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내 미르바토 닻별에 일랑일랑 바노니
한울에 켜켜이 쌓인 마음 별찌 타고 오비노나
푸살거리는 하야로비 나래가 다흰 가슴 적셔 가론
그린비 흐노니 흐노니 헤윰 깊어 잠 못 이루네
나린 님을 꿈 가온에 안아들어 속살거리길
어여쁜 나의 임 예그리나 흐노느라
하제도 아사도 새하마노 찾노라 겨르로이 못 잊고
은애한다 은애한다 비나리는 나의 임 예그리나
곡두기행 외전(外傳) :: 예그리나(Yegrina)
청사의 손바닥에 마른 햇살이 잡혔다. 볕이 닿은 손끝에 부유하는 먼지들이 내려앉았으나, 오래가진 못했다. 움찔거리던 손끝이 갈고리처럼 구부러졌다. 포근함을 손에 쥐려는 것처럼 가벼운 주먹을 쥔 청사가 천천히 눈을 떴다. 뿌연 것이 먼지 때문인지, 졸음의 막이 한 꺼풀 눈동자를 덮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다. 청사는 나른함을 이불 삼아 몸을 뒤척거리다가 옆으로 손을 뻗었다. 청사가 눈을 번쩍 뜨고 상체를 일으켰다.
구겨져 있던 이불이 허리 밑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전라의 몸이 드러났다. 오랜 시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몸에는 탄탄하고 잘게 조각난 근육들이 유려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뭇 여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몸이었지만 그 몸의 주인은 자신의 외형을 감상하거나 뽐낼 여유가 없는 몸짓으로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도?”
아침이라 잠긴 목소리가 성대를 긁었다. 마른기침을 뱉은 후에 다시 한 번 “고도” 하고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청사는 구겨진 이불자락을 들추고 빈 방을 둘러보았다. 어디에서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두루마기를 집어 든 청사가 소맷부리에 팔을 끼웠다. 앞 춤을 추스르지도 않고 장지문을 열었다. 열린 문 너머에서 송곳처럼 날카로운 공기가 몰아쳤다. 사방이 하얀 설원이었다. 동물의 발자국조차 용납하지 않는 백색 눈밭 위로 방 안에서 보았던 햇살보다 시린 빛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청사는 눈밭과 동색으로 부서지는 입김을 토했다. 숨을 고르는 청사가 불안한 시선으로 눈이 쌓인 마당을 둘러보았다.
마당에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보폭이 일정한 모습으로 정갈하게 이어졌다. 발자국이 끊어진 끝엔, 그럭저럭 눈과 비를 피할 수 있는 정자가 보였다. 움막에 가까운 초라한 조형물이었다. 성긴 짚으로 만든 지붕 위에서 녹은 눈덩이가 툭하고 떨어졌다. 눈은 사내의 어깨에 닿아 흘러내리면서 검은 두루마기를 적셨다. 앉아 있는 여인이 손을 뻗어 어깨의 눈을 털어 주었다. 여인은 까르륵, 높은 소리로 웃었다. 그 소리에 피식, 가벼운 소리를 내며 사내 또한 따라 웃었다.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새 나왔다. 풍광처럼 녹아 있는 모습이 작은 소란에도 수증기처럼 날아가 버릴 듯 세밀하고 고요한 반응이었다. 사내의 앞에서 꼬리를 흔드는 여인의 활기참과는 대조되었다.
“요 봐라, 고도야. 아무래도 새로 하나 만드는 게 낫지 싶은데.”
반듯하게 허리를 편 그는 저를 부르는 여우의 말에 고개만 모로 꼬았다. ‘고도’라고 불린 이는 제 손을 만지작거리는 여우와 마주 앉아 있었다. 눈밭만큼이나 하얀 머리를 다소곳하게 묶은 미호가 고도의 왼손을 주물렀다. 손목부터 그 아래가 잘려 나간 손이다. 뭉툭해져 버린 손목 끝엔 나무 의수가 덜렁거리며 붙어 있었다. 손가락의 형상까지 본따 만든 의수지만 만든 이의 솜씨가 좋지 않아 정교함이나 섬세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구색만 갖춘 손을 영 불만족스럽게 본 미호는 입술을 삐쭉였다.
“때가 타서 더러워. 물과 눈에 젖어서 퉁퉁 부었다가 쪼그라들어 갈라진 흔적도 많아. 이런 흉측한 건 손에 달고 있느니만 못하다고.”
열 살 내외의 어린아이 형상이었을 때의 미호는 새침데기 애기씨다운 구석이라도 있었지, 성체가 되어 미간을 좁히니 그 모습에서 도색과 미색이 흘러내렸다. 세간 남자들 모두가 현혹될 미모였다. 눈앞에서 붉고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는 것은 물론, 고혹적인 눈을 굴리며 말하는데 어느 사내가 연정을 품지 않을까. 그토록 매력적인 아씨를 지척에 두고도 고도는 목석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매정할 만큼 덤덤한 몸짓이었다. 여인에게 반응하지 않는 사내란 것을 자타가 익히 알고 있거늘, 청사는 더는 지켜보지 못했다. 문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켰다. 마당으로 맨발을 뻗었다. 허공을 밟는 사뿐한 발걸음을 두 남녀는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흐응, 우리 지진아가 고향에서 쓸데없는 걸 배워왔네.”
“쓸데없는 거라니?”
“배려심이라고들 하지. 네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뭐얏! 신경 써줘도 그 얄미운 말투는 변함없네!”
“생물은 자고로 타고난 천성대로 살아야 하는 법. 너는 그냥 떼쓰고 울고 징징거리며 매달리는 게 제일 잘 어울린다.”
“욕이지!”
“칭찬이지.”
“누가 그런 말을 칭찬으로 들어!”
“남 생각 하지 말고 네 멋대로 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건데 삐치기는.”
“……고도는 날 놀리기만 해. 미워.”
“어허,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느냐. 그깟 칭찬에 꼬리를 흔들고 있어. 거짓말이 능숙하지 못한 놈이로세.”
“아이씨, 진짜!”
미호는 손에 쥐고 주물럭거리던 의수를 세게 잡아당기고 말았다. 흥분하여 힘을 조절하지 못했다. 뒤늦게 깜짝 놀라 손을 뗐지만 이미 늦었다. 무두질을 통해 부드럽게 만든 사슴 가죽 끈은 미호의 힘을 견뎌내지 못한 채, 의수를 연결해 놓은 부위가 끊어졌다. 마당으로 나동그라진 의수를 보고 미호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어, 어떡해, 미안해, 진짜 미안해, 고도.”
미호가 황급히 고도의 의수를 잡으러 평상 밑에 발을 뻗었지만, 의수를 먼저 들어 올리는 손길이 있었다. 미호는 정수리 위로 드리워진 기다란 그림자를 따라서 고개를 들었다. 청사가 심통 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공이 짐승처럼 길쭉하여 냉정하게 보이는 눈이건만. 그 시선을 정면에서 받으면 지은 죄가 없어도 바짝 긴장하게 됐다. 하물며 잘못을 인정한 미호가 두 귀를 뒤로 바싹 젖히면서 뒤로 물러나는 것은 당연했다.
“일어났어?”
고도의 의수를 망가뜨렸는데 혼은 청사에게 날 것처럼, 미호는 뒤로 젖힌 귀를 파드득 흔들었다. 청사의 시선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미호가 이젠 꼬리까지 동그랗게 말고 뒤로 물러났다. 미안하다고 두 귀를 축 늘어뜨려서 용서를 구하는 바람에 청사는 한숨만 푹 내쉬었다. 호통을 칠 분위기가 아니었다.
“고도.”
미호에게서 시선을 뗀 청사가 두 팔을 벌려 고도를 품에 안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출렁이면서 고도와 청사의 어깨너머로 흘러내렸다. 고도는 청사를 보고 의아한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청사가 몸에 걸친 것이라곤 속곳처럼 얇은 무명 두루마기 한 겹이 전부였다. 허리춤의 끈도 제대로 묶지 않아서 마른 근육이 잡힌 상체와 탄탄한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옷 정리도 못 하고 한달음에 달려 나올 만큼 급한 일이 생겼나 오해가 생길 정도였다. 이런 모습에 고도는 면역이 있다 할 손, 미호에게는 망측한 일인지라. 그녀는 뒤로 젖혔던 귀를 앞으로 빳빳하게 세우고 사납게 소리쳤다.
“이 망할 용 새끼가. 옷 좀 제대로 입어! 내가 여성체라는 것도 잊었니?”
높은 목소리로 항의하는 미호를, 청사는 본체만체했다. 그의 관심사는 고도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고도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쪽 붙이면서 배시시 웃기만 했다.
“잘 잤어? 왜 먼저 일어나서 밖에 나와 있는 거야, 춥잖아. 이러다 고뿔 걸린다.”
고뿔 걱정은 청사에게 더 잘 어울릴 것을. 고도는 걱정의 주체와 객체가 바뀐 듯한 이 상황을 여전히 의문 띤 시선으로 바라봤다. 맨몸으로 달려와 저를 끌어안은 청사에게 손을 뻗은 건 한참 후였다. 고도는 흐트러진 청사의 긴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 머리를 쓸어 만지는 손길이 더없이 다정해서 청사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고도가 표현을 잘 안 해서 그렇지, 행동 하나하나에 애정이 묻어났다. 청사는 몸을 부르르 떨 정도로 좋은 감정을 내색치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평정심을 찾아야 했다.
“네 차림새가 고뿔 붙기 제격이구나. 지진아 말처럼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나오지 그러냐.”
고도의 목소리가 닿은 귀가 간지러웠다. 배시시 웃은 청사는 고도를 꼭 끌어안았다. 그의 목에 얼굴을 비비면서 속살거리길,
“귀찮아.”
어린애처럼 칭얼거리는 목소리라. 커다란 남자가 온몸으로 사랑을 표하는 모습을 겸연쩍게 여겼다. 청사의 행동은 언제나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싫지 않았지만 보는 눈은 신경 쓰였다. 고도는 미호를 한 번 바라보았다. 미호가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귀찮다는 말로 될 문제가 아니다만. 이러다 지진아 숨넘어갈라.”
청사는 고도를 바라볼 때와 확연하게 다른 온도로 미호를 바라봤다. 푸른 눈동자에 얼굴이 붉어져서 씩씩거리는 미호의 형상이 맺혔다. 어떻게 다 큰 처녀 앞에서 아랫도리를 훤히 내놓고 돌아다닐 수 있느냐며 자신의 불쾌한 심정을 보상해 달라고 외치는 기세였다. 고도를 향한 청사의 시선은 언 마당을 녹일 만큼 포근하고 다정했지만 미호를 쳐다보는 눈은 시큰둥하다 못해 귀찮다는 인상까지 녹아 있다. 미호로서는 아주 괘씸한 노릇이었다.
“이런 뻔뻔한 놈을 봤나. 야, 대롱이 너 너무한 거 아니니? 어떻게 나랑 고도를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 달라, 나 상처 받는다고!”
“뭐래, 이 노처녀 팔미호가.”
“뭐라고!”
“네가 고도를 자꾸 꾀어내려 하니까 그러잖아. 누가 쥐 잡아 먹은 입술 오물거리면서 고도랑 얘기해도 된다고 했어? 왜 고도를 넘보고 그러는 건데.”
“내 도홧빛 입술은 타고난 것이야! 내가 미쳤다고 저 도사 놈을 유혹하겠니?”
“그렇다면 행동거지 똑바로 해. 고도 마음 흔들지 말고.”
“쟨 이런 걸로 흔들릴 애도 아니잖아. 애초에 왜 이런 걸로 질투하는 거야.”
“나보다 더 친하게 지내지 마.”
“미친 용아, 너 고도에 대한 집착이나 의존도가 엄청 심해진 거 스스로 아나 모르겠어.”
“그럴 리가.”
“용이 인간한테 이러는 게 말이 되니! 하늘이 통탄할 일이다!”
“괜찮아. 나는 고도의 것이니까. 고도도 내 것이고. 그렇지 않느냐.”
쪽, 대답도 듣지 않고 청사는 고도의 볼에 한 번 더 입술을 묻었다. 고도는 이젠 청사의 이런 행동이 익숙한 듯 볼을 내어주면서 부끄러운 기색도 없었다. 미호만 가슴을 퉁퉁 칠 노릇이었다. 청사가 고도에게 품은 마음이 과했다. 고도가 청사를 받아들이는 마음도 지나치게 너그럽다. 둘에겐 절제가 없었다. 좋고 싫음을 즉각적으로 표현하며 주변 눈치를 살피지 않았다. 미호가 아닌 다른 존재가 이 모습을 봤다면 둘을 얼마나 꺼려했을지, 당사자들만 모르고 있지 않나. 인간의 방식으로 혼인을 맺어도 이만큼 애잔하게 서로를 생각하기도 힘들겠다며 미호는 쯧, 혀를 찼다. 미호의 심정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청사는 고도에게 연신 아양을 부렸다.
“고도야, 네가 옷 입혀 주면 안 되겠느냐.”
“어허, 누가 보면 손발 다친 환자라도 되는 줄 알겠어. 옷도 얇게 입고 나온 게 누군데 나한테 칭얼거리느냐.”
“엣취.”
“억지 기침은 삼가도록.”
“쳇, 그러니까 옷 입혀 주면 되지 않느냐.”
“멀쩡한 손으로 옷고름도 못 매느냐.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온 거냐.”
“그런 의미가 아닌 거 알잖아.”
“알았다, 알았느니라. 그만 끌어안아.”
고도가 몸을 일으켜 마당으로 내려서려 했다. 청사가 그런 고도를 번쩍 안아들었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뜬 고도는 제 무릎 밑과 등을 받쳐 든 청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청사는 올려다보는 고도의 시선을 향해 샐쭉이 미소 지어 보이더니 맨발로 마당에 들어섰다.
“부서진 의수는 새로 만들자. 이번엔 내가 힘을 보태 주마.”
얼결에 청사의 목 뒤를 양팔로 끌어안은 고도가 대답했다.
“괜찮다. 낡아도 그럭저럭 쓸 만해.”
“내가 보기 불편해서 그래.”
“어차피 붙여 놓고 도술을 써서 실제 손처럼 위장하면 된다. 그 정도는 문제없지.”
