을 제 때 닦아 주지 않아 물을 먹은 나무 바닥이 삐거덕 날카롭게 울었다. 산중 버려진 집에 거처를 잡고 한 몸 뉘며 자는 용도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집 손질을 따로 못한 여파가 컸다. 청사가 도포 안에서 꺼낸 종이 다발을 보고 깜짝 놀란 미호가 꼬리를 곤두세웠다가 지붕을 잘못 건드려 눈덩이가 그의 머리 위로 왕창 떨어져 내린 것이다. 입 안 가득 들어찬 눈덩이를 퉤 뱉으면서 미호는 청사의 도포 속에서 나온 물건을 바라봤다.
태상노군, 원시천존, 옥천대제, 제석천, 천공, 천주, 노천야, 옥황야, 옥황상제, 상제, 하늘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나 본질은 하늘의 가장 높은 주인이며 33개의 천궁 중 중심산인 수미산에 터를 잡고 사는 이가 있다. 그는 하계에 벼락과 물보라를 일으키는 신이한 재주를 부리기도 하고, 때론 자신의 대리 주인으로 현세에 좋은 뜻을 알리고자 부처를 보내기도 했다. 지금은 하늘의 일을 신경 쓰느라 땅의 일을 천룡과 그 밑의 존재들에게 모두 맡겼지만, 세상이 지금보다 덜 복잡했을 때, 상제는 자신의 복부를 갈라 직접 사리를 뭉쳐 만든 물건을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나눠 줬었다.
하계를 다스리는 땅의 주인에게는 사방 정토를 느낄 수 있는 혜안의 보주를, 바다를 다스리는 용왕에게는 심연 깊은 곳마저 진정시킬 수 있는 영면의 보주*****를, 바다와 땅을 총괄하여 그 속에 속한 인간과 요괴와 도깨비와 미물을 지킬 수 있는 천룡에게 진명의 보주를, 명계와 신선계에도 각 보주를 줌으로써 세상에는 총 다섯 개의 보주가 존재했다. 이들은 모두 제석천의 뱃속에서 잉태된 사리이고, 보주를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하늘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하늘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었다. 개중 천룡이 받은 진명의 보주는 ‘여의주’라고도 불려서 천룡의 아래턱에 보존하는 것이 정설로 여겨지는데 그 귀하디귀한 물건이 청사의 품에서 나온 것이다. 미호가 자지러질 만큼 경악스러워하는 것이 당연한 반응이었다.
“넌 아직 천룡이 아니잖아! 왜 여의주를 가지고 있는 거야?”
하늘의 물건을 땅의 요괴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제석천의 보주 중 용의 여의주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용은 본디 하늘과 밀접하게 연관된 존재이면서 삶의 터전만 하계에 속해 있다. 땅이든, 바다든, 구름 사이든 하계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어서 본질은 하늘의 권속이지만 땅에 더없이 가까운 존재이기도 했다. 그래서 간혹 용들은 스스로 여의주를 생성하기도 했다. 비록 제석천이 직접 준 천룡의 보주보다는 그 힘이 월등히 약했지만 하늘의 기운을 주먹만 한 구슬에 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 많은 존재들이 탐내는 물건으로 자리 잡았다.
미호가 여의주를 알아본 것도 수많은 용들이 만들어 낸 구슬 덕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천룡의 보주를 목도하긴 첨이라. 눈앞에 나타난 검은색의 여의주는 아무것도 모르는 미호가 보기에도 하계와는 다른 속성의 신이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이 휘몰아치는 보주였다. 마치 세계 밖의 또 다른 세상을 담아낸 것처럼 깊이도 넓이도 알 수 없었다. 보주 속에서 빛나는 은하수는 용의 등뼈를 닮아서 연기처럼 꿈틀거리며 별의 사다리를 잇고 있었다. 아름답지만 위험하고 두려운 존재였다. 강한 힘을 원하는 요괴일지라도 이 여의주를 빼앗을 생각은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이 힘은 욕심을 낸다고 될 물건이 아니었다. 자칫 그릇이 작은 이가 이 힘을 접하면 역으로 힘에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이 힘을 다스릴 만한 존재가 세상에 몇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대롱이, 너 이거 빨리 집어넣어.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상상만으로도 끔찍해.”
“그런 경망스러운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라, 지진아.”
“네가 왜 이걸 가지고 있는 거야?”
“아버지께 받았어.”
“뭐? 아버지 퇴위하셨니?”
“아니, 내가 즉위하기 전까지 나보고 보관하라고 주셨어.”
“세상에. 원래 천룡은 그렇게 대범하니? 즉위식에서 보주도 함께 물려받는 게 정상 아니야? 이렇게 미리 받은 거 하늘님은 아시니?”
“음. 모르지 않으려나.”
“맙소사. 나 안 본 걸로 할게. 그거 어서 집어넣어. 나 괜히 화 당하고 싶지 않아. 무서워.”
덜덜 떠는 미호는 곁에 있는 몽당이를 꼭 끌어안았다. 몽당 역시 겁먹은 커다란 눈을 굴리면서 여의주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늘의 권속에 자칫 화를 입을까 봐 몸을 사리는 둘의 반응은 당연했다. 고도처럼 멀거니 바라보다가 직접 손을 대는 행동이 오히려 정상과 거리가 멀었다.
“신묘하구나. 이런 건 나도 처음 봐.”
그 어떤 힘도 빨아들일 듯한 아득한 어둠을 보고 고도는 이것이 바로 천룡의 본질임을 알았다. 세상을 어둠으로 삼키는 것도, 그 어둠으로부터 보호하는 것도 모두 천룡이 할 일이었다. 주먹만 한 보주를 손바닥에 굴리는 고도를 보면서 청사가 말했다.
“솔직하게 말할게. 그 보주는 원래 내 몸 안에 보관해야 하지만 아직 감당이 되지 않아 들고 다니고만 있어.”
고도가 청사의 말을 듣고 미간을 좁혔다.
“위험한 짓이야. 왜 몸에 담지 않는 것이냐. 감당이 안 될 줄 알았으면 부친으로부터 미리 받지도 말았어야지.”
“감당이 안 된다는 건 네가 생각하는 그 덜떨어진 모습을 말하는 게 아니야. 용의 습성을 고스란히 표출하게 된다는 뜻이다. 내가 더는 인간이나 요괴 흉내를 내지 못하고 온전한 용의 형상과 기운을 내뿜게 된다는 말이거든. 감당이 안 되는 것은 내 몸이 아니야. 이런 내 기운을 바로 옆에서 직접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너와 팔미호, 도깨비가 문제가 되겠지.”
“허면 이 자리에서 이걸 꺼내 보인 이유가—.”
“그래, 이걸 이제 품을 거야. 정말 많은 것이 달라지겠지.”
정제되지 않은 하늘의 기운에 그대로 노출된다는 뜻이구나. 고도는 이해를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의주를 청사의 손에 쥐어 준 고도가 물었다.
“이걸 몸에 품으면 지금의 너와 달라진단 말이지.”
“나는 달라지지 않아. 나와 함께 있는 너와 주변이 달라질 거야. 땅의 존재들이 하늘의 힘을 고스란히 방출하는 나를 감당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럼 하계에 머물지 못하겠구나.”
“머물더라도 오래는 못 있겠지. 길어 봤자 몇 달 정도다. 해를 넘기면 만물의 이치가 틀어질 거야.”
고도는 시선을 내리고 가만히 고민을 시작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었을 때 으레 그랬듯이 전후 사정과 앞으로 벌어질 일을 침착하게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고민 끝에 결론을 내릴 고도를, 청사는 보채지 않았다. 아무리 고민하더라도 고도가 선택할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도의 선택권을 박탈한 것은 다름 아닌 청사였다. 헤어지는 것도 용납하지 않고 어떻게든 하늘에 같이 가길 요구한 만큼 고도가 그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끌고 가려던 빛들 말이다. 그들은 아리아라고 하더구나. 땅의 주인이 나를 대리 주인으로 선택했기에 나를 데리고 주인을 직접 만나러 가려 했다더군.”
고민을 마친 고도는 담담하게 말했다. 청사는 고도가 민가까지 내려가서 벌인 추격전을 떠올리고 물었다.
“대리 주인이 뭔데?”
“모르겠다. 땅의 뜻을 대신 전달하는 역할인가. 아리아도 잘 모르는 눈치였어.”
“이해할 수가 없어. 땅의 주인이 무슨 연유로 너를 선택한 걸까.”
“그러게 말이다. 땅의 주인을 직접 보면 알 수 있다던데 내가 만나길 거부해서 영원히 알 수 없는 문제가 되어 버렸어.”
“의외네. 땅의 주인이 왜 널 만나고 싶어 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긴 한데.”
“만나지 않으려는 이유가 따로 있어?”
“너무 대단한 존재를 만나는 것이잖아. 복잡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서 거부했지. 난 네게 집중할 시간도 부족하거든.”
그 말에 보주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근심 걱정이 가득했던 미호와 몽당이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몽당이 자신을 안고 있는 미호의 팔을 손바닥으로 탕탕 때리며 불만족을 표출했다. 미호가 몽당이를 품에 안고 둥기둥기 흔들어 주면서 “나도 그래, 재수 없어, 저 둘…….”하고 중얼거렸다.
“고, 고도…… 그렇게 말하면…….”
미호와 몽당의 반응이 어떠하든 말든, 여의주를 손에 꼭 쥔 청사는 얼굴을 새빨갛게 불태웠다. 고도에게서 선택권을 박탈한 자신을 욕하더라도 모두 받아들일 준비만 하고 있던 터라 달콤한 고백은 기습 공격과 같았다. 고도가 이렇게 하나둘 받아 주는 것이 늘어날수록 청사는 막무가내로 굴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든 다잡아야 했다. 고도가 어느 정도 선을 그어 놓아야 청사가 도를 넘으면 으름장을 놓고 저지해야 하는 게 정석이었다. 이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끝내 받아 주는 고도의 태도 때문에 청사는 고도에게 더 강도 높은 애교라도 부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청사의 욕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도는 예의 그 무덤덤한 말투를 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땅의 주인을 만나 봐도 된다.”
“그럴 리가. 나한테만 신경 써라. 땅의 주인은 알 바 없어.”
“그럴 줄 알았다.”
토닥이는 고도의 손길에 청사는 눈가를 붉혔다. 부끄럽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설렘에 손가락 끝을 움직였다. 고도가 직접적으로 청사에게 신경 쓴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줄곧 행동만 보이고 직접 말하지 않아 왔기에 대수롭지 않은 음성으로 설명하는 이 순간이 그렇게 특별할 수가 없었다. 청사는 붉어진 볼을 꼼지락거리던 손끝으로 슬그머니 긁다가 고도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둘의 모습을 꼴 보기 싫은 미호가 결국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나도 고향에 돌아가든가 해야지, 이 망할 것들이 진짜.”