“너 이 녀석, 귀찮아서 새로 만들기 싫단 소리잖아. 의수를 새로 제작하는 게 뭐가 그리 귀찮다고 이 허름한 걸 손목에 달고 다니느냐.”
“원래 늙으면 만사 귀찮아지는 법.”
“흥, 너는 원래부터 만사에 시큰둥했거든? 요괴 관련한 일만 빼고.”
“우리 대롱이가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게 되어서 이제 재미가 없다. 놀려 먹을 수가 없어.”
“나는 즐거워. 이렇게 무심해진 고도가 이상하게 내 품에 안길 때마다 울면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데. 낮과 밤이 이리도 다른 귀여운 연인은 세상에 너뿐일 테다.”
“그만해라.”
“농담으로 들려?”
“알았다. 그 입 봉해 버리기 전에 다물고.”
“부끄러워 하긴, 그럼 약속의 뽀뽀.”
“진짜 봉해 버리든가 해야겠네.”
“그래, 네 그 입술로 내 입술을 얼른 봉해 주려무나. 어서 뽀뽀.”
보채는 청사를 불만족스럽게 올려다보던 고도가 청사의 뒷목에 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청사의 고개가 아래로 끌려 내려왔다.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청사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쪽. 가볍게 닿은 입술에서 감칠맛이 났다. 청사는 입맛을 다시다가 다시금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다물어 있던 입술을 벌렸다. 고개를 반대편으로 틀어 입술을 열자, 목 뒤를 감고 있는 고도의 손이 움찔거렸다. 고도는 단숨에 깊이 들어오는 청사의 호흡에 숨을 몰아쉬었다. 서로의 입술 주변으로 흩뿌려지는 숨결이 뜨거웠다. 청사는 허공으로 사라지는 고도의 숨결마저 담아 마셨다. 고도와의 입맞춤은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입술과 혀를 맞대고 하루 종일 방 안에 있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도, 오늘 바쁜 일 없지.”
고도는 자신을 내려 주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청사의 어깨 너머를 바라봤다. 눈 덮인 하얀 마당에 청사의 발자국이 요란스럽게 찍혀 있었다. 정자의 평상 아래에 가지런히 놓인 제 짚신짝보다 더 큰 발자국이었다. 여인만큼 고운 피부에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가지고 흑단 같은 머리칼을 지닌 이였지만, 손과 발이 커서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 주는 어엿한 ‘사내’의 몸을 가진 이이기도 했다. 예쁜 구석이 아무리 많아도 도저히 여인으로 보일 수 없는 이다. 그렇기에 고도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청사가 매번 난감했다. 정자에 홀로 남은 미호가 계절이 지난 쑥과 삿갓을 잔뜩 씹어 먹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될 정도였다. 청사는 심지까지 다 녹여 버리는 불길에 휩싸인 소년처럼 제 마음을 제어하지 못했다.
“일정, 일정이라.”
청사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미호의 찌푸린 얼굴이 사라지자 고도는 눈을 들어 청사를 올려다보았다. 이불 위에 고도를 다소곳이 눕힌 청사는 고도의 옷고름을 풀었다. 고도의 눈동자가 전보다 더 빠르게 굴러갔다.
“의수를 새로 맞춰야 한다.”
그 말에 청사가 바람 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아깐 귀찮아서 그냥 쓴다면서.”
“으으으음, 생각이 바뀌었다. 이왕 끈이 떨어진 거 새로 맞추는 게 좋겠어.”
“이 상황을 피해 보려고 아무 말이나 뱉었다면 실망이야.”
“어허, 내가 언제 아무렇게나 내뱉었더냐. 언제나 고민하고 숙고해서 딱 한 마디를 하는 신중한 남자인데.”
“허이구, 가슴에 손을 얹고 그런 말을 하시지.”
“이렇게?”
“아이고, 귀여워라.”
“아니, 네 놈 얼굴 붉히라고 하는 짓이 아니라……, 예끼, 이놈아. 내 오늘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옷은 그만 벗겨라.”
“고도, 네 말마따나 난 이제 너를 속속들이 알고 있어서 상황을 모면하려고 대충 내뱉는 말도 구분할 줄 알거든.”
고도는 청사를 너무 오냐오냐하며 받아 준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되짚어 보았다. 청사는 요즘 꽤나 자신감이 붙어서 밀어붙이는 경향이 생겼는데 그걸 거절하면 하루 종일 시무룩해 있었다. 승낙하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애정을 퍼붓고, 제어하면 금세 토라져서 하루 종일 삐쳐 있다. 고도가 보기에 청사는 중간이 없이 끝과 끝의 극단적인 행동만 일삼고 있었다. 이게 모두 청사의 계획이 아닐까, 잠깐 고민해 보았다. 실은 고도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뒤가 없도록 행동하는 것이 아닐는지.
청사가 고도보다 우위를 점하게 된 건 고도 탓이 컸다. 고도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 가기로 했을 때, 그 이유가 전적으로 청사라는 사실을 밝히고 나서는 주도권을 잡기 어려워졌다. 청사의 행동에서 불안감이 사라졌다. 이전엔 고도가 청사를 밀어낼까 봐 조심하는 기색이 있었다면 이제는 고도가 자신을 버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그 확신에 따른 행동에 힘이 붙어서 고도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물론, 고도에게도 표현을 요구했다.
고도는 아직 이런 사랑이 어색했다. 사랑이 무어라고 확실히 정의 내리기도 난감했다. 그저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이 있다면, 믿음과 신뢰, 정으로 얽히는 그 어떤 관계보다도 복잡하고, 상대에게는 일희일비하게 된다는 점이다. 저돌적인 청사를 나무라고 있지만, 고도 역시 청사가 곁에 있는 것을 더 안심하고 기뻐하니, 이게 서로를 갈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이런 관계는 결국 혼자보다는 둘이서 나누는 모든 것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지는 과정이었다. 날이 갈수록 청사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고, 이러다 속절없이 청사 없으면 못 살게 되면 어쩔지 걱정이 되었다. 고도의 속을 모르는 청사는 저항이 없는 고도를 보면서 샐쭉이 웃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말이다. 청사가 고도의 속곳까지 내리면서 속삭였다.
“의수는 내가 구해다 주마. 오늘은 추우니 나가기 싫지 않느냐. 나랑 계속 이렇게 있자.”
귓바퀴를 타고 흘러드는 달콤한 속삭임이 잔뜩 들떠 있었다. 고도는 골몰하던 고민을 머리 한편으로 밀어냈다. 앞으로 있을 일을 고민해 봤자 직접 겪어 보지 않는 한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배워 왔다. 섣부른 판단과 결론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현재에 충실하기로 결심한 고도는 청사가 자신의 귀를 만지작거리는 동안 몸에서 힘을 풀었다. 볼과 목 부근에 순흔을 남기던 청사가 고도의 앞머리를 손바닥으로 넘겨주었다. 정욕이 가득한 눈이 고도를 긴장시켰다. 고도는 목 뒤로 돋아난 소름을 애써 외면했다. 이런 태도의 청사에게 면역이 생기려면 조금 더 시일이 걸릴 듯 했다.
“대롱아.”
고도의 부름에 청사는 고도의 양다리를 허리에 감던 행동을 멈췄다.
“왜?”
고도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청사는 고도의 등허리 뒤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불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던 고도의 몸이 청사의 두 팔로 인해 허공에 들어 올려졌다. 청사는 벗은 가슴을 맞붙이고 고도를 지척에서 바라봤다. 얇은 살갗 너머에서 울리는 심장 소리가 하나로 합쳐졌다. 날 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서로의 소리에 익숙해진 것이 청사는 못내 흡족했다. 고도의 턱에 입술을 맞췄다. 고도가 청사의 입맞춤에 응하면서 말했다.
“적당히 봐주면서 해줘라. 말했다시피 내가 늙어서 기력이 없거든.”
“이렇게 탐스러운 육체를 두고 그런 노인 같은 말을 하면 안 되지.”
“내 살아온 세월이 이미 수백 년이라, 지칠 만도 하지.”
“머리는 그렇게 인식하는 모양이지? 몸도 그런지는 한번 볼까?”
청사는 고도의 아래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사타구니 사이는 뜨겁고 부드러웠다. 말로는 늙었다 하지만 청사의 손가락을 게걸스럽게 잡아먹은 아래는 아직도 육욕에 착실히 반응했다. 정신과 육체가 느끼는 바가 다른 고도의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오늘은 하루 종일 귀에 대고 속삭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도가 말로는 늙었다, 지쳤다 하고 스스로도 움직이길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런 마음가짐과 달리 매번 청사의 품에 안겨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붉게 젖은 눈으로 올려다보며 우는 모습은 야했다. 그 선정적인 모습을 정말로 본인은 모르는 듯했다.
고도가 성감대를 자극받아 숨을 헐떡이는 모습을 상상한 청사는 더는 지체하지 않았다. 고도의 하얀 허벅지가 파르르 떨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발끝을 둥글게 말면서 어쩔 줄 모르는 감각에 휩쓸리는 걸 같이 느끼고 싶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힘겨워하는 모습도 당장 탐하고 싶어 미칠 노릇이었다.
“아.”
맞닿은 가슴을 느리게 비비자 고도가 짧게 신음했다. 의지와는 상관없는 고도의 육체적 반응이 청사의 행동에 불을 지폈다.
“오늘은 방에서 못 나갈 줄 알아라, 귀여운 내 사랑아.”
늙었다는 생각은 두 번 다시 못하게 할 만큼 그의 몸을 뜨겁게 감싸 주겠노라 다짐하는 청사였다.
*
“아, 그만, 그만, 대롱아 잠시 멈추어라, 아, 아, 읏!”
땀에 젖은 짧은 머리가 흐트러졌다. 숨을 다급히 몰아쉬는 고도가 손을 내밀어 잠시 멈출 것을 요구했다. 청사는 그 뜻을 듣지 않았다. 고도를 내려다보며 제 입술을 핥기만 했다. 색탐에 완전히 몰두해 있는 반응이었다. 고도의 마른 허리가 눈앞에서 둥글게 말린 모습은 색정적이어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팔에서 힘이 풀린 고도가 상체를 지탱하지 못하고 엎드려서 엉덩이만 든 채 울면 청사는 ‘쉬, 쉬 괜찮아’라는 거짓 달램을 습관처럼 뱉었다. 끊임없이 허리를 밀어붙였다. 토정한 정액으로 흠뻑 젖은 고도의 엉덩이 사이를 청사가 들쑤실 때마다 젖은 낭심과 엉덩이가 마찰하는 살 소리가 적나라하게 방 안을 울렸다. 고도가 그 뜨거운 열기에 머릿속이 완전히 녹아서는 청사의 허릿짓에 박자를 맞출 때면 청사는 형용 못할 만족감에 목 너머를 그르렁 울렸다.
“아아, 좋아, 아, 좋아서 미치겠어, 고도.”
“아, 아읏, 빠, 빨라…….”
“잘하고 있어, 아, 아아.”
청사가 고도의 허리를 잡고 마지막 속도를 올리자 고도가 이불을 움켜쥐었다.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아파서 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청사는 잘 알고 있었다.
“아, 아앗……!”
고도가 허리를 비틀며 몸을 웅크렸다. 등을 타고 흘러내린 뼈와 근육의 곡선이 욕망을 절정으로 밀어붙였다. 청사는 고도가 토정하는 그때에 맞춰서 함께 절정에 달할 수 있었다. 몸을 부르르 떨면서 바닥과 이불에 하얀 액체를 질질 싸고 만 고도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고도가 체력이 완전히 떨어져서 나가떨어진 모습을 본 청사는 아직 제 색욕이 충족되지 않은 현실에 슬픈 표정을 짓고 말았다. 고도의 몸속에서 제 물건을 빼내자 안에서부터 딸려 나온 하얀 점액질이 고도의 허벅지 밑까지 흘러내렸다. 청사는 손수 고도의 몸을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으로 닦아 주고, 몸속에 뿌린 정액까지 긁어 낸 후에야 고도를 품에 안고 이불을 목 밑까지 끌어당길 수 있었다.
“매번 이러면 안 되는데.”
기절하듯 정신을 놓은 고도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고도가 힘에 부치는 사실을 매번 인지하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고도만 보면 몸속에서 솟구치는 열기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고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면서 청사는 연신 고도의 얼굴에 제 얼굴을 비볐다. 이런 상태에서도 고도의 몸을 만지지 않으면 혼자서 열기를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손바닥에 감기는 고도의 보드라운 살갗이 좋았다. 왼팔을 고도에게 팔베개를 해준 청사는 자유로운 다른 손으로는 고도의 배를 만지작거렸다. 마른 근육만 잡히는 판판한 배를 손으로 주무르면서 손바닥에 감기는 음모와 성기도 함께 쓰다듬었다. 음모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한 밀도로 우거져 있었는데, 이렇게 높은 체온에 젖어 있으면 은밀한 늪처럼 보여서 연신 손길이 가는 곳 중 하나였다. 젖은 음모를 손가락 사이에 감으면서 말랑거리는 성기를 쓰다듬자 고도가 본능적으로 미간을 좁히며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입술 새로 흘려보냈다.
“아.”
귓가에서 짧게 부서지는 신음은 본능적이었다. 고도가 고개를 돌리고 있느라 드러난 목선에 청사는 고개를 묻었다. 숨을 폐부 깊숙하게 들이마시자 고도의 익숙한 체향도 딸려 왔다. 청사는 당장이라도 고도의 다리를 허리에 감고 온몸을 이 은밀한 늪 사이로 파고들고 싶었다. 그 욕구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고도는 많이 지쳐 있었다. 매일 기력이 다할 정도로 강하게 몰아붙이는 청사를 감당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고도가 까무룩 정신을 잃을 만큼 밀어붙이는 것도 적당히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간과 용족은 체력과 정신력에 있어서도 같은 선상이 아니다. 자꾸만 이 사실을 까먹어서 극단으로 치닫는 게 문제였다.
청사는 살집 없는 허리와 배를 더 세게 안았다. 자세가 불편해서 몸을 뒤척거리려는 고도에게 어림없다며 끌어안고 놔주지 않는 청사였다. 가슴팍에 고개를 기대고 편안한 숨결을 내뱉는 고도의 모습을 청사는 지겹지도 않은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고도의 얼굴 곳곳에 입술을 내려앉혔다. 고도의 얼굴과 머리카락 사이에 고개를 박은 청사도 무거워진 눈꺼풀을 내리고 잠에 빠질 때였다.
‘이런, 어떻게 된 일이지? 인간이잖아.’
낯선 소리가 꿈결처럼 들렸다. 실재와 꿈을 구분할 겨를도 없이 소리가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이런 일은 처음이야.’
‘잘못 찾은 거야. 우리가 실수한 게 틀림없어.’
‘아냐, 이건 인간이 아니야. 인간은 이런 힘이 없어. 혹시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쓴 게 아닐까?’
‘그분은 그런 저급한 짓을 하지 않아.’
‘맞아, 그분은 아주 우아하고 품위 있고 고귀한 분이셔서 한낱 인간의 껍데기를 탐하지 않으시지.’
‘그럼 뭘까. 이 아이는 누구지.’
‘누굴까. 무엇이기에 그분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분일까.’
‘아닐까.’
‘맞을까.’
‘틀릴까.’
‘옳을까.’
속살거리는 작은 소리에 청사는 감았던 눈을 떴다. 서쪽 창에 몸을 숙이고 있는 노을빛 너머로 가마솥을 얹은 아궁이처럼 하늘이 일렁였다. 낮과 밤의 경계. 낮 동안 살아 숨 쉬던 모든 것들이 깊은 잠의 이불을 덮는 시간. 그 시간은 찰나여서 하늘에 걸린 노을의 장막이 바람에 나부끼기 일쑤였다. 세상이 밝음과 어둠의 틈바구니에 낀 때에, 방 안을 가득 울리는 목소리는 신비로우면서도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청사는 몸을 반쯤 일으키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다만, 어디서 언제 나타난 것인지 모를 빛무리가 깊은 잠에 빠진 고도의 주변에서 반짝거리고 있음이 문제였다.
‘그분이야.’
‘아니야.’
‘맞아.’
‘달라.’
‘옳아.’
‘틀렸어.’
빛들이 고도의 검고 짧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면서 실랑이를 벌였다. 쌕쌕, 고른 숨을 내쉬는 호흡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깊은 잠에 빠진 고도 주변으로 흰빛이 모여들었으나, 고도는 느끼지 못했다. 빛은 형태가 없었고 손과 발로 보이는 기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형의 존재가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는 현상을 보였다. 청사는 작은 요괴들의 장난으로만 알았다가 곧 그 생각을 정정했다. 작은 빛은 요괴 특유의 삿된 기운이 전혀 묻어나질 않았다. 빛들이 내뿜는 기운은 상서롭고 귀하여 기린이나 해태 등의 성수 주변에 머무는 힘을 닮아 있었다. 청사는 고도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빛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아리아*?”
빛들이 깜짝 놀라 우왕좌왕하는 기색을 보였다. 한데 모여 수군거리면서 고도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던 것들이 뿔뿔이 흩어져서는 허공을 휘적거리며 날아다녔다. 그들이 사방에서 겁먹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릴 알아!’
‘누구야? 요괴인가?’
‘이상한 기운이야! 혹시 저게 그분인가?’
‘아냐, 그분과 정반대의 속성이야. 저건 하늘의 권속이야.’
‘하늘!’
‘하늘!’
꺄악, 비명을 지른 빛들이 사라졌다. 맑고 투명하게 울리던 목소리가 사라지고 그들이 은은하게 내비추던 향기와 기운마저 깔끔하게 없어져 버리자 청사는 퍽 당황했다. 너무 갑작스러웠다. 돌연 나타난 빛무리가 고도를 유심히 살피더니 놀라서 줄행랑을 친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청사는 아리아라는 존재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자연과 만물의 흐름을 따라 정처 없이 배회한다는 사실만 단편적으로 알 뿐이다. 그들은 땅의 권속 중에서도 힘이 강한 이들 주변에 군집하며 밝은 빛으로 산란하는 쓸데없으면서도 시끄럽지만 하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다.
청사가 아리아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고도와 함께 하계를 돌아다닐 때는 고도가 등 뒤에 구천 마리 이상의 요괴가 봉인된 죽통을 들고 다녔으므로 그 오염된 기운에 아리아는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땅에 속한 정화된 존재들은 스스로 고도를 피했다. 인간들 틈에 섞여들지 못한 고도가 땅에게도 외면 받아 팔미호와 도깨비랑 우애를 다지며 함께 다닌 것은 땅이 먼저 고도를 외면한 탓도 컸다. 고도에게 극노한 염라대왕의 화가 자칫 자신들에게 미칠까 봐 땅이 먼저 등을 돌렸고, 고도는 그 이름만큼이나 외롭고 고된 길을 걸어야 했다. 그런 고도에게 아리아가 먼저 다가온 현상은 가볍게 치부할 일이 아니었다. 고도를 버렸던 땅이 왜 이제야 고도에게 다시 아는 척을 하는 걸까. 왜 갑자기?
“……그분은 뭐지.”
아리아들이 속살거린 ‘그분’의 정체에 대해서도 감을 잡을 수 없는 청사였다. 고도와 누군가를 착각한 걸까.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다. 땅도 실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리아는 대체로 이성과 본능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존재들과는 달리 ‘땅의 권속과 힘’의 크기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특수한 종족이기에 그런 실수는 거의 벌어지지 않는 게 정설이었다. 아리아가 왜 고도 곁에 온 것인지, 정말로 단순한 실수라 넘겨야 하는지 청사는 차분하게 머리를 굴렸다.
“땅에 무슨 변화가 있는 건 아니겠지.”
청사는 몸을 일으켰다. 잠이 든 고도를 보고, 그가 당분간 잠에서 깨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옷을 바르게 갖춰 입고 마루 밑의 신을 꺼내 신었다. 집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침에 정자에 앉아 있었던 미호는 보이지 않았다. 텅 빈 마당을 한차례 둘러본 청사의 발길이 산으로 향했다. 깊은 산 외딴 곳에 버려진 집에서 생활한 지 몇 달이 되어 가고 있어서, 근처 산세와 길과 방위는 대충 익히고 있는 청사였다. 한밤중에 산에 버려진다 해도 눈 감고도 집을 찾을 수 있었기에 걱정 없이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길 어디에서도 아리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땅의 울림도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변한 것은 없었다. 땅은 여전히 고요했고 침묵을 지켰다. 인간도 요괴도 도깨비도 성수도, 그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고 묵묵하게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감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땅의 눈꺼풀은 무겁다. 진정한 위협이 없으면 눈을 뜨지 않는다. 우직한 땅은 어제도 오늘도 여전히 몸을 웅크린 채 느리게 숨을 내쉴 뿐이었다. 땅이 그대로인데 그의 권속인 아리아가 찾아온 점은 기이했다.
“아리아, 그분. 아리아, 그분.”
중얼거리는 청사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한동안 고도 주변이 잠잠했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무슨 일이 터지려는 것인지. 입가가 절로 씰룩거리면서 불쾌함으로 일그러졌다.
청사의 피부 위로 용 비늘이 뻣뻣하게 일어났다가 다시 누웠다. 산이 하늘의 기세에 눌려 숨을 죽였다. 어른의 눈치를 살피는 어린아이의 형상이다. 땅을 발아래 굽어 둘 수 있는 존재에게 스스로 몸을 낮추는 태도를 취하니, 청사도 일방적으로 분노를 표출할 수 없었다. 아리아를 쫓으려던 걸음을 멈추고 고도가 잠들어 있는 집으로 되돌아가려 할 때였다.
“어.”
예기치 못한 것을 본 청사가 탄성을 터뜨렸다. 걸음을 멈추고 눈앞을 응시했다. 황색 푸르름으로 빛나는 거대한 날개를 지닌 새 한 마리가 나타났다. 마치 청사가 혼자 있기를 기다린 것처럼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청사의 주변을 표표하게 날아다니는 날갯짓이 낯설지 않았다. 바람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새가 기지개를 켜듯 날갯짓이 필요 이상으로 컸다. 오색빛깔의 칼깃이 비비한 새. 지상이 아닌 천상의 존재였다.
“치미?”
삐익, 새의 대답이 이어졌다. 청사는 퍽 당황한 얼굴로 봉황을 바라봤다. 산과 아리아에 집중했던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봉황을 보자 까마득히 잊고 있던 하늘 위의 사정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땅에 있는 동안은 청사에게 관여하지 않겠다던 아비의 약속이 메아리처럼 들렸다. 왜 갑자기 봉황이 지상으로 내려와 자신을 찾아온 것인가. 관여 않겠다던 약조는 거짓이었나. 청사는 눈살을 찌푸리고 봉황을 노려보았다. 봉황 다리에 매인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좁혔던 미간을 폈다. 이런 귀한 새를 전서구로 쓰는 이는 청사가 아는 한 하늘에서 단 하나였다.
“아버지가 아닌, 누이가 보낸 거냐.”
치미가 청사의 어깨에 앉아 왼쪽 발을 내밀었다. 발목에 묶여 있는 두툼한 양의 종이가 보였다. 비단 끈으로 곱게 묶어 둔 종이는 전서치고는 상당히 많은 양이었다. 청사는 전서의 비단 끈을 풀어 종이를 펼쳤다. 은하수를 갈아 만든 먹이 비단 종이 위로 유려한 필체가 되어 움직였다.
[어리석은 동생에게 할 말이 있어서 누이 서진이 붓을 들었단다.]
“누이에게 지금 신경 쓸 정신이 어디 있다고. 참으로 때를 못 맞춰 서신을 보내는구나.”
후환이고 뭐고 지금은 땅에 신경을 쓰고 싶다. 하늘 일은 하늘에 돌아가서 생각해도 되지 않겠는가. 서신을 도로 접어 비단 끈으로 묶어 버리려 하자 치미가 삐익, 울었다. 청사의 머리카락을 부리로 물고 잡아당기며 항의했다. 청사는 하늘의 연락을 모두 무시하고 고도가 자고 있는 집으로 향했으나, 연신 앞길을 가로막는 봉황을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알았다, 알았다고.”
짜증스레 다시 전서를 펼쳤다. 서신 속 글자들이 반짝반짝 영험하게 빛을 냈다.
[땅 위의 삶은 그럭저럭 버틸 만하더냐. 내 몇 번 내려가 본 적 없지만, 그곳은 참 척박하고 좁았던 기억이 난다. 자미원의 가장 작은 해우소보다 더 작은 곳에서 삼 대가 머물며 함께 사는 모습에 어찌나 측은지심이 들던지. 그러면서 저녁밥은 이십 첩 반상인 것을 보고 놀랐단다. 사람들이 그들을 양반이라 부르던데 양반이 그리 좁은 집에서 살면 한 나라의 왕은 얼마나 작은 데서 산단 말이냐! 우리네 마당보다 더 작은 곳에 아흔아홉 개의 기둥을 세우고 나라를 다스린다 생각하면 손발로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다!]
마당보다 좁은 곳에 터를 잡고 사는 삶이 맞지만, 그게 딱히 좁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사치스러운 누이의 발언을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것으로 대충 넘겼다. 곧 치미가 조그마한 부리로 손가락을 찔러대는 통에 청사는 나머지 내용을 억지스러운 정성을 다해 읽어 내야만 했다. 지상에 대한 불평과 하늘에 대한 예찬을 눈치껏 건너뛴 청사는 누이가 서신을 보낸 결정적인 이유를 단 하나의 문단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은퇴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셨다. 상제님의 허락이 떨어졌고, 후계 수업을 받는 너에게 직위와 권리가 우선적으로 물려질 것을 하늘 전체에 공표했느니라.]
청사의 눈이 한 대목에서 멈추었다. 은퇴, 라는 말을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뱉었다. 곧 기함하여 소리를 내질렀다.
“뭐?”
청사는 급히 머리를 굴렸다. 아직 아버지의 은퇴 시기와 자신의 천룡 즉위식이 여덟 달은 남은 터였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올 때도 한 해 동안의 자유를 허락받았었다. 그 전제하에 고도를 찾아와 사랑을 나눈 것이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은퇴라니.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 서신을 읽은 청사가 하늘로 강제 송환을 당할까 우려할 것을 미리 예견했는지 누이는 바로 다음 문장에 곧장 이런 말을 적어 넣었다.
[어디 도망칠 생각 마라. 내가 친히 군대를 끌고 가 네 뒷덜미를 잡고 하늘로 올려 보내는 수가 있노라. 내 눈을 피해 몸을 숨길 생각은 하지 마.]
“대체 언제 예언까지 하게 된 거야, 누이는!”
[그리고 이건 예언이 아니라 네 행동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니, 굳이 하늘의 별자리를 헤아려 미래를 보지 않아도 네 반응은 뻔하다.]
“염병!”
[이런 나한테 욕하지도 말고.]
“―…….”
옆에서 부리로 찍어대는 치미를 밀어낸 청사는 불퉁한 얼굴로 서신을 마저 읽어 나갔다.
[아버지께서 건강이 악화되어 일선에서 빨리 물러나는 것이니라. 그렇다고 거동이 불편하신 정도는 아냐. 그저 요즘엔 고뿔에 걸리면 열흘을 지독하게 앓아누우실 만큼 몸이 많이 쇠하신 게지. 지금도 우려할 정도로 나쁜 상황은 아니니 너무 쓸데없는 걱정은 마라. 아버님께서도 일찍 물러나시며 네가 하계에서 넉넉히 머물어도 된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무척 안타까워하신단다. 그래서 상제님과 말씀을 나누신 뒤 네가 바로 즉위식을 갖지 않고 유예해도 될 만한 핑계를 만드셨단다.]
유예가 가능한 핑계가 무엇인지. 선뜻 생각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한 청사는 곧 이어진 이야기에 진심으로 비명을 질렀다.
[네가 혼사도 못 치르고 바로 즉위하면 일에 치여 배우자를 찾지도 못할 거라며 하계에서 그를 찾아오느라 늦을 수 있다는 공표를 했노라.]
배우자! 이 무슨 미친 소린가! 왜 당사자의 의견도 묻지 않고 거짓으로 천인들을 속인다는 것인가. 그것도 상제와 아비가 함께. 둘이 죽이 잘 맞는 절친한 사이더니 이런 괴팍한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성향도 똑 닮은 건가!