집안에서 혼사를 치루라는 아우성에 질려서 잠깐 도피했더니만 그보다 더 못 볼 꼴을 보고 있다는 말투다. 몽당이도 미호의 의견에 동의한다면서 미호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기며 발을 굴렀다.
“귀여운 몽당이, 우리 토끼 사냥 갈까?”
“몽당!”
“사슴도 잡아먹자.”
“몽당 몽당!”
좋아서 두 손바닥을 짝 맞대는 둘에게 고도가 “지진아는 왜 이렇게 편식이 심하냐. 가끔은 풀도 먹어야 건강이 유지되느니라.”는 말을 건넨 탓에 “여우는 풀 안 먹어, 이 등신아!”라는 호통을 들어야만 했다. 미호가 커다란 백여우로 변해서는 등에 도깨비불로 변한 몽당이를 태우고 산속으로 사라지자 고도는 청사에게 눈을 굴렸다.
“쟤는 날이 갈수록 입이 거칠어지네. 저 사내 같은 계집을 어떤 남자가 데려가려나, 걱정이로다.”
“나이 먹어서 신경질적으로 변한 걸 거야.”
“집에서 얼마나 혼사로 닦달을 했으면, 쯧쯧.”
“음. 하지만 나도 지진아 상태가 이해가 되긴 하는데.”
“네가?”
고도는 청사가 여의주를 도포 속에 챙기고는 부엌간에서 아궁이 불에 데운 따뜻해진 물을 가져오는 모습을 바라봤다. 청사는 뜨거운 물이 담긴 통을 들고 마루 밑에 앉았다.
“나도 반려자를 데려가지 않으면 저 지진아 같이 시달릴 게 뻔하거든.”
“그래. 혼사와 후계는 중요한 일이지. 특히나 신분과 직위의 영향을 무시하기 힘든 상황이라면 더욱더.”
청사는 고도의 앞에 앉아서 고도의 더러워진 발을 씻겨 주었다. 아리아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느라 맨발이 상처가 나고 더러워져 있는 것은 물론, 빨갛게 얼어붙어 있었다. 더러워진 물을 대신 버려 주고 새 물로 발을 헹궈 준 뒤 젖은 발은 청사가 제 도포자락으로 정성스레 물기를 없애 주었다. 천상의 소재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도포가 더러운 발을 적신 물로 젖어드는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고도는 이렇게까지 신경 써줄 필요는 없는데, 하는 마음으로 청사를 바라봤다. 발을 닦아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그의 붉어진 뺨을 보니 굳이 하지 말라고 말리거나 구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고도, 내가 이기적으로 굴어서 미안해.”
청사의 작게 떨어지는 목소리를 듣고 고도는 눈을 깜빡였다. 물기를 닦아 준 고도의 마른 발을 여전히 만지작거리면서 만지는 청사는 고도의 눈을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꼭 죄지은 사람처럼 우물거리는 모습이었다.
“변명일지도 모르지만, 이 정도로 내가 무언가를 선택해서 책임지는 경우는 처음이라 경황이 없어졌어. 난 고도랑 같이 지내고 싶은데 내 직위가 너와 함께 지내는 일조차 쉽지 않게 만들어서 화가 많이 났어. 이런 나한테 실망 많이 했겠지. 미안하다.”
하늘이라도 어찌 완벽할 수 있을까. 불완전한 부분이 존재하고, 그 부분에 휘둘려서 오히려 하늘보다는 땅에 가까운 존재처럼 보이기에 청사를 받아 주고 마음을 열었거늘. 청사가 하늘이 지닌 단호하고 완벽한 모습만을 갖추었다면 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으리라. 고도는 제 발을 주무르는 청사의 손을 잡아 주었다. 청사가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표정을 보니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한번 머리 뚜껑이 열리면 앞뒤 안보고 사건을 저지르는 게 어찌 자신을 닮아 가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뭐든지 아는 존재가 어디 있겠느냐. 서로 맞춰 가자. 문제가 뭔지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어떤 심정인지, 어떠한 기분인지를 말하면서 지내자. 그러다 보면 네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실은 사랑의 한 형태라는 걸 내가 알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행동만 봐도 네가 이기심으로 나를 주무르려는 것으로 보이지 않거든.”
청사는 맞잡은 손을 움직이다가 고개를 틀었다. 따뜻한 숨결이 고도의 턱 아래에서 번져 나갔다.
“입 맞춰도 될까?”
본디 청사였다면 이리 말하면서 새색시처럼 수줍어했을 텐데. 적홍 빛이 도는 도홧빛 뺨 대신 진지한 눈으로 입맞춤의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고도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청사가 생각하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어떠한 현실적 어려움을 헤쳐야 하는지 깨달은 어른의 눈을 하고 있었다. 아직 미흡하고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그걸 부끄러워하거나 회피하는 대신 정면으로 맞서는 청사였다. 그릇이 달랐다. 왜 하늘이라 불리는지 알 것 같다. 완벽하기 때문에 하늘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마저 용기 있게 인정하는 커다란 그릇이어서 하늘이라 불리는 것이다.
고도는 대답 대신 청사의 두 뺨을 손으로 잡았다. 청사의 속눈썹이 움찔, 떨리는 모습을 보면서 고도는 눈을 감았다. 맞닿은 입술이 부드럽게 엉켰다. 윗입술이 아랫입술을 물고, 아랫입술이 보드라운 살점을 씹으면서 혀를 꺼내 서로를 탐했다. 청사는 자연스럽게 고도의 허리를 팔로 감쌌다. 팔로 휘감은 고도의 몸을 자신에게 기대도록 했다. 고도의 너른 소매 안, 뽀얀 손목의 속살에도 입을 맞추었다. 청사는 손목에 입술을 댄 채 속삭였다.
“누이의 답변을 받았어. 몽당 도깨비가 나를 찾아오기 직전에 누이가 날려 보낸 전서구가 내 어깨에 앉았었어.”
가슴이 허전하여 눈을 뜬 청사는 옆자리에 누워 있던 고도가 사라진 걸 파악하자마자 문밖으로 달려 나갔었다. 고도의 기운이 집 근처가 아닌 산속에서 어렴풋하게 느껴져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라 대번에 파악했었다. 요술을 부려 고도가 있는 곳까지 날아가려던 청사는 곧 눈앞에서 점점이 터진 바람의 빈 공간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오색찬란한 털을 가진 봉황이었다. 봉황은 아직 어린 새끼였기에 하계의 공기도, 어둠도 달빛도 모두 신기해하며 옹송망송 날아다녔다. 청사는 치미의 발목에 맨 전서를 잽싸게 낚아챘다. 치미는 지붕 위에 앉아 세상을 굽어보았다. 삐이이익, 우는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누이의 전서를 모두 읽어 내린 청사가 종이를 손에 움켜쥐고 웃었다.
청사가 생각하고 있던 바가 맞았다. 누이의 전서에서 확신을 얻었다. 몇 가지를 더 물어보려고 치미의 발에 답신을 적어 묶어 주려던 청사는 곧이어 몽당 도깨비가 아리아와 대척하는 고도의 상황을 말해 주기 위해 날아온 탓에 치미의 일을 제쳐두고 분노로 용신으로 변화했긴 했지만 말이다. 전서구의 내용을 떠올린 청사가 고도를 붙잡고 말했다.
“오늘은 보름달이 떴고, 아리아가 민가까지 내려가도 오염되지 않는 기일이야. 만물이 눈을 뜨는 밤이라 해서 꽃잠 자기 좋은 때며, 왕실에서도 후계가 없을 때 무당들이 점지해 주는 날로도 통하지. 내일도, 내일 모레도 이 기운이 이어지겠지만, 시작은 오늘이라 오늘 영험한 기운을 받기 가장 좋을 때라고 하더구나. 고도야, 오늘 나랑 중요한 데 가보지 않겠느냐.”
너무 늦었다면 푹 쉬고 내일 움직여도 된다만. 청사의 이야기를 가만 듣던 고도가 이번엔 두루마기까지 반듯하게 펴주는 청사에게 물었다.
“멀리 가는 거라면 해가 뜨고 움직이는 게 낫지 않나?”
“멀진 않다. 한 시진 정도 걸으면 도착하는 곳이야.”
“흐음. 미리 알아본 모양이네.”
“그래, 누이가 이 산을 잘 알더군.”
“꼭 오늘이어야 하나. 한숨 자고 가는 게 뭐 대수라고.”
“내일도 괜찮긴 해. 괜찮긴 하지만…….”
참으로 지지부진한 대답이로다. 청사의 말과 본심이 일치하지 않았다. 청사는 고도의 뜻이 그러하다면 하는 수 없다고 말했지만 서운한 기색이 한가득이었다. 언행이 불일치하는 청사의 모습에서 고도가 다정하게 그를 달랬다.
“내일 바로 움직이자. 오늘은 푹 자고. 그 정도는 괜찮겠지, 대롱아.”
“그래.”
“대신 잠이 오지 않으면 나랑 한가로이 거닐어도 된다.”
특별한 일을 미루어도 일상은 청사에게 내어 주었다. 청사는 고도의 배려가 따뜻해서 부끄러워진 볼을 손으로 살짝 긁었다. 청사가 냉큼 겉옷을 챙겨 왔다. 청사는 고도가 따뜻하게 입은 복장을 신경 썼지만 정작 본인은 제비꽃 색 도포자락만 휘둘렀다. 종족 특성상 냉혈 동물에 가까워서 추위를 거의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고도는 굳이 따지자면 저보다 신장도 크고 몸에 붙은 잔 근육도 많으며 하늘에서는 주요 직책을 물려받을 청사가 어른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고도는 체질적으로 근육도 잘 안 붙을뿐더러 피부도 찹쌀떡처럼 말랑거려서 남자다운 위엄이 없었고, 머릿속은 노인처럼 끊임없이 세월의 풍파를 겪고 있지만, 정작 신체가 그 생각처럼 노화하지 않는 괴리감으로 어른보다는 어린애 같은 기색이 있었다.
늙을수록 애가 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주변 상황을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다는 의미다. 늙어서 귀찮아진 마음이 커진 탓에 요즘은 예전만큼 말장난을 늘어놓거나 사사로운 시비를 걸어 재미를 찾기보다는 서책을 읽고 금을 켜고 따뜻한 바닥에 누워 새액새액 자는 것이 편해졌지만, 그래도 이런 식의 청사 반응을 지켜보는 것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맥쩍함을 달래 주는 일이 매한가지였다.
고도는 청사가 내민 외투를 걸치면서 마당 밖으로 내려섰다. 순간, 청사가 뒤에서 고도를 끌어안았다. 날씨가 차서 꽁꽁 얼기 시작하는 고도의 양손을 소중하게 감싸고 말했다.
“은애한다, 고도야.”