청사는 톡톡히 골탕 먹은 기분이었다. 아비와 상제의 손바닥에서 놀아나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혼사는 무슨, 당분간 하계에 머물면서 고도랑 사심 없이 사랑을 나누고 종국엔 그를 하늘로 데려가 함께 살 생각만 하지 않았나.
청사는 손톱을 질끈 깨물었다. 손톱 끝을 씹으면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읽었던 내용을 다시 찬찬히 되짚었다. 친부가 천룡직에서 물러나면서 해당 직위가 공석이 된 상태다. 이럴 땐 후계자가 바로 즉위식을 갖고 일을 이어 가야 하지만, 예정에도 없이 은퇴를 한 경우라 강제로 즉위식을 앞당기는 대신 당분간 공석으로 두도록 하는 예외사항을 만들었다. 그 예외사항이란 것이 “차기 천룡이 배우자를 찾고자 하계로 내려갔다”는 핑계거리였다. 이건 아버지와 상제가 쌍으로 자신의 목에 줄을 채운 것과 다름없었다. 혼사 생각이 없고 고도와 함께 여생을 보낼 생각만 하는 청사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추진하는 일 아닌가.
청사는 화가 나서 가슴이 뜨거워졌다. 머리로 몰리는 열감을 밀어내며 침착함과 평정심을 찾고자 부단히도 노력했다. 아비와 상제가 저를 엿 먹이려고 작정한 뒤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아닐 것이다. 상제는 고도를 탐탁지 않게 여기니 이런 짓을 주도했을 수는 있지만, 아버지는 고도에게 싫은 감정이나 좋은 감정 등 특별한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만약 아버지가 고도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청사에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줘서”겠고,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차기 천룡이 자꾸만 하계로 내려가는 몹쓸 원인 제공자”일 테다. 두 가지 의견 모두 나름의 정당한 이유가 존재했다. 그러나 아비는 정작 청사에게 “너도 다 컸으니 알아서 처신하라”고 맡겼을 만큼 고도의 문제를 깊게 생각하지 않는 편에 가까웠다. 혼사란 주제를 들먹인 것은 아비보다 상제의 입김이 더 컸을 터.
청사는 서신을 반으로 접어 더는 읽지 않았다. 근처 바위에 앉았다. 한쪽 무릎을 굽히고 그 위에 팔을 얹어 턱을 괴었다. 서신을 손에 구겨 쥔 채 얼굴을 받친 손가락으로 제 볼을 툭툭 두드렸다.
하계 생활이 끝나면 천룡 즉위식과 혼사 동시에 준비해야 할 것이다. 하늘로 돌아갈 때 부인을 데려가지 못하면 인간들에게 하늘에 제사를 지내도록 강요하여 제물로 받쳐진 인간 여자를 잉태시키는 절차를 가져야 한다. 고도가 옆에 있는데 다른 여인과 배를 맞추어 잉태시키는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여인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배를 맞춘단 말인가. 사랑하는 이는 고도뿐이거늘. 하나, 천룡의 의무 중 하나가 후계를 보는 것과 연결된다면 청사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대롱아, 나는 너를 위해 살고 싶다.’
평생을 죽기 위해 여행을 해온 고도가 동해 용왕 앞에서 그렇게 소원을 빌었다. 평생의 숙원을 접고 오로지 청사를 위해 연명하겠다고 생각을 고쳤다. 수십 년 동안 마음먹은 인생의 지침을 사랑 하나로 포기하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던가. 청사는 잊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저 사랑스럽고 소중한 이를 배신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도 안 된다. 그가 자신에게 준 목숨을 평생토록 소중히 아끼면서 보듬어 주겠노라 하늘에 맹세했다. 그런 고도를 옆에 두고 다른 연인과 혼약을 맺는 일은 염두에 두고 싶지도 않았다. 함께 사는 것은 고도 하나다. 그가 반려자다. 잉태를 위한 여식과 잠자리를 들면서 고도를 상처 입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고도의 숨결, 그의 마음, 그의 생각과 육신 모든 것이 청사에겐 필요했다. 단 하나도 다른 존재에게 양보할 수 없었다. 고도는 자신의 것이었다. 자신은 고도의 것이었다. 서로의 존재 가치와 시간을 나누기로 약속한 이였다. 그것은 정인이라는 단순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러나 고도를 반려자로 공표한다 해도 후계를 낳을 여인과의 혼사를 계속해서 추진하려 한다면 청사로서는 도리가 없다. 천룡의 후계는 하늘에서 최우선으로 처리하는 문제이기에 청사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상제의 명이 직접 하달되는 일이다. 천룡의 후계가 곧 상제를 보필하는 재상이 된다. 하늘 일을 결정할 때 청사보다 상제의 의견이 중요하게 반영되는 것은 당연했다.
청사가 말없이 고민에 빠지자 지켜보던 치미는 날개를 접어 나뭇가지에 앉았다. 기운 빠진 치미를 보던 청사가 고개를 들었다. 서신을 보낸 누이에게로 생각이 옮겨졌다. 어쩌면 누이는 이 후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 수도 있다. 본디 아이를 잉태하고 낳아 기르는 것은 여인의 몸으로 이루어지는 거룩한 행위라, 혼사와 새끼를 낳을 생각이 일절 없는 누이일지라도 그 같은 여성 고유의 영역에는 지극한 관심이 있을 터였다. 누이라면 알 수도 있다. 부탁을 하면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청사는 전서 뒷면을 손끝으로 훑었다. 안쪽에 적혀 있는 글자들이 서신 바깥쪽으로 움직여 나왔다. 청사의 뜻대로 서신 밖에 새로운 글자가 형성되었다. 그것은 누이에게 현재의 상황을 알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간단명료하게 적은 답신이었다.
“치미, 네 주인에게 돌아가거라.”
치미는 날개를 흔들었다. 청사의 답신을 주인에게 돌려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쁜 듯했다. 가벼운 몸짓으로 허공을 향해 포롱거렸다. 날아오른 칼깃에서 뿌려지는 오색찬란한 무지갯빛이 흩뿌려졌다. 꼬리털이 유난히 긴 봉황은 청사를 한 바퀴 돌아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사라진 치미의 빛을 오랫동안 지켜본 청사가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청사를 휘감던 바람이 갑자기 길을 바꾸어 청사를 피하기 시작했다. 깊은 산에서 어울리던 이매망량과 도깨비들이 숨을 죽였다. 청사의 먹색 머리를 비추던 달그림자도 고개를 숙였다. 나뭇가지와 돌멩이, 잔 벌레들이 모두 청사의 몸에 자신의 더러운 손이라도 닿을세라 뒤로 물러났다. 숨기고 있던 하늘의 기운을 여과 없이 드러내자 세상 만물이 청사의 아래에 몸을 숙였다.
청사는 한 가지 문제만 해결하면 하늘로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다. 한 가지 문제만. 그 문제가 지나치게 버겁다는 사실을 청사는 인정했다. 고도를 하늘로 데리고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풀기 어려운 문제가 거대한 몸을 웅크리고 청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사는 질린 얼굴로 문제를 쳐다봤지만 여기에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고도와 함께 올라갈 하늘에서는 이보다 더 골치 아프고 어려운 일들이 닥치게 될 것이다. 고작 눈앞의 문제에 일희일비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고도에게 영원을 맹세한 다짐마저 언젠가 흔들릴지도 모르는 법이다. 이번을 기회 삼아 그 어떤 문제도 고도와 자신을 갈라놓을 수 없음을 보여 주기로 마음먹었다. 결심을 굳힌 파란 눈동자가 우아한 품위를 내뿜으며 빛났다.
“고도에게 조금도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 것이다. 누이라면 분명히 그 방법을 알고 있을 거야.”
모든 일을 가능한 빠르게 추진하기로 했다.
*
몽당이 낚시 도구를 챙겨왔다. 바다에서 물질 할 때 쓰는 것과 달리, 코가 작은 쇠갈고리와 명주실이 전부였다. 잡은 고기를 담을 주루먹**은 미호가 부엌에서 들고 왔다. 치마를 걷어서 허리춤에서 묶자, 걷어 올린 옷자락 밑으로 도타운 속바지가 보였다. 보슬보슬 김이 오른 주먹밥을 챙겨서 주루먹에 담아 준 고도가 앞장섰다. 뒤이어 몽당이와 미호과 왁자지껄 웃으며 따라왔다.
고도는 때때로 미호와 몽당을 데리고 얼음낚시를 즐겼다. 꽁꽁 언 계곡가를 발끝으로 툭툭 두드리면서 목 좋은 곳에 구멍을 뚫으면 운이 좋은 날엔 잠자는 송어들이 잡혔다. 어부였던 경험을 무시 못 하는지, 물고기는 고도의 손에 귀신같이 걸려들었다. 똑같이 명주실에 지렁이를 끼우고 고기를 기다려도, 미호와 몽당이에게는 입질이 오지 않았다.
성미가 급한 미호는 낚싯줄을 내팽개치고 토끼나 까투리 등을 잡으러 산으로 들어가곤 했다. 돌아올 땐 양손에 두둑한 찬거리용 고기가 달려 있었고 말이다. 미호는 고기를 들고 아랫마을에서 곶감을 얻어 왔다. 곶감 따위엔 통 관심이 없는 미호지만, 매일 사냥한 육고기, 물고기로만 겨울을 보내는 고도가 신경 쓰여서 입가심을 위해 바꿔 왔다. 고도는 송어 한 마리를 통째로 솥에 넣고 어죽을 끌이다가, 미호의 기특한 행동에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녀는 “어린애 취급하지 마!”라고 퉁명스레 외치면서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지만 말이다.
미호는 정자에 앉은 고도 옆에 붙어 앉았다. 미호의 꼬리 여덟 개가 뻣뻣하게 섰다. 미호의 앉은키보다 더 높은 백색 꼬리들이 털을 바싹 세우고 미호의 정수리 위에서 신경질적으로 흔들렸다. 그런 꼬리를 붙잡고 있는 조그마한 도깨비 몽당이는 꼬리가 움직일 때마다 재미있다면서 까르륵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엇이 널 이리 화나게 만들었을까.”
고도의 물음에 미호는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울렸다.
“자꾸만 이 산의 여우들이 나를 찾아와! 토월산으로 빨리 돌아가라고 캐갱캐갱 울어대!”
대체 여우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무슨 재주냐고 묻고 싶은 고도였다. 여우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저 반인반요의 팔미호는 간혹 만능 도사인 고도도 할 줄 모르는 재주를 부렸다. 짐승들과 교감하며 대화하는 부분이 특히 그러했다.
“흐음, 네가 혼약 적령기라 구미호 뿐만 아니라, 여우들도 꼬이는 모양이야.”
“악,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왤까. 우리 지진아가 이토록 인기가 많았는지 오늘 처음 알았네.”
“나같은 예쁜 여성체는 당연히 인기가 많지.”
“오호라, 그 인기로 순박한 시골 남자 꼬아내서 또 간이라도 빼먹으려고?”
“이제 인간이라면 치가 떨린다. 그럴 일 없으니 안심해. 아부지가 날 찾는다고 여우들이 합심해서 날 토월산으로 보내려는 거야.”
“호오, 버린 자식이 아니었구나.”
“버리다니! 내가 촌장 딸인 걸 몰랐던 거야? 토월산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구미호라고.”
“그랬군.”
“대답이 성의 없어!”
발톱을 꺼내면서 반발하는 미호의 뒤에서 몽당이가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살랑거리는 여우 꼬리를 잡고 놀이를 즐기던 몽당이 폴짝, 마루 위로 뛰어내렸다. 짤막한 다리를 뒤뚱거리며 달린 몽당이 고도의 양반다리 위로 올라왔다. 포개어 덮은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몽당이 고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고도는 곶감을 먹다 말고 몽당을 쳐다봤다. 저를 닮은 얼굴을 한 어린아이의 형상이 낯설면서도 신기한지 데굴데굴 검은 눈을 굴렸다. 고도는 몽당이를 한참이나 관찰했다. 몽당이가 가랑이 사이에서 폴짝폴짝 뛰면서 고도를 향해 손을 흔드는 통에 고도는 소매 속에 감춰 두었던 손가락을 꺼내 주었다. 몽당이는 제 손바닥만 한 고도의 집게손가락을 양손에 쥐고 흔들면서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까르륵 웃기 바빴다.
“돌아가면 분명히 혼사를 치르라고 난리일 텐데.”
혼사 얘기에 몽당이에게 손가락을 내어 준 고도가 고개를 들었다. 말도 하지 못하는 어린 도깨비에게 관심을 쏟느라 미호의 말을 귀담아 듣지 못했다. 혼사. 그 단어에 고도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녀석, 혹시 혼사를 피해서 이리로 도망 온 게냐?”
본심을 꿰뚫린 미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쩜, 예나 지금이나 미호가 고도를 속이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
“시, 싫어서 도망칠 수도 있지!”
“역시나 나를 대피처 삼았던 거군. 네 놈 그렇게 친구가 없느냐. 나 아니면 찾아올 데가 없었다니.”
“그, 그거 아니거든!”
“그럼 내가 그렇게 좋아?”
“으아아, 너 진짜 얄미워!”
“좋아한단 말을 왜 못할까. 자 따라해 봐라, 나 지진아는 고도처럼 늠름하고 잘생긴 남자를 좋아한다.”
“아냐!”
“좋아해. 그 말이 그렇게 어렵더냐. 좋아해.”
“조, 좋아……하지 않아.”
대답은 그리하면서도 얼굴이 시뻘건 것이 고도를 다른 누구보다 좋아한단 사실을 부인하긴 어려운 듯하다. 고도는 히죽 웃으면서 미호의 머리통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싫으면 도망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지진아로다.”
“읏, 너는 겪어보지 못해서 그래. 혼사로 시달리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데.”
“흐음. 그건 좀 이상하긴 하구나. 넌 인간 남자를 동족보다 좋아하지 않느냐. 그러한 혼사를 집안에서 추진하려고 한다고?”
“그럴 리가 있겠니. 아부지는 날 반인반요에게 시집보내려 할 거야. 인간이 되고 싶은 생각일랑 집어치우고 평생 요괴로 살라는 뜻이겠지.”
뻣뻣하게 신경질을 부리던 여덟 개의 꼬리가 힘없이 양옆으로 흔들렸다. 미호의 표정은 덤덤했지만 속이 문드러진다는 사실은 꼬리의 좌우 반동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미호는 인간이 되고자 한 희망이 그 어떤 요괴보다 컸다. 사랑하는 남정네가 하필 인간이었기에 그를 위해서 인간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 요괴였다.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상대를 위하는 헌신적인 사랑이 결국 파국으로 치달아 생에 가장 큰 상처를 입었지만 그 문드러진 흉터 위에도 꽃은 피고 있었다. 겨울이라 새싹이 움트진 않았어도 마을 남자들이 보내는 시선에 부끄러워하며 언제든 언 마음을 녹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겉으론 강하고 드세 보여도 속은 그 어떤 과실보다 부드럽고 약한 여인. 그녀는 잘 익은 복숭아 껍질로 썩은 속살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인간과의 사랑을 염원해도 실천하기는 많이 두려운 듯했다. 인간이 되고 싶고, 인간들이 나누는 진실 된 사랑을 바라지만 평생을 요괴로 살 수밖에 없는 그의 팔자에 고도는 별스러운 위안을 해주고 싶지 않았다. 고도는 몽당이가 깨무는 손가락을 빼내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 좋아하느냐.”
풀 죽은 얼굴로 마당만 내려다보던 미호가 새하얀 귀를 쫑긋 거렸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고도에게 고정됐다.
“금?”
“그래, 묵금 말이다. 네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 내가 묵금 소리꾼으로 제법 유명해졌거든. 그 유명한 소리 한번 들려주려고 그런다.”
미호의 꼬리가 이전보다 힘 있게 움직였다.
“건방지게 너는 왜 성의 없이 시작하는 모든 일을 잘하는 걸까?”
“저런, 심한 오해로다. 난 매사 인사를 다하여 열심히 한다.”
“너처럼 무관심한 애가 말도 안 돼.”
“티 내어 열심히 노력해서 뭐하겠느냐. 요란한 소문 뒤엔 비웃음 혹은 결과가 당연하다는 반응뿐이다. 조용히 노력해야 깜짝 선물 같아서 좋고말고.”
“그래도 열심히 하는 티를 내야 보람이 있지. 혼자 묵묵히 하면 재미없어.”
“노력 도중에 관심을 받는 것보다 완성된 결과물로 인정받는 것에 재미를 들리면 된다.”
“그럴 끈기와 결과물에 대한 확신이 없어.”
“길러야지.”
“뭘?”
“네 자신이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졌는지, 스스로를 탐색하는 눈을 길러야지. 그 정도 노력도 없이 네 일을 동네방네 소문내며 빈 수레로 취급하지 마라.”
그러면서 집 안에서 묵금을 들고 온 고도가 평상에 자리를 잡았다. 음을 조율하기 위해 오른손으로 현을 뜯었다. 무겁지만 맑은 소리가 평상 밑바닥에 깔렸다. 미호는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검은 머리의 사내가 검은 금을 타고 있는 그 기묘한 조화를 가만히 바라봤다. 낡은 정자 너머로는 소복하게 쌓인 하얀 눈밭이 펼쳐져서 고도의 존재감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눈에 박혀 들었다.
인간이면서 요괴와 도깨비, 성수의 존경까지 받는 이 특수한 존재는 자신을 닮은 소리를 울렸다.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은 소리였다. 자고로 현악기 중 거문고만이 하늘의 소리를 대변한다고 일컬어지거늘, 땅에 가장 가까이 닿아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하늘을 대변한다니 이 얼마나 신비로운가. 땅에 속한 고도가 하늘의 권속에게 사랑을 받는 것처럼. 그의 소리가 낮게 퍼질수록 하늘이 정수리에 바싹 닿을 듯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고도, 너야말로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계속할 거지. 천룡이 하늘로 돌아가면 너도 따라갈 거야? 이곳을 대피처로 쓰는 이는 내가 아니라 너이지 않느냐.”
망가진 의수를 왼손에 끼운 고도는 가볍게 도술을 부렸다. 덜렁거리는 의수를 손목에 매다는 것이 과연 어떤 쓸모가 있는지를 궁금해하던 미호에게 그 어떤 설명보다 더 완벽한 해답을 눈으로 보여 주었다. 도술을 불어 넣은 의수가 뭉툭한 손목 끝에 딱 달라붙었다. 마디마다 이음새가 감추어진 손가락이 실제처럼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굽혔다 펴지는 모습이 인간의 실제 손과 다를 바 없었다. 도술의 영묘한 힘으로 겉모습만 나무일 뿐, 실제 손을 대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의수였다.
고도는 줄을 뜯었다. 줄 위를 움직이는 손은 날렵했다. 소녀의 발걸음처럼 가볍고 경쾌했다. 서전검을 휘두르던 모습을 떠올릴 만큼 무겁고 안정되기도 했다. 흔들리는 줄을 타고 넘실거리는 소리는 그가 ‘환영도사’라는 별칭을 얻었던 과거의 모습만큼 다채롭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울려 퍼졌다. 금 소리에 대해 하나도 아는 것이 없는 미호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도 방긋, 미소가 지어졌다. 무거운 소리가 전혀 무겁게 심장을 짓누르지 않는다. 그건 정말로 신기한 일이었다.
“와.”
미호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졌다. 고도가 뜯는 줄을 타고 꽃이 피었다. 차갑던 겨우내 공기가 포근해졌다. 뿌연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쳤다. 언 땅이 소리에 맞춰 발을 굴렀고, 땅속에 숨어 있던 꽃향기가 미호의 코끝을 간질였다. 만개한 꽃잎이 화르륵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몽당이가 방정맞게 발을 굴렸다. 겨울에 피어난 봄은 고도가 묵금을 연주하며 만들어 낸 환상적인 도술인지, 환영이 보일 만큼 아름다운 소리 때문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저 미호는 꽃이 피어나는 고도의 손끝을 보면서 두 손바닥을 포개어 웃었다.
고도가 청사와 재회하기 전,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며 줄을 뜯는 소리꾼으로 명망이 높은 시절을 들었다. 그의 묵금 소리가 먼 도성까지 닿아 왕이 직접 그를 보고 싶어 할 정도로 고도의 실력이 천하제일이라 손을 꼽았다고 한다. 고도의 소리에는 슬픔과 기쁨이 덤덤하게 묻어 있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 땅의 모든 의문을 답할 수 있을 듯한 깊이가 담겨 있었다. 인간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소리였다. 모든 인간 군상이 귀를 기울일 정도로 깊고 울림이 가득한 소리였다. 낡은 묵금에서 피어나는 붉고 노란 꽃의 향연이 그 어떤 무릉도원보다 아름답고 안락하다 느낄 때였다.
‘그분이야!’
어디선가 밝은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외침이 사방으로 번졌다.
‘그분이 맞아!’
‘그분이 확실해!’
꽃바람이 휘감던 정자 주변이 요란스러워졌다. 눈을 감고 묵금을 켜던 고도의 손길이 멎었다. 줄 위에서 멈춘 손가락을 타고 만개하던 꽃잎들이 다시 봉우리를 닫았다. 정자를 꽃밭으로 만들었던 붉고 노란 이파리들이 차가운 겨울 공기에 사르르 날아가 부서졌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미호와 철없이 손을 뻗으면서 신기해하는 몽당이 주변으로 눈대중으로만 수백 개에 달하는 빛의 군집이 화려하게 발광하고 있었다.
‘하늘이 근처에 없어, 권속이 사라졌어.’
‘지금이야, 지금 데려가야 해.’
‘우리가 데려가야 해.’
‘그분을 데려가야 해.’
사방에서 터지는 목소리가 고도 주변을 감쌌다. 고도는 빛의 군집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요괴인가, 귀신인가. 이리저리 뜯어보아도 삿된 기운이나 위협적인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신선들이 산다는 청호림의 맑은 기운을 닮아 신령스럽게까지 느껴지지 않은가.
“고도, 이게 다 뭐야?”
그녀는 정신 사납게 정자를 뛰어다니는 몽당이를 품에 단단하게 안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정체 모를 것들이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호의적으로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유인 즉 아까부터 빛이 연신 고도의 머리와 옷을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그러게, 나도 처음 보는 것들이네. 이게 어떻게 말을 하는 거지. 입이 어디 있는 거지.”
“네가 모르는 게 있어?”
“나라고 만물을 다 알지는 못하지.”
고도가 눈앞에서 반짝이는 빛을 톡 건드리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가자, 가야 해! 그분 맞아!’
‘까르르륵, 드디어 찾았어, 데려가자.’
‘어서, 어서 가자!’
정신 사나운 소리에 미호가 놀라서 고도의 옷자락을 덥석 잡았다. 머리카락이며 옷자락이 잡아당겨지는 당사자는 비실비실 웃기 바빴다. 당황스러운 이는 미호뿐인 듯했다.
“이 미친 도사야! 얘네가 너를 끌고 가겠다잖아! 왜 가만히 있냐!”
미호가 꼬리를 휘둘러 빛 가루를 날려 버리자 빛의 군집이 꺄아악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내 인기가 죽지 않았구나.”
“퍽이나!”
위기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요망한 도사 같으니라고. 손끝에 모이는 빛을 보는 고도 대신 미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호는 몸을 낮추고 꼬리를 흔들었다. 그녀의 여덟 개 꼬리를 타고 독한 요기가 흘러 나왔다. 미호의 붉은 눈이 세로로 길쭉, 맹수처럼 변했다. 고도의 살갗이 저릿할 만큼 강한 요력인데도 빛은 요동조차 없었다. 빛은 요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치 애초부터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데려가자.’
‘가자, 가자.’
‘그분을 데려가자.’
미호의 요기를 정면에서 무시하는 빛의 반응을 고도는 신중하게 바라봤다. 자신의 힘이 통하지 않는 바람에 미호는 자존심이 상해서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 울었다.
[감히 누굴 무시하는 거야.]
건방진 빛무리를 향해 기다랗게 변한 손톱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소용없었다. 빛은 가볍게 공중제비를 돌고 다시금 고도의 몸에 달라붙었다.
‘가자, 가자, 가자, 가자.’
동글게 소리를 부르며 연신 고도를 보채고 졸랐다.
‘가자, 가자, 가자, 가자.’
음성은 강압적으로 변했다. 고도를 잡아당기는 힘이 커지면서 고도는 비틀, 중심을 잡지 못했다. 빛은 더 이상 영롱하지 않았다. 섬뜩했다. 그들은 비정상적으로 고도에게 집착했다.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몽당이가 방에 달려가 고도의 서전검을 들고 왔다. 커다란 검을 검의 손잡이보다 작은 덩치의 몽당이가 거뜬하게 들고 있었다. 무겁지도 않은지 그 검을 머리에 이고 고도에게 건네려고 안간힘이다. 고도는 몽당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요괴를 잡아들이고 동해 용왕의 눈을 찌른 검엔 그만큼 독한 힘이 고이기 마련인데 어린 도깨비가 서전검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있었다. 도깨비의 왕이라 일컬어진 옛 친우 ‘소’조차도 이 검만은 손도 대지 못했거늘. 고도는 빛보다 몽당을 먼저 신경 썼다.
“검은 괜찮다.”
고도는 몽당이 가져온 검을 평상 위에 올려놓았다. 대신 빛을 향해 맨손을 뻗었다. 미호가 놀라서 소리를 쳐도 고도는 손을 휘이휘이 저으면서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빛 가루들은 고도가 내민 손에 우르르르 몰려들었다. 한데 뭉쳐진 빛은 마치 노란 달처럼 빛났다. 고도는 손을 비벼서 빛을 흐트러뜨려 보았다. 와글와글 흩어진 빛이 다시 뭉쳐서 눈앞을 밝히는 모습이 정신 사납고 재밌었다.
“이 방정맞고 촐싹대는 빛 덩어리들아. 너희는 누구기에 나를 데려간다고 하느냐.”
고도의 반응에 빛 가루들이 요란스럽고 질서 없이 외쳤다.
‘너는 그분이니까!’
‘인간이 그분인 건 이상하지만.’
‘그래도 주인님이 인정했어.’
‘인정했어. 주인님께 가야 해.’
‘데려 가야 해.’
‘가자, 가자.’
‘가야 해, 가자, 가자, 그분, 가자.’
지성체가 아닌 빛의 요란한 소리에 고도가 침착하게 반응했다.
“뭐지. 나를 지금 ‘그분’이라는 것과 헷갈려하는 듯한데.”
사방팔방에서 와르르르 대답이 쏟아졌다. 응응응응, 대꾸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강박적인 외침이 커져서 귀가 아플 정도였다.
“아, 헷갈리는 게 아니라, 내가 그분이 맞다고? 이런 이상한 애들을 봤나. 너희의 주인은 누구냐. 고놈이 뭔갈 오해해도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야.”
빛이 앞다투어 대답했다.
‘주인님은 땅의 주인. 땅의 소리, 땅의 몸신. 땅 그 자체. 이곳에서 잠을 자는 아주 고귀한 존재.’
‘그분은 주인님을 대신하여 땅의 뜻을 전해 주는 이.’
‘그분은 대대로 성수가 맡아온 직책.’
‘이름이 필요 없는 자. 그분.’
‘주인님을 대신하는 자, 그분.’
‘너는 그분이지만 인간이라 이상해.’
‘이상하지만 이상한 게 이상한 법.’
‘주인님에게 가자.’
‘주인님이 찾아. 가자, 가자.’
이쯤 되면 고도의 시체라도 끌고 갈 기세다. 고도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고도는 요괴와 도깨비, 귀신과 인간 등 이 땅에서도 가장 아래에 위치한 존재에는 박식해도 성수나 신선, 땅의 주인이나 성물 등 고귀한 존재에 대해서는 지식이 얼마 없었다. 애초에 태어나길 미천한 어부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신이 땅의 주인과 어울릴 일이 있겠는가.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 존재나 다름없었다. 요괴랑 복작이며 지내온 것이 전부인 고도에게 땅의 주인의 초대는 신기하고 이상하지만 썩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땅의 주인이라면 지룡(地龍)인가. 태초에 천룡과 한 배에서 나와 하나는 땅에 몸을 묻고 다른 하나는 은하수에 몸을 묻어서 각기 하늘과 땅을 주관하게 된 중요한 존재. 만약 지룡이 맞다면 고도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용과 얽히는 것은 천룡만으로도 벅차 죽겠는데 이젠 땅의 주인까지 알현하라니.