입술에 쪽, 부드럽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맞춤이 뒤를 이었다. 불시에 접촉된 입술의 감촉에 고도는 처음엔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실바람처럼 웃었다.
“내 마음과 같구나.”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가 않으니 이 정도 증세면 중증이라. 고도는 제 손을 붙잡은 청사에게 손가락을 하나둘 밀어 넣었다. 엉켜든 둘의 다섯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서로의 손등을 쥐고 놓지 않았다.
*
“지진아, 장작 패서 아궁이 잘 때워 둬라.”
“뭐? 내가 어떻게 장작을 패? 이 가녀린 손 안 보이니?”
“발톱 꺼내서 한두 번 휙휙 그으면 될 거 아냐. 어디서 약한 척이냐.”
“이 망할 대롱이 자식, 내가 네 머슴이니? 춥지도 않은데 아랫목 데우고 싶으면 네가 하든가.”
“방정맞은 입이네. 고도를 위해서니까 해놓으라고. 너 이렇게 비협조적이면 집으로 가.”
못됐어, 착하고 귀여웠던 대롱이는 어디 간 거야! 미호는 자신을 구박하는 청사가 미워서 입술을 삐쭉였다. 여전히 얼굴을 붉히면서 몸을 배배 꼬며 고도에게 안기는 청사의 모습은 자주 목격되지만, 고도 외에는 그런 모습을 보여 주는 여지조차 남기지 않았다. 장죽의 설대만 물고 무심하게 쳐다보면 그렇게 청사를 오래 알고 지낸 미호조차 뜨끔해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양반집 규수 대접을 받으려고 고도를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 큰 여염집 아씨를 이리도 박대할 수가. 미호는 설움을 삼켰다.
“고도 고뿔 걸렸니.”
그래서 방을 데울 장작이 필요한 거니. 자세하게 묻는 미호에게 청사는 성의 없이 대답하면서 집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니, 고뿔드는 것보다 몸 상태가 더 안 좋아질 예정이라서.”
그게 무슨 뜻일까. 청사는 신발 끝으로 마당의 흙을 고르면서 곳곳에 결계를 치기 시작했다. 하늘의 기운을 고스란히 담은 기운에 지붕에 앉아서 짹짹 지저귀던 멧새들은 놀라서 날아갔다. 미호는 순수한 하늘의 기운을 느끼고 붉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며칠 전부터 청사가 일부러 하늘의 기운으로 땅을 정화시키고 있다는 걸 느끼곤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자신의 기운을 집 주변에 뿌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결계와 막을 치고 진을 그리는 일련의 과정은 고도의 도술에 비유하면 이중, 삼중으로 집을 보호하는 행동으로 보였다.
“오늘 무슨 일 있어?”
미호의 물음에 청사는 한 번 더 결계를 만들었다.
“오늘 고도의 몸이 열릴 거야.”
열린다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한 미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여느 때보다 상서로운 빛으로 감싸인 집을 보면서 청사는 비로소 만족하여 말을 덧붙였다.
“순수하게 모든 기운이 열려서 조금이라도 오염되면 큰일 나. 자칫하면 몸 안에 썩은 물이 고일 수도 있거든. 그러지 않도록 사전에 꼼꼼하게 준비해 두고 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방 안도 데워 놔줘.”
“뭔데 그래? 오늘 무슨 일 할 거야?”
“내 정기를 받을 거거든.”
하늘의 정기를 받는 일은 몸을 완전히 개방한 후에야 품을 수 있기에 하늘과 반대 속성인 땅의 기운으로 열린 몸 안이 오염될 수도 있다. 오염을 피하려면 땅에서 나는 음식조차 입에 대면 안 되지만, 그건 개별적인 체질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고도의 몸 상태를 벌써부터 판단하긴 어려웠다. 우선 준비할 수 있는 걸 다 준비할 뿐, 청사는 집안의 기운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얼이 나가 있는 미호에게 당부했다.
“장작 잊지 마. 오늘 고도랑 나랑 조금 늦을 테니까 어디 나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고.”
“어, 어, 응.”
미호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도가 문을 열고 집에서 나와 청사랑 함께 나선 후에야 “아니 근데 지가 뭐라고 날 부려 먹어.”라면서 씩씩 거린 미호는 툴툴거리는 말과 달리 곧 장작을 구하러 떠났지만 말이다.
고도는 새하얀 입김을 뱉으면서 깍지를 꼭 끼고 걷는 청사를 바라봤다. 청사는 오늘따라 유독 긴장한 모습이었다. 말 한 번 걸기 어려운 분위기로 손만 꼭 잡고 걷는 청사 때문에 고도 역시 이렇다 할 쓸데없는 말은 삼갔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긴장과 망설임의 기색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고요와 침묵만이 내려앉은 눈밭을 뽀드득 밟아 나갔다.
청사가 안내한 곳은 깊은 산골짜기였다. 소복하게 쌓인 눈이 설빙으로 얼어붙어서 바위 겉면을 날카롭게 빛냈다. 나뭇가지는 작은 충격에도 성마르게 끊어졌고 점점이 이어지던 토끼나 노루의 발자국도 어느 순간부터는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호랑이나 설표의 발자국이 드물게 찍혀 있었다. 그 외엔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산의 침묵은 어둠을 닮아 있었다. 고요함이 찬 공기를 짓눌러 목구멍이 까슬거리는가 하면 이 땅에 발을 딛는 모든 존재에게 냉엄한 안식을 선사하고 있었다. 생보다는 사에 가까운 곳. 산 자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 이 땅의 가장 깊은 심장부였다. 고도가 휘항 밖으로 까만 눈을 드러냈다. 허공으로 녹아드는 하얀 입김을 따라 잔잔한 목소리가 예사 질문을 던졌다.
“어디까지 가면 되느냐.”
고도의 설신이 언 땅에 푹푹 빠지는 것을 보던 청사가 고도를 말없이 등에 업으면서 대답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그렇다면 나를 내려 줘도 되는데.”
“그냥 업혀 있거라.”
“축지를 써서 한 번에 달려 줄까?”
“괜찮다. 등 뒤로 네 체온을 느끼고 싶어서 내가 좋아 업은 거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험준한 산을 혼자 걸어도 버거울 때에 멀쩡한 성인 남자를 등에 업고 가려 하다니. 고도는 싫다고 내려 달라는 말을 하는 대신에 청사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편안하게 등 뒤에 기댄 고도가 의외였던 청사는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마주한 새까만 눈동자가 예뻤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좋아서 청사는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턱을 뒤로 꺾어서 쪽, 고도의 볼에 뽀뽀를 한 청사가 웃었다. 그의 입맞춤을 받은 고도는 말없이 청사의 목에 얼굴을 묻고 작은 숨소리를 나른하게 내뱉었다.
뽀드득, 눈밭엔 청사의 걸음만이 유일하게 이어졌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 이상 길이라 불릴 만한 지표가 사라졌다. 햇볕마저 높은 산봉우리에 걸려 계곡 사이로 내려오지 못했다. 등성이의 뽀얀 눈이 녹고 젖은 땅이 드러나도 하얗게 얼어붙은 설원을 나아가는 청사의 걸음걸이는 지체되지 않았다.
방향과 위치마저 헷갈릴 만큼 깊은 산길에 들어온 청사가 해가 다 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청사의 따뜻한 등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고도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청사는 고도를 등에서 내려 주면서 눈가에 묻은 졸음을 손끝으로 더듬어 털어 주었다.
“한때 선녀들이 몸을 씻었던 곳이라고 누이가 말하더구나. 하늘의 기운이 닿은 못 중에서도 단연코 가장 정화가 잘된 곳이라 하더라.”
고도는 청사의 설명을 듣지 않았으면 눈앞에 펼쳐진 해괴한 장면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뻔했다. 죽음을 닮은 계곡의 풍경과는 정반대로 녹음이 펼쳐져 있었다. 눈이 녹아서 젖은 땅에는 작은 꽃을 피운 이끼들이 엉성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이끼가 매달려 자란 나무는 여름철 우거진 수풀림처럼 기둥으로는 충분한 물을 머금고 푸르른 이파리를 흔들고 있었다. 나무 밑으로는 달맞이꽃이 한 폭의 치마를 닮은 꽃잎을 활짝 피운 상태였다.
“이리 와보아라, 고도.”
주변을 도닐면서 겨울에 볼 수 없는 풍광을 퍽 신기한 눈으로 둘러보던 고도는 청사가 잡아끄는 손길에 녹음이 더 깊은 곳을 따라 들어갔다. 나뭇잎이 더욱 무성해지면서 희뿌연 물안개가 자욱하게 퍼졌다. 안개는 맞잡은 청사의 온기만큼이나 따뜻했는데 어딘가에서 온천물이 솟는 소리를 잡아내자 이는 안개가 아닌 온천의 수증기임을 알게 되었다. 녹음을 걷고 나온 곳에는 커다란 온천 못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반짝이는 윤슬이 곳곳에 얇게 흩뿌려진 수증기를 닮아 희뿌옜다. 고도는 제법 규모가 큰 온천 못을 보다가 청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기가 신성시되는 곳이 맞나? 보기엔 몸 담그기 좋은 온천인 것 같다만.”
계절을 역행하는 주변 풍경이 마치 신선들만 노니는 청호림 풍경 같았지만, 온천 자체는 평범했다. 고도를 잘 모를 때의 청사였다면 그의 말투에 기껏 이곳까지 안내해 준 제 노력이 하찮은 취급을 받는 듯해 입술을 삐쭉이며 툴툴거렸을 테다. 이제는 그런 시기가 지나서 고도가 무슨 말을 하든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이게 되었다.
“밤이 되면 달빛이 이곳을 가득 메우지. 가장 뜨거운 양기를 머금은 수면 위로 달빛이 섞이며 천지가 일합하는 신성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게 돼. 그 모습을 보면 아무리 고도라도 깜짝 놀라서 눈을 떼지 못할 거야.”
그렇게까지 말하니 내심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고도는 추위에 언 살갗을 조근하게 녹이는 온천의 물안개를 손으로 휘저었다. 신기한 기운이 어떤 것일까 유추하느라 눈을 반짝이는 고도를 보면서 청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청사는 유난히 긴장을 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이 방법 외엔 남은 것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고도가 썩 불편해할 방법이기에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고도가 괜찮다고 말했다 한들,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청사의 바람이 떨리는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이곳에서 너와 합일하고 싶다, 고도야. 여기면 가능하다. 네가 내 후계를 낳는 일이 이곳에서 벌어지길 원한다.”
고도가 후계를 이어야 한다. 그래야 하늘도 천룡의 후계를 잉태한 고도에게 고개를 조아릴 테니까. 고도를 하늘로 데리고 올라갈 명분은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고도의 도력이 하계에서 감당할 수 없으므로 하늘로 데려와 감시하고, 좋은 일에 쓰이도록 하면 정치적, 군사적인 이점이 있음을 설파할 수도 있다. 천계에 ‘천룡이 필요로 의해 데려온 도사’라고 공표하는 순간부터는 섣부르게 움직이지 못함이 자명했다.
그것으로는 고도의 안전까지 보장할 수가 없다. 정치적, 군사적인 이유를 들어 고도를 억지로 하늘로 데려간다 해도 청사의 혼사와 후계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청사가 일면한 문제를 해결하느라 고도에게 소홀해지면 그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게 될 것이다. 그 틈에 불온 세력이 고도를 명계로 추방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방법은 하나다. 고도가 그 후계를 낳아서 후계의 모태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리하면 굳이 정치적, 군사적인 이유로 고도의 존재 가치를 천인과 상제에게 하여금 설득할 필요도 사라진다. 혼사 문제도 두 번 다시 언급되지 않을 것이다. 감히 누가 후계를 낳은 존재를 부정하겠는가. 고도를 싫어하는 세력이 있다 해도 천룡의 후계를 낳은 모체를 직접 해치는 일은 상제에 대한 반역행위라 고도를 쉽사리 건들지 못할 것이다.
청사의 의지는 확고했다. 고도가 지금 당장 거북함을 표현한다 해도 그와 자신이 하늘에서 아무 걱정 없이 함께 살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생략할 수 없다. 고도가 어떻게든 이 방법을 받아들이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천룡의 후계는 대롱이, 네가 꼭 이어야 하는 건가.”
고도는 가급적 남성의 몸으로 잉태하는 과정을 피하고자 다른 방법을 강구했으나, 청사는 물러나지 않았다.
“가족과 친지 중 나 외에 후계를 이을 만한 적자가 없는 상황이야.”
“아무나 임신이 가능하다면 씨받이의 개념도 없는 거고?”
“세상에, 어떻게 고도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내가 다른 여식과 몸 정을 나눠도 상관없다는 소리야?”
“그건 아니지만…….”
“충격이야. 나는 고도 말고 다른 누구도 안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그런 식으로 널 배신하고 싶지 않아서 이런 곳까지 데려와서 설명하고 있던 건데.”
“으, 으음. 그, 그래, 미안하다.”
“고도, 빈말로도 그런 말 하지 마라.”
고도는 여성을 후계자 잉태에 이용해 보라고 조언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차선책으로 여성을 알아보진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물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청사는 고도 외에는 누구에게도 씨를 뿌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만약 고도가 청사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평생 후계는 보지 않을 생각으로 보였다.
고도는 휘항을 벗고 머리를 흔들어 털었다. 남성이 잉태를 한다는 거북함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청사가 다른 무엇보다 고도와 함께 오랫동안 행복해지고 싶어서 벌이는 일인 만큼 그 뜻을 따라 주기로 했다.
“나는 여성이 아니라서 아기집이 없지. 그런데도 어떻게 후계를 잉태하는지 말해 봐라.”
고도가 잉태에 대해 본격적으로 묻자 청사도 진지하게 제 지식을 끄집어냈다.
“간단해. 정기를 이 안에 품고 있으면 돼.”
부드러운 손바닥이 고도의 판판한 배를 눌렀다. 배 안에 넣어 두기만 하는 걸까. 고도는 정기를 품는다는 개념이 명확하게 와 닿지 않았다.
“이 안에 어떻게 품으라는 거지.”
“그건 내가 해줄 일이니 고도는 아무 걱정 마라.”
“그렇다면 네가 넣어 준 정기란 것을 열 달 동안 품고서 낳으면 되나. 난 아기가 나오는 길도 몸에 존재하지 않아.”
“아니, 한 달 정도면 돼. 인간처럼 완전하게 생명체로 자라난 아이가 몸 밖으로 나오는 것과 달라. 이 속에 주먹만 한 알을 키우면 되는 거다. 알의 성장과 부화는 이 못이 대신 책임져 줄 테니까 너는 그 작은 알이 만들어질 때까지만 나를 도우면 돼.”
“알이란 말이지. 어떻게 배출하지? 입 밖으로 토하면 되나? 아님 변과 함께 배출하는 건가”
“하하, 전혀 아니야. 내가 끄집어내는 거야.”
“저런. 내 배를 가른다는 소리구나.”
“비슷한 뜻이지. 물론, 네 몸에는 상처 하나 안 날 테지만.”
“네가 알 대신 내 장기를 잡아 뜯어서 죽으면 어떡하느냐.”
“그걸 지금 농담이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널 잘못되게 하면 내가 스스로 목을 맬 테니까 걱정 마.”
“그 후사 처리도 매우 극단적이군. 결국 내가 뭔가를 준비할 건 없다는 소리로 들리네. 네 기운을 한 달 가량 품으면 모두 끝날 일이라 말하니.”
“응, 고도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푸르른 청색 눈동자는 기대감으로 고조되어 있었다. 청사의 설명을 들어도 잉태가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고도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청사는 빛나는 눈으로 고도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길 기다리고 있었다. 고도와 합일하여 고도를 잉태시킨다는 일에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무척이나 설레고 있음이 훤히 드러났다.
청사가 바란다면. 그래서 같이 있을 수 있다면. 고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자신이 이렇게 말랑말랑한 성격으로 변한 것인지 모르겠다. 늙은 거라 치부하기엔 청사를 우선시하는 마음이 컸으니, 이는 사랑 때문에 사람마저 바뀌었다고 봐야 했다.
“하늘의 정기를 어떻게 몸으로 받으면 되는 게냐.”
고도가 자신이 후계자를 낳아야 한다면, 어찌 싫다고 말하겠느냐며 반쯤 체념한 목소리로 물었다. 난색을 표하다가도 결국 입맛을 다시면서 그 부탁을 들어주고 마는 고도가 귀여워서 청사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청사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고도의 시선을 향해 눈꼬리가 샐쭉이 접힐 만큼 예쁘게 웃어 보였다.
“나한테 안기면 되지.”
특별할 것 없는 그 한마디에 고도는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잉태하는 방법은 용족의 특수성이 있으면서 왜 씨를 뿌리는 과정은 인간이나 용족이나 똑같으냐는 불만이 터질 뻔했다. 뱃속에 한 달 동안 정기를 담는 특이한 잉태 방법이라서, 씨를 뿌리는 과정도 별스러울 줄 알았더니만.
“네게 다리를 벌리면 되는 일이냐.”
태연하게 묻는 고도 때문에 청사는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아, 야하게 그런 말을 왜 입에 직접 담고 그래.”
“평소와 다름이 없어 보여서 말이다. 그런 일이라면 어렵지 않잖아.”
“으음. 근데 네가 생각하는 것과 약간 다를지도 몰라.”
“네 세 번째 다리를 품는 건 솔직히 이제 익숙해졌는데.”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청사가 펑, 소릴 내며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 치의 헛된 마음도 없이 사실을 근거로 한 이야기를 꺼내는 고도였지만 자신이 내뱉는 말이 어떤 유혹이 되고, 청사의 마음을 소란스럽게 만드는지 자각이 없었다. 그래서 더 나빴다. 매번 이렇게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고도에겐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자, 잠자리를 같이 하는 건 맞지만, 그래도 다르긴 할 거야.”
“흐음. 내 보기엔 똑같은 과정인데 다르단 말이지.”
무슨 차이점인가 하여 고개를 모로 숙이는 모습을 청사는 마른침까지 꿀꺽, 삼키며 바라봤다. 이 순진무구한 검은 눈동자가 어떻게 변할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수태와 잉태를 위한 잠자리가 어떤 특별한 경험을 안겨 주는지 숱하게 들어왔다. 그 경험을 통해서 변하게 될 고도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얼굴로 열이 몰려서 고도를 똑바로 바라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청사는 이제 헷갈리기 시작했다. 후계가 중요한 것인지, 수태를 위한 그 과정 속에서 변하게 될 고도가 중요한 것인지. 솔직히 마음으로는 후자를 더 열렬하게 반기며 환호하고 있었지만, 그런 내색을 하면 고도가 싫어할지도 모른다. 용의 반려가 된다는 게 인간인 고도가 모르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땅의 존재가 하늘의 권속에 속하게 된다는 건, 고도는 평생 청사와 떨어져서는 살 수 없다는 의미였다.
“네가 부디 감당해 주길 바랄게.”
고개를 한 번 더 갸웃, 흔들어 낸 고도가 별 의미 없이 청사의 청을 승낙했다.
“그러마.”
고도의 허락이 떨어지자 청사는 더는 수태를 위한 과정에 바로 접어들었다. 청사의 가느다란 동공이 조금 더 날카롭게 흡착되면서 파랗던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을 발했다. 인간의 눈에 가까웠던 눈동자는 투명하고 겹겹이 빛을 내는 파충류의 청안으로 바뀌었다. 그의 몸에서 부드럽게 새어 나오는 특이한 기류에 온천의 물안개가 짙어졌다. 신성한 분위기가 청사의 힘과 섞이면서 온천 못 전체가 금을 녹여 허공에 뿌린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고도.]
마치 천지를 울리는 듯한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청사의 변화를 놀라운 눈으로 쳐다보던 고도는 제 볼에 닿는 청사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청사의 손이 맞는데도 고도가 익히 알고 있던 손의 크기가 아니었다. 그보다 컸다. 고도의 머리통을 한 번에 끌어안을 정도로 크고 투박하게 변한 손에는 검푸른 비늘이 군데군데 나 있었다. 손등에서 드러난 비늘이 팔꿈치까지 이어졌다. 청사의 몸에서 흘러넘치는 기운에 푸른 도포자락이 넘실대느라 품이 넓은 옷 사이로 청사의 하얀 피부가 드러났고, 그 피부 곳곳에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비늘이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비늘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처럼 동시에 파드득, 흔들리며 누웠다가 일어나길 반복했다. 고도는 청사의 새파란 눈 밑, 광대 주변에 펼쳐진 푸른 비늘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몸을 다잡았다.
완벽한 용의 모습도, 위장한 인간의 모습도 아닌 반인반용의 형태였다. 겉보기엔 요괴처럼 일부 징그럽고 단단한 비늘로 덮인 피부가 보였다. 그러나 그 흉측함을 뛰어넘는 신령스러운 힘이 청사와 주변 못 일대를 숨이 막힐 정도로 감싸고 있었다. 청사가 자연스럽게 뿜어내는 하늘의 기운이 고도를 압박했다. 숨을 내쉬는 자연스러운 행동마저 의식적으로 생각해야 할 만큼 긴장감을 안겨 주고 있었다. 청사는 더 이상 불완전한 용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을 호령할 만한 위대한 존재로서 기품과 위압감이 묻어 있었다. 세상의 경배와 외경심을 마땅히 받아들일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이였다.
“대롱, 아니 한무.”