“귀찮고 번거로워. 가기 싫다.”
땅의 주인의 초대를 단순히 귀찮고 번거롭다며 거절하는 존재는 고도 외에 없을 것이다. 미호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고도의 단호한 반응에 몽당이는 무엇이 그리 웃긴지 서전검을 머리에 인 채 배를 잡고 웃느라 바빴다. 빛무리는 고도의 대답을 듣자마자 쿵쿵거리며 발을 굴렀다. 대리 주인으로 임명한 이가 그 주인 된 이의 말씀을 거역하다니.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라. 그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가야 해!’
‘가야만 해!’
‘가야 한다니까!’
“네 주인이란 놈이 퍽 건방지구나. 할 말이 있으면 그 주인이 직접 와야지, 누구한테 오라가라하고 있어?”
‘주인은 자고 있으니까!’
“저런, 엄청난 잠꾸러기로다. 가서 양 뺨을 때려 깨우거라.”
‘우리는 깨우지 못해! 그분만이 주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어!’
“그래, 내가 가서 때려 주면 되느냐?”
도술을 이용해서 한쪽 팔을 커다랗게 부풀린 다음에 땅의 뺨을 후려치는 거야 어렵지는 않은 일. 그런 요사스러운 방법으로 땅의 주인이 눈을 뜨게 만드는 일이라면 동참해 주겠노라 말하는 고도였다. 진지함이라고는 볍씨만큼도 없다. 땅의 주인이 누군지는 궁금해도 그를 만나기 위한 수고스러움을 부러 낭비하고 싶지 않아 했다. 빛이 갑자기 몸집을 키웠다. 그것들은 고도를 한꺼번에 붙잡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빛에 감싸인 고도가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르자 미호가 소리쳤다.
“고도!”
고도는 빛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구 안에 앉은 채 눈을 껌뻑거렸다. 주변을 손등으로 툭툭 두드려 보았다. 빛의 구는 도자기처럼 연약하면서도 매끄럽고 단단하게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한 번도 접해 본 적 없는 이 기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 땅의 주인이란 자는 무슨 잠을 그리 깊게 들어서 애먼 사람을 납치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오랜만에 겪어보는데, 이 납치라는 거.”
“좋아할 때냐, 이 망할 도사야!”
“재밌잖냐.”
미호에게 실없는 말을 하는 고도는 정말로 그 납치를 즐기고 있었다.
[감히 누구를 데려간단 것이냐!]
등 뒤에서 깊은 목소리가 터졌다. 천지를 울리는 천둥 같은 소리를 향해서 고도가 고개를 돌렸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흡착된 청잣빛 눈동자였다. 육중한 살기를 두 눈에 머금은 청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청사 주변에서만 휘몰아치는 한풍에 그의 옷깃과 머리카락이 넘실거렸다. 걸음을 뗄 때마다 땅이 움푹 파였고, 살얼음이 진 마당의 눈이 녹았다. 이끼 속에서 싹을 틔운 겨울나무가 단숨에 말라붙어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물론 멧새와 들쥐들이 먼 곳까지 도망을 쳤다. 고도를 허공에 띄운 빛의 구가 청사의 기에 눌려 구름처럼 요동쳤다. 빛무리의 결속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자 빛은 혼비백산이 되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하늘의 권속이다!’
‘권속이 그분을 빼앗는다!’
‘그분, 그분을 빼앗긴다!’
‘빼앗기면 안 된다!’
빛의 군집들이 재빨리 고도를 붙잡아 끌려 했지만 옹송망송 흩어진 힘이 다시 밀집하기란 어려웠다. 고도를 잡아끄는 힘과 놓고 가려는 힘이 팽팽하게 대립한 사이, 가까이 다가온 청사의 살기에 겁을 먹은 빛무리는 빠른 속도로 몸을 숨겼다. 한 척 정도 허공으로 떠올랐었던 고도는 정자의 평상 위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두루마기 위로 엉덩이를 문지르면서 한동안 굽은 허리를 펴지 못했다.
[감히 누굴 마음대로 데려간단 것이야!]
다가온 청사가 고도의 손을 잡았다. 고도를 일으켜 양팔로 안았다. 눈을 세로로 홉뜨고 이를 빠득 가는 모습이 진정으로 분노에 들어차 있어서 고도는 입만 벙긋했다. 고도는 청명한 하늘을 닮은 청사의 눈 속에서 불안감이라는 기색을 읽어 냈다. 청사의 불안감은 고도의 손을 꼭 쥐고 있는 손의 떨림으로 전가됐다. 고도가 진정으로 사라질 줄 안 것처럼 퍽 두려워하는 상태였다. 고도는 청사에게 잡힌 손목을 힐끔 내려다봤다. 청사가 급히 고도를 껴안느라 못 본 듯했으나, 고도의 살갗에는 빛이 내지른 비명들이 잔영처럼 남아 있었다. 마치 소인의 손바닥 자국이 찍힌 것처럼, 몸 곳곳에 빛 가루가 흩날리고 있었다. 사라져도 흔적이 남은 빛의 정체에 대해 심도 깊은 생각을 해보려다 그만두었다. 고도는 청사 몰래 소맷부리와 손목에 묻은 빛 가루를 털어 내고 청사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어서 오렴.”
그 말에 청사가 울컥해서 외쳤다.
[왜 그리 천하태평이느냐.]
“너무 간만에 흥미진진한 일을 겪어서 한 번 즐기고 있었지.”
[그렇다고 눈 반짝이면서 정말로 좋아하면 어떡해! 이상한 것이 너를 탐낸다. 왜 너를 탐내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내 무척 기분이 나빠.]
“땅의 주인이 시킨 일이라고 하네. 그 주인 놈 성향이 과격해서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일을 벌였다만, 뭐, 이런 경험이 한두 번도 아니지 않으냐.”
[한두 번이 아니라면 뭘 어떻게 겪었는데?]
“글쎄, 대롱이, 네 놈이 나를 자꾸 보쌈해서 옷 벗기는 거?”
그 말에 청사의 눈가가 붉어졌다. 읏, 하고 부끄러운 듯 입술을 깨물다가도 삐쭉이면서 투덜거렸다.
[나와 엮이는 건 다른 문제잖아.]
“수줍어하기는, 하하하.”
[시, 시끄럽고. 그 땅의 주인이란 거나 말해봐. 널 데려가려는 거. 그게 누군지 알아?]
“네가 모르는데 내가 어찌 알까.”
[불쾌하다. 정말로 불쾌해.]
글쎄, 고작 빛이 데려가려 했다는 점 때문에 이리도 심기가 불편할 수 있을는지. 청사가 평소보다 훨씬 날이 서서 으르렁거리는 이유를 고도는 짐작하지 못했다. 청사의 심정을 복잡한 얼굴로 지켜보다가 그의 머리를 더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널 두고 어디 가지 않을 테니 걱정 마라.”
달래는 고도의 목소리에 청사의 노기가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화가 나도 고도가 다정하게 대해 주면 치켜뜬 눈꼬리가 본래대로 내려오고 만다. 청사는 고도의 손목을 움켜쥔 힘을 슬그머니 풀었다. 이전보다 더욱 정겹게 고도를 끌어안았다.
[너는 호기심이 많다. 내가 잠깐만 시선을 돌리면 네 호기심을 따라 움직일 인간이야. 내 허락도 없이 아무 곳이나 갈까 봐 겁이 난다.]
“허어. 내가 물가에 내놓은 아이도 아니고서야.”
[농담할 기분이 아니야.]
“오냐, 농담하지 않으마. 약조하마. 네게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지지 않으마. 아무리 호기심이 들어차도 참겠다. 그러니 화 그만 내고 내 볼에 입 맞춰 주지 않겠느냐.”
고도가 이 정도로 먼저 청사를 받아들일 태도를 취하면 청사는 화를 풀고 고도의 품 안에 파고들겠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청사는 고도를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청사의 모습에 왼쪽 뺨을 내밀었던 고도가 “음?”하고 소리를 내어 물었다. 고도가 고개를 모로 숙이자 청사가 미호와 그녀의 품에 안긴 도깨비에게 시선을 줬다.
[잠깐 방에 들어가 있어. 고도랑 단둘이 할 얘기가 있다.]
어째 며칠 전의 상황과 비슷한 것 같은데. 그때는 둘이서 자리를 피했고 이번엔 선객(先客)을 내쫓은 경우지만. 미호는 따지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라서 입이 댓 발이나 튀어나왔다. 못된 대롱이, 용 새끼. 욕설을 삼키면서 몽당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기분대로 툴툴거리며 화를 내지 못한 것은 청사가 웬일로 진지하게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청사가 아무리 만만해 보인다지만 하늘에 속한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미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얌전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고도.]
이야기를 들을 귀가 없음을 확인한 청사가 고도를 불렀다. 청사는 고도와 고도 주변의 평상, 평상 밑에서도 여전히 모래알처럼 반짝거리는 빛 가루를 바라봤다. 햇살이 비친 눈가루처럼 투명한 조각들이 영롱하게 빛을 산란하는 모습이 심히 거슬렸다. 청사는 양손에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 괜한 초조함을 삭였다. 고도를 끌고서라도 하늘로 데려가고 싶다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까 봐 청사는 스스로를 제어하는 데에 힘썼다. 하늘로 끌고 가면, 고도는 자의로 하계에 내려올 수 없게 된다. 하늘에서 땅으로 오는 방법은 오로지 옥황상제의 허가가 떨어진 경우뿐이다. 한번 하늘로 올라간 고도는 너른 자미원에 갇힌 채로 평생 땅을 밟지 못하고 살아가리라.
청사는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생각이 자꾸만 극단적으로 치우치려는 것을 애써 자제하며 숨을 골랐다. 어리게 굴지 않으려 했다.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을 지웠다. 천룡의 후계자로서 배운 하늘에서의 가르침을 상기하면서 마음을 다잡는 데에 노력했다.
[잠깐만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
“그래, 물론이다.”
청사는 고도의 목과 어깨가 춥지 않도록 머리에 쓰고 있는 휘항의 끈을 여며 주었다. 밭은 숨을 내쉬는 고도의 입 앞에 흰 서리가 앉았다. 인간이라면 으레 느껴야 할 추위에 몸서리치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한다. 휘항이 필요 없는 듯 추위에서 비껴 선 태도였다.
고도는 조금씩 변해 가고 있었다. 그는 추위와 더위라는 계절감에서 해탈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서 멀어지는 듯했다. 사람을 멀리한 고도는 산에 가까워졌다. 인간에게 닿지 못하는 존재들과 친해졌다. 땅의 권속 중 가장 성스럽다고 알려진 ‘아리아’가 고도를 찾아온 시점에서 이미 고도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되었다고 봐야 했다. 고도가 땅에 가까워지더라도 목숨에 영향이 없다면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청사는 이를 원하지 않았다. 땅에 가까워진다는 말인즉 하늘에서 멀어진다는 뜻이다. 고도가 하늘과 멀어질수록 불안해지는 것은 청사였다. 하늘에서 멀어지고 청사와 멀어져서 닿지 못하는 관계가 될 것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너무 특별하고 무거운 감정이 실려서 고도를 부담스럽게 하지 않도록. 아주 일상적이고 가벼운 어투로 물어보도록 하자.
[저기, 그러니까 고도.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고도는 입술을 오물거리는 청사를 빤히 올려다봤다. 언제나 생기가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멀리에서도 지켜봐 주는 청사였지만 오늘은 조금 더 특별했다. 경직된 어깨가 수상했다.
“뭘 물어보려고 이렇게 진지할까.”
청사는 슬그머니 집 안을 살폈다. 혹여나 문지방 너머로 팔미호나 몽당 빗자루 도깨비가 엿듣고 있지는 않을까 봐 조심하는 기색이었다. 누구도 이 분위기를 방해할 수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청사는 침을 삼켰다.
[그게 말이지.]
“그래.”
[이런 곳에서 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는데 솔직히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빨리 말하는 거란다. 하계에서 너랑 더 오랫동안 놀고 싶었는데 내가 초조해져서 안 되겠구나.]
“그렇게 망설이다 쌀 얹힌 가마솥이 다 탄다.”
[음?]
“적당히 뜸들이란 소리다.”
고도의 꾸중에도 청사는 마른 입술을 혀로 살짝 핥으며 말하길 망설였다. 빤히 올려다보는 고도의 까만 눈동자가 설렜다. 안 그래도 새하얀 휘항에 감싸인 고도는 오목눈이처럼 보이는 터였다. 휘항은 청사가 쓰기 위해 산에서 잡은 토끼로 만든 모자였다. 그런 걸 푹 눌러쓴 고도가 평소보다 배는 귀여웠다. 고도의 몸이 작고 마른 것인지, 휘항의 길이가 긴 것인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남색 자미색겉감과 진홍색 숙고사 안감이 안 그래도 추위로 얼어 있는 고도의 하얀 얼굴과 까만 머리카락과 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참으로 고왔다. 그 귀엽고 까만 눈을 가진 새끼 뱁새를 똑 닮아서 청사는 고도를 콱 끌어안으려던 팔을 이성으로 붙잡았다.
진정하고 제대로 말하자. 다시금 속으로 다짐한 청사가 마른침을 삼키고 입술을 뗐다.
[나랑 하늘에서 같이 살지 않을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청사의 말에 고개를 바로 세운 고도가 눈을 깜빡였다. 가만히 쳐다보는 검은 눈동자가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지 청사는 쉽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청사를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여 청사의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혹여나 거절의 대답이 들려올까 봐 청사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말하는 게 눈치 없는 행동이라면 다시 정식으로 고백할 테니까 약식으로 네 뜻을 묻는 거라 생각해 주거라. 그러니까 고도가 내 반려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이야.]
혼약이라도 하는 것처럼 긴장한 청사다. 북을 치는 듯한 가슴 소리가 고도에게 전해졌다. 청사는 움켜쥔 주먹 속에서 손톱을 하나둘 셌다. 대답은 천릿길을 돌아 나오듯 멀리서부터 울렸다. 귀에 스며드는 고도의 목소리가 처음에는 환청인 줄만 알았다.
“미안하다.”