고도가 하늘의 주인에게 예를 표하고자 한쪽 무릎을 꿇으려 할 때, 청사가 급히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고도야, 네게 군신의 예를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내게 예를 갖추려고 하면 화를 낼 거야.]
청사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고도 역시 알고 있으나 당장 눈앞의 위대한 존재에게 예를 갖추지 않으면 어찌 불경한 일이 아닐까. 고도는 자신과 농을 주고받으며 편하게 손을 맞잡고 다니던 연인을 청사가 아닌 하늘의 주인으로 인식해야 했다. 앞으로 그를 따라 하늘에 올라가면 더욱더 그를 외경심으로 모셔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너무 많이 달라졌어. 앞으로도 너를 편하게 대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야.”
[편하게 대해. 넌 내 유일한 반려니까.]
“솔직히 지금 네 힘이라면 내가 감당이 안 될 것 같다. 하늘의 정기를 내 몸에 품으라고 했더냐? 글쎄, 장담하지 못하겠구나. 네 힘을 감당 못 해서 내가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겠어.”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조금도 걱정 말고. 네가 신경 쓸 것은 수태를 위해 내가 너를 안는 과정을 버티라는 것뿐이다.]
버티라고. 고도는 청사의 말에 입을 벙긋거리다 도로 다물어 버렸다. 수태가 인간과 같다면 청사의 성기를 몸에 품고 그가 씨를 뿌리면 끝날 일이었다. 그 일련의 과정은 한 번이면 완료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토록 단순한 행위를 버티라고 말하는 연유를 모르겠다. 그만큼 몸에 부담이 갈 일이 있는가. 고도가 아무것도 모르겠는 눈으로 천진하게 바라보자 청사는 속으로 작게나마 욕설을 삼켰다. 고도가 아무것도 모를수록, 그 후폭풍이 얼마나 클지 벌써부터 짐작되었다. 고도가 미쳐서 자신을 붙잡고 울며 매달릴 그 모습이.
[고도, 너는 뱀술을 먹어 본 적 있느냐.]
뱀술 이야기에 눈을 깜빡이던 고도가 고개를 저었다.
“딱히 찾아 마실 만큼 좋아하는 음료가 아니다. 왜 갑자기 네 친척을 잡아먹는 얘길 하느냐?”
[친척은 얼어 죽을. 으음? 아닌가. 그래, 비슷하겠구나. 성기는 닮은 구석이 있으니.]
“뭐라.”
[뱀은 교미를 할 때 몸속에서 성기가 나온다. 성기는 암컷 몸에 박힌 후 암컷이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표면에 손톱만 한 돌기를 지니고 있지. 그 돌기는 암컷 몸에 박혀서 빠지지 않도록 고정하는 역할을 해.]
“흐음. 뱀의 생태를 탐구하자는 건 아니겠고.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그 성기를 암컷 몸에 박은 수컷은 짧게는 세 시진에서 길게는 열두 시진 넘게 교미를 한다. 하루 종일 몸을 틀면서 암컷의 몸에 성기를 박고 빼내질 않아. 그래서 인간들이 뱀을 정력제로 보아 술을 담가 먹지 않더냐.]
뱀의 교미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는 청사를 고도는 불길한 눈으로 바라봤다. 천천히 청사의 시선과 표정을 살피니 천룡의 눈으로 개안한 청사가 욕망을 표현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수태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든 정신을 집중한 모습이었다. 용의 교미를 위해서 갈무리하고 있던 하늘의 힘까지 개방한 이상, 뒤로 내빼는 건 어림없어 보였다.
“대롱이 네 이놈, 지금 나랑 하루 종일 교미를 하겠다는 선전포고냐.”
청사는 고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도 장담 못 한다.]
“어째서?”
[나도 교미는 처음이니까 내가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모르겠어. 이전에 경험이 없으니 참고할 것이 없구나.]
청사는 고도의 설신과 버선을 벗기고 두루마기를 어깨 너머로 넘겼다. 얇은 모로 만든 흰색 저고리와 속바지만 남긴 청사가 자신도 옷을 벗었다. 풀썩, 바닥으로 떨어진 푸른 도포자락이 눈에 젖어 짙은 색을 띠었다. 그 위로 한 겹, 두 겹 옷을 모두 벗어 낸 청사는 머리를 묶고 있던 비단 끈마저 풀어 버렸다. 새하얀 나신 위로 드문드문 군집해 있는 먹빛 비늘이 제일 먼저 고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탄탄하지만 고운 피부엔 잘 정제된 칼끝처럼 빛나는 비늘이 누워 있었다. 비늘은 한쪽 어깨에서 손등까지 이어졌고, 등허리에서 골반을 덮었으며 허벅지와 무릎께에도 돋아나 있었다. 고도가 청사의 나신을 훑는 사이에 비늘과 동색인 머리카락을 길게 내린 그는 비스듬히 고도를 바라봤다. 고도는 제게 입을 맞추려고 얼굴을 숙이는 청사를 두 손으로 슬그머니 턱을 밀어냈다.
“너 체격이 커진 것 같은데.”
눈대중으로 청사의 몸집과 키가 커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물며 풀어헤친 머리카락도 평소 등허리에서 할랑거리던 것이 지금은 발목까지 길어져 있지 않나. 청사의 이질적인 모습에 당황한 고도는 그와의 입맞춤조차 꺼렸다. 청사는 밀어내는 고도의 허리에 한 팔을 감으며 속삭였다.
[이게 나란다, 고도야.]
네가 쉽게 저항하기 힘든 이 모습이 실제 내가 맞단다. 귓가에 속삭이는 청사의 목소리를 듣고 고도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 모습이 청사가 보기에 썩 좋았다. 요즘 들어 고도는 세상만사에 초연해지고 무덤덤해지고 있었다. 금을 켜거나 서책을 읽거나 잠을 자는 세 가지 행위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감정이 결핍된 채 그저 잠만 자다 고도가 죽어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애먼 상상마저 하고 있었는데 이리도 감성적으로 대응해 주니 그 어찌 보기 싫은 장면일까. 고도의 시선이 힐끔, 무성한 음모로 뒤덮여 있는 청사의 성기를 바라봤다. 성기가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예사롭지 않아 퍽 당황한 표정이었다. 청사는 그런 고도의 등허리와 무릎 밑을 잡아서 품에 들어올리기만 했다.
[괜찮다, 네게 해가 될 건 없을 거야.]
참방, 뜨거운 물속으로 발을 집어넣으면서 고도를 데리고 들어왔다. 차가운 공기와 상반되는 뜨거운 물의 온도가 살갗을 휘감았다. 청사가 고도의 곁에 앉아서 짧고 검은 앞머리를 이마 뒤로 모두 넘겨주었다. 젖은 손으로 몇 가닥 흘러내린 고도의 머리칼을 정리해 준 뒤에 이어서 눈썹과 볼을 매만졌다. 청사의 커다란 손이 낯설어서 고도는 움칠했다.
평소엔 여인처럼 고운 섬섬옥수이건만, 오늘은 힘의 개방으로 외형이 일부 변했기 때문일까, 마치 낯선 이가 자신을 만지는 듯했다. 안 그래도 뿌옇게 수증기가 오른 못에서 청사와 얼굴을 바싹 대고 있지 않으면 그의 얼굴마저 흐려졌기 때문에 묘하게 불안한 기분도 들었다.
고도는 참방이는 물속을 헤집어 손을 뻗었다. 청사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다가온 청사의 새파란 눈동자를 직시하자 안도의 숨이 흘러 나왔다. 고도는 고개를 살짝 틀어 청사의 젖은 입술에 살포시 자신의 입술을 묻었다.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뽀뽀에 청사의 시선이 더 짙어졌다. 청사가 고도를 감싼 손을 물속으로 집어넣은 것과 고도가 그런 청사의 목에 두 팔을 감은 것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잘 부탁한다.”
그 한마디가 도화선이 되었다. 청사는 조심스럽게 고도를 살피던 탐색을 그만두고 고도의 몸에 자신을 밀착했다. 고도가 아, 하고 짧게 소리를 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붙은 몸의 일부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대롱아. 아, 잠시만.”
고도의 부름에도 청사는 아무 말 없이 젖은 옷자락 속으로 손을 밀어 넣고 고도의 몸을 더듬었다. 예전처럼 활동량이 많지 않은 고도였기에 몸에 자리 잡은 단단한 근육들은 많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만큼 허리가 얇아지고 몸의 선이 부드러워졌다. 원래 부드러웠던 피부였지만 이젠 찹쌀떡처럼 말랑말랑하고 쫀득하여 몇 번이나 입에 물고 빨아들이고 싶었다. 그의 팔 안쪽과 허벅지를 쪼옥, 빨아먹으면 탄력 있는 살덩이가 입 안에서 달콤하게 굴러다닐 것만 같아 입에 침이 고였다.
“청사, 잠깐만, 아주 잠깐만도 괜찮으니 손을 풀어라.”
아까부터 당황해 있는 고도는 청사를 끌어안았던 목 부근의 팔을 풀어내고 그의 어깨를 뒤로 밀쳤다. 청사는 손바닥에 감기는 물속의 피부를 음미할 뿐, 고도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고도의 몸에 제 몸을 조금 더 밀착하면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왜 그러느냐. 내 사랑아, 말하면 내 무엇이든 들어줄 테니, 이대로 말해 보거라.]
청사가 뒤로 넘겨 준 고도의 머리카락을 타고 또르륵, 물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청사는 제 입술로 떨어진 물방울을 핥고 고도의 귓불에 날카로운 이를 박아 넣었다. 너무 세지 않게 깨물었지만 그 따끔한 감각에 고도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떨렸다. 고도는 불편한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밑에가…….”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중얼거리는 한마디를 청사는 용케도 알아들었다. 청사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당황해 있는 고도의 왼손을 붙잡아 허름한 나무로 만든 의족을 풀어 주었다. 잘려 나가 뭉툭해진 손목을 정성스레 핥아 주었다. 고도가 벌일 수 있는 저항을 하나둘 차단해 버리는 청사의 행동을 가만 지켜보기가 어려웠다. 고도가 거부하더라도 그 거부권조차 받아들이지 않을 기세였다. 이대로 일을 치르기엔 밀착한 하체가 신경 쓰여 참을 수가 없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고도는 하는 수 없이 도력을 이용해 이 상황을 벗어나려고 했다. 짚신과 자신을 바꿔치기해서 몸을 빼낼 심산이었다. 적어도 도력을 쓰기 위해 힘을 끌어 올렸지만 그 힘이 산산조각 나며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현상을 겪기 전까지 그 생각은 변함없었다.