청사는 고도를 내려다봤다. 휘몰아치는 바람 사이에 시린 눈발이 섞여 있었다. 눈송이가 지붕에 쌓이다 흘러내려 청사의 눈꺼풀에 맺혔다. 청사는 그 무거움이 선연해서 억지로 눈을 빤히 뜬 채 고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고도의 대답이 거짓말처럼 입김을 타고 새 나왔다.
“난 하늘로 가서 살 수 없어. 정말 미안하다.”
북소리가 울리던 심장이 완전히 멈추는 기분이었다. 청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도의 입술만을 바라봤다. 언제부터인지 속눈썹에 걸린 눈송이가 녹아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난 하늘로 가서 살 수 없어. 정말 미안하다.
그 말이 오랫동안 청사의 귀에 남았다.
[어째서?]
그러니까 왜? 뭐가 문젠데? 설마 정말로 고도가 땅의 권속에 더 밀접히 가까워지면서 하늘을 등한시하는 마음이 생긴 걸까. 그게 아니라면 왜 하늘에서 살지 않겠다는 것인데. 모든 인간들에게는 극락정토나 다름없는 천계가 무엇이 문제일까.
“천계에 올라가는 일은 내게 있어 무리다.”
청사는 애써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고 물었다.
[그러니까 대체 왜?]
“내가 하늘에 가면 죽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처음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입을 벙긋한 채 아무 말도 뱉을 수 없었다. 고도가 죽는다고. 왜. 뭐 때문에?
[네 이름은 명부에서 지워졌다고 들었다. 죽을 리가 없어.]
“명부에 이름이 적힌 것의 의미를 모르느냐. 명부에 적힌 이름과 수명을 보고 저승차사들이 귀들을 인도하러 오는 지침서로 삼는다. 지금은 차사들이 나를 끌고 가지 못해서 죽지 못하지만 누군가 억지로 그곳에 보내면 얘기가 달라지지.”
[너를 억지로 명계에 보낼 사람이 어디 있겠어? 잊었느냐, 고도야. 너는 내 형님 앞에서 소원을 빌 때 네게 있는 모든 ‘악연’을 끊어 달라고 말했다. 또한, 천인으로 환생한 과거의 인간이 너에게 보복을 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구나.]
“천인들의 의견도 같을까.”
[대체 내가 너를 반려로 지정하는 데에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는데.]
“많이 있겠지. 하계에서 내 악평이 자자하여 하늘에도 닿았다고 들었다. 이런 나를 탐탁지 않아 하는 무리가 그들의 힘으로 나를 명계에 던져 버리면 나는 꼼짝 없이 죽어야 한다. 내 아무리 인간들 사이에선 뛰어난 도사일지라도 천인들을 상대로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없으니.”
[하나…….]
“죽을 위험까지 감수하고 너와 하늘에 올라가는 것보다는 땅에서 너를 기다리며 짧지만 안전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이 역시 너는 이해하지 못하겠느냐. 나는 죽지 않는 이상 영원히 너를 기다릴 수 있단다. 네가 조급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조금 멀리 있지만 끝없이 함께할 수 있지 않느냐.”
그럴 수 있다면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청사는 자신이 천룡의 보위에 오르면 고도를 만나기 위해 개인적인 시간을 내기도 힘들뿐더러, 수많은 이들에게 후계 문제로 들볶일 것이 눈앞에 선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도의 말도 옳다. 고도를 명계에 던져 버릴 존재가 하늘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천인은 삿된 마음을 먹지 않는 게 이치이나, 이치가 절대적으로 만물에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청사가 고의적으로 하늘의 힘을 땅 위에서 개방하여 지상의 모든 존재들을 발아래 굽이 둔 것처럼, 천인 중에서 내공이 높은 이가 고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가늠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천상의 고위 백관이라면. 그들이라면 땅에서 악평을 받고 있는 고도를 용서하고 받아 줄까. 너른 마음으로 용서할지도 모른다. 성과 선을 몸소 실천하는 천인이니, 부처의 자비를 본받아 고도의 허물을 과거에 묻어 둘 뿐 현재까지 끌고 와 질책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확률일 뿐이다. 만약 천인들이 고도를 즉시 처결하려 마음먹는다면 아무리 인간 중 가장 뛰어난 도사인 고도일지라도, 인간과 계(界) 자체가 다른 존재인 천인을 이겨 낼 재간이 없다. 천인들이 고의적으로 삼도천 강에 고도를 빠트린다면 청사도 손쓸 수가 없다. 물살에 휩쓸린 고도가 명계에 닿으면, 설사 상제가 들고 일어나더라도 결과는 같아진다. 삼도천에 떠내려 온 고도를 염라가 직접 처결할 것이다. 고도를 그 어떤 세상과의 소통도 단절된 무저갱에 처박을 것이다. 고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볼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도록 살게 함이 분명했다.
고도를 잃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에 청사는 있는 힘껏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무리 천룡의 후계자라지만 모든 천인들을 적으로 돌릴 만큼 강경하게 일을 진행할 힘이 아직은 없었다. 고도를 지키기엔 힘이 부족했다.
[내가 노력하겠다. 너에게 아무런 위험이 닥치지 않도록 노력하겠어. 그래도 하늘로 같이 못 간다는 뜻이냐.]
“나는 땅에, 너는 하늘에 있어도 충분히 함께 있을 수 있지 않느냐. 보고 싶을 때마다 네가 내려오면 된다. 혹은 내가 허락 맡고 올라가면 되겠지.”
[내가 그 일을 견딜 수 없다.]
“대롱아.”
[네가 내 옆에 없으면 아무것도 소용없다.]
고도가 요괴 9,999마리를 잡는 대가를 모두 치르고 나서 청사는 천룡의 후계 수업을 받으러 올라갔던 하늘의 일이 떠올랐다. 너른 천계에서 한시도 고도를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참으로 그리워해서 낮과 밤을 구분 없이 뜬눈으로 고도를 상상하다가 이내 눈을 감고 책상 위에 고개를 엎길 여러 차례였다. 청사는 눈앞에 그리는 고도에게 손을 뻗지도 못했고, 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머리가 기억하는 고도의 표정이, 그의 온기와 목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지는 바람에 초조함과 불안감이 가중되었다. 이대로 고도를 잊고 영영 그를 보지 못할까 봐, 입술에 피가 배어 나오는 것도 모를 만큼 악착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고자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청사는 천룡의 후계직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몸이었다. 때가 되면 아버지가 앉아 계신 천룡의 자리에 자신이 즉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예정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배울 것이 많았다. 고도만 생각하면 그리워 눈물이 핑 돌았지만 후계 교육을 그 그리움 때문에 엉성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인간의 나이로 환갑이 넘는 세월 동안 후계 교육을 받는 내내 무슨 생각을 했던가. 오로지 고도와 남은 생을 함께 할 생각뿐이었지 않나. 누구보다 필사적으로 후계 자리를 보존하지 않았던가. 아버지와 상제로부터 “이쯤 하면 되었다”는 이야기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몇 달 동안 수업을 쉬어도 된다는 명이 떨어지자마자 고도를 만나기 위해 하계로 내려왔다. 그리하여 다시 만난 고도는 변함없이 아름답고 강했다. 기억 속에서 흐려질까 봐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던 그 얼굴과 온기, 목소리가 선명하게 와 닿았을 때 청사는 그를 안고 60년간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고도의 목소리를 통해서 “내 사랑아”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결심했었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앞으로는 고도와 헤어지지 않을 것이다. 고도만이 청사에게 가장 의미 있고 유일무이한 존재다. 청사는 스스로에게 각인시켰다. 고도의 마지막 사랑이 자신이며 자신 또한 고도가 최초이자 최후의 반려가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리 믿었는데.
[같이 가자, 고도야. 난 너 없으면 안 된다.]
한동안 청사를 올려다보던 고도가 피식, 바람을 꺼트리며 웃었다. 실바람 같은 웃음소리를 듣자 굳어 버린 청사도 점차 현실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왜 너는 땅에서 살겠다는 말을 빈말로도 해주지 않고, 내게만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냐.”
따져 묻는 말투는 아니었다. 하지만 청사의 취약한 부분을 대번에 꼬집은 질문이었기에 청사는 고도의 손을 힘주어 움켜쥐고 말았다.
[혹시 내가 이기적으로 네게 선택하라 말한 것에 상처 받았어?]
“그런 뜻으로 물은 건 아니다. 네가 땅에서 살 수 없다는 걸 얼핏 이해할 수는 있지만 하늘에서 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그런단다. 지금처럼 네가 가끔 땅을 방문하여 나와 시간을 보내면 되지 않겠느냐. 굳이 땅의 품에서 자란 내가 어머니를 버리고 낯선 곳에 평생 몸담을 필요가 있느냐.”
[미안하다, 고도. 내가 어리석었구나. 네게 내 사정을 제대로 설명도 않고 내 뜻만 따라 달라 우기고 있었어. 내가 이렇게 그릇이 작구나.]
“자책하라고 한 말이 아니다. 설명할 필요성이 없어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그 뜻을 존중할 수 있어.”
[아니야, 다 말할게. 말하는 게 당연해.]
“억지로 그럴 필요는 없는데.”
[아니다, 내가 마음이 급해서 절차도 제대로 못 밟았구나. 너에게 설명도 없이 이해를 강요한 모자란 나를 부디 용서해라.]
청사는 호흡을 골랐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고도가 편히 이해할 수 있는지를 따졌다. 고도가 이해할 수 있도록 모든 부분을 최대한 쉽게 설명하기로 했다. 청사는 데구르르 굴리던 머릿속을 정리한 후 비로소 입을 뗐다.
[고도도 알다시피 나는 천룡이야. 천룡은 옥황상제의 옆에서 땅의 일을 보좌하는 직책이지.]
“음, 그래, 하늘의 주인이 상제이고 네가 그 주인 밑의 최측근이라는 것은 안다.”
[그건 천룡직에 보위를 물려받게 된 후고, 지금은 후계로서 수업만 받았어. 이번에 하늘로 돌아가면 나는 아버지의 자리에 즉위하게 될 것이야. 그러면 상제를 모시고 땅을 굽어보는 일에 바빠서 하계로 내려오기도 힘들어지겠지. 즉위한 후 천룡의 모든 힘을 개방하고 나면 내 힘이 너무 커져서 하계의 생명들이 감당을 못 하게 되니까 결코 내려와서도 안 돼.]
“아아.”
그래서 자신을 데려갈 생각만 하고 땅에 머물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구나. 고도는 청사의 설명을 듣자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천계에서는 스스로 깨우쳐 가는 존재에의 의식을 하계에 와서는 한 번도 드러낸 적 없는 청사였다. 굳이 자신이 하늘에 속한 존재임을 땅 위에서 자랑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바람과 빛과 물과 소리와 향기가 청사를 의식하면서 고개를 조아리는 것은 피곤하고 귀찮은 일이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힘을 드러낼 이유가 없었기에 억지로 능력을 눌러 담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이 달라졌다. 청사는 자신이 땅에 있다는 사실을 만물에게 고했고, 사방이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며 흘러가길 명했다. 그러자 눈으로 보이지 않는 변화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물줄기가 바뀌었고, 삭풍이 멈추었다. 겨울임에도 꽃향기가 났고, 달빛은 대낮의 햇살보다 찬란하게 발광했다. 해는 결코 청사의 머리 위를 지나지 않았으며 구름은 그에게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았고 추위는 물러가며 온기가 청사를 반겼다. 청사의 주변 만물이 이치를 따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서 청사 주변뿐만이 아니라, 땅 전체가 청사를 위해서 재정립된다면 땅 위는 온통 혼란스러워지리라. 청사는 땅에 오랫동안 머물러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대롱아.”
청사는 고도의 목소리에 바짝 얼어붙듯 긴장했다. 고도가 자신의 일을 부정적으로 말할까 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그래.]
고도의 시선을 마주한 청사는 착잡해 보였다. 억지로 지었던 입꼬리를 조금씩 내렸다. 의연함으로 가장하고 있던 단단한 분위기가 한순간에 얇은 계란 껍데기처럼 부서졌다. 고도에게 “아냐, 고도, 아무 말도 하지 마”라고 입을 막아 버릴 듯이 불안해했다.
“자, 이리 와라, 안아 보자.”
고도는 두 팔을 벌렸다. 청사는 이번엔 그 품을 거절하지 않았다. 의연한 척 굴었던 가장이 사라지고 침울한 얼굴을 한 청사가 고도의 품에 안겼다. 고도는 자신에게 꼭 안긴 청사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조금 전의 품위 넘치던 분위기는 봄이 와 언강이 녹듯 사르르 사라져 그 자리엔 고도가 으레 알고 있던 애정을 갈구하는 청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아, 그대로구나. 그대로라서 한결같아 다행이다. 고도가 쪽, 가볍게 그 입술에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고도의 애정 표현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청사는 곧 얼굴이 불고구마처럼 새빨개져서는 펑, 소릴 내며 터졌다.
[뭐하는 거야, 고도.]
고도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롱이, 네가 이상한 분위기를 내보이고 있지 않느냐.”
[이상한 분위기는 지금 네가 더, 읏.]
고도가 고개를 반대로 틀어서 쪽, 입을 맞추었다. 청사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고도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면서 입가가 잔뜩 일그러졌다. 좋아서 웃어야 하는지 당황스럽다고 곤란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런 감정 표현도 없이 쪽, 쪽, 가볍게 입술을 두드리는 입맞춤을 연달아 하는 고도 때문에 청사는 머릿속이 빙글거리며 뒤섞였다. 마음 같아서는 혀라도 내밀어 고도의 입맞춤에 응하고 싶었지만 아기 새가 부리를 쪼아대듯이 가볍게 쪽쪽거리는 고도가 귀여워서 농염한 분위기를 일부러 피하고 싶은 생각이 더 컸다. 청사는 결국 새빨개진 얼굴을 다스리지 못하고 고도의 목과 어깨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고도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틀어서 붉게 익은 청사의 귓불에도 뽀뽀를 해주는 것을, 청사는 아랫도리가 불끈 솟아오르려는 욕정을 참으면서 받아들여야 했다.
[……가끔 네게 조련당하는 기분이야.]
“흐응, 너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나네. 그때 내 대롱이가 되겠냐고 물었는데.”