놀란 고도가 제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도술을 다시 끌어당겨 봤다. 몸 안에서 도력이 움직이지 않았다. 황급히 한 손으로 인을 맺어 보아도 도력이 실타래처럼 엉켜 나와 고도의 뜻대로 움직이긴커녕, 사방을 감싼 희뿌연 수증기처럼 자꾸만 흩어지기만 했다. 신령한 장소라 도력이 약해졌다. 게다가 도력을 방출하려 할 때마다 밖으로 끄집어낸 기운이 청사를 알아보고 바로 흩어져 버리는 바람에 힘을 쓰는 일이 불가능했다.
고도는 당황한 눈을 들어 청사를 바라봤다. 청사는 고도가 무엇에 그 커다란 눈을 불안하게 굴리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누구도 고도를 막지 못해서 그가 하계에서 온갖 말썽을 피운 것이거늘, 단숨에 자신의 힘을 제압한 청사를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올려다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나. 하계의 힘이 천상의 힘에 대적할 수 없음을 온몸으로 처음 느껴 본 고도로서는 자꾸만 몸 밖으로 도력이 흩어지는 현상을 처음 겪어 보고 놀랄 만했다. 청사는 고도를 우아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난 억지로 널 범하고 싶은 생각 없어. 내 사랑아, 말하면 들어주겠다는데 왜 실력 행사를 하려는 거지.]
그 말에 고도의 얼굴이 붉어졌다. 온천의 뜨거운 기운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아까부터 고의적으로 몸을 밀착하고 하체를 파고드는 청사의 행동이 여실히 느껴졌다. 고도가 도망가려 할수록 바짝 붙어서 고도를 더 괴롭혔다.
“대롱이 너…….”
다시 도술을 써서 빠져나가려던 고도는 눈앞에서 터져 버린 자신의 힘을 보고 입술을 달싹였다. 부적으로 힘을 봉인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진심으로 이 상황을 벗어날 의지마저 있는데 이 상황에서 펼쳐진 도술이 말도 안 될 만큼 허무하게 부서졌다. 하늘과 땅의 차이를 비로소 실감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그 어떤 성수나 요괴, 도깨비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의 차이에 고도는 바싹, 마르는 입술을 핥았다. 청사는 고도를 살살 달랬다.
[실력 행사하지 말거라. 네 몸의 기운을 빼야 하는데 자꾸 단전에 기운이 모이지 않느냐.]
“읏, 대롱아.”
[그래, 도술을 거두고 편하게 있어라.]
“편하게 있을 수가 있겠어? 이 사기꾼 같으니라고.”
[뭐가 문제냐?]
고도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술을 움칠거렸다.
“밑이…… 아무리 봐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고도의 젖은 살결을 쓸어 만지던 청사가 그 말에 작게 웃음을 흘렸다. 청사는 고도의 젖은 바지를 벗겨 물 밖으로 던졌다. 차르륵, 떨어지는 묵직한 물소리를 뒤로한 청사가 고도의 다리를 벌리고 자신의 허벅지 위로 앉혔다. 뿌연 온천물 속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물결에 흔들리는 고도의 음모를 만지작거리면서 성기를 손바닥으로 주무르는 감각을 고도는 눈앞에서 생경하게 보는 것처럼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정말로 크고 딱딱했다. 제 허벅지에 비벼지는 것이 고도가 알던 것과 달랐다. 심줄이 불거져 나온 두툼한 살덩이에는 손톱만 한 돌기들이 느껴졌고, 그 돌기들이 박혀 있는 성기는 자못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이것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쉬이 상상할 수 없었다. 몸에 큰 무리가 갈뿐더러, 돌기라는 이질적인 감각을 거북해하다가 설령 욕지기라도 하면 청사에게 큰 실례가 되는 것이 아닐까. 우왕좌왕하는 고도가 왜 그리 마음을 다잡지 못하는지를 청사는 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단호하게 고도를 달랬다.
[고도야, 너무 겁먹지 마라. 오히려 아주 기분 좋을 것이라 장담할게.]
고도는 엉덩이를 뒤로 뺐다가 청사가 두 볼기짝을 움켜쥐고 자신에게 바싹 끌어안는 바람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이런 게 들어오는데 좋을 리가 있겠나.”
[교미를 할 때 수컷 뱀은 몸속에 숨긴 성기를 꺼낸다고 말했을 텐데.]
“넌 뱀이 아니라 용이잖아.”
[사촌지간이지.]
“언제는 동족 취급 받기 싫다면서, 이런 기회주의자를 봤나.”
[동족이든 뭐든, 내 급해지려 한다. 하계에서 이렇게까지 힘을 푼 게 처음이라 자꾸 몸속의 기운이 날뛴다고.]
“그렇다고, 앗.”
청사의 기다란 손가락이 예고도 없이 엉덩이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둥글게 잘린 손톱이 몸속을 파고들어 안쪽으로 깊숙하게 자리 잡았다. 고도의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파고든 손가락이 내부를 긁을 때마다 힘이 들어갔던 허리가 움칠거리며 반응했다. 청사의 어깨를 움켜쥔 고도의 손끝에도 강한 힘이 쥐어졌다.
“대롱이 네 손이 원래 이렇게 크지 않았었는데.”
불만처럼 토로하는 그 말에 청사는 눈가를 얇게 접어 웃었다.
[지금부터 많은 것이 다를 테니 이런 걸로 놀라면 이르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벽을 긁던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났다. 평소 세 개쯤 들어왔을 부피감이 손가락 두 개에서 느껴졌다. 벌어진 입구 안으로 뜨거운 온천물이 휘감아 올라왔다. 고도는 청사의 어깨를 쥔 손을 세웠다. 오른손 끝이 하얗게 변했다. 손톱이 길었다면 이대로 청사의 살 속으로 손톱이 파고들 힘이었다.
다르다. 지금까지와 많이 다르다. 고도는 그 변화를 온몸으로 체감하면서 눈을 깜빡였다. 수증기가 맺혀 물방울로 변한 속눈썹 끝이 젖은 채 흔들렸다. 고도는 몸 안으로 솟구치는 뜨거운 온천물과 이질적인 청사의 손길에 열기 오른 숨을 뱉었다. 청사는 그러한 고도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집중하여 바라봤다.
당황한 고도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았을 때, 발갛게 부어오른 아랫입술이 너무도 탐스러워 저도 모르게 입을 맞추고 쪽쪽 빨았다. 고도는 과실처럼 입술을 깨물어대는 청사에게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온천물과 함께 들어온 청사의 손가락 두 개에 온 신경이 쏠려서 입을 맞추는 청사의 혀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청사가 손가락 끝을 굽혔다가 펴며 내벽을 살살 긁었다. 그때마다 고도는 숨을 삼키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입술을 빨던 청사는 물방울이 맺혀 떨어지는 고도의 앞머리와 속눈썹에 시선을 빼앗겼다. 맞대고 있던 입술을 떼고 단아한 눈썹과 이마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촉촉이 젖어 있는 이마에 본능적으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피부에서 맡아지는 고도의 향기를 폐부 깊이 들이마시면서 밑을 쑤시던 손가락을 세 개로 늘렸다.
“……읏.”
손가락 세 개의 부피감은 청사의 기존 성기 두께에 달했다. 아랫배가 꽉 찰 정도로 묵직한 용량이었다. 고도는 몸 안을 가득 채운 청사의 손가락이 버거워서 숨을 헐떡였다. 청사의 입가로 고도의 더운 숨결이 훅 끼쳤다. 눈가를 찌푸리고 청사의 손가락을 받아들이느라 몸 안에 고인 열기가 입 밖으로 느리게 뻗어 나오고 있었다. 청사는 고도의 반응을 하나하나 확인한 후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고도의 몸이 열리는 속도가 느렸다. 그동안 잠자리를 같이 해서 몸이 쉽게 열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고도의 육신에 고여 있는 땅의 기운이 쉽사리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았다. 수백 년 동안 단전에 쌓인 땅의 기운을 빼내어야 그 공간에 하늘의 정기를 담을 수 있는데 땅의 기운을 배출할 만큼 몸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몸의 가장 은밀한 부위에서부터 천천히 열어 주면 자연스럽게 몸 안이 비어 갈 줄 알았건만. 교미 상태가 된 청사의 신체적 변화가 이질적이어서 그 거북함에 고도가 마음을 편히 먹지 않는 게 문제였다. 억지로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상황의 변화를 기다리기엔 마음이 급했다. 청사는 애써 초조함을 숨겼다. 뜨겁게 뱉어지는 고도의 숨결을 받아 마시듯 삼키면서 고도의 몸 안에 박아 넣은 손가락 세 개를 움직였다.
“아!”
고도의 짧은 비명과 함께 땅의 기운이 훅, 배출되었다. 배출된 기운은 단전에 쌓인 양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고도가 아주 잠깐 이성을 놓쳤다가 붙잡은 그 순간에 몸이 열리는 길을 볼 수 있었다. 고도가 이성적으로 이 일을 거북하다 판단하고 있다면 그러한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풀어 주는 방법밖에 없을 듯싶었다.
청사는 고도를 조금 더 세게 품에 안았다. 손가락 세 개를 동시에 움직이자 고도가 뜨거운 숨을 토하면서 온몸을 들썩였다. 청사에게 끌어안긴 고도는 곧바로 몸 안을 파헤치는 청사의 손길에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벌렸다.
“아, 아파, 대롱아, 아파.”
움찔 떨면서 청사의 목에 매달린 고도가 조금 더 거칠어진 숨을 토했다. 청사가 고도의 몸 안으로 밀어 넣은 손가락을 위아래로 거칠게 흔들 때마다 고도는 들썩이는 몸을 감당 못 하고 청사를 붙잡았다.
“아, 으…….”
귓바퀴로 흘러드는 고도의 신음을 들으면서 청사는 아랫배가 꽉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평소보다 긴장한 고도의 모습도, 마치 새색시처럼 이 행위를 낯설어하는 태도도 모두 청사에게 자극이 되었다.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건만 그 생각을 철회해야만 했다. 고도의 색다른 반응에 청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고도가 신음을 토할 때마다 땅의 기운도 함께 뱉고 있어서 그것을 명분 삼아 괴롭히고 말았다.
[매번 만져 주는 곳인데도 유난히 좋아하네. 내 본래 손가락이 마음에 드는 걸까.]
긴 손가락이 성기만 닿던 고도의 몸속 깊은 곳을 찔렀다. 고도는 꽉 감았던 눈을 크게 떴다. 청사의 목을 휘감아 안았던 팔에서 일순간 힘이 빠져나갔다. 물속으로 참방, 떨어진 팔을 간신히 들어 청사의 팔을 잡아 보았지만 청사의 손가락은 성기처럼 변해 고도의 몸속을 쑤셨다.
“아, 앗.”
고도는 청사의 팔만 어설피 잡고 청사의 목에 얼굴을 기댔다. 손가락이 몸 안의 정확한 부분을 찌르는 바람에 청사와 고도의 성기가 아랫배를 쿡쿡 쑤시며 부풀어 올랐다. 만져 주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부풀어 기립한 성기가 서로의 배를 쿡쿡 쑤셨다. 고도는 청사의 목에 뜨겁게 뱉어대는 숨을 삼키더니 곧 참지 못하고 허리에 준 힘을 풀었다. 빳빳하게 서 있던 허리가 그대로 무너져 청사에게 완전히 기대었다. 청사는 어깨와 목에 고개를 묻은 고도가 청사의 팔을 붙잡고 말리던 손길을 치우는 걸 지켜보았다. 어느새 허벅지 사이에 힘을 주고 청사를 온몸으로 꼭 붙잡아 안는 모습에 청사의 숨도 함께 거칠어졌다. 고도의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기운의 양이 많아졌다. 슬금슬금 기어 나오던 기운이 한꺼번에 수증기처럼 휘몰아쳤다. 단전에 모여 있던 기운이 겉에서부터 한 겹, 두 겹 벗겨지며 허공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육안으로도 볼 수 있었다.
청사는 허벅지를 벌려 청사의 허리를 감는 고도를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고도는 신음을 삼키면서 표현을 삼가고 있지만 몸에서 반응하는 흥분을 숨기지 못했다. 손가락으로 찔러 줄 때마다 좋아서 끙끙거리는 소리도, 붉어진 얼굴도 사랑스러워서 청사는 고도를 통째로 삼켜 마시고 싶은 심정이었다. 청사는 고도의 내부를 들쑤시던 손가락을 천천히 빼냈다. 손을 따라 허리를 둥글게 휜 고도가 헐떡이며 미처 삼키지 못한 숨을 뱉었다. 청사는 촉촉하게 젖은 고도의 눈가에 입술을 내려앉히며 속삭였다.
[한 번에 기운을 다 빼내진 못하겠지만 시도는 해볼게.]
청사는 도드라진 고도의 턱 선을 지그시 응시하면서 입을 벌리고 혀를 섞었다. 고도가 눈을 감고 그 입맞춤을 받아 주는 동안에 천천히 고도의 엉덩이 사이로 자신의 성기를 끼워 맞추었다. 반밖에 기립하지 않은 청사의 성기가 이미 손으로 길을 낸 고도의 몸속을 느린 속도로 파고들었다. 청사가 몸을 천천히 밀어붙이자 고도는 맞닿은 입술 새로 둔탁해진 호흡을 골랐다. 손가락 세 개의 부피보다 더 큰 귀두가 밀려들어올 때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버티던 고도였지만 곧 두껍게 휜 기둥이 밀어들자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 아, 청사, 청사…….”
돌기가 난 기둥이 들어갈 때마다 그 적나라한 감각에 놀란 모습이었다. 미끄러지듯 삽입이 되었던 이전과 달리 돌기가 난 부분에서는 구멍이 더 벌어져야 했고, 벌어진 구멍이 힘겹게 돌기와 기둥을 삼키며 수축해도 곧 또 다른 돌기를 삼키기 위해서 뻐끔거려야 했다. 벌어졌다가 다물어지길 반복했다. 평범하게 밀려들어오는 성기와는 확연하게 다른 그 감각에 고도의 몸이 뒤틀렸다. 고도는 꿈틀거리는 내벽 안쪽으로 울퉁불퉁한 청사의 성기를 받아들이자 정신이 없는 듯 정처 없이 시선이 흔들렸다. 크기와 감촉이 낯설어서 놀란 고도를 달래 주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청사 역시 여유가 없었다.
뜨겁다. 이전에도 고도와 배를 맞대면 기분이 좋고 몽롱해서 고도의 몸 상태를 살피기보다는 이 뜨거움에 심취하여 본능적으로 움직이곤 했지만 이번은 그 기분이 극심했다. 고도의 기운이 비어 가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점점 땅의 색이 사라지는 단전에 자신의 정기를 채워 넣을 생각을 하자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육체적 결합보다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이대로 고도의 몸속에 자신의 정기가 머물고 가득 차서 고도가 오직 청사만을 찾고 원할 생각을 하자 소름이 돋았다.
고도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하계의 존재가 땅에서 하늘의 기운을 받아들이면 끊임없이 그 기운을 갈구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이 단정하고 무심한 고도가 몸에서 기운이 비어 갈 때마다 청사의 옷깃을 잡고 뜨거운 시선을 줄 것이다. 땅에 발붙이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생명들은 땅의 기운을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어서 힘을 갈구하는 경우가 없었다. 하지만 그 땅의 기운을 몰아내고 하늘의 기운을 억지로 품게 되면 강제적으로 집어넣은 하늘의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사라지기 마련이다. 자연스럽게 소진되는 기운을 얻을 방도는 오직 청사만을 통해서일 것이다. 땅 위의 그 어떤 존재도 고도에게 하늘의 기운을 나눠 줄 수가 없으니 고도는 청사에게만 발정하여 그 힘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될 것이다.
인간이 용과 교미를 한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였다. 필요한 기운을 오직 반려인 용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는 것. 육체와 정신 외에 본능과 생존까지 전적으로 반려자에게 구속되는 방식임을 청사는 고도에게 일부러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하면 분명히 고도는 싫어하고 망설일 테니까. 그러니까 말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낫다. 이렇게라도 고도를 완전히 가지고 싶었던 청사의 마음이 색정적으로 물드는 고도의 얼굴을 보면서 뜨겁게 부풀어 올랐다.
청사는 몸을 뒤로 내빼려는 고도의 상체를 움켜 안았다. 힘으로는 빠져나가지 못하고 구속되듯 품에 안긴 고도를 꽉 안은 채 아래를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아……!”
고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벌름거리며 집어삼킨 청사의 성기가 뱃속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고도의 몸속에 박혀서 빠져나갈 생각조차 없었다. 박혀서 고정된 것처럼, 고도는 몸 안으로 퍼지는 청사의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허공을 보며 숨을 헐떡였다.
“하아, 하아.”
고도의 몸에서 힘이 풀렸다. 손끝에서 힘이 빠져나가서 청사의 등 비늘을 더듬던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힘주어서 청사의 허리를 감쌌던 허벅지 안쪽도 푸들거렸고, 청사가 쪽, 쪽 얼굴 곳곳에 내려앉히는 입맞춤도 나른할 정도로 기운이 없었다. 고도는 몽롱한 상태였다. 몸에서 기운이 잔뜩 빠져나가서 힘을 주기도 힘들고, 생각을 깊게 할 겨를도 없었다. 느낄 수 있는 건 청사의 신체 일부가 고도의 몸에 박혀 있다는 사실 하나만이었다. 고도는 청사의 가슴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청사는 고도의 몸에서 절반 이상의 기운이 빠져나간 것을 확인했고, 그 부작용으로 고도가 멍하니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도 파악했다. 고도의 몸에서 힘이 빠진 덕에 삽입이 수월해져서 다행이었다.
[고도, 고도야.]
톡톡, 손끝으로 입술을 두드리며 부르자, 고도가 뿌연 수증기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렸다. 청사와 눈이 마주치자 처음에는 멍하니 파란 눈을 응시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자연스럽게 쪽, 입술을 맞대는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천진해 보였다. 고도의 나른한 표정과 연신 고개를 틀어 가며 청사의 턱과 입술에 쪽쪽, 입을 맞추는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청사는 고도의 이름을 끊임없이 귓가에 뿌리면서 허리를 움직였다.
“아, 음.”
청사의 등을 손바닥으로 잡고서 버티는 고도가 몸 안을 쳐올리는 힘에 눈을 반쯤 감았다. 청사의 허벅지 위에 앉은 고도는 양다리로 청사의 허리를 감쌌다. 밀착한 상체와 청사의 볼에 비벼지는 자신의 입술을 달싹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윽, 아, 벅차, 청사, 청사야.”
고도가 할딱이며 내뱉는 소리에 청사는 반응할 수 없었다. 청사는 고도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잡아 벌리고 몸을 빼내었다가 다시 박아 넣었다. 성기가 출입할 때마다 울퉁불퉁한 기둥의 겉면을 따라 벌름거리는 고도의 내벽이 자극적으로 문질러졌다. 고도는 몸속 가장 깊은 곳을 자극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입구에서부터 쾌락을 내던져 주는 결합에 머릿속으로 하얀 불꽃을 터뜨렸다. 손끝을 세워서 청사의 등비늘을 세게 움켜쥔 고도가 쏟아지는 신음을 청사의 가슴팍에 내뱉었다.
“하읏, 읏, 읏.”
출렁이는 못의 수면이 고도의 몸을 감쌌다. 열린 몸에서 짙은 땅의 기운이 반 이상 빠져나와 수증기처럼 기화했다. 고도의 그릇이 비어 갈수록 고도는 몸의 쾌락에 쉽게 젖어들었다. 청사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고도를 붙잡고 허리를 흔들었다.
[하아, 하, 고도, 고도야.]
청사의 움직임은 거칠었다. 고도의 내벽이 찢어질 정도로 들어찬 성기가 끝까지 빠져나왔다가 퍽, 소리를 내며 한꺼번에 꽂혀들었다. 그럴 때마다 고도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청사의 등에 손톱을 박아 넣었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쾌감에 파르르 떨었다. 뒤로 쓸어 넘겼던 고도의 앞머리가 이마 위로 다시 흘러내릴 정도로 고도는 들썩이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 어떡하지, 대롱아, 내가 그러니까…… 아.”
[쉬이, 쉬, 괜찮다, 내게 매달려.]
“아픈데……, 아, 읏, 아픈데 그만두면 싫…… 아!”
[쉬, 괜찮단다, 내 사랑아.]
“하윽! 아, 아……!”
고도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손끝에 힘이 너무 세게 들어가는 바람에 날카로운 청사의 등 비늘에 손끝이 베고 말았다. 출렁이는 수면 위로 핏방울이 톡 떨어졌으나 고도는 상처를 인지하지 못했다. 고도는 몸을 쳐올리는 청사의 성기에 완전히 정신이 날아갔다. 이건, 기분이 좋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완전히 청사에게 물들어 그의 소유가 되는 기분이었다. 청사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정신적 교합이었다.
“아아, 처, 청사야, 대롱아, 하윽, 아.”
고도가 먼저 청사를 끌어안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해 비틀거리는 모습이 완전히 이 행위에 몰두한 모습이었다. 고도의 적나라한 쾌락을 향한 욕구에 청사도 더는 참지 않았다.
“아!”