[만약 거기서 넘어갔다면 정말로 네게서 헤어 나오지 못했겠어.]
“지금은 헤어 나왔다 그거지.”
[주도권을 빼앗기진 않았으니까.]
“이게 빼앗긴 게 아님 뭘까. 나한테 휘둘리면서 욘석 봐라.”
[후, 그래, 할 말 없다. 너와 관련된 문제에선 난 언제나 정신을 못 차리니 말이다.]
“정신을 못 차려서 나한테 대뜸 하늘로 올라가자는 말을 한 거냐.”
[……그, 미안해. 혹시 내가 더 설명해야 할 게 남았을까.]
“궁금한 게 생기면 그때 물어보도록 하마. 지금 모두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은 가지지 않았으면 하는데.”
[고도. 나는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하고 싶은데 너는 안 그러느냐.]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나도 너와 함께하고 싶다. 네가 하는 일을 말해 주니 더욱 함께하고 싶구나. 내가 참으로 대단한 이와 사랑을 하고 있다는 걸 그 여느 때보다 확실하게 깨달았기도 하고.”
[내 직책이 부담스러운가.]
“아니라곤 말 못 하겠네.”
[안 된다, 고도야. 날 버리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또 그런다. 네 녀석 너무 혼자서 생각이 튀지 마라.”
고도가 이를 세워 청사의 귓불을 물어 버렸다. 따끔한 아픔이 뒤따랐다. 청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방에 들어가서 확 옷을 벗기고 싶다. 고도의 어깨에 묻은 코를 타고 고도의 살내음이 맡아져서 더욱 죽을 맛이었다. 색욕과 고도가 먼저 표현해 주는 애정 중 무엇이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한 청사는 결국 고도를 꼭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기로 했다. 색정적인 욕심으로 머리가 어지럽지만 지금은 고도의 숨결과 냄새가, 얼굴 곳곳에 뽀뽀를 해주는 감촉이, 훨씬 더 소중했다.
[아무것도 걱정 안 했으면 좋겠다. 고도는 지금처럼 나와 사랑하고 나를 위해서 살아 주면 나는 더 바랄 게 없겠어. 함께 있어 줘, 고도. 난 네게 그것만을 원한다.]
고도는 청사를 빤히 바라봤다. 고도의 분위기를 살피는 청사의 모습이 이전에 알던 그와 제법 분위기가 달랐다. 청사와는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한 침착함이나 우아함이 느껴졌다. 이전에도 곱상한 얼굴에 잘 자란 양반집 자제의 분위기는 있었지만 그것은 부족함 없이 자라난 부유한 가문의 느낌이라는 게 더 강했다. 지금은 금전이나 재물의 소유 정도보다 아랫것을 부리는 데에 익숙한 분위기에 가까웠다. 부드럽게 군림하는 군주의 느낌이다. 청사라는 존재가 안 본 사이에 변한 것인지, 원래 이런 존재였는데 이제야 능력이 개화하며 분위기가 무르익는 것인지 고도는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 더 높은 곳에 앉을 청사는 고도가 알던 어리고 어여쁜 모습과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고도는 더 세게 청사를 안았다. 두 사람이 꼭 끌어안느라 찬바람이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었다. 고도는 포근한 체온에 몸을 기댄 상태에서 특유의 나지막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 이리도 걱정이 늘었을까. 넌 내 하나뿐인 대롱 뱀이다. 주인은 사육하는 동물을 버리지 않아.”
[그건 싫은데.]
“승격시켜 주지, 가축 용.”
[날 길들일 거면 주인 된 도리로써 날 버리면 안 된다는 서약이 있어. 서약할 거냐.]
“아아.”
[어중간한 대답은 듣고 싶지 않다. 똑바로 말해라. 너는 나와 헤어지고 싶어? 나와 함께 하늘로 가는 게 어려워?]
“한 번만 더 물으면 세 번 채우겠어.”
[정말 못하겠어? 내가 이렇게 사정하면서 부탁해도 진짜 안 될까?]
“굳이 세 번을 채우다니 제사 의식도 아니고.”
그제야 청사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고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몸의 노화도 성장도 멈춘 고도는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짧게 잘린 머리카락도, 어린 청년의 외모도, 그 속에 담긴 노인 같은 눈빛도 변함없었다. 변함없는 고도가 좋았다. 그는 세상 물정에 쉽게 흔들리는 나약한 인간이 아니었다. 고도가 올곧게 서 있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한결같은 소나무처럼 변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그러마.”
청사는 고도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이야기가 길어져서 몸이 식은 고도였기에 더는 바깥에 세워 두고 싶지 않았다. 청사는 고도의 손목을 잡아끌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을 던지듯이 벗은 청사는 곧장 고도를 안아 들고 방 안의 이불 위에 눕혔다. 아랫목에 달궈져서 이불 너머까지 따뜻했다.
“왜 이리 급할꼬. 신도 아직 못 벗었는데.”
고도가 몸을 바로하고 다시 나가려 하는 것을 청사가 막았다.
[내가 벗겨 줄게, 괜찮아.]
“어허, 이게 또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지.”
[그냥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런 거야, 음흉은 무슨.]
직접 두 손으로 고도의 신발을 벗겨 준 청사는 솜으로 누빈 도톰한 버선까지 끌어 내렸다. 굳은살이 박인 고도의 맨발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오랫동안 전국 팔도를 돌아다닌 흔적이었다. 단 한 번도 몸을 편하게 뉘지 않고, 하루 두 시진 정도만 나무 위에서 쪽잠을 자며 요괴 9,999마리를 잡으러 다니던 때에 몸에 남은 상처다.
이젠 하루 종일 서책을 읽거나 묵금을 타면서 여유와 한가로움을 즐기지만 그런 여유조차도 고도에게 충분한 안식을 주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고도는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글과 소리를 벗 삼아 가난하게 여유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물과 고급스러운 옷, 화려한 장신구와 손발이 되어 줄 시종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꽃과 열매로 매일 입이 호화로운 여유를 즐길 자격이 충분했다. 그 자격을 주기 위해서 자신이 곁에 있는 것 아니겠나. 고도가 평생을 웃으며 지낼 수 있게 하려고. 그런데 이제 와 고도가 고통 받은 길(苦道)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홀로 외롭게(高蹈) 살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결단코 없었다.
청사는 고도의 맨발에 입을 맞췄다. “더럽다, 대체 뭐하는 거냐, 아까부터.”라며 설핏 당혹스러운 음성을 뱉는 고도에게 청사는 정성스럽게 발을 주물러 주며 대답했다.
[내 생각이 짧았다. 땅에 속한 네가 땅을 버리고 하늘을 선택하는 게 얼마나 중대한 결정인지, 내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내 미련함을 욕하거라. 그저 너와 함께 있고 싶어서 네 아비나 다름없는 땅의 품을 떠나란 말을 너무도 쉽게 말했구나. 그 품을 떠나면 죽을 수도 있는 너를, 내가 파악하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아직도 어리구나.]
“이런, 꽤 멋있는 말을 뱉는 구나. 그 역할은 내 몫인데 말이지.”
[멋있는 말이라고. 그리하고 싶으면 네가 전부 하거라. 넌 나를 가진 존재이니 그 어떤 명령도 내가 들어줄 수 있어.]
하늘을 가진 존재라. 고도는 뜻하지 않은 청사의 고백에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자신을 모두 내어 주는 그 희생적인 마음을 단순히 인간들 간에 교류하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청사가 그가 가진 모든 세상을 한낱 인간인 자신의 손에 쥐어 주었다. 하늘을 가지라고, 하늘에게 명령하라고. 그 말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고도가 모를 리 없었다. 고도는 모든 것을 내어 주려는 청사가 안타까우면서도 예쁜 나머지 기운 빠진 미소를 흘렸다.
“하늘에게 명령하는 인간이라. 나도 꽤 출세했는걸.”
[더 출세해 보겠느냐. 하늘에서도 너를 위협할 존재가 아무도 없도록.]
“그게 가능하다면 내 능히 받아 주지.”
[진심이지?]
청사가 발을 주무르던 손을 떼고 이불을 잡았다. 고도를 자리에 뉘고 그 위로 이불을 단정하게 덮어 주면서 고도에게 출세할 방법을 알려 주었다.
[네가 내 후계자를 낳으면 된다. 그러면 아무도 너를 못 건드려.]
잠시 침묵을 지킨 고도가 차츰 눈살을 찌푸렸다.
“……뭐.”
무슨 헛소리냐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고도를 청사는 다시 어깨를 눌러 반듯하게 눕혔다. 고도가 작게 몸부림치면서 벗어나려 했지만 청사는 고도가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강제했다.
[사내가 아이를 품는 방법은 누이가 알려 줄 것이다.]
“무슨 헛소리냐?”
[후계자를 보존한다는 말이 왜 헛소리지?]
“네놈이 밤일에서 내게 여자 역할을 시키더니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다. 남자는 임신을 하지 못해. 어디서 내게 후계자를 잇느니 마느니 하는 말을 할 수가 있지.”
[그래, 남자는 임신을 하지 못하겠지.]
“알면서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지만 나는 하늘에 속한 천룡이다. 인간들처럼 임신으로 후계자를 낳게 하지 않아.]
“그럼 알이라도 낳는 건가? 뱀처럼?”
[가장 비슷한 방법을 비유하자면 그렇겠지. 용이 후계를 이으려면 하늘의 정기를 담아 잉태를 하는 방법뿐이다. 내 생각에 여기엔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외따로 구분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인간이 후대를 보는 것과는 방식이 다르니.]
“……잠깐, 설명 멈춰 봐라.”
[아니, 들어 보아라. 네가 후계를 낳을 수 있다면 낳는 게 최선이다. 누이가 도와줄 것이다. 누이는 너를 싫어하지 않고, 내 결정을 진지하게 받아 주는 이니, 분명 도움을 줄 것이다.]
“…….”
[네게 해악이 끼칠 만한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날 믿어 줘. 너를 위해서다. 네가 땅을 버리지 않고도 나와 함께 하늘에 있도록, 아무도 그런 우리 둘 사이를 위협하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은 다 하겠다, 고도.]
고도는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었지만 끝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여기서 속에 있는 말을 뱉어 봤자, 청사를 불신하고 남성의 몸으로 용의 후계를 잉태하는 일이 얼마나 불쾌한지에 대해서만 토로할 테니 말이다. 이불 속에 손을 집어넣어 굳은살과 상처가 너저분한 맨발을 정성스레 주물러 주는 청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할망정, 그런 식으로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하나, 마음과 달리 본성의 거부감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잉태라니, 용의 후계를 잉태하라니. 설령 인간처럼 열 달을 배불러 아이를 낳는 방법이 아니더라도 잉태라는 것 자체가 주는 혐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늘에서 청사와 함께 살려면 최선은 그의 반려자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이해했다. 반려가 되면 당연히 후계를 봐야 하겠지만 그것까지 고도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잉태, 잉태를 해야만 같이 있을 수 있다니.
“정말로 그 방법밖에 없단 말이지.”
착잡하게 말하는 고도를 보며 청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청사는 그 외엔 솔직하게 아무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 외에 너를 인정하게 만들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아직 천룡의 후계자라 정치적으로 큰 힘이 없다. 너에게 고위 천인들이 손 하나 대지 못할 만한 보직을 내릴 수가 없어. 네가 나와 붙어 있기 위해서는 반려로서 인정받는 것이고, 반려로서 제대로 인정받으려면 후계를 보는 것밖에 모르겠다.]
고도는 청사의 입장을 백번 이해했으나, 머리가 이해하는 것과 가슴이 시키는 일은 유별했다. 허울만 반려자이면 언제든 정치 싸움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과거 궁에서 왕의 옆자리를 지킬 때 보아 왔다. 왕의 애정을 받지 못해도 내쳐지고, 붕당의 편을 잘못 서도 사약을 마시기 일쑤였다. 보직이 불안정한 청사에게 가장 큰 무기가 ‘후계자’를 낳은 반려자라면 고도는 선택 사항이 없었다. 하나 반려자라는 직책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알기에 고도는 과연 후계자만 낳으면 만사형통인지를 따져보았다. 인간과 하늘의 법도가 다르니 후계자 문제의 중요성을 모르겠어서 판단할 근거가 부족했지만 말이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
[고도.]
“네가 원하면 후계를 낳는 데에 동참하겠으나, 정말 많은 다짐이 필요한 일이잖아. 여기서 바로 주먹을 불끈 쥐며 열심히 노력해보겠단 소릴 하는 게 더 이상할 거 같은데.”
고도가 청사를 자신의 바로 옆자리에 눕혔다. 모로 누운 청사가 엇, 하고 눈을 깜빡일 때 고도는 그의 콧잔등에 뽀뽀를 해주었다.
“머리가 복잡한 일이야. 아무렴, 이런 건 일단 자고 일어나서 다시 생각하자.”
[아니, 난 조금 있다가―.]
“너와 같이 자고 싶어서 그러는데 눈치도 없긴.”
품에 안긴 고도를 보면서 눈까지 붉힌 청사는 천천히 몸에서 힘을 뺐다. 그는 팔을 돌려 고도를 부드럽게 안았다. 고도는 청사의 도포자락에 파고들어 팔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뒤척이면서 눈을 깜빡이던 고도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청사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쌔액, 잠을 잤다. 요괴를 잡으러 다니던 지난날, 나무에 올라 앉아 선잠을 자고, 조금만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어도 바로 눈을 뜨던 과거와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편안한 얼굴로 자는 고도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아늑했다.
청사는 어쩐지 울고 싶었다. 고도가 잠을 편하게 잔다. 그 당연한 행위가 고도에게는 아주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누군가 옆에 있기에 더 편하게 잘 수 있다는 것은 청사를 믿고 신뢰하는 마음이 크다는 뜻이었다. 청사는 고도를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팔을 풀고 싶지 않았다. 품속에서 쿵쿵 뛰는 고도의 심장 소리와 느린 숨소리를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뭐든 다 할 거야. 진심이야.]
물기 어린 목소리는 고도의 귀에 닿지 않았다. 쪽, 이마에 입을 맞추어 준 청사는 고도를 소중하게 끌어안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요정’의 순우리말. 숲의 요정을 ‘수피아’라고 한다.
** 볏짚으로 만들어 어깨에 지고 다니는 배낭