청사는 고도의 허벅지를 옆으로 힘주어 벌렸다. 물살이 일 정도로 난폭한 행동에 고도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청사는 매끈한 바위에 고도의 등을 기대도록 하고 몸을 뒤로 뺐다가 앞으로 쳐올렸다. 고도가 바위를 등 뒤로 잡고 버티다가 삽입되는 순간 팔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팔과 등에 쓸리는 바위의 면이 거칠었지만 고도는 몸속을 두드리는 빠른 움직임에 더 집중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청사가 움직이지 않고 몸속에 가만히 자리 잡고만 있어도 행복할 거 같았다. 왜 이렇게 충만하고 충족감이 드는지 이해할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고도는 어깨를 움츠렸다. 움츠린 어깨에 볼을 한쪽 기댄 상태에서 청사의 박자에 맞춰서 허리를 움직였다. 들썩일 때마다 청사의 성기가 꽂혔다. 엉덩이를 찰싹 두드리는 두 개의 낭심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거친 음모는 고도의 회음부와 속살을 간질였다. 벌름거리는 내벽을 쳐올리는 움직임에 고도의 눈가에서 물기가 흘러내렸다. 앞머리에 맺힌 물방울이 굴러떨어진 것인지, 몸이 열리면서 생리적인 반응까지 자연스럽게 이끌어 나온 것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고도는 참을 수 없는 쾌락에 허리를 반쯤 비틀면서 힘겹게 울었다.
“청사야, 아, 거기, 아, 아……!”
[하아, 하, 고도, 한무라고 불러 줘. 앞으로 나를 한무라고 불러.]
“아, 읏…… 한무!”
[고도.]
“조, 조금만 천천히…… 아앗!”
[하아, 하아.]
흥분한 청사가 더는 참지 못하고 고도를 붙잡아 물 밖으로 나왔다. 뜨거운 온천 열이 살갗에 고여 두 사람을 빨갛게 물들였다. 평평한 바위에 고도를 눕힌 청사가 고도의 양다리를 어깨 위로 올렸다. 젖은 몸 위로 하얀 수증기가 끊임없이 솟구쳤다. 열기의 흔적뿐이 아닌, 고도의 몸속에서 완전히 개방된 땅의 기운이 조각나는 모습이었다.
“아아, 아, 아, 아!!”
고도는 반으로 접힌 허리의 아픔도 감지하지 못하고 한 손으로 젖은 흙을 움켜쥐며 괴로워했다. 물속에서 부드럽게 움직였던 청사의 성기가 뭍으로 나오자마자 흉기처럼 거칠게 고도의 몸속을 파고들었다. 성기에 난 돌기가 살아 있는 생명처럼 커졌다가 줄어드는 것처럼 움직였고, 휘어진 기둥이 내벽을 퍽퍽 쑤실 때마다 고도는 몸속을 채우는 특별한 기운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고도는 괴로울 정도로 허리를 틀면서 흙만을 손바닥에 가득 잡았다.
“하아, 아, 앗, 한무, 하, 한무.”
어깨에 올린 고도의 다리가 정신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청사의 눈이 핥듯이 바라봤다. 세로로 길어진 눈동자가 눈물을 흘리며 쾌락과 괴로움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는 고도에게 고정되었다. 흥분의 감도가 짙어질수록 청사의 부드러운 살결은 짙은 색의 비늘로 채워졌다. 청사의 손등에도 비늘이 가득 차오르고, 둥글게 잘려 있던 손톱이 맹수의 그것처럼 길고 날카로워졌다. 청사는 검푸른 용의 발로 변한 손으로 땅을 잡았다. 자칫 고도의 몸에 상처라도 날까 봐 땅에 양손을 박은 채 허리를 흔들었다. 귓가에서 터지는 고도의 짤막한 비명과 신음 소리에 청사는 더욱 흥분했다.
[여기, 응, 여기 좋지, 고도, 고도? 응, 응?]
“아읏, 아, 아! 한무……!”
청사는 어느새 열기로 바싹 말라 허공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으로 고도를 덮었다. 허리까지 닿았었던 머리카락은 발목을 넘어 청사의 키보다 더 자라나 있었다. 머리카락들이 너풀거리면서 고도의 몸에 얽혔다. 고도의 하얀 발목과 허벅지 안쪽, 그의 옆구리와 얇은 허리, 들썩이는 가슴팍까지 부드럽게 훑으면서 청사는 숨을 헐떡였다.
“아읏, 거, 거기, 아, 아……!”
눈물을 터뜨린 고도가 청사에게 옭죄듯 안긴 채 정신없이 흔들리는 하체의 감각에 헐떡였다. 청사의 거친 숨소리가 급박해졌고, 몸을 꿰뚫듯이 쳐올리는 강도가 강해졌다. 비명을 닮은 신음을 터뜨리며 힘겨워하는 고도에의 몸을 빠르게 왕복했다. 절정에 달한 청사가 제 성기를 고도에게 박아 넣듯이 결합했다.
“아……!”
고도는 물기가 맺힌 눈을 크게 떴다. 몸속에 박힌 성기 밖으로 뜨거운 기운이 배출되었다. 마치 열기처럼 화악, 고도의 몸 안을 적시는 기운에 고도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몸이 텅 비어 가고 있었다. 남은 기운이 얼마 고이지 않았을 정도로 단전이 텅 비어 갔다. 기운을 기화해 버리듯 청사의 분출물이 고도의 몸속을 녹였다.
고도는 참을 수 없는 갈증에 숨을 헐떡였다. 수백 년간 쌓아 왔던 기운이 사라진 두려움과 당황스러움보다, 얼마 남지 않고 고인 그 땅의 기운을 밀어내는 더 강한 청사의 힘에 정신이 쏠렸다. 너무 강하고 아름다워서 감히 느끼는 것도 영광스러운 하늘의 기운이 얇은 육체 너머에서 무서울 정도로 용솟음쳤다. 몸이 비어 가면 비어 갈수록 그 빈 공간을 메우려는 본능처럼 고도는 그 어느 때보다 흥분하여 청사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더 해줘. 한무, 아.”
본인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청사는 고도가 이미 이성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거대한 땅의 기운을 단전에 모아 놓고 도술을 부리던 인간이기에 기운이 모조리 기화되어 텅 비자 살기 위한 본능처럼 움직인다고 판단했다.
고도의 몸에 얼마 남지 않은 땅의 기운. 밑바닥에 고여서 찰랑이는 이 기운만 몰아내면 공허한 몸을 완벽하게 연 고도에게 자신의 정기를 담뿍 먹여 줄 수 있었다. 윗입과 아랫입 모두를 자신으로 채워 줄 것이다. 고도가 공허를 느끼지 못할 때까지 매달리도록 그를 자신의 기운으로 적셔 줄 것이다.
[아아, 귀여워, 귀여워, 고도.]
흔들리는 몸을 주체 못 하면서 고도는 청사를 꼭 끌어안았다.
“거기, 아, 음, 거기, 더, 더…… 아아!”
거친 행위에 고도의 등에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청사는 어깨에 걸쳤던 고도의 다리를 내리고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비틀거리며 청사의 허벅지에 앉은 고도에게 성기를 밀어 넣었다. 고도가 청사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 고도가 원하는 적나라한 욕구를 받아들이면서 청사 역시 흥분으로 잠식되어 가는 머릿속을 비워 갔다.
앞으로 고도는 제 몸을 채운 청사의 기운이 모자라게 되면 이렇게 매달리게 될 것이다. 정기적으로, 주기적으로, 비어 가는 스스로의 욕구를 해갈하지 못해서 먼저 허리를 흔들고 말 것이다. 그렇게 야하고 색정적으로 변하는 고도를 옆에 두고 과연 하늘 위에서 천룡의 정무를 볼 수 있을까. 중요한 일을 하다가도 고도가 먼저 다가와 입을 맞추고 안달을 내면 보는 눈이 있더라도 바지를 내리고 몸을 맞대고 싶어 할 텐데. 이 야한 연인을 다른 사람이 보더라도 눈알을 뽑지 않고 버텨 낼 인내심이 있을까.
청사는 고도가 자신 없이 살 수 없는 몸으로 만들면서도 죄책감보다 큰 갈증을 느꼈다. 땅의 기운을 잃고 하늘의 기운으로 채워진 고도가 계속해서 도술을 쓸 수 있을지, 쓰게 된다면 그것은 신선들이나 천인들이 부리는 신령술일 것인지 궁금했다. 인간의 몸으로 신령한 도술을 부리다 자칫 인과율이 어긋나 고도를 더 고통스럽게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머릿속 한편에서 꿈틀거렸다.
걱정이 들었다고 해서 몸을 섞는 행위를 도중에 그만두지는 않았다. 걱정이 앞섰다면 이리 행동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설령 고도에게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기더라도 청사가 모두 책임질 생각이었다. 그럴 작정으로 고도와 교미를 하는 것이다. 차기 천룡이라는 직책을 두고 사랑하는 이와 영원을 약속하는 것은 아주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 이 정도의 결심은 당연했다.
청사는 충족되지 않는 욕심에 마른침을 삼켰다. 고도가 더 자신에게 매달리길 바랐다. 나른하고 여유로운 시선을 주는 고도도 좋지만 참을 수 없는 색욕에 울상을 지으면서 자신의 몸에 벌어진 변화에 괴로워하다가 결국은 먼저 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흔드는 고도의 모습이 꼭 보고 싶었다. 고도가 그리해 줄 수 있다면 지금 하는 교미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한무, 한무야…….”
헐떡이며 우는 고도가 목에 얼굴을 비비면서 힘들어하는 걸 보며 청사의 눈은 세로로 더욱 흡착되었다. 이젠 하늘에 갈지 말지 고민하는 일조차 없을 것이다. 떨어지면 살 수 없게 되는 건 고도일 테니까. 그러한 자신의 변화를 인지하는 데에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알려 주지 않으면 자신이 그저 청사와 배가 맞고 난 뒤 색탐을 하게 되었다고 자책하며 끝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고도가 제 몸에 일어난 변화를 알든 모르든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이대로 영원히 자신의 반려가 되길 소원했다.
[고도, 넌 내 것이야. 나는 네 것이고. 이는 영원한 불변의 진리가 될 것이다.]
몸이 텅 빈 고도가 청사의 기운에 매달리며 우느라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 축악귀경
**** 구국단망 중천대신 내합이신 오도일이관지/ 통제건곤 하재불멸 천라지망 : “북두칠성에 두 개의 별을 더한 9개의 별과 하늘의 주인을 대신하여 내 도(道)가 단 하나의 길로 통하느니 내 몸에 와서 합하라/ 하늘과 땅은 내 말을 따라 어떤 재앙이라도 없어지도록 하늘과 땅에 그물을 펼치라” 논어(論語)와 민속신앙 칠성경 경문에 쓰인 단어의 조합으로 실존하는 경문은 아님
***** 용왕에게 준 ‘영면의 보주’는 현재 동해 용왕이 소유하고 있지 않다. 마갈어(摩竭魚: 바다에 살며, 두 눈은 해와 같고, 입을 벌리면 어두운 골짜기와 같아서 배도 삼키고 물을 뿜어내는 것이 조수와 같다는 고기)가 보주를 삼키고 바다